화가들의 정원 - 명화를 탄생시킨 비밀의 공간 정원 시리즈
재키 베넷 지음, 김다은 옮김 / 샘터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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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로는 봄이지만 테라스에 화분들을 내놓을 때는 아직 되지 않았다그 대신 테라스에서 내려다 보이는 공터에는 매화꽃이 반쯤 피어났다다음 달 초에는 동네 곳곳에 벚꽃이 필 것이다이렇게 동네 전체가 내 정원인 양 꽃 피는 풍경을 즐기고 있지만지치고 힘들 때 언제든지 그 안에서 쉴 수 있는 나만의 정원이 있다면 좋을 것이다자기 정원을 갖고 있었고 그 풍경을 직접 그림으로 담아냈던 화가들은 얼마나 행복했을까그들의 행복을 간접 경험할 수 있게 하는 책이화가들의 정원이다이 책은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화가들이 직접 가꾸고 그 안에서 쉬고 작품을 만들었던 정원을 사진과 그림으로 담아냈다.


(위) 덴마크의 화가 P.S. 크뢰이어의 작품 <장미들>. 이 책의 표지 그림으로 쓰였다.

(아래) 영국의 화가이자 공예가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한 버드나무 잎 무늬 벽지. 이 책의 면지에서 활용되었다.


  『화가들의 정원은 그 자체로 하나의 정원 같다표지부터 하얀 장미들과 초록색 잔디그 위에 비치는 햇살로 가득하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덴마크 화가 P.S. 크뢰이어의 그림 <장미들>이다종이의 결이 그대로 보이는 약간 거친 질감의 표지 덧싸개는 캔버스를 연상시킨다표지를 지나면 19세기 영국의 화가이자 공예가였던 윌리엄 모리스가 디자인한 버드나무 가지 무늬가 프린트된 면지가 나타난다면지의 버드나무 숲을 지나면 화가들이 자신의 정원 풍경을 그린 그림들과 과거의 풍경을 담은 흑백 사진현재의 모습을 담은 컬러 사진들이 펼쳐진다책 전체가 그려지거나 사진으로 찍힌 꽃과 나무로 가득하다다른 책들보다 가로로 더 길쭉한 판형은 세로보다 가로가 더 긴 풍경화들과 풍경 사진들을 싣는 데 적합하다.


클로드 모네의 수경 정원 풍경. 모네는 수면에 반사된 빛을 포착하는 데 힘썼기 때문에, 수련을 비롯한 수경식물들이 너무 무성하게 자라 수면을 가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관리했다.

클로드 모네, <수련이 핀 연못>, 1899. 모네는 정원의 수련이 핀 연못을 자주 그렸다. 이 그림에는 모네가 1895년 설치한 일본풍 다리도 그려져 있다. 


  미술사 전공자가 아니라 조경 전문가가 쓴 책이지만 미술사 쪽으로도 설명은 잘 되어 있는 편이다앙리 마티스를 추상화가’, ‘유명한 화가가 아닌 화가라고 하는 것이 의아하지만(마티스는 간결하고 함축적인 형태의 종이 오리기 작품으로 추상미술에 영향을 미쳤지만본인은 구상화가였으며 피카소와 함께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칭송받는다.) 화가 한 명 한 명의 미술 경향과 작품 활동을 충실히 설명하고 있다. ‘정원이 작품 속에 담기고 예술이 정원 속으로 흘러들어가 하나가 되었다는 서문의 문장처럼화가의 예술과 정원은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남기며 그 화가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빚어냈다정원은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들만큼이나 그 화가의 개성과 취향을 또렷이 보여주면서붓과 캔버스뿐만 아니라 흙과 씨앗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데도 열중했던 화가들의 또 다른 면모를 드러낸다.


  이렇게 풍부한 사진과 그림이야기를 담고 있는데도 화가들의 정원에 있다고 상상을 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이 있다우선 도판의 명도와 채도가 낮은 것이다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를 담은 그림과 사진인데도 실제로 인쇄된 책을 보면 생각보다 색감이 어둡고 차분하다좀 더 선명하고 화사한 정원 풍경을 원했던 독자들에게는 아쉬운 일이다모니터와 인쇄된 지면의 색상 혼합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인쇄된 지면에서 색감이 좀 더 어둡고 차분해질 수밖에 없지만색을 보정하면 원래의 밝고 선명한 색에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그리고 정원 관련 용어를 역주로 설명했으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을 것이다포르티코퍼걸러코티지 정원정형 정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조경원예에 문외한인 독자로서 좀 더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었으면 했다이건 책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이지만 책에서 언급되는 식물 중에 낯선 이름이 많은 것도 내 상상을 가로막았다.

