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도시 - 뉴욕의 예술가들에게서 찾은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올리비아 랭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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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가 나오기 전 "지금 외롭다면 이건 당신을 위한 책이다"라는 제사題辭가 나를 맞는다. 내가 지금 외로운 건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서문 대신 실린 첫 번째 글 「외로운 도시」에서 "사람은 어디서든 고독할 수 있지만, 도시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 느끼는 고독에는 특별한 향취가 있다"(p. 13.)고 작가는 말했다. 인구 수백만의 대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교외 지역이라 대도시라기보다는 지방 소도시 같은 느낌이고, 거의 평생을 지낸 곳이라 내겐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혼자 산 적은 한 번도 없고 늘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또 다른 조건으로 봤을 때는 어떨까. "…물리적으로만 고립되어야만 고독해지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오히려 서로 연결되고 가깝고 연대한다는 감각의 부재와 결핍, 즉 어떤 이유에서건 원하는 만큼의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고독의 여건일 수 있다."(p. 14.) 가족과 함께 살고 사이도 좋은 편이니 친밀감을 전혀 느낄 순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별일이 없으면 내가 가족들보다 수십 년은 더 살 테니 나는 혼자 남겨질 것이고,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공동체는 없으며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 내가 일하고 싶은 분야에는 다시 발도 들여놓지 못한 채 가난 속에서 고립된 채 나이만 먹어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크다. 뼈저리게 외로운 건 아니지만 문득 외로움을 느끼거나, 앞으로 견딜 수 없이 외로워질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 점에서는 나를 위한 책까지는 아닐지라도 내가 읽어도 괜찮을 책일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이 내게 맞는지 미리 생각해 봤다. 


  이 책은 영국의 비평가 올리비아 랭이 뉴욕과 그곳의 예술가들, 그들을 둘러싼 고독에 관해 쓴 여덟 편의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이 에세이들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겹은 작가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대도시 뉴욕에서 느끼는 고독을 털어놓는 에세이다. 작가는 남자친구와 함께 살기 위해 무작정 뉴욕으로 왔지만, 남자친구는 이미 변심했다. 영국에서 살던 집은 이미 세를 줬으니 한동안은 뉴욕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뉴욕에 친구나 지인이 한 명도 없지는 않았지만, 사람들과 교류하기보다는 집에 혼자 멍하니 있거나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 서핑을 하고, 혼자 이리저리 시내를 거니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허름하고 주변의 소음과 네온사인에 그대로 노출된 집. 불안정한 경제 상황. 사소한 언어 차이에서 느끼는 이질감. 누군가 자신을 따뜻하게 봐주길 바라지만 관음적인 시선에 노출되는 것은 두려운 마음. 이런 것들이 대도시에서 혼자 살아간다는 감각을 더욱 생생하게 했다. 


  작가가 뉴욕에서 느끼는 고독은 뉴욕의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그리는 비평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에워싼 고독에 저항했고, 작가는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로 고독에 대응했는지 들여다 본다. 에드워드 호퍼는 훤히 들여다 보이는 유리창 안에 혼자 있거나 함께 있어도 대화하지 않는 그림 속 인물들을 통해, 고립되어 있으면서 수많은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고독과 불안을 표현했다. 앤디 워홀은 이주민인 데다 성소수자였고 남들보다 튀는 옷차림과 언행을 하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에게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상처 입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고 같다는 것은 무시당하거나 거부당할 위험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똑같은 이미지들을 무수히 만들어냈고, 그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살아갔다. 사진작가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는 부모에게 학대당하고 방치된 채로 자랐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성소수자이자 에이즈 환자로서 편견과 억압과 부딪혀야 했다. 워나로위츠는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 몸을 팔거나 성관계를 가질 사람을 찾아 나서던 뉴욕의 거리들에 랭보(19세기 프랑스의 시인) 가면을 쓴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뉴욕의 아르튀르 랭보 Arthur Rimbaud in New York> 연작을 통해, 뉴욕이라는 화려한 도시 이면에 숨겨진 장소들, 배제된 사람들을 드러냈다. 예술 창작뿐만 아니라 정부의 에이즈 환자 처우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하는 등의 사회 활동을 통해, 자신과 같은 소수자들을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사회에 맞섰다. 헨리 다거는 가족과 유일한 친구가 죽은 뒤로는 이웃과도 거의 교류하지 않으면서 50여 년을 골방에서 살았지만, 그가 요양원으로 떠난 뒤 그가 남긴 300점의 그림과 수천 페이지의 회고록, 15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의 원고가 골방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평생 고립된 삶을 살면서 거대한 또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냈고, 현실과 자신이 만들어낸 우주를 완전히 구분하지 못했다.


