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수업에서 나를 만나다 - 교사의 내면을 세우는 수업 성찰
김태현 지음 / 좋은교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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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들이 읽으면 많이 도움이 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수처럼 가르치려 들지 않고, 그렇다고 자신의 경험만을 나열하지 않고, 경험 속에서 느낀 점들을 심화시켜 하나의 실천 방법으로 만들어낸 책이다.

 

경험이 묻어 있기에, 그럼에도 경험을 넘어서 있기에 더 가치가 있는 책이다.

 

많은 교사들이 수업을 힘들어하고, 수업에서 지치고 좌절하고 결국 관행적인(이 관행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말인가. 그냥 예전에 했던 대로 했을 뿐이라는, 책임을 미루는 말이지 않은가) 수업 방식으로 돌아가고 마는 현실에서,

 

"그럼에도"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수업을 변화시켜 가려 하는 교사들이 있는데, 그런 교사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쓰여진 책.

 

자신의 수업을 바꾸고 싶어서 많은 노력을 했던 교사가 대학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냈던 '수업 비평'이나, '아이의 눈으로 수업보기'나 일본의 '배움의 공동체'를 넘어 자신만의 방법을, 철학을 이야기해주고 있는 책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수업을 바꾸고 싶어하는 교사들의 마음에 쏙쏙 들어오는 책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실천을 통해 자신의 수업을 한 번 바꾸어 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하는 책이기도 할 것이고.

 

수업을 바꾸기 어렵다. 교사들은 생각이 진보적일지라도 실제 행동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또한 학교 다닐 때 모범적인 생활을 많이 한 사람들이 교사들이기에 이들은 자신의 행동이 남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를 부단히 신경쓴다.

 

그것이 바로 수업을 잘하고자 하는 욕망을 억누르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왜냐 하면 나만 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는 교사도 많고, 또 입시에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교사도 있기에 남들과 같이, 입시에 나올 만한 내용 중심으로 수업을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이 책에서는 교사들이 수업에서 자신감이 없다고, 불안해 한다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다. 즉 교사들은 꽤나 자신있게 수업을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교사들은 수업을 하면서 많은 불안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해 내고 있다.

 

이 불안감을 감추려고 교사들은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는 것을 꺼린다. 자신의 수업은 한 교실에서 문을 꼭꼭 닫아걸고 오직 자신만의 수업으로 이끌어가는 교사들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교사들은 대부분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면서 힘들어한다.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비평적 관점으로 수업을 보고, 학생의 배움을 중심으로 수업을 보고, 교사의 내면을 중심으로 수업을 보라고 한다.

 

이 세 가지가 차례로 또는 융합적으로 작용하게 자신의 수업을 성찰해야 하는데, 혼자서는 불가능하니 수업 친구를 만들라고 한다. 수업 친구 모임. 그것을 통해서 수업을 함께 공유해 나가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수업은 한 번에 확 변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고쳐나가려고 하게 된다고.

 

교사들... 읽으면 참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들의 수업을 성찰하는 힘을 갖게 해주는 책이니 말이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이렇게 수업에 대해 고민하고, 수업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교사들이 점점 늘고 있는 우리나라, 교육에 희망이 보인다.

 

역시 교사는 수업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신의 수업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보람을 느끼는 교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생각할 만한 문장들이다.

37쪽. 수업을 예술적인 차원에서 음미하는 것이 ‘비평적인 관점으로 수업보기’이다. ... 수업은 예술이다. 교사라는 예술가에 의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고 창작되는 것이 수업이다.

39쪽. ‘교사가 어떤 목적으로 수업을 했고, 그 목적대로 수업이 구현되고 있느냐’를 봐야 한다.