 

  이런 아쉬운 점들이 있지만출간된 지 몇 달 만에 5쇄나 찍은 것을 보면 이 책이 독자들에게서 꽤 호응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코로나 때문에 집안에 갇혀 있게 된 독자들에게는 먼 곳의 아름다운 정원을 책으로나마 만날 수 있다는 게 위안이 될 것이다나 자신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이 책에 실린 정원들의 그림과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으니까책을 펼치고 마음에 드는 풍경을 골라서 그 안에 있다는 상상을 한다면화가들이 그랬듯이 잠시 동안의 평화와 휴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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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 오늘의 젊은 작가 26
김병운 지음 / 민음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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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좋은 의도로 쓰인 작품을 좋게 평가하지 못할 때는 죄책감이 든다. 아는 사람만 아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을 평가할 때 이런 죄책감을 느꼈다. 이 소설은 공상표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배우 강은성이 진짜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동성애자라는 자신의 성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내는 이야기이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겠다는 마음 하나로 세상의 온갖 편견과 몰이해, 폭력에 맞서 분투하는 인간의 이야기. 정말 좋은 주제이고 내가 마음 깊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소설에 온전히 몰입하지 못했을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이 소설은 메인플롯인 공상표의 커밍아웃과 사랑 이야기가 아닌 서브플롯인 공상표의 어머니 김미승과 그녀의 전 연인 양병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배우인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연예계에서 일해 오던 김미승은 동료인 양병진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양병진의 말처럼 김미승은 아들에게 줄 사랑이 너무 많아 아들을 도무지 떠나지 못했고, 양병진에게 온전한 사랑을 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은 헤어졌다. 아들이 갑자기 사라지자 김미승은 양병진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양병진은 다른 사람과 결혼했으면서도 김미승의 부탁을 뿌리치지 못하고 종종 그녀와 만나며 옛 감정을 떠올린다. 그는 아들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느라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들에게만큼 애정을 쏟지 못하는 김미승의 모습을 보여주는 관찰자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결혼한 상태에서 배우자 몰래 옛 연인을 만나면서 애틋한 감정을 떠올리는 것 자체에 공감할 수 없었고, 메인플롯인 공상표의 이야기와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공상표와 김영우의 사랑 이야기가 기대했던 것만큼 마음을 크게 움직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우선, 김영우의 구애 방식은 다소 폭력적이다. 김영우는 공상표가 게이임을 직감하고 그에게 너는 정말 게이가 아니냐, 섹스 경험은 있느냐, 이상형은 어떤 사람이냐고 집요하게 캐묻는다. 공상표 본인은 그것이 추파고 작업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그 과정에서 둘 사이에 흐르던 긴장감이 싫지 않았다고 말한다. 공상표 본인에게는 나쁘지 않았다지만 게이이든 이성애자든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는 굉장히 무례하고 폭력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두 사람이 겪는 갈등들이 너무 전형적이며, 두 사람의 사랑을 와 닿게 하는 디테일이 더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김미승이 양병진과 헤어진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그가 등 푸르고 비린 생선을 싫어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정어리와 고등어 초밥을 대신 먹어주는 것 같은 사소한 것. 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더 생생하고 개성 있게 만드는데, 작가는 그런 디테일을 보여주기보다는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열등감과 세상의 편견 때문에 헤어지게 되었는지 일일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몰입을 방해했던 것 중 하나는 게이는 여성적이다라는 편견이 이 소설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공상표는 어린 시절 소꿉장난이나 인형놀이에 관심이 많았고, 김미승은 아들의 이런 여성스러운행동을 경계해 아들의 인형을 모두 버렸다. 김영우의 단편영화에서 생애 처음으로 게이인 캐릭터를 연기한 공상표는, 영화 속 자신의 모습이 게이 같은 것, 말투, 몸짓, 목소리가 남자답지 못한 것이 싫었다고 말한다.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이 따로 있을까? 그리고 세상에는 수많은 게이들이 있고, 그들은 그저 각각의 개성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 소설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를 비판하는 작품인데도 한편으로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쉬웠다.


