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풀 젠더
아이리스 고틀립 지음, 노지양 옮김 / 까치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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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배우면서 변화할 수 있다교회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동성애는 옳지 않은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내가 변하게 된 계기는대학교 교양 수업에서 동성애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교수님의 질문이었다내가 반대하는 쪽에 손을 들자교수님은 왜 반대하느냐고 물었다내 대답은 동성 친구 간의 감정이 우정인지 사랑인지 혼란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였다내가 말해놓고도 스스로 너무 터무니없는 답이라고 느꼈다그때 나는 내가 교회에서 동성애와 성소수자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그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을 뿐정작 동성애와 성소수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때부터 동성애와 성소수자에 대한 책들을 읽으며 공부하기 시작했다동성애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성소수자와 관련된 용어 하나도 좀 더 신중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되었다.

 

뷰티풀 젠더는 그렇게 사람들이 배우고 변화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책이다이 책은 다양한 젠더(사회적 성별정신적 성별)에 속하는 사람들의 관점과 그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제그에 관한 쟁점그 밖의 다양한 젠더 관련 지식들을 최대한 많이 담으려고 노력한 책이다저자 자신이 여성에서 남성(본인의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소년’)으로 젠더를 전환한 트랜스젠더이기에한 사람의 트랜스젠더로서의 개인적인 경험도 기록하고 있다이렇게 젠더와 관련해 최대한 다양한 목소리다양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젠더를 아무 편견 없이 탐사하고타인의 젠더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고 느꼈다나름대로 젠더에 대해서 공부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젠더 관련 용어들과 개념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한국인인 나로서는 체감하기 어려운 젠더 관련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한국도 점점 다인종 사회로 변화해 가고 있지만건국 초기부터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이민자들이 모여들었던 미국에서는 인종에서나 성적 지향에서나 소수자가 되는 사람들의 역사가 오래되었다이렇게 한 사람 안의 다양한 요소들이 교차하며 그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을 교차성이라고 하는데미국에서 흑인라틴계 등 백인 이외의 인종들은 젠더와 성적 지향뿐만 아니라 인종이나 경제적 상황에 따른 지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몇 겹의 차별을 겪게 된다우리는 아직 크게 체감하고 있지 못하지만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고민해 온 문제다대명사 문제도 한국에서 체감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이다영어를 비롯한 서구의 언어들과 달리 한국어는 대명사의 성 구분이 거의 없다여성을 지칭하는 대명사 그녀는 보통 글이나 노래 가사에서 주로 쓰이고 실생활에서는 그 애나 그 사람’, ‘그분’ 등 성 구분이 없는 호칭과 대명사를 사용한다대명사 문제에 있어 우리는 젠더 중립적이기 더 쉽지만젠더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언어에서의 이런 이점은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이렇게 이 책은 지금 당장 우리가 체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에게도 언젠가 다가올 젠더 관련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그러니 배워야 할 것은 아직도 너무 많다.


『뷰티풀 젠더』 속 텍스트의 내용을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저자의 일러스트들(한국어판의 이미지를 찾기 쉽지 않아 원서 이미지를 올렸는데, 텍스트가 한국어로 바뀐 것만 빼면 원서의 내지 디자인, 이미지와 같다.)


젠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더 직관적으로 와 닿게 하는 것은 저자의 일러스트다저자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재능을 활용해 풍부하고 다채로운 일러스트들로 텍스트 설명을 뒷받침한다일러스트에서 좀 더 나아가 인포그래픽(정보데이터지식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을 활용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간결한 선과 선명한 색감의 일러스트들은 복잡하고 다양한 젠더 이야기를 더 쉽고 명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텍스트만 나열되었을 때의 딱딱함과 지루함도 덜어준다이런 일러스트가 이 책만의 개성을 만들어준다.


