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 - 이성아 소설집
이성아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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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참 소설을 많이 읽었는데....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도 그렇고, 국어시간에 배운 소설들을 더 읽어보고 싶은 욕구도 있었고, 또 소설 속에서 삶의 방향을 찾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그래서 서점에 가면 어떤 소설들이 나왔을까 궁금하기도 하고, 아는 작가의 소설이 나오면 망설이지 않고 사기도 했었는데...

 

하다못해 최신 경향의 소설을 알아야 한다고 문학상 작품집들을 읽기도 했었는데... 어느 순간 부터 소설이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존에 사 모았던 소설들은 헌책방으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기도 했고.

 

이럭저럭 소설을 잘 읽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현실이 더 소설 같아서. 도대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들이, 아니 소설보다 더한 일들이 현실에서 펑펑 터지는데, 소설을 읽을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또 소설들이 지나치게 무슨 기법을 시험하는지, 읽어도 마음에 와 닿지 않고,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이 드는 소설들도 많았으니, 이래저래 소설에서 멀어지게 되었는데...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라고, 문학사회학에서 주장을 했고, 따라서 소설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문제에 다가갈 수 있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 소설의 주인공들은 문제적 개인이었고, 이 문제적 개인에 대한 판단에 따라 어떻게 우리 삶을 꾸려갈 수 있나를 고민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요즘은 삶이 너무 팍팍한데, 소설을 읽으면 더 삶이 퍽퍽해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시 소설에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 거리두기, 소설을 읽을 때도 필요한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베르테르 효과도 소설에 거리를 두지 못한 결과 아니던가. 그런데, 요즘 소설은 자연스레 거리를 두게 만든다. 현실이 더 팍팍한데, 어떻게 소설 속에 들어갈 수 있겠는지, 소설을 읽으며 오히려 현실과 비교할 수 있게 된 나이가 되었는지, 이제는 소설의 인물에 몰입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읽으면서 분석하고 비판하고, 자신을 되돌아 보는 나이가 되었다고나 할까? 소설의 장년에 비유한 어느 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이미 자신의 삶의 치열성에서 조금은 빗겨난 나이... 그러한 나이에 읽는 소설은 다른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소설은, 이러한 장년의 나이도 아니다. 읽으면서 이 소설은 노년의 나이에 읽어야 하는 소설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자꾸 들었다.

 

총 8편의 단편들로 묶여 있는 소설집인데, 이 책의 제목이 된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는 단편의 제목이 아니다. 이는 이 소설집의 첫번째 소설인 '저 바람 속 붉은 꽃잎' 중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로 제목을 삼았다. 그리고 이 소설의 내용은 제목에 있다고 봐야 하는데...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가 아니라, 태풍이 지나간 다음, 그 다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이 소설집에는 태풍, 우리 인생에 한 번쯤 휘몰아치는 그런 광풍을 고스란히 겪은 후 그 다음의 일들을 이야기 하고 있는 소설들이 많다. 그런 이야기를 마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이야기해주듯이 조근조근 들려주고 있고, 또 아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듯이, 그래서 읽는 이로 하여금 편지를 읽듯이 읽을 수 있게 소설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특히 주요 인물들이 인생의 격랑을 거친 여성들... 그래서 이 소설은 여성주의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우리 시대는 여성성을 회복해야 하는 시대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 여성성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 소설들이 이 소설집에는 많다.

 

삶의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에서 오롯이 겪어낸 여성이 이미 나이가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소설들... 그 과거의 장면은 바로 태풍이 몰아치는 장면이고, 잠시 행복했던 순간은 태풍의 눈에 들었던 순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평온하고, 행복에 젖어 있더라도 그 순간이 태풍의 눈 속의 순간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네 삶은 결국 태풍을 온몸으로 견디는 일이니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남편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속칭 불륜에 빠지기도 하고, 장애인 자식을 두기도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삶을 유지해 나간다. 그러한 강인함, 그 강인함을 부드러움으로 감싸안는 사랑, 이것이 바로 여성성이고, 이 소설에 나타난 모습이기도 하다.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 아니, 이 소설의 제목을 바꾼다. 우리는 어디쯤 서 있을까? 바로 내 인생에서 태풍은 지금 다가오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한 번 겪고, 지금은 잠시 평온한 상태인 태풍의 눈에 있을까, 아님 태풍의 눈 시간이 지나고 다시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에 있을까?

 

이 소설에 나오는 여인들은 이미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서서, 태풍을 겪던 시절을 생각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노년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의 삶은 어디쯤 와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삶에서 지금 태풍은 도대체 어디쯤 와 있을까?