  이런 점들 때문에 온전히 이 소설에 몰입하지 못했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마음이 먹먹해졌다. 몇 시간 뒤에 자신이 방화 사건으로 죽는다는 것을 모른 채 김영우가 마지막으로 공상표에게 문자를 보내는 장면이다. 몇 년 동안 공상표에게 다시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하다 공상표가 커밍아웃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몇 번이나 문자를 썼다 지웠다 커밍아웃을 축하한다는 문자를 보낸다. 그러고 나서 어쩌면 공상표를 다시 만나고 그와 함께 만들지도 모를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기대를 품는다. 독자들은 그의 기대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죽은 김영우뿐 아니라 만들어질 수 있었지만 앞으로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 그들의 영화에게 애도를 보낸다. 그리고 자신에게 씌워질 온갖 편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짜 자신으로 살기로 선택한 공상표에게 응원을 보내고, 그가 앞으로 만들어갈 작품들을 기대한다.

 

P.S. 부록으로 실려 있는 배우 공상표의 필모그래피는 꽤 알차고 디테일하다. 시놉시스를 읽어 보니 흥미로운 것들도 여러 개 보여 실제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져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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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류 선언 - 서브컬처 본격 비평집
텍스트릿 엮음 / 요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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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르란 나름대로의 서사 규칙과 관습으로 굳어진 특징들이 있어누구나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그 작품을 보는 순간 그것이 어떤 종류인지 알게 되는 콘텐츠들, 그 콘텐츠들을 묶은 집단이다엘프와 마법사가 나오면 판타지하늘에 우주선이 떠다니면 SF, 중국을 배경으로 무예 실력을 겨루는 고수들이 나오면 무협이런 식으로. 2000년대 이후로는 장르가 작품의 완성도보다는 대중의 즐거움을 충족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콘텐츠들을 포괄하는 의미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장르 콘텐츠의 역사가 수십 년 동안 쌓여 왔고웹소설을 비롯한 장르 문학 작품대중영화대중음악게임 등의 장르 콘텐츠들이 대중들에게서 큰 인기와 수익을 얻고 있다그러나 장르 문학은 문학의 주류로 여겨지는 순문학과 비교해 비주류로 여겨지곤 하고대중성이 강한 장르 콘텐츠들은 순수 예술 작품들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것으로 취급받는다장르 콘텐츠 비평을 전문으로 하는 비평가들의 모임 텍스트릿은 장르가 주류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미학과 의미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뜻에서, ‘비주류 선언을 한다자신들이 또 다른 주류임을 외치는 ‘B급의 주류 선언이자 ‘Be 주류 선언이다.비주류 선언은 장르가 현대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보고장르와 관련된 콘텐츠들을 비평하는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르 콘텐츠를 그저 즐길 거리로만 여기고진지하게 비평하거나 깊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텍스트릿의 연구자들은 장르 콘텐츠를 연구와 비평의 대상으로 삼고우리가 장르 콘텐츠들을 즐기면서도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을 짚어낸다왜 판타지 소설들은 대부분 중세시대 서양을 배경으로 할까중세시대 서양이 한국 사회에서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가장 거리가 멀고 낯선 세계이기 때문이다한국의 판타지 문학 속 중세 서양은 실제 중세 서양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서양이 근대에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낯선 동양에 대한 환상을 키워 왔지만 그들이 재현한 동양은 실제 동양의 모습과 달랐던 것과 통하는 부분이다우리는 언제나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꿈꿔 왔고픽션을 통해 현실을 탈출하려 했다판타지 소설 속 중세 서양은 독자들이 현실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고 욕망을 채우는 공간이라는 기능을 한다이렇게 텍스트릿은 장르 콘텐츠들에 지금의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또한 텍스트릿은 장르 콘텐츠가 한국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해 왔는지를 되짚어 본다이들은 장르 콘텐츠의 내용 면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장르 콘텐츠가 유통되는 방법과 매체에서의 변화를 함께 살펴보고 있다. 1990년대에는 장르 문학 작가들이 PC 통신을 이용해 자신의 작품을 연재했다. 2000년대 초반 초고속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장르 문학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이 시기에는 장르 문학 작품들이 주로 개인 사이트에서 연재되었다. 