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호를 읽는다. 읽을거리가 많다.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는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잡지라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단지 사회적 약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그런 관심들을 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준다. 물론 사회 문제만을 다루지 않는다.


  작은 행복이라고 해야 하나? 디저트에 대한 소개도 하고, 집에 대한 소개도 하고, 직업에 대한 소개도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많은 면들이 이 잡지에 실린다고 보면 된다.


  이번에는 농업이다. 빅이슈와 농업은 거리가 멀 거라는 생각을 하는데, 빅이슈가 도시에서 생활하는 집 없는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삼는다면, 농업은 정착해서 살아가는, 주거문제는 해결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농민들의 삶은 팍팍하다. 살기 힘들다.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은 예전부터 들려왔지만, 이제는 웬만한 기업농이 아니면 농업으로 버티기 힘들다. 그렇다고 농업을 포기할 수도 없다.


우리가 먹을거리 없이 살아갈 수는 없기에, 농업은 우리들 삶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갈수록 힘들어지는 농업에 대해서 빅이슈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게다가 기후위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도 힘들지만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무척 어려움을 겪었으니, 기후위기를 빅이슈가 다루면서 농업을 다룰 수밖에 없다.


농업에 종사하는데, 도시에서 하는 농업을 소개하기도 하고, 또 친환경, 유기농으로 농사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 못난이 채소를 판매하는 곳을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맛은 같은데 단지 못생겼다는 이유로 상품이 되지 못하는 채소들이 많았는데, 이런 관점을 벗어난 사람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이처럼 빅이슈는 다양한 삶, 다양한 사람들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들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세상임을 잊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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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결실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떨어짐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떨어짐이 죽음을 의미한다면, 가을은 성숙의 계절이자, 죽음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가을에 떨어진다면 열매를 맺을 수도 있었을테라고 조금 위안을 하기도 합니다. 


  무릇 생명이란 나고-자라고-죽고를 반복하는, 그 개체는 유일한 존재로 이것을 반복하지 못하지만 생명이라고 하는 전체를 보면 이러한 반복이 계속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의 섭리라고 하지요. 그런 자연의 섭리에 따라 때가 되어 세상을 뜨게 되면 슬프지만 마음을 상하게까지는 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애이불상(哀而不傷)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죽음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아주 특별한 죽음의 의식'이라는 시인데요... 앨런 긴즈버그와 부크월드라는 사람. 자신의 죽음을 지인들에게 알리고 죽었다는 그 사람들. 시인은 그래서 이들은 가을을 만끽하고 드디어 떠났다고 할 수 있다고 여겼나 봅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으니까요.


'둘 다 인생을 마감하는 큰 행사의 하나인 죽음 앞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이 위엄스럽고 또 유쾌해 보여 좋았다.'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9쪽)


하지만, 가을이 되기 전에 떨어지면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의 섭리라고 할 수 없지요. 우리는 너무도 많은 이렇게 이른 죽음을 만났습니다. 최근에는 더욱 더 많은 죽음을 만나게 되었지요.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 이들에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겠지요.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의 책임으로, 그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우리는 진정한 애도를 표하고, 또 그런 죽음을 일으킨 자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애도와 책임은 따로 갈 수가 없습니다. 책임을 지게 하지 않고는 진정한 애도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러니 애도를 하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이 되어야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가을. 결실, 풍요로움을 만끽해야 할 때, 오히려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요즈음, '메멘토 모리'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죽음은 삶의 친구로서 늘 삶의 곁에 있지만, 죽음이 나타나는 때는 삶이 충분히 충족되었을 때여야 합니다.


그래야 슬퍼하지만, 마음을 상하지는 않게 되겠지요. 지금은 많은 사람들 마음이 상처로 패인 상태입니다. 좀 다독여야 하겠지요.


우연히 이시영 시집을 만났습니다. 제목이 나를 끌었지요.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제목처럼 이 시집에는 죽은 존재들이 많이 나옵니다. 박홍주 대령, 조용수 사장,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당사자들, 외국 사람으로는 아옌데 칠레 대통령 등등. 이들의 죽음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많은 죽음에 빚지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시들 중에 마음을 울리는 시가 있었습니다. 봄날에 활짝 핀 목련. 얼마나 화사한가요? 이제 막 봄을 맞아 인생을 꽃피우기 시작할 때. 그런 봄날, 그래서 이 시는 더 슬픕니다. 