  그들이 힘겹게, 치열하게 고독과 맞서는 모습은 연민과 감동을 자아내지만, 작가는 연민하거나 감동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그들의 고독이 그들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지 않고, 더 큰 사회적 상황이 그들을 더욱 고독으로 몰아갔다고 본다. 이런 성찰이 에세이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또 다른 한 겹이다. 1950년대에 아동이 양육자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해야 이후에 감정적, 사회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는 애착 이론이 개발되기 이전, 애정 표현은 아이를 망칠 수 있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헨리 다거의 유년기도 그런 믿음이 지배적인 시대에 속했다. 그는 가정에서도, 보호소에서도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한 채 자라났고, 성인이 되어서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갔다. 에이즈의 원인과 치료법이 밝혀지기 전까지 에이즈 환자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족에게 거부당했으며, 의료진조차 치료를 거부했고 장의사들은 시신을 매장해 주지 않았다. 보수적인 정치인들은 에이즈의 원인을 성소수자들의 '부도덕한' 성행위 탓으로 돌리고 정책 결정권자들은 에이즈 환자들에게 필요한 교육과 자금원을 고의로 차단했다. 많은 성소수자 예술가들이 걸어 다니는 병균 덩어리인 양 취급받고 쓸쓸히 죽어갔다.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는 병든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사회 운동 단체 '액트 업Act Up'에 가입해 에이즈 환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힘썼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고독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서의 낙인과 배제가 낳은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이런 낙인과 배제에 저항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세 겹의 층은 지층처럼 뚜렷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섞이며 글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만든다. 그 모든 층에 녹아 있는 것이 뉴욕이라는 도시 자체다. 뉴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나는 구글 지도 중 뉴욕 시의 지도를 모니터에 띄워 놓고 책을 읽었다. 구체적인 지명이 나올 때마다 검색을 했고, 그곳을 클릭하면 화면 왼쪽에 그 장소의 사진과 그 장소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나왔다. 그 사진과 설명으로 그곳이 어떤 곳인지 짐작했다. 책 속에서 작가와 뉴욕의 예술가들이 머물거나 방문했거나 활동했던 장소들은 생각보다 서로 가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을 따라 뉴욕 시내 곳곳을 걸어 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가는 고독에 관한 이 책을 쓰면서 오히려 놀랄 만큼 많은 관계를 맺었다고 했는데, 나는 고립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통해 오히려 저 멀리 있는 뉴욕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됐다. 


  뉴욕이라는 공간 자체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고독과 마주하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과 예술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 보고 나왔다.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고독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고독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대신, 고독을 자신의 삶과 예술 세계의 일부이자 원동력으로 끌어안았다. 작가는 고독이 고쳐야 할 문제점이나 누구를 만나서 치유되어야 할 병이라기보다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 낙인과 배제라는 더 큰 힘이 낳은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 속의 예술가들은 고독 속에서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 보고 고독에 대응하는 예술 세계를 만들어내거나, 자신을 더 고독하게 만드는 사회의 낙인과 배제에 맞서고 서로 유대했다. 누구나 고독을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독을 끌어안거나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고독과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을 더 외롭게 만드는 세상에 저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에 대한 이런 성찰과 행동이 세상을 더 다정하게 만들 것이다. 세상이 더 다정해진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언젠가 떠난다 해도 나는 덜 외롭고 더 따뜻한 마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P. S. 1. 원문을 읽어 보지 못했지만 번역본만 봤을 때도 세밀한 감정의 결까지 살아 있는 훌륭한 번역이었다. 번역자 후기는 단순한 번역 후기가 아니라 이 책을 온전히, 깊이 이해하고 쓴 좋은 서평이다. 