2000년대 후반 이후로는 문피아조아라 등 기업형 웹소설 사이트들이 등장했고스마트폰이 발명되고 보급된 이후로는 카카오페이지네이버 시리즈 등의 웹소설 플랫폼들에서 장르 문학이 더욱 흥행하고 있다작가는 웹소설 플랫폼에 소설을 직접 업로드하면서 창작자일 뿐만 아니라 출판사와 같은 출판 주체의 역할도 함께 수행하게 되었다매체에서의 변화는 내용 면에서의 변화까지 불러왔다온라인 공간에서 더 다양한 독자들과 만나게 되면서무협 소설은 어려운 무공의 개념을 좀 더 쉽게 전달하면서 여성 인권 신장 등 당대의 변화를 반영하게 되었다이 책은 이렇게 내적인 측면만 분석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까지 살펴보면서 장르를 바라보는 시야를 더 넓혀주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를 더 펼쳐나갈 수 있는 지점에서 논의를 마무리하는 글들이 많다한국형 판타지가 어색한 이유라는 글에서는 왜 창작자들이 한국형 판타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한국보다는 서양을 배경으로 판타지 작품을 창작하게 되는지 그 이유를 파헤쳐 보고 있다하지만 한국의 환상성이 어떤 점에서 현실의 질서와 도덕윤리와 맞닿아 있어 현실을 넘어서고 싶어 하는 독자들과 어긋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았다면 좋았을 것이다또한 결론 부분에서 잘 만든’ 한국형 판타지의 예시와 그들이 왜 성공했는지에 대한 분석이 빈약하다.로맨스와 페미니즘은 공생할 수 있을까에서 저자는 로맨스가 낭만적 사랑이라는 허울을 통해 가부장제를 뒷받침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르다고 주장한다그리고 로맨스 소설에서 여성은 로맨스를 통해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얻어내며사랑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연대를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의 연대 정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여성들의 다양한 욕망이 로맨스 소설에 반영된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면이다그러나 로맨스 소설에서 여성이 성취하는 것은 연애 상대인 남자주인공에게 좌우되는 것인 경우가 많다남자주인공의 사랑을 통해 얻은 것이니 그의 사랑을 잃으면 사라지는 것이다그리고 로맨스와 페미니즘이 공생하려면 로맨스 소설에 강간 판타지나 폭력적인 행동이 로맨틱한 행동으로 미화되는 것 등 여성혐오적인 면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이러한 면들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좀 더 논의를 진행할 만한데 결론을 내리는 글들을 읽으면서, 지면이나 연구 기간의 한계 때문에 논의를 더 이어가지 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장르에 대한 연구와 비평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지금다각적으로 장르 콘텐츠를 비평하고 장르와 지금의 우리 사회를 연결해서 탐구해 보는 시도 자체는 나름대로의 가치와 의미가 있다이 책의 부제는 서브컬처 본격 비평집이지만, ‘본격보다는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시도이다이 책이 텍스트릿의 첫 번째 결과물이고대표 저자인 이융희 팀장이 다음 책에서는 좀 더 본질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으니 다음에는 더 깊이 있는 논의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참고김지혜장르문학·서브컬처에 담긴 독자적 미학경향신문, 2019.08.30.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8302042005&code=9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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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썰록
김성희 외 지음 / 시공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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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위가 약한 편이라 좀비물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관동별곡>부터 <만복사저포기>, <사랑 손님과 어머니>, <운수 좋은 날>, <소나기>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우리 문학 작품들을 좀비물로 다시 썼다는 책 소개에 궁금해졌다. 대체 저 작품들에 어떻게 좀비라는 소재를 넣을 수 있을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책에 실린 다섯 편의 패러디 소설 모두 아이디어도 기발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필력도 좋았다. 각 소설에 대한 감상을 간단하게 적으려고 한다.

