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시성이라고 불리는 두보의 시 중 한 구절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춘망'이라는 시의 첫구절.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 나라는 망했어도 산하는 존재한다 정도로 해석되는 말. 국가의 흥망성쇠와는 상관없이 자연은 그대로 존재한다는 말로 이해하면 될 듯하고, 이 시와 더불어 야은 길재의 시조도 연결이 되는데...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여기서 두 번째 중장의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는 구절이 두보의 국파산하재와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순간적인 삶을 살고, 인간이 만든 나라도 영원하지 않고 생명이 있는데, 자연은 그와 반대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말일텐데...

 

인천 아시안게임과 또 다른 뉴스 방송을 보다가 너무도 놀란 것이 강인데, 그 강이 직선으로 아주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이었다.

 

강이 직선이라?

 

강은 곡선이어야 하지 않나? 이 때 곡선이 강이 유연하게 휘게 정비하라는 말이 아니라, 강 가의 곳곳이 드나듦이 있어서 온갖 생명체들이 그곳에 머물 수 있어야 하는데...그렇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정비된 강에서 어떤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 생명체가 살지 못하는 강이 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또 4대강은 녹조로 녹조라떼라는 별명까지 얻었다는데...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영원해야 하는데, 우리는 거꾸로 나라는 멀쩡한데 산하를 망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만히 내버려 두면 더 좋을 산하를 인위적인 힘으로 변형시키려 해서 결국 산하를 망가뜨리고 있으니, 산천도 망하고 인걸도 없는 그런 상태로 변하지 않았나 싶다.

 

천혜의 자연이라는, 금수강산이라는 우리나라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강은 인공적인 냄새가 너무 풀풀 나고, 푸른 산들은 하나둘 깎여나가 이제는 고층빌딩들이 숲을 대신하고 있으며, 자연스레 만들어졌던 길들이 온갖 인공적인 도로로 덮여버린 세상.

 

산하를 이렇게 파괴하고도 어떻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

 

아름다운 옛시절이라고 하던데...비록 가난했지만 자연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던 시대가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고 하지만, 그 댓가가 자연 파괴라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지...

 

심호택의 "하늘밥도둑"이라는 시를 읽고 싶어졌다. 반듯반듯한, 녹색으로 뒤덮힌 강물의 영상에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아름다운 옛날을 노래한...그래서 더욱 현재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그 시집을...

 

두보나 길재의 시가 앞뒤가 바뀐 지금... 다시 바로잡아야지. 순간이 영원을 뒤집으면 안되지. 영원에 맞춰 순간을 살아가야지. 

 

그의 시집에 나온 두 시... 마음이 짠하다.

 

그만큼 행복한 날이

 

그만큼 행복한 날이

다시는 없으니

싸리빗자루 둘러메고

살금살금 잠자리 쫓다가

얼굴이 발갛게 익어 들어오던 날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먹을 것 없던 날

 

심호택. 하늘밥도둑. 창작과비평사, 1996년 초판 7쇄. 8쪽

 

하늘밥도둑

 

망나니가 아닐 수야 없지

날개까지 돋친 놈이

멀쩡한 놈이

공연히 남의 집 곡식줄기나 분지르고 다니니

이름도 어디서 순 건달 이름이다만

괜찮다 요샛날은

밥도둑쯤은 별것도 아니란다

우리들 한 뜨락의 작은 벗이었으니

땅강아지, 만나면 예처럼 불러주련만

너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살아보자고, 우리들 타고난 대로

살아갈 희망은 있다고

그 막막한 아침 모래밭 네가 헤쳐갔듯이

나 또한 긴 한세월을 건너왔다만

너는 왜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 거냐?

하늘밥도둑아 얼굴 좀 보자

세상에 벼라별 도적놈 각종으로 생겨나서

너는 이제 이름도 꺼내지 못하리

나와보면 안단다

부끄러워 말고 나오너라

 

심호택. 하늘밥도둑. 창작과비평사, 1996년 초판 7쇄. 1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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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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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는 그림을 본다고 하지 읽는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옛 그림을 볼 때는 본다는 말보다는 읽는다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

 

이 책에도 나오지만, 김정희가 제자인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주자, 이상적은 그 그림을 읽는다고 표현을 했다.