P. S. 2. 텍스트 자체는 뛰어나지만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작품들 중 책에 실린 도판은 몇 점밖에 안 되는 것이 아쉽다. 작가가 작품 각각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창의적으로 해석하지만, 독자 자신이 작품을 직접 보고 각자의 감상과 해석을 내놓는 것도 중요하다. 저작권이 아직 안 풀린 현대 미술 작품들이라 저작권료 부담이 있었을 것이고 원서 자체에 도판이 많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욕심을 내서 도판을 더 찾아 넣었다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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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7 23: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바스티안 2021-07-08 00:18   좋아요 1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숫자가 만만해지는 책 - 한 번 배우고 평생 써먹는 숫자 감각 기르기
브라이언 W. 커니핸 지음, 양병찬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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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능 볼 때까지는 수학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지만, 수능 수리영역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점수를 받고 나서는 수학에서 손을 뗐다. 그 이후로는 간단한 계산도 PC나 핸드폰의 계산기로 해왔고, 근의 공식, 인수분해 공식은 물론이고 소금물의 농도 구하는 법까지 잊어버렸다. 살면서 정산 정도는 해야 되는데 이렇게까지 숫자와 담을 쌓고 살아도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숫자가 만만해지는’이라는 제목과 ‘한 번 배우고 평생 써먹는 숫자 감각 기르기’라는 부제에 끌렸다.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초등학교 수학 실력 정도면 충분하다”는 서문 속 저자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수학만 알아도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 책의 주목적은 어려운 수학 공식들의 원리를 쉽게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팩트 체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팩트인지 체크하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는 수많은 숫자들과 그 숫자들을 근거로 한 주장들이다. 인터넷 기사, 블로그 포스트, 광고 등 우리 주변의 다양한 매체들에 등장하는 숫자들은 얼핏 보면 정확해 보인다. 하지만 이 숫자들에는 우리 생각보다 오류가 많다. 이 책은 사칙연산, 올림과 반올림, 단위 환산만 할 수 있어도 이 숫자들이 정확한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네 가지는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만 되어도 할 수 있는 계산이다.

  숫자로 된 정보의 오류를 잡아내려면 먼저 어떤 이유로 오류가 생기는지 알아야 한다. 저자는 각종 매체가 숫자로 된 정보를 제시할 때 오류를 내는 경우를 유형별로 정리하고, 어디에서 무엇을 잘못 계산해서 오류가 생긴 건지 차근차근 살펴본다. 우선 영어에서는 발음도 철자도 비슷한 ‘100만(밀리언million)’과 ‘10억(빌리언billion)’, ‘1조(트릴리언trillion)’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알파벳 한두 개를 혼동했을 뿐인데 1000배 이상의 오차가 날 수 있다. 단위 환산을 잘못하거나 더 작은 단위와 더 큰 단위를 혼동하는 경우도 있고, 길이와 넓이, 부피를 혼동해 오류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뉴욕 타임스』,『뉴스위크』같은 공신력 있는 매체에서도 의외로 이런 오류를 많이 저지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더 주의해야 할 것은 실수로 인한 이런 오류보다 의도적으로 숫자에 속임수를 쓰는 경우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숫자로 된 자료인 그래프와 통계는 객관적인 자료로 보이지만, 그래프는 눈속임을 하기 쉬운 수단이며 통계는 진실을 호도하는 수단으로 오용될 수 있다. 미국의 뉴스 채널 <폭스 뉴스>에서는 2007년 12월부터 2010년 6월까지의 실업률 그래프를 제시했는데 이 그래프만 보면 실업률이 계속 치솟고 있다. 하지만 이 그래프의 X축을 자세히 보면 각 항목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각 항목 사이의 간격을 일정하게 하면 실업률은 수정하기 전의 그래프에서만큼 가파르게 치솟고 있지 않다. 시각적으로 보기 좋게 만들려고 했든 당시 대통령 임기 동안의 실업률을 강조하려고 했든 시청자들을 기만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개인 블로그도 아닌 『뉴욕 타임스』, 『뉴스위크』, <폭스 뉴스>, 같은 유력 언론 매체에서도 이렇게 실수로든 고의로든 숫자 관련 정보에서 많은 오류를 저지른다.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나 권익을 주장하는 각종 단체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숫자들만을 내세우거나 교묘하게 통계, 그래프를 조작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숫자의 오류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할까?