46쪽. 나의 경우에는 사고의 수준을 가지고 배움의 양상을 판단한다. 내게 있어 배움이란, 학생들이 사고를 통해 생각이 새롭게 되어 삶이 변화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적 사고-> 추론적 사고 -> 비판적 사고 -> 창의적 사고 -> 성찰적 사고

52쪽. 예상외로 많은 교사들이 학생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수업을 잘하고 싶어도 준비한 대로 수업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53쪽. 학생들의 마음을 잘 모아서 한 방향으로 수업을 진행하려면 교사의 내면이 견고하게 서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의 작은 행동에도 신경이 쓰이고, 그것으로 인해 수업은 흔들리게 된다.

57쪽. 수업을 같이 보고 내면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만으로도 많은 교사들은 큰 힘을 얻고 수업을 개선해 갈 수 있는 동력을 갖게 된다.

70쪽. 우리가 수업을 처음 볼 때, ‘수업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를 보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수업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수업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즉 수업의 정체성을 살펴야 하는 것이다.

72쪽. 내 수업의 정체성 찾기! 이를 위해 교사들은 ‘내가 생각하는 좋은 수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해야 한다. 수업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먼저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85쪽. 진정한 교사라면 내 수업 속에서 학생들에게 교과 지식을 익히고 습득하는 기쁨을 주어야 한다. 수업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세상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려주고, 참다운 행복을 누리는 지혜를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적 신념이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105쪽. 배움이 있는 수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실 내에서, 적절한 질서 속에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이 서로의 생각을 말하고 들어줄 수 있는 친밀한 관까 형성되어야 한다.
... ‘경계’가 있지만 ‘존중’이 있는 수업을 우리는 지향해야 한다.

109쪽. 수업 내 관계에서 교사 스스로 자신만의 철학을 갖기 위해서는 ‘학생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내게 학생은 어떤 존재인지’,‘학생은 어떻게 하면 변할 수 있는지’. ‘나는 학생을 어떻게 성장하게 하고 싶은지’ 등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 학생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철학을 갖췄다면 이제는 교사 스스로가 평소에 학생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차려야 한다.

116쪽. 수업의 경계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교사들은 대개 자신감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 ‘내 수업이 재미없으니까 애들이 떠드는 거야’, ‘나는 학생들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무능한 교사야.’라는 패배의식이 수업 속에서 학생들과의 경계를 세우는 것을 어렵게 한다.

139쪽. 통제하는 수업에서 학생들을 존중하는 수업으로 나아가려면, 교사는 일단 수업의 힘을 빼야 한다. ... 과도하게 권위만 내세웠던 모습에서 벗어나, 이제는 학생들의 생각과 마음을 읽도록 노력해야 한다.

149쪽. 대화하는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교사는 어떤 형태로든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발행하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해야지, 학생들과 대화하는 것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152쪽. 교사가 수업 속에 학생들이 들어올 수 있는 여백을 둠으로써, 학생 스스로 친구와 혹은 교사와 대화하면서 의미 있는 배움이 만들어진다.

153쪽. 수업에 여백을 갖는 것은 (이처럼) 교사 주도의 수업을 멈추고 학생들이 생각하고 발표할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160쪽. 교사가 대화 있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과 소통을 하려면, ‘학생 개개인의 소리를 깊게 들어야겠다’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한다.

163쪽. 수업 개선의 열쇠는 오히려 작고 소박한 데 있다. 학생들이 발표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고, 학생들이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고, 그 이야기에 공감해 주는 것이다.

173쪽. 의미, 의문, 논리, 성찰, 창의, 위계가 있는 내용을 통해 학생들을 의미 있는 배움으로 이끌어야 한다.

180-181쪽. 교사는 일반인도 할 수 있는 요약 정리를 잘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교과 지식 속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학생들이 발견하게 하고, 이를 통해 학생들이 세계를 더 깊고 즐겁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192쪽. 똑같은 내용 속에서도 학생을 도전하게 하고 몰입하게 하는 과제를 만드는 교사가 진정한 의미의 ‘좋은 교사’이다. 이것이 교사의 전문성이다. 수업의 프로인 교사는 학생의 지적, 문화적, 정서적 상황을 고려하여 정교한 활동 과제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216쪽. ‘마음 열기 – 생각 쌓기 – 생각에 날개 달기 – 삶에 접속하기’의 4단계 틀로, 기승전결의 4단계 글쓰기 구조를 변용

237쪽. ‘수업 친구 만들기’는 학교 동료 선생님 한 명과 함께 서로 수업을 공개하고, 수업에 대해 내면적인 대화를 하는 것으로 시작.

