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
바네사 스프링고라 지음, 정혜용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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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하고 때로는 신랄한 문체 안에서 자신을 착취하던 가해자의 민낯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의 위선과 한심함을 가차없이 드러낼 수 있는 용기, 반성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그와 그를 추앙하는 세상을 보고도 주눅 들지 않는 단단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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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이름이 알려주는 것 - 학명, 보통명, 별명으로 내 방 식물들이 하는 말 edit(에디트)
정수진 지음 / 다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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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따금씩 내가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읽는다그 분야를 깊이 파고들 생각까진 아니지만 한 번 훑어보면서 시야를 넓히고 싶기 때문이다이번에 읽은 책 식물의 이름이 알려주는 것은 식물학 분야와 원예 분야 모두를 담고 있다식물의 이름을 통해 알게 되는 지식을 바탕으로 식물을 더 잘 이해해서(식물학더 잘 기르자는 게(원예이 책의 목표니까식물을 기르는 취미는 없지만 지금 우리 집 앞에 핀 꽃이 무슨 꽃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좀 더 섬세하게 보고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래서 식물을 잘 기르겠다는 마음보다는 식물을 좀 더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식물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아보기 전저자는 식물의 이름으로는 어떤 것이 있고식물의 이름은 어떻게 붙이는지부터 설명한다우선 식물에게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일해서 부르는 공식 이름학명이 있다학명을 알려면 18세기 스웨덴의 생물학자 카를 폰 린네가 제시한 생물 분류 단계와 이명법을 알아야 한다린네의 생물 분류 단계는 계------종의 순서대로 하위분류로 뻗어나간다이명법은 그 중 해당 생물의 속 이름과 종 이름두 개의 이름을 붙여 학명으로 만드는 것이다보통명은 복잡한 학명을 간단하게 만든 약칭이나 사람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쓰이는 이름이고보통명 중에서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이름은 국명이라고 한다화훼 시장에서 흔히 쓰이는 이름은 유통명이고특정 지역이나 특정 상황에서 부르는 별명도 있다이런 이름들은 그 식물의 생김새와 색깔냄새독성의 유무개화 방식그 식물이 자생하는 곳그 식물을 발견한 사람그 식물의 쓰임새 등 정말 다양한 것에서 유래했다이제 식물의 이름을 어떻게 짓는지 알게 되었으니그 이후로는 각각의 식물들이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고 그 이름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낼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위) 팬지의 이름은 꽃잎 무늬가 생각에 잠긴 사람의 얼굴같이 생겼다고 해서 '생각, 사색'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팡세'에서 유래했다.

(가운데) 데이지는 '낮에 뜬 눈'이라는 뜻의 고대 영어 ‘daegeseage’에서 따온 이름으로 해가 떠 있는 동안에만 꽃이 피는 특성이 담겨 있다.

(아래) 떡갈나무 잎은 떡을 찔 때 깔거나 찐 떡을 감싸는 데 쓰면 방부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떡갈나무는 '떡 아래에 까는'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식물들의 이름에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다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인 팬지pansy. 그저 귀여운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꽃잎의 무늬가 생각에 잠긴 사람의 얼굴같이 생겼다고 생각사색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팡세pensée’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팬지를 자주 봐 왔지만 한 번도 팬지 꽃잎의 무늬가 사람 얼굴 같다고 느낀 적은 없었는데 이 이야기를 읽고 나니 갑자기 팬지의 무늬가 눈을 찌푸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람의 모습으로 보인다여자 이름으로도 쓰이는 귀여운 이름 데이지daisy는 낮에 뜬 눈이라는 뜻의 고대 영어 ‘daegeseage’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이 이름에는 해가 떠 있는 동안에만 꽃이 활짝 피고 해가 진 밤에는 꽃이 오므라드는 데이지의 특성이 담겨 있다떡갈나무는 떡 아래에 까는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떡갈나무의 싱싱한 잎을 떡을 찔 때 깔거나 찐 떡을 감싸는 데 쓰면 은은한 향이 나면서 방부 효과를 내 떡이 금세 상하지 않는다고 한다이렇게 사람들은 수백 년수천 년 동안 식물을 보면서 했던 상상관찰해서 알게 된 특성활용했던 용도 등을 식물의 이름에 녹여내 다른 식물들과 구별될 수 있게 했다그렇기 때문에 식물의 이름을 알면 식물이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 각각의 식물을 키우는 데 필요한 지식은 식물의 이름으로 풀어낸 식물 이야기보다는그 식물에 관련된 정보를 요약 정리한 페이지나 본문 속 원예 팁에 들어 있다건조한 곳에서는 잘 못 자라니 잎에 자주 분무를 해 주는 게 좋다추위에 약하니 영상 13도 이상의 환경에서 키우는 게 좋다는 식으로식물을 잘 키우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 부분을 꼼꼼히 읽고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지만 식물을 더 잘 키우는 것과는 상관없는 지식이라도 그 식물에 더 흥미와 관심을 갖게 만들어준다식물을 키울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도 식물의 이름을 통해 풀어낸 다양한 지식들은 흥미롭게 다가온다.

