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정기 구독을 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책 가운데 하나.

 

두 달에 한 번 나오지만, 그 동안에 내가 살아온 방식을 반성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게 하기도 하는 책이기도 하고.

 

근본주의자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근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세상은 더 좋아질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근본을 추구하되, 다름을 인정하고, 근본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는 일.

 

그것이 지식인의 역할이고, 지금 녹색평론과 같은 책이 해야 할 역할이다.

 

이번 호는 " 대안학고, 희망의 교육을 위하여"이다.

 

녹색평론이 생태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이 생태주의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교육을 간과할 수가 없다. 교육은 생태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어떤 교육이냐가 중요한데, 이런 교육에 대해서 우리는 제도권 교육이나 학원 교육으로 대표되는 사교육에 대해서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고민도 많이 하지만, 대안교육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다.

 

대안교육. 말 그대로 이것이 아닌 저것을 추구하는 교육. 이곳이 아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교육이 대안교육이라고 해야 할텐데, 지금 수많은 대안학교들 중 대안교육을 실질적으로 행하고 있는 학교는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번 호에서 대담에 참여한 분들도 우려하고 있는 것이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전혀 대안적이지 않은 기관까지 묶여 있으며, 정부에서는 대안교육을 인가라는 무기로 간섭하고 통제하려 한다는 점이다.

 

대안교육은 그냥 놓아두어야 한다.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대신 대안교육이니 너희들 맘대로 할 것이니 우린 모른다 하는 자세가 아니라, 너희들이 꿈꾸는 교육을 해라, 그런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뒷받침해주겠다 하는 자세를 지녔으면 하는데...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처럼 대안교육이 들불처럼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그럼에도 대안교육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안교육이 제도권 교육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좌담에서도 나오지만 혁신학교가 만들어지고 나름 성과를 거두게 된 데에는 대안학교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육은 죽었다. 학교는 죽었다는 말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지금 이 시대, 대안 교육은 여전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제도권 교육과 대안 교육이 함께 가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제도권 교육과 대안 교육이 함께 가는 사회, 이런 사회는 생태적 사회가 될 수 있다.

 

생태적 사회라는 이야기는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 다양성을 이루는 사회일테니 말이다.

 

이런 대안 교육에 대한 글과 더불어 배병삼의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한자어를 풀이하는 과정에서, 아니 유교 경전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늘 다가왔던 말, 인(仁). 이 말을 이야기하면서, 배병삼은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도대체 지식인으로서 감정을 숨기기에는 지금 우리 사회가 너무 저열하다. 그들에게 고급스런 단어(이런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사교적인 언어라고 하지)를 쓸 수가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이 글을 읽으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단장의 슬픔을 애써 외면하려는 그런 집단에게 인(仁)이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족속들이니, 어찌 고운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이런 애타는 마음이 날것 그대로 글에 드러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공부한 사람들이 지닌 마음의 자세 아닐까.

 

공부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일텐데, 이기적이기 위해서는 이타적이어야 하듯이, 공부는 남과 나를 잇는 다리가 되어야 할텐데,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공부를 하는 집단. 오로지 제 말만 하는 집단. 그런 집단들에게 이번 호 배병삼의 글을 그대로 들려주고 싶다.

 

"불인하도다, 이 땅이여. 잔인하도다, 이 땅 사람들이여. 아! 슬프다." (71쪽)

 

이 땅, 이 땅 사람들. 누구를 말하는지 꼭 짚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 터.

 

두 달에 한 번 여전히 내 생각보다 앞서 간 책을 읽는 재미는 단지 재미로 그치지 않는다. 나를 되돌아 보게 한다. 내 삶을 성찰하게 한다. 내가 어떤 삶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보여준다.

 

그래.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책의 역할이다. 책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책은 단지 시간을 때우게 해서는 안된다.

