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급 한국어 오늘의 젊은 작가 30
문지혁 지음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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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에 출간된 문지혁 작가의 장편 소설 <중급 한국어>의 전편이다. 나는 이 책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가 <중급 한국어>가 나왔을 때 <초급 한국어>도 있다는 걸 알고 뒤늦게 사서 읽었다. 작가 스스로 자전적 소설이라고 밝힌 데다가 주인공 이름부터 문지혁인데, 그렇다고 해서 에세이 느낌은 전혀 아니고 제대로 소설이다. 

주인공 문지혁은 외고-명문대 영문과 졸업 후 미국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학위를 받고 뉴욕의 한 대학교에서 한국어 강사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지혁은 소설가가 자신의 본업이고 한국어 강사는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한국어 강사 일을 해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구개음화 같은 한국어 발음 규칙부터 '한 시 일 분'은 왜 '한(우리말) 시 일(한자) 분'인지, '삼촌이 좋아'와 '삼촌은 좋아'가 왜 다른지 등 한국인도 설명하기 힘든 한국어의 기초를 외국인이 알기 쉽게, 심지어 외국어로 설명하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혁은 열심히 수업에 매진하는 한편, 이방인이자 비정규직 노동자로서 불안하고 위태로운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의식한다. 심지어 지혁은 오래 사귄 애인과 헤어진 직후이고,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의 간병을 여동생에게 맡긴 상태다. 기왕 외국에 왔으니 뭐라도 되어서 귀국하고 싶은 욕망과 무엇도 되지 못할 것 같은 불안 사이에서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무엇 하나 겪어본 적 없는 상황인데도 몰입이 잘 되었고, 얼른 <중급 한국어>를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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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요시노 겐자부로 지음, 김욱 옮김 / 양철북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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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선 얼마 전 공개되었고 한국에선 연말 공개 예정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애니메이션 영화의 원작이 이 책이라고 해서 서둘러 구입해 읽어봤다. 원작이기는 해도 내용은 크게 상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영화를 안 봐서 얼마나 상관 없는지 모르겠다. 다만 1937년에 출간된 청소년 교육용 소설이다 보니 성인 독자가 읽기에는 내용이 상당히 계몽적이고 교훈적이고, 심심하고 평이하게 느껴질 수 있다. 


소설의 내용은 대략적으로 말해서 '코페르'라는 소년의 성장기다. 열다섯 살, 중학교 2학년인 코페르는 비록 아버지가 안 계시지만 자애로운 어머니와 박식한 외삼촌의 보살핌을 받으며 잘 지내고 있다. 본명은 혼다 준이치이고, 코페르는 외삼촌이 '코페르니쿠스'에서 앞의 세 글자를 따서 지어준 별명이다. 코페르는 고민이 있거나 궁금한 것이 있을 때마다 외삼촌에게 질문한다. 


질문의 내용은 (그 나이 또래 남자아이답게) 대체로 학교 생활이나 교우 관계 등에 관한 건데, 이에 대한 외삼촌의 답변이 상당히 성실하고 진지하다. 나이가 한참 어린 손아랫사람의 고민이라고 해서 무시하거나 비하하는 느낌 없이, 바람직한 어른의 자세를 보여준다. 코페르 또한 외삼촌의 답변을 (꼰대질로 여기지 않고) 성실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 자기 자신을 교정한다. 요즘은 이런 식의 멘토-멘티 관계를 보기가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기도 했다. 


