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노프스키에 관심을 두고 읽고 있다.
<파노프스키와 뒤러>라는 작품을 읽고 그의 책들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은 르네상스미술에서의 인문주의적 주제들이라는 표제에서 볼 수 있듯이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을 해석하고 있다.
서점검색으로는 품절 상태다.
도서관에서 빌려읽고 있는데 2주안에 다 읽는것은 무리다. ㅠ
밑줄도 못 긋고 옆에 두고 계속 읽어야 할것 같은데...
알라딘 중고 책을 검색했다. 십만원, 십오만원... 개인판매자들의 판매가이다. 품절 책이라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지만,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가의5배, 8배라니...
빠른 시간내에 재출간되길.
시공사든 한길사든.




티치아노 그림의 두 여인은 리파가 영구한 지복(Felicita Eterma, EternalBiss)과 짧은 또는 일시적인 지복(Felicita Breve, Brief or Transient Bliss)이라는표제어 아래 설명한 한 쌍의 의인상과 밀접한 유사성을 지닌다. 영구한 지복은금발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며, 그녀의 벌거벗은 몸은 그녀가 결국 소멸하고야 마는 현세의 사물들을 경멸함을 뜻한다. 그녀가 오른손에불꽃은 신의 사랑을 상징한다. 짧은 또는 일시적인 지복은 품위 있는 숙녀 의 모습이며 드레스의 노랑과 흰색은 ‘만족‘ 을 의미한다. 귀금속으로 치장하고손에 든 그릇에는 헛되고 짧은 행복의 상징인 금과 보석이 가득 차 있다.
- P286

도상학은 미술작품의 주제나 의미를 형식과 대별하여 다루는 미술사의한 분야이다. 그러므로 이 서문에서는 주제와 의미가 형식과 어떻게 구분되는지 그 차이점을 규정해 보고자 한다.
아는 사람이 길에서 내게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먼저 형식적 관점에서만 말한다면, 내가 눈으로 보는 것은 한 집합체의 세부요소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 이상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집합체는 색과 선, 입체가 어우러져 발생하는 일반적인 시각 현상의 한 부분에 속하는것이며 따라서 나의 시각세계를 구성하는 것의 일부이다. 내가 그 집합체를자연스레 하나의 사물(한 신사)로 확인하고 세부 요소의 변화를 사건(모자를 벗는 행위)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이미 순수하게 형식적인 인식 행위의 한계를 넘어서서 주제 혹은 의미의 첫 영역에 들어서 버린 것이다. 이렇게 인지된 의미는 기본적이고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성격을 지닌다. ...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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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아버지와의 불편하고 소원했던 관계를 설명하면서,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먼 해변에 버리고 온 일을 기억한다. 그 고양이가 자신들보다 먼저 집에 돌아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고양이를 버렸지만 집을 찾아온 고양이를 다시 버릴 정도로 무정하지 않다는 것일까? 상황에 수동적이라는 것일까? 그 시절에는 그것이 비난을 받을 행동이 아니었다고 덧붙인다그러면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설명한다. 불운했던 삶과 중일 전쟁 참전까지

아버지가 난징함락 전위부대인 보병 제20연대 소속이었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보급부대인 치중병 제 16연대 소속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게 된다. 그로 인해 아버지의 군인시절 정보를 더 알아볼 용기를 내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하이쿠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글들을 찾아보며, 전쟁으로 인해 괴로웠을 아버지의 심정을 더듬어 헤아리는 아들의 마음을 읽게 된다. 전쟁에서 겪었던 포로처형 경험을 짧게 말한 것이 다였음에도 그 상처를 자신이 계승했음을 고백한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 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 51p 고양이를 버리다

 