 

한 사람의 영혼에 자리잡아 그 사람의 삶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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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11-09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녹평 독자를 만나면 언제나 반가워요!!
그나마 녹평이 있어 이 사회가 이 정도라도 유지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나는 왜 이렇게 산만해졌을까 - 복잡한 세상, 넘쳐나는 기기 속에서 나를 잃지 않는 법
알렉스 수정 김 방 지음, 이경남 옮김 / 시공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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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무호흡증이라고 들어 보았는지. 수면무호흡증은 들어보았어도, 이메일 무호흡증은 처음 듣는 말이었는데, 잠잘 때 숨을 쉬지 않는 경우가 있듯이 이메일의 홍수 속에서 그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숨을 무의시적으로 쉬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경우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점점 더 빈도수가 많아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만큼 우리는 잠만큼이나 이메일과 같은 전자기기, 즉 디지털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다.

 

함께 하는 시간은 많아지는데, 의식적으로 이용하는 시간은 적어지니, 자연스레 무호흡증이 생길 수 있고, 이 무호흡증이 당장은 건강에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도, 장기적으로 몸에 좋을 리가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것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데 문제가 있는데, 이메일 무호흡증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스위치 태스킹을 멀티 태스킹으로 착각을 하고 지내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고 한다.

 

한꺼번에 여러 일을 한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일들을 순서대로 할 뿐이고, 체계적이지 않은 그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이것이 바로 디지털 주의 결핍 상태, 즉 디지털로 인한 주의 산만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산만함을 다방면의 일을 동시에 처리함으로 착각하고 지내는 일, 그것이 디지털 시대의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한다.

 

이를 우리나라에 적용해 보자. 우리나라는 이메일 무호흡증이라기 보다는 카톡 무호흡증이라고 해야 하고, 컴퓨터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스마트폰 중독으로 인한 스마트폰에 의한 주의력 결핍 상태가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의 일상을 관찰해 보라. 아이들은 한 순간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지 않는다. 또 언제든지 스마트폰이 울린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이 책에 나와 있는 현상을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더 심하게 겪고 있는 것이다.

 

물론 늦게 스마트폰을 만나게 된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사람들을 관찰해 보면 모두들 손에 이 작은 기기를 들고 몰두하고 있다.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기기가 잠시라도 없으면 불안해 한다.

 

그렇다고 일의 능률, 학생들의 학습 집중력이 높아졌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학습 효과를 이루는 것 같지만, 그것은 착가에 불과하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 책은 그 점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디지털 시대를 벗어나야 한다고,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미 그럴 수는 없다.

 

이런 디지털 기기는 이미 우리 몸의 일부가 되었고, 우리 몸은 이런 기기들로 인해서 확장이 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얽힘'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얽힘을 인정하고, 여기에서부터 시작하자고 한다.

 

어떻게? 우선 "관조"

 

디지털 기기를 다루고 있는 나를 관찰하는 연습부터 하자는 것이다. 이를 거리두기라고도 할 수 있는데, 명상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이런 명상과 같이 디지털 기기를 다루는 나를 생각하고, 인식하면서 기기를 다루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명상에서 호흡을 하면서 호흡이 내 몸에 어떻게 들어오고, 어떻게 나가는지를 의식하면서 하듯이 디지털 기기를 다루면서 내가 지금 왜, 어떻게 이 기기를 다루고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의식적으로 디지털 기기에 매달릴 때보다 훨씬 더 디지털 기기를 제대로 잘 다룰 수 있다고 한다.

 

이에 더불어 하나 더 디지털 안식일을 갖자는 것이다. 러다이트운동처럼 기기를 거부하고 파괴할 수는 없으니, 이를 이용하되 일정한 시간을 두고 디지털 기기를 닫아두는 생활을 하자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디지털 안식일을 갖는다면 디지털에 대해 더 의식적인 사용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좋은 말이다. 디지털에 몰입을 하더라도 그렇게 몰입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관조가 필요하고, 디지털 세계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의 세계를 갖는, 오프라인에서 자신의 생활을 하는 그런 디지털 안식일을 갖는 것, 그것이 바로 디지털로 인한 산만함에서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여기에 자연 속을 산책하는 일... 오프라인의 결정체. 그런 일들. 우리 아이들에게 온라인 상의 세계만이 아니라 오프라인에서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경험하게 하는 일. 그것을 어른들이 먼저 실천하는 일.

