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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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 여러 의미로 대단한 작가다. 이번에 읽은 <푸른 들판을 걷다>를 비롯해 내가 읽은 그의 책이 총 세 권인데(한국에 소개된 책이 세 권이니 당연하다), 세 권 모두 각자 다른 방식으로 나에게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특히 <푸른 들판을 걷다>는 총 일곱 편의 단편이 담겨 있는 소설집이라서,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고 나서 느낀 아쉬움(좋은데 너무 짧다, 더 읽고 싶다)을 덜 느껴서 좋았다. 이 책을 필사하거나 원서로 다시 읽는 독자들이 많다는데 나도 그래 볼까. 영미권 작가의 소설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든 건 처음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작품은 맨 처음에 실린 <작별 선물>이다.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날 채비를 바쁘게 하는 소녀가 있다. 소녀의 엄마와 오빠는 슬픈 기색을 비추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성심성의껏 소녀를 배웅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다정하고 평온한 가정의 이별 장면 같지만, 이들이 숨기고 있는 사연은 다정함이나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다. 클레어 키건은 <맡겨진 소녀>,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가족이나 이웃, 종교 등의 공동체가 공동체로서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공동체의 결속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약자를 착취하거나 약자에게 학대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례를 솜씨 좋게 고발해 왔는데 이 소설도 그렇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소설이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에 사는 평범한(혹은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인데 반해, 무라카미 하루키가 극찬했다는 <물가 가까이>는 미국의 한 부유층 가족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주인공 청년은 폭력적인 (새)아버지와 방관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점에서 <작별 선물>의 주인공 소녀와 처지가 결코 다르지 않다. <작별 선물>의 소녀는 결국 집을 떠나기라도 하지만 <물가 가까이>의 청년은 어떤 선택을 했는지 불분명한 채로 소설이 끝이 났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인 결말도 상상 가능하다. 


(집을) 지키는 남자들과 (집을) 떠나는 여자들이라는 모티프는 이 책에 실린 다른 소설에서도 반복된다. 표제작 <푸른 들판을 걷다>를 비롯해 <검은 말>, <삼림 관리인의 딸>, <굴복>, <퀴큰 나무 숲의 밤> 모두 그렇다. 우리말에서 아내를 '집사람'이라고 일컫기도 하고 영어에서 주부를 'housewife'라고 부르는 것처럼, 보통 집은 여성과 연결되는 데 반해 이 책은 집을 남성과 연결한 점이 흥미롭다. 이때의 집은 '가부장' 할 때의 집[家]인가 싶다. 집으로 상징되는 남성 권력에 대한 저항이 잔잔히(혹은 절절히) 깔려 있는 책이라서 더욱 공감하며 읽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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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에서 전합니다! - 빈민가에서 바라본 혼탁해지는 정치와 사회
브래디 미카코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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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래디 미카코의 책은 재미있다. 저자의 관심 분야인 영국 정치와 복지 제도, 대중 음악(특히 펑크, 록)에는 큰 관심이 없지만 계속해서 읽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이 책도 재미있게 읽었다. 일본어판 원서는 2022년에 나왔는데, 2013년에 발표한 책 <아나키즘 인 더 UK>에 실린 에세이 중 일부와 2015년부터 2022년 사이에 발표한 기사, 칼럼 등을 엮은 것이라서 지금 독자가 읽기에는 다소 옛날 이야기 같은 내용도 많다. 물론 영국의 정치에도 음악에도 문외한이나 다름 없는 나에게는 대부분이 새롭고 신선한 내용이었지만. 


학창 시절 영국의 록 그룹 '섹스 피스톨즈'의 열광적인 팬이었던 저자는 일본과 영국을 오가다 1996년부터 아예 영국에 정착해 살고 있다. 그 때만 해도 영국은 미국만큼은 아니어도 적어도 유럽 안에서는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안정적이며 문화적으로 앞서나가는 이미지가 있었다. 그러나 정권이 교체되고 신자유주의가 확산되고 이민자가 늘어나면서 현재의 영국 사회는 저자가 처음 왔을 때의 영국 사회보다 살기 나쁜 공간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장기간 침체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는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며 문화적으로는 부자들의 생활 양식만 우러르고 가난한 사람들의 현실에는 무관심한 상태로 전락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영국이 보기와는 다르고 예전보다 살기 힘들어졌으니까 오지 마세요' 이런 식의 태도를 견지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실에 굴하지 않고 살아가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게서 계속해서 영국에서 살아갈 힘을 발견하고 희망을 찾는다. 이를테면 기본적인 산수 문제도 풀지 못하는 성인들을 위해 무료로 강의를 하는 동료 R이라든가, 무직이어도 자원 봉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이웃들이 그렇다. 젊고 가난할 때는 좌파였다가 나이 들고 부유해지면 우파로 변하는 사람들도 (전 세계적으로) 많은데, 영국에는 제적으로는 부유층에 속하지만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좌파인 뮤지션, 유명인들이 많은 점도 희망적이다.