 

나는 태풍을 어떻게 맞이하고 보낼까?

 

태풍이 지나간 자리의 황량함. 태풍이 지나간 삶의 황폐함. 그러나 삶은 살만한 것이므로, 그 황폐함 속에서 다시 시작하는 모습. 이미 쓸려간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것이 비록 비루할지라도.

 

따라서 이 소설은 노년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새로운 시작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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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기 좋은 날 - 그날, 그 詩가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김경민 지음 / 쌤앤파커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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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갈수록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정보화 시대, 갈수록 짧아지는 말 속에서 어쩌면 시는 더 자기 자리를 잡을 수 있어야 하는데도.

 

말이 짧다고 생각도 짧지는 않으니, 긴 생각을 거부하는 시대에 시는 더 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

 

서점에 가끔 가곤 한다.

 

인터넷으로 책을 사는 편이 편하고, 더 쌀 수도 있지만...그래도...

 

가끔은 손으로 직접 책을 만져보고, 책에서 나는 냄새도 맡아보고 싶고, 책 속 글자들의 모습도 보고 싶어서 간다.

 

특히 이런 즐거움은 시집이 꽂혀 있는 곳에서 더욱 커진다.

 

시집이란, 그냥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어루만지고, 살피고, 또 살피고, 그러다가 마음이 움직이면 손에 든다.

 

하지만...

 

갈수록 서점에서는 시집이 꽂혀있는 책장의 크기가 준다.

 

시집이 점점 구석으로 밀려가더니, 이제는 유명시인들의 시집들만...가끔은 무슨무슨 문학상을 탄 시집들만...또 한 시인의 시집이 아닌 여러 시인의 시를 묶어놓은 시집들만... 보인다.

 

여기에 시를 해설해 놓은 책들과, 자기 나름대로 시를 감상한 책들이 놓여있기도 한다.

 

짧은 말과 글을 요구하는 시대, 어쩌면 시가 제 시대를 만났다고 좋아해야 하는데...

 

시는 점점 서점에서조차도 밀려가고 있다.

 

그만큼 시는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다.

 

이 멀어지는 시를, 우리 곁으로 돌려보내려는 노력이 시를 읽고 난 감상을 쓴 책들이다.

 

시는 어렵지 않다. 시는 즐겁다. 시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시는 우리 자신이다.

 

이렇게 말한다.

 

평론가나 학자들이 어렵게 말한다면, 이들은 마치 일기를 쓰듯, 자신의 내면을 솔직하게 시를 통해, 시와의 만남을 통해 드러낸다.

 

우리는 이 책들을 남의 일기를 보듯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읽으며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생각과 비교를 하기도 하고, 미처 생각하지 못햇던 부분, 미처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되살리기도 한다.

 

시 읽기 좋은 날.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냥 손에 잡고, 읽으면 된다.

 

깊은 의미를 생각하지 말고, 눈으로, 입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이렇게 시에 다가가면, 시는 어느 순간 내게 다가온다.

 

시가 다가오는 순간, 마음은 행복으로 가득찬다.

 

그 때부터 시는 즐거움이 된다.

 

학교에서 배웠던 시, 시험보기 위해서 외웠던 시들, 이 책에 있다.

 

그러나 그 지긋지긋했던, 어려웠던 시들이 아니다.

 

다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시 읽기 좋은 날.

 

다시 읽을수록 시는 더욱 맛이 난다. 더욱 마음에 파고든다.

 

어른이 되었다고, 시는 젊은이들의 몫이라고 단정짓지 말자.

 

시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학이고,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문학이다.

 

한 살 한 살 나이 먹어가면 세상을 살아온 사람에게 시는 말을 건넨다.

 

그 말은 내가 먼저 다가가야 내게 다가온다.

 

벽을 쌓고 있는 사람에게 누가 말을 걸겠는가.

 

말과 글이 짧아지는 시대. 짧은 글로 말을 거는 시를 읽자. 그리고 그 시에 대답을 하자.

 

시와 대화를 하자.

 

시 읽기 좋은 날... 이 날은 매일매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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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와 불교 살림지식총서 256
오세영 지음 / 살림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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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불교와 시의 연관성은.

그런데 언뜻 생각해 보아도 불교와 시는 상당히 연관이 있다.

부처가 그 많은 말들을 해놓고도 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역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온갖 상징들.

그리고 이렇듯 언어를 절대시하지 않지만, 또한 언어로부터 진리를 설파할 수밖에 없는 모습.

비록 염화시중, 이심전심, 교외별전이라는 말로 언어로부터 독립한 진리의 설파를 더 강조하고 있지만.