이 책의 마지막 장저자 자신이 유방 절제 수술을 받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털어놓는 이야기는 성소수자 당사자의 목소리를 전해준다유방을 절제한 자신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과 그때 자신이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을 드러낼 수 있는 그녀(저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소년으로 정의하지만 자신을 가리키는 대명사는 그녀로 쓰고 있다고 밝혔다)의 용기에자신의 젠더를 놓고 고민하고 쉽지 않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된다이런 당사자성 또한 젠더를 다루는 책으로서의 큰 장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읽고 나서도 나는 저자와 나와 다른 젠더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젠더를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는 개념이 머리로는 이해되는데 마음속으로 아직 완전히 납득되지는 않고성 중립적 화장실에 대해 여성들이 갖는 두려움도 간과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저자는 말한다젠더를 배우는 과정은 끝나지 않고틀려도 괜찮다고하지만 배우려는 의지가 없는 것은 괜찮지 않다고이 책은 이렇게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모르던 것을 알아가고 배워가도록 격려하고어떻게 배우고 행동하면 좋을지 조언하고 제안한다그럼으로써 이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를 100퍼센트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는 데 작은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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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식의 언어 - 국어학자가 차려낸 밥상 인문학 음식의 언어
한성우 지음 / 어크로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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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음식을 가리키는 말들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음식 자체와 음식을 둘러싼 사람들의 생활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중간중간에 저자 자신의 경험들을 이야기하며 우리 음식의 언어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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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의 집
사샤 나스피니 지음, 최정윤 옮김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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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숨은 글에 이 작품과 『백 년 동안의 고독』스포일러 포함, 모바일 버전과 앱에서는 숨은 글 기능이 포함되지 않으니 스포일러를 피하시려면 스포일러 표시 부분 아래를 읽지 않으시면 됩니다.


  입구는 있어도 출구는 없는, 고요하면서도 뭔지 모를 불안이 느껴지는 외딴 마을 레 카세. 이곳을 배경으로 배신, 도피, 실종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소개 글을 보고 알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는 섬뜩한 이야기를 기대했다. "이 마을이 괴물이라는 생각이 마음에 드네. 그런데 마을이 주민들을 잡아먹는다고?" 뒤 표지에 적힌 이 대사를 보고 그런 기대가 더 커졌고. 불길한 분위기가 감도는 폐쇄적인 마을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를 다룬 고딕 소설(중세의 고딕 양식으로 된 저택을 배경으로 유령, 살인 등 기괴한 사건이 벌어지는 소설을 뜻했지만, 오늘날에는 그 뜻의 범위가 넓어져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거나 인간의 이상 심리 상태를 다룬 소설까지 포함하게 되었다.)이거나, 『백 년 동안의 고독』처럼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상처럼 일어나는 마을을 그린 마술적 리얼리즘 소설일 줄 알았다. 


 예상과 달리 비현실적인 일은 이 소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청각장애인이 번개를 맞고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을 제외하면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뿐이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괴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마을 밑바닥에 사람들의 온갖 욕망과 악한 마음이 고여 있는 듯한 분위기 때문이다. 두세 사람을 제외하면 소설에 등장하는 마을 레 카세의 사람들은 모두 추잡하다. 불륜은 예삿일이고 마을 어딘가에서 살인, 감금, 중상모략, 배신, 도피 행각, 차별과 혐오 등 온갖 추악한 일이 일어나는데 주민들은 자신들이 멀쩡하고 상식적인 양 행세한다.


  이러한 마을의 진상은 마을 주민들이 한 사람씩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서서히 풀린다.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사람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앞서 이야기한 사람이 보지 못한 그 사람의 뒷이야기가 밝혀지는 식으로. 파이를 한 겹 한 겹 쌓아 올리듯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쌓아 올리며 마을 전체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솜씨가 뛰어나다. 이야기 하나하나도 역겹지만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다. 마을 사람 20여 명의 이야기를 듣고 스무 편쯤의 막장 드라마에 지쳤을 때 나오는 두 이야기는 독자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따뜻한 인류애가 느껴지는 니코데모와 어머니의 이야기와 상류층과 자신의 계급 격차에 씁쓸해 하면서 풋풋한 우정을 경험하는 마르코 팔라체시 박사의 어린 시절 이야기. 이 마을에서 그나마 고결하고 인간미 있다고 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마지막 한 챕터, 사무엘레의 이야기는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모든 것들을 뒤집는다. 그렇게 이야기가 뒤집히지만 작가가 보여주는 것은 한결같다.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표면 아래 인간의 추악함이 숨겨져 있고, 인간들은 자신이 저지른 짓을 숨기면서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어떤 일이라도 저지른다는 것. 그것이 남기는 암울한 그림자는 읽고 나서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스포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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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소설 속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무엘레가 머릿속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이다. 한 마디로 "아 젠장, 꿈이네." 소설 속 이야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복선은 여기저기 있었다. 사무엘레의 연인 클라라가 지적했듯이, 니코데모 템페스티, 아니, 그인 척했던 독일군 패잔병 아미코 프리츠는 세계적인 체스 선수가 되어 얼굴이 널리 알려졌는데도, 그의 옛 연인은 프리츠에게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프리츠나 그의 양어머니와 아무런 접점이 없는 알도 팔라체시는 아미코 프리츠가 군에서 낙오되고 마을 뒷산을 헤맸다는 이야기를 아들에게 들려준다. 아버지의 집착에 질려 가출한 엘레오노라는 오갈 데 없는 자신을 거두어준 보리안이 자신을 구속하려 들자 보리안의 집에서도 나와버린다. 그렇게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엘레오노라가 스스로 사무엘레의 집에 갇혀서 그만을 기다린다. 이런 모순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심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암시를 독자에게 군데군데 남겨둔 것이다.