 

읽는다. 왠지 문자에만 쓰여야 할 것 같은 이 말을 그림에 쓰는 이유가 뭘까?

 

그 점에 대해서 알게 해주는 책이 바로 이 책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다.

 

그림은 우선 보아야 한다. 보아야 읽던지 말던지 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자신의 마음 속으로 끌어들여와야 한다.

 

마음 속으로 끌어들여와 그림과 대화를 하기 시작해야 한다. 책과의 대화는 곧 책읽기고, 그림과의 대화는 그림 읽기라고 보면 된다.

 

대화를 할 때는 상대를 알아야 한다. 또 상대를 배려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알아야 하고, 자신이 어떤 표현을 할지 가늠해야 한다.

 

나만이 아니라, 또 나와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대상이 아니라 나와 대상이 함께 관계맺으면서 무언가를 만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대화다.

 

이런 대화를 그림과 한다면 그것은 훌륭한 읽기다! 그림을 제대로 읽은 것이다.

 

그림을 그린 화가를 읽고, 그림을 그릴 당시의 사회를 읽고, 문화를 읽고, 사상을 읽고, 그림 표현을 읽고, 자신의 시대를 읽고 함께 대화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옛 그림 읽기다.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다.

 

옛 그림을 읽어갈수록 더욱더 풍부해지는 지식, 풍요로워지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옛 그림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짐도 자연스레 느끼게 되고.

 

이 책에는 우리에게 낯익은 그림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소개가 무슨 시험에 나오는 지식 위주의 소개가 아니라, 정말로 옛 그림과 대화를 할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소개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그 그림을 다시 보게 되고, 그림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고, 어느덧 그림이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림을 처음에는 눈으로 보기만 했으나 이제는 그림 너머를 보게 되고, 다시 그림을 보게 되어 그림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단지 그림과만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화가와도 대화를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이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함께 어울리며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이 책에 나온 그림을 순서대로 나열해 본다.

 

김명국의 달마도,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안견의 몽유도원도, 윤두서의 자화상,

김홍도의 주상관매도, 윤두서의 진단타려도, 김정희의 세한도, 김시의 동자견려도, 김홍도의 씨름, 무동, 이인상의 설송도, 정선의 인왕제색도

 

이렇게 총 11편을 읽게 되는데, 11편으로 나누었지만, 김홍도의 씨름과 무동이 한 편에 있으므로, 실질적인 그림은 12편이고, 이 그림들을 읽어가면서 관련되는 그림들이 많이 나오기에 실질적으로 12편의 그림을 중심으로 많은 옛 그림들을 읽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여기에 더해서 책의 뒷부분에 중심이 되는 12편의 그림을 더 크게 실어놓았으니, 책을 다 읽고, 다시 이 그림들을 보면서 그림들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더 좋다.

 

자꾸 보아야 보인다고, 보여야 좋아하게 된다고, 좋아해야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즐길 수 있게 되니, 우리 옛 그림들 자주 보아야 한다. 우선 자주 볼 수 있게 해야 한다.

 

좀 높다고 생각되는 옛 그림을 볼 수 있는 박물관, 미술관들의 문턱이 조금 낮아졌으면 좋겠다. 나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쉽게 자주 볼 수 있게.

 

덧글

 

이 책에 나오는 그림들을 넣고 싶으나 직접 사진을 찍지 못하고 있고, 또 다른 곳에 있는 사진을 끌고오느니, 그냥 제목만 보고 검색해 보면 언제든지 그 이미지는 볼 수 있으니...생략. 모니터의 이미지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훨씬 좋을테니 또 생략.

