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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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의 발을 씻어주던 에우리클레이아는 오딧세우스의 흉터를 알아본다. 이 인지는 서사에 새로운 활기와 긴장감을 주는 사건이다. 서동욱 교수는 타자철학서론에서, 변장한 오딧세우스를 대접한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와 부지중에 세 천사를 대접한 아브라함을 예로 들며 환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환대는 오랜 역사를 지닌, 타자에 대한 긍정적 반응이다.

 

동독으로 유학을 간 라티프 마흐무드가 얀의 집을 방문했을 때, 얇고 낡은 신발을 신고 있던 그는 발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다. 그 발을 씻겨주고 좋은 신발을 내주면서, 오딧세우스의 흉터와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를 떠올리는 얀의 모친 엘레케의 환대와 지성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환대는 공동체 안에 들어온 타자를 대등한 관계로 사유하고 있지 못할 때가 많다. 엘레케는 라티프의 상처난 발에서 『오딧세이아』의 미메시스를 찾고 있다. 얀은 라티프와 함께 유럽여행을 하는 도중 망명을 한다. 그제서야 알게 된 라티프는 유럽을 떠돌다가 영국으로 망명한다. 얀의 행동은 라티프를 한 주체로서 보고 있지 않음을 알려준다. 라티프는 그들의 삶에 새로운 국면을 만드는 미메시스적 존재였을까?

 

출입문이자 국경인 공항은 한 국가의 울타리를 상징한다. 이 경계는 공동체의 영역을 확실히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밖의 것은 타자의 영역임을 드러낸다. 어느 공항에서든 입국심사는 이루어지고, 우리는 추방에 대한 불안을 안고 그 앞에 선다. 망명을 신청하고 있는 살레 오마르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서있다. 그 국가의 언어를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동류로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에 의한 것이다. 객체이고 대상으로서 이민자를 대할 수밖에 없는 국가 공동체의 배타적 성격과 동일자적 시선을 발견하게 된다.

 

공항 직원의 친절한 웃음 뒤에 차가운 합리성이 벽을 치고 있는 표리부동함을 알기에 죄수의 기분이 든다. “난민”, “망명이라는 단어만 반복하고 있는 노년의 이방인은 그들을 불편하게 하는 타자다. 동일자의 시선에서 그들은 공동체를 침범하는 낯선 타인이고 거절할 이유를 찾아야 할 대상이다. 살레 오마르는 말이 통하지 않는 자로서 받아들여진다. 그는 자신의 소유물 우드알카마리를 가볍게 절취(窃取)당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난민기구 법률고문 레이철의 방문계획과 전화해달라는 메시지가 적힌 카드를 읽으며 살레 오마르(샤아반)는 양가감정을 느낀다. 그녀의 엽서는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 친절일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그는 위안을 받는다. 그럼에도 그녀의 방문이 그의 공간에 충만한 침묵을 산산조각내지 않기를 바란다. 환대는 그 대상을 자아를 가진 존재로 인정하지 못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서로 친숙하고 애착이 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고가는 환대라면 특별히 철학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어쩌면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문 앞에 와 있는 낯선 사람의 요청에 응해야 할 때 환대는 윤리적 정치적 철학의 의제로 떠오른다.”(이주여성인권포럼 우리 모두 조금 낯선 사람들81p)

 

살레 오마르 역시 레이철에게서 신발을 선물 받는다. 이 지점에서 신발은 이 소설에서 상징어가 된다. 문명을 의미하고 있지 않을까? 익숙한 문명에서 낯선 문명으로 이행할 때 그가 신은 신발이 그 기후에 맞지 않는 경우처럼, 이주민은 신체의 고통과 같은 아주 구체적인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단순한 고독이 아닌 몸으로 느끼는 고통을 동반한 고독이다. 타자는 신체를 갖고 있다는 잊기 쉬운 사실을 주지시킨다때로는 홀로 머무를 공간이 필요하고, 다르게 생긴 얼굴들 사이에서 위축되는 몸을 지닌 존재다.

 

라티프도 살레 오마르도 모두 자신이 자아를 가진 존재임을 바틀비의 대사로 말한다. “그렇게 안 하는 편을 택하고 싶습니다라고. 또한 주체로서 망명지인 영국의 소도시 사람들의 삶을 관찰한다. “어딘가에 정신이 팔려 있거나 산만해보이고,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소란에 맞서 분투하느라 분주한(14p)”그들의 삶을 포착한다. 라티프와 살레 오마르는 노골적인 조롱과 혐오를 표시하는 사람들의 타자성을 생각한다.

