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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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인생>, <형제> 등으로 한국에도 잘 알려진 중국 작가 위화의 신작 장편 소설이다. 위화의 소설은 대학 시절 <허삼관 매혈기>를 읽은 게 전부인데, 이번에 읽은 <원청>이 <허삼관 매혈기>보다 훨씬 좋았다. (작품의 문제가 아니라) 그 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지식이나 독서 경험이나 인생 경험 등등이 현저히 달라서 그렇게 느낀 것 같고, 지금의 내가 <허삼관 매혈기>를 다시 읽으면 어떻게 느낄지 궁금해서 조만간 읽어볼 생각이다. 


린샹푸는 황하 이북에 있는 어느 마을의 제법 잘 사는 집안의 외아들이다. 자애롭고 성실한 부모님 슬하에서 공부도 하고 농사도 짓고 목공도 배우며 성장기를 보낸 린샹푸. 시간이 흘러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린샹푸는 신부가 될 여자를 구한다. 그러던 차에 마을을 지나가던 낯선 두 남녀를 자신의 집에 묵게 하는데, 이튿날 일어나 보니 남자는 떠나고 여자만 남아 있었다. 그 여자, 샤오메이와 사랑에 빠져 약식으로 혼인을 치르고, 그렇게 둘이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 줄 알았으나...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샤오메이는 떠났고, 린샹푸는 열심히 샤오메이를 찾지만 실패한다. 얼마 후 린샹푸의 집으로 돌아온 샤오메이. 그런데 이번에는 배가 부른 상태였고, 몇 달 후 딸을 낳은 샤오메이는 또 다시 린샹푸의 곁을 떠난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딸을 보며 샤오메이를 찾아야겠다고 결심한 린샹푸는 자기 가문의 집과 땅을 하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약간의 돈만 가진 채 젖먹이 딸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난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린샹푸가 샤오메이를 만나서 자신의 가문과 부모가 마련해 준 안온하고 풍족한 삶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을 버린 샤오메이를 받아주고, 또 다시 자신을 버린 샤오메이를 찾으러 떠난 건 린샹푸의 선택이고, 그로 인해 삶이 크게 흔들리고 때로는 극심한 가난과 불안, 위험에 노출된 것도 맞지만,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안주했다면 영영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을 만나고 인생에 둘도 없는 따뜻한 추억들을 만든 것도 사실이다. 


샤오메이는 린샹푸를 만나지 않았다면 더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샤오메이는 린샹푸와 다르게 출신 배경이나 성장 환경이 좋지 않아서, 린샹푸와 함께 지냈을 때가 삶에서 몇 안 되는 편안하고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끝내 누구의 아내도 되지 못하고, 어머니로서도 죽기 전까지 죄의식에 시달렸다는 점에서 린샹푸와의 만남이 행운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샤오메이가 악의로 가득 찬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순하고 성실하고 계산적이지 않은 사람이라는 점이 안타까움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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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 산책
정용준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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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릉산책>은 <내가 말하고 있잖아>로 알게 된 정용준 작가의 소설집이다. 말더듬증을 가진 소년이 언어치료원에 다니면서 겪는 일을 그린 <내가 말하고 있잖아>를 읽으면서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인물을 묘사하는 태도가 사려 깊고 정중하다고 느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도 비슷하게 느꼈다. 특히 표제작 <선릉 산책>이 그랬다.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지인의 소개로 발달장애 청년 '한두운'을 하루만 돌보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나'는 처음에 발달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당황하지만, 한두운과 한나절 정도를 보내며 소통의 어려움이나 주변 사람들의 시선 정도만 제외하면 한두운도 평범한 청년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나'의 생각은 흔들리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한두운과 헤어진다. 이후 '나'와 한두운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다. 


2021년 김승옥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미스터 심플>도 좋았다.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클래식 기타를 구입한 '나'는 물건을 받기 위해 '미스터 심플'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판매자와 약속을 정하고 심야에 무인 빨래방으로 향한다. 물건을 받고 헤어졌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마침 둘 다 빨랫감이 있었고, 세탁이 완료되기를 기다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미스터 심플이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엉겁결에 그의 글을 봐주기로 한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쓴 글을 아무 대가도 없이 봐준다는 게 마뜩지 않았던 '나'. 하지만 미스터 심플의 글을 읽고 이야기를 듣고 연주를 들으면서, 결국 '나'는 자신이 미스터 심플에게 해준 것 이상의 감동과 위로를 받게 된다. 무심하거나 탐탁지 않게 여긴 타인 또는 사건에서 의외의 통찰을 얻게 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선릉 산책>과 결이 비슷한 이야기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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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에서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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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에서>는 이승우 작가가 <사랑의 생애> 이후 5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초반은 (이승우 작가의 소설답지 않게) 범죄 스릴러 소설 같은 분위기다. 주인공 황선호는 대기업을 그만두고 유력 정치인의 측근이 된다. 선거를 몇 개월 앞둔 시점에 그가 모시는 정치인이 연루된 뇌물 스캔들이 터지고, 스캔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잠적하는 역할을 황선호가 맡게 된다. 