  저자가 독자들에게 쥐여 주고 싶어 하는 무기는 상식과 더 예민한 숫자 감각이다. 『뉴스위크』지에서는 2004년 미국 정부가 6600억 배럴의 석유를 비축하고 있다고 보고했는데, 이 정도면 미국 전 국민이 264년 동안 쓸 수 있는 양이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양의 석유를 갖고 있는데 왜 미국인들은 유가 파동에 신경을 곤두세울까? 알고 보니 ‘6억 6천만(660밀리언)’ 배럴을 ‘6600억 배럴(660빌리언)’ 배럴로 혼동한 것이었다. 이렇게 자신이 갖고 있는 상식과 자료 속 숫자가 말하는 주장이 어긋난다고 느껴진다면, 숫자의 자릿수를 바꿔보거나 단위를 바꿔보면서 그 숫자가 정확한지 체크해 보라고 저자는 제안한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시사 상식과 교양은 풍부해도 숫자 감각은 부족하고, 큰 수만 나오면 숫자 감각이 마비되어 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사람들이 숫자 감각을 기를 수 있도록 그가 제안하는 수단은 어림 계산이다. 어림 계산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적은 양의 정보만으로 정확한 값과 근접한 수치를 도출해내는 계산인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이 책에 나오는 어림 계산의 첫 번째 예는 미국에 있는 자동차의 수를 추정하는 것이다. 알고 있는 정보는 현재 미국 인구가 약 3억 3천만 명이라는 것뿐이다. 한 명당 자동차를 한 대씩 갖고 있다고 추정하면 3억 3천만 대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만 18세 미만의 미성년자나 운전을 할 수 없는 노인들,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자동차를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들을 고려해 미국인의 3분의 2나 4분의 3이 차 한 대씩을 보유하고 있다고 계산하면 2억에서 2억 5천만 대의 자동차가 있다는 추정치가 나온다. 이 추정치는 놀랍도록 정확한 값에 가깝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15년 미국에는 약 2억 6360만 대의 승용차가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상식을 바탕으로 어림 계산을 해도 얼토당토않은 수치에 속을 가능성은 훨씬 더 줄어든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어림 계산 실력을 늘리기 위한 몇 가지 팁도 소개하고 있다. 2의 10제곱은 1024, 10의 3제곱은 1000인데, 전자가 후자보다 약 2.5퍼센트 크다. 2의 20제곱은 10의 6제곱보다 5퍼센트 크다. 오차가 점점 커지긴 하지만, 2의 10×n 제곱이 10의 3×n 제곱의 근삿값이라는 것을 알면 큰 숫자를 계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복리(어떤 양이 동일한 시간 간격을 두고 일정한 백분율만큼 계속 증식하는 것)를 계산하는 데는 ‘72의 법칙’을 활용할 수 있다. 72의 법칙은 ‘어떤 금액이 단위 기간당 x퍼센트의 복리로 불어난다면, 원금의 두 배가 되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72를 x로 나눈 값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대학의 장학금이 1년에 8퍼센트씩 증가한다면, 9년 후에는 장학금이 두 배로 증가한다. 이 법칙은 우리가 투자한 원금이 몇 년 뒤에 어느 정도로 증가하는지 어림 계산 하는 데 유용하다.

  계산 실력을 늘리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연습 문제를 풀어보는 것. 저자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학생들에게 출제했거나 외부에서 입수한 문제 몇 개를 소개하는데 하나같이 흥미롭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다고 했을 때 축구장 하나에는 사람들이 몇 명 들어갈 수 있을까? 우리 집 마당에 나무가 여섯 그루 있다면 마당에 떨어지는 나뭇잎은 몇 장이나 될까? 노트북의 디스크 형태로 데이터를 저장한다면, 내 방만한 공간에는 데이터가 얼마나 저장될까? 길거리 뷰에 나오는 사진들을 촬영하기 위해 구글의 자동차는 몇 마일을 운행했을까? 엉뚱한 질문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의 상식과 숫자 감각, 창의적인 사고력을 총동원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의 학생들은 입사 면접에서 이런 문제를 접했을 때 저자와 함께 이런 문제들을 풀어보았던 것이 많이 도움이 됐다고 한다.

  계산에 약한 편이라 사실 더 많은 계산 팁이 나왔으면 했다. 수학을 잘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수학을 잘한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서 수학을 잘하게 되는 꿀팁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 주변의 숫자들 속 수많은 오류들과 그것이 왜 잘못된 건지 체크해 보는 내용이 대부분인 것이 아쉬웠다. 비슷비슷한 ‘팩트 체크’가 책을 읽는 내내 이어져 지루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하루아침에 쉽게, 잘하게 되는 왕도는 없는 법. 이 책을 읽고 갑자기 수학 천재가 될 수는 없겠지만, 숫자가 생각보다 무섭고 어려운 것이 아니고 숫자의 바다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는 무기는 이미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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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
우나영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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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책들을 고르다 서가 선반에서 툭 튀어나온 길쭉하고 판판한 책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 아름다운 한복 일러스트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흑요석(닉네임, 본명은 우나영)'이 몇 년 전 한복을 설명하는 일러스트집을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생각났다. 홍보 글을 보고 참 예쁜 책일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사보지는 않았었는데, 그 책이 눈앞에 있었다. 표지와 몇 페이지만 들여다봐도 예쁘고 흥미로워 보여서 끝까지 정독하고 싶어졌다. 읽어야 할 책이 여러 권 있었지만 이 책을 제자리에 다시 놓지 못하고 빌려왔다.