 

그는 오십 년대 영국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의를 바지에 집어넣은 전형적인 영국인, 해결할 수 없는 도덕적 갈등으로 괴로워하는, 근엄하고 아래턱이 축 처진, 그 영화 시대의 은행원이나 공무원처럼 보였고, 이제는 우리가 서로를 지나쳤으므로, 그는 불운한 영웅처럼 일부러 타가닥타가닥 소리를 내며 한가로이 걸어가고 있었다. 히이죽거리는 gwinnin 블랙어무어 놈. 하지만 조롱하려는 건 아닌데, 그는 위기의 한복판에서 자멸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고, 그가 혐오감을 보이며 낸 쉿 소리는 딱딱한 학대로 위장했을 뿐, 실은 도와달라는 외침인지도 몰랐다.”(123p)

 

영국 한 소도시에서 만난 라티프와 살레 오마르는 과거 공통된 시간과 공간 속에 있었음에도 동일한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하다. 오해했거나 지워버린 기억 속에서 그들의 시간이 어긋났음을 알게 된다.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더라도 타인을 나의 기억 속에서 인식하기 때문에 서로를 타자로 밀어낸다. 그들이 만난 사람들 역시 타자였다. 고향에서 이웃과 친척들은 전체주의 아래 동일성에 포획되거나 그렇지 못한 타자였다. 독일의 엘레케와 얀은 체코에서 이주한 이방인이었다. 공항 직원과 레이철 역시 유럽 공산국가에서 이주해온 이민 2세들이고, 살레 오마르가 잠시 머물렀던 숙소에서 그를 노골적으로 조롱했던 두 사람은 코소보 난민과 체코 집시 망명자다. 영국의 원주민 역시 누군가는 그들의 공동체 안에서 타자경험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라티프 마흐무드와 살레 오마르 두 사람의 만남에 여러 사람의 서사를 담고 타자로 환원되고 있다.

 

무심을 따라 상인의 배가 드나들던 바닷가는 국경과 출입문이다. 경계인 바닷가에 머물던 이주민의 후손은 역사의 격랑에 의해 그 밖으로 내몰렸다. 그들은 망명지에서도 바닷가에서 거주한다. 새로운 공동체의 타자로서.

 

도래하는 타자, 타자와의 마주침은 침범의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때론 지나친 환대와 공동체의 문화를 강요함으로 충돌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들은 더 이상 계절풍을 타고 오지 않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복잡한 문제들을 동반한다. 그들을 마주침은 필연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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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10-09 01: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 님 축하합니다 바닷가 좋을 것 같은데, 이건 바깥으로 밀려난 걸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군요


희선

그레이스 2022-10-09 08:4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강나루 2022-10-10 07: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작으로 선정된 것 축하새요^^

그레이스 2022-10-10 07:45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억울한홍합 2022-12-31 05: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존경스럽습니다

그레이스 2022-12-31 07:29   좋아요 2 | URL
황송합니다.
감사하구요.

2rjfnr 2025-01-11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바닷가에서) 모셔두고 있을 뿐 아즉이네요. ~~
늦었지만 새해 좋은 일 가득하기를
바라고 화이팅입니다.♡♡

그레이스 2025-01-11 23:17   좋아요 0 | URL
^^
지난주에 다시 읽었어요.
새로운 문장들이 다가오네요.
2rjfnr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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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뒤져서 양자역학 관련 책 몇권 꺼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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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8-21 22: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리학도 어렵지만 양자역학은... 저랑 같이 움직이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레이스님, 주말 잘 보내셨나요.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8-21 22:18   좋아요 3 | URL
^^
예~ 서니데이님도 일주일 잘 시작하세요~~

단발머리 2022-08-21 22: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의 양자역학 리뷰 기다릴게요!!

그레이스 2022-08-21 22:23   좋아요 2 | URL
;;;

막시무스 2022-08-21 22: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서분야가 너무 다양하신데요! 알쓸신잡 나오시겠어요!ㅎ 열심히, 즐거운 독서를 응원할께요!

mini74 2022-08-21 22: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양자역학 헉 ㅎㅎㅎ 그저 웃지요. 저도 그레이스님 리뷰 기다릴랍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2-08-21 22: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거 아주 쉬운 그저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는 책이예요 ㅎㅎ

바람돌이 2022-08-21 2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집에 김상욱 교수 책 2권 있더군요. 아이 책입니다.
그 책 2권을 가만히 보면서 저걸 읽어 말어 하면서 한참을 서성였습니다. ㅎㅎ 아직도 서성이는 중입니다.

