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사진과 빅이슈 그리고 홈리스


  '홈리스 월드컵' 처음 들어봤다. 빅이슈 덕이다. 이런 경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니... 그만큼 내세계에 갇혀 있었다는 얘기다.


  올림픽이 끝난 다음에 열리는 패럴림픽은 알고 있었는데, 홈리스 월드컵이라니... 그것도 매해 열린다니.


  영화 '드림'을 소개하는 글이 빅이슈 여기저기에 실렸는데, 왜 그랬나 했더니, 영화 '드림'이 홈리스 월드컵에 바탕을 두었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참가한 2010년 대회.


대회 참가 목적이 우승이 아니다. 참여하면서 자신들이 할 수 있음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온마음으로 느낄 수 있고, 또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거창한 목적을 달지 않아도 좋겠다. 그냥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월드컵을 홈리스들도 즐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 그들이 축구를 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고, 또 그들만의 세계 대회를 갖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니 홈리스 월드컵이란 대회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가 있다. 여기에 우리나라 홈리스들도 참여하고 있다는 점도 의미가 있고.


여기서 생각해 본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했다. 인종, 성별, 경제적 차이, 신체 등에 의해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이 당연한 명제가 당연하지 않게 여겨지는 사회는 문제가 있다. 아직도 장애인들이 지하철 역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라고 시위를 하고 있는 현실이 생각났다. 


요즘은 언론에서도 잘 다뤄주지 않지만, 이들은 한 해가 넘도록 자신들도 안전하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들의 요청에 답을 하지 않고 있는 관련기관이 답답하기만 한데...


홈리스 월드컵도 마찬가지다. 홈리스들은 경제적으로 참가비를 마련하기 힘들다. 참가비만이 문제가 아니다. 외국에서 대회가 열리니, 교통비도 마련해야 한다. 많은 돈이 들어가는 대회, 홈리스 월드컵이지만 현실적으로 경비는 무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경비 문제로 고민하지 않고 참가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래야 홈리스 월드컵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할 수 있다. 


홈리스 월드컵은 한 해에 한 번 열리는 특별한 행사다. 이런 행사가 아니라 장애인들이 출퇴근을 하고 직장에 다니는 일은 늘상 해야 하는 일이다. 보통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겐 보통이 특별이 되지 않는가.


보통이 보통이게 하기 위해서는 제도가, 시설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뒷받침은 사회가 책임을 져야 한다. 사회의 의무다. 이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기관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휠체어를 탄 사람이 연극을 보러 대학로에 간다고 하자. 수많은 소극장들이 있는 서울 대학로. 하지만 소극장들은 3층 이상에 있거나 지하에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수 있는 소극장이 별로 없다는 것.


즉, 휠체어를 탄 사람은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고 싶어도 (대형 공연장이 아닌 소극장들에서 하는, 우리가 그다지 비싸지 않은 가격에 자주 접할 수 있는)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홈리스 월드컵처럼 참가비용 때문에 참가하기 힘들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과 비슷하다. 개인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제도, 시설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보통이 특별이 되지 않게.


영화는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빅이슈를 통해서 홈리스들이 꽤 오랫동안 대회에 참여해왔음을 알게 되었다. 좀더 관심이 생겼다고나 할까.


이번 호에는 그때 직접 선수로 참여했던 빅판의 이야기와, 감독으로 참여했던 사람, 그리고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영화를 본 사람이 이번 호를 읽는다면 영화와는 또다른 무엇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같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글을 통해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으니.


그래서 영화 '드림'은 영화로 끝나서는 안 된다. 빅이슈가 홈리스의 자립만을 위한 잡지가 아니라 우리 보통 사람들을 위한 잡지이듯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낮은 시선에서 살펴볼 줄 알아야 하겠다. 높은 곳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을 볼 수 있는 눈, 그런 눈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영화 '드림'이었으면 좋겠다. 잡지 [빅이슈]가 그런 눈을 지니게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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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3-05-12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영화를 봤는데, 감동적 실화와 별개로 정작 영화는 별로였어요..
 

  좋았다. 박남준 시인의 첫시집이란다. 다시 펴낸 첫시집. 아마 시인도 감회가 새로웠겠지만, 나처럼 박남준 시인의 시집을 몇 권 읽은 사람에게도 반가운 일이 된다.