  실제 레 카세 마을은 사무엘레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만큼 지독한 악의 구렁텅이는 아닐지 모른다. 소설 밖의 우리가 우리만의 어두운 비밀을 감추고 있듯,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마을이 아닐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지는 않으니 아예 허구는 아니겠지만 사무엘레가 생각해낸 만큼 극단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옮겨갈수록 부풀어나고 더 자극적으로 변하지만, 정작 실상은 별 것 아닌 경우가 많으니. 떠나간 부모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마을 아이들에게는 따돌림당했던 사무엘레의 내면의 어두움이 레 카세를 실제보다 더 어둡고 위험한 곳으로 만들지는 않았을까 싶다.


  사무엘레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악행을 직시하지 못하고 회피하듯이, 사무엘레도 자신이 만든 이야기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회피한다. 사무엘레는 연인 클라라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목격하고, 그녀를 해안 절벽에서 밀어서 죽였다. 그 기억을 지우기 위해 엘레오노라라는 존재를 만들어낸다. 현실에도 엘레오노라가 있기는 하지만 사무엘레의 가상현실 속 엘레오노라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다. 현실의 엘레오노라는 사무엘레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혼수상태에 빠진 피해자로, 사무엘레와 어떤 감정적인 교류도 하지 않았다. 가상현실 속 엘레오노라는 실제 연인 클라라처럼 아름답고 사랑스럽지만, 밖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노는 것을 좋아하고 결국 바람까지 핀 클라라와 달리 사무엘레 한 사람만을 바라본다. 아버지와 보리안의 간섭은 견디지 못했으면서 사무엘레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사무엘레의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 그런데다 죽음까지 함께한다. 사무엘레와 엘레오노라의 최후는 언뜻 보면 애틋하지만, 실제 엘레오노라의 의지와 감정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사무엘레만의 환상이다.


  작가는 결국 자신이 현실이라고 믿는 가상현실을 선택한 사무엘레를 동정하고 그의 최후를 애틋하게 그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두운 과거가 있고 연인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해서 그 연인의 목숨을 빼앗는 게 정당화되는 것도 아니다. 사무엘레가 무엇보다 진짜라고 느끼는 엘레오노라도 그의 입맛대로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다. 매일 수많은 여성들이 연인이나 남편의 손에 죽는 현실을 생각하면 사무엘레의 환상이 마냥 애틋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사무엘레가 자신이 클라라를 죽인 것을 깨닫고도 전혀 후회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엘레오노라와의 행복한 사랑이라는 가상으로 뛰어들었으니 더더욱. 나는 사무엘레를 동정하지 않고, 그와 마지막으로 함께한 것은 허상일 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무엘레에게 따뜻한 결말(현실적으로는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사무엘레 자신에게는 행복한 결말)을 준 작가의 선택을 지지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쌓아가는 작가의 솜씨는 훌륭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이야기를 마무리한 방식은 높이 평가할 수 없다. 