막시무스 2022-08-21 23:10   좋아요 1 | URL
액션!ㅎㅎ

그레이스 2022-08-21 23:14   좋아요 2 | URL
저도 김상욱교수 책 떨림과 울림 있어요 ^^
여기도 한 챕터 분량인데, 김상욱의 양자공부란 책을 읽을까 생각중이예요
이러다 다른 바쁜책 있으면 미루겠죠ㅋ

scott 2022-08-22 0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댁 책장은
보르헤스의 책장 보다 더 광활하고 방대 할 것 같습니다 ^^

그레이스 2022-08-22 00:10   좋아요 2 | URL
^^;;😅

책읽는나무 2022-08-22 08: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김상욱 교수님은 TV에서는 늘 친근하고 아주 즐거운 양자역학을 공부하시는 분이신 것 같아 양자역학이 쉽나? 하고 넘어갈 뻔 하게 만드시는 재주가 있으시더군요. 의심이 많은지라....아직 책을 사진 않았는데 그 <떨림과 울림> 책 자꾸 사고 싶게 만드십니다^^

그레이스 2022-08-22 16:31   좋아요 2 | URL
양자역학이란 제목의 책이 따로 있는데 그걸로 사셔도 좋을것 같아요

Yeagene 2022-08-22 22: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독서의 폭이 정말 넓고 다양하신 듯합니다.존경스럽습니다♡

그레이스 2022-08-22 22:33   좋아요 2 | URL
아녜요
그렇지 않습니다 ㅎㅎ

고양이라디오 2022-08-26 1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알면 알수록 재밌는 양자역학ㅎ <떨림과 울림> 읽어보고 싶네요. <빛의 물리학>도요!

그레이스 2022-08-26 12:30   좋아요 2 | URL
문장 한 줄 썼을 뿐인데 댓글이 이렇게 많이 달리는 걸 보면 이심전심이 느껴집니다.~♡

서니데이 2022-09-01 0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좋은 아침입니다.
여름이 계속될 것 같았는데, 잠깐 사이에 아침 저녁은 많이 차가워졌어요.
이제는 열대야도 끝났고, 낮에도 많이 덥지 않은 시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9월이 시작되어서, 인사 남기러 왔어요.
좋은 일들 가득한 9월 보내세요.^^

얄라알라 2022-09-03 14: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뒤지시면 ˝양자역학˝ 책이 집에서 나온다는 말씀이시죠? 그것도 한 권이 아니라, ˝몇 권˝!
와! 저는 그레이스님, 미학, 철학, 미술사....그쪽 전공책 많이 가지고 계시려니 상상했는데 ㅎ

역시 진정한 독서가는 분야를 가르지 않고 즐기시나봅니다

그레이스 2022-09-03 14:58   좋아요 3 | URL
ㅎㅎ
과학분야도 즐겨 읽었었는데 ... ^^;;
꺼내놓고 읽다 중지 중입니다.

산만한 독서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길 멈출 때
벵하민 라바투트 지음, 노승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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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연구해서 지식을 완전하게 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린 말이다. 과학, 예술, 철학의 길이 궁극적으로 한 지점에서 만난다는 생각을 했다. 작가는 과학적 개념에 충실하면서, 실제 사건들을 바탕으로 허구를 썼다고 한다. 허구를 사실로 받아들일 위험성을 걱정할 정도로 플롯에 개연성이 있다. 천재적 몰두와 발견의 순간, 작가의 펜은 인간의 나약함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는 어려운 과학이론과 나의 천박한 지식의 간극을 역사와 보편성으로 메꾸면서 이끌어 갔다.

