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을 때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과 그녀가 남편이 아닌 사람을 사랑하게 된 이유들로부터 생각이 출발한다. 작가는 결혼이상주의자 콘스탄친 드미트리치 레빈의 사랑과 결혼을 병치시킨다. 레빈와 키티의 결혼이 이상적이거나 행복의 나날의 연속은 아니라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그리고 그 원인이 레빈 자신의 성격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 서두의 문장,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나름의 이유가 있다.(113p.11)” 은 중요한 주제임이 분명하다.

 

친구 스테판 아르카지치의 생각을 통해 알려주는 것처럼, 레빈은 자존심 강하고 쉽게 격분하는 내성적인 성격(147p,15)”을 지니고 있다. 시간이 지나며 레빈에게서 많은 모순과 허점을 발견한다. 형과의 논쟁에서 자기모순을 발견하고, 질투심 때문에 이성을 잃고, 무례를 범하고, 취약한 성품을 노출시킨다. 그 레빈에게서 작가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다시 읽으면서,  다른 주제들이 보였다. 사실 처음에도 작가가 안나 카레니나 보다는 콘스탄친 드미트리치 레빈에게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는 것에 의문을 가졌었다. 레빈의 농촌 생활과 농민들에 대한 관심과 귀족들에 대한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19세기 러시아 사회, 문화, 정치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소설 뿐 아니라 부활이나 전쟁과 평화와 같은 톨스토이의 작품들에서 농민에 관한 주제는 동일하게 반복된다. 


농노해방과 농촌운동문화와 예술정치와 경제농민이나 귀족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다른 책들에서 참고했다.


19세기 후반 도시와 강의실을 떠나 러시아 농촌으로 떠난 학생들은 자신을 인민주의자라 칭하며, 농촌의 민중들의 삶을 살며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이것이 19세기 러시아 지식인 인텔리겐챠의 민중 속으로(브나로드 В Народ)운동이다. 이것은 일종의 순례 여행이었다.


이 젊은 선전자들은 특권을 누렸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자기 가족의 귀족적 저택에서 자신들의 양육을 도왔던 농노 계급유모와 종복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나타샤 댄스올랜도 파이지스 334)”


톨스토이에게서도 보이는 죄책감이다. 부활이 그 예다. 이들은 귀족과 국가의 억압으로부터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던 농민들의 해방을 위해 헌신한다. 그리고 형제애로 농민들과 연결된 공동체를 꿈꾸었다. 이런 희망을 증폭시킨 계기는 1861년의 농노해방령이었다. 그러나 농노해방과 젊은 지식인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귀족들과 농민들은 변하지 않는다.

 

작가들은 작품을 썼다. 1852년 투르게네프의 사냥꾼의 일기를 기점으로 농민에 대한 묘사가 달라졌다. 이전 작품들에서 보이는 농노에 대한 프레임과 달리 합리적 사고를 하는 인간으로서의 농민들을 등장시킴으로 뒤에 오는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체호프, 부닌 등에서 그 변화를 읽게 된다.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농부, 화가, 음악가, 학자, 작가로서 농촌에서 살려고 시도했다. 농민들에게 소작료를 경감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그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거절당한다. 귀족과 농노의 사이의 간극에 대한 현실자각과 실망으로, 톨스토이는 모스크바 상류사회 생활을 하다가 군 입대를 한다. 이 경험이 그의 소설에도 담겨 있다.


카드게임으로 영지 내(內) 집을 날리기도 했던 톨스토이는 다시 영지로 돌아와 당시 조성된 개혁적 분위기와 차르의 농노해방 계획에 힘입어 농민들과 함께 하는 삶에 투신한다. 인민주의자들처럼 민중 속으로의 삶을 산다. 1859년 그는 야스나야 폴라냐에 농촌 어린이들을 위한 최초의 학교를 설립한다.


그의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농민들과 함께 하고자 했지만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고, 귀족적 사고에서 완전히 멀어지지도 못한 듯 보인다. “다른 한 편으로 그의 전 생애는 부끄러운 특권을 가진 엘리트 세계를 버리고 자신의 땀으로살기 위한 투쟁이었다.(나타샤 댄스올랜도 파이지스)이에 대한 질문들은 그의 작품들에 쓰여진 일관된 주제였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양면성을 알고 있었고 수년 간 괴로워했다. 작가로서 그리고 당시의 러시아인으로서 그는 민중에게 지도력과 계몽을 제공해야 할 예술가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것이 그가 농민 학교들을 설립하고 시골 이야기를 쓰며 힘을 쏟고 시골의 늘어나는 독자를 위해 고전(푸쉬킨, 고골리, 레스코프와 체홉)을 출판하는 출판업(‘중개자’)을 시작한 이유였다.”

