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다보면 신들의 계보와 이름들이 등장한다. 한번 읽어서는 제우스 헤라 아폴론, 아프로디테, 디오니소스 등의 신들의 이름은 기억나도 그가 어떤 신인지 관련된 이야기나 계보는 다 휘발되고 체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사라지는 현상을 경험한다. 거기에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읽게 되면 로마신의 계보가 섞이고 혼돈에 빠진다. 아이들은 헷갈리지 않는 걸 보면 배움에는 때가 있나보다 하는 생각에 잠시 좌절감을 맛본다.
미술사공부 모임에서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를 마치고 신화그림을 공부하기로 했다. 그래서 정한 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빠진 화가들』이다. 이 책은 토마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의 내용을 그대로 싣고 있다. 그 전에 읽었던 번역과 달리 바이런, 밀턴, 포프 등의 시(詩)들의 소개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너무 오래 전 번역을 읽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각 장에 나오는 신화의 이야기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다. 고전주의와 신고전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많이 등장한다. 신화가 이들의 주제가 된 것은 역사적인 배경이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는 여전히 교회를 중심으로 한 그림과 조각들이 주를 이루었고, 화가들을 지원하는 귀족들의 주문에 따른 인물화와 신화의 내용들이 그려졌다. 바로크시대를 거쳐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시대에 성화를 금지시키거나 절제 시키게 되면서, 화가들이 풍경과 인물 그리고 신화의 내용을 그리게 되었다. 물론 16세기부터 18세기라는 시간과 이탈리아로부터 유럽과 영국에 이르는 공간적인 편차를 두고 이루어진다.
라파엘 전파로 분류되는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신화그림은 매끄럽고 예쁘다. 니콜라 푸생,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 구스타프 모로, 번 존스 등 1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라파엘 전파, 상징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등장한다. 물론, 램브란트나 티치아노등 이탈리아나 유럽의 르네상스, 바로크 화가들의 작품들이 보이기도 한다.
푸생은 근대 미술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화가이다. 그는 그림 안에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는다. 그는 신화를 통해 인간의 존재와 죽음의 문제를 질문하고 있다. 모로는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그림을 통해 신화 속에서 그려지는 사랑, 죽음, 공포 등의 심리적 묘사를 그려내고 있다.
내게는 이 두 화가의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신화를 그린 화가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을까? 그들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림에 나타난 알레고리는 무엇일까? 이런 질문들은 신화를 활자로만 읽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물론 휘발되는 신화의 지식을 잡아두는 부수적인 유익도 있다.
조금 아쉬운 것은 화가들이 편중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내게는 새롭게 알게 되는 화가들이 많았기에 유익했다. 다른 한가지 문제는 제본이었다. 책이 저절로 분철되는 현상을 겪고 있다는 것. (이 책을 공들여 엮은 작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나만 겪는 현상이길 바란다.
이 책을 보충하기 위해 함께 읽은 책들을 소개하면, 이주헌의 『신화, 그림으로 읽기』, 황경신의 『그림같은 신화』이다.
이주헌의 『신화, 그림으로 읽기』는 그리스와 유럽을 여행하면서 본 유적들과 미술관, 박물관의 작품들을 주제별로 소개하고 있다.
황경신의 『그림같은 신화』는 사랑, 욕망, 슬픔, 외로움의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감정들의 주체는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이다. 그들을 중심으로 그림들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불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도 그렇지만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보면 신들이 여인들로부터 사랑을 이루는 방식이 폭력적이다. 이러한 신화적 폭력성은 오늘까지도 우리가 사는 사회 안에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신화에서 주로 대상화되는 여성들이 이 책에서는 감정의 주체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빠진 화가들』에서 화가나 그림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고른 또 한 권의 책이 이주헌의 『신화의 미술관』이다. 이 책은 올림푸스의 신들을 중심으로 에피소드와 그림을 소개하고 있다. 그 작품의 시대의 폭이 넓고 다양한 화가들을 소개하고, 그 작품에 대한 설명과 해석도 함께 해주고 있다. 또한 신화가 상징하는 바와 관련된 역사의 사건과 의미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빠진 화가들』이 단지 신화와 그림만을 소개하고 있다면 이 책은 그 상징을 해석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신화는 예술의 주제로서 변주되어 왔다. 시대마다 미술, 음악, 문학에서 다양한 상징과 의미로 변형되고 재창조되었다. 왜 그들은 신화를 주제로 했을까? 그것은 마치 우리가 토론을 하거나 글을 쓸 때 텍스트가 용이한 것과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신화에는 인간의 욕망, 사랑, 죽음 등의 존재의 질문이 담겨 있고, 그것은 예술의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는 올림포스의 신들도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기에 끝없이 변주가 가능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