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 성년의 나날들, 박완서 타계 10주기 헌정 개정판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2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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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이어지는 자전적 소설이다. 읽어가면서 계속 드는 의문은 작가는 왜 이 소설을 썼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미 『엄마의 말뚝』이나 『나목』에서 다뤘던 소재였다. 그런데 왜 다시 이 소설을 써야 했을까 하는 것이 나의 의문이었다. 못 다한 말이 있었을까? 소설을 쓰고도 청산되지 않은 감정이 있었을까?


다 읽고 난 후, 다시 『엄마의 말뚝』과 『나목』을 비교해 보니 확실히 달랐다. 두 소설들은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많은 부분 사실이지만 허구적인 부분이 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나 이 소설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는 허구가 없었다. 특히,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달랐다.


『엄마의 말뚝』에서는 오빠의 죽음이 극적인 요소를 띄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오빠의 부상과 죽음은 너무나 초라하고 극적이지도 않다. 오랜 시간 비루해지고 파리해지면서 죽어갔다. 가족들을 지치게 했다. 작가는 그런 오빠를 보는 마음의 고통을 고스란히 적어놓는다.

“오빠가 넘어온 이데올로기의 전선은 나로서는 처음부터 상상을 초월한 것이긴 했지만 이런 오빠를 보고 있으면 그 선의 잔인하고 음흉한 파괴력에 몸서리가 쳐지곤 했다.”
-34p

20대 박완서에겐 허물어지고 절뚝거리는 오빠의 육체보다도 인격이 바뀌어버린 오빠를 보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서울이 수복된 후 다시 불안함 속에 피난을 떠나던 오빠의 염치를 잃은 모습은 읽고 있는 나 역시 아연하게 만든다. 오빠의 죽음과 장례도 그렇게 누추했다.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엄마의 모습도 지나치게 애통하지 않아서 슬프다.


공산치하와 서울 수복 시절, 이중생활, 생존과 돈을 벌기위해 했던 일들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 오갔던 속물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생각들.

어떻게 이런 수치스러운 행위와 생각을 적나라하게 쓸 수 있었을까? 어떤 작정으로…?
쉽게 쓰여 진 글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굳이 드러내지 않아도 될 은밀한 부분을 세상에 내놓고 오히려 괴롭지는 않을까? 그런 두려움 때문에 주저했을 텐데.


작가의 아주 은밀한 감정들을 발가벗기듯 드러내고 있어서 내내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나는 왜 불편했을까?

작가라면, 작가가 될 소양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라면,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생각을 할 것이라는 기대가 깨졌기 때문일까? 속물적이고 소시민적이라고 느끼게 하는 장면이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것보다는 내가 그 감정들을 모두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불편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자주 표현하는 말을 사용하자면, ‘징그러울’ 정도로 세밀하고 적나라하게 써내려간 내밀한 사건과 감정들 때문에 나 역시 고통을 느꼈다. 어떻게 이렇게 발가벗듯이 다 드러낼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혐오의 감정을 느끼는 이유를 내 안에서 발견하고 있었다. 숨기고 싶은 은밀한 생각들이 작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내밀하게 숨겨놓은 혐오스런 생각들을 보게 했다. 그렇게 내내 불편했다.


작가에게 기대하는 세상의 요구를 그녀는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치부와 같은 그 시절을 픽션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다시 기록하고 있다. 어떤 의도였을까? 아니 의도 같은 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숭고하지도 희생적이지도 않았던 삶을 미화시킨 것에 대해 동시대 사람들에게 미안했을지도 모르겠다. 시대를 읽는 사유가 없이 20대를 맞이한 박완서가 해방과 전쟁을 고스란히 겪어냈다. 혼돈 속에서 생존이 하루의 시작과 끝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 소설은 고백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외면했던 죄의식에 대한 참회와 치유의 글이라는 생각이다.
어쩌면 내가 오독과 오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편, 이것이 실재이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리얼리티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그러니 함부로 그 시절을 겪어낸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고 요구하지 말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전쟁은 남과 북을 가르고, 피난 간 사람들과 피난가지 못한 사람을 가르고,…… 많은 분열을 만들어냈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한 상처가 벌어진 채 아물지 않은 나라에서 이렇게 쓴다는 것이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까 생각했다.