자신은 그저 평범한 아버지의 평범한 아들이라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세상은 다르다. 아버지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아들의 것은 다르다. 하지만 그 사이에 단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세상은 연속되고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산둥성 가오미 둥베이, 붉은 수수밭으로 피바다를 이루는 곳이다. 1927년과 19392번에 걸친 항일전과 관련한 비극적인 역사가 있었던 곳이다. 이 전투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피와 할머니의 피로 적셔진 검은 흙과 붉은 수수밭의 대비는 이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와 그 참혹함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 전쟁터 한가운데서 학살을 목격한 사람들은 피비린내와 차라리 붉은 수수밭으로 대치되는 시체로 가득한 풍경의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장소는 …… 장소는 더 이상 사랑과 욕망으로 취했던 옛날의 붉은 수수밭이 아닌 유린당한 사람들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모옌의 붉은 수수밭을 읽으면서 중국대륙을 훑고 간 1937년 중일전쟁을 자세히 알아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함께 읽은 것이 난징대학살이었다. 난징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이다. 난징뿐만 아니라 중국의 여러 곳에서 이러한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다. 난징은 오, , 양나라 때의 성도이었다. 장제스의 군대와 일본군의 격전지였다. 19371213일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의 민간인에 대한 만행에 대한 자료와 사진은 끔찍한 것이었다. 난징에는 이 전쟁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잔인한 살인을 명령하게 된 의도는 전쟁에서 감정을 무디게 하기라는 설명을 읽었다. 전투에서 두려움 없이 적군을 살상하기 위해 방어능력이 없는 양민을 죽이는 것으로 훈련을 한다는 것이다. 분개를 떠나 전쟁과 인간의 잔인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하며 할 말을 잃게 된다. 아연실색.

 

그런데 이러한 학살의 가해자 편의 서술이 담담한 것은 더욱 우리를 당황시킨다. ‘국가의 전쟁이었고, 자의적인 것이 아니었고 징병이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윗세대가 벌인 전쟁이고 나도 그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투 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 일본의 청년들을 태평양전쟁에 보내기 위한 선동적인 활동을 했던 늙은 화가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회환과 자긍이 오가는 그의 마음은 자신이 살았던 세계가 무너지고 부유하는 세상에서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가치를 붙들고 있는 인간의 누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쟁은 모두에게 상흔을 남긴다. 그러나 그 상처를 말할 때 태도와 내용은 분명히 달라야할 것을 요구받는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의 질문이 떠오른다. ‘조상의 죄에 대한 후손의 책임에 대한 질문.

혈연에 대하여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려했던 작가 하루키도 결국 자신 안에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정체성과 역사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을 본다.

 

역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의식의 안쪽에서 또는 무의식의 안쪽에서, 온기를 지니고 살아있는 피가 되어 흐르다 다음 세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쓰인 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  97p 고양이를 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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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프스키는 역사학의 과제와 난점을 지적할 뿐, 그것을 정면에서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중세로 논의 영역을 좁혀서 이 문화적 유비가 나타나는 한 사례를 조명하려 한다.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이 바로그 사례다.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유비의 내용이 밝혀질 때, 양자는 정당하게 ‘평행현상‘ (parallels)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파노프스키는 유비성의 내용에 대한 본격적 설명을 잠시 미뤄두고, 먼저 두 문화 현상의시공간적 일치라는 대단히 특기할 만한 사실을 그 유비성을 방증하는일종의 예비적 논거로서 제시한다. 
- P23

"그러나 모든 내적 유비를 접어두더라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순전한 사실 영역에서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은 결코 우연이라고는 할 수없을 뚜렷한 동시발생(concurrence)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이 동시발생을 못 본 척 넘어갈 수는 없다. 그래서 중세철학사학자들이 자신의연구 재료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은, 그들이 여타의 고려 사항들에 영햐을 반지 않았음에도, [중세]미술사학자들이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과 똑같았돤 것이다 - P24

파노프스키는 서로 무관한 양극단인 것처럼 보이는 신비주의와 유명론이 사실은 주관주의라는 한 경향의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철학적 주관주의에 상응하여 등장하는 예술 현상이 원근법적 공간 해석이라고 진단한다. 또한 그는 후기 고딕예술에서 나타나는초상화, 풍경화, 실내화의 장르적 특성을 철학적 유명론의 정신과 연결시키고, 이 시기의 성화(Andachtsbilder)를 신비주의와 연결시킨다. "초상화, 풍경화, 실내화가 응시자로 하여금 신의 창조가 지닌 한없는 다양성과 무제약성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무한성의 감각을 일으키는 데 비해,
성화는 응시자로 하여금 창조자의 무한성에 자신의 존재를 침잠하게 만듦으로써 무한성의 감각을 일으킨다. 이러한 후기 고딕예술의 복잡다기한 경향은 마침내 14세기 플랑드르 화파로 융합된다. 그리고 이는 유명론과 신비주의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64)의 철학에서 융합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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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536176?cds=news_edit