관동행: Gama to Gwandong (원작: 정철-관동별곡)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 중 가장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현대물보다는 사극을 더 좋아하기도 하고,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무서운 얘기를 해 달라는 학생들에게 <관동별곡>의 뒷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사 방식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너희 반이 진도 꼴찌다'라는 선생님들의 단골 레퍼토리에 누구나 <관동별곡>을 공부할 때 느꼈을 심정("폭포가 멋지군, 하면 될 걸 갖다가 용의 꼬리가 어떻고, 오바는 또 얼마나 심한지. 그래서 500년 뒤에 니들은 읽기 싫다고 난리를 치고")을 솔직하게 내뱉으니 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의 추억들이 떠올랐다. 게다가 <부산행: Train to Busan>을 패러디한 제목의 재기발랄함까지. 잔혹하지만 제목만큼이나 유쾌한 분위기를 끝까지 이끌어가 즐겁게 읽었다.

시골에서 유배 생활을 해다 갑자기 왕의 부름을 받고 강원도 관찰사가 됐는데, 왜 정철은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몇 마디로 압축하고 폭포 얘기나 줄줄이 늘어놓고 있을까? <관동행>은 이런 의문에서 시작된 단편이다. <관동별곡>의 저자 송강 정철을 모델로 한 우리의 주인공 정 대감은 학식이 풍부하고 유능한 관료였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한테나 쓴소리를 필터 없이 퍼붓는 고지식한 성격. 어린 딸이 처음 만든 물김치를 자랑하는 친구에게 그 물김치가 어째서 못 만든 건지 정 대감이 한 페이지 가득 품평을 늘어놓는 장면에서는 빵 터졌다. 그렇게 지나치게 강직한 성품 탓에 조정 대소 신료들은 물론 왕에게 미움을 산 정 대감은 파직되고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벼슬 잘리고 지방으로 내려와 백수가 된 상황을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라는 시 구절로 미화하며 정신승리하던 정 대감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왕이 정 대감을 강원도 관찰사로 제수했다는 것이다. 아내과 종복들에게 모처럼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일 수 있어 들뜬 마음에 성대하게 관찰사 부임 행차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미친놈이 정 대감에게 뛰어든다. 그런데 그 미친놈이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희뿌옇게 썩은 눈알에 구더기가 끓고 있는 좀비였다. 왕과 조정 신료들은 도성을 제외한 전국에 좀비로 변하는 전염병이 퍼지자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강원도 관찰사에 정 대감을 임명한 것이다. 정 대감 일행의 관동행은 꽃길이 아니라 저승길이었다.


  좀비가 근처에만 나타나도 온 몸에 두드러기가 나면서 재채기가 나는 증상 때문에 좀비 감지기가 된 정 대감. 정 대감은 자신의 좀비 감지기 기능과 풍부한 지식을 활용해 백성들과 함께 좀비에 맞서 싸운다. 가족들과 종복들에게 생계를 맡기고 하염없이 때만 기다렸던 잉여인간 정 대감이 자기 재능을 활용해 진정한 리더로 변화해 가는 모습이 나름 감동적이었다. 남편을 지키기 위해 비녀 하나 들고 좀비에게 달려드는 유씨 부인의 용기와 사랑에 뭉클해지기도 했고. 나름대로의 사연과 잘생긴 외모, 뛰어난 무예 능력을 갖춰 조력자로 활약할 줄 알았던 마을 청년이, 결국은 좀비 치료제만 들고 도망가 버리는 대목은 클리셰를 깨서 신선하게 느껴졌다. <관동별곡>의 구절들과 기근으로 인해 백성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까지 삽입해 역사물로서의 무게감도 살짝 넣었다. 작가 후기에서는 "단점 몇 개는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하지만 독자인 내가 보기에는 장점이 많았던 사랑스러운 작품이다.

만복사 좀비기(원작: 김만중-『금오신화』 중 <만복사 저포기>)

<관동행>과 같은 역사물이지만 판소리 한 마당을 하듯 유쾌하게 입담을 펼치는 <관동행>과 달리 서정적으로 <만복사 저포기>를 재해석하고 있다. 작가는 왜 <만복사 저포기>의 주인공 양생이 젊은 나이에 가족들과 떨어져 만복사에서 혼자 지내게 됐을까, 라는 의문에서 이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왜구가 쳐들어온데다(고려시대가 배경이기 때문에 임진왜란은 아니다) 왜구에게 죽은 마을 사람들이 좀비로 변하면서 양생을 포함한 생존자들은 만복사로 피신하게 된다. 언제 좀비에게 습격당할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양생은 혼인을 하고 손주를 낳아 어머니께 효도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다, 원작처럼 부처님과 저포 내기를 해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스님들과 절에 함께 숨어 있던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좀비일 거라 의심하고, 양생 본인도 그런 의문을 품지만 그녀가 부처님이 보내주신 배필이라는 생각에 그녀를 감싼다.