(나타샤 댄스올랜도 파이지스 367p)

 

톨스토이의 생애를 알고 나서 새롭게 주목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안나 카레니나611장에서, 사냥 후 베슬로프스키와 오블론스키와 레빈은 헛간에 머무른다. 들려오는 농장 하녀들을 목소리를 듣고 베슬로프스키와 오블론스키는 밖으로 나갔다 돌아옵니다. 키티와 결혼한 지 얼마 안되는 레빈은 함께 하지 않는다. 여기서 오블론스키의 말이 흥미롭다. 레빈이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은 키티가 신경쓰이기 때문이라고 오히려 비난한다. 하녀와 즐기는 것이 레빈에게도 도덕적 문제가 되지는 않음을 내포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다른 지주들처럼 농민(혹은 농노) 여성을 가지는 것에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소냐가 낳은 13명의 아이 이외에도 자기 영지의 마을들에 적어도 12명의 어머니 다른 자식들이 있었다.”고 한다. 농민 여인들 중 그가 정말 사랑했던 유일한 여자는 악시니아 바지키나였다. 소냐와의 결혼 후에도 그는 악시니아와 관계를 지속했고, 그 사이에 아들을 낳았다. 오블론스키의 행동과 레빈의 소극적 반론은 톨스토이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부활에서도 귀족들에게 유린당한 농민 여성들과 태어난 아이들의 비참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톨스토이의 남성 귀족 주인공들에게는 이러한 욕망과 죄의식이 뒤섞여 있음을 보게 된다.

 

 민중 속으로운동은 예술계에서도 한 흐름을 만들었다. 예술가이자 후원자였던 블라디미르 스타소프는 이런 예술가들을 후원했고, 미술에서 이동 전람회파, 음악에서 쿠치키스트의 주장을 지지했다. 스타소프는 민중적이고 러시아적인 예술을 주도했다. “1860년대와 1970년대의 모든 미술가들과 작곡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화가 레핀, 음악가 무소르그스키, 조각가 안토콜스키는 그가 후원한 예술가들이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미술사에 이동파라는 독특한 화파가 등장한다. 반체제적 미술운동이다. '이동파'의 전신은 페테르부르크 예술가 조직이다크람스코이를 포함한 14명은 1861년 발표된 반쪽자리 농노해방법을 찬양하라는 예술아카데미의 요구(1863)를 거부하여, 예술아카데미를 자퇴하고 생활 공동체를 만든. 이들은 전시 공동체 이동파를 조직하고, 기득권에 정면도전하는 반체제적 미술운동을 한다. 이들은 여기저기 이동하며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 전시회를 열었다.

크람스코이 <미지의 여인>

이동파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 바로 이반 크람스코이(1837~1887). 그를 잇는 제자들은 레핀과 야로센코다. “크람스코이의 자화상은 ‘1860년대 전형적인 지식인 상이라는 평가를 바도 있다”. “인텔리겐치아는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책무에 충실하기 위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헌신적으로 만연한 사회악과의 고독한 싸움을 수행해 나갔다.(러시아 미술사이진숙 149-150p)” 그가 크람스코이가 러시아의 지식인 인텔리겐치아인 화가로서 러시아 미술계에 러시아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은 민음사 안나 카레니나의 표지그림이다. 실제로 크람스코이와 톨스토이는 만남이 있었다고 한다.

일리야 레핀-<볼가강의 배 끄는 사람들>

크람스코이의 제자 레핀의 그림 중 유명한 작품은 <볼가강의 배 끄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표정은 감상자로 하여금 비애를 느끼게 한다. 이 레핀이 1887년 톨스토이 초상화를 그리기위해 그를 방문해서 만나고 관찰했던 감상은 당황스럽게도 역겨움이다. 진짜 비천한 출신인 레핀은 농민들과 이해하지 못하고 섞이지 못하는 톨스토이가 그들을 위하는 양, 자신이 농민의 삶을 사는 양 하는 태도에서 이런 감정을 느꼈다고 한다. 그는 톨스토이를 대하는 순박한 농민들의 얼굴에서 그토록 빈정대는 빛이 역력한 표정을 본 적이 없었다(나타샤 댄스올랜도 파이지스)“고 회상하고 있다.

 

안나 까레니나에서 레빈의 모습은 농민도 귀족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다. 그가 지방 귀족회의에서 보여준 태도는 이런 상황을 잘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지주 농민 공동체, 도시민의 대표들이 구성된 러시아의 지방 자치 기관이 젬스트보 [zemstvo]. 이 젬스트보를 콘트롤하는 게 귀족이어서, 귀족회장은 중요한 자리인 듯 보인다. 기존의 귀족회장을 불신임하고 새롭게 회장을 뽑는 자리에서 레빈은 당황스러운 태도를 취한다. 그는 이따위 회의가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의 논의에 귀를 듣지 않고 다툼을 피해 회의장을 빠져 나왔다가 막상 투표할 때는 공을 어느 함에다 넣어야할지 모른 상태가 되어 버린다. 그 함이 찬성인지 반대하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모두가 바라보는 상황에서 어디에 넣지?”라고 형에게 묻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그는 모든 사람이 다 알 수 있도록 아무 함에다 공을 넣는다. 신임투표에 이어 새로운 회장을 뽑는데도 마찬가지의 일을 벌인다.

 

한 표가 모든 문제를 결정할 수도 있다고, 진지하고 일관된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적 인간 세르게이 이바노비치가 이 곳에서는 보다 지혜롭다. 형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이런 콘스탄친 드미트리치 레빈에게 너는 다 하찮다고 말하면서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구나.(안나 카레니나3232p)”라고 한다. 레빈의 투표권을 행사하는 정치적 태도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는 정치적 무관심 층이 아니라 유아(乳兒)다.

