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을 때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과 그녀가 남편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게 된 이유들로부터 생각이 출발한다. 작가는 결혼이상주의자 콘스탄친 드미트리치 레빈의 사랑과 결혼을 병치시킨다. 레빈와 키티의 결혼이 이상적이거나 행복의 나날의 연속은 아니라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그리고 그 원인이 레빈 자신의 성격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 서두의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1권13p.1부 1장)” 은 중요한 주제임이 분명하다.
친구 스테판 아르카지치의 생각을 통해 알려주는 것처럼, 레빈은 “자존심 강하고 쉽게 격분하는 내성적인 성격(1권47p,1부5장)”을 지니고 있다. 시간이 지나며 레빈에게서 많은 모순과 허점을 발견한다. 형과의 논쟁에서 자기모순을 발견하고, 질투심 때문에 이성을 잃고, 무례를 범하고, 취약한 성품을 노출시킨다. 그 레빈에게서 작가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다시 읽으면서, 다른 주제들이 보였다. 사실 처음에도 작가가 안나 카레니나 보다는 콘스탄친 드미트리치 레빈에게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것에 의문을 가졌었다. 레빈의 농촌 생활과 농민들에 대한 관심과 귀족들에 대한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19세기 러시아 사회, 문화, 정치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소설 뿐 아니라 『부활』이나 『전쟁과 평화』와 같은 톨스토이의 작품들에서 농민에 관한 주제는 동일하게 반복된다.
농노해방과 농촌운동, 문화와 예술, 정치와 경제, 농민이나 귀족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다른 책들에서 참고했다.
19세기 후반 도시와 강의실을 떠나 러시아 농촌으로 떠난 학생들은 자신을 ‘인민주의자’라 칭하며, 농촌의 민중들의 삶을 살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이것이 19세기 러시아 지식인 인텔리겐챠의 “민중 속으로(브나로드 В Народ)”운동이다. 이것은 일종의 순례 여행이었다.
“이 젊은 선전자들은 특권을 누렸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자기 가족의 귀족적 저택에서 자신들의 양육을 도왔던 농노 계급—유모와 종복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나타샤 댄스』 올랜도 파이지스 334)”
톨스토이에게서도 보이는 죄책감이다. 『부활』이 그 예다. 이들은 귀족과 국가의 억압으로부터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던 농민들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다. 그리고 형제애로 농민들과 연결된 공동체를 꿈꾸었다. 이런 희망을 증폭시킨 계기는 1861년의 농노해방령이었다. 그러나 농노해방과 젊은 지식인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귀족들과 농민들은 변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작품을 썼다. 1852년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일기』를 기점으로 농민에 대한 묘사가 달라졌다. 이전 작품들에서 보이는 농노에 대한 프레임과 달리 합리적 사고를 하는 인간으로서의 농민들을 등장시킴으로 뒤에 오는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부닌 등에서 그 변화를 읽게 된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농부, 화가, 음악가, 학자, 작가로서 농촌에서 살려고 시도했다. 농민들에게 소작료를 경감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그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거절당한다. 귀족과 농노의 사이의 간극에 대한 현실자각과 실망으로, 톨스토이는 모스크바 상류사회 생활을 하다가 군 입대를 한다. 이 경험이 그의 소설에도 담겨 있다.
카드게임으로 영지 내(內) 집을 날리기도 했던 톨스토이는 다시 영지로 돌아와 당시 조성된 개혁적 분위기와 차르의 농노해방 계획에 힘입어 농민들과 함께 하는 삶에 투신한다. 인민주의자들처럼 ‘민중 속으로’의 삶을 산다. 1859년 그는 야스나야 폴라냐에 농촌 어린이들을 위한 최초의 학교를 설립한다.
그의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농민들과 함께 하고자 했지만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귀족적 사고에서 완전히 멀어지지도 못한 듯 보인다. “다른 한 편으로 그의 전 생애는 부끄러운 특권을 가진 엘리트 세계를 버리고 “자신의 땀으로” 살기 위한 투쟁이었다.(『나타샤 댄스』 올랜도 파이지스)“ 이에 대한 질문들은 그의 작품들에 쓰여진 일관된 주제였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양면성을 알고 있었고 수년 간 괴로워했다. 작가로서 그리고 당시의 러시아인으로서 그는 민중에게 지도력과 계몽을 제공해야 할 예술가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농민 학교들을 설립하고 시골 이야기를 쓰며 힘을 쏟고 시골의 늘어나는 독자를 위해 고전(푸쉬킨, 고골리, 레스코프와 체홉)을 출판하는 출판업(‘중개자’)을 시작한 이유였다.”