 

'동자견려도'를 그린 사람 이름을 김시라고 했는데, 학자들마다 이름이 다르다고 함. 어떤 이는 제, 어떤 이는 지, 어떤 이는 시라고 하는데, 김시라고 하는 편이 옳다고ㅡ위창 오세창의 예까지 들어가면서 165쪽에서 주장하고 있음.

 

혹시 김제의 '동자견려도'나 김지의 '동자견려도'라는 말이 나오면 그들이 김시라는 점을 명심하면 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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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하고 놀자 - 독서 프로그램과 축제 기획 매뉴얼북
박형섭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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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책의 계절이다. 각지에서 책 축제를 하기도 한다. 이 책은 그렇게 책 잔치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책에 관심 있는 모든 분을 위한 지침서'라는 글이 책의 겉표지에 실려 있다. 책의 작은제목은 '독서프로그램과 축제 기획 매뉴얼북'이라고 되어 있고.

 

이 작은제목과 어울리게 책과 관련된 행사, 또는 축제를 어떻게 기획할 것인가가 구체적으로 잘 나와 있어서 실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다.

 

전자매체의 발달로 인쇄매체가 쇠퇴해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전자책으로 읽기보다는 종이책으로 읽는 것이 더 익숙하고, 책이라고 하면 손에 들고 한 장 한 장 넘기는 감촉을 느끼는, 오래된 책에서는 특유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책을 멀리하게 된 것이 요즘 현실이고, 책보다는 너무도 흥미로운 것들이 전자매체 속에서 펼쳐지니 사람들이 책과 멀어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가령 만화를 예로 들더라도 웹툰이 지니는 짤막한 전개, 대사가 거의 없는 전개 등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예전 만화의 글이 많은 만화를 잘 읽어내지 못한다.

 

읽는 방식도 변한 것이다. 이런 변화 속에서 책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 무언가가 집 안이나 도서관 안에 있는 책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일일 것이다. 책을 실내라는 공간에 가두어두고 그 곳에서만 책을 만나게 할 것이 아니라, 책이 밖에 나와서 언제 어디서든지 책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일.

 

그런 일을 꾸미는 사람들은 우선 출판사 관계자들일 수도 있고, 도서관의 사서일 수도 있고, 독서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고, 문화적 소양을 높이겠다고 작심한 지방자치단체일 수도 있다.

 

누구든 책이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자주 만나게 된다면 책하고 놀자라는 이 책의 제목에 어울리는 문화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인데...

 

무작정 책을 밖으로 나오게만 했다가는 반대로 책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게 만들 수도 있으니, 책을 밖으로 나오게 하되, 의미있게 하는 작업을 해야 하고, 일회성으로 그치는 행사가 아니라 생활 현장에서 꾸준히 지속되게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에서는 얻을 것이 참 많다. 학교 도서실을 이용해서 책하고 친해지게 하는 행사를 할 수도 있고, 지역 사회와 연계하여 지역에 책이 나오게 하는 행사를 할 수도 있고, 좀더 큰 행사를 기획해-가령 파주 출판단지의 책잔치처럼- 할 수도 있다.

 

어떤 형태로 하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책이 밖으로 나오게 되고,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책을 만나게 될 것이다.

 

책과의 만남이 자주 일어나게 되면 자연스레 책에 흥미를 느끼게 되고, 책을 통해서도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엄청난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독서 프로그램 기획 - 축제를 하세요 -삼인삼색 북토크 라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앞 부분에서는 큰돈을 들이지 않고 쉽게 할 수 있는 독서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고, 축제를 하세요는 이를 확대한 책 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책축제와 관련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봄으로써 책이 바깥에 나오는 과정, 어려움, 필요성 등을 느낄 수 있다.

 

책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읽으면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은 틀림없고, 또 책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에게 책을 읽히고 싶은 부모들도 읽으면 적용할 부분이 많은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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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신비
버트 헬링거 지음, 박이호 옮김 / 고요아침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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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당연한 신비"다.

