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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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추천사는 무려 박완서 선생님이 쓰셨는데 그중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작가는 왜 이런 어려운 일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을까." 박완서 선생님도 어렵다고 인정한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수 작가로서는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일. 그것은 '민생단 사건'이다. 민생단 사건은 1932년 동만주에서 벌어진 한인들 간의 대학살이다. 작가 후기에 따르면 김연수 작가는 등단 이전부터 이 사건에 관심이 많았는데, 같은 민족이고 같은 이념과 사상을 가지고 항일 운동에 나선 사람들이 왜 어쩌다 서로 죽이는 참극을 일으키게 되었는지 궁금했다고 한다. 


소설은 고등공업학교 출신의 만철(남만주철도회사) 측량기사 김해연이 용정으로 파견을 오면서 시작된다. 식민지 출신이지만 만철 직원이기 때문에 일본인 버금가는 지위를 누리는 김해연은 일본인 군인 나카지마로부터 사랑을 해보라는 조언을 들은 지 얼마 후 이정희와 사랑에 빠진다. 용정 출신이지만 이화여전에서 음악을 전공한 신여성 이정희에게 첫눈에 반한 김해연은 어떻게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려고 애쓰지만 첫사랑이라서 쉽지 않다. 그런 김해연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지고, 그 후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뀐다. 


소설 자체만 보면 (일본군 앞잡이나 다름없는) 만철 직원에서 항일 운동가로 변신한 김해연이라는 남자의 인생 역정을 그린 작품으로 보인다. 하지만 같은 이념을 공유하던 사람들이 서로 의심하고 끝내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된 과정과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을 떠올리면, 결국 다들 어느 나라 사람, 어떤 사상을 가진 사람이기 이전에 사랑과 질투, 동경과 증오 같은 감정을 느끼는 인간이고, 그러한 인간성(인간의 성질)이 이들의 운명을 결정한 것 아닐까 싶다. 복잡한 역사적 사건을 평범한 개인(들)의 이야기로 풀어낸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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꾿빠이, 이상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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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가 2001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꾿빠이, 이상>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동안 김연수 작가의 작품을 여러 권 읽고, 이상과 이상의 아내 김향안(변동림), 구인회 문인들에 대한 지식을 알게 모르게 쌓아서 그런지 처음 읽었을 때보다는 몰입도 잘 되고 내용도 이해가 잘 되었다. (이래서 위대한 작가들이 소설을 여러 번 재독하라고 하나보다.) 


김연수 작가는 이상의 소설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의 이름 '연'에서 자신의 필명을 따왔을 정도로 이상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의 실린 작가의 말에 등단할 때부터 이상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상의 강렬하고 찬란했던 생애 중에서도 김연수를 사로잡은 것은 임종, 정확히는 임종 직후다. 


1910년생인 이상은 1937년 4월 17일 도쿄대학 부속병원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임종 직후 이상의 가족과 친구 등이 이상의 데드마스크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다. 김연수 작가는 이를 이상의 여동생 김옥희가 "오빠의 데드마스크는 동경대학 부속병원 유학생들이 떠놓은 것을 어떤 친구가 국내로 가져와 어머니께까지 보인 일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어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라고 한 말로 알게 되었다. <꾿빠이, 이상>은 바로 이 데드마스크의 존재 혹은 소재에 관한 논쟁으로 시작된다. 


소설은 총 세 장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장 '데드마스크'에서 출판전문 잡지사의 기자인 김연화는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사라진 이상의 데드마스크를 자신이 가지고 있으며, 이상 탄생 9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 공개할 예정이니 취재를 하러 오라는 서혁수라는 남자의 전화다. 두 번째 장 '잃어버린 꽃'에서 서혁수의 형이자 아마추어 이상 연구자인 서혁민은 이상이 마지막 눈을 감은 도쿄대학 부속병원을 찾아간다. 그곳에서 그는 이상이 남긴 시를 모방해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라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 세 번째 장 '새'에서 재미 교포 출신의 이상 연구자 피터 주는 도쿄대학 부속병원에서 발견된 '오감도 시 제16호 실화'의 진위 여부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다. 