 

시란 말을 분석해보면, 시는 말과 절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또한 절이라는 말은 땅과 마디로 나뉘어져 있고, 결국 시란 아주 작은 땅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생계에 얽매이지 않은 사람들이 쓰는 언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의 언어가 중언부언 길어질 이유가 없으니, 시가 추구하는 모습과 너무도 비슷할 수밖에 없단 생각이 든다.

 

불교와 현대시의 연관성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아주 작은 책이다. 이 작은 책을 다시 3부로 나누고 있는데, 1부는 불교와 시의 연관성을 불교와 시의 특성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점을 이론적으로 풀어서 설명해주고 있어, 불교와 현대시의 관련성이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2부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분석하고 있다. 거창하게 독립을 염원한 시다, 아니 그런 거창한 의미를 찾기 보다는 이 시는 그냥 이별을 다룬 시다 등등 많이도 해석이 되어 이 시를 우리나라 형이상시, 또는 사상시의 세계를 개척한 시라고들 말하는데, 여기서는 선시(불교시)의 관점에서 해석을 하고 있다. 절대 진리의 세계를 추구하는 선시라고 말이다. 또 하나의 타당한 해석이 이 시에 붙여지고 있으니, 좋은 시는 여러 각도에서 해석이 되고, 향유가 된다는 사실을 한용운의 시를 통해 알 수 있으니, 이 부분은 시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참 좋겠단 생각이 든다.

 

3부에서는 조오현의 시조를 이야기하고 있다. 선시, 즉 불교시를 다루는데, 일반인들이 깨달음을 쓴 시를 다루기보다는 스님이 쓴 선시를 이야기하는 편이 이해하기에 훨씬 쉬우리라는 생각이 든다. 조오현의 시조는 일상의 감정에서부터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시조까지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도 이 책의 제목과 연관되는 시조는 후기의 시조이리라.

 

스님으로서 깨달음을 얻은 경지를 시조로 표현하고 있고, 이 조오현의 시조가 지니는 의의는 한시로 표현하지 않고, 이를 우리의 전통적인 시가 형식인 시조로 표현하고 있는데 있다고 한다. 그렇다. 천 년을 넘게 이어져 온 이 시조 양식 속에 깨달음을 담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조오현의 시조는 선시조로서의 면모도 있지만, 우리의 형식을 살려, 그 속에 깨달음을 담았다는 문학사적 특서오 지니고 있게 된다. 이 점을 이 작은 책에서 지은이는 말하고 있다.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책이다. 그렇다고 어렵다고 할 수만은 없다. 2부와 3부는 쉽게 다가온다. 그리고 시를 해석하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다. 가까이 두고 읽어볼만한 책이다.

 

덧말

 

조오현 스님의 "절간이야기"란 시집이 있다. 앞부분은 산문시이고, 뒷부분이 이 책에서 이야기한 시조형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앞부분 산문으로 길게 쓰인, 이야기가 있는 그 시들, 참 좋다. 가슴이 뭉클하다. 한 번쯤 읽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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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 제30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79
서효인 지음 / 민음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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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라고 아도르노는 말했다는데, 시가 시로서 성립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한탄일텐데, 오히려 이러한 시대일수록 시가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데, 근대라는 시기를 혁명의 시대, 또는 폭력의 시대라고 하고, 현대를 정보화의 시대, 개인주의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하는데, 인간이 파편화되고 원자화된 이 시대에 과연 시가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을까, 시대에 대응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들을 하는데, 그럼에도 시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어려운 시대일수록 꿈을 잃지 않아야 하기 때문인데, 이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요소가 희망이라는 사실에서, 시는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하고,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처럼 우리가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삶이 공허해지고 말텐데, 이런 의미를 찾는 노력을 시가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의미를 찾을까 하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데...

 