 

신비란 당연하지 않음에서 오는데, 당연하지 않음을 당연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영혼에 대하여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하는데, 헬링거는 이러한 영혼에 대한 이야기는 영혼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이고, 이것은 우리에게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영혼을 믿으면 행복하다고 했는데, 이 영혼을 정신이라고 하든, 신이라도 하든, 그의 글들을 읽어가다보면 세상을 막 살 수는 없음을 알게 된다.

 

어떻게 살든지, 우리는 정신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드라망이라는 말이 생각날 정도로 옳고 그름, 위와 아래 등 서로 함께 할 수 없는 것조차도 함께 하고 있음을 헬링거는 강조하고 있다.

 

그의 말을 보자.

 

스스로 홀로는, 스스로에 빠져 있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자주적인 사람은 영적인 정신의 움직임들과 공명에 머물기에 다른 자주적인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의 생각, 행동과 공명에 머뭅니다. 이게 바로 원래의 사랑입니다. 영적인 사랑입니다. 72쪽

 

나는 독립된 주체이지만, 남들 역시 독립된 주체이기에, 이들은 라이프니츠의 창이 없는 단자가 아니라 서로 창이 열린, 상호 소통하는 단자라는 얘기다.

 

바로 우리들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공동체는 스스로 선 홀로들이 함께 모여 서로 공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공명은 동의에서 온다. 그의 말을 보자.

 

우선 우리 내면에서 경험된 인정과 사랑 다음에 밖으로 향하는 동의가 옵니다.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이 나와 함께 움직이는 진동 다음에 동의가 옵니다. 이 진동에서 그들로부터 어떤 것이 내게, 나로부터 어떤 것이 그들께 더해집니다. 77쪽

 

 

이런 공동체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는가. 아주 신비로운 모습이기는 하지만, 우리 인간 세상에서는 당연해야 하지 않는가.

 

개인이 영적인 움직임과 함께 할 때 그는 '영적인 정신의 움직임들과 공명에서 생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홀로 생각'(71쪽)한다고 한다.

 

홀로이되 홀로이지 않음. 이런 상태에 머물기 위해서는 우리는 위로만 올라가려는 지향성을 버려야 한다.

 

보통인 사람들과 함께 함. 그 속에서 영적인 함께 함이 가능하고, 이것이 바로 공명이고 동의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아래에 머물러야만, 우리는 영적인 정신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오직 아래에서야 우리는 영적인 정신의 움직임들과 인식된 공명에 머뭅니다.'(55쪽)

 

이런 공명, 동의는 먼 미래에 오지 않는다. 과거에만 존재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여기에 존재한다.

 

영화된 정신의 움직임들과 공명에 오는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지금 존재합니다. 오직 지금에만 우리는 그 정신과 공명에 있습니다. 오직 지금에만 우리는 그 정신 안에서 지난 것과 연결돼 있습니다. (232쪽)

 

하여 이는 전체적인 사람을 향하게 된다. 우리는 전인적 인간을 추구하고, 그런 전인적 인간이 바로 우리가 만나야 할 인간들 아니겠는가. 이런 인간들의 만남. 이것은 전체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전체를 향한 영원한 움직임. 이것이 바로 이 책이 말하는 핵심이 아닐까 한다.

 

모든 홀로는 전체를 향해 길에 있습니다. ... 우리는 전체의 길을 가야 합니다. ... 우리는 우리가 가는대로 우리 몫의 길을 갑니다. ...오는 대로의 전체에게, 오는 대로 동의가 전체 사랑입니다.(247-248쪽)

 

홀로이자 홀로이지 않은 인간. 그런 인간의 신비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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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공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슨 구름 따먹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라고, 그가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어지기 때문에 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또 춘추전국시대 인물이기에 한참 지나간 과거의 인물일 뿐이라고, 그의 사상은 이미 한물 간 사상이라고만 치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녹색평론에 연재된 배병삼의 글을 보면서 논어가 현대에도 적용될 수 있음을 알았고, 왜 그가 성인이라는 소리를 듣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의 말들은 그 시대의 말들이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말들이기도 했으니, 그의 말들은 역시 영적인 말이다.