 

  청소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설명은 쉽고 재미있다게다가 선명한 컬러 세부 도판들과 그 옆의 간결한 도판 설명으로 본문에서 설명한 내용을 한 번 더 풀어낸다그래서 어린 시절 보던 식물도감 같은 느낌을 준다책 표지와 챕터 페이지각 식물 항목의 첫 페이지에 그려진 식물 일러스트본문의 강조 표시 등 다양한 곳에서 사용되는 연두색은 식물 관련 책다운 싱그러움을 더한다식물을 더 잘 키우고 싶은 사람에게도그저 식물을 더 잘 알고 싶은 사람에게도 이 책은 책장을 펼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게 하면서 유용한 지식흥미로운 지식도 전해주는 책이 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https://www.almanac.com/plant/pansies

https://www.amazon.com/Outsidepride-Gerbera-Daisy-Flower-Plant/dp/B004I0GYBM

https://www.pngwing.com/ko/free-png-hyt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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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4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5월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바스티안 2021-06-04 23:0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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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불의한 사람들이 승승장구할 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했지만, 남이 피해를 입든 말든 자기 멋대로 하는 사람들이 더 잘 살 때 회의감을 느낀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은 벌을 받는다고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바르게 살아야 할까. 이상과 현실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서로 먼데 왜 마음속에 이상을 품고 살아야 할까. 미국의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의 소설 『니클의 소년들』을 읽으며 그 질문의 답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니클의 소년들』의 주인공 엘우드 커티스는 선하고 정의롭기에, 마음속에 이상을 품고 살기에 더 고통받았다. 그가 청소년 시절을 보낸 1960년대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한 민권 운동가들이 인종 차별에 저항하고 있던 시대였다. 그는 흑인이었고, 미국에서도 인종 차별이 특히 심한 남부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고 사업을 하겠다고 집을 나간 부모 대신 외할머니가 그를 키웠다. 흑인이라 받는 차별과 모욕은 일상이었다. 백인 아이들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놀이공원에 흑인 아이들은 입장할 수 없었고, 백인 학교에서 보낸 중고 교과서에는 '죽어라, 검둥이' 같은 욕설이 잔뜩 적혀 있었다. 가난과 차별, 폭력 속에서도 그는 올곧고 건실한 청년으로 자랐고, 온 동네 사람들이 그의 장래를 기대했다. 꿈도 희망도 없이 아무렇게나 사는 또래들과 달리, 엘우드는 대학에 진학하고 민권 운동에 참여해 흑인의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생각지 못한 불행이 닥쳐왔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고등학생을 위한 대학 강의를 들으러 가던 길에, 엘우드는 한 흑인 남자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하필 그 차는 도난 차량이었고, 엘우드는 흑인이고 그 차에 탔다는 이유로 차 도둑과 공범으로 몰렸다. 누구에게나 인정받던 모범생 엘우드는 하루아침에 소년범이 되어 니클 아카데미라는 소년원으로 끌려갔다.

  심지 굳은 엘우드는 절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착실하게 생활하면 빨리 출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면 보상이 따른다는 것이 엘우드의 상식이었으니까. 문제는 니클이 그런 상식이 통하는 곳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엘우드는 니클에 온 지 며칠 되지도 않아 학교 폭력 가해자들이 작고 약한 하급생을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엘우드가 그들을 막아섰지만, 백인 교사들은 싸움에 끼어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가죽 채찍으로 수십 대나 때렸다. 니클은 어디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수용소였고, 교사들은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폭력을 휘둘렀다. 흑인 학생들은 백인 학생들과 차별당하며 더 심한 폭력을 견뎌내야 했다. 니클에서 탈출하려다 붙잡히거나 학교에 불이익을 입힌 학생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되어 학교 뒤편 비밀 묘지에 묻혔다.

