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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의 인문학 -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 반비 / 2017년 8월
평점 :
요즘 허리가 아프고 목도 부어서 몸 상태가 왜 이렇게 안 좋을까 곰곰 생각해 봤더니 운동을 게을리한 게 원인인 것 같다. 운동이라고 해봤자 집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돌거나 집에서 요가를 하거나 스트레칭을 하거나 훌라후프를 돌리는 정도인데, 그조차도 날씨가 춥다는 핑계로(집도 춥다) 안 했더니 금세 몸이 안 좋아진 것 같다(어느덧 나도 몸으로 나이 듦을 느끼는 때가 되었구나ㅠㅠ).
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은 제목만 보면 걷기의 효능을 알려주며 걷기를 예찬하는 책일 것 같지만(실제로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정확히는 걷기를 통해 철학과 문학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 걷기와 사유, 육체와 정신의 관계를 고찰하고, 나아가 행진, 축제, 혁명 등 걷기의 정치적 의미를 모색하는 책이다.
최근 몇 년 동안 걷기와 인문학 열풍이 거세게 불면서 걷기와 인문학 모두 출판계에서 흔하다면 흔한 주제가 된 감이 없지 않지만, 이 책은 한참 전인 2000년에 처음 출간되었고, 대부분의 인문학 저자(주로 남성)가 남성의 관점에 치우친 서술을 하는 반면 레베카 솔닛은 - '맨스플레인(man+explain)'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답게 - 제인 오스틴, 버지니아 울프, 조르주 상드, 실비아 플라스 등 다수의 여성을 등장시키고 페미니즘에 관한 장(章)을 따로 두는 등 여성의 관점을 비중 있게 반영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여자의 보행은 많은 경우 이동이 아니라 공연으로 해석된다. 그런 해석대로라면 여자들은 보고 싶은 것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걷고, 자기의 경험이 아니라 자기를 보는 남자의 경험을 위해서 걷는 셈이다. (375쪽)
영어에도 여자의 걷기를 성별화하는 표현이 많다. 창녀를 뜻하는 표현으로 길거리를 걷는 사람(streetwalker), 거리의 여자(woman of the streets), 도심의 여자(woman on the town), 공공의 여자(public woman) 등이 있다. 이런 표현에서 여자를 남자로 바꾸면 공인(public man), 유행에 밝은 사람(man about the town), 건달(man of the streets)이 된다. 성에 관한 관습을 깨뜨린 여자를 묘사하는 방황한다(stroll, roam, wander, stray)는 표현은 여자의 여행에 성적인 면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또는 여자가 여행을 떠날 때 여자의 섹슈얼리티는 관습을 위반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375쪽)
온갖 충고들이 쏟아졌다. 밤에 밖에 나가지 마라, 헐렁한 옷을 입어라, 모자를 쓰든지 머리를 짧게 잘라라, 남자처럼 하고 다녀라, 비싼 동네로 이사를 가라, 택시를 타라, 자동차를 사라, 혼자 다니지 마라, 에스코트해줄 남자를 구해라. 현대판 그리스 돌벽. 현대판 아시리아 베일. 사회가 나의 자유를 지킬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의 행동과 남자들의 행동을 통제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말하는 충고들이었다.(386쪽)
제14장 '도시의 밤거리: 여자들, 성(性), 공공장소'는 이 책에서 다른 장은 안 읽어도 이 장만은 꼭 읽으라고 권하고 싶을 만큼 좋다. 이른 새벽이나 늦은 밤 혼자서 길을 걸을 때 여성이 느끼는 공포감은 말로 다 할 수 없다. 최근 동네에서 여학생이 길을 걷다가 성폭행을 당했다는 얘기를 들어서 요즘은 더 무섭다. 밤길만 무서운 게 아니다. 벌건 대낮에 노상방뇨하는 남자들은 왜 그리 많은지(며칠 전에도 봤다. 심지어 눈까지 마주쳤다). 골목을 돌 때마다 어떤 광경을 보게 될지 두렵다.
저자는 여성의 공간을 집 안으로 한정하고 집 밖으로 나온 여성은 보호받지 않는 존재, 즉 함부로 범해도 되는 존재로 가정하는 문화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밤늦은 시간에 밖에 있는 여자,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 혼자 다니는 여자는 '강간 당해도 싼 존재'로 치부되고 성폭행을 당해도 귀책사유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회는 모든 여성에게 검은 히잡을 두르는 사회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밖으로 나가서 걸었다. '수컷으로부터 습격당하거나 구타당할 가능성이 있는 암컷이라서' 한탄했던 실비아 플라스를 생각하며, 자유롭고 싶어서 남자 옷을 입고 남장을 한 채 파리의 거리로 나선 조르주 상드를 생각하며 걷고 또 걸었다. 이제 저자가 걸어간 길 위에는 전 세계의 수많은 여성들과 남성들이 있다.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만날 수 없고, 만나지 않으면 연대할 수 없다던 저자의 가르침이 마음에 남는다. 춥다는 핑계로 집 안에만 있지 말고 부지런히 밖으로 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