시집을 읽으면 그래도 대표시가 제목이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고 그 시를 더욱 더 주목해서 보게 되는데, 이게 웬일인가 제목이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이다. 세계 대전은 달랑 두 번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백 년 동안이라니, 무슨 서양의 백년 전쟁도 아니고, 그래서 이 시를 읽는데, 아니 시집 자체가 폭력, 전쟁, 공포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아도, 이런 내용이 도처에서 넘쳐나고 있는데, 결국 이 시집의 제목에 나와 있는 시처럼 우리는 백년 동안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르고, 누구 말대로 전쟁의 목적이 바로 평화라는 역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탄압을 하는 이 역설이 바로 이 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람이 나온다. 이 시에는 얌전한 사람, 순한 사람, 현명한 사람, 정확한 사람, 배운 사람, 인내심 강한 사람, 멋진 사람, 유머러스한 사람들이 순서대로 나온다. 이들을 이렇게 명명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이들은 어떤 행위로 이렇게 명명되었다. 이들이 명명된 사실은 사회에서 어떤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지 않나. 그러나 우리는 이런 사람을 떠나서 우선 사람이다. '불침번처럼 불면증에 시달리는 당신은 사람이다. 명령을 기다리며 전쟁의 뒤를 두려워하는 당신은 사람이었다. 백 년이 지나 당신의 평화는 인간적으로, 계속될 것이다. 당신이 사람이라면.'이라고 한다. 우린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이어야 한다. 이 사람이라는 사실에 우리의 동일성이 있고, 이 사실이 다양성 속에서도 동일성을 확보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라는 동일성에 기반해 다양성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아니 함께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은 지속된다. 앞으로도 죽. 이 전쟁이 단지 물리적인 전쟁만은 아니다. 그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이 시집 2부와 3부에 나와 있다. 2부와 3부의 제목만 보면 "아주 도덕적인 자의 5분"과 "핍진성"이다. 아주 도덕적인 자라는 말에서 아주란 말이 부정적으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도덕이 우리를 얼마나 길들이는지, 우리를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존재로 강제하는지 알려주고 있고, 핍진성이라는 말은 진짜는 아니되 진짜와 같음을 의미한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진실이 아니다. 진실을 위장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 핍진성이라는 말로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세상 속에서 감추진 진실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시인은 시에서 핍진성이라는 단어로 우리가 가짜 진실에 속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적이다는 아도르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아우슈비츠를 겪고도 시를 쓰지 못한다는 것은 더욱 야만적이다. 시인은 시를 써야 한다. 시 속에서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야 한다. 사람들은 시를 읽어야 한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세상의 어두운 모습을 표현해내는 시를 읽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얌전한, 순한, 멋진, 배운, 인내심 강한, 유머스러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 된다. 우리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 만남을 바로 시가 주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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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시사 : 1920~1945
유종호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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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시사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책은 많다.

정말로 많다.

그만큼 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업적으로 내세우는 책이 바로 시사이다.

연구자라면 한 번쯤 욕심을 내보고 싶기도 하리라.

자신이 공부한 시를 하나의 체계를 세워 책으로 낸다는 일,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다 보니 많은 연구자들이 시사에 관한 책을 냈고, 이 책들의 내용이 그만그만한 경우도 많았다.

또 이것저것 많은 연구성과들을 종합적으로 내세워서 일반인들이 읽기에 힘든 경우도 많았다고 할까...

 

이 책은 유종호 교수가 자신의 관점에서 또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우리 근대시사를 정리한 책이다.

읽기도 쉽고, 또 많은 시인들에 대해 장황하게 알기보다는 주요한 시인들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서 기억하기도 쉽다.

 

그게 바로 이 책의 장점이다.

하지만 그는 근대지향과 전통지향, 그리고 사회현실지향과 우리언어지향이라는 네 축을 중심으로 살펴본다고 했는데, 과연 이것이 충실히 지켜졌는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뒤로 갈수록 시인의 시에 대한 설명이 많아지고 있는 반면에 이 시들이 이 축이 어디에 속하는지, 그리고 이 축들이 어떠한 변화를 통해서 우리 시를 형성해갔는지에 대한 설명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도 말하고 있듯이 이 네 가지 축이 명확히 구분되지도 않는다.

아니 구분될 수가 없다. 전통지향과 근대지향은 구분히 가능하다 하더라고, 사회지향과 언어지향은 서로 나뉠 수 있는 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별의 불가능성은 시의 기본이 바로 언어라는 사실에 있다.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시는 이미 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를 음악적으로 표현하든, 회화적으로 표현하든, 시는 언어로 만들어진 예술이기 때문에 언어에 대한 관심이 기본이라면, 근대시사의 축을 오히려 사회지향과 개인지향으로 나누는 편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렇다치더라도 문학사에서 살아남는 시는, 좋은 시, 기억할 만한 시임에는 틀림없으니,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1920년 대에서 1945년까지 나온 시집, 또 시들은 우리가 알아야만 할 시들이다.

물론 유종호 교수가 쓴 이 책에 나오는 시들이 다 좋은 시라고 말할 수는 없다.