제가 읽고 있다가 중단했었던 <호르몬의 거짓말>이 언급되어 있어서 올립니다.
왜 중단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아마 다른 책들에 밀려서 잊고 있었던듯 해요^^
꽤 의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다시 읽어 봐야겠어요
여러개의 책 탑 아래쪽에 깔려 있네요.;;;
다 읽고 있는 책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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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3-14 09: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한번 책탑 바닥에 깔리면 다시 선택받기 힘든데 ㅎ 책입장에서 행복할거 같아요^^
 

<율리시즈> 읽을 계획이다. 책읽기를 좋아했던 마릴린 몬로가 어려워서 낭독으로 읽었다는...
<등대로>와 비교해봐야겠다.
버지니아 울프는 잘 아는데, 제임스 조이스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만 읽어봤다. 제임스 조이스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르귄의 비교에 대해 생각해봐야겠다.

게다가 읽는 사람은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수동적인즐거움과 자신들의 즐거움을 다르게 인식한다. 일단 버튼을 눌러켜면 TV는 계속, 계속, 계속 흘러나오고 그저 앉아서 멍하니 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독서는 능동적이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행동이고, 내내 깨어 있어야 한다. 사실상 사냥이나 채집과도 그리다르지 않다. 스스로 말하지 않기에, 책은 도전이 된다. 책은 물결치는 음악으로 마음을 달래 줄 수도, 요란한 웃음소리나 거실에 울리는 총소리로 귀를 먹먹하게 만들 수도 없다. 책은 머릿속으로 귀기울여야 한다. 책은 영상이나 화면처럼 눈을 움직여 주지 않는다.
- P132

스스로 정신을 쏟지 않는 한 정신을 움직이지도 않고, 마음을 두지 않는 한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해 주지 않는다. 단편소설 하나를 잘 읽으려면 그 글을 따라가고, 행동하고, 느끼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 사실상 그 글을 쓰는 것만 빼고 다 해야 한다. 읽기는 게임처럼 규칙이나 선택지로 "상호작용" 하지 않는다. 읽기는 작가의 정신과 능동적으로 협력하는 작업이다. 모두가 빠져들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 - P133

하지만 자본주의자들은 몇 년이 아니라 몇 주를 중요시한다. 빠르게 들어오는 큰돈을 얻기 위해, 출판사는 이번 주 베스트셀러를 제공하리라 여겨지는 인기 작가에게 수백만 달러를 선지급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완전히 손해가 되는 일이 적지 않은이 수백만 달러는 예전 같으면 믿을 만한 미드리스트 저자들에게주는 정상적인 선지급금과 계속 팔리는 오래된 책들의 로열티로 쓰이던 돈에서 나온다. 몰록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수많은 미드리스트 저자들이 떨어져 나가고, 수많은 확실히 팔리는 책들이 할인판매를 당했다. 그게 사업을 하는 방식인가?
나는 아직도 기업들이 정신을 차리고, 출판업은 사실상 자본주의와 건강하고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정상적인 사업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빌고 있다.  - P135

제임스 조이스는 거의 나오자마자 정전의 반열에 올랐다.
버지니아 울프는 정전에서 배제되거나 마지못해 받아들여졌으며그러고도 수십 년간 의구심을 샀다. 정교하고 효과적인 서술 기법과 장치를 갖춘 『등대로 쪽이 기념비적인 막다른 길인 『율리시스』보다 후대 소설 쓰기에 미친 영향이 훨씬 크다는 주장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침묵, 유배, 교묘함"을 선택하고 은둔 생활을 한 제임스 조이스는 스스로의 글과 경력 외에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나라에서 지적, 성적, 정치적으로 활발,
한 사람들이 이루는 비범한 집단으로 꽉 찬 시간을 보냈다. 그리프어른이 된 후 내내 다른 작가들을 읽고, 서평을 쓰고, 출간했다. 제임스 조이스가 연약한 쪽이고, 버지니아 울프가 굳센 쪽이다. 조이스가 컬트의 대상이고 우연이며, 울프는 20세기 소설의 중심에서 지속적으로 풍부한 여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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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14 0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제 버지니아 울프를 시작하는 저인데 그레이스님 대단하십니다. ^^

그레이스 2021-03-14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작을 다 읽은건 아니구요
책을 많이 가지고는 있어요.^^
오래전에 읽어서, 비교 하려면 다시 읽어봐야해요. 그냥 버지니아 울프의 활동과 당시 영국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인 때가 있었어요.
제가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말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