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연명 전집 대산세계문학총서 38
도연명 지음, 이치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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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에 관한 책 4권을 읽었다. 먼저 읽은 것은 김학주의『도연명』. 읽다가 아무래도 본격적으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구입한 것이 이 책 『도연명전집』이다.

처음 도연명의 글에 매력을 느낀 것은 「귀거래혜사」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돌아가자 歸去來兮 ’ 라고 말하는 부분이 마음에 와서 부딪치고 사로잡았다. 도연명의 「귀거래사」 전체를 다 읽고 자연히 이 시를 짓게 된 배경에 관심이 갔다. 왜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가.

가난해서 밭 갈고 뽕나무를 심어도 자급자족할 수 없었던 선비. 아이들은 많고, 가난하게 사는 자신을 안타깝게 여긴 숙부가 추천해주어 팽택현 수령이 되었지만 ‘다섯 말의 쌀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없다’ 하며 도장끈을 풀고 집으로 돌아가며 지은 사(辭).

그는 이 사(辭)의 서문에서

나의 본성이 자연스러움을 좋아하여 억지로 꾸밀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배고프고 추위에 떠는 것이 비록 절박하지만 본심을 어기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웠다. 전에도 벼슬한 적이 있으나 모두 생계에 쫓겨서 스스로를 부렸던 것이다. 이에 슬퍼하고 비분강개하여 평생 품었던 뜻에 깊이 부끄러워하였다. ……이 일로 인해 본 심을 따르게 되어, 글을 지어 이름 붙이길 ‘귀거래혜(歸去來兮)’라 하였다. 을사년 11월에 서문을 쓴다.
-296p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서문 중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동진(東晉)시대 사람. 곧 송(宋)으로 나라가 바뀐다. 이러한 어지러운 시기에 관리를 하는 것은 그가 밝힌 본성으로 견뎌내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겠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돌아가자
바야흐로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이미 스스로 마음이 육신의 부림을 받도록 하였거늘
어찌 근심하여 홀로 슬퍼만 하리오.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앞으로의 일은 바른 길 쫓을 수 있음을 알았다네.
실로 길을 잘못 들었으나 아직 멀리 가지는 않았으며
지금이 옳고 어제가 틀렸음을 깨달았네.
배는 흔들흔들 경쾌하게 나아가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 옷자락을 날린다.
길 가는 사람에게 앞길을 묻고
새벽빛 희미하니 한스럽게 여긴다.
-296~298p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중 제1수


그의 돌아감은 본성때문이라 하지만 의지적인 것이라 생각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자신이 월든으로 간 것은 필사적(desperately)이었다고 한 것처럼. 본성이 맞지 않아도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경우가 세상에는 더 많다. 그 머무름이 더 타당하게 보인다. 본성을 따라 세상을 등지는 것이 어렵고 고독하다. 많은 사람이 선택하는 길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唐代까지도 인정받지 못했다. 왕유는 도연명의 걸식시(乞食詩)를 거론하며 “한 번의 부끄러움도 참지 못하더니 종신토록 부끄러움을 겪는구나. 이 역시 남과 나를 괴롭히는 것이니, 작은 것을 지키느라 큰 것을 잊고 그 뒤에 끼칠 누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고 비판한다.

도연명의 시를 감상하며, 비록 번역에 의지한 것이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그의 마음을 느꼈다. 의지적으로 선택한 길이지만 외롭고 고독하며 생활의 빈곤으로 우울함도 느낀다. 아들들에게 주는 편지에서는 자신의 살아온 삶은 본성을 따른 것이고 후회함이 없지만 아들들이 풍족하게 살도록 해주지 못한 것에 미안함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래서 힘을 다해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왔으나, 너희들에겐 어려서부터 춥고 배고픈 생활을 하게 했구나.……”(아들 엄 등에게 주는 글, 與子儼等疏) 힘을 다해 벼슬을 그만두었다는 말에서 그가 당시 갈등했고 그만두는 데 많은 의지가 필요했음을 알게 되었다.