252-253쪽. 수업 나눔은 답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수업 시간에 내가 그것을 의식하고 관찰하고 성찰하는 것 자체로 의미를 지닌다.
... 수업 나눔에서 중요한 것은 해결의 ‘끝’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도전의 ‘시작’을 만드는 데 있다.

265쪽. 수업 변화에 대한 열망이 높은 교사는 직접적으로 수업의 문제점을 알려 달라고 하거나, 자신이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중심으로 조언을 해달라고 한다. 이럴 때는 문제 사항에 대해 직접적인 조언을 하는 컨설팅의 방법을 사용하면 좋다.

268쪽. 예상 외로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과 대화 하면서 내용을 연결하는 ‘소통 능력’이 부족해요.

272쪽. 교사는 수업을 열어야 한다. 아무에게나 여는 것이 아니라 정말 친한 동료 교사 한 명에게는 수업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진솔한 수업 나눔을 시작하면서 수업에 대한 깊은 고민과 아픔을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318쪽. 교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 첫째는 학생에 대한 공감 능력 키우기, 둘째는 세계에 대한 민감성 키우기, 셋째는 공동체에 속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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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공동체 - 손우정 교수가 전하는 희망의 교실 혁명
손우정 지음 / 해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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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이라는 말과 공동체라는 말이 합쳐져 우리 교육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아마 수업에서 환멸을 느끼던 교사들이 돌파구로 일본에서 실시한 배움의 공동체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리라.

 

배움의 공동체는 그래서 교육청이나 교육부에서 주관하는 무슨무슨 연구학교나 시범학교와는 달리, 교사들로부터 시작해서 교사들이 정착시킨 교수학습법이라고 할 수 있다.

 

교사를 개혁의 대상으로 치부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런 모습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사실 수업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수업을 가장 많이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바로 교사 자신들이고, 자신의 수업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역시 교사들이다.

 

그런 교사들이 무기력과 분노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 배움의 공동체를 배우고자 했고, 학교에 도입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런 교사들과 배움의 공동체의 다리 역할을 이 책을 손우정 교수가 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대학에서 직접 사토 마나부 교수에게서 지도를 받고, 또 그와 함께 여러 배움의 공동체 현장에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배움의 공동체 수업을 전파한 사람이 바로 손우정 교수다.

 

물론 배움의 공동체가 일본과 똑같은 방식으로 갈 수는 없었다. 일본이라는 나라와 우리나라의 특성은 다르며, 또 우리나라에서도 학교마다 특수성이 있기에, 자기 학교에 맞는 배움의 공동체 수업을 만들어가려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따라서 이 책에서 손우정 교수가 이야기하듯이 배움의 공동체는 특정한 수업기술(매뉴얼)이 아니라 교육 철학이라고 해야 한다.

 

철학의 공유. 이것이 바로 교육개혁의 시발점이었다. 수업개선의 첫걸음이었다. 얼마나 수업을 바꾸고 싶었으면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배움의 공동체를 받아들였겠는가.

 

배움의 공동체를 받아들이고 정착시킨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배움이 커졌다고 한다. 배움이 커졌다는 얘기는 무력감에 빠져 학습으로부터 도피하는 아이들이 줄었다는 얘기가 되고, 교사 중심에서 학생 중심으로 바뀌었다는 얘기이며, 교사는 교사, 학생은 학생이라는 대립적인 관계가 교사와 학생이 함께 하는 서로 신뢰하는 관계로 변했다는 얘기다.