맹목적으로 아가씨를 지키려는 양생의 모습이 순정남으로 보일 수 있지만, 정작 그녀도 자신을 사랑하는지는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이 찜찜하게 느껴졌다. 결국 양생은 이미 좀비에게 물려 감염되어 좀비가 되었고, 양생 때문에 절 안의 모든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있었다는 반전이 밝혀진다. 양생은 그녀가 좀비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어주지만, 좀비 소탕 대원인 그녀에게 양생은 가엽지만 생존자들을 위해서 퇴치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이런 엇갈림이 안타깝고 씁쓸한 뒷맛을 남겼다. 양생뿐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던 절 안의 모든 사람들까지 안타까웠다. 그들에게서 좀비가 됐을 리는 없지만 전쟁과 기근 등 온갖 환란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 갔을 역사 속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사랑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원작: 주요섭-<사랑 손님과 어머니>)

원작의 문장까지 하나하나 비틀어 원작과 한 문장 한 문장 비교하며 읽는 재미가 있었다. 원작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옥희의 아버지 경선이 살아 있다는 것. 그러나 심한 병에 걸려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처지고, 옥희의 친할머니는 아들의 병을 며느리 탓으로 돌리며 옥희 어머니를 심하게 구박한다. 스물네 살의 나이에 여섯 살짜리 아이의 어머니이자 며느리, 아내로 살면서 시어머니와 시댁 식구들에게 근거 없는 미움을 받고 가사 노동에 시달리는 옥희 어머니. 가부장제의 억압 아래서 그녀는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며 이 지옥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매일 밤 기도한다.

남편이 아직 살아 있는데도 어머니가 사랑 손님에게 미묘한 감정을 드러내면서 긴장감이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순한데 이상하게 사랑 손님만 보면 맹렬하게 짖던 개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면서 긴장감은 더욱 증폭되고, 결국 어머니와 사랑 손님의 관계, 그들이 아버지에게 한 짓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피비린내 나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자신이 해방되기 위해서 남편도 시어머니도 마을 사람들도 망설임 없이 좀비로 만들고 살육해 버린 어머니가, 마침내 기차에 올라 웃음을 터뜨리는 장면에서는 희열이 느껴진다. 아직 스물네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옥희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던 원작 속 어머니와 달리, 이 작품 속 어머니는 좀비라는 수단을 이용해 스스로 해방을 쟁취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잔혹해지는 전개가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옥희 어머니의 이런 반란이 통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운수 좋은 날(원작: 현진건-운수 좋은 날)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들 중 가장 원작과 거리가 멀다. 잘 나가는 모델이자 추리소설 작가였던 주인공은 남편과의 이혼과 슬럼프로 망가져 간다. 전 남편의 재혼 소식을 들은 그녀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대리 기사를 불러 전 남편의 결혼식장으로 쳐들어가는데, 이것이 <운수 좋은 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 대리 기사의 성이 김씨라는 점에서 아, 설마 싶었다. 그런데 이 김씨가 정말 김 첨지였다. 그것도 좀비가 된 김 첨지.

좀비가 되는 전염병에 걸려 아내와 아들마저 죽은 뒤 김 첨지도 그 전염병에 걸렸지만 그는 죽지도, 이성을 잃지도 않았다. 좀비가 된 게 분명한데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결국 설렁탕 한 숟가락 먹이지 못하고 아내를 떠나보낸 이후로 김 첨지는 고기를 입에 댈 수 없었다. 슬럼프에 빠지면서 고기에 집착하며 날씬했던 몸무게가 이전의 두 배로 늘어났던 주인공은 김 첨지 때문에 채식밖에 할 수 없는 좀비가 된다. 그녀는 좀비가 되면서 날씬하고 아름다웠던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만, 인육에 대한 갈망이 불쑥불쑥 치밀어 올라올라 주체할 수 없게 된다. 외모가 아름다웠을 때는 주인공을 칭송하고 욕망하던 사람들이, 주인공의 외모가 망가지자 그녀를 꺼리고 비웃는 모습이 씁쓸했다. 그래도 다른 단편들에서 무수히 썰리고 죽어 나가던 다른 좀비들에 비하면 주인공은 훨씬 나은 처지다. 채식만 하면서 살면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