 

논어의 많은 편 가운데 요즘 위정편이 마음에 내내 머문다.

 

정치가 하도 엉터리라서 그런지, 정치란 이런 것이다 하고 말하는 위정편을 읽어야 하겠다는 생각. 논어를 펼친다.

 

처음 시작이 학이(學而)편이고, 다음이 위정편이다. 이번에는 위정편을 집중적으로 읽기로 하고 읽어 보았다.

 

오래 전에 읽은 논어에 대한 기억으로 정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절들이 많이 나온다. 이것들과 정치를 연결지으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굳이 위정편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논어의 편제가 그렇듯이 처음 시작이 위정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정치와 관련된, 지금 이 시대 정치인들이 명심해야 할 말을 찾아 본다.

 

爲政以德, 譬如北辰居其所而衆星共之(위정이덕, 비여북신거기소이중성공지)

- 덕으로 하는 정치는, 북극성이 자리 하고 있으면, 뭇별들이 그 주위에 함께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게 공자가 생각하는 정치다. 덕으로 하는 정치. 덕은 자연스레 주위로 스며든다. 그래서 남들에게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남들이 따른다. 훌륭한 정치가는 북극성과 같아서 그 주위에 훌륭한 별들이 모여들고 함께 하기 나름이다.

 

이런 덕의 정치 이루어지고 있는가? 지금 정치인들은 과연 덕으로 정치를 하려고 하기는 하고 있는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 덕은 법이나 형벌과는 다르다. 그것을 구분하는데, 공자의 장점이 있다.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도지이정, 제지이형 민면이무치 도지이덕 제지이례 유치차격)

 

- 백성을 정치로 인도하고 형벌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형벌은 면하여도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나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이 부끄러움도 알고 잘못도 바로 잡게 된다.

 

얼마나 좋은 말인가? 얼마나 타당한 말인가? 모든 것을 법, 법 하는 시대에, 도대체 사람을 위한 정치를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사람 위에 법이 있다는 식의 정치가들의 말이 통하는 시대는 과연 올바른 시대인가?

 

공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국민들은 덕과 예로써 인도되어야 한다. 그것은 형(刑)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와는 다르다.

 

다음 글은 위정편의 중심이라고 할 만하다. 진정으로 정치가들이 명심해야 할 말이 아닌가 싶다.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 (거직조제왕 칙민복, 거왕착제직 칙민불복)

 

- 정직한 사람을 기용하여 그릇된 사람을 다스리면 백성들이 복종할 것이요, 그릇된 사람을 등용하여 정직한 사람을 다스리게 하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한 때 어떤 대통령은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사람이 중요하다는 말인데, 정직한 사람을 자신의 주변에 두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라는 얘기다.

 

인(人)의 장막에 가려져 있으면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없다. 자신에게 올바른 말을 해줄 수 있는 정직한 사람을 기용하는 것, 그것이 정치의 가장 기본일진대, 과연 그러한지...

 

청문회를 제대로 통과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 청문회 기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소리를 하지 않나, 그 정도는 관행이라고 넘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현대 우리나라 정치, 과연 공자가 그 모습을 보면 무엇이라 할 것인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사라진 시대, 도와 덕이 사라진 시대라고 개탄하지 않을까?

 

더 많은 말들이 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공자의 말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기에는.

 

다시 꺼내 읽은 논어의 위정편... 지금 우리나라 정치와 연관되어 마음을 쿡쿡 찌른다. 몇 천 년 전 공자의 말씀이 아직도 허공에서만 떠돌고 있으니...

 

그의 말이 지상에 내려와 우리 정치인들의 가슴에, 머리에 콕콕 박혔으면 좋겠다.

 

하지만 거꾸로 그런 정치인들을 만드는 게 우리 몫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함석헌 선생 말처럼 깨어 있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깨어 있는 국민이라야 덕이 있는 정치가를 뽑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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