 

레빈은 이상주의자인 듯 보이나 자신의 성품이 그 실현을 막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취약한 성품을 인물들에게 전치함으로 스스로를 성찰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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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9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시의 시대적 한계나 귀족출신인 본인의 계급적 한계가 톨스토이의 한계였을거예요. 그래도 러시아같은 사회에서 자신의 인본주의를 실천하려 노력한것만으로도 위대한 영혼인것만은 틀림없는듯요. 부활이나 동화류만 본 톨스토이가 저는 취향이 아니라서 항상 미루기만 하네요. 일단 책장에 꽂혀서 저릋 노려보는 전쟁과 평화부터 봐야 되는데... ㅎㅎ 톨스토이를 정말 읽어야겠다 생각하게 하는 멋진 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07-29 18:25   좋아요 1 | URL
^^
저는 작가가 자기성찰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가 위대한 것이겠죠.^^
작가들은 글보다는 정직해서 위대한듯요!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5-07-29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안나 카레니나> 읽었을
적의 충격이 생각나네요.

브나로드 운동이니 하는 것들
교과서 배울 적에 고저 외워라고
만 들었는데, 문학작품으로 만나
게 되니 바로 이해가 되더군요.

역시나 고전은 다시 읽는 거라는
이탈로 칼비노의 말이 이제야
와 닿습니다.

그레이스 2025-07-29 20:35   좋아요 1 | URL
네 맞아요
읽을때마다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있어요~^^
 
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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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짧고 간결한 글에는 드러난 사실보다 감춰져 있는 의미들이 더 많다. 그래서 그의 글은 빙산에 비유된다. 설터의 글은 일상의 행위, 풍경, 대화, 생각을 아름답게 서술한다. 독자는 그 문장의 일각 밑에 가라앉아 있는 의미들을 탐사하고 건져올린다. 헤밍웨이의 글이 다시 읽고 싶어진다.

 

설터의 이 소설 서두는 말미를 읽고 나면 두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빠르게 검은 강에 다가간다. 강변은 돌처럼 평평하고 매끄럽다. …… 강물은 우리 밑에서 시야를 흔들며 흐르고, 물새들은 그 위를 날아 빙그르르 돌다가, 사라진다. 우리는 이 넓은 강을 흘끗 본다. 과거가 흘린 꿈, 강의 깊은 곳을 지나니 강바닥이 수면을 흐렸다. 얕은 물을 따라, 겨우내 보트를 묶어두는 황량한 부두를 따라 우리는 빠르게 나아간다. 그러곤 갈매기처럼 휙 솟아올라, 몸을 돌려, 뒤를 돌아본다.(23p)”

 

그는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강 쪽으로 걷는다. 그의 양복은 너무 덥고 꼭 꼈다. 강가에 닿았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부두가 있다. 칠이 벗겨지고, 판자는 썩었고, 받침대는 이끼가 끼었다. 그 넓고 어두운 강, 그 둑에 온 것이다.(437p)”

 

강가로 나간 사람, 그가 갈매기처럼 솟아올라 몸을 돌려 뒤를 돌아 본 것은 과거가 흘린 꿈이다. 그가 지나온 시간의 이야기들이 그 사이에 담겨 있다. 이 서두와 말미 사이에 지나온 시간의 이야기들이 담겨있기도 하고, 같은 장면이기도 하다. 영화적 표현이다. 이 시적 표현에서 주목하게 되는 구()과거가 흘린 꿈이다.

 

비리(Viri)약간의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그의 삶의 기준은 사그리다 파밀리아와 같은 위대한 건축물이다. 유명해지는 것을 꿈꾸었다. 그는 성공한 사람이고 강변에 집을 짓고 부러워할 만한 아내와 가정을 이뤘다. 그렇지만 자존감은 낮았다.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이 높았고 아내 네드라(Nedra)의 인정에 의존적이었다. 항상 그는 그녀로부터, 그녀의 인정, 그녀의 종잡을 수 없는 기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321p)” 이혼 후에도 그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우울증까지 앓는다.

 

미국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두 사람

사르가소그것이 집을 상징하는 단어다. 외도를 하고 돌아온 비리에게 뱀장어에 대한 글을 읽어주는 장면은 암시와 중첩된 의미들을 전한다.

 

암컷은 강어귀에서 평생을 보낸 수컷을 만나 함께, 다른 수백, 수천 마리와 함께 그들이 태어난 곳으로 간다. 해초가 많은 바다 사르가소 해. 깊이조차 알 수 없는 깊은 바다 속에서 그들은 교배하고 죽는다.91p”

 

사르가소 해(Sargasso Sea)는 북대서양 해류에 둘러싸여 흐름이 없는 바다다. ‘마의 바다’, ‘죽음의 바다라고 불린다. 그러나 해조류로 덮여 있는 이 바다 속에서 유럽뱀장어와 아메리카뱀장어 이곳에 알을 낳는다. 광막한 사르가소! 아득하고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이 바다 속에서 생명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뱀장어는 성적인 의미를 암시하고 있어서 네드라가 비리의 외도를 알고 있지만 묵인하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하고, 자신의 성적 욕구를 다른 사람에게서 채우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그녀에게 사르가소는 집에 대한 은유이다.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괴로운 그에게는 집이 적막하고 해초로 뒤덮인 흐르지 않는 바다다. 한편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 생명이 탄생하는 바다 속이다. 아이들이 주는 기쁨은 네드라를 그곳에 머물게 한다. 사르가소 해인 것이다!