영국 사회의 보수화, 우경화 현상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저자의 남편은 아일랜드계 영국인으로, 원래는 런던에서 화이트칼라 계통의 직업에 종사했으나 현재는 블루칼라 계통의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오랫동안 노동당 지지자였던 남편이 (책 속 시점으로) 최근에 보수당도 아니고 극우 정당을 지지하겠다고 해서 저자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자의 옆집에 사는 (저자의 남편과 마찬가지로 블루 칼라 직업에 종사하는) 청년도 극우 정당을 지지한다고 해서 저자는 이게 그저 놀랄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저자의 관찰에 따르면 이들은 직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경쟁하는 상황인데, 외국인 노동자들은 시급이 낮아도 군말 없이 일하는 반면 영국인들은 노조니 뭐니 시끄럽기 때문에 회사는 외국인을 선호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일터에서 밀려날 위기에 놓인 영국인 노동자들은 저임금 고물가를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들어보면 이들은 외국인 자체를 혐오하는 게 아니라 외국인에 밀려 입지가 줄어드는 현실에 절망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비난 받아야 할 대상은 외국인이 아니라 영국에서 돈 벌면서 영국인을 차별하는 회사 아닌가(노동자들이여, 일어나라!).


영국은 여성 인권이 높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저자의 경험상 상류층에 한정된 이야기이고 저자가 속한 하류층 사람들 사이에선 여전히 여성 인권이 낮다는 지적도 인상적이었다. 저자가 사는 동네에만 해도 십 대에 싱글맘이 된 여성이 부지기수이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도 허다하다. 하류층일수록 복지 수당을 노리고 임신 중지 대신 출산을 택하는 경향이 높고, 대체로 그 결과는 남성의 가정 폭력과 여성의 알코올 또는 마약 중독, 아이들의 낮은 삶의 질(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십 대가 되면 부모의 전철을 밟는다)이라는 관찰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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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 - 2024 부커상 인터내셔널 수상작
예니 에르펜베크 지음, 유영미 옮김 / 한길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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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이라고 해서 구입했다. 읽어보니 통일 이전의 동베를린이 배경인 로맨스 소설이다. 그런데 로맨스 소설로 보기에는 주인공인 두 남녀의 나이 차이가 너무 크고, 남자에게는 이미 가정이 있으며, 학대 내지는 폭력으로 보이는 장면도 있다. 이렇게 문제적인 관계를 그린 소설에 부커상 위원회가 그런 큰 상을 준 이유는 뭘까. 내 생각에는 이 소설에 그려진 두 남녀의 가학적-피학적 관계가 통일 이전 동독 사회 내부의 국가-국민(혹은 정부-시민)의 관계를 은유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독일 통일 이전인 1986년 7월 11일. 동베를린에 사는 열아홉 살 소녀 카타리나는 버스에서 우연히 한스라는 남자와 만나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한스의 나이가 카타리나의 부모 뻘인 쉰세 살인 데다가 그에게는 이미 아내도 있고 아들도 있다는 것. 한스와 카타리나는 그러한 것들을 의식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서로에게 빠져 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둘의 사랑은 영원할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카타리나가 일 때문에 다른 도시에서 살게 되면서 두 사람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고, 이런 상황이 불안한 한스는 카타리나에게 점점 더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카타리나는 한스를 안심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카타리나를 유혹하는 것들이 새로운 도시에는 너무나 많고, 결국 한스의 불안을 증폭시킬 만한 사건이 일어나고야 만다. 