 

이 책에서 손우정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배움의 공동체 수업에 관련해 그동안 그가 겪은 실천을 바탕으로 배움의 공동체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배움의 공동체 이론에 대해 정리해주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 배움의 공동체를 운영하는 것이 좋은지, 또 구체적인 수업사례를 들어 배움의 공동체가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여 이 책은 배움의 공동체에 대한 개론서라 할 만한데, 개론서는 큰 틀의 이론을 제공하고 있으니, 세부적인 사항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채워넣어야 한다.

 

그 채움을 교사들이 하고 있고,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정착한 학교도 있다. 그리고 배움의 공동체를 시도하는 학교도 있고.

 

그렇다. 지금 서울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는 눈을 뜨고 수업을 듣는 학생이 한 반에 5-6명 남짓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교사들이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고 하는데, 중학교에서는 학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아이들이 많은데, 초등학교에서는 기초학력조차도 익히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는데...

 

이것을 한 번에 해결할 만병통치약은 없겠지만, 적어도 이런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한 방법으로 배움의 공동체를 도입할 수는 있겠다.

 

물론 지금 학교 현장의 현실적인 면에서 많이 힘들기도 하겠지만, 교사들이 스스로 이런 수업방법을 도입하려 하고 있다는 데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길게, 조급하지 않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면서 아이들을 배움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수업 방법, 그 중에서 검증된 방법인 이 배움의 공동체...

 

배움의 공동체에 대한 임상실험 보고서이자, 이론서이면서 홍보책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

 

이 책의 개론을 구체적인 실천으로 채워넣으려는 많은 교사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아직은 우리 교육에도 희망이 있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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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멈퍼드 건축비평선 - 『뉴요커』 스카이라인 칼럼 1947-1956 문명텍스트 18
루이스 멈퍼드 지음, 서정일 옮김 / 한길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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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루이스 멈퍼드.

 

하긴 건축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지가 얼마 되지 않고, 건축이라고 해야 기껏 유명한 사람 이름이나 알고 있는 처지이고, 몇몇 유명한 건물에 대해서 사진을 본 정도니, 멈퍼드라는 사람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그래도 건축비평선이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오래 전 글들이지만, 건축이란 이미 100년, 200년 전의 것도 건재하게 우리 앞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러니 건축에 대한 비평글도 굳이 시대를 따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947년부터 1956년 사이에 [뉴요커]지에 칼럼으로 연재된 글들이다. 그러니 미국의 뉴욕이라는 도시와 거의 50-60년 전이라는 시대가 지금 나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가 되기 쉽다.

 

뉴욕이라는 도시에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이 글을 읽기에는 좀 어렵다. 건축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여 구체적인 건축에 대해서 그림을 그리긴 포기하고, 그가 어떤 자세로 글을 써갔고, 건축에 대해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읽고, 지금의 우리와 비교해 보기로 했다.

 

건축은 결국 사람이다. 사람이 얼마나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가를 중심으로 미와 기술이 융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와 기술이 융합되어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면 자연히 자연과도 어울려야 한다. 그의 글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잘 드러나고 있다.

 

공원, 산책로, 살기 좋은 인구 밀도... 고층보다는 저층으로... 등등

 

대도시의 거대한 건축물에 대한 비평에서부터 공공건물에 대한 비평, 그리고 도시계획까지 다 드러나고 있는 비평선집인데...

 

마지막 부분에 나온 말...

 

이 말은 지금도 유용하다. 아니, 우리가 명심해야 한다.

 

희망적 대안은 한가한 몽상이 아니라 현실을 직면하는 능력과 공공적 책임감이 필요하며 지금까지 권한을 휘두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과감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아이비엠사는 탈중심화를 주도적으로 실천하고 있는데 그들이 좋아하는 모토를 우리 계획당국, 도로 기술자, 은행과 보험사, 부동산 개발업자 그리고 진정으로 시민과 투표권자 모두에게 퍼뜨려야 한다. 생각하라! 320쪽

 

도시 계획을 할 때 교외에 다른 거주지를 마련하고, 도로를 확충하려는 일이 얼마나 헛된지를 멈퍼드는 그 시대에 이미 이야기하고 있는데, 한참 뒤에 우리나라 서울을 보면, 참... 이 사람의 비평글을 도시계획자들이나 행정가들이 전혀 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이 교통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한 것들이 오히려 더 교통문제를 더 일으킨다는 사실을 그가 이미 지적했음에도 말이다.