 

삶은 날씨고 삶은 식사다(52p)”라고 작가는 가벼운 날들의 의미를 전한다. 그래 그게 삶일지 모르지! 그러나 순간순간 그게 다일까, 그것만으로 만족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타인의 눈에 비리와 네드라의 생황은 행복한 것으로 보인다. 친구와 이웃들을 초대하며 식사를 즐기며 이것이 삶이고 행복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합니다. 그러나 비리와 네드라는 서로에게서 채울 수 없는 욕망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만족을 얻고 있다. 심지어 비리가 성적욕망을 채우는 것은 상사로서 위압에 가까운 것이었음을 은밀하게 폭로한다. “만족감 없이 살아가는 행복한 삶이라는 모순은 네드라 내면의 갈등을 점점 키워간다.

 

부친의 죽음을 앞둔 임종과 장례를 기점으로 네드라는 집을 떠나는 결정을 하게 된다. 죽음은 언제나 인간에게 삶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 오고가는 길 위에서 목격한 풍경들 속에서 그 영감이 있었다. 홀로 집을 떠나 아버지에게로 갔다가 돌아오는 자동차 여행은 예기치 못한 고독감을 선물한다. 그 며칠의 시간은 홀로됨과 자유에 대한 필요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이후 유럽 여행은 네드라에게 연습과 같았다.

 

네드라는 욕망을 따라 집을 떠나지만 과연 그녀가 원한 자유를 얻었을까? 이혼 전 네드라는 자주 쇼핑을 하고 돈을 썼다. “소비주의는 정서적 공허감을 먹고 번성한다는 캐럴라인 냅의 말을 기억하게 한다. 혼자 여행하고 사랑하고 욕망대로 살아가지만 그녀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징후를 이 소비에서 본다. 그녀는 도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돈을 쓰는지 모르겠어.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386p)”라고 의문을 갖는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본주의적 습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미국의 중산층 삶은 전적으로 자본에 의존하고 있음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네드라와의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혼 후에도 그녀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리, 돈을 쓰던 습관에서 자유롭지 못한 스스로를 발견하는 네드라, 두 사람 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기에 그들이 바라는 욕망은 모두 돈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출발자체가 성공과 유명이었던 비리는 사랑하는 여성도 네드라처럼 예쁘고 멋있고 거실과 식탁을 멋지고 세련되게 가꿀 줄 아는 여자여야 하는 것이었을까? 그는 그녀를 사랑했을까? 사랑했을 것이다. 자본으로 환원되는 욕망이 그 사랑을 왜곡시켰을 것이다. 이제는 칠이 벗겨지고, 판자는 썩었고, 받침대는 이끼낀(437p)” 그 넓고 어두운 강둑에 돌아와 지나간 시간을 기억하는 그는 여전히 그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일까?

 

우리가 꿈꾸는 나날은 무엇일까? 타인이 욕망하는 그런 일상인가? 산뜻한 날씨 아래 멋진 집에서 세련된 가구와 잘 차려진 식탁 앞에서 가벼운 대화를 즐기는 일상일까? 자본으로 환원되는 욕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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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7-19 19: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설터에 아직 입문을 못하고 있어요. ㅠㅠ
‘삶은 날씨고 삶은 식사다‘,
너무 좋은 비유네요^^

그레이스 2025-07-19 19:24   좋아요 2 | URL
딱 꽂히는 말인데!
자꾸 고쳐 생각하게 돼요

레삭매냐 2025-07-19 2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설터, 작가들의
작가라는 말이 꼭 들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단편선에 빠져서 정말
죽어라 읽던 기억이
나네요. 어떤 책은 번역
을 기다리지 못하고 원
서로도 사서 쟁여둔 기
억이...

그레이스 2025-07-20 17:23   좋아요 0 | URL
맞아요
문장이 넘 좋더라구요
저도 원서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단편도 읽어봐야겠네요.

자목련 2025-07-21 0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설터의 단편소설 <어젯밤>을 처음 만났을 때 좋았던 기억이 떠올라요. 이 소설도 좋았고요!

그레이스 2025-07-21 08:44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단편을 읽어봐야겠네요^^
전 이 책이 세권째예요.
 
모비 딕 - 전면 개역판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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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상징으로 가득 찬 소설이다. 멜빌이 포경선 선원이었던 경험담으로부터 나왔을 이 작품은 모험담으로 읽기에는 단어, 문장, 장면들의 상징 때문에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다.

 

첫 문장 “Call me Ishmael.”을 이 책에서는 내 이름을 이슈메일이라고 해두자라고 번역했다. 여러 다른 책에서는 내 이름은 이슈메일이다.” “나를 이슈메일이라고 불러라라고도 되어있다. 이 번역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만큼 이 소설에서 중요한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화자의 이름이 이슈메일이다. 이슈메일 즉 이스마엘은 성경에서 아브라함에 의해 추방되는 아들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얻지 못했을 시기 대를 잇기 위해 여종 하갈에게서 나은 아들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고 이삭을 보호하기 위해 하갈과 함께 떠나보낸다. 이슈메일의 정체성을 읽게 된다. 주류에 속하지 못한 자, 스스로 자신을 떠도는 자, 추방된 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는 때로 우울한 기분을 떨쳐버리고 혈액순환을 조절하기 위해포경선을 탄다. “권총과 총알 대신(31p)”이라고 말하고 있듯 죽음의 충동을 느끼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할 정도로 심기증이 심해질 때 바다로 나간다.