  첫시부터 마음에 들었다. 개인이 느낄 수 있는 사랑, 서정을 잘 담아내고 있는 시인데, 꼭 개인의 서정이 아니라, 사람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무언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면, 그 그리운 대상에게로 가려고 하지만, 가도 가도 닿지 못할 때 그냥 포기할까? 아니다. 포기하지 않는다. 가지 못하지만, 그 대상을 잊지 못할 때 기다린다. 


  그가 지나갔던 자리에 서서, 기다리는 자세.. 이는 포기가 아니라 다시 돌아올, 다시 만날 때까지 잊지 않고 기다리겠다는 마음의 표시다.


이런 마음이 그 자리에 서서 나무가 될 수도 있지만, 다른 쪽으로 마음이 갈 수도 있다. 그리워 하는 대상이 잘 살 수 있는 곳을 만드는 일. 또는 그리워 하는 대상이 바라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일.


그와 함께 가지는 못하지만, 그가 바라던 세상을 향해 가면, 이미 그는 그 걸음 속에 함께 한다. 박남준 첫시집은 그래서 개인의 마음에서 사회로 나아간다. 


시인이 태어난 전라도, 특히 법성포 이야기에서부터 광주민주화 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을 상기시키는 시까지, 이 시집에는 다양한 마음이 담겨 있다.


다양한 마음이라지만, 그 마음은 그리움이다. 아직 우리가 도달하지 못한 무엇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을 향해 나아가는 마음.


첫시부터 마지막시까지 주욱 읽어가면서 마음이 포근해지기도 하다가도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다가, 슬픔에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시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시집이다. 여기에 이야기가 있는 시도 있으니, 한 사람의 인생이 녹아 있는 시 '할매는 꽃신 신고 사랑 노래 부르다가'라는 시도 있으니. 시를 통해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시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시는 포기를 모른다. 시는 그 자리에 서 있더라도 누군가에게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또한 언젠가 올 사람을 환대해 주기 위해 기다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시는 계속 우리에게 남아 았다. 박남준 첫시집을 읽으면서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라는 제목이 된 시에서, 시가 하는 역할이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어쩌면 시는 시를 쓸 수 없는 시대에도 그 자리에 남아 시는 쓰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첫시를 보자. 그냥 마음에 받아들이면 좋다.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먼 길을 걸어서도 당신을 볼 수 없어요

     새들은 돌아갈 길을 찾아 갈숲 새로 떠나는데

     가고 오는 그 모두에 눈시울 붉혀 가며

     어둔 밤까지 비어 가는 길이란 길을 서성거렷습니다

     이 길도 아닙니까 당신께로 가는 걸음

     차라리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섰습니다


박남준, 세상의 길가에 나무가 되어, 걷는사람. 2022년.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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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저 1호.


  인간이 만든 물체 중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떠나가고 있는 존재.


  망망한 우주를 계속 나아가야 하는, 결코 돌아오지 않을 우주선.


  시집 표지가 캄캄하다. 우주는 이렇게 암흑이다. 그리고 우주에 무엇이 있는지 우리 역시 모른다. 캄캄할 뿐이다.


  다른 생명체가 우주에 있을까? 태양계를 겨우 지금 벗어나고 있는 지금, 빛의 속도로도 200만년이 걸린다는 안드로메다까지 가려면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안드로메다가 아니라 그 밖의 우주에 도달하는 일은 과연 가능할까? 인간이 만든 물체가 그때까지 버텨줄까?


우리가 그린 그림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 퇴색되고 사라지듯이, 보이저 1호 역시 언젠가는 제 수명을 다하지 않을까?


우주 공간에 산소가 없으니 부식이 되지 않아 고장이 나지 않을까? 그냥 관성의 법칙으로 앞으로만 나아갈까?


이 모든 일들은 미지의 세계에 속한다. 그럼에도 보이저 1호는 우주로 나아간다. 일말의 소통 가능성을 안고.


다른 외계 생명체를 만났을 때 우주에 또다른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지구의 언어, 지구의 문화를 담고서.


이렇게 캄캄한 암흑에서도 소통을 포기하지 않는다. 소통하기 위해서 하나로 통일하지 않는다. 지구에 존재하는 많은 언어들을 레코드판에 담고, 또 다른 예술작품도 담아두었다.


소통하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다 찾는 일. 그것이 바로 소통불능의 시대에 소통을 추구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다.


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로 계속 나아가는 보이저 1호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소통의 방법이 담겨 있는데... 암흑 우주가 아닌 푸른, 창백한 푸른 점, 아주 작은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란...