 

18세기 디스바흐에 의해서 우연히 만들어진 안료 프러시안 블루가 최초로 사용된 <그리스도의 매장>(피터르 파데베르프,1709)은 인류의 비극을 애도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1782년 셸레는 이 프러시안 블루에서 시안화물을 분리해내고, ‘프러시안산()’이라고 명명했다. 1907년 프리츠 하버는 화약과 폭약의 원재료인 질산염의 공급을 위해, ‘공기 중 질소 채취 연구를 한다. 그 연구는 비료 생산에 공헌을 했고, 그는 공기에서 빵을 이끌어낸 사람이 되었다. 1915년 역사상 처음으로 자행된 가스공격을 감독한 그는 시안화물을 이용한 살충 훈증제 치클론을 발견했다. 이 살충제는 나치가 자신의 친족을 비롯한 수많은 유대인을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다. 아름다운 프러시안 블루는 아우슈비츠 가스실 벽에 참담한 푸른빛을 남겼다. 인류의 우연한 발견은 양면성을 띈다.

 

전쟁터의 참호에서 일반상대성 방정식에 대한 최초의 정확한 해를 구한 슈바르츠실트의 풀이법에는 일반상대성의 신빙성과 물리학의 토대를 위협하는 특이점이 존재했다. 그가 전쟁터의 침상에서 죽기 직전까지 빠져나오지 못한 이 심연은 후에 블랙홀의 존재로 밝혀진다. 수학의 심장부에 가까이 간 그로텐디크는 광기에 휩싸인다. 입자가 파동을 따라 서핑을 하듯 운동한다는 루이 드 브로이의 양자이론은 상상할수록 아름답다. 자신의 이론을 발표하다 정신을 잃는 그의 모습은 스탕달 신드롬을 떠올리게 한다. 과학자의 광기는 스스로를 소진시키면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를 닮았다.

 

슈레딩거 방정식은 아원자 영역의 어둠을 흩어 신비의 세계를 드러내줄 프로메테우스의 불”(118p)처럼 보였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는 이 불을 거부하고 불확정성을 주장한다. 양자는 단일한 정체성을 가지지 않는다는, 기존 물리학의 토대를 흔드는, 이 이론을 보어는 새로운 물리학의 주춧돌”(217p)이라 여겼다. 1927년 솔베이 회의에서 아인슈타인과 보어는 격돌했다. 오랜 질의와 응답과 토론 끝에, 아인슈타인은 항복했고, “신은 우주를 놓고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소!”(227p)라는 말을 던진다. 보어는 신에게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시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229p)라고 답변한다. 천재도 항상 창조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격물치지에서 더 나아가 왕양명은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이라고 했다. 지식을 넓히는 것은 사물을 바로 잡는 데 있다는 뜻이다. 사물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는 한계 밖의 것을 그대로 둠, 그대로 수용함이 아닐까 한다. 끌어들여와 현재의 지식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게 함으로 앎과 모름의 경계가 명확해 지고, 그 경계는 한 걸음 내디딜 시작점이 된다. 그렇게 지식은 넓혀져 갈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세계의 정원사라고 할 수 있겠다. 가지가 부러지도록 레몬이 달리는 죽음을 앞둔 풍요는 눈에 보이는 현상의 이면을 지시한다. 가지를 잘라보지 않고서는, 얼마나 살지 알 방법이 없다. 이 정원에 존재하는 것들은 내가 보여주는 세상은 당신이 나를 적용하면서 생각하는 세상과 같지 않다"(200p)고 경고한다. 정원사는 그 정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정원사가 할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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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8-19 2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한자를 많이 아시는군요? ^^ 개연성 있는 허구라니 상당히 사실적인가 봅니다. 이 책도 요즘 인기가 많은거 같아요~!!

과학은 너무 어렵다는...😅

그레이스 2022-08-19 20:50   좋아요 3 | URL
한자 잘 몰라요
새파랑님~ 그저 책에서 본 짧은 지식일 뿐이예요.
이 책은 과학사를 소설로 엮은거라 사실 잘 몰라도 읽을 수 있어요.
쉽고 흥미진진해요.^^

희선 2022-08-20 02: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인류의 우연한 발견은 양면성을 띈다, 는 말 맞네요 그런 일 프러시안 블루뿐 아니라 많겠습니다 세계 전쟁을 해서 만든 약도 있잖아요 방사성물질도 생각나네요 안 좋은 것뿐 아니라 좋은 걸 처음부터 알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없겠지요 시간이 가야 아는군요 그래도 어떤 일이 어떤 일로 이어질지는 알 것 같기도 해요 그러니 그런 건 조심해야 합니다 과학자보다 과학을 쓰는 사람이 더...