 

포경선을 타기 위해 도착한 뉴베드퍼드와 낸터컷에서 그의 눈에 띄고 심상에 새겨지는 이미지와 단어는 관(,coffin)이나 형틀, 비문과 같이 죽음을 암시하는 것들이다. 피쿼드 호에 타기 전 만난 선원 일라이저(엘리야)의 예언과 같은 말들도 이 항해가 어떻게 끝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러면 이런 암시와 전조가 가득함에도 이슈메일은 왜 배를 타는가? 사람이 그렇다. 모든 전조를 무시할 만큼 지금 당장 배를 타야한다는 욕구가 그 어두운 암시를 이긴다. 그리고 이슈메일에게는 이런 것들이 상관없는 문제들이다. 죽을 것 같아서, 계속 머뭇대다간 누군가를 죽일 것 같아서 바다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선장 에이허브(아합)은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도탄에 빠뜨리고, 자신도 비참하게 죽은 왕의 이름이다. 이 이름은 선장이 항해를 어떻게 이끌어 갈지 짙은 암시를 드리우고 있다. 암시라기에는 노골적인 이름이어서 정해진 결말을 가리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독자는 그 마지막을 향해 페이지 한 장 한 장을 넘기면 나아간다. 페이지의 양이 마치 정해진 때를 향한 시간의 분량인 듯이!

 

표면적으로 에이허브는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모비 딕에 복수하기 위해 항해를 한다. 선원들에게 연설을 하고, 자신의 사람을 몰래 승선시킨다. 의혹을 제기하거나 공포에 휩싸인 선원들에게 아주 작은 과학적 트릭으로 그들을 설득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에게 문제의식을 제기하던 스타벅마저도 그를 따르게 된다. 죽을게 분명한 모비 딕과의 결전에 나서는 선장을 만류하는 그의 간청에서 그를 영웅이나 우상처럼 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에이허브가 선원들이 자신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들은 정치행위와도 유사하다. 작가는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당시 미국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멜빌이 모비딕을 대폭 수정하던 1950-51년 시기 미국은 노예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국가적 분열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영미문학의 길잡이2) 그에 따라 피커드 호는 모험담을 위한 포경선의 의미를 넘어 미국이라는 국가 혹은 그와 유사한 공동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 국가의 지도자나 전체를 이끌어 가는 정신이 지향하는 지점이 공동체의 일원의 희생을 강요하고,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실제로 에이해브가 현란한 기교로 선원들을 굴복하게 한 후 경멸감과 승리감으로 불타는 에이해브의 두 눈에는 그의 파멸적인 오만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는 문장은 그런 지도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선원들은 저마다 이 포경선을 탄 이유가 있다. 이슈메일과 키퀘그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생업을 위한 것이다. 모두에게 배를 탄 저마다의 사연과 목적이 있지만 결국 이 배가 나아가는 방향은 모비 딕을 향한 길이다. 그것이 국가가 아닐까? 국가의 방향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욕망이나 지향을 다 수장시킬 수도, 그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보호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국가를 이끌어가는 정신이 한 개인의 삶을 폐허로 만드는 것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향유고래에서 기름을 퍼 올리거나 부패한 고래에서 용연향을 건져 올리는 장면은 위험하기도 신기하기도 하다. 그들의 이런 노동은 자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결국 이 배도 돈, 자본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고래 떼를 쫓다가 배들이 겁에 질린 그 무리 안으로 끌려 들어가 고래들이 만든 원형 안에 갇히고, 평화롭게 어미가 새끼에게 수유하는 장면들을 목격한다. 선원들은 전쟁 같은 바깥과는 다르게 놀랍고 신비한 세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경이롭고 신비하고 두려움마저 느끼는 이 풍경에서 나는 제국주의가 파괴하고 있는 식민지의 전통과 풍속들, 생명의 이어짐을 보게 된다. 전쟁이 벌어지는 외부의 안쪽에서는 여전히 생명을 지키는 고요함이 유지되고 있지만 언제 파괴될지 모르는 고요함이다. 이것은 식민지 뿐 아니라 대륙 안에서 자행된 원주민들에 대한 강제이주와 학살을 떠올리게도 한다

 

배 우현에 향유고래 머리를 달고, 별 가치가 없는 참고래이지만 잡아서 좌현에 그 머리를 달면 뒤집힐 일이 없다는 한 메시지를 얻는다. 한 공동체가 유지되는 방식이다.

당신이 한쪽에 로크의 머리를 들면 그쪽으로 기울어지지만, 반대쪽에 칸트의 머리를 들면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오는 것과 마찬가지다(405p)”

그러나 그렇게 평형을 유지하다가도 곧 곤경에 빠지게 된다. 어쨌든 균형과 불균형은 번갈아 가면 오게 되어있으니! 그렇다고 화자가 말하든 이것들을 다 바다에 집어던질까? 고래머리는 그럴 수 있어도 끊임없이 새로 생겨나는 사상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들을 자연스럽게 커지고 소멸하도록 하는 것이 공동체가 유지되는 방법이란 생각이다.