P. S. 마을 전체가 비현실적인 천재지변으로 사라지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몰살당하는 결말(『불만의 집』에서는 사무엘레의 머릿속 가상현실에서 일어난 일이지만)은 『백 년 동안의 고독』을 떠올리게 했다. 사무엘레의 머릿속 마을에서 비현실적인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데도 이 소설 특유의 어둡고 기묘한 분위기는 묘하게 마술적 리얼리즘을 떠올리게 한다. 마을 사람 한 명 한 명이 최후를 맞는 모습이 각각의 캐릭터에 맞게 잘 쓰여졌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서사도 잘 구축되어 와서, 어쩌면 레 카세 마을의 이야기가 사무엘레의 머릿속이 아니라 (소설 속에서) 실제인 쪽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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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의 집
사샤 나스피니 지음, 최정윤 옮김 / 민음사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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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릭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겹겹이 쌓아가며 전체 마을의 이야기를 구축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품고 있는 어두움과 추악함이 숨을 막히게 한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없는데도 유령이나 괴물이 나오는 고딕 소설보다 더 소름 끼치게 느껴지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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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정치를 하다 - 우리의 몫을 찾기 위해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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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때 사회 교과서에서 정치의 정의를 처음 봤을 때 의아했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자원을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활동이라니정치는 선거에서 뽑힌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 아닌가뭔가를 나눠주는 게 어떻게 정치가 되는 거지어른이 되고 세상을 알아가면서 깨달았다파이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누구에게얼마만큼 나누느냐가 중요하다는 걸어떻게 파이를 나눌 것인가를 놓고 수많은 갈등이 일어나고 있고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의 입장을 조율해 가는 것이 바로 정치라는 걸그리고 파이가 공평하게 나눠지지 못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고제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으며 그 중 하나가 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는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장영은 작가는 랑시에르가 말한 정치의 정의에 동의하며 정치하는 여성의 범위를 더 넓게 잡았다국회의원이나 장관총리대통령 등 정치 지도자가 되어 나라를 이끌어간 여성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몫 없는 사람의 몫여성의 몫을 찾기 위해 사회적 실천을 했던 여성들로그런 기준으로 선정한 여성 정치인’ 21명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 여성정치를 하다이다.

 

  물론 장관이나 총리 등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 올라몫 없는 사람을 위한 법과 정책을 만들어낸 여성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권력다툼의 한복판인 정계에서 몇 번이고 좌절했다 다시 일어나 권력을 쟁취하고 그 권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는 여성들의 모습은 존경스럽다하지만 높은 자리에 앉지 않고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친 여성들더 넓은 의미에서의 여성 정치인들의 이야기는 정치가 나와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나 자신도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열한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여성 교육을 금지하는 탈레반의 만행을 고발하며 개발도상국의 여자아이들에게 교육받을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싸운 말랄라 유수프자이그림을 통해 노동자들이 겪는 불평등한 현실을 폭로하고 전쟁을 반대한 독일의 화가 케테 콜비츠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강의와 저술을 통해 여성과 노동자흑인 등 미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당하는 사람들을 대변한 헬렌 켈러 등낮은 곳의 여성 정치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한다그녀들은 여성이라는 것이 핸디캡이 되고 루머나 신체적인 위협비협조적인 사회 분위기 등 온갖 어려움이 따라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이들의 용기와 결단행동력은 힘없는 나 하나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절망하고 무기력해진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이들 모두가 생전에 자신이 한 정치의 성과를 본 것은 아니다여성의 참정권을 찾기 위해 평생을 싸워온 영국의 사회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결국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이 참정권을 가질 수 있다는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독일의 정치인 페트라 켈리는 사회의 약자들을 대변하고 생태 친화적인 정치를 추구하는 녹색당을 주요 정치 세력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지만녹색당이 내분에 휩싸이고 자신도 녹색당에서 퇴출된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하지만 저자는 이들을 실패자로 낙인찍지 않고이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실천했고그들이 뿌린 씨앗이 이후에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돌아본다여기에서 이 책에 실린 여성 정치인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과 사려 깊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각 인물을 그렇게 깊이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한 명 한 명의 분량이 열 페이지 남짓인데 책의 판형도 작아 각 인물의 삶과 업적영향은 간략하게 설명된다특히 마거릿 대처의 경우에는 정책적인 면에서 과오도 많은데 그녀의 독선적인 면만 조금 언급된다책에서 소개하는 인물의 단점을 너무 자세히 이야기하면 독자들의 동기 부여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오히려 그 인물의 한계까지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이 그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이 책에 실린 글들이 원래 한정된 신문 지면에 싣는 칼럼이어서 그런지 문장과 문장 사이 몇 문장이 편집된 것처럼 연결이 매끄럽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다이렇게 책의 완성도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지만책에 실린 21명의 여성 정치인의 삶과 정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또한 책의 맨 뒤에는 각 인물의 이야기를 쓰는 데 참고한 책들의 목록이 실려 있어각각의 인물을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들을 또 다른 책들로 이끌어 준다여기에 이 책의 의미와 가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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