 

디지털 홍수 시대에서 나를 잃지 않는 법이다.

 

적어도 디지털 기기를 만지면서 왜 만지는지, 어떻게 만지는지를 생각하는 관조의 습관을 갖고, 또 일주일에 한 번만이라도 디지털에서 멀어져 실생활에서 직접 온몸을 사용하는 그런 디지털 안식일을 갖는 생활을 하자.

 

그것이 나를 찾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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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대해 알고싶은 모든 것들 - 이명옥 사비나 미술관장의 톡톡튀는 교과서 미술 읽기
이명옥 지음 / 다빈치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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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장이 들려주는 미술 이야기다.

 

미술에 관한 모든 것이라는 제목이라고는 하지만, 여기서는 교과서에 실린 작품을 중심으로 미술에 관해서 알려주고 있다.

 

교과서란 정석이라는 말로도 통하고, 기본이라는 말로도 통하니, 미술에 관해서 미술 교과서 만큼 정통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리라.

 

그럼에도 우리는 미술 교과서를 제대로 본 적이 있었던가?

 

학교에서 미술 교과서는 능력있는, 또는 그 쪽으로 나아가려는 몇몇 학생들을 제외하면 관심있게 들쳐보지 않았던 책이고, 들쳐보더라도 흥미로운 그림이나 쓱 훑고 지나가고 마는, 시험 때나 돼야 억지로 외우기 위해 펼쳐들던 책 아니던가.

 

미술에 관해서 가장 기본적인 작품들을 담고 있는 책임에도 가장 홀대받는 책이 미술 교과서였는데, 작가는 교과서 전을 연 경험으로, 그 때 많은 사람들이 관람했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미술에 대해 관심이 많았음에도 미술을 제대로 만날 기회가 적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즐길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것은 미술과 자주 만나게 하는 일이다. 미술에 거리를 두지 않게 하는 일이다.

 

미술과 거리를 두지 않는 일. 어차피 우리는 학창시절을 통해 미술을 배우지 않았던가. 전국민이 모두 미술에 관해서는 10년이 넘도록 배워왔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미술에 관해서는 이미 교과서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교과서를 중심으로 미술에 대해서 알려준다면?

 

어른들은 과거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미술과 만나게 될 것이고, 아이들은 지금 배우는 교과서와 비교하면서 미술과 만나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쓰여졌다고 볼 수 있는데...

 

따라서 이 책은 교과서라는 미술관에 있는 17개의 전시관을 돌아보면서 미술과 만나게 해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장르별, 주제별로 17개로 나누어 그림을 보여주고 설명해주고 있는데, 교과서에 실릴 정도면 이미 많이 알려진 작품들이라서 우선 눈에 익은 그림들이고, 이 그림들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림에 대해서 또 조각에 대해서 좀더 알게 된다.

 

처음부터 순서대로 읽을 필요도 없이 미술관에 가면 자기가 보고 싶은 전시관부터 들르듯이, 보고 싶은 그림, 읽고 싶은 부분부터 보면 된다.

 

이게 옳은 관람 순서이고, 옳은 책읽기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좋아하던 그림은 더 좋아하게 되고, 낯설었던 그림은 친숙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17개 전시관. 실제 미술관에 가면 엄청난 시간을 들여야 할테지만, 책의 장점이 무엇인가, 시간을 압축해서 우리에게 미술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물론 직접 미술관에서 진품을 보는 감동만은 못하겠지만, 미술을 배우고, 미술을 즐길 준비를 하는데는 교과서만한 것이 없으니, 이 교과서 미술관, 관장과 함께 떠나는 여행, 한 번 해 볼 만하다.

 

이런 여행을 한 다음 꼭 미술관에 들러볼 것. 나에게 다짐하는 말이다.

 

덧글

 

에고, 책이 절판되었다네...

 

하지만 도서관에는 있을테니, 찾아서 읽어보면 좋겠지. 현대 사회, 모든 것이 너무도 빨리 바뀌는데, 요즘은 책들의 수명도 참 짧다. 절판 되는 책이 너무 많다.