한복에 대한 책들 중에는 너무 학술적이고 전문적이어서 일반 독자가 바로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많다. 책 속의 설명을 읽다 보면 한자로 된 어려운 용어가 툭툭 튀어나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일반 독자들을 위해 『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의 작가는 처음부터 용어를 하나하나 설명한다. '아청색', '청현색', '홍람색', '담자색' 같은 색깔 이름은 직접 그 색깔들을 보여주고, 앞으로 계속 언급될 한복의 각 구조의 명칭을 미리 설명한다. 한복의 배색과 기본 구조, 기본 의상을 미리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한복이 어떤 옷인지 큰 줄기를 파악하게 하고, 각각의 한복이 어떤 옷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나간다. 이렇게 체계적이고 친절한 설명 덕분에 한복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독자라도 책을 읽고 나면 한복이 어떤 옷인지 대강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간결한 선화로 그려 더 알아보기 쉬운 한복 저고리의 구조와 각 부분

각 시대의 여성 한복을 비교한 일러스트. 왼쪽은 19세기의 여성 한복, 오른쪽은 20세기의 여성 한복이다.


일러스트는 설명하고 싶은 부분만 더 눈에 띄게 표현하는 데 사진보다 유리하다. 『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는 이런 일러스트의 장점을 활용해서 한복의 구조와 각 부분의 명칭, 종류, 입는 법 등을 더 알기 쉽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간결한 선화 안에 설명하는 부분만 색채를 넣어 강조하는 방식 덕분에 사진을 볼 때보다 더 명쾌하게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 각 시기에 따라 옷깃, 고름, 소매, 치마의 모양과 사이즈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나란히 배치해 두어서 시대가 지남에 따라 한복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시대뿐만 아니라 어느 붕당이냐에 따라서 여인들의 쪽머리와 깃 모양도 달랐다는 것이 흥미롭다.


화려하고 섬세한 한복 일러스트

이미지 출처: 우나영 그라폴리오


화려하고 섬세하고 유려한 일러스트는 알아가는 재미에 보는 재미를 더한다. 작가의 화려하고 섬세한 화풍의 장점은 한복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궁중 의상에서 특히 빛난다. 궁중 의복의 복잡한 구조를 정확하게 그려 기초를 단단하게 다진 뒤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채와 화려한 무늬를 입혀 궁중 의상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곁에 두고 보고 싶을 때마다 펼쳐보고 싶게 만들 정도로 이 책은 아름답다.

한복을 알고 싶어도 관련 서적들이 너무 대략적이거나 너무 학술적이어서 만족스럽지 못했던 사람들이 한복을 알아가기에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여성 한복만 다루고 있다는 것과 책의 분량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것이다. 작가가 남자 한복을 다루는 후속편도 다루겠다고 했으니 후속편을 기다리고 있다. 도포, 중치막, 두루마기가 어떻게 다른 건지 구별할 수 없는 나이니. 여자 한복을 다룬 이 책과 남자 한복을 다루는 후속편을 합본으로 만들어서 한복 전반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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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달리기 푸른숲 역사 동화 7
김해원 지음, 홍정선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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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열심히 챙겨보고 있는 드라마 <오월의 청춘>의 원작이라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된 책이다. 드라마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가 원작 소설의 두 주인공 캐릭터를 바탕으로 해서 가족, 친구, 지인 등 조연 캐릭터들을 새로 만들어낸 반면, <오월의 청춘>은 원작의 주인공 캐릭터들을 조연으로 삼고 그들을 바탕으로 주인공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 원작의 주인공 명수의 두 여동생 명옥과 명신을 지우고 그 자리에 광주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누나 명희를 여주인공으로 만들어 넣었다. 명수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정태에게는 사이가 껄끄러운 형이 있는데, 이 인물은 희태라는 남주인공 캐릭터로 재탄생했다. 드라마는 명희와 희태를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원작의 주인공인 명수와 친구들의 이야기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원작을 읽으면서 드라마가 원작에서 이런 부분을 가져왔다는 것이 조금씩 보여 흥미롭게 읽었다.