마치 보이저 1호가 외계 생명체를 만나 그 속에 담긴 지구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그들이 그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만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보이저 1호가 찍어서 보낸 지구의 모습은 '창백한 푸른 점'이었는데, 그 속에 사는 우리는 마치 우주와 같이 거대한 지구라고 여기고 살아가고 있으니...


지구에 살고 있는 각 나라 사람들이 서로를 외계인 바라보듯이 보고 있지는 않은지... 또 한 나라 안에서도 서로를 외계인 보듯이 보고 있지는 않은지... 각자 자기 말만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보이저 1호에 담긴 메시지들이 이해받지 못하고 계속 우주로 나아가고 있듯이, 우리 역시 이러한 소통불능의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은지...


적어도 보이저 1호에는 소통하고자 하는 여러 노력이 담겨 있는데... 류성훈 시집을 읽다가 제목이 된 시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계속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보이저 1호. 언제 보이저 1호는 그가 담고 있는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는 생명체를 만날까 하는 생각. 그러다가 우리 모두가 보이저 1호처럼 아직 소통불능의 세계에 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각자의 메시지를 담고서.


다만, 보이저 1호는 다양한 언어를 담고 있으니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하는데, 자기만의 언어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들이 판치는 세상은 소통불능의 세상이 된다. 


류성훈 시를 읽으면서 소통에 대해서 생각해 봐도 좋겠다.


       보이저 1호에게

 

     물통 속에 밤이 퍼졌다

     내 붓은 차갑게 씻기고


     안부라는 건

     대개 꿈풍선일 뿐, 눈부신

     우주 방사선 속에서


     버릴 꿈이 없어서, 널 닮은

     연체동물을 그렸다 저 외행성 출신의

     물기 없는 입을, 활짝 핀

     중력 없는 팔들의 짙푸른 기별을


     축하한다

     악수하는 법도 몰랐으면서

     우리는 늘 몽상이라는 교신 위에서

     지구에서의 너를 그렸으니

     한때 색색 풍선보다 더 필요했던

     날숨을, 더운 붓을 휘갈겨 본다


     화장실 창밖이 밝아 오고

     벌어진 해바라기가 그려져 있다

     그 금빛 껄끄러움 또한

     교신, 이라 생각했던 물음을 안고

     나는 지금 태양권의 어디쯤을

     쫓아가고 있을까


류성훈, 보이저 1호에게, 파란. 2020년. 102-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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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에는 영화 관련 글이 많다.


  드라마도 영화 관련 작품에 포함을 시키면 표지 화면을 장식한 공찬이 출연한 드라마부터, <사랑의 고고학>이라는 영화에 출연한 옥자연에 대한 글, 그리고 <라이스보이 슬립스>의 감독이자 출연자인 앤소니 심 감독 이야기까지.


  영화(드라마)가 소설과 비슷하게 우리에게 다른 인생을 경험하게 해주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 관한 글들은 삶에 대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배우란 직업은 자신의 삶과 작품 속의 삶을 각자 살아가기도 하고, 함께 살아가기도 하는 사람이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삶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영화에 관한 글들을 읽으면서 평소 하지 못했던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좋은데, [빅이슈]를 읽으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만나거나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만난다는 점에서 좋다.


이번 호에서 특히 생각할 글은 바로 말에 대한 정문정의 글이다. <정문정의 말빨글빨>이란 꼭지에 실린 글. 제목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품위를 지켜내는 비폭력 언어'(36쪽)다.


언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는 요즘이다. 그 누구가 내뱉은 말들이 국제 관계에 영향을 주는 모습을 요즘 보고 있는데, 국제 관계뿐만이 아니라 국내 관계에서도 이 말들이 숱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자신의 말이 얼마나 큰 파급력을 지니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한 말하기를 하는 사람. 그 사람의 말하기가 여과 없이 방송을 통해서 나오고 있으니... 사회 전체가 비폭력 언어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지 않나 싶다.


많은 말이 있지만 4.19혁명을 기리는 기념식에 참석해서 한 말은 비폭력 대화가 아니라 폭력 대화임을 생각하게 되는데...


'4.19혁명 열사가 피로써 지켜낸 자유와 민주주의가 사기꾼에 농락당해서는 절대 안 되는 것'이라는 말과 '독재와 폭력과 돈에 의한 매수로 도전을 받을 수도 있다'는 발언은 특정 정치인과 특정 정당을 지칭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밖에 없다.(대통령의 4.19 기념식 발언은 조금만 검색해도 찾을 수 있다)


정치란 한 당과 대통령과 그 측근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정치는 새의 날개처럼 좌우가 모두 있어야 한다. 좌우를 아우르는 몸통 역할을 행정부, 특히 대통령이 해야 한다. 자신이 날개 자리로 가면 안 된다.