희선

그레이스 2022-08-20 07:45   좋아요 2 | URL
예!
그렇죠?
누구에게 그 발견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mini74 2022-08-20 1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우슈비치의 푸른 빛이라니 ㅠㅠ과학의 양면성같은 건가요...요즘 이공계 아이들 과학과 윤리? 이런 류의 수업 들으며 토론도 하더라고요. 꼭 필요한 수업 같아요.

그레이스 2022-08-20 12:43   좋아요 2 | URL
아 정말 필요한 수업인듯요
사유의 한계 안에 갇히는 게 무서운 일을 초래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요!

단발머리 2022-08-20 12: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 리뷰 너무 좋네요. 저도 이 책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그레이스님 리뷰 읽고 나니 쫘악 정리되는 것 같아요. 저는 새로운 지식을 처음 대하는 과학자, 수학자들의 분투가 잘 전해져서 좋았는데 그레이스님 글 읽으면서는 지식의 확장이라는 면이 딱 느껴지네요. 잘 읽고 갑니다^^

그레이스 2022-08-20 12:46   좋아요 3 | URL
아유.. 감사합니다.
저 아직 다른 분들 리뷰를 안보고 좋아요만 누르고 와서.. 이제 슬슬 읽어보려구요. 단발머리님과 다른 분들 리뷰 제목만 봐도 그 아우라에 기가 팍 죽던데...^^;;
감사합니다.

바람돌이 2022-08-20 17: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쉽고 흥미진진하다는 그레이스님 댓글에 절망!!! 읽다가 무슨 말인지 어려워서 집어던진 사람 저라니까요. ㅠ.ㅠ

그레이스 2022-08-20 17:59   좋아요 2 | URL
^^;;
뭐라고 해야할지...
이거야말로 독서취향때문이 아닐런지요.;;

서니데이 2022-08-20 21: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좋을 것 같긴 한데, 그런데도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 조금 있어서 한번 더 생각해보게 되네요.
가벼운 책만 읽다보면 생각할 내용이 많은 책은 읽는 시간이 조금 더 오래걸려요.
잘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8-20 21:37   좋아요 3 | URL
읽는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을수 있습니다. 모르는 이론에 너무 연연하지 않으면...^^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주말 되시길 바래요~~

공쟝쟝 2022-08-21 18: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렇게 정갈하고 아름답게 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ㅋㅋㅋㅋㅋㅋㅋ
아... 그걸(?) 이렇게 꿰시다니. 그레이스님, 서말인 구슬 잘 꿰시는 분.

그레이스 2022-08-21 18:21   좋아요 2 | URL
정갈, 아름다움은 저랑 조금 먼데,,, 이런 칭찬 감사합니다^^;;
 
이민자들
W. G. 제발트 지음, 이재영 옮김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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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너무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감상을 바로 글로 정리하지 못할 때가 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감동을 글로 풀어내지 못하는 능력의 한계일 것이다. 라캉이 기표가 기의에 닿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진다고 한 것처럼 그저 텍스트만 읽었을 뿐인 독서를 할 때도 있다. 의미를 찾는 과정이 독서를 끝낸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이 작품의 경우는 평행하는 여러 인물의 서사가 나에게서 생성되는 의미를 찾는 것이 어려웠다. 한마디로 적용의 문제가 어려웠고, 여전히 생각 중이다.

 

작가는 직접 화자(話者)가 되기도 하고, 또 다른 화자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이들 모두는 영국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고, 일부는 유대인이다. “이민자들은 타국에서도 주로 고향사람들과 어울린다.”(84p) 그들에게서 고향에서의 삶과 이주의 역사를 듣는다.

 

헨리 쎌윈 박사를 만나러 가는 화자(話者)를 따라 걸어간다. 머릿속에서 스케치하며, 잔디밭을 지나고 개암나무가 늘어선 통로를 지난다. 통로가 끝나는 지점에는 지금은 돌보지 않아 낡은 테니스장, 마치 젊음의 흔적만 남아있는 한 사람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몇 번의 만남 뒤에 그들은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한다. 유년시절과 헤어진 사람들, 이주와 이민자의 삶에 대해서. 나는 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 자서전을 써내려가듯 말하는 그 분위기에서 깊은 비애감을 느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향수병이 점점 더 심해진다고”(29p) 하던 나이든 이방인은 자살한다. 그리고 오래전 스위스 산악에서 실종되어 그에게 큰 상실감을 안겨줬던 그의 친구는 칠십 이 년 만에 빙하에서 발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사자들은 이렇게 되돌아온다. 때로는 칠십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얼음에서 빠져 나와, 반들반들해진 한줌의 뼛조각과 징이 박힌 신발 한 켤레로 빙퇴석 끝에 누워 있는 것이다.”(34p)