 

이런 책은 미술 시간에 교과서와 함께 보면 좋을텐데,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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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목소리 - 그림이 들려주는 슬프고 에로틱한 이야기
사이드 지음, 이동준 옮김 / 아트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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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독특한 발상이다. 그림의 목소리라니.

 

마치 시인들이 시가 내게로 다가왔다고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런데 지은이가 미술학자가 아니다. 화가도 아니다. 그는 시인이다. 그래, 그래서 그림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구나.

 

2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그림이 말하다. 또 하나는 화가가 말하다.

 

그림이 말하다. 그림을 보면서 그림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화가가 말하다. 그림을 보면서 그 그림을 그릴 때 화가의 마음을 듣는다. 화가의 독백을 듣는다.  

 

그림은 그냥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야기를 한다. 하다못해 돌멩이도 침묵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 그것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한다. 마음을 열고 그림을 보아야 한다. 그림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온 정신을, 온 마음을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들으려고 해야 한다. 그래야 들린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지혜, 듣기'

 

귀는 있으되, 듣지 못하는 귀가 많은 지금, 들리지 않는 소리까지도, 말해지지 않은 소리까지도, 어쩌면 그림으로 표현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은 너무도 드문 세상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이 귀하다. 침묵에만 머무르고 있는 듯한 그림이 말하는 소리를 들려주고 있으니.

 

하지만 그림이 과연 침묵에만 머무르고만 있을까? 아니다. 그림은 그려지는 순간 이미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다. 화가가 말하든, 그림이 말하든 그림에는 이야기가 있다. 소리가 있다.

 

그 소리를 찾을 수 있는 귀. 그 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그것이 필요한 세상이다.

 

처음엔 그냥 작가의 상상력에만 의존한 책이겠구나 했다가, "그림이 말해주지 않은 것"이라는 글이 그림과 이야기 뒤에 딸려 있는데, 이 설명이 그림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냥 상상이 아니라 사실에 바탕한 상상, 즉 있음 직한 일을 상상해 내고, 그 상상을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고 깨닫게 되었다.

 

상상이 아무 데서나 나오는 것이 아닌 철저한 사실을 바탕으로 그 사실을 넘어서는 곳에 존재함을 다시 인식하게 했다고나 할까.

 

침묵을 지키는 듯한 그림도 제 소리를 지니고 있고,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귀를 지닌 사람들,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있는데...

 

세상 밖으로 나와 있는 많은 소리들을 억지로 듣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으니, 남들에게 너무도 자명하게 들리는 소리를 애써 외면하는 사람들도 있으니, 반성할지어다.

 

소리는 막는다고 없어지지 않고, 소리는 없는 듯하지만 어디서나 존재하니, 그 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 열린 귀를 지녀야 한다.

 

그림 앞에서 그림의 소리를 들어도 좋다. 이렇게 그림의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사람, 세상의 소리들, 그 많은 소리들을 안 들을 수 없겠지.

 

열린 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임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 책이었다. 덕분에 눈도 호사했지만, 새롭게 귀를 인식하게 해준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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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민주주의와 아나키즘 - 삶의 정치 그리고 살림살이의 재구성을 향해
하승우 지음 / 이매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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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삼척에서 핵발전소 유치를 두고 주민투표가 있었다.

 

이미 삼척에 핵발전소를건설하기로 했었는데, 이번 지방자치제 선거에서 삼척시장으로 출마한 사람의 공약이 주민투표에 핵발전소 유치 여부를 부치기로 한다는 것이었고, 이 공약을 실천한 것이다.

 

투표율이 개표를 할 수 있는 선을 넘었고, 개표 결과 핵발전소 유치 반대로 결정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다음. 중앙정부에서, 또 법무부에서 이런 주민투표는 법적 효력이 없다고 나온 것.

 

법적 효력?

 

자신이 사는 곳에 자신의 삶이 걸려 있는 문제를 주민 스스로 투표를 통해 결정했는데, 그것이 법적 효력이 없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이지? 핵발전소에서 나온 전기를 누가 쓰지? 핵발전소 주변 주민들이 쓰나, 아니다. 핵발전소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쓴다. 그런데 결정은 정부에서 한다.