6개월 간 '보보민주공화국(보보)'으로 가게 된 황선호는 이 때만 해도 외국에서 한가롭게 지내다 연락이 오면 귀국해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보보로 간 지 며칠 안 되어 보보 정부가 외부인은 모두 출국하라는 포고령을 내린다. 출국하고 싶어도 본국과 연락이 되기 전까지 출국할 수 없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황선호는 난처한 상황에 놓인다. 자신을 보보로 보낸 사람들은 연락을 받지 않고, 외부인인 그를 보는 사람들의 눈은 점점 더 매서워진다. 


이후 황선호는 과거에도 보보 정부가 이런 식으로 외부인들을 배척하고 추방하려고 했던 전적이 있고,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어디선가 공동체를 이루어 자급자족하며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뜻밖에도 이 공동체는 황선호의 가족 및 출생과도 관련이 있다. 타의에 의해 떠밀리듯 가게 된 낯선 나라에서 자신의 생의 비밀을 알게 된 남자. 이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비슷한 일이 나에게도 생긴다면, 그것은 행운일까 나락일까. 


<이국에서>는 의도하지 않은 여행이 예상하지 못한 만남과 깨우침으로 이어지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이승우 작가의 전작인 <캉탕>과 유사하다. <캉탕>과 다른 점은 주인공이 스스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타의나 압력에 의해 떠나거나 떠나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는 건데, 떠나든 떠나지 않든 자신이 원해서 내린 결정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남을 위해 일하더라도 네가 원하는 일을 해라.")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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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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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집의 제목은 <나주에 대하여>이지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마음'이었다. 그럴 만큼 이 소설집에 나오는 인물들은 인간의 다양한 마음을 보여준다. 동경하는 마음, 걱정하는 마음, 비교하는 마음, 집착하는 마음 등등. 때로는 사랑스럽기도 하지만 때로는 짠하고 때로는 징그럽고 극악하게도 느껴지는 다양한 마음들을 섬세하고도 예리하게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가 탁월하다고 느꼈다. 


어쩌면 마음이야 말로 인간을 인간 아닌 존재들과 구별하는 요소다. 인간은 A라는 변수 때문에 B라는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A라는 변수 때문에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어서 B라는 선택을 하는 존재 아닌가. 예를 들면 많은 사람들이 실연을 하지만, 실연한 사람들 모두가 헤어진 연인의 새로운 연인을 스토킹하는 건 아니다. 실연에서 스토킹으로 이어지는 사이에 개입된 마음. 그러한 마음에 대해 쓸 때 '이상하게 행복하다'는 작가의 다음 소설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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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탑의 살인
치넨 미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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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소설은 크게 본격 미스터리와 사회파 미스터리로 나뉜다고 알고 있다. 이 중에 나는 사회파 미스터리를 좋아하는데(마츠모토 세이초, 미야베 미유키 등), 치넨 미키토의 <유리탑의 살인>은 본격 미스터리 소설로서는 드물게 재미있다고 느낀 작품이다. (괜히 2022년 서점대상 후보작, 15만 부 넘게 팔린 화제의 베스트셀러가 아니다.) 


이 소설은 구성부터 특이하다. 프롤로그에 이치조 유마가 범인이라고 나와 있어서, 나는 처음에 이 소설이 범인의 시점으로 범행 과정을 설명하는 구성을 취하는 줄 알았다. 이어지는 본편에서 눈보라치는 산 속에 유리탑 모양의 고립된 저택이 있고, 이곳에 명탐정, 추리소설 작가, 잡지 편집장, 영능력자 등 개성 강한 손님들이 모이고, 이들을 모은 저택의 주인이 (프롤로그에 적힌 대로) 이치조 유마에 의해 살해되는 장면을 볼 때에도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튿날 또 다른 인물이 살해된 채 발견되고, 또 이튿날 또 다른 인물이 살해된 채 발견되는 것을 보면서, 이치조 유마 외에 또 다른 범인을 찾는 것이 작가가 부여한 독자의 할 일임을 알았고, 문제의 또 다른 범인을 찾은 후에도 소설이 계속 이어지고 또 다른 트릭이 있음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 작가 보통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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