소설의 배경이 중일 전쟁이 발발한 1937년이다 보니, 읽는 동안 '이렇게 착한 코페르와 친구들이 곧 태평양 전쟁에 끌려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안 좋았다. 실제로 이 책은 태평양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금서로 지정되었는데, 이는 태평양전쟁이 얼마나 반사회, 반인권적인 행위였는지를 방증한다. 이런 의미를 가진 작품을 발굴하고 선택한 미야자키 감독의 안목도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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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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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문학은 서양 문학에서 결코 짧지 않은 역사와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나는 최근에야 윌리엄 트레버와 애나 번스의 작품을 통해 부분적으로 접했다. 그동안 이들의 작품을 읽으며 느낀 건,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이 대체로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점이었는데, 아마도 이는 작품의 배경인 아일랜드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암울한 역사와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에 반해 클레어 키건의 소설 <맡겨진 소녀>는 아일랜드의 현대사가 자국의 문학 작품에 드리우는 그림자의 농도가 상대적으로 옅은 편이다. 1981년 북아일랜드 분쟁 당시 북아일랜드 감옥에 수감 중이던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이 벌인 단식 투쟁이 직접 언급된 것을 제외하면, 소설의 시대상은 인물들의 대화나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암시될 뿐이다. 가난한 부부가 형편에 맞지 않게 아이를 많이 가지는 모습을 통해 피임과 낙태를 하지 않는 가톨릭 문화권임을 보여주고, 도박과 음주를 일삼는 남자들과 남의 사생활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여자들의 모습을 통해 사회적 분위기가 절제나 예의와 거리가 멀다는 걸 알 수 있는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을 읽고 그동안 읽은 모든 소설의 결말 중 가장 강력하고 공포스럽다고 느꼈다. 1998년 북아일랜드 평화협상 이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종식된 북아일랜드 분쟁과 달리, 충분한 안정과 평안을 제공했던 위탁 가정을 떠나 원가족이 사는 집으로 돌아온 주인공 소녀가 앞으로 겪게 될 정신적 불안과 혼란(어쩌면 육체적, 성적 학대와 폭력도)이 충분히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아빠 차를 타고 킨셀라 부부의 집으로 향하며 소녀가 상상했던 것처럼,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소녀에게 집안일 또는 농장일을 시키고, 구박이나 학대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화와 장면들을 보면서 소녀의 부모야말로 문제라는 걸 알았다. 이들은 다섯 남매를 양육할 만한 경제적 여유도 없으면서 줄줄이 애를 낳고, 취학 연령도 되지 않은 어린 딸을 잘 모르는 부부에게 맡길 만큼 무책임하다. 특히 아빠는 자식 앞에서 거짓말을 하고, 자식을 맡기는 상대에게조차 무례하게 행동하고, 자식을 두고 가면서 짐도 챙겨주지 않을 만큼 무신경하다. 반면 킨셀라 부부는 낯선 아이가 자기 집 침대에 실례를 해도 질책하지 않고 오히려 민망하지 않게 넘어가 주고, 소녀가 부탁하기도 전에 필요한 옷이나 책, 간식 등을 넉넉히 사준다. (누가 죄인인가, 아니고 누가 부모인가!) 


소녀가 킨셀라 부부의 배려와 친절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것을 봐도 소녀가 부모로부터 어떤 양육을 받았을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소녀는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진 후 한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이 편안함이 끝나기를 - 축축한 침대에서 잠을 깨거나 무슨 실수를,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거나 뭔가를 깨뜨리기를"(45쪽) 바랐다. 자신이 (집에서와 다르게) 이토록 편안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서다. 


시간이 흐르고 킨셀라 부부와의 이별을 앞두고 이유식을 먹는 송아지를 구경하던 소녀는 생각한다. "참 이상하다. 엄마 소의 우유를 짜서 내다 팔기 위해서 젖소에게서 송아지를 떼어내 우유 대신 다른 걸 먹인다니. 하지만 송아지는 만족스러워 보인다."(82쪽) 아마도 소녀는 엄마 소의 젖이 아닌 이유식을 먹어도 만족하는 송아지의 모습에서 부모, 형제와 함께 있지 못하고 남의 집에 맡겨진 자신의 신세를 겹쳐보는 한편,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지만 죄책감 때문에 납득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그래서 자신의 감정으로 발화하지 않고 송아지의 감정으로 투사하는) 상태였던 것 아닐까.


잠시나마 소녀에게 친부모보다 더 좋은 양육 환경을 제공했던 킨셀라 부부에게도 약점은 있다. 소녀가 집에 온 첫날 "이 집에 비밀은 없다."라고 단호하게 가르친 것과 달리, 소녀에게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킨셀라 부부의 비밀을 알고 나서 소녀는 배신감을 느끼고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량한 아저씨와 아주머니에게 그토록 끔찍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동안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자신을 정성스럽게 돌보면서도 때때로 슬픈 표정을 지었던 이유를 알게 된다. 어떤 비밀은 감당하기 힘든 진실과 선의 또는 순진을 가장한 타인의 악의 또는 무지로부터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생겨나기도 한다는 걸 어렴풋이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킨셀라 부부는 폭력이 난무하고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불합리한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다. 소녀는 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세상에는 이런 어른들도, 이런 삶도 있다는 걸 배운다. 킨셀라 부부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소녀가 이후 킨셀라 부부 같은 어른으로 자랐는지 아니면 자신의 부모와 같은 어른으로 자랐는지는 소설에 나오지 않고 알 길도 없다. 하지만 아빠가 지팡이를 들고 쫓아올 때 킨셀라 아저씨는 자신을 안아주고 킨셀라 아주머니는 자신을 위해 울어주었다는 사실만은 오랫동안 기억하지 않았을까. 그 기억이 소녀를 좋은 어른으로 자라게 했을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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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를 끄고 씁니다 - 가족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의 특별한 삶
양영희 지음, 인예니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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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가족의 나라>, <수프와 이데올로기> 등을 만든 재일 코리안 2세 영화감독 양영희의 산문집이다. 저자의 삶에 대해 언제 어디서 처음 들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받은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저자는 1964년 '조선인 부락'이라 불리던 오사카시 이카이노(현 이쿠노구)에서 열렬한 조총련 활동가인 부모의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저자는 오빠들에게 온갖 귀여움을 받는 존재였다. 그런데 저자가 일곱 살 때, 오빠들이 모두 북의 '귀국 사업'에 보내졌다. 갑자기 오빠들과 헤어진 것도 충격이었지만, 조총련계 재일코리안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일본에 사는 평범한 소년, 청년이었던 오빠들이 북으로 간 이후 점점 몸이 마르고 자유를 빼앗겨 불행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조총련 활동가인 아버지와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인 어머니는 아들 셋을 빼앗기고도 북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수 없었다. 그렇게 누구를 원망하고 싶어도 원망할 수 없어서 자기 자신을 원망하는 상태로 여생을 보냈다. 