 

파울 베라이터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소식을 들은 화자(話者)는 파울 베라이터가 자신의 스승이던 S도시에서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와의 첫 만남, 견학수업, 클라리넷을 연주하던 모습, 쾌활하고 즐거운 것 같았던 그가 오르간 연주를 듣고 흐느껴 울던 모습, 어떤 생각에 빠져들며 침울해지던 모습을 기억한다. 나중에 알게 된 그 슬픔의 원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반()유대인이었고, 1/4만 아리안의 피가 흐르던 그가 징집에 응하고, 1939년과 1945년에 다시 독일로 돌아간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독일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쟁터에서 견딜 수 없는 일들을 목격했을 그, 비트겐슈타인, 벤야민, 츠바이크 등 자살한 작가들의 책을 읽고 기록하던 그, 알프스 아래 작은 마을에서 이민자로서 살다 끝을 낸 그에게서 처절한 고독을 본다.

 

화자(話者)의 여행은 그들의 흔적을 찾고 그 땅 어딘가에 뿌리가 있음을 확인하기 위함이었을까? 고향을 떠나 스위스와 프랑스로 그리고 영국으로 이주하는 일가의 역사를 듣고, 정신병원에서 죽어간 아델바르트 할아버지의 비망록에 적혀 있는 아름다운 여행기를 따라 되짚어간다. 그 비망록에 적힌 마지막 종착지였던 예루살렘의 풍경은 폐허와 같았고 병든 사람들만이 눈에 띈다.

 

맨체스터의 공장지대 아뜰리에에서 작업하고 있는 화가 페르버의 말에 가슴이 서늘하다.

“19세기 내내 독일인들과 유대인들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도시가 바로 맨체스터였지. 그러니 나는 가출한다고 나섰다가 되려 집으로 돌아온 꼴이었네. 우리 시대 공업의 탄생지인 이 도시의 거무칙칙한 건물들 사이에서 사는 날이 길어질수록, 나는 나 역시 흔히 말하는 것처럼 굴뚝 아래에서 일하려고 이리로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어(that I am here, as they used to say, to serve under the chimney).”(243p)

 

절멸 수용소의 굴뚝(chimney)을 바로 떠올렸다. 의도적으로 이중적 의미를 담기 위해 이 문장을 썼을까? 그리고 육필원고-그의 어머니가 1939년에서 1941년 사이에 슈테른바르트가의 집에서 적어놓은 것-를 건네준다. 그 기록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고통스러운 독일 동화 같은, 가슴을 옥죄어오는 탁월한 글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과 일상 풍경은 아름답기만 하다. 독일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동화되어 살았었기에, 호른 연주자와의 사랑과 이별, 프리츠 페르버와의 결혼, 그와 함께 오른 산들, 슈테른바르트가의 집에서 시작한 신혼과 뮌헨 테레지엔비제 광장에 만들어진 스케이트장의 기억은 온 세상이 파란빛으로 가득했던”(279p) 아름다운 기억이다.

 

1991년 루이자 란츠베르크의 기록을 따라 독일로 간 화자는 유대인들의 허물어져가는 공동묘지에서 그 흔적을 찾는다. 남편 프리츠와 루이자는 194111월에 강제 수송된 뒤에 소식이 끊겼다고 적혀 있는 란츠베르크가 묘비를 발견한다. 여행에서 돌아와 폐허가 되어가는 맨체스터에서 페르버의 마지막과 한때는 유명했던 호텔의 퇴락한 모습을 마주한다.

 

어딘가에 속하려했던 인간의 모습. 그러나 배척의 대상이었고, 탈주자이며, 이민자였던 그들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이주한 곳에서도 번영의 흔적만 남아있는 타자들의 도시에 머문다. 그래서 그들은 더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삶을 끝내버린다. 삶의 경계 밖으로 내몰렸던 역사, 여전히 뿌리내릴 곳이 없는 이민자들의 실존적 상황은 처절한 고독으로 다가온다. 우리 안의 누군가는 이런 실존적 상황을 겪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끝없이 자신의 근원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 그의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끝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기분”(185p), 그것이 그들의 실존 느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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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블리땡 2022-09-14 2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책탑 멋져요 ㅎㅎ