 

피쿼드 호는 하나의 국가를 상징할 수 있다. 특히 여기에 승선한 32명의 선원은 당시 미국의 32주에 해당한다고 보기도 한다. 이 선원들 사이에는 위계와 역할이 존재한다. 에이해브(선장스타벅(일등항해사스터브(이등항해사플래스크(삼등항해사), 작살잡이들(퀴퀘그, 타슈테고, 다구) . 한편 에이해브가 비밀리에 태운 선원들 중 페달라(배화교도)의 역할은 오로지 모비 딕을 추격하고 사냥하기 위해 돕는 사람이다. 페달라가 배화교도로 불리는 것에서 그리고 그와 에이해브가 서로 눈빛으로 대화하는 장면에서 그는 에이해브가 이 항해를 계속할 수 있도록 정신적인 지지와 영적 교감을 하는 관계로 보인다. 한 국가에서 보여지는 모습이고,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위험요소가 될 수도 있다.

 

선원들 모두가 이 배는 모비 딕을 쫓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그들은 모비딕에 대한 인식도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그 배에 탄 이상 이 추적과 사냥에 가담하게 된다. 이것을 국가의 메타포로 받아들인다면 많은 의미들을 얻게 된다. 에이해브에게 모비 딕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예상하면서도 싸워야 할 어떤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것이 그가 이 배의 선장으로 있는 의미이다. 그러나 모비 딕의 흰색은 저마다 다른 느낌이다. 대표적으로 스타벅에게는 신성으로 다가온다.

 

삶은 시간의 베틀 위에서 필연과 우연과 자유의지로 짜여진다는 말이 다가왔다. 이슈메일과 선원들이 이 배에 탄 것은 어쩌면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마치 한 국가에 태어나는 것이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그러나 이 항해 중 일어나는 일들은 우연이고 그들의 대응방식은 선택에 의한 것이다. 배라는 공간 안에서 어떤 우연과 자유 의지가 그들로 하여금 파선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외부로부터 오는 위험과 그 위험으로 끌고 들어가는 지도자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것, 개인의 자유 의지가 아닐까? 그 자유 의지가 힘을 발휘하는 것, 멜빌이 고민했던 민주주의에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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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이 이끈 정풍운동은 '학풍'(學風), '당풍'(黨風), '문풍'(文風)의 삼풍정돈(三風整頓)을 말한다. 이 중 문풍, 문예정풍은 작가들의 글쓰기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19425옌안 문예좌담회문예활동에 가이드를 마련한다. 문화대혁명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1942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있기 전까지 있었던 문예정풍에 딩링을 비롯한 옌안의 작가들은 저항했다.

 

…… 루쉰은 죽었다. 우리는 그의 뒤를 잇기 위해 이러저러한 일을 해야 한다고 습관적으로 말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파헤치는 그의 용기를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우리가 진리에 의연히 대처하는 루쉰의 자세와 대담성을 따라갈 수만 있다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는 저버릴 수 없는 무기인 잡문을 원한다. 일으켜 세우자. 잡문은 결코 죽지 않았다.”(천안문조너선 D. 스펜스, 309p)

 

그들은 땅속에 묻혀 녹슬고 있는 루쉰의 보도(寶刀)’를 파내 다시 예리하게 다듬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아사람아』에서 허 징푸의 책 마르크스 주의와 휴머니즘 출판을 막으려는 C대학 당위원회에서 한 교수는 “42년 옌안의 정풍을 이래라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시작한다. 그는 공석에서 항상 이 말 옌안의 정풍으로 말을 시작한다. 그에게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한 교수들 모두에게 문예정풍에서 문화대혁명에 이르는 시절은 각인되어 있는 역경과 고통의 기억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있었던 전쟁과 독재와 탄압이 많은 사람들의 공적인 연설이나 글의 서두가 되는 것과 같은 결이다.

 

문화대혁명의 시대가 끝나고 4인방이 숙청된 후에 대학으로 돌아온 쑤웨와 허징푸의 삶을 중심으로 그 시절을 보낸 지식인들의 깨어진 삶과 관계와 신념을 상실한 혼돈을 그리고 있다. 허 징푸가 말하듯 마르크시즘은 휴머니즘을 품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들의 인간다운 삶을 지향하며 시작된 혁명은 그들에게서 그것을 앗아갔다. 쑤웨는 혁명의 과정에서 일기장이 공개되는 수모를 겪고 지방으로 추방되었고, 그 와중에 남편에게 배신당했었다. 주변인의 배신과 이혼이라는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은 것보다 더욱 힘든 일은 자신이 이제까지 믿어왔던 사상이 흔들리는 것이다. 그녀는 정신적인 지주, 대들보를 뽑혀 버리고 만 것 같아고통스러워 한다. 그런 그녀에게 허징푸는 맹목적인 것과 확고하다는 것을 혼동하지 말 것과 회의와 신념은 서로 양립할 수 있다고 위로한다.(사람아, ! 사람아』「2장 마음이 머물 곳을 찾아서허 징푸 편)

 

허 징푸는 지극히 평범하고 작은 존재였던 그의 아버지가 치른 거대한 희생을 기억하며 그 희생은 역사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하고 질문을 던진다. 그의 아버지는 ‘인민 대중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 역사는 그 인민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의 휴머니즘적인 희생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기근 속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양식을 포기한 그의 아버지의 죽음이야말로 기려야 할 인민의 희생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기념하고 추도한다. 추도사는 그의 원고, ‘마르크스주의와 휴머니즘이다.