  니클에서 일어나는 일은 법적으로도, 엘우드의 가치관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면하고 묵인한다면 공범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엘우드가 우리 스스로를 위해 일어설 수 있다고 동급생 터너에게 말하자, 터너는 이렇게 답한다. "여기서도 살아남는 요령은 밖에 있을 때랑 똑같아. 남들이 어떻게 구는지 보고, 장애물 경주를 하듯이 놈들을 피해서 돌아가는 길을 알아내는 거지. 여기서 걸어 나가고 싶다면."(p. 108.) 터너는 니클에서 자신만의 요령으로 버텨 왔다. 남의 일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산 덕분에 한 번도 채찍질을 당하지 않았고, 제일 쉽고 편한 일을 맡았다. 일을 하기 싫을 때는 숨겨둔 가루비누를 먹고 병동으로 실려가 며칠씩 쉬고 왔다. 그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 엘우드처럼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엘우드와 터너는 그렇게 각자의 방식으로 니클에서의 삶을 버텨냈다.

  바로 곁에서 함께 공부하고 일했던 아이들이 새벽에 끌려가 폭행당하거나 성적으로 학대당하거나 살해당해도 일상은 흘러갔다. 엘우드도 이제는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엘우드의 내면은 위축되고 망가져 가고 있었고, 엘우드는 그렇게 변해 버린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 없었다. 그저 아무 문제도 일으키지 않고 형량을 채우거나 열여덟 살이 되면 이곳을 졸업할 수 있다. 하지만 엘우드는 조용히 니클을 졸업하는 대신, 니클 자체를 없애버리기로 결심한다. 정부에서 보낸 감사관들이 왔을 때 그들에게 니클의 실상을 폭로하는 쪽지를 전달하겠다는 엘우드의 말에 터너가 경악하자, 엘우드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틀렸어, 터너. 이건 장애물 경주가 아니야. 장애물을 피해서 돌아갈 수가 없다고. 반드시 장애물을 통과해서 가야 돼. 놈들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하든 고개를 꼿꼿이 들고 걸어가야 돼."(p. 218.)


  터너는 엘우드가 니클에 순응하는 데 도움을 주었지만 내면으로는 자신도 모르게 엘우드에게 영향을 받아 왔다. 그는 대책 없이 이상만 좇는 엘우드가 짜증나기도 했지만 엘우드가 누구보다 굳건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백인 교사의 심부름 때문에 엘우드가 쪽지를 전달하지 못하게 되자, 터너는 감사관에게 신문을 건네는 척하며 그 속에 쪽지를 넣어 전하는 기지를 발휘한다.


  엘우드와 터너는 목숨을 걸고 감사관에게 쪽지를 건넸지만, 니클 문제는 몇 주 동안만 의회에서 논의되고 곧바로 잊힌다. 쪽지를 쓴 것이 엘우드라는 것이 밝혀지자 백인 교사들은 엘우드를 채찍질한 뒤 3주 동안이나 독방에 가두었다. 세상에 끊임없이 저항했던 엘우드마저 누구도 자신을 위해 와주지 않는 현실에 절망했다. 좌절할 때마다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킹 목사의 말을 떠올리지만, 자신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들마저 사랑하겠다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실천할 수도 없었다. 그때 터너가 나타나 엘우드를 독방에서 구출한다. 그리고 함께 니클을 탈출한다.


​  두 소년 모두 무사히 탈출하고 살아남았다면 이 소설은 완벽하게 희망적인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 소년만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사람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순응하며 살아가려 했던 터너였다. 소설의 1부에서 그렇게 공을 들여 니클에 오기 전 엘우드의 삶을 보여주었는데. 게다가 3부에서는 성인이 된 엘우드의 시점과 아직 니클에 있는 엘우드의 시점이 교차되며 이야기가 진행되었는데 어떻게 살아남은 사람이 터너일 수 있을까? 며칠 동안 도망을 쳤지만 엘우드는 그들을 추격해 온 백인 교사의 총에 맞아 숨졌다. 터너는 엘우드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계속 도망쳐야 했고 그래서 살아남았다. 엘우드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터너는 엘우드의 이름으로 수십 년을 살아왔다. 성인이 된 엘우드라고 생각한 사람은 사실 그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터너였다.