첫 번째 장에서 김연화는 데드마스크뿐 아니라 이상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인물임을 알게 된다. 이상이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평단과 대중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갈렸고, 평론가들 중에도 이상에 대해 '천재'라고 칭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외국 시의 아류', '미친놈의 개수작'이라고 폄하하는 사람도 있었다. 조선총독부 건축기사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가난한 문인의 삶을 택한 것, 본명인 '김해경' 대신 아직도 그 의미와 유래에 대한 해석이 분분한 '이상'이라는 필명을 사용한 것 등도 이상을 따라다니는 아우라 또는 미스터리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상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는 "이상을 믿느냐 안 믿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해 이상을 믿는 사람에게 이상은 작품뿐 아니라 자신의 삶과 죽음까지도 신비화한 불세출의 예술가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단지 이상뿐일까. 객관적 사실이 부재하는 상황일 때 믿음이나 취향, 습관이나 경험, 심지어는 기분이나 느낌 같은 주관적 판단에 의해 대상을 평가하는 일은 허다하다. 그러한 평가를 잘 이용하면 성공하고, 이용하지 못하면 실패하는 것이 예술가의 삶일 테고...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한 남자가 스스로 만든 '이상'이라는 '마스크'로 원했던 관심과 인정을 받았지만 만족하지 못했고, '마스크 아래 인간' 김해경의 삶과 균형을 맞추지도 못해 끝내 죽음으로 향해간 이야기, 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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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들 - 여성은 왜 원하는가
캐럴라인 냅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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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캐럴라인 냅의 마지막 책이다. 예전에 한 번 읽었는데, 몇 달 전 팟캐스트 <정희진의 공부>를 듣다가 정희진 선생님이 이 책을 언급하신 걸 듣고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재구매했다. 그동안 거식증을 비롯한 식이장애에 대한 관심이 늘기도 했고, 소식좌 유행에 대한 이런저런 말을 듣기도 해서 그런지, 전에 이 책을 읽었을 때보다는 훨씬 책이 잘 읽히고 머리에 남는 내용이 많았다. 


이 책의 한국어판 제목은 <욕구들>이지만 원제는 <Appetites>이다. 이 책이 거식증을 비롯한 식이장애에 관한 내용임을 감안할 때 원제가 더 바람직한 듯 보이기도 하지만, 식욕이 곧 성욕, 애착, 인정욕, 명예욕, 만족감 등과 연결된다는 것이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임을 감안하면 한국어판 제목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일단 캐럴라인 냅이 거식증 당사자다. 저자의 키가 162cm인데, 하도 안 먹어서 몸무게가 37kg까지 내려간 적도 있다. 당연히 체력도 떨어지고 생리도 안 했다. 온종일 무기력하고 우울하고 사소한 일에 짜증이 났다. 거식증을 고치려다 술 중독에 빠지기도 했다(이 이야기는 저자의 다른 책 <드링킹>에 썼다). 저자는 2002년 마흔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폐암으로 사망했다. 거식증이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아니겠지만 간접적으로 저자의 건강과 수명에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저자는 자신을 비롯한 많은 여성들이 유독 식이장애에 시달리는 이유를 문화, 사회, 역사적인 차원에서 고찰한다. 식이장애는 여성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남성 중심 사회가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억압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다. 여성도 인간이므로 다양한 크기와 종류의 욕망을 가지는데, 사회는 오로지 남성만 욕망의 주체로 인정하고 여성은 욕망의 대상으로 한정하기 때문에, 여성은 자신의 몸을 관리하거나(가꾸거나) 방기하는(망치는) 방식으로 욕망을 분출하는 것이다. 


식이장애가 여성이 통제욕을 자기 자신의 몸에 발산한 결과라는 사실은, 역으로 여성에게는 자기 자신의 몸밖에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허락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이는 학력이 높거나 낮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여성이라면 보편적으로 겪는 문제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혐오하며, 고치거나 바꾸거나 숨겨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며, 이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각종 문제를 겪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성의 몸은 페미니즘이 가장 덜 건드린 미개척지 중 하나일 수도 있고, 어쩌면 최후의 미개척지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383쪽) 저자는 여성이 태어나고 자라는 가정과 여성이 사회화되는 학교에서 가장 먼저 자기 자신의 몸을 미워하고 괴롭히는 방법을 배운다고 지적한다. 저자 자신이 여학교에 다닐 때는 자유롭게 먹고 편하게 움직였는데, 남녀 공학에 다니면서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했다는 고백이 의미심장하다. 


쌍둥이 언니의 출산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때 처음으로 여성의 몸이 남성을 먹이거나 남성에게 먹히는 대상이 아닌,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하나의 인간을 만들어내는 인류의 기원임을 실감했다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인류의 기원인 여성의 몸을 육성하고 지원하기는커녕 억압하고 통제하니, 출생률이 줄고 인구 절벽이 일어나는 건 당연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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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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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년 넘게 아이돌 팬으로 살았고 주로 남자 아이돌을 덕질했지만 여자 아이돌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S.E.S의 모든 음반을 사모았고, 아직도 핑클의 성유리가 역대 여자아이돌 중에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며, 여자친구, 마마무의 노래는 지금도 즐겨듣고, 아이브, 뉴진스, 르세라핌을 눈여겨보고 있다. 그래서 조우리 작가의 소설 <라스트 러브>가 여자 아이돌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알고 무조건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성 작가가 쓴 여자 아이돌 이야기는 어떨까, 여성 작가가 쓴 남자 아이돌 이야기와는 어떻게 다를까 궁금하기도 했고. 