피, 소나기(원작: 황순원-소나기)

영화 <엽기적인 그녀>의 주인공 그녀는 <소나기>의 소녀가 진흙이 묻은 스웨터와 함께 소년까지 같이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면서 원작을 잔혹하게 변주했다. 이 단편 속 소녀는 소년과 함께 무덤에 묻히는 대신 무덤에서 깨어난다. 좀비가 된 채로. 소년은 소녀가 좀비가 된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지키다가, 결국 소녀가 살인과 식인을 하는 것까지 돕게 된다.

작가는 <사랑 손님과 어머니, 그리고 죽은 아버지>처럼 원작의 문장들을 그대로 빌려오거나 살짝 변주하는 방식으로 원작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이어간다. 그러나 하얗고 화사했던 소녀의 피부는 혼자 흑백사진에 들어 있는 것처럼 잿빛으로 변했고, 소년과 소녀에게 한 마디 건넸던 이웃 아저씨는 소녀에게 처참하게 죽임당한다.  슬프게도 소년에 대한 순수한 감정이 아닌, 자기 친할아버지까지 속이면서 살아남으려는 생존본능이 소녀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도 소년은 끝까지 소녀를 지키려 한다. 김 선생이 소녀를 죽이지 않았다면 소년은 그 자신이 희생양이 될 때까지도 소녀의 곁을 지켰을 것이다. 이렇게 맹목적일 정도로 순수해서 더 잔혹한 소년 소녀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렛미인』을 떠올리게 했다. 평범한 인간인 소년이, 다른 사람을 죽여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소녀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그래서 원작과는 또 다른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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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간으로 백제를 읽다 - 나뭇조각에 담겨 있는 백제인의 생활상
백제학회 한성백제연구모임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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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 고대의 국가인데다 다른 나라에 멸망당해서인지 백제 관련 사료는 다른 시대에 비해 유난히 적다. “토기 파편 몇 조각을 가지고 논문 수십 페이지를 쓰려니 죽겠다는 백제사 연구자분의 한탄이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날 정도다사료 부족으로 허덕이는 백제사 연구자들에게 단비 같은 존재가 목간木簡이다목간은 종이가 보편화되기 이전에 사람들이 문서를 작성하기 위해 썼던 나뭇조각이다. 1999년 부여 궁남지에서 백제시대 목간이 대량으로 출토된 이후로 20여 년 동안 목간을 통한 백제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지만연구자가 아닌 보통 사람들에게는 그 연구 결과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그래서 백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중 독자들에게 목간을 통해 새롭게 해석한 백제사를 들려주려 만든 책이 목간으로 백제를 읽다.

나주 복암리에서 발굴된 목간들. 백제의 지방들에서도 문서 행정이 이루어졌고, 지방 관리들이 주민들의 연령대별 인구 수, 재산 상황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지금까지 발굴된 백제시대의 목간들에 가장 많이 기록되어 있는 내용은 정치행정과 관련된 것이다백제 조정에서는 목간과 종이를 활용해 문서 행정을 운영해 왔기 때문이다종이로 된 행정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니 백제시대의 문서 행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살펴보려면 목간을 연구할 수밖에 없다부여 쌍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에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같은 우리나라 사서에는 없고 주서같은 중국 사료에만 나와 있던 외경부라는 중앙 행정 기구의 명칭이 적혀 있었다. ‘외경부의 철로 면 10냥을 대신한다고 쓰여 있는데철과 면은 특산물로 바치는 세금인 조調에 해당하는 물품이다이를 통해 외경부가 조세 등 백제의 국가 재정을 관장하는 행정 기구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또한 수도인 부여뿐만 아니라 나주 같은 지방에서도 목간이 발굴되어 지방에서도 목간을 활용해 문서 행정을 운영했다는 것이 밝혀졌다나주 복암리에서 발굴된 호적 목간에는 해당 지역의 연령대별 인구수와 전답별 면적가축의 수가 적혀 있다여기에서 백제의 지방 관리들이 주민들의 인구수와 재산소득 상황까지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이와 같이 백제시대 목간은 현존하는 역사서에 남아 있는 내용을 증명하고 보완할 뿐만 아니라백제사에 대한 새로운 내용까지 밝혀내고 있다.