저자는 자신의 가족의 기구한 사연을 카메라로 기록했다. 처음에는 어쩌다 드물게 북한을 방문하게 되면 오랜만에 보는 오빠들과 오빠들의 가족(특히 조카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서 그들을 만나지 못할 때 부모님과 함께 보려고 찍었다. 그러다 저자가 전문적으로 영화를 배우면서 그동안 찍은 영상들을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몇 편을 만들었다. 저자로서는 분단으로 인한 가족 해체와 북한의 인권 유린 현실 등을 알리기 위한 작업이었지만, <디어 평양> 공개 이후 저자가 북한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를 당해 저자와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다시 만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다. 


이 책에는 '카메라를 끄고' 저자가 이제까지 카메라에 담아온 이야기를 글로 정리한 내용이 실려 있다. 저자가 가족과 민족, 국가 때문에 겪는 물리적, 정신적 어려움을 혈연도 아니고 같은 민족, 국민도 아닌 사람들의 도움과 배려로 극복하는 장면들(방북 전 비자 발급을 도와준 미국의 교수, 영화 촬영에 협조해 준 현 남편 아라이 카오루 씨 등)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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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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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인생>, <형제> 등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중국 작가 위화의 신작 장편 소설이다. 위화의 소설은 대학 시절 <허삼관 매혈기>를 읽은 게 전부인데, 이번에 읽은 <원청>이 <허삼관 매혈기>보다 훨씬 좋았다.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지식이나 독서 경험이나 인생 경험 등등이 현저히 달라서 그렇게 느낀 것 같고, 지금의 내가 <허삼관 매혈기>를 다시 읽으면 어떻게 느낄지 궁금해서 조만간 읽어볼 생각이다. 


린샹푸는 황하 이북에 있는 어느 마을의 제법 잘 사는 집안의 외아들이다. 자애롭고 성실한 부모님 슬하에서 공부도 하고 농사도 짓고 목공도 배우며 성장기를 보낸 린샹푸. 시간이 흘러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린샹푸는 신부가 될 여자를 구한다. 그러던 차에 마을을 지나가던 낯선 두 남녀를 자신의 집에 묵게 하는데, 이튿날 일어나 보니 남자는 떠나고 여자만 남아 있었다. 그 여자, 샤오메이와 사랑에 빠져 약식으로 혼인을 치르고, 그렇게 둘이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 줄 알았으나...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샤오메이는 떠났고, 린샹푸는 열심히 샤오메이를 찾지만 실패한다. 얼마 후 린샹푸의 집으로 돌아온 샤오메이. 그런데 이번에는 배가 부른 상태였고, 몇 달 후 딸을 낳은 샤오메이는 또 다시 린샹푸의 곁을 떠난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딸을 보며 샤오메이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린샹푸는 자기 가문의 집과 땅을 하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약간의 돈만 가진 채 젖먹이 딸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난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만나서 자신의 가문과 부모가 마련해 준 안온하고 풍족한 삶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을 버린 샤오메이를 받아주고, 또 다시 자신을 버린 샤오메이를 찾으러 떠난 건 린샹푸의 선택이고, 그로 인해 삶이 크게 흔들리고 때로는 극심한 가난과 불안, 위험에 노출된 것도 맞지만,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안주했다면 영영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을 만나고 인생에 둘도 없는 따뜻한 추억들을 만든 것도 사실이다. 


샤오메이는 린샹푸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샤오메이는 린샹푸와 다르게 출신 배경이나 성장 환경이 좋지 않아서, 린샹푸와 함께 지냈을 때가 삶에서 몇 안 되는 편안하고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끝내 누구의 아내도 되지 못하고, 어머니로서도 죽기 전까지 죄의식에 시달렸다는 점에서 린샹푸와의 만남이 행운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샤오메이가 악의로 가득 찬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순하고 성실하고 계산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점이 안타까움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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