​  그렇게도 선하고 정의로웠던 엘우드가, 외할머니와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엘우드가 허무하게 죽었다. 그렇게 듣고 싶어 했던 대학 강의 한 번 듣지 못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더 깊이 학문을 연구하고 흑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는 꿈도 그의 죽음과 함께 흩어져 버렸다. 그가 삶의 지침으로 삼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도, 그가 무엇보다 중시했던 정의와 사랑도 그를 죽음에서 구하지 못했다. 그가 자기 목숨을 바쳐 감사관에서 건넸던 쪽지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고, 니클은 50여 년 뒤에나 폐교되었다. 니클에서 학생들을 고문하고 학대하고 살해했던 백인 교사들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고 천수를 누렸다. 그렇다면 엘우드가 바르게 살려고 했던 것, 마음속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저항했던 것은 완전히 헛된 일이었을까?


​  엘우드는 간절히 바라 왔던 것들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굳건한 의지는 터너의 삶을 바꾸었다. 그저 세상에 순응해 아무렇게나 살아가던 터너는 죽은 엘우드의 몫까지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 왔지만 그 또한 니클이 남긴 트라우마로 내면이 망가져 있었다. 뒤틀리고 망가진 그를 제대로 살게 한 것은 엘우드의 몫까지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었다. 터너는 건실한 업체의 사장이자 지역 사회의 원로로 존경받게 되었고, 죽은 엘우드 대신 니클에서의 만행을 고발하기 위해 니클 관련 기자회견이 열리는 탤러해시로 떠난다. 그곳은 엘우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었다. 어린 엘우드가 언젠가 흑인이 직원이 아니라 손님으로 오기를 간절히 바랐던 호텔에, 터너가 손님으로 찾아오는 장면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터너는 자신이 오랜 친구의 소망을 이루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니 덤덤했지만, 독자들은 엘우드의 소망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에 먹먹해진다.


개울 위로 쓰러진 나무줄기 같았다. 나무는 개울에 속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 존재하면서 수면에 자기만의 잔물결을 만들어낸다.(p. 76.)


​  이것이 엘우드가 느낀 터너의 첫 인상이었다. 그는 위축되어 있는 니클의 다른 아이들과 달리 묘한 자신감을 가지고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터너에게서 강렬한 존재감을 느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는 '개울 위로 쓰러진 나무줄기'가 엘우드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자신만의 잔물결을 만들어내는 사람. 터너의 존재감은 사실 터너가 마음속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꾸며낸 허세였다. 반면에 엘우드의 존재감은 그의 성품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가 죽은 뒤에도 그의 존재 자체가 터너의 삶에, 이 세상에 계속해서 잔물결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  나는 이미 죽었는데 다른 누군가의 삶에, 이 세상에 잔물결을 남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생각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세상이 내가 한 옳은 행동으로 달라졌지만 나는 그 결실을 하나도 누리지 못하고 고통만 받다 죽을 수도 있다. 내가 한 선한 행동이 항상 보답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심지어 한 번도 보답받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증명한 나 자신의 의미와 가치, 그로 인해 느끼는 긍지와 자부심은 누구도 빼앗을 수도 손상시킬 수도 없다. 『니클의 소년들』은 이상이 실현되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 이상을 위해 누구보다 고결하게 살았던 소년의 삶을 통해,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우리가 왜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이상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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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설공찬전
이서영 지음, 신중철 그림, 채수 원작 / 솔아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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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설공찬이』, 『다시 쓰는 설공찬전』스포일러 포함


  두 달 전 도서관에서 『다시 쓰는 설공찬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 채수蔡壽, 1449-1515가 쓴 공포 소설 <설공찬전>을 현대 작가가 다시 쓴 소설이다. <설공찬전>은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한문뿐만 아니라 한글로도 필사되어 평범한 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이 읽혔다. 그러나 당나라에 반역해 후량이라는 나라를 창건했던 장군 주전충이 지옥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내용을 담은 이유로 논란에 휩싸였다. 당시 국왕이었던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는데, 주전충에 중종을 빗대어 비판했다는 의심을 받은 것이다. 그 밖에도 "저승에서는 여자여도 글을 알면 좋은 벼슬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대목, 명나라 성화제가 총애하는 신하의 수명을 늘려달라고 했다가 오히려 염라대왕에게 노여움만 샀다는 대목이 성리학적 세계관에 갇혀 있던 유학자들에게 노여움을 샀다. 사헌부에서는 저자인 채수를 처형하고 간언했지만, 중종은 너무 과한 처사라며 채수를 파직하는 데 그쳤다. 


