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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보내지 마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을 데뷔작부터 순서대로 읽기 시작한 지 보름 만에 여섯 권을 읽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단연 <나를 보내지 마>이다.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을 만큼 읽기도 쉬웠다.
주인공은 11년 경력의 간병사 캐시. 그녀는 지금은 폐교가 된 기숙 학교 '헤일셤' 출신으로 이따금 그곳을 추억하며 회상에 젖는다. 캐시의 추억 속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인물은 루스와 토미다. 외부와의 접촉이 일절 차단된 이 학교에서 루스는 시도 때도 없이 사건을 일으키는 트러블 메이커이고, 토미는 그림 실력이 형편없고 이따금 누구도 말릴 수 없을 만큼 화를 내는 탓에 놀림감이 되는 아이다. 캐시와 루스, 토미는 속내를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이고, 얼마 후 루스와 토미가 연인 사이가 되고 나서도 캐시는 이 둘을 거리낌 없이 응원한다.
소설은 이미 어엿한 어른인 캐시가 학창 시절을 추억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헤일셤은 일견 평범한 기숙 학교처럼 보인다. 헤일셤은 미술 교육을 특히 중시하며, 뛰어난 작품은 학교 외부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마담이 가져간다. 학생들은 마담이 자신의 작품을 가져가길 바라며 암묵적인 경쟁을 한다(그림 실력이 형편없는 토미가 전교생의 놀림감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헤일셤은 또한 외부와의 접촉을 일절 차단한다. 일 년에 몇 번, 학교 외부에서 가져온 물건을 학생들이 구입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뿐이다(이때 캐시가 구입한 카세트테이프의 타이틀이 '나를 보내지 마'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헤일셤이 결코 평범한 기숙학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헤일셤은 학생들 간의 성적인 접촉 내지 성관계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는다. 다만 성관계를 해도 아이를 가질 순 없음을 은밀히 암시한다. 헤일셤은 학생들의 흡연을 강력히 제지한다. 흡연에 관한 이미지, 흡연이라는 말 자체도 삼갈 정도인데, 이는 헤일셤 학생들의 '정체'와 관련이 있다. 헤일셤 학생 전원은 인간의 장기 이식을 위해 복제된 존재이며, 기증자에게 장기를 이식하기 전까지 흡연 등을 일절 삼가며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관리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캐시가 헤일셤에서 자신이 장기 기증용 클론임을 은연중에 알게 되는 과정과 헤일셤 졸업 후 간병사로 일하며 장기 기증용 클론으로서의 삶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캐시는 헤일셤을 졸업하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헤일셤에서 겪었던 일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를 알게 된다. 어째서 학생들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창조성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했는지, 학생들이 그린 그림을 보며 교사들이 눈물지었는지, 학생들의 정체를 알려준 교사가 학교를 떠나야 했는지 캐시는 알게 되고 허탈해 한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나를 보내지 마>의 주인공 캐시 역시 과거에 겪었던 일들의 실체를 알게 되고 나서 현재나 미래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 간병사로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에 집중하고, 장기 기증용 클론으로서 제 역할을 다 하는 데에 충실할 뿐이다. 작가는 장기 기증을 위한 '도구'로서 태어나는 이들을 불쌍하다 단정 짓지 않고, 가까운 미래에 실제로 벌어질 만한 일이라고 경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밖에 있는 내가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건, 나 또한 인류의 존속이라는 거대한 계획 안에서 쓰다가 곧 버려질 도구임을 본능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