또 언급하지 않은 시들이 좋지 않은 시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시는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근대시사를 읽는 이유도, 이런 책을 통해 시를 평가하는 안목을 기르는 연습을 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어떤 기준에서 좋은 시라고 하는지, 여러 문학사 책들을 읽다보면 자신만의 시를 보는 눈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눈을 통해 시를 더 잘 감상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최승호의 '이것은 죽음의 목록이 아니다' 라는 시를 빌려서 말을 해보자. 제목을 비틀어서 이것은 문학사에서 사라진 시인들의 이름이 아니다 정도로 하고...

 

이것은 문학사에서 사라진 시인들의 이름이 아니다

 

1923년 개인시집 "해파리의 노래"로부터 해방이 되는 1945년까지 나온 시집의 주인공들은.

김   억,조명희,이하인,박종화,변영로,노자영,주요한,김동환,김명순,김소월,유도순,한용운,

최남선,권구현,이광수,황석우,김영희,김동명,유   엽,양주동,이진언,이은상,정영수,김성실,

모윤숙,허수만,장정심,박귀송,김한촌,황순원,김희규,백용수,정지용,김영랑,오신혜,백   석,

김기림,장재성,김인걸,이서해,윤곤강,박영희,이용악,오장환,이상필,정희준,이   찬,허이복,

장만영,노천명,이해문,조동진,임   화,조중협,최경섭,박세영,김광섭,김대봉,최병량,이하윤,

한죽송,김태오,김상용,박용철,함윤수,김광균,이병기,김기림,정호승,신석정,박남수,김이랑,

박팔양,안자산,김동일,김남인,김해강,이기열,김달진,박노춘,서정주,강홍열,임춘길,김용호,

이가종,이강수,권   환,차원흥,김기한,이태환,진금도. 다

권영민 편저, 한국현대문학사년표1, 서울대출판부. 1987년 초판본에서

 

누가 이들을 문학사에서 사라졌다고 하는가. 어찌 알겠는가. 그들이 어느 문학사에 나올 줄.

최소한 한 권 이상의 시집을 냈던 시인들.

아마추어리즘에 빠져있든, 아니면 치열한 시적 정신을 지니고 있든, 그들은 한 권 이상이 시집을 내고 우리나라에서 시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이다.

그들이 문학사에서 언급이 되든, 되지 않든 그들은 이미 시인으로 존재했고, 앞으로도 시인으로 존재할 것이다.

누가 언제 어떤 책에서 이들을 다시 언급할지 알 수 없으므로.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알려진 시집을 낸 시인들이 이만큼이라는 사실이 우리 근대가 얼마나 빈약한지 알려주는 증거나 되나, 이를 딛고, 더 많은 시인들이 더 좋은 시를 만들어내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20여년에 우리 시가 완전한 형태의 시로 자리매김하고, 시인이 시인으로 인정받는 토대가 되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할 수가 없다.

 

유종호의 책에서는 이들 중 몇 명만이 나온다.

그리고 이 목록에 없는 사람 중에 몇 사람이 더 나온다. 가령, 이육사는 해방후에 시집을 냈기 때문에 이 명단에 없지만, 그의 시들은 일제시대에 발표되었기에 이 책에서 다뤄지고 있다. 이한직도 마찬가지다. 그도 일제시대에 시집을 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면에 발표를 해서 이 책에서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 함형수란 시인은 '해바라기 비명'이란 한 시로 이 책에 언급이 된다.

그 시 하나로 그는 시단에서 무시할 수 없는 시인이 되었다는 얘기다. 행복한 시인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많은 시집을 내도 문학사에서 지워져버리는 시인이 허다한데, 시 하나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은 많은 시를 양산해내기보다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단 한 편의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인이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시인 중 한 명인 윤동주를 다루고 있지 않은 점이다.

윤동주의 시집이 해방 후에 나와서 이 책의 년도와는 맞지 않지만, 그의 시들이 비록 생전에 발표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시가 쓰여진 시기는 일제시대니 다뤄줘도 좋으련만... 저자는 엄격하게 자신의 규정을 지키고 있다.

 

한국근대시사라고 해서 시를 전공하는 사람,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만이 읽어야 한다는 편견을 버리게 하는 책이다. 대중을 위해서 쓴 책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문학전공하는 사람들이나 고르는 제목을 붙이면 잘 읽지 않는 게 우리의 모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제목이 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냥 옛날에 우리나라에 이런 시인들이 있었구나, 이들이 쓴 시는 이렇구나, 이런 시들을 바탕으로 지금 우리의 시들이 나오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으면 된다. 그렇게 읽은 다음 책을 덮을 무렵 더 풍부해진 상식과 지식으로 시를 보는 눈이 한층 더 좋아진 자신을 느끼게 된다.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고 우선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하자.

그게 시를 이야기하는 책에 다가가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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