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를 먹으며
- 납골당
하얀 통을 집으로 삼아 너는
하얀 분말로 변해 버렸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늘 국수 먹자고 하던 너는
길고도 가느다란 면발을
후루룩 후루룩
또 한 잔의 술에 곁들여
잘도 먹었지
국수는 장수의 상징
가느다랗더라도 길게
길게 우리 생을 살아가는 것
국수를 좋아하던 너와
국수를 좋아하던 나는
함께 국수를 먹으며
오래도록
한 잔의 술을 기울이며
세상사를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이제
하얀 통 속
흰 가루로만 남은 너를
도저히 면발이 될 수 없는 너를
국수를 먹으며 되새기고 있는
길벗을 잃은 나……
중심
- 선생노릇 4
한 여름
작은 공간에 갇혀 헤매고 있을 때
후드득, 후드득
시원한 빗줄기 소리가 들려와
몸을 창가로 끌어낸다.
시원하게 수직으로 내리꽂는
빗줄기
빗줄기 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하얀 덩어리들.
이런!
이것들이!
계절을 무시하고
한 여름에 내리는 우박, 우박 덩어리들.
차에 맞고 땅에 튀어오르는 하얀 파편들.
그래, 세상이 제 때를 모르는데
제 멋에 겨워 날뛰고 있는데
하늘이라고
아니, 하늘만이라도
하늘! 만! 이! 라! 도!
길을 찾아야 하고
길을 알려줘야 하고
우리 함께 길을 가야 하는데
하늘만이라도
제 길을 제
길을 가고 있어야지
선생만이라도 제 자리를 지켜야지
중심 잡기가 괴롭더라도……
바담 풍 세상
에스컬레이터에서는 걷거나 뛰지 마시고 반드시 황색선 안쪽에 서서 손잡이를 꼭 잡으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서 있는 사람들을
밀치고 꼭 걸어 올라가는 사람들
전철이 도착한다 하면
쿵쾅 쾅 쿵쿵쿵
우르르 뛰어간다
방송이 무색하게 듣지 않는다
대부분 어른이다
움직이면 배가 전복될 가능성이 있으니 다른 방송이 있을 때까지 제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리십시오
배가 기울자
갑판 위로 오르려 하는
사람들을 배 안으로
불러들이는 방송
살기 위해 가만히 있어
죽어갔던 말 잘 듣는,
교육 잘 받은 학생들
가만히 있어야 할 땐
제멋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정작 움직여야 할 땐
도리어 가만히 있으라고 한다
이게 어른들의 훈장질이다
저는 계속 바담 풍 바담 풍 하면서
학생들이 따라 바담 풍 바담 풍 하니
역정을 내며 바담 풍 하란 말야
바담 풍이 아니라 바담 풍!!
우리 세상
참
바담 풍 세상이다
성적표에 갇힌 학교
넓은 운동장을 뛰놀던 아이들도, 벤치에 앉아 먼 미래를 응시하던 아이들도, 재잘재잘 일상을 공유하던 아이들도, 세상이 제 것인 양 으스대던 아이들도, 이 아이들을 하나로 만들던 건물들도, 나를 따르라, 그러나 나를 밟고 넘어서라고 외치던 교사들도, 모두 가둬버린 성적표. 사각의 틀에, 교육이란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가둬버린 성적표, 스스로 그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이 나라 교육의 현주소.
죽음이 삶에게
당신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반했어요.
당신의 일거수일투족, 당신의 모두가
내 존재의 전부였어요.
나에게 전부인 당신이지만,
당신에게 전 존재하지 않는 존재.
당신은 그토록 날 밀어냈지만,
전
당신을 떠날 수가 없었어요.
당신은 저에게 전부였기에.
당신과 저는 늘
함께 하고 있었지만,
우린 언제나,
혼자만 나타나야 했어요.
함께 하되, 홀로만 보여야 하는
비극.
늘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당신이
제게 온 순간 저는,
깨달아야 했어요.
당신이 제게 오는 것은
제가 당신을 놓치는 것임을.
둘이되 하나이고,
하나이되 둘인
바로 우리
그대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