후대의 많은 사대부들은 도연명의 글을 읽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며 자연에 귀의(歸依)하여 술을 즐기고 마음 가는 대로 산 사람으로 도연명을 그렸다. 왕유와 같이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시구 행간에서 그의 마음에 무수한 갈등이 오고 가서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閑情賦)

드디어 집이 보이고 기뻐서 달리고, 머슴아이와 아이들을 반겨주고, 집으로 돌아와 어린 것들 데리고 들어가 방에 들어가니 편안함을 느끼겠다는 시구는 필사적인 마음과 그 마음을 흐르는 서글픔 같은 것이 느껴져 울컥했다. 도장끈을 풀어놓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어떤 마음이었을지가 헤아려진다.

아무리 자기 본성이라지만 세상을 거스르는 일이 쉽고 즐겁기만 하겠는가. 고독과 괴로움이 더 많을 것이 인지상정으로 알아지는 것인데.

그는 <육체, 그림자, 정신(形影神>에서
육체가 그림자에게, 그림자가 육체에게, 정신이 설명하며라는 오언시 3수를 통해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육체와 그림자의 괴로움과 정신이 설명하는 이치를 이야기 한다. 함께 할 사람이 없어 술잔을 놓고 자신의 그림자와 대화를 하는 고독한 밤의 광경이 떠오른다. 이 글을 읽다보면 그가 정신분석학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그는 세상으로부터 외따른 곳에 초막을 짓고 멀어진 땅에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며 마음을 비워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소처럼 술을 마시고 마당을 서성이다가 울타리 밑에 핀 국화를 따고 유유히 고개를 들다 남산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바라본다.(飮酒) 불현 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지의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다. 그 경지에 이르기까지 아니 거기에 이르러서도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감정을 다스려야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인간의 마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슬프고 한스러워 홀로 지팡이 짚고 돌아오는데
울퉁불퉁한 산길 가시덤불 우거진 곳을 지나갔다.
산골짜기의 물은 맑고도 얕아
이내 발 씻기에 좋구나.
갓 익은 술 거르고
닭 한 마리 잡아 이웃을 부르니
해는 지고 방 안 어두워
싸리나무로 밝은 촛불 대신한다.
즐거우나 밤 짧아 아쉬운데
어느덧 다시 날이 새는구나.
-70~72p 「전원의 집으로 돌아와(歸園田居)」 중 제5수


어쩌면 내가 신념대로 살려고 할 때 느꼈던 감정을 그의 시들에 이입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시를 짓는 재주가 있으면 ‘화도시(和陶詩)’라도 지어볼텐데…….

돌아가자
바야흐로 황폐해지려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오.
이미 스스로 마음이 육신의 부림을 받도록 하였거늘
어찌 근심하여 홀로 슬퍼만 하리오.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앞으로의 일은 바른 길 쫓을 수 있음을 알았다네.
실로 길을 잘못 들었으나 아직 멀리 가지는 않았으며
지금이 옳고 어제가 틀렸음을 깨달았네.
배는 흔들흔들 경쾌하게 나아가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 옷자락을 날린다.
길 가는 사람에게 앞길을 묻고
새벽빛 희미하니 한스럽게 여긴다.
296~298p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 중 제1수 - P296

슬프고 한스러워 홀로 지팡이 짚고 돌아오는데
울퉁불퉁한 산길 가시덤불 우거진 곳을 지나갔다.
산골짜기의 물은 맑고도 얕아
이내 발 씻기에 좋구나.
갓 익은 술 거르고
닭 한 마리 잡아 이웃을 부르니
해는 지고 방 안 어두워
싸리나무로 밝은 촛불 대신한다.
즐거우나 밤 짧아 아쉬운데
어느덧 다시 날이 새는구나.

70~72p 「전원의 집으로 돌아와(歸園田居)」 중 다섯 번째 수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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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1-21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이 올려주신 도원명 시들 넘 좋아요 그레이스님 글 읽고나니, 도원명의 글 속에 그저 안빈낙도가 아닌 갈등과 고뇌가 담긴 것 같아 더 와닿는듯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그레이스님 ~

그레이스 2022-01-22 00:1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문학과 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 도연명전집이다.
지식을 만드는 지식에서 출판된 도연명전집1,2는 상세하게 시에 대한 설명이 있어 좋았고 이 책은 이 책 나름대로 원문과 나란히 번역이 있어 비교하며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번역자의 감상이나 어투가 들어갈 수 밖에 없어 그의 해석과 정서에 기대 읽는 단점이 있으나 좋은 번역을 만나는 행운을 만나면 내 짧은 지식으로 보는 것 보다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이 책은 번역을 보먼서 마주한 페이지에 사언시, 오언시, 부의 원문과 주가 나란히 나와 짧은 한문실력이지만 나름 해석해보는 시도도 해볼수 있었다.
함께 읽고 있는 도연명전집 1,2(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는 시에 대한 상세한 해석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좋았다.