 

허 징푸의 출판을 막기 위한 시류와 C대학 위원회의 교수들을 보며 쑨웨는 습관의 권력에 대해 생각한다. “습관보다도 무섭고 권위가 있는 것이 있을까하고, 위를 보고 사람의 지위에 따라 말의 경중을 재는 습관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허징푸 역시 자신의 책 출판을 막는 내막과 공명정대하지 못함에 대해 생각한다.

 

내막이 있을 수 없는 일에 내막이 생기는 것은 자기의 행위가 공명정대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사물에 내막이 생기면 곧 이유도 없이 갖가지 마찰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 중국인의 정력은 모두 내막의 제조와 내막의 탐색에 낭비되게 된다.”(사람아, ! 사람아』「4장 동녘은 해, 서녘은 비허 징푸 편)


작가 다이 허우잉은 마르크스주의와 휴머니즘은 서로 통하거나 또는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작가의 중요한 사상적 전환은 마르크스의 인간 소외에 대한 이론 인식에 서 일어났다고 한다. 노동으로 만들어지는 물건과 자본으로부터 인간 소외 문제를 해결하고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났지만 그 혁명은 인간을 대상화하는 자본주의와 같은 오류를 범한 것이다. 사상 혹은 철학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인간은 소외된다. 그것은 도구이고, 목적은 인간의 행복이어야 한다.

 

허징푸는 조용히 쑤웨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쑤웨는 그런 허징푸에게 결국 마음을 연다. 당원으로 정치에 몸담았던 쑤웨는 공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부상을 입었다. 등장하는 대부분의 가정과 관계가 깨지고 무너졌다. 혁명이후 그들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인간성 회복 없이 불가능하다. 여전히 문화대혁명 시기의 처세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들은 과거의 유물이 되어 간다.

 

허징푸와 쑤웨가 새로운 관계로 발전하고 쑤웨와 그녀의 전남편 자오 전환이 서로 편지로 사과하고 용서하고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결말은 단지 사랑과 가정의 회복이라는 표면적 의미를 넘어, 당시 중국인들이 혁명이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자세에 대한 메시지다. 문화대혁명 당시 있었던 반인륜적 잘못들에 대해 민중은 어떤 자세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제안이다. 옳고 그름을 밝히고 사과와 뉘우침이 있어야 함에도 사람들은 모진 역사 속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태도를 보인다. 여전히 권력 다툼과 복수에 몰두하는 부류도 있었다.

 

사단칠정(四端七情)에서 사단 중 사단四端(측은지심(惻隱之心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 중 옳고 그름을 가리고자 하는 마음이다. 휴머니즘의 출발은 이 시비지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시비를 가린 후에야 타인의 불행을 아파하고,은 부끄럽게 여기고, 타인에게 양보하는 마음이 빛이 나고 진실된 것이 된다. 잘못을 알고 부끄러워하고 사죄하는 것이 그 시대 필요한 정신이었다. 사죄가 없고 용서가 없기에 불의는 반복되는 것이다.

 

작가는 예술 창작의 최고 임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와 예술가의 현실에 대한 인식, 태도, 감정을 있는 그대로 형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이 추구하는 최고의 진실은 생활의 정확한 묘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도 생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태도 및 그에 대한 생생한 표현이어야만 한다“(작가의 말)고 말한다.

 

작가는 문화대혁명의 당시 시인 원제를 조사하고 심사하는 그룹의 일원이었던 그녀가 1년 후 그를 다시 만나 그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의 결혼을 당에서 허락하지 않자 그로인해 상심한 원제는 자살한다.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쓴 것이 시인의 죽음이다. 인간, 인간성, 휴머니즘이 빠진 혁명에 대한 회의를 읽게 된다. 작가는 리얼리즘적 소설을 썼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 의문,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을 도입하여 쓴 것이 사람아, ! 사람아이다. 계급투쟁만 남고 인간은 황폐화된 상황에 대한 작가의 비판이 담겨있다. 어떤 사상이든 철학이든 인간을 위하지 않으면, 허공을 칠 뿐이다. 쑤웨가 괴로워하는 것도, 허징푸가 글을 쓰는 것도 다 같은 이유이다.


루쉰은 신해혁명과 그 이후의 실패를 겪고 있는 중국을 비판하면서도 인간애를 놓치지 않는다. 신랄한 잡문에서도 역시 그 정신을 읽게 된다. 루쉰에 이어 다이 호우잉을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책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심지어 시인의 죽음은 읽었던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이 허우잉의 3부작을 다시 읽고 있는 중이다. 중국의 근현대사와 인물들에 대한 독서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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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2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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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톨스토이는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고 문학사 전체를 통해 이보다 더 훌륭한 작품은 없다고 봐요. 서사도 물론 좋지만, 나는 이게 교육적인 책이라 생각해요. 도스토옙스키 씨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줘요라고 지인에게 편지를 썼다. 1899년 출판된 부활에서 재판과 유형지의 모습은 도스토옙스키를 떠올리게 한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는 서로를 배제하는 통찰자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들의 영혼과 육체라는 관념을 상호일체감 속에서 풍요롭게 호흡하고 있었다”(러시아의 문학과 혁명71-73p)고 이케타 사다요시는 말한다. 죄와 벌, 백치, 악령,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등에 자신의 유형지 경험을 담았던 도스토옙스키와 동시대 작가인 톨스토이 역시 유형지가 서사를 퍼 올릴 수 있는 러시아 문학의 중요한 원천임에 동의했음을 알 수 있다.