드라마 <오월의 청춘> 속 정태(최승훈)과 명수(조이현)의 모습


  드라마가 1980년 5월을 살아갔던 광주의 청춘들을 다루고 있는 반면, 소설은 소년체전을 준비하기 위해 그때 광주에 모였던 아이들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전남 대표 1000미터 달리기 선수로 뽑힌 명수와 정태, 둘과 합숙소에서 같은 방을 쓰게 된 친구 진규와 성일, 네 명의 소년들이다. 명수와 정태, 진규는 열세 살이고 성일은 열두 살. 고된 훈련에 지치고 좀처럼 넘기 힘든 자신의 한계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아이들은 같이 울고 웃으면서 우정을 쌓아간다. 1980년 5월 18일, 코치와 감독 몰래 광주 시내로 놀러나간 아이들은 뜻밖의 참혹한 광경과 마주치게 된다. 5 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소설 속 주요 장소들. 광주천을 중심으로 가까이 모여 있다.


  소설에 나오는 지명들을 지도 앱에서 찾아가며 주인공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았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장소들은 지도 속 하늘색 띠, 광주천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명수의 아버지는 명수를 합숙소에 데려다주는 길에 양동시장에 들러 새 운동화를 사준다. 아이들의 합숙소로 쓰인 여인숙은 사직공원 담장 앞에 있다. 아이들이 휴일을 제외하면 매일 가서 훈련했던 무등경기장은 사직공원에서 걸어서 한 시간쯤 되는 거리. 아이들은 매일 아침 뛰어서 무등경기장까지 갔으니 그보다는 시간이 약간 덜 걸렸을 거다. 아이들은 18일 오후 광주공원으로 놀러갔다 시위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진압하는 공수부대와 마주친다. 광주천 건너편, 지금은 철거된 옛 적십자병원에서는 시위 중 부상당한 사람들을 치료했고, 옛 전남도청에는 사망한 시민들의 시신을 모셔두었다. 전남도청과 지금의 광주 지하철 금남로4가역, 금남로5가역을 가로지르는 금남로는 5 18 민주화운동의 중심지였다. 이렇게 주인공들이 훈련하고 먹고 자고 노는 공간 중 대부분은 실제 광주 시내에 있는 장소들이다. 작가가 장소에 대해 고증과 설정을 꼼꼼히 한 덕분에, 주인공들과 함께 광주 곳곳을 오가는 느낌이 들었다.


  5 18의 진행 상황도 사건 전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5 18이 일어나기 전부터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시위가 일어나니 돌아다니지 말고 몸 조심 하라고 주의를 준다. 휴일인 일요일이라 광주 시내로 놀러나왔던 아이들은 광주 시내에서 시위하던 사람들과 진압하러 온 공수부대와 맞닥뜨린다. 아이들은 온갖 험한 일들을 목격한 뒤 간신히 합숙소로 돌아오고, 감독과 코치는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합숙소에서만 지내게 한다. 그러나 합숙소 밖의 끔찍한 소식은 계속해서 들려온다. 이튿날인 19일, 비 내리는 밤에 아이들은 방에서 조잘조잘 속마음을 털어놓고, 21일에는 시외 전화가 끊겨 광주 밖이 집인 아이들은 가족들과 연락하지 못하게 된다. 그날 오후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계엄사령관의 담화문을 듣고 코치는 분개한다. 자료를 찾아보면서 5 18 민주화운동의 진행 상황과 그때 날씨까지 정확히 고증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공수부대원들의 잔혹한 폭력과 욕설, 전남도청에 줄을 지어 누워 있는 시신들과 그 시신들 앞에서 통곡하는 가족들까지 이 소설은 숨김 없이 아이들에게 보여준다. 주인공 아이들에게나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나. 참혹해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이기 때문이다. 멋있게만 보였던 군인 아저씨들이 사람들을 해칠 리 없다고, 김일성이 보낸 북한군일 거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그들이 정말 우리 군인이라는 진실에 당혹스러워한다. 게다가 생각지 못한 비극과 위험이 아이들에게 닥쳐온다. 그래도 아이들은 성일의 말대로 "어두운 밤을 밝히는" 우정을 나누면서 함께 씩씩하게 이 비극을 헤쳐나간다.