그레이스 2022-09-15 07:4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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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글을 먼저 읽은 후, 직접 저자의 강의를 듣게 될 때, 글에서 받았던 이미지와 달리 낯설 때가 있다. 그러다가 강의 중에 글에서 끌렸던 생각의 방향이나 열정을 느끼게 되면 그 강사와 저자는 한 사람이 된다. 새삼 글쓰기의 매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강사의 책 2권을 읽고 2회에 걸친 강의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좋았다.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에서는 우리 옛 그림을 보는 법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우리가 서양화 감상법으로 우리 그림을 보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우리 그림에서 색, , , 형상 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조선 그림은 사의화(寫意畵). “지식인의 호사스러운 취미의 그림이 아니라 묘사 대상에 자기의 정신세계를 담은, 즉 정신에 무게를 둔 그림이다.”(9p,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 화가 개인의 삶과 사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이 마음을 움직여서 그림으로 그려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그린 화가의 마음을 따라 거닐다가, 그의 세상에 말을 걸고, 인생을 만날 것을 권한다.

 

작가는 더 보고 싶은 그림에서 그림을 더 깊이 있게, 확장시켜 본다. 보이는 그대로 보고,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고, 나의 눈으로 보는 감상을 소개한다. 내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방법은 '나의 눈으로 보기'이다. 감상자의 사상과 철학, 세상을 보는 시선이 그림을 담는 그릇이 된다. 저자는 독서에 대해 직접적으로 강조하지는 않지만 그가 수록한 그림들과 감상을 통해 독서를 통해 인문적 소양을 높이는 것이 중요함을 전달하고 있다.

실제로 그림을 보는 방법은, 텍스트를 읽고 작가를 읽고 나를 읽는, 독서의 단계와 통한다. 저자와 함께 그림을 보다보면, 그림의 서사를 읽고, 화가의 시대와 메시지를 읽고, 감상하고 있는 나의 시대와 나를 불러오게 된다.

 

이 책들은 두 개의 그림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조선의 그림과 서양화를 비교하는 형식이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 시선의 미학을 보다에서는 카라바조의 <나르키소스>를 비교한다. 흘러가는 물과 고여 있는 물, 멀고 가까운 거리의 차이,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이야기 한다. 관조하는 시선, 어지러운 삶의 문제들도 다 잊은 듯한 고사의 얼굴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게 된다.

 

윤두서의 그림을 좋아한다. 이 책들에서도 윤두서의 작품들에 많은 시간 머물러 있었다.

윤두서 <진관타려도>1715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에서는 윤두서의 <진단타려도>를 소개하고 있다.

진단타려고사의 내용은

희이(希夷) 진단은 중국의 격동기였던 당나라 말에서 송나라 초까지 살았던 학자다. 당시는 당나라가 주전충에게 멸망한 수, 자고 일어나면 정권이 뒤바뀌는 510국이 난립하던 시기였다. 관상학과 수상학에 조예가 깊던 진단은 새 왕이 나타날 때마다 군주상이 아니라며 나라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 날 흰 나귀를 타고 길을 가던 중에 한 나그네에게서 조광윤이 송나라를 세웠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진단은 후주의 장군 출신 조광윤이 왕위에 오를 것과 그로 인해 태평성대가 열릴 것을 이미 예언한 적이 있었기에, 자기의 예감이 맞았다고 크게 기뻐하다가 나귀에서 떨어진 것이다.”(158p,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

실제로 조광윤은 송을 세우고, 그의 통치 시대는 한 나라 이후로 가장 평화로웠다고 평가받는다. 진단 선생은 새 시대가 열리는 것을 보고 은둔한다. 윤두서는 이 고사를 읽고 <진단타려도>를 그린다.

윤두서 <자화상>18세기초


숙종의 환국 정치로, 당쟁이 극심했던 난세에, 입신양명의 길이 막힌 남인이었던 윤두서는 고사의 유머러스한 장면을 그림으로 자신의 염원을 표현하고 있다. 나귀에서 큰 대자로 떨어진 진단의 얼굴은 윤두서의 얼굴이다. 놀란 듯 우스꽝스러운 표정은 그가 그린 <자화상>과는 다른 분위기를 띄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또 다른 모습이다. 그러기에 자신의 염원을 해학적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자화상>에서도 화면을 꽉 채우는 얼굴과 치켜 올라간 눈과 눈썹에서 엄격함이나 진취적인 성품보다는 따뜻한 눈빛을 본다. 이 전에 <돌깨기><밭갈기>와 같은 서민들의 고단한 노동을 그린 그의 시선 때문이었을 것이다.