봄날


  목련이 활짝 핀 봄날이었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불법 체류 노동자 누르 푸아르(30세)는 인천의 한 업체 기숙사 3층에서 모처럼 아내 리나와 함께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목련이 활짝 핀 아침이었다. 우당탕거리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갑자기 들이닥친 출입국관리사무소 직원들이 다자고짜 그와 아내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기 시작했다. 겉옷을 갈아입겠다며 잠시 수갑을 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푸아드는 창문을 통해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다 그만 발을 헛디뎌 바닥으로 떨어져 숨지고 말았다. 목련이 활짝 핀 눈부신 봄날 아침이었다.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1쪽)


이렇게 좋은 날이 가장 좋지 않은 날, 축제의 날이 죽음의 날이 되면 사람들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존재들을 가슴에 묻고 영원히 기억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결의를 다집니다.


그 결의가 사람들 마음 속으로 스며들어, 시인이 말한 '평화'란 시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


  내가 만약 바람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미풍이 되어

  저 아기다람쥐의 졸리운 낮잠을 깨우지 않으리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 창비. 2007년. 119쪽)


더 말이 필요없는 시입니다. 더 말을 할 수 없는 때입니다.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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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시집. 오래 된 시집. 지금은 상상도 못할 억압의 시기. 그러나 시는 억압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시를 썼다는 이유로 온갖 탄압을 받았던 시대가 그 시대다. 불온함을 갖게 한다고. 시에는 불온함이 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 시는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자신에게 맞춘다. 신영복 선생이 온달과 평강공주에 대한 글에서 썼듯이... 


어리석은 우직함. 그것이 시일지도 모른다. 그런 시를 어떻게 대했나, 구광본 시집에서 '경고'란 시를 만났다.


민중의 나라가 과연 이런 나라일까? 상상을 억압하면서 과연 민중의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시는 이런 경고를 통해서 민중의 나라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구호만 있는, 그야말로 삶에서 떠난 말들만 난무하는 나라가 아니라, 진정 삶을 풍요롭게 하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는 앞에서 열거한 일들도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중의 나라다. 따라서 시에서 말하는 민중의 나라는 구호만 민중의 나라일 수밖에 없다.


경고


  이곳에서 시를 찾는 자나 하늘을 노래하는 자 혹은 날개 달린 동물들에 대하여 상상력을 발동한 자 그리고 꿈의 세계를 기웃거린 자는 다가오는 민중의 나라에 대한 반역자로 판단하여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임


- 구호만 남아 있는 이 도시의 시장 백


구광본, 강, 민음사. 1989년 11판. 24쪽.


표현의 자유.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시를 찾고, 하늘을 노래하고, 날개 달린 동물들에 대하여 상상력을 발휘하고, 꿈의 세계를 기웃거려야 한다.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한다.


말로만 자유, 평등, 공정, 정의를 외치는 나라가 아니라, 삶에서 실현되는, 이를 바탕으로 다른 세상을 꿈꾸는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한다.


구호만 남아 있는 이 도시의 시장은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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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는 당시 유령이 돌아다니고 있다고 했는데 그 유령은 시대를 대변하는 유령이라고 할 수 있다면, 지금 유령은 나타나지 말아야 할 망령에 불과하다.


  망령의 출현. 그것은 바로 현실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말.


  도처에서 예전에 사라졌던 망령이 부활해서 실제 존재들을 억압하고 있는데...


  그런 망령이 나타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망령이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망령의 출몰, 아니, 망령이 우리를 옥죄고 있는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헌책방에서 구입한 이 시집에서 우연히 망령을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망령을 철저하게 눌러놔야 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1989년 시집이니 꽤 오래 된 시집이지만, 그럼에도 이 시집에 실린 시 중에 '고인돌'은 지금 우리에게도 해당하지 않나 싶다.


                      고인돌


               죽는 일이 제법 무섭기는 하지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보다

               세상 더 무서운 일은 없다


               죽음이나 두려움에 관한 한

               우리보다 몇 곱절 훤했던 옛 사람들

               한 번 죽은 사람은 아주 보내버리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고인돌을 세웠다


               누운 사람 양편에 받침돌을 세우고

               일어설 생각일랑 꿈에도 못하도록

               어마어마한 뚜껑돌을 덮어놓은 것이다


정진명, 머나먼 DMZ. 문학과비평사. 1989년. 97쪽.