  금서가 되어 사라진 줄 알았던 이 소설의 한글 필사본이 1996년 발견되었다. 최초의 한글 소설로 알려진 <홍길동전>보다 100여 년 앞선 소설이었다. 젊은 나이에 죽은 선비 설공찬이 사촌동생 설공침의 몸에 빙의되어 저승 이야기를 한다는 이 소설은 결말 부분이 필사되지 않아 미완성 형태로 남았다. 그럼에도 빙의와 저승 세계라는 환상적인 소재를 다룬 덕분인지 설공찬전을 원작으로 연극도 만들어졌고, 설공찬전을 모티브로 한 웹툰, 웹소설도 만들어졌다. 그리고 소설의 배경이 된 순창 지역에서는 설공찬전을 재해석해 다시 쓰는 프로젝트 두 가지를 진행했다.


  그 중 김재석 작가가 쓴 『다시 쓰는 설공찬이』는 전문 작가가 쓴 소설답게 소설 자체의 퀄리티는 괜찮은 편이다. 홍보용 소설답게 우리나라, 특히 순창 지역의 자연과 민속, 저승관을 최대한 자세하게 보여주려는 의도가 보이지만 꽤 자연스럽게 소설에 녹여냈다. 무엇보다 원작에서는 설공찬이 빙의되기 전 잠깐 설공침의 몸에 깃들었다 박수무당 김석산에게 쫓겨나는 부분에서만 등장하는 설공찬의 누이에게 '초희'라는 이름과 그녀만의 서사를 준 것이 흥미로웠다.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깊이 이해했지만 세상이 정해 놓은 한계에 부딪쳐야 했던 공찬과 초희 남매의 모습을 애틋하게 그려냈다. 그래서 설공찬은 인간으로 환생하고 설초희는 저승에서 명부를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다는 결말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설공찬은 원작에서 사촌동생 설공침을 괴롭히지만, 김재석 작가는 그런 공찬의 행동이 증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재해석했다. 공찬은 당시 사회의 틀에 갇힌 사람들이 그 틀에서 벗어나 좀 더 자연스럽고 인간적으로 살아가길, 더 선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공침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 것이었다. 자신과 동갑내기지만 훨씬 더 총명한 사촌 공찬을 질투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사촌누이 초희를 무시하던 공침은 다소 단순한 악역처럼 보였지만, 공찬의 혼이 빙의되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초희는 '여자도 능력이 있으면 중용된다'는 원작의 구절을 스스로 증명했다. 원작의 권선징악적인 교훈을 넘어서 두 남매가 새로운 삶을 찾고, 남은 사람들도 그들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돌아보는 결말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다시 쓰는 설공찬이』가 설공찬과 설초희 남매에 집중한 반면, 이서영 작가의 『다시 쓰는 설공찬전』은 이들의 영혼이 빙의되는 설공침에게 집중한다. 『다시 쓰는 설공찬이』에서 설공침이 다소 단순한 악역으로 나왔던 것과 달리(이 소설에서도 나중에는 설공침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만) 『다시 쓰는 설공찬전』에서 설공침은 악하다기보다는 아무것에도 의욕이 없어 아무렇게나 사는 인물로 묘사된다. 설공찬과 설공심(『다시 쓰는 설공찬전』에서는 설공찬의 누이가 '설공심'이라는 이름으로 설정되어 있다) 남매의 빙의는 설공침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된다. 빙의가 풀리고 나서 그는 자신의 몸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일인지 깨닫고, 설공찬의 저승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아 있을 때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원작과 『다시 쓰는 설공찬이』에서 설공찬이 저승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통로로만 활용되었던 설공침을, 빙의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주인공으로 해석한 것이 신선하다. 빙의가 풀린 뒤 설공찬이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느끼는 자신의 몸과, 그 몸에 닿는 부드러운 이불 같은 작은 것들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새롭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심리 묘사가 특히 섬세하다. 