항상 생각하게 되지만 전쟁을 겪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다를 수밖에 없다. 현상에 대한 인식, 역사관, 세계관…등 모두. 해방 전후를 살았던 세대의 삶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작가의 글은 마치 일기장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가족들이 양키한테 붙어먹고 산다고 생각한다. 인생이 추비하고 남루해진다고 고백한다. 개울가에서 구토를 일으키는 20대 박완서의 모습은 애처롭고 쓸쓸하다. 등을 쓸어주고 싶다. 청년의 때가 이래도 되는가.


그렇게 긴 고백은 엄마와 박완서 각자의 울음으로 정리한다. 그 험한 세월동안 가슴밑바닥에 눌러 놓았던 통곡이 터져 나온 것이다. 작가의 출가 후.
그녀들에게는 그렇게 각자 우는 것이 서로 마주 붙들고 우는 울음보다 더 정직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에게나 나에게나 온몸을 내던진 울음은 앞으로 부드럽게 살기위해 꼭 필요한 통과 의례, 자신에게 가하는 무두질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엄마하고 나하고 만날 수만 있었다면 둘 다 울지 않았을 것이다. 따로따로니까, 서로 안 보니까 울 수 있는 울음이었다.
그날 엄마가 정릉으로 빨래를 간 건, 참 잘 한 일이었다.”
-280p

이 부분이 이해가 간 나에게 놀랐다. 도대체 어떤 정서가 자리 잡고 있기에….


얼마 전, 엄마와 이야기 하다가, 나를 결혼시킬 때 엄마가 공중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엄마 앞에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내가 울고 있었다. 그것도 주체 못할 정도로. 엄마는 담담하게 수다 떨듯이 말하고만 있는데,…… 창피하지도 않았다. 그냥 울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고 해야 하나? 그 울음으로 그동안 감춰왔던 미안함을 고백했던 것 같다. 늦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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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3-26 13: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오늘 왤케 눈물나게 하는 글들이..😭

그레이스 2021-03-26 13:34   좋아요 4 | URL
^^;;
마지막글 얹으면서 또 울었습니다^^
어떤 책은 읽고도 글쓰기까지 오래 걸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 책이 그랬어요.
오래 걸려 쓴 만큼 오래 기억될 것 같습니다.
미미님 감사해요~

scott 2021-03-26 15: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 어무이,,,,,
ʕ>⌓<。ʔ

mini74 2021-03-26 2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왜 이리 먹먹하지요. ㅠㅠ 저도 그레이스님 마음이 왜 이리 이해되고 와닿는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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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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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난 아파트 11층에서 이불에 싸여 던져졌다. 아파트 아래를 지나는 아저씨는 나(유원)를 받고, 언니는 나를 던진 그곳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죽었다. 아저씨는 나를 받으면서 장애를 입었다. 나는 이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던져졌다.
내가 나의 존재를 찾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전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알아내기도 전에, 사람들은 나의 존재에 의미를 덧입혔다.
나는 이 두 사람의 희생으로 살았고, 그 희생은 나에게 계속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유원이 되어 독백을 해보았다.

청소년문학이다. 아이들은 어떤 감상으로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던져졌다‘는 말은 나에게 실존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던져진다는 것. 나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 관습이나 의무성 따위에 의해 이미 결정된 현재에 ‘던져진 존재’이다. 이렇게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 아닌 임의성속으로 던져져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불안함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그 임의성 때문에 나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임의성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이러한 세상에서 나의 존재를 찾아내서 그 본래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 화재는 유원 자신이 일으킨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였던 유원을 이불에 싸서 던진 언니의 의지도 유원의 선택 밖에 일이었다. 언니를 기억하는 엄마, 아빠, 언니의 친구 신아언니, 당시 사건을 기사로 기억하는 사람들. 유원이 던져진 세계에 함께 던져진 사람들이고, 유원의 존재에 의미를 가중시키는 사람들이다. 예쁘고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 모범적이었던 언니의 몫까지 잘 살아내야 하는 의무를 얹어 준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말들이 유원을 옭아맨다.