부여 쌍북리에서 출토된 구구단 목간(왼쪽)과 해독본(오른쪽), 9단부터 2단까지 구구단이 적혀 있다. 이 목간 덕분에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이미 구구단이 활용되어 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사진 출처: 한국문화재단


  백제시대 목간은 백제의 정치행정뿐만 아니라 백제 사람들의 학문 수준도 알려준다2011년 부여 쌍북리에서는 2단부터 9단까지 구구단이 기록된 목간이 발굴되었다그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구구단과 관련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기 때문에일제 강점기에 일본을 통해 구구단이 들어왔다는 설까지 있었다그러나 백제시대의 구구단 목간이 발견되면서 삼국시대부터 이미 구구단이 활용되어 오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도 외우는 구구단이 그리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겠지만백제가 멸망한 지 수백 년 뒤인 중세시대의 유럽에서도 숫자를 쓸 줄 아는 것은 소수의 상류층과 지식인들뿐이었고 이들조차 덧셈과 뺄셈밖에 하지 못했다고 한다그렇기에 구구단 목간은 백제가 복잡한 산술 체계를 이해하고 활용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목간을 통해 백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기도 한다백제 왕들이 묻혀 있는 부여 능산리 고분 옆에는 왕들의 명복을 비는 절 능사陵寺가 있다이 능사 터에서 자기사子基寺라는 세 글자가 적힌 목간이 발굴되었다. ‘자기사라는 절에서 능사에 보낸 물품에 붙인 꼬리표로 추정된다조경철 교수는 자기사를 아들의 터가 되는 절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이 절을 부모가 아들을 위해 세운 절이라고 본다부여 왕흥사 터에서 출토된 사리함에 왕흥사는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세운 절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조경철 교수는 왕흥사가 자기사와 같은 절이라고 가정하고자식을 먼저 보내야 했던 위덕왕의 슬픔을 짐작해 본다능사에서는 오랜 세월 맺은 업으로 같은 곳에 태어났으니서로 옮고 그름을 물어 무엇하겠습니까부처님께 절 올리고 귀의합니다라고 적힌 목간이 발견되었다조 교수는 이 목간에 신라군에게 죽임당한 아버지 성왕성왕과 함께 목숨을 잃었던 백제 병사들에 대한 위덕왕의 슬픔이 담겨 있다고 보고 있다자기사와 왕흥사가 정말 같은 절인지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고능사에서 발견된 목간에 대한 해석도 연구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지만목간을 통해 역사 이면에 담긴 백제 사람들의 마음을 상상해 보려는 시도가 신선하게 느껴진다.

 

  대중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다 보니 학술서보다는 쉽고 부드럽게 이야기를 풀어가려는 것이 느껴진다중학교 역사 교과서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정도다글씨 크기가 크고 행간도 넓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다편집과 디자인이 세련되고 깔끔하며모든 사진 자료들이 컬러로 되어 있어 보기에도 좋다. 

 

  하지만 각 챕터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백제시대 목간들 중 중요한 몇몇 목간들을 공통적으로 다루다 보니 겹치고 반복되는 내용들이 꽤 있다물론 각 장을 맡은 저자에 따라 목간을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고 다른 저자가 설명하지 않은 내용을 이야기하지만비슷하거나 같은 내용이 반복되어 지루하다고 느낄 수 있다그리고 연구 결과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책이다 보니 대중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몇 줄의 목간에서 백제의 정치행정사회문화에 관련된 다양한 내용들을 유추해 내는 학자들 덕분에 우리는 백제의 숨겨진 면들을 보게 된다중국일본의 사료나 유사한 사례들까지 살펴보면서 목간에 적힌 사실의 파편들을 역사로 재구성해내는 것이 놀랍다수십 만 점의 목간들이 출토된 중국과 일본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500여 점의 목간만이 출토되었고그 중 70퍼센트는 신라 목간이라고 한다하지만 지금도 여러 지역에서 목간이 꾸준히 출토되고 있다고 하니백제에 대해 더 많은 것이 밝혀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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