그렇게 눌러놓았어야 하는데... 다시는 나오지 못하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망령이 출몰하고 있다.


아니 망령을 불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불러낸 망령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다'고 해야 한다.


그래서 생각한다.


망령은 망령이 있을 자리로 가야 한다. 망령이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망령을 제자리로 보내고, 다시 이곳으로 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옛사람들이 '어마어마한 뚜껑돌을 덮어놓'았듯이. 그렇게.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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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보이는 것이 어쩌면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것들뿐이라는 사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 자신이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런 자세가 필요하다. 과연 나에게 보이는 것,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실일까? 내게 보이지 않는 면이 분명 있을텐데, 나는 그 보이지 않는 면을 보려고 노력했던가? 한번 더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가짜뉴스는 사라진다. 빅이슈에서 가짜뉴스를 다뤘는데, 가짜뉴스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진실은 그만큼 단순하다. 너무 어렵게 진실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그 단순함이 실천으로 이어지는 데는 꽤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에겐 가혹하게, 타인에겐 관대하게, 그리고 잘못한 것이 생긴다면 인정하고 사과할 것'(17쪽. 오후, '가짜뉴스 속에서 일단 대충 살아남기' 중에서)


참 단순하다. 그런데 참 어렵다. 자신에게 가혹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옛 성현의 말도 실천하기 힘든데, 이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나를 가혹하게 대하는 일... 남을 관대하게 대하는 일.


이런 자세만 지니고 있어도 지금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사망사고는 막을 수 있다. 살기 위해서 노동을 하는데, 그 노동으로 인해서 죽음에 이르는 일이 빈번하다니...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체가 어떤 환경인지 꼼꼼하게 챙기는 사업주, 관리자들이 얼마나 될까? 이윤보다도 노동자의 안전을 생각하는 경영자들이 얼마나 될까? 그들이 내는 이윤이 어디서 오는지, 노동이 없으면 이윤도 없음을 잘 알고 있을텐데...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가혹한 태도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치권의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가 떨어지거나 끼이거나 절단되거나 또는 서서히 몸 속에 스며드는 독으로 인해 죽는 경우가 많은데, 사과, 진정성 있는 사과가 이루어진 적이 있던가. 그때그때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형식적인 사과만 있지 않았나.


그러니 가짜뉴스가 판치는 세상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하긴 자신이 한 말을 기억도 하지 못해 사과조차도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보이는 것만 보게 된다. 그 이면에 가려져 있는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고 있다.


빅이슈 이번호에는 그런 보이지 않던 면들이 실려 있다. 그런 면들을 보여주고 있다. 동물영화제 소개를 통해서 동물들의 삶을 생각하게 하고, 영화를 통해서 특성화고를 나오고 취업을 할 수밖에 없는 청소년들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유의 비극은 단 하나의 명징한 이유로 발생하지 않는다. 겹겹의, 연쇄의 원인 그 속에서 침묵한 입과 방관한 눈 속에서 오랜 시간 꾸준히 퇴적돼온 결과다. 열하홉 살 외주업체 노동자의 죽음, 현장실습 고교생의 죽음, 청년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 뉴스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30쪽. 정지혜, '우연을 기다리는 유연함으로' 중에서)


영화 <다음 소희>에 대한 글에서 나오는 말이다. 소희란 주인공이 겪는 일들을 그린 영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노동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우리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그런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한다. 


이 글에서처럼 사고는 정말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때마다 사과, 사과... 그러나 그 사과가 잘못을 바로잡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는지... 오히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타인에게는 가혹한 자세를 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한다.


계속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으로... 그래서 정문정이 이번 호에 쓴 '내가 아는 세상이 평균이 아니니까'라는 글에서 한 말을 곱씹게 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을까? 그것이 상대에게도 통할까? 아닐 수 있음을... 그런 생각을 해야 한다.


그러면 가짜뉴스부터 시작해서 타인에게 가혹한 그런 환경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은 복잡한 일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오히려 간단하고 단순한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시 명심하자. 나에게는 가혹하게, 타인에게는 관대하게, 그리고 잘못은 진심을 다해서 사과하기.


빅이슈 이번 호, 내 태도를 돌아보게 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내게 보여준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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