 

지방에서 당사자들이 할 수가 없다. 당사자들이 어렵게 성사시킨 주민투표도 법적 효력이 없다고 무시한다. 이게 바로 민주주의 사회라는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문제가 무엇인가? 바로 민주주의라는 형식만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법적 절차라는 형식적 절차만이 중요하지, 실질적인 내용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과는 관계가 먼 사람이 결정해준 대로 따라야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종. 아니 이 정도면 말살이다. 지방자치라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지방의 독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방은 중앙정부에 종속이 되어 있는 실정이다. 그러니 자신의 삶터를 중심으로 하는 풀뿌리 민주주의는 실현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책은 우리가 진정 민주주의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풀뿌리 민주주의의 이론으로 아나키즘을 들고 있다.

 

아나키즘을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에 이론을 부여하고 있으며, 이런 이론을 통해 풀뿌리 민주주의가 하루 아침에 갑자기 나온 이론이 아니라 예전부터 있었던, 불가능한 이론이 아니라 충분히 실현가능한 이론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 아나키즘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고, 어떤 결정된 이론이라기보다는 그 상황에 맞게 실천해 가는 이론임을 보여 풀뿌리 민주주의가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삶터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과 연결되어 가는 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여 이 책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와 아나키즘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두 개념이 '연방주의'와 '협동'이다.

 

중앙집중적인 지금 우리 상태에서는 삼척의 경우와 같이 풀뿌리 민주주의가 살 수가 없다. 연방주의 처럼 각 지방이 독립적인 정치, 경제적 힘을 지니고 대등한 관계들을 맺어갈 때 풀뿌리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협동이 필수적이다. 경쟁보다는 협동을, 대등한, 너를 나로 보는 그러한 인식부터 시작하는 아나키즘과 풀뿌리 민주주의의 연관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아나키즘. 여기에 대해서 인식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실천이 이루어진다면 형식적인 법 구절에 얽매여 사람들을 옭아매는 제도를 타파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삶에 관한 정치를 소수의 정치가 계급에게 맡기고, 자신의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정책들을 만들어내는 정치가 계급에게 내 권리를 위임하지 않고, 내 삶에 관계되는 정치에 내 스스로 참여하는 능동적인 권리를 찾게 되는 방법이 풀뿌리 민주주의이고, 아나키즘이다.

 

지금, 우리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얼마나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위임한 결과 아니던가.

 

내 권리를 찾아오는 것. 내 삶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내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고 책임을 다하는 것.

 

내 삶터와 같이 다른 사람의 삶터도 존중해주는 모습. 그런 모습을 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삶.

 

그게 가능하게 하는 정치. 그것이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에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듯이 아나키즘이다.

 

내 권리 찾기. 이게 바로 지금 해야 할 일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야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그런 정치 행태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할 만한 좋은 글들.

33쪽. 대의민주주의는 이성의 구실만을 강조할 뿐 아니라 선거라는 정치적 경쟁의 장 밖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갈등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제거하려 든다. 대의민주주의 정치는 시민의 직접적인 정치 개입을 부정하고 시민의 정치 행위를 가로막는다. ... 대의민주주의는 시민의 삶을 수동적으로 만들 뿐 아니라 정치 민주주의와 경제 민주주의의 연관성을 제거하거나 정치를 경제에 예속시킨다. 그러면서 정치는 점점 더 전문가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대의민주주의에서 민중의 정치란 실현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불가능하다. 고대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전환은 민주주의를 축소하거나 민주주의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48쪽. 공간적 의미에서 벗어나면 풀뿌리 운동은 단지 지역운동을 뜻하지 않고 "권력을 갖지 못한 일반 대중이 스스로의 삶의 공간에서 집단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삶과 삶의 공간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와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가려는 의식적인 활동"으로 이야기될 수 있다.

50쪽. 인간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세계를 인식하고 변화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다가올 미래를 예정된 법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다.

51쪽. 풀뿌리 정치는 `합의`나 `순수함`보다 `차이`와 `혼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대화와 조직화만으로 부족하다. 앞서 말한 배제의 문제를 해결하고 풀뿌리의 관점을 가지려면 끊임없는 자기부정이 필요하다.