윤두서 <돌깨기> 18세기 초

윤두서 <나물캐기>17세기 말?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에서 윤두서의 <나물캐기>를 통해 춘궁기 서민들의 배고프고 고단한 삶과 여인들의 노동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더 보고 싶은 그림에서 이 그림을 더 깊게 감상하고 있다. 그는 <나물캐기>와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을 비교한다. 그림을 감상하다 문학을, 문학을 읽다가 그림을 자연스럽게 연상한다. 나 역시 에밀 졸라의 대지를 읽으면서 밀레의 그림을 떠올렸다. 동양 문화권에는 이미 서화동원(書畫洞源)의식이 있었다. “그림과 글은 삶의 근원을 묻는 언어적 역할을 하는 유사점이 있다.”(145p) 가파른 비탈길에서 식용 나물을 찾고 있는 여인들의 야윈 모습과 구부리고 허리를 펴는 힘없는 동작에서 굶주림의 시기를 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윤두서는 비탈을 가파르게 함으로 이 곳 험준한 지역까지 먹을거리를 찾아올라올 만큼 어려운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땅에서 먹을 것을 찾고 있는 흰 천을 쓴 여인은 이삭 줍는 여인들을 연상시킨다. 수확의 시기에 땅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 식량을 삼아야했던 가난한 여인들의 고단하고 비참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비참함은 이 여인들의 뭉그러진 손에서 더욱 선명하게 보인다. 손이 기형이 되도록 일하더라도 그 노동이 자신의 소유의 땅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나마 좋았겠지만, 남의 땅에서 손이 터지도록 한 일은 굶주린 배를 채우기에도 모자란다. 17세기 말 조선이나 19세기 프랑스의 가난한 여인들의 삶은 차이가 없는 듯이 보인다.


윤덕희 <독서하는 여인> 18세기

윤두서의 따뜻한 시선은 아들인 윤덕희에게도 흘러간 듯하다. 저자는 옛 그림에도 사람이 살고 있네에서 윤덕희의 <책 읽는 여인>을 소개한다. 슈테판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 수록되어 있는 프라고나르의 그림을 비교한다. 조선시대 그림 중 저자가 본 유일한 여성의 독서를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양반 여성을 위한 교훈서에는 여성의 할 일로 여공(女工)’치산(治産)’을 말하는데, ‘여공은 가사 일을 말하고 치산은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것을 가리킨다. 가사일과 남편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며 살림을 일구는 것이 여성의 할 일이었다. 책을 읽는 행위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난했던 이덕무의 부인이 바느질로 하루하루 끼니를 댔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더구나 진보지식인이었던 이덕무조차 언문소설을 읽는 여성들에 대해 경계하는 글을 썼다고 한다.


윤덕희가 살았던 조선 양반가 여성의 이런 상황에서 이런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파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여인을 보는 그의 시선은 따뜻하다. 손으로 짚어가며 읽고 있는 이 책은 여인의 행실을 써놓은 여사서』 『여범첩록』 『여계』 『여논어와 같은 종류가 아니라, 언문 소설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평상위에 한가로이 앉아 몰두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감동을 준다. 여인이 살고 있던 시대적 상황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느껴진다. 녹우당 어디쯤이었는지…, 다시 가보고 싶다.

 

두 책에 수록하고 감상한 그림들에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을 바라본 화가들의 시선이 있다. 그림을 보는 저자의 시선 역시 사람을 향하고 있다. 그 방향성 때문에 글을 읽는 나의 마음은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 그 그림들을 지나 저편의 사람과 삶을 향해 간다. 그림을 보는 것은 사적인 사건이다. 동시에 그림 속 인물들과 관계를 맺고, 다른 감상자들과 교감하고, 상황과 나를 잇는 시공을 초월한 사건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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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9-10 08:41   좋아요 3 | URL
감사합니다 ~~
페넬로페님도 축하드려요
추석명절 잘 보내시고 담주에 봬요~~

책읽는나무 2022-09-13 11: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2관왕!!
그림하면 빼놓을 수 없는 분 중 한 분이시니까요^^
축하드립니다^^

그레이스 2022-09-13 14:01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거품이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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