  평범한 사람들이 거대한 폭력을 힘으로 이기기는 힘들다. 하지만 살아남고 연대하고 기억할 수는 있다. 그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무기이다. 5 18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이, 5 18을 학교에서 배웠지만 실감하지는 못하는 아이, 또는 어른에게 이 책은 살아남고 연대하고 기억하는 것의 소중함을 알려준다. 드라마를 보지 않아도 이 책 자체로 5 18에 대해 배우고 느낄 수 있고, 드라마를 본다면 드라마에서 덧붙인 서사와 드라마에서는 나오지 않는 원작만의 서사를 모두 돌아보며 더 풍성하게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5 18 당시의 상황이 다음 주부터 나온다. 주인공들 위주로 사건이 전개되니 이 책 속 아이들의 애틋한 이야기가 모두 나오지는 않겠지만,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더욱 빛나는 평범한 사람들의 용기와 사랑, 우정이라는 메시지가 잘 드러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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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지 2021-05-30 09: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챙겨보는 드라마인데 원작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네요. 시대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청춘들의 용기와 열망, 벗들 사이의 우정과 그 속에 피어나는 사랑 등이 애잔하게 그려지는 드라마 다음 주가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바스티안 2021-05-30 15:10   좋아요 0 | URL
원작이긴 하지만 드라마는 남녀 주인공 위주로 이야기가 진행돼서 원작을 아주 많이 가져오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깨알같이 원작 속 내용과 설정들을 조금씩 가져왔고 ‘평범한 사람이 겪은 5 18‘이라는 주제와 정서는 그대로 가져와서, 드라마를 보신 분이라면 더 재밌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다음 주부터 드라마에 5 18이 나오는데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맞서 나갈지 궁금해져요.
 
동의
바네사 스프링고라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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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77년 프랑스의 일간지 『르몽드』에는 미성년자와 성인 사이의 성관계를 처벌하지 말아달라는 공개 서한이 실렸다. '아이들은 폭력의 희생자이기는커녕 스스로 동의했다고 법정에서 밝혔다'면서. 68 혁명(1968년 프랑스에서 기성 세대와 국가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일어났던 시민 혁명) 이후 70년대 프랑스에서는 모든 육체가 자유로운 성생활을 누려야 한다는 풍조가 일어나면서 청소년의 성생활을 막는 것을 사회적 억압으로 보는 시각까지 생겼다. 이 공개 서한도 그런 풍조의 일환이었다. 14살 소녀 바네사 스프링고라를 연애라는 명목으로 성적, 정신적으로 학대한 작가 가브리엘 마츠네프도 그 서한에 서명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바네사는 수십 년 뒤 자신이 겪은 폭력을 자전적 소설로 기록해 출간했다. 그 소설이 『동의』이다.

바네사는 자신이 어떻게 마츠네프의 덫에 걸려 들었는지, 마츠네프의 손아귀에 있는 동안 어떤 것들을 느꼈는지 이야기하고, 마츠네프에게서 벗어나서 온전히 홀로 서기 위해 방황했던 날들을 이야기한다. 이혼한 부모의 무관심과 방치로 외로웠던 바네사는 잘생긴 데다 유명 작가인 마츠네프가 자신에게 열정적으로 애정을 표시하자 그의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 첫사랑이라는 감정에 눈이 멀어, 50살이나 먹은 남자가 14살밖에 되지 않은 자신을 유혹한 것 자체가 비정상적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채. 바네사가 아직 마츠네프의 진짜 모습을 눈치채지 못했을 때도 그의 추악함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고대에는 어른이 젊은이로 성으로 인도하는 일이 의무였다는 궤변과, 어린 바네사와 성관계를 맺으려고 늘어놓는 온갖 사탕발림들 속에서. 독자들은 그의 추악함을 눈치챘지만 바네사는 눈치채지 못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반대해도 더욱 강해지는 사랑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와의 관계가 계속되면서 환상은 깨지기 시작했고, 바네사는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네사를 매혹시켰던 그의 탄탄한 몸매와 매끈한 피부는 겉멋 부리기의 결과였고, 그는 자기 외모뿐만 아니라 바네사의 외모까지 관리하려 들었다. 그는 바네사가 또래의 남자아이들과 콘서트에 가는 것도 반대하고, 모든 생활을 통제하려고 들었다.