53쪽. 풀뿌리 운동은 경쟁과 생존 투쟁을 극복하고 공생과 자율의 삶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이자, 내 삶의 경험이나 의식하고 분리되지 않은 정치 구조를 만드는 행위이며, 삶 자체를 정치적으로 재구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풀뿌리 운동은 개인이 사회라는 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성장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서로 돕고 보살피는 호혜의 관계가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54쪽. 정답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 아닌가. 정답이 없기 때문에 둥글게 모여 앉아 지혜를 모아보자는 것이 민주주의 아닌가.

95쪽. 협동조합이야말로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기대를 건 삶의 양식이었다.

139쪽. 아나키스트들의 지향은 다양했지만, 기본은 `자유로운 코뮌` 또는 `자율적인 코뮌`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주민들이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스스로 만들고 구성원의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체계, 생산하고 교환하고소비하는 체계가 사유화되지 않고 사회화된 체계, 그곳이 바로 코뮌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사회를 위해 아나키스트들은 사회혁명이 필요하다고 봤다. 아나키스트들은 `정치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을 주장했다.

157쪽. 아나키즘은 모든 권력에 맞선 반대, 모든 조직에 맞선 반대, 모든 질서에 맞선 반대가 아니라, 제어할 수 없고 집중화된 권력을 향한 비판이다. 따라서 `반강권주의`가 적절한 번역이다.

168쪽. 타자를 대상화시키지 않아야 서로 보살피며 자치와 자급의 삶을 살 수 있다.

169쪽. 법치주의에서는 법 자체만큼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해석하는 과정이 중요하며, 그 과정에 시민의 참여가 보장돼야만 한다.

190쪽. 연방 국가는 `유기적인 분리`의 원칙을 따라서 모든 권력을 분산시킬 수 있는 만큼 분리시켜야 하며, 공공 행정은 전적으로 공개되고 통제돼야 한다. 이런 정부 아래에서 아나키즘은 시민과 사회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기 질서를 재구성하고 공동체 간의 관계를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220쪽. 국유화는 민중을 시혜의 대상으로 여기며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지만, 민중이 스스로 그 권리를 지키고 확장시킬 기회를 주지는 않는다. 국유화가 되면 사람들이 모여 회의하며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기울일 기회나 그럴 이유도 줄어든다. 따라서 배타적인 사적 소유권에 맞선 저항은 국유보다 `공동의 소유`와 `공적인 소유`를 지향해야 한다.

221쪽. 공유가 자연스러운 원리로 사회에 자리 잡으려면 협동을 내세운 다양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져야 한다. 아나키즘은 국가와 자본을 대체할 힘을 만들지 않으면 실제로 사회를 바꿀 수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힘은 외부의 지원이 아니라 바로 평범한 사람들 속에서 만들어져야 했다.

235쪽. 아나키즘은 중앙 집중화된 혁명 조직이 아니라 각자의 살림살이를 지지할 수 있는 다양한 조직들 간의 연계와 단단한 삶의 그물망이 아직 오지 않은 사회를 도래하게 만들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도래할 사회는 그 사회를 도래하게 만드는 방법에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강하게 믿었다. ... 손을 잡으려면 서로 마주보며 서로의 존재에 눈을 떠야 한다. 그런 마주봄의 계기는 바로 교육이다. ... 농업 노동과 공업 노동을 결합하려면 교육 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243쪽. 아나키즘의 주체는 자기에 눈 뜨며 자기 삶을 만들어가는 존재,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는 존재다.

251쪽. 정치인들에게 공적인 일을 떠맡긴 채 공적인 시민의 성격을 잃고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 갇힌 개인은 인간의 본질적이고 자주적인 특성, 곧 적극적인 공동체 참여를 통한 자아의 실현이라는 특성을 잃어버린다. 자본주의와 권위주의는 사람들의 이런 자각과 성장을 가로막으려 온갖 노력을 다한다.

277쪽. 연방주의의 과제는 단순히 국가기구를 해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분권을 통해 지역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그런 지역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구성하며, 궁극적으로 국제적인 규모의 네트워크를 건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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