줄거리만 보면 흔하디 흔한 치정 소설 같은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이 소설에 묘사된 통일 이전 독일 사회의 모습이 너무나 신기하고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가령 소설 초반에 카타리나가 쾰른에 사는 할머니 집을 방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통일 이전 쾰른은 서독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카타리나가 할머니 집에 가려면 여행 허가서를 받아야 했다. 분단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할머니 집에 가는 데 정부의 허가서가 필요하다는 게 신기하겠지만, 북한에 부모님이 살아계셔도 만날 수가 없는 나라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허가서를 받으면 동독 사람도 서독에 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카타리나가 동독에 비해 모든 것이 풍족하고 훨씬 쾌적한 서독 거리 한 구석에 거지가 있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이런 식으로 소설에 묘사된 통일 전후의 독일 사회의 모습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읽다 보니 카타리나와 한스의 관계도 단순한 불륜, 치정 관계 이상으로 보였다. 이를테면 한스가 카타리나에 대한 의심과 집착이 심해진 나머지 카타리나에게 자백을 강요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일종의 육체적 고문을 가하는 장면 등은 '슈타지'로 불리는 동독 시절의 정보기관이 시민들을 대했던 행태를 연상시킨다. "카타리나는 일 년 뒤에도 한스와 함께하게 될까? 일 년 뒤에도 그녀의 나라가 아직 그녀의 나라일까?" (376쪽) 같은 문장은 카타리나에게 한스가 일종의 나라였고, 두 사람이 헤어지는 결말은 결국 지구 상에서 동독이라는 나라가 사라지고 한때 동독의 시민이었던 사람들은 나라 잃은 사람들이 되었음을 상징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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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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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성폭행 범죄를 저질렀다. 그것도 작년 한 해 동안 두 명이나(각각 다른 그룹. 둘 다 최애 아님). 이런 적이 처음은 아니다. 몇 년 전에 좋아했던 아이돌 그룹의 멤버는 다수의 여성에게 성폭행 범죄를 저질러 형사 처벌을 받았고, 그 밖에도 좋아하는 배우, 작가, 예술가, 정치인 등등이 범죄 또는 스캔들의 가해자로 지목되어 사라지거나 사라지지 않고 여태 남아 활동 중이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남성인데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다시는 남성 연예인, 예술가 등등을 좋아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남성 연예인, 예술가 등등에게 호감을 느끼는 내가 한심하고 부끄럽다. 왜 여성은 남성과 직접 만나거나 사귀는 게 아니라 멀리서 팬질, 덕질을 할 뿐인데도 이런 죄의식 또는 걱정을 느껴야 하는가.


미국 시애틀 출신의 에세이스트, 도서평론가, 기자인 클레어 데더러가 쓴 <괴물들>은 숭배의 대상인 동시에 혐오의 대상이 되는 예술가들을 바라보는 팬의 시선에 대한 책이다. 어려서부터 열렬한 예술 소비자였던 저자는 자신이 열광했던 예술가 또는 창작자 중에 끔찍한 성폭행범, 학대범, 마약 중독자 등이 있는 걸 알고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가령 로만 폴란스키, 마이클 잭슨, 파블로 피카소, 마일스 데이비스,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은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루어낸 위대한 예술가인 동시에 전 세계인이 다 아는 범죄자 또는 스캔들 메이커이기도 하다. 만약 이들이 저지른 범죄를 똑같이 저지른 일반인을 만난다면 우리는 그를 비난하거나 외면할 것이다. 그런데 왜 이들의 예술 작품(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마이클 잭슨의 음악,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 마일스 데이비스의 연주,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은 여전히 소비되고 심지어 찬사를 받을까.


이 책은 숭배의 대상인 동시에 혐오의 대상이 된 예술가들의 목록을 열거하거나 고발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런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을 대하는 복잡한 팬의 마음, 예술 소비자의 심리를 소개한다. 영화 팬인 저자는 로만 폴란스키의 범죄를 싫어할 수는 있어도 그의 영화까지 싫어하기는 힘들다고 고백한다. 나는 로만 폴란스키가 만든 영화를 본 적조차 없기 때문에 저자의 고백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파블로 피카소, 마일스 데이비스,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해서는 그들의 작품을 접한 적은 있지만 팬이 될 정도로 큰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들의 예술이 존재하지 않아도 나의 일상에는 큰 지장이 없을 것 같다.


문제는 마이클 잭슨이다. 나는 오랫동안 마이클 잭슨을 '아동 성추행 혐의가 있는 불세출의 스타'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가 작년에 우연히 유튜브에서 그의 무대 영상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한동안 그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다. 관심이 살짝 식은 후에야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혐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이미 그의 팬이 되어버린 나로서는 혐의는 혐의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만약 혐의의 대상이 마이클 잭슨이 아니라면 - 가령 내가 좋아하지 않는 연예인이라면 - 과연 내가 그렇게 생각할까. 비슷한 예가 쟈니스 엔터테인먼트(현 스타토)이다. 이 회사가 그동안 얼마나 큰 범죄를 일으켰고 은폐해 왔는지는 전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이 회사 소속의 연예인들을 좋아한다. 가해자는 죽은 사장이니까 소속 연예인들은 좋아해도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내가 좋아하지 않는 연예인의 소속사가 비슷한 범죄를 일으켰어도 똑같이 생각했을까.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주로 남성 예술가를 다루지만 여성 예술가를 다룬 부분도 있다. 여성 예술가에 대한 감정도 어려운 문제다. 책에 나오는 사례는 아니지만, 예를 들어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아니 에르노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 사귀었던 실제 경험을 담은 책 <단순한 열정>은 배우자가 있는 남성과 교제하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반도덕적이고, 탈냉전 이전에 적국인 러시아의 남성과 사귀었다는 점에서 반애국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성인 예술가가 자유롭게 자신의 성적인 관심과 경험에 대해 털어놓는 글을 썼다는 점에서 이 책을 높게 평가했는데, 반대로 남성인 예술가가 그런(자유롭게 자신의 성적인 관심과 경험에 대해 털어놓는글을 썼다면 나는 과연 그 책을 좋아했을까. 아마 눈길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식의 구분은 개인적인 선호에 그치지 않는다. 애초에 남성 작가가 자신의 비도덕적이고 반사회적인 경험이나 생각에 대해 쓴 글은 허다한 반면 여성 작가의 그런 글은 드물다. 이 책에 나오는 모성 문제처럼 - 남성은 부성이 없어도 비난 받지 않지만 여성은 모성이 결여되었다는 혐의만 있어도 비난 받는다 - 사회가 여성에게 유독 가혹하다면 일개 독자인 나 정도는 관대하도 괜찮지 않나 싶다.