날개 자리로 가지 않고 몸통을 지키는 대통령의 말하기가 바로 '비폭력 대화'일텐데, 상대를 사기꾼, 폭력. 돈으로 매수하려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날개 자리로 자신을 옮기고, 그 날개만을 키우려는 말하기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다.


한쪽만 키우는 말하기, 이는 몸통이 없는 비대칭 날개만이 있는 새를 생각해 보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다. 그 새가 날 수 있을까? 얼마 날지 못하고 추락하고 만다.


정치에서 비폭력 대화가 아닌 '폭력 대화'가 난무하면 정치는 날개는 있지만, 비대칭 날개를 지니고 균형을 지닌 몸통이 없는 정치가 되어버려,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가 없게 된다. 이것이 오히려 본인이 비판한 '독재와 전체주의 체제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을 쓴다고 해도 이것은 가짜 민주주의입니다'에 해당하지 않을까. 왜 그 점을 생각하지 않을까.


그러니 이런 연설문을 보면 정문정이 한 이 말이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싸울 때조차 상대를 존중하는 법, 상대와 나의 존엄을 지키면서 우아하게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는 법은 누구나 배우고 익혀서 써먹을 수 있는 교양입니다'(41쪽)라고 했다. 이 정도 교양을 행정부 수반이라는 직책을 맡은 사람이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적어도 행정부 수반이라면, 한 나라를 대표하는 사람이라면 정치를 하는 다른 정당, 정치인을 존중해야 한다. 또한 다른 나라를 자극하는 발언을 하면 안 된다. 무엇보다도 '비폭력 대화'를 실천해야 하는 자리가 바로 행정부 수반이라는 자리다. 자신이 날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몸통이 되는 것. 


몸통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비폭력 대화' 아니겠는가. 이 비폭력 대화를 실천할 때 정치권도 안정이 되고, 국제 정치에서 우리나라의 처지도 안정이 될 수 있다. 굳이 애써서 몸통에서 벗어나 날개 자리고 가서 추락의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있을까? 


[빅이슈] 297호를 읽으며 한 생각이다. 영화만 잘 봐도, 감정이입을 할테니, 비폭력 대화에 한 발짝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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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그런 사람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책. 평범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려는, 삶을 보려는 사람들 이야기다.


2023년 봄호다. [삶이보이는창]도 오래 발간되었다.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지. 그럼에도 이렇게 꿋꿋하게 버티면서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고마운 책이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고, 미처 생각 못한 이야기들도 실려 있지만, 이번 호에 나온 노동시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진다.


노동시간, 단순하다. 줄이면 된다. '더 짧은 노동시간과 더 긴 여유시간'(6쪽)을 원한다고 되어 있다.


당연한 말이다. 우리는 여유시간이 필요하다. 69시간 노동 운운은 말할 것도 없고... 하루 노동시간이 8시간이 된 지도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하루 노동시간을 6시간으로 하려는 나라들도 있지 않은가.


하루 6시간 5일 노동. 그러면 주당 30시간이다. 정부에서 처음에 내놓은 시간의 반도 되지 않는다. 노동시간이 줄면, 생산력이 떨어지나? 아니, 노동시간이 준 만큼 다른 노동자들을 더 고용하면 된다.


임금이 오른다고? 기업을 운영하는데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얼마나 될까? 정확한 통계가 필요하지만, 인건비보다는 다른 여타 비용이 기업 운영에 더 많이 들 것이다. 


노동자의 수 증가가 생산력 증가로 이어진다면, 기업의 이윤에는 그다지 큰 손실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인구절벽, 인구가 급감한다고 걱정하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인구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한다. 인구가 늘려면 사람들에게 여유가 있어야 한다. 세상은 즐길만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나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내 후손들이 즐길 수 있는 사회라면 아이를 낳는다. 이래서 인구 문제 대책에 노동시간을 포함시키는 것도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든다.


전국민이 하루 6시간 노동만 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시간으로 활용해도 먹고 살 수 있는 사회. 노동시간을 더 줄여서 하루 4시간 노동을 하고, 나머지는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사회. 노동자들이 과로로 쓰러지는, 하루에도 수많은 산업재해가 일어나는 사회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이번 호다.


표지 그림처럼 따스하게, 서로가 서로를 감싸주는, 그런 사회... 그런 사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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