  하지만 서사 전개에서는 역시 중견 작가인 김재석 작가가 더 노련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서영 작가가 원작의 서사를 그대로 풀어 쓰면서 설공찬과 설공심, 설공찬은 이런 사람이라고 직접 설명하는 반면, 김재석 작가는 원작에 없는 사건들을 만들어내 설공찬, 설초희 남매의 서사를 엮어나가고 둘의 말과 행동을 통해 둘이 어떤 인물인지 보여준다. 이서영 작가는 살구나무에 내려앉는 공심 혼령의 옷자락에서 살구꽃이 피어나는 모습을 무시무시하면서도 아름다운 장면으로 완성하지만, 설공침에게 빙의된 설공찬이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설공침의 아버지 설충수를 농락하는 장면에서의 공포감은 김재석 작가가 더욱 더 스릴 있게 그려낸다. 모든 인물이 표준어를 쓰는『다시 쓰는 설공찬이』와 달리『다시 쓰는 설공찬전』은 순창 토박이 주민의 감수를 받아서 순창 방언을 쓴 정성이 돋보이지만, 설공찬 남매, 설공침은 순창 방언을 쓰는데 주인공들의 부모 세대는 표준어를 쓰고 있어 일관성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부모 세대가 한양에서 살다 온 것도 아니다. 설씨 일가는 몇 대째 순창에서 살아 왔으니 순창 방언을 쓰려면 부모 세대도 쓰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내가 드라마를 만든다면 김재석 작가 버전을 원작으로 하거나 두 작가 버전을 모두 활용하되 이서영 작가 버전에서는 설공침의 내면 부분을 가져올 것이다. 


  관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답게 두 책의 만듦새 모두 투박하다. 문제집만큼 큰 판형에 동화책만큼 여백이 넓고 글씨가 커 소설이라기보다는 동화책 같은 느낌이다. 『다시 쓰는 설공찬전』은 서문에 영어 번역을 병기했는데, 영어 실력이 좋지 않은 나도 서문의 영문 번역이 딱딱한 직역이라고 느껴졌다. 그리고 영문 텍스트에서 단행본 제목은 보통 이탤릭체로 표기하는데 영문 버전에서도 단행본 제목을 중괄호([]) 안에 넣어 영문 텍스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좀 더 경험이 많은 출판사에 맡겨서 세련된 편집과 디자인으로 나왔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고전의 재해석 자체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재해석 작품들이 양적으로도 많이 늘어나고 질적으로도 더 발전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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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 독본 - 〈아Q정전〉부터 〈희망〉까지, 루쉰 소설·산문집
루쉰 지음, 이욱연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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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고향」스포일러 포함


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고향

 

  좋아하는 드라마의 명대사가 루쉰의 이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서부터 이 구절을 좋아했다지금까지도 책상 앞에 써 붙여 놓았을 정도로 좋아하지만 이 구절이 루쉰의 단편 소설 고향속 한 구절이라는 것을 알 뿐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는 몰랐었다십여 년이 지난 지금 고향을 처음으로 읽게 되면서 내가 사랑하는 이 구절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말인지 알게 되었다.


  「고향의 주인공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집을 다른 사람에게 팔게 되었다고향집을 처분하러 20여 년 만에 돌아온 고향은 어린 시절의 정겨운 모습이 아니었다활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황량하고 쓸쓸했다기와 사이에는 풀이 돋아나 있을 정도로 고향집은 낡아버렸고일가친척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조카만 남아 있다어린 시절 함께 놀던 친구는 흉년과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며 겉늙어 예전의 생기를 모두 잃어버렸다위의 구절은 주인공이 어머니조카와 타향으로 떠나는 배에서 희망에 대해 생각하다 하는 말로이 소설의 마지막 구절이다.