 

비록 뉴욕의 모습이 그림으로 떠오르지 않아 구체적인 장면들을 상상하지는 못했지만, 건축에 대한 태도에서, 적어도 우리가 건축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는 고민하게 되는 책이었다.

 

나같이 단순히 건축에 관심을 가진 사람 말고, 도시설계자나 도시정책입안자, 아니면 도로 기술자 들이 읽으면서 지금-여기에 적용한다면 꽤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꼭 그들만이 아니더라도 나같은 사람도 읽어서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알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멈퍼드가 바란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역시, 생각은 힘이 세다.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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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인간 2 Rediscovery 아고라 재발견총서 2
메리 셸리 지음, 김하나 옮김 / 아고라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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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이다.

 

1,2권을 합치면 총 분량이 800쪽이 넘는 대작이다. 1800년대에 이렇듯 장편소설을 썼다니... 그것도 인류의 미래를 상상해서, 2000년대를 배경으로 해서 말이다.

 

1권이 개인사를 중심으로 작품이 전개되어 흥미가 떨어졌다면, 2권은 역병으로 인한 인간들의 갈등과 죽음이 묘사되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특히 전세계적인 재앙을 앞에 두고 인간들이 취하게 되는 모습들이 이 소설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어서 과거의 소설이 아니라 현재를 볼 수 있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종말을 앞둔 사람들이 취하게 되는 세 가지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우선 정착민과 이주민의 갈등이 이 소설에 나타난다. 자신들이 살던 터전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는데, 그들이 그 곳에 가서 이미 정착해 있던 사람들과 함께 살면 좋겠지만,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

 

서로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단들, 그것은 기존에 살고 있던 집단과 이주해 온 집단을 막론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지니는 태도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들이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데, 평화로운 해결보다는 무력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 소설에서 이 점이 제일 먼저 나오는데, 대륙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영국 사람들을 약탈하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약탈만으로는 인류가 생존할 수 없다. 하여 에이드리언으로 하여금 이들이 평화적으로 서로 합의를 보게 만든다. 이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다.

 

종말이 눈 앞에 닥쳐옴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장점들을 충분히 살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에이드리언이나 또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어서, 최근에 온갖 재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돕는 오히려 유토피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사회학적 통찰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살던 터전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는 모습이다. 이미 폐허가 된 곳에서 살 수는 없는 일. 또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곳에서 사는 일 자체는 공포다. 그러기에 다른 곳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곳으로 집단 이주를 한다.

 

청교도들이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듯이, 지금도 살기 힘든 사람들이 좀더 살기 좋은 나라를 찾아 떠나듯이 집단 이주를 하는 모습이 이 소설에 나오고 있다.

 

현실이 힘들다면 그곳을 떠나는 것, 이미 고쳐질 가능성이 없으면 떠나는 것, 당연한 일이다. 지구가 살기 힘들어지면 우주를 개척하여 그곳으로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났다고 해도 이미 지구 전역에 재앙이 번졌을 때는 그 어디도 살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 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재앙에 직면하지 않게 미리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해주고 있다.

 

역병이라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 재앙이라도, 사실은 인간이 최대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 대비는 할 수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 소설에서도 이런 재앙의 징조는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데(1권에서), 당시 시대의 한계이겠지만, 의사들의, 과학자들의 노력이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것이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이런 것이 예언서의 역할 아니겠는가. 예언서에 있는 대로 된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라 하는...

 

세 번째는 사이비 종교가 기승을 부린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있을 때 그들에게 감미로운 환상을 제공하는 사이비 종교가 창궐한다. 이런 사이비 종교가 창궐했을 때는 이성의 힘으로 이를 막을 수 없다.