유원을 받아주었던 아저씨는 삶의 불행이 그 사건 때문인 것처럼 부모님에게 돈을 받아간다. 아저씨는 불시에 집에 찾아와 유원과 가족들에게 죄의식과 부채의식을 확인한다. 그 방문은 유원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부모님은 아저씨가 불행한 것이 항상 마음에 쓰여 거절하지 못한다. 유원은 부모님이 그 아저씨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 아저씨를 보며 상처받는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 것이 슬프고 고통스럽다.

특별한 시선들 때문에 항상 외톨이었던 유원이에게 친구가 생겼다. 수현과의 만남은 마음속에 감추어두었던 의문들을 끄집어내게 한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던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언니 아는 사람들은 다 그래. 언니는 뭘 해도 됐을 앤데 너무 아깝대. 그렇게 갈 사람이 아니래. 분명히 크게 됐을 거래. 나를 11층에서 던진 거 말이야. 그것도 언니가 영리하고 용감해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거래.”
“나 자랑스러우라고 더 언니를 띄우는 것 같기도 해. 근데 왜 나는 그런 말 듣는 게 싫지? 어쩌라는거야 , 나보고.”
-112p

수현은 유원에게 가볍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준다. 수현이가 아저씨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둘의 관계는 잠시 주춤대지만 유원이가 자신을 가둔 의미들로부터 벗어나려는 결심을 하고 하나씩 풀어가면서 수현과의 사이도 회복되고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유원은 ‘던져진 존재’로서 살지 않기로 결심한다. 자신을 무겁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더 이상 나를 통해 언니의 삶을 요구하지 말아달라고.
그리고 아저씨를 만나서 이야기 한다.

“그때, 제가 너무 무거웠죠.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다리가 으스러진 거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무거워서, 아저씨를 다치게 해서 불행하게 해서.”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저한테 그래요.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198p

자신에게 항상 같은 자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움직이는 존재로 다가가는 것이다.

패러글라딩. 세상에 다시 한 번 자신을던진다. 패러글라이딩하는 유원이는 던져진 아이와 대비를 이룬다. 던져짐에서 던짐으로. 기투.
이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살아가기위해 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함께 던져진 모든 존재자들과의 본래적 관계를 회복한다. 사랑에 존재를 던진다고 해야 할까?

유원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아픔에서 벗어난 수현의 응원이 있기 때문이다.

유원은 이제 가볍게 사는 것을 연습중이다. 수현과 함께.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다. 우리가 선택하는 세상이 아니다. 가족, 사회, 관습, 문화는 우리가 던져짐과 동시에 존재에 의미를 만들어내고 가둔다. 나는 어떤 의미에 포획당하고 있을까? 벗어나야 할 의미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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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23 0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누군가의 치명적인 희생으로 내가 여기 살아남아 있다니, 아 너무 슬프고 무거운 시작이네요. 뭔가 위로가 될 것 같은 책입니다.

그레이스 2021-03-23 01:21   좋아요 2 | URL
제게는 실존적 질문을 하게되는 소설이었습니다.
청소년문학인데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해봤는데 어려울수도 쉬울수도 있겠단 생각입니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속에 던져진 아이들의 질문과 답!
 


















사진 위에는 커다란 활자로 ‘달에서 온 제초의 남자!‘ 라고 찍혀있었다. 쉐백은 정신없이 읽어나갔다.