 

  이렇게 결코 희망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주인공은 어떻게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주인공은 조카를 비롯한 미래 세대들에게서 희망을 본다자신과 고향 친구는 성인이 되어 재회했을 때 계급 차이(주인공은 지주의 아들이고 친구는 소작농의 아들이다)로 거리감을 느끼게 되었지만아직 어리고 순수한 조카와 친구의 아들은 계급 차이는 신경 쓰지 않고 스스럼없이 서로를 대한다주인공은 그 아이들이 자신과 친구가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살기를 바란다고향의 주인공처럼 루쉰은 지금 세대보다 미래의 세대가지금의 세상보다 미래의 세상이 더 발전하고 진화하기를 바랐다.

 

  그는 중국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역사가 노예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한 시대와 노예가 되어 잠시 안정적으로 살았던 시대가 교차해 온 역사였을 뿐이라고 말한다이민족 정복자나 권력자가 사람들을 노예로도 삼지 않고 개나 소를 죽이듯이 쉽게 죽였던 시대와노예가 되어 착취당하더라도 그나마 목숨은 부지했던 시대루쉰은 권력자와 부자들을 위해 힘없는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이 희생되어 왔던 중국의 역사를 인육의 잔치라고까지 한다그의 또 다른 단편 소설 광인일기에서 피해망상증에 걸린 주인공은 주변 사람들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생각하고 공포에 사로잡히는데그저 정신병자의 망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일말의 진실이 들어 있다실제로 인육을 먹는 것은 아니라 해도 사람이 자신을 위해 동족을 해치는 세상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왔으니.


  「광인일기의 주인공이 미쳐 있는 동안 쓴 일기는 식인해 보지 않은 아이가 혹시 아직도 있을까아이들을 구하라는 구절로 끝난다루쉰은 아무도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새로운 시대를 꿈꾸었고그 시대를 만드는 것이 청년들의 사명이라고 말한다그는 청년들이 인육의 잔치판을 치워버리고 생존하고 발전하기를 바란다자신이 길을 안다고 그럴 듯한 간판만 내세우는 자칭 지도자들을 따르기보다는친구들을 찾고 그들과 단결해 생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함께 나아가는 것이 낫다고 말한다근대 이전의 낡은 관습과 근대의 새로운 사상이 서로 충돌하고외세의 간섭과 침략이 계속되는 혼란스러운 당시의 중국 사회에서그는 자신조차 어떤 길을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털어놓으며 청년들 스스로 길을 찾아가기를 바랐다.


  100여 년 전 중국 작가 루쉰이 동포들에게 외쳤던 이 이야기들이 왜 시간과 국경을 뛰어넘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생생하게 다가오는 걸까죽임당하거나 노예가 되어 착취당해 왔던 식인의 역사는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는 역사이기 때문이다지금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을의 위치에서 착취당하거나 을이 될 기회조차 없어 내일의 생계를 걱정한다수많은 사람들이 청년들의 멘토를 자처하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공허한 소리만 늘어놓거나 근거 없이 희망을 이야기할 뿐이다오히려 자신은 누군가에게 길을 가르쳐주고 이끌어줄 입장이 못 된다고 말하는 루쉰이 더 믿음직스럽게 느껴진다그저 다 잘 될 거라는 말보다희망이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닐지 의심하면서도 끝까지 절망과 싸우려 했던 루쉰의 절박함이 더 와 닿는다.

 

  루쉰이 끝까지 놓지 못한 희망은 이루어졌을까그가 자신이 살던 시대의 어두움을 뚫고 희망을 보려던 그때로부터 100여 년 뒤의 미래 세상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루쉰이 살던 세상보다 나아졌을까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세상은 지금도 계속되니 어떤 면에서는 정체되어 있고그의 조국에서는 이제 그처럼 쓴소리를 하는 사람은 발을 붙일 수 없으니 어떤 면에서는 더 후퇴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을 더 발전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자기 자신조차 냉정하게 평가하는 그의 비판 정신은 숫돌처럼 우리의 정신을 날카롭게 만든다헛된 희망이 사람들을 더 고통스럽게 할까 경계하면서도청년들이 자신이 겪었던 공허함과 적막함을 다시 느끼지 않도록 위로하려는 그의 따뜻한 마음은 100여 년 뒤의 우리에게도 와 닿는다희망이 있다고 섣불리 낙관하지도없다고 섣불리 비관하지도 않고 다른 이들과 손을 잡고 함께 희망을 만들어 가길 바랐던 마음고향의 마지막 구절을 늘 보면서도 알지 못했던 그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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