 

남편 없는 하녀의 딸로 축사에서 태어난 마슬로바의 애칭들은 태생과 삶을 시사하고 있다. 지주인 마님들은 그녀의 대모가 되어주고 이 아이를 구원받은 아이라는 뜻의 스파숀나야라고 불렀다. 반은 하녀, 반은 양딸이 된 그녀는 낮춰 부르는 카티카도, 사랑스럽게 부르는 카텐카도 아닌 그 중간인 카튜샤로 불렸다. 이 이름들에서 어떤 자의식이 생겨날지는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시골 영지에 잠시 들른 귀족 청년이 하녀와 사랑을 나누고 떠나버리는 이야기는 흔한 사건이었던 듯하다. 러시아 문학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로 푸쉬킨, 체호프, 부닌 등 많은 작가의 소설에 등장한다. 지주 마님들의 조카 네흘류도프와 사랑하고 버림받은 마슬로바는 이 사건으로 삶이 나락에 빠진다. 그녀는 그 집을 나와 다른 주인들을 거치고 결국은 유곽을 향한다. “천한 하녀라는 굴욕적 처지에서 달라붙는 남자들과 은밀하고 일시적인 간음을 할지, 아니면 생계가 보장되고 정당한 처지에서 법적으로 허용된, 벌이가 좋은 일상적인 간음을 할지사이에서 후자를 선택한다. 그 선택이 첫 남자와 다른 모든 남자들에 대한 복수라고 생각하는 데서 그녀와 같은 처지의 여성들의 불행을 본다.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으로 재판정에서 살인죄로 기소된 마슬로바를 만나고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에 죄의식을 느낀다. 재판의 부조리를 목격한 그는 그녀의 무죄 판결과 석방을 위해 힘을 쓴다. 그녀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결심을 하고 유형지를 향하는 그녀를 따라 간다.

 

네흘류도프는 카튜샤에게 속죄하기로 마음을 먹은 후, 스스로에게서 다른 모순, 죄악들을 발견한다. 그것들을 해결하기로 생각은 확장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차츰 그의 시선은 타인을 향한다. 정직한 자기성찰이 불러온 파장이다. 마치 둑의 한 부분이 무너지자 그 주변이 허물어지는 것처럼 삶의 전 영역에서 전복과 회복이 이루어진다. 신념을 되찾고 삶이 변화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그 과정이 너무 쉽게 보여서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과하는 것조차 몇날 며칠을 밤잠을 설치며 고민하는 게 인간인데! 자신의 깊은 내면 안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죄의식을 마주하고 잘못을 정직하게 바로잡는 것은 삶을 전적으로 뒤바꿀 동력이 생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윤리와 사회정의라는 과제의 실현에 있어 둘 사이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나 수치심이 현재 정의를 실천하려는 자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기에 사회 개혁에 참여하려 한다면 비록 도덕적 완성에 직접 반하는 수단이라도 모든 수단을 써야 한다는 위험한 유혹을 믿어서는 안 된다. 그 목적이 선의 원리에 등을 돌리게 한다면 그것은 허위이다.”(인생이란 무엇인가톨스토이)라는 말의 울림이 크다.

 

그가 한 자기 개혁 중 하나가 자신의 영지와 관련된 일이었다. 네흘류도프는 젊은 시절 헨리 조지의 사상에 품었던 열정을 깡그리 잊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토지는 사유의 대산이 될 수 없고, 물이나 공기나 햇빛처럼 사고 파는 대상이 될 수 없다. 땅이 인간에게 베푸는 모든 혜택을 인간은 똑같이 누려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는 급기야 자신의 영지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의 개혁은 소작인들의 삶을 목격하는 충격을 통과하면서 급진적으로 나아간다. 그는 영지와 관련된 결정을 하자 모든 것이 단순해져서 놀란다. 우리는 복잡하고 망설여지던 일들을 한 단계 실행하자 단순하고 명료해지는 현상을 종종 경험한다. 삶이 복잡하게 보이는 것은 머뭇거림과 실천이 없기 때문 아닐까?

 

유형지를 향한 여정에서 네흘류도프는 죄수들의 비참한 행렬을 본다. 그들을 대하는 공무원들의 태도에 대해 비판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에 대해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된다. 열차에서 농부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네흘류도프에게서 자유로움과 기쁨을 느낀다. 마슬로바 역시 네흘류도프의 도움으로 정치범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여정과 유형지에서의 생활 동안 그녀는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에게 경이로움을 느끼고 그들에게 동화된다. 사면이 된 후에 유형지를 떠나 도시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것은 더 이상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결심으로 보인다.

 

제목 부활(Воскресение)’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뜻한다.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의미가 아니다. 새로운 존재로 살아남을 의미한다.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는 유형지를 향하는 여정을 통과하며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타인을 향한 사랑으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날 밤 이후 네흘류도프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가 삶의 새로운 조건으로 들어가서가 아니라, 그때 이후 그에게 일어난 모든 것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기의 그의 삶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는 오직 미래가 보여줄 것이다.” (부활2, 338p)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그의 철학과 실천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이케타 사다요시가 말했듯 작가의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영혼과 육체가 포함된 온전한 인간 존재로서 살아가라, 고뇌하고 고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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