 

소설에서 에이드리언이 합리적인 말로 이들을 설득하려 해도 이들은 한사코 그의 말을 부정하고, 사이비 종교 지도자의 말에 따른다. 그것이 그들을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못할지라도 그들은 사이비 종교 지도자를 따른다. 그리고 종말을 맞는다.

 

이런 점은 근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비일비재한 일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무언가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자신을 맡기려는 태도, 자신의 책임을 다른 존재에게 넘기고 그것에 안주하는 태도.

 

이런 태도는 어려울 때 더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지기도 한다. 과학기술이 최첨단을 달리는 지금 시대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으니...

 

그러니 이 소설은 종말을 맞게 되는 인간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그 종말을 맞이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종말이 닥쳤을 때 인간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이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조금 무섭다. 인류가 종말이라는 재앙을 아직은 맞이하고 있지는 않지만, 소행성의 충돌로 지구 멸망의 위기가 닥친다는 주제로 만들어진 영화도 많고, 인류 종말을 예언하는 예언서들도 있는데...

 

이 소설은 인류 멸망이 역병이라고 하고 있다. 전 세계를 휩쓴 역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대책은 없는...

 

그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러나 그런 재난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은 깨우쳐 주고 있다.

 

읽기가 지지부진했던 1권에 비해 2권에 들어서서는 읽기에 속도가 붙었다. 마치 1권이 마라톤을 하는 사람과 같은 속도였다면, 2권은 특급열차를 타고 달리는 속도와 같다고나 할까.

 

뒷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빨리 빨리 읽게 된다. 그만큼 흥미롭다. 여기에 재난 상황에서 보이는 인간들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으니... 더욱 흥미롭고... 생각할 거리도 많고.

 

최후의 인간. 이 소설의 맨 앞에서 예언서라고 했고, 실제로 소설의 제일 앞부분에서 어느 동굴에서 발견한 글들을 짜맞추었다고 했으니, 예언서 형식을 띤 소설... 현재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그 미래를 다시 현재에 끌어오는 그런 소설.

 

지금 우리는 메리 셸리가 말한 2000년대를 살고 있다. 비록 그가 말한 최후의 인간만이 살아남은 2100년은 되지 않았지만, 지금 세상엔 '에볼라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설마? 이 소설처럼.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자본의 욕망에만 빠지지 않는다면. 이 소설에서처럼 인간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이 소설에서 귀족들이 위기 때 자신들의 권리를 양보한 것과 같이 자본도 인류를 위해서 충분히 양보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이 소설에서처럼 최후의 인간만이 남지 않고, 인류가 다양한 인류가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런 생각도 하게 만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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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인간 1 Rediscovery 아고라 재발견총서 1
메리 셸리 지음, 김하나 옮김 / 아고라 / 2014년 7월
평점 :
품절


메리 셸리.

 

내가 이름을 알게 된 것은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소설을 통해서 였다. 그녀가 영국 낭만파 시인인 셸리의 부인이라는 사실을 그 책에 나와 있는 설명을 통해서 알 수 있었고, 그 때 그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그 생명체를 만들어낸 박사의 이름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매우 재미있게 "프랑켄슈타인"을 읽었기 때문에, 또 100년 전에 이미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복제 문제와 비슷한 문제제기를 했다는 그 총기 때문에, 이 책이 나왔다는 기사를 본 순간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제목도 "최후의 인간"이지 않은가. 뜻하지 않은 일로 인간들이 멸망해가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인간의 모습을 이야기한 소설이겠지 기대하면서, 상당히 흥미진진하겠지라는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1,2권으로 분리되어 출판되었는데, 지금은 1권만 읽은 상태.