지구에 내디딘 그의 첫 발자국! 
170년 만에 아나레스 정착지에서 우라스에 온 첫 방문지 위에 박사가 어제 정기 달 화물선으로 파이어 우주항에 도착한 모습을 찍었다. 
과학 부문에서 전 국가 대상으로 주어지는 세오 오엔 상을 수상한 이 특별한 과학자는 외부 세계인에게는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는 명예로운 이유 윤 대학 교수직을 받아들였다. 
우라스를 처음 본 소감을 묻자 이 키가 큰 뛰어난 과학자는 답했다.
"당신들의 아름다운 행성에 초대받아 무한한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쌍둥이 행성이 형제애 속에서 함께 나아갈 모든 세티 인의 우정의 신세기가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난 아무 말 안 했는데!"
쉐벡은 과에에게 항의했다.
"물론 그렇죠. 그 패거리가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했는걸요. 새모이 (대중 신문을 가리키는 속어. 옮긴이) 기자들의 상상력이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니까요!"
선생님이 실제로 뭐라고 말하건 간에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써 대는 거예요.
쉐백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마침내 말했다. - P96

그러나 가장 작은 시골 마을에서 만나고 본 사람들도 다들 잘 입고 잘 먹었으며, 그의 기대와 달리 근면했다. 그들은 뭔가를 하라는 명령을 기다리며 무뚝뚝하게서 있지 않았다. 아나레스 인들처럼 그들도 바쁘게 이것저것 할 일을 찾아다녔다. 그 점이 그에게는 수수께끼였다. 그는 사람에게서 결단이나 자발적 창조력같은 내적인 동기를 없애 버리고 외부적인 동기와 강제성을 불어넣으면 게으르고 부주의한 일꾼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부주의한 일꾼이 그런 사랑스러운 농장을 가꾸고 우수한 자동차며 편안한 기차 같은 것을 만들 수 있겠는가. 재산이라는 미끼와 강요는 분명 그가 믿었던 것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내적인 동기를 대체하고 있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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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프스키에 관심을 두고 읽고 있다.
<파노프스키와 뒤러>라는 작품을 읽고 그의 책들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은 르네상스미술에서의 인문주의적 주제들이라는 표제에서 볼 수 있듯이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을 해석하고 있다.
서점검색으로는 품절 상태다.
도서관에서 빌려읽고 있는데 2주안에 다 읽는것은 무리다. ㅠ
밑줄도 못 긋고 옆에 두고 계속 읽어야 할것 같은데...
알라딘 중고 책을 검색했다. 십만원, 십오만원... 개인판매자들의 판매가이다. 품절 책이라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지만,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가의5배, 8배라니...
빠른 시간내에 재출간되길.
시공사든 한길사든.




티치아노 그림의 두 여인은 리파가 영구한 지복(Felicita Eterma, EternalBiss)과 짧은 또는 일시적인 지복(Felicita Breve, Brief or Transient Bliss)이라는표제어 아래 설명한 한 쌍의 의인상과 밀접한 유사성을 지닌다. 영구한 지복은금발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며, 그녀의 벌거벗은 몸은 그녀가 결국 소멸하고야 마는 현세의 사물들을 경멸함을 뜻한다. 그녀가 오른손에불꽃은 신의 사랑을 상징한다. 짧은 또는 일시적인 지복은 품위 있는 숙녀 의 모습이며 드레스의 노랑과 흰색은 ‘만족‘ 을 의미한다. 귀금속으로 치장하고손에 든 그릇에는 헛되고 짧은 행복의 상징인 금과 보석이 가득 차 있다.
- P286

도상학은 미술작품의 주제나 의미를 형식과 대별하여 다루는 미술사의한 분야이다. 그러므로 이 서문에서는 주제와 의미가 형식과 어떻게 구분되는지 그 차이점을 규정해 보고자 한다.
아는 사람이 길에서 내게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먼저 형식적 관점에서만 말한다면, 내가 눈으로 보는 것은 한 집합체의 세부요소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 이상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집합체는 색과 선, 입체가 어우러져 발생하는 일반적인 시각 현상의 한 부분에 속하는것이며 따라서 나의 시각세계를 구성하는 것의 일부이다. 내가 그 집합체를자연스레 하나의 사물(한 신사)로 확인하고 세부 요소의 변화를 사건(모자를 벗는 행위)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이미 순수하게 형식적인 인식 행위의 한계를 넘어서서 주제 혹은 의미의 첫 영역에 들어서 버린 것이다. 이렇게 인지된 의미는 기본적이고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성격을 지닌다. ...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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