도연명의 시가 뒤에 오는 문사들에게 왜 사랑을 받았는지 알 수 있었다.
참으로 인간다운 마음과 고고한 성품이 한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시에 그대로 담겨 있다.
그런 마음을 조탁하느라 애쓴 흔적 없이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써내려 간다.
어떤 글 앞에서는 다 이해하지 못하였으나 마음이 먼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문사들이 화운하고 그림으로 재현하게 하는 이유인것 같다.


















자식들을 나무라다

흰머리가 양쪽 귀밑 덮고
피부도 더 이상 실하지 못하다.
비록 아들을 다섯 두었지만
모두 종이와 붓을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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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辭)

돌아가련다.
전원이 장차 황폐하려 하니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스스로 마음을 육체의 노예로 삼았으니,
돌아간들 어찌 서글퍼하고 홀로 슬퍼하랴?
이미 간 것은 따질 수 없음을 깨달았고,
앞으로 올 것은 쫓을 수 있음을 알았노라.
진실로 길을 잘못 듦이 아직 멀지 않으니,
지금이 옳고 어제가 잘못이었음을 알았노라.
배는 흔들흔들 가벼이 나부끼고,
바람은 살랑살랑 옷자락에 불도다.
길 가는 이에게 앞길을 물어보니,
새벽빛이 희미함을 한하노라.
이윽고 내 집 보이면,
기뻐하면서 내달리겠지.
동복은 기쁘게 맞이하고,
아이들 문에서 기다리겠지.
- P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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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다 중
42-5
사람 사는 곳에 오두막 엮었으나,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그럴 수 있는지,
마음 멀어지니 땅은 절로 외지노라.
수레와 말의 시끄러움 없구나.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를 따고,
유연하게 멀리 남산을 바라보네.
산기운은 해 저물면서 아름답고,
날던 새 서로 더불어 돌아오누나.
이 안에 ‘참된 뜻이 있으니,
말하려 하나 이미 말 잊었노라.
- P361

잡시

49-11,
내가 길 떠나 아직 멀지 않았을 때,
고개 돌려 바람 차가운 것 슬퍼했지.
봄 제비가 계절에 맞춰 날아올라,
높이 날다 먼지 낀 들보를 스치네.
변방의 기러기 머물 곳 없음을 슬퍼하며,
갈마들고자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건만,
떨어진 곤계는 맑은 연못에서 울며,
여름을 건너고 가을 서리를 겪었네.
수심 겨운 나는 말하기 어렵거늘,
아득하고 아득하게 봄밤만 길구나.
- P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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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10만 부 기념 새해 에디션)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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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시선은 방송토론이나 인터뷰에서 시평과 신념을 펼치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급진적인 말들을 했다. 그는 딸들과의 대화에서 그 말들이 부메랑이 되어 올 때 할 말을 잃기도 한다. 그리고 일관성 없을 때가 많았고, 기분에 따라 하게 될 때가 많아서 앞뒤가 안 맞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 시절에는 그렇게 말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말을 너무 많이 했어요.”

과연, 그는 그 때 한 말들을 후회하는 것일까? 만일 그때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아마도, 그는 다시 하게 될 것이다. 후회하더라도 마음속에 있는 것은 말하고, 상처가 되더라도 생각하는 것은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가끔 나도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한 말들이 나에게 족쇄가 되는 것을 느낄 때.
독서토론을 진행하는 자리에서 가끔 움찔할 때가 있다. ‘과연 나는 이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을까?’ 하고. 누군가 “당신 그때는 이렇게 말했잖아? 그런데 그렇게 살고 있나?”고 묻는 때가 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멈칫하게 한다. 가끔은 그렇게 쏟아놓은 말들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인 것을 확인할 때도 있다. 그 방식이 나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손해를 보게 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차라리 내뱉지만 않았더라도 조금은 돌아갈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역시 그때 그 자리로 돌아간다면 같은 말을 했을 것이고,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10년 20년이 지나도 몸서리치며 후회 할 치기어린 말들이 있을지라도…….