 

주요 등장인물은 여섯 명이다.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라이오넬, 그리고 그의 여동생 퍼디타. 왕자이었으나 아버지가 왕위를 포기하여 귀족이 된 에이드리언과 그의 누이 아이드리스, 여기에 야망을 지닌 사람인 레이먼드, 그리고 그리스 귀족 출신의 여자 에바드네.

 

1권에서는 이 중에 세 명이 세상을 뜬다. 바로 에바드네와 레이먼드, 퍼디타. 그리고 이들의 죽음은 곧 다가올 비극을 예비하고 있는데...

 

단순한 사랑이야기로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에이드리언이 에바드네를 사랑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에바드네는 레이먼드를 사랑하고, 그러나 레이먼드는 퍼디타와 결혼하고, 라이오넬은 아이드리스와 결혼을 하고, 에바드네는 결국 영국을 떠나고 반쯤 정신이 나가있던 에이드리언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전개되고 있으니, 이 정도면 흔한 연애소설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첫부분에서는 잘 읽히지 않는다. 이 정도 사랑의 갈등이야 지금 세상에서는 별것도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1권의 중반부를 넘어서부터 그리스와 터키의 전쟁이 나오고, 그 전쟁에 그리스를 위해서 레이먼드가 참전하면서부터 갈등이 심화된다.

 

이제부터는 단순한 사랑의 갈등이 아니라 사회 문제가 대두된다. 이는 레이먼드의 죽음과 더불어 불길하게 다가온다. 

 

레이먼드의 죽음이 전쟁으로 인한 죽음이라기보다는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물론 그는 소설 속에서 폭발로 인한 사고로 죽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광범위하게 나오고, 그것은 전쟁의 비극과 더불어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린다.  

 

소설에서 먼저 그리스-터키 전쟁에 참전하다 부상을 당해 영국으로 귀국한 에이드리언이 전쟁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스 전쟁의 진짜 이유는 드러나지 않았어. 그럴싸한 이유를 뒤에 잘 숨겨두었던 거지. 296쪽.

전쟁이라는 격한 시간 속에서 인간의 탈을 쓴 악마로 변모한 거야. 297쪽.

 

다음에 레이먼드를 찾아 그리스에 왔다가 그와 함께 참전한 라이오넬이 목격한 전쟁의 참상, 전염병의 위협이다.

 

모든 인류의 적인 전염병은 6월에 나일 강가에서 뱀의 머리처럼 사악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원래 전염병과는 거리가 멀었던 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도 감염이 시작된 상태였다. 그곳이 바로 콘스탄티노플이었다. 321쪽.

 

이런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그리스군에 광범위하게 퍼지고, 결국 그 두려움이 레이먼드를 홀로 콘스탄티노플 성으로 들어가게 하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하지만 전염병은 여기서 언급만 되고 있을 뿐이다. 전염병의 위험성은 레이먼드와 퍼디타의 죽음 이후 라이오넬의 설명을 통해서 언급이 될 뿐이다. 아직은 영국에서 그 전염병의 위협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생각있는 사람들이 우려를 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라이오넬은 전엽병의 위험성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제 다가올 여름에 감염이 확산될 것을 우려한 그리스는 테살리아 경계에 저지선을 세워 엄격하게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고 하네요. 402쪽.

 

여기서 1권이 끝난다. 아직 전염병은 영국에 상륙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두려움을 주인공이 느끼고 있을 뿐이다.

 

이제 본격적인 종말 문학적인 요소는 2권에서 시작된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이 지금부터 거의 100년 전 소설인데,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과 유사한 일들이 묘사되어 있음에, 우리 인간의 역사가 이토록 반복을 거듭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전쟁의 비인간성. 전염병의 위협.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두 가지 위협 아니던가. 세계 각지에서 전쟁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거나, 고통을 받고 있으며, 에볼라 바이러스가 지구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 아니던가.

 

우리는 지금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로 떨고 있지 않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도 엄격하게 출입국을 통제하고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한 해결은?

 

단지 공포 속에 빠져 있으면 안되지 않은가. 자, 소설 2권을 읽어보자. 어떻게 대처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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