마츠네프가 바네사를 어떻게 통제했는지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둘이 함께 작문 과제를 하는 장면이다. 마츠네프는 자신이 젊은 시절 승마 실력을 사람들 앞에서 뽐냈던 일을 자랑하며, 그 이야기를 받아 적어서 작문 과제로 제출하라고 한다. 바네사가 거부하자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거냐고 상처 받은 척하고, 네가 쓴 것처럼 보이게 쓸 수 있다고 구스른다. 결국 바네사는 마츠네프의 글을 받아 적어 과제로 제출하고 좋은 점수를 받지만, 그것은 바네사의 글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때부터 자신을 잃어간다. 작문 과제뿐만 아니라 그와 주고받는 편지까지 그의 문체와 닮아갔다. 바네사는 그 후 자신뿐만 아니라 마츠네프와 연인 관계였던 소녀들이 하나같이 그와 같은 문체로 편지를 썼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아직 자아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청소년들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는 것을 즐겼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바네사는 마츠네프가 상상 이상으로 추악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출장을 간다고 하고 거리에서 다른 여자아이와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을 마주치고, 그가 쓴 소설과 일기에서 그가 필리핀에서 열한 살짜리 어린 소년들과 성관계를 가지고 난교 파티를 즐겼다는 대목을 발견한다. 바네사는 자신이 그에게 결코 특별하지 않았고, 그가 자신에게 하는 행동이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도 그의 추악한 행동에 가담한 공범이라는 생각이 들어 괴로워하고 빠져나오고 싶어했을 때, 아무도 바네사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부모도 친지도 선생님도.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었기에, 바네사는 스스로 마츠네프를 떠난다.

마츠네프를 떠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곧바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츠네프와 사귀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의 눈총을 견디기 힘들었고, 자기 자신에게 죄인, 낙오자, 창녀라는 비난을 퍼부었다.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질 때에도 스스로가 쾌락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누군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도구,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헤어지고 나서 10여 년 동안 마츠네프는 바네사를 모델로 한 소설, 바네사가 보낸 편지들을 포함한 일기, 서간집을 쉬지 않고 출간했다. 상처가 아물 새도 없이 소금을 뿌리는 격이었다. 바네사는 자신이 채 형체가 갖추어지기도 전에 그가 자신을 말들의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을 깨닫고, 문학 자체에 환멸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바네사는 오랜 방황을 끝내고 대학에 진학했고, 출판계에서 경력을 쌓아 출판사 대표가 되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과 결혼해 아이도 낳고 행복한 가정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츠네프는 계속해서 바네사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우려고 했다. 그는 자기 전기를 출간하겠다며 바네사의 사진을 실어도 되겠느냐고 편지를 보냈고, 바네사의 사진을 포함한 옛 연인들의 사진을 자기 공식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다. 심지어 길이 남아야 할 문화유산인 양 바네사의 편지가 포함된 연애 편지들과 원고를 출판 기록물 연구소에 기증했다. 출판사 편집자였던 어머니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책과 문학을 가까이 했던 바네사는, 마츠네프를 통해 책과 문학이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제 바네사는 오히려 책과 문학을 자신의 무기로 삼아 복수를 한다. 마츠네프의 추악한 진실은 『동의』로 박제되었다.

2013년 에세이로 권위 있는 문학상을 받으면서 마츠네프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예술 작품을 그 아름다움이나 표현력이 아니라 윤리성 혹은 비윤리성을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대단한 바보짓이다."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욕망과 명성을 위해 아이들을 성적, 심리적, 문학적으로 착취하는 그를 보면서 바네사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문학은 모든 것을 정당화하는가?"

나는 단호히 답하겠다. 문학이, 예술이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예전에 한 교수님은 예술가들은 우리와 피 자체가 다르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예술가 또한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지켜야 하는 사람이다. 어떤 예술도 인간의 존엄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다. 마츠네프가 문학상을 받고 어린 아이들을 성폭행했던 로만 폴란스키가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게 지금의 현실이지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에 공감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문학, 예술 뒤에 숨어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지만 세상은 점점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동의』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문학과 예술은 피해자가 반격을 하는 데에도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 『동의』는 위대한 작가로 칭송받아 오던 작가 마츠네프가 사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어린 아이들에게 욕망을 쏟고 그들을 통제하는 것에서 기쁨을 얻는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폭로한다. 마츠네프가 그 누구의 동의도 없이 피해자들의 신상과 삶을 기록으로 남긴다면, 그의 행적을 기록한 이 책도 남아 사람들이 그의 추악함을 기억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가해자와 세상이 자신의 삶에 끊임없이 가하는 폭력을 견디면서 더욱 단단해졌던 바네사의 품위와 존엄함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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