소설은 데뷔 5년차 여자 아이돌 그룹 '제로캐럿'의 멤버 한 명 한 명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제로캐럿은 5년 전 5인조로 데뷔해 3년 차에 지유와 재키가 탈퇴하고 새 멤버 마린이 들어오는 혼란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꾸준히 인기를 얻으며 안정적으로 활동해왔다. 마침내 데뷔 5년 만에 첫 콘서트를 하게 되어 멤버들 모두 기뻐하는데, 사실 이들에게 이 콘서트는 마지막 콘서트이기도 하다. 다른 멤버들에 비해 많은 나이, 그룹 활동에 대한 의지 저하 등을 이유로 회사가 두 멤버와의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꿈이기도 했고 청춘을 바친 일이기도 한 아이돌 활동의 끝을 기다리는 멤버들의 심경은 복잡하다. 할 수만 있다면 조금만 더 오래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싶은 멤버가 있는가 하면, 자기보다 훨씬 예쁘고 재능 있는 멤버들과의 경쟁에 지친 멤버도 있다. 한 시절을 함께 보낸 멤버들과 곧 헤어진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아픈 멤버가 있는가 하면, 콘서트 직전까지 다른 멤버에 대한 정리되지 않은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멤버도 있다. 아마 실제 아이돌 멤버들 역시 이런 마음을 품고 활동을 하고 있거나 마무리하지 않았을까. 


<라스트 러브>에는 제로캐럿 멤버들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제7의 인물이 있다. 바로 제로캐럿의 팬인 팬픽 작가 '파인캐럿'이다. 이 소설은 제로캐럿 멤버들의 이야기와 파인캐럿의 소설이 교차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작가는 이를 통해 자신의 스타인 아이돌 그룹 멤버들을 보면서 팬이 꾸는 '꿈'과 그가 살아가는 '현실'을 환상적이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팬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묶이지만 그 안에 다양한 인물 유형이 존재함을 보여줌으로써 팬 문화의 빛과 그늘을 동시에 조명하는 점도 이 소설의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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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법한 모든 것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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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 작가의 소설 하면 '좋지만 어렵다'는 인상이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어렵지만 좋다'로 바뀌었다. 특히 앞의 네 편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좋았고, 뒤의 두 편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여러 번 반복해 읽으면서 감상을 다듬어갈 생각이다. 


2022 김유정문학상,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니니코라치우푼타>는 중위 연령이 61세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근미래가 배경이다. CG 작업이 대세인 영화계에서 드물게 아날로그 방식으로 일하는 특수분장사인 딸과 치매로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엄마의 이야기를 그린다. 막연히 상상한 장밋빛 미래와 달리 실제로 도래한 미래는 "재해와 기근과 신종 바이러스의 주기적 출몰이 고착화된 세계에서의 각자도생과, 인류가 더 이상 인류를 이어갈 이유를 찾지 못하면서 그 진행에 가속도가 붙은 초고령 사회"라는 문장이 나오는데, 미래 아니고 현재 같다. 


<노커>는 길에서 신원 미상의 인물에게 어깨빵을 당한 딸 다정이 언어 기능을 상실하자 딸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 민주의 이야기를 그린다. 비슷한 일이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자 정부는 가해자를 찾아서 처벌할 노력을 펼치기는커녕 피해자가 알아서 조심하고 당하면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대응한다. 당연히 이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무나 치고 도망가는 모방 범죄 사건이 늘고, 사람들은 평소에도 겁에 질려 생활하고 피해자가 발생하면 대비하지 못한 그 사람 잘못이라며 탓한다. 이 소설도 허구 아니고 사실 같다. 


표제작 <있을 법한 모든 것>은 플랫폼에 연재될 로맨스 소설을 창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은 소설가 C를 통해 호텔 키퍼, 매점 점원, 가사도우미 등 '섀도 워크(shadow work)'의 다양한 사례와 발생 가능한 문제 상황 등을 보여준다. <에너지를 절약하는 법>은 1980년대 '국민학교(초등학교 x)'를 배경으로 한국의 군사문화와 가부장제, 교육 등이 어떤 식으로 연관되어 있고 그로 인해 어린 소녀들이 어떤 트러블 또는 트라우마를 겪었는지를 예리하게 묘사한다. 가까운 일상에서 다채로운 상상을 펼쳐내는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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