저자는 이 책에서 숭배의 대상인 동시에 혐오의 대상이 된 예술가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대신해서 결론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어떤 범죄까지는 괜찮고 어떤 범죄는 안 괜찮은지 일률적으로 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억지로 정한다 해도 어차피 개인마다 받아들이는 기준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는 예술 영화의 팬이 아니기 때문에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를 평생 안 봐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문학을 열렬하게 사랑하는 독자로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지 않을 수는 없다. 사실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전혀 호감이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오히려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남성성에 대한 집착과 여성 혐오가 스스로 남성성이 부족하다고 느낀 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명이 인상적이었다. 미시마 유키오와 비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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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운하우스
전지영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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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유의지로 살아간다고 말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것들의 영향을 받는데 그중 하나가 공간이다. 예를 들어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는지에 따라 사용하는 언어와 말투(표준어인지 방언인지)에 차이가 생기고, 같은 지역 안에서도 어느 동네(서울이면 강남인지 강북인지), 어떤 형태의 집(아파트인지 빌라인지) 또는 어떤 평수의 집에서 살았는지 등등에 따라 각자 다른 계급적, 사회적, 문화적 특성을 보일 수 있다.


전지영의 소설집 <타운하우스>에는 공간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여덟 편의 단편이 살려 있다. 맨처음에 실린 <말의 눈>은 학교폭력 피해자인 딸 서아의 회복을 위해 낯선 섬의 타운하우스로 이사한 엄마 수연의 이야기를 그린다. 수연은 서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살면 서아도 자신도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서아가 다니는 학교에서도 비슷한 학교 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서아가 목격자로 지목되면서 점점 불안감을 느낀다. 육지에서 떨어진 섬, 시내로부터 멀리 위치한 타운하우스의 이미지가 수연과 서아 모녀의 고립된 상황과 겹쳐지며 공포감마저 자아낸다.


이어지는 단편 <쥐>는 해군 관사로 사용되는 아파트에 거주하는 윤진의 이야기를 그린다. 윤진은 해군인 남편 몫까지 독박 육아를 하느라 육체적으로 많이 지친 데다가 경력 또한 끊어진 지 오래고, 해군 관사에서 여자들의 관계는 남편들의 계급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에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을 느낀다. 이런 와중에 남편의 부대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남편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고, 관사에 사는 여자들 사이에서 겉도는 존재인 대령의 아내가 윤진에게 아파트에 쥐가 있다고 말한다. 이 소설 또한 독자의 공포감, 불안감을 자아내는 장치로 해군 관사라는 밀폐되고 위계적인 공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점이 인상적이다.


사격장 근처에 사는 부부가 갑작스런 사고로 아들을 잃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이야기를 그린 <난간에 부딪힌 비가 집 안으로 들이쳤지만>, 수산 시장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안과의의 이야기를 그린 <맹점>, 부촌의 한 저택에서 수상한 아르바이트를 하는 여자 손님을 태운 택시 기사의 이야기를 그린 <언캐니밸리>와 같은 동네에서 하숙을 하는 예술고등학교 학생의 이야기를 그린 <소리 소문 없이>, 지역 주민 대부분이 고용되어 있었던 제철소가 문을 닫기 직전의 상황이 배경인 <남은 아이> 또한 공간의 특징이 소설의 내용과 잘 어우러진다고 느꼈다. 


<뼈와 살>만은 등장 인물들이 속해 있는 공간이 아닌 등장 인물이 만드는 공간이 중요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예술가인 '나'는 푸른 실크로 된 아름다운 집 모형을 만들어 상업적으로도 비평적으로도 그럭저럭 성공을 거둔 상태다. '나'의 후배인 이선은 그런 '나'의 작업 스타일을 결코 좋아하지 않으며,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이선에게 은근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 집이라는 공간이 단순한 생활 공간인 걸 넘어 개인의 취향과 욕망 등이 반영된 공간임을 감안할 때 이런 설정은 매우 상징적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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