(『나타샤 댄스』 올랜도 파이지스 367p)
톨스토이의 생애를 알고 나서 새롭게 주목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안나 카레니나』 6부 11장에서, 사냥 후 베슬로프스키와 오블론스키와 레빈은 헛간에 머무른다. 들려오는 농장 하녀들을 목소리를 듣고 베슬로프스키와 오블론스키는 밖으로 나갔다 돌아옵니다. 키티와 결혼한 지 얼마 안되는 레빈은 함께 하지 않는다. 여기서 오블론스키의 말이 흥미롭다. 레빈이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키티가 신경쓰이기 때문이라고 오히려 비난한다. 하녀와 즐기는 것이 레빈에게도 도덕적 문제가 되지는 않음을 내포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다른 지주들처럼 농민(혹은 농노) 여성을 가지는 것에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소냐가 낳은 13명의 아이 이외에도 자기 영지의 마을들에 적어도 12명의 어머니 다른 자식들이 있었다.”고 한다. 농민 여인들 중 그가 정말 사랑했던 유일한 여자는 악시니아 바지키나였다. 소냐와의 결혼 후에도 그는 악시니아와 관계를 지속했고, 그 사이에 아들을 낳았다. 오블론스키의 행동과 레빈의 소극적 반론은 톨스토이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부활』에서도 귀족들에게 유린당한 농민 여성들과 태어난 아이들의 비참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톨스토이의 남성 귀족 주인공들에게는 이러한 욕망과 죄의식이 뒤섞여 있음을 보게 된다.
‘민중 속으로’ 운동은 예술계에서도 한 흐름을 만들었다. 예술가이자 후원자였던 블라디미르 스타소프는 이런 예술가들을 후원했고, 미술에서 이동 전람회파, 음악에서 쿠치키스트의 주장을 지지했다. 스타소프는 민중적이고 러시아적인 예술을 주도했다. “1860년대와 1970년대의 모든 미술가들과 작곡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화가 레핀, 음악가 무소르그스키, 조각가 안토콜스키는 그가 후원한 예술가들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미술사에 ‘이동파’라는 독특한 화파가 등장한다. 반체제적 미술운동이다. '이동파'의 전신은 페테르부르크 예술가 조직이다. 크람스코이를 포함한 14명은 1861년 발표된 ‘반쪽자리 농노해방법’을 찬양하라는 예술아카데미의 요구(1863)를 거부하여, 예술아카데미를 자퇴하고 생활 공동체를 만든다. 이들은 전시 공동체 ‘이동파’를 조직하고, 기득권에 정면도전하는 반체제적 미술운동을 한다. 이들은 여기저기 이동하며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 전시회를 열었다.

크람스코이 <미지의 여인>
이동파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바로 이반 크람스코이(1837~1887)다. 그를 잇는 제자들은 레핀과 야로센코다. “크람스코이의 자화상은 ‘1860년대 전형적인 지식인 상’이라는 평가를 바도 있다”. “인텔리겐치아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무에 충실하기 위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헌신적으로 만연한 사회악과의 고독한 싸움을 수행해 나갔다.(『러시아 미술사』 이진숙 149-150p)” 그가 크람스코이가 러시아의 지식인 인텔리겐치아인 화가로서 러시아 미술계에 러시아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은 민음사 안나 카레니나의 표지그림이다. 실제로 크람스코이와 톨스토이는 만남이 있었다고 한다.

일리야 레핀-<볼가강의 배 끄는 사람들>
크람스코이의 제자 레핀의 그림 중 유명한 작품은 <볼가강의 배 끄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표정은 감상자로 하여금 비애를 느끼게 한다. 이 레핀이 1887년 톨스토이 초상화를 그리기위해 그를 방문해서 만나고 관찰했던 감상은 당황스럽게도 역겨움이다. 진짜 비천한 출신인 레핀은 농민들과 이해하지 못하고 섞이지 못하는 톨스토이가 그들을 위하는 양, 자신이 농민의 삶을 사는 양 하는 태도에서 이런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톨스토이를 대하는 순박한 농민들의 얼굴에서 “그토록 빈정대는 빛이 역력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나타샤 댄스』 올랜도 파이지스)“고 회상하고 있다.
『안나 까레니나』에서 레빈의 모습은 농민도 귀족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다. 그가 지방 귀족회의에서 보여준 태도는 이런 상황을 잘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지주 농민 공동체, 도시민의 대표들이 구성된 러시아의 지방 자치 기관이 젬스트보 [zemstvo]다. 이 젬스트보를 콘트롤하는 게 귀족이어서, 귀족회장은 중요한 자리인 듯 보인다. 기존의 귀족회장을 불신임하고 새롭게 회장을 뽑는 자리에서 레빈은 당황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그는 이따위 회의가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의 논의에 귀를 듣지 않고 다툼을 피해 회의장을 빠져 나왔다가 막상 투표할 때는 공을 어느 함에다 넣어야할지 모른 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 함이 찬성인지 반대하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모두가 바라보는 상황에서 “어디에 넣지?”라고 형에게 묻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다 알 수 있도록 아무 함에다 공을 넣는다. 신임투표에 이어 새로운 회장을 뽑는데도 마찬가지의 일을 벌인다.
한 표가 모든 문제를 결정할 수도 있다고, 진지하고 일관된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적 인간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이 곳에서는 보다 지혜롭다. 형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이런 콘스탄친 드미트리치 레빈에게 “너는 다 하찮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구나.(『안나 카레니나』3권 232p)”라고 한다. 레빈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정치적 태도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는 정치적 무관심 층이 아니라 유아(乳兒)다.
레빈은 이상주의자인 듯 보이나 자신의 성품이 그 실현을 막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취약한 성품을 인물들에게 전치함으로 스스로를 성찰하고 있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