시선은 공중으로 흩어지는 말들보다는 글로 고착시키는 걸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아낄 줄 아는 사람들은 노출되는 자리를 신중히 삼갈 줄 아니 누군가는 내 또래 여자들의 이야기를 해야 했지요.‘
-325p

말을 많이 하게 된 이유다. 사람들이 많이 보고 듣는 방송에서 자신의 인생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어찌 다른 사람들처럼 스스로를 아끼고 싶지 않았을까? 당시 여자들이 당하는 비참한 상황에 대해 누군가는 말해야 했기에 기왕에 말을 시작한 자신이 그 역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의 거칠고 격한 말들은 고요하고 잠잠해지고 침묵사이로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보다는 글이 더 많아지고……. 인생을 마감하는 시간이 가까워 오면서 ‘이제 남은 말들은 정말로 의미 있는 사람들하고만 쓰겠다’고 하며 대중과 작별인사를 한다.



어두운 시대에 태어나고. 그 역사를 아프게 온 몸으로 겪어냈음에도, 자유롭게 사랑하고, 작가로서 당당하게 할 말을 했던 심시선, 그의 자녀들과 또 그들의 자녀들. 시선으로부터 이어져 온 것들은 심시선을 닮았다. 그러나 그들은 다르다. 3대가 산 시간이 다른 것처럼. 네 자녀는 또한 각자의 방식으로 엄마를 기억하고 있다.

여성이지만 여성으로 살지 않고 엄마이지만 엄마로 살지 않았던 그녀의 자유로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자유롭게 사랑하고 거침없이 생각을 말하는 심시선의 삶 속에 강요된 것이라곤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음에도 인생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마음껏 사랑하고 자유롭고 너그럽다.


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너그러울까?
여유가 없고 불안한 마음 때문에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향해 너그럽지 못했던 시간들을 기억해 본다. 아이들 키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마음에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쫓기듯 책을 읽고, 책 한권을 못 읽고 일어나 밥 준비를 해야 하는 상황에 가끔은 짜증이 난다. 빨래를 개며, 설거지 하며, 흘러가는 생각을 잡아두지 못해 안타깝다.


소설이지만 아이 넷을 키우며 화가로서 작가로서 심시선처럼 사는 게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만큼 다른 곳에서의 희생이 있을 수밖에…. 노출된 삶이 그랬고, 그에게 꽂히는 대중의 시선이 그랬고, 자녀들에게 있었던 빈자리가 그랬을 것이다.

그렇듯 시선에게도 후회는 있다.

‘늘 철쭉이 흔하고 시시한 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봄이 와도 철쭉을 대단히 반기는 이는 없지 않나요? 그런데 어느 날 밤 산책을 나갔다가 송이 째 떨어져 있는 흰 철쭉을 보았고, 지나가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그 꽃을 비추는 순간 그것이 살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흰색이란 것처럼 보이는 그런 흰색요. 그것을 칠십대에야 깨달았으니, 늦어도 엄청 늦은 거지요.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날은 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태어나길 잘했다 싶고, 어떤 날은 묵은 괴로움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런 고민을 하겠지요. 철쭉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빛에만 집중하는 상태에 있지 않을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철쭉의 마음을 짐작해봅니다. 바깥의 빛이 있고 안의 빛이 있을 터입니다.
밤 산책에서 또 근사한 것을 발견하면 꼭 전하겠습니다.

―XXX라디오 짧은 코너 <작가가 보내온 엽서>(2004)에서‘
280~281p


어떤 모양으로 살던 치열하게 살아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 이런 글을 남기게 될까? 지금은 모르지만 그때는 알게 되는 것이 있다는…. 그러나 조금 여유를 갖고 그 때 알게 될 작은 파편의 반짝임이라도 발견하게 될 수 있길 바래본다. 그 반짝임을 일견하게 하는 바람 한 줄기가 불 때 나는 그곳에서 볼 수 있기를…….

입안에 말이 고이는 것을 보니 봄이 온 듯하다. 나의 작고 방치된 정원에는 수반이 하나 있고 새들이 와서 몸을 씻고 간다. 그 모습이 내 아이들 어릴 적을 닮았다. 찬물에 머리를 대충 감고 히히웃는 것과 어찌나 비슷한지 모른다. 꾀바르고 곰살맞은 막내가 벌써 중학생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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