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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 250년 만에 쓰는 사도세자의 묘지명, 개정판
이덕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11월
평점 :
“아이고 이놈아, 너는 어찌 이 늙은 애비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느냐.”
죽은 세자를 안고 우는 영조의 비탄의 말이다.
“공부가 국시고 예법 또한 국시다”
영조의 이 말에서 이미 관객은 영화가 줄 메시지의 방향을 짐작한다.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다.….”
“내가 바란 것은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다정한 말 한마디였소.”
- 영화 『사도』 중
아들과 아비의 뒤늦은 대화가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독의 시선에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 비극이 집안일이고 부자간 갈등으로 이해되어야 할 사건인가? 공부지상주의,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은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그러나 조선왕조에 단 한번 등장한 일물(一物, 뒤주를 뜻함)에 의한 왕위계승자의 죽음, 정조의 ‘병신처분’(1776년, 정조즉위년)으로 혜경궁 친정의 몰락 등은 영화의 이 해석에 동의할 수 없게 한다.
‘역사란 궁극적으로 기억과 망각의 시뮬라시옹으로 존재한다’(『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 김기봉)고 했나? 역사가 어떤 거대담론에 의해서 과거의 기억과 망각을 결정하는 언어놀이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역사영화는 말할 것도 없이 작가와 감독의 시선 안에 갇혀 재현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래서, 다시 뽑아들었던 책이 바로 이덕일의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였다.
이 책을 시작하며 작가는 고등학교 국어시간 읽었던 『한중록』을 떠올린다. 혜경궁의 일관된 메시지는 이 비극이 영조의 이상성격과 사도세자의 정신병의 충돌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중록』 내용과 의도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고 그 단서를 ‘영괴대(靈槐臺)’비에서 찾았다고 한다. 이 비碑와 『영조실록』에 기록된 사도세자의 모습은 『한중록』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중록』은 네 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 1편만 정조 때 쓰고 2~4편은 정조 사후에 기록했다. 기록 시기만 생각해보아도 혜경궁의 의도는 친정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련이 없음을 밝히고자 함임을 알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나경언의 고변’이었다. 나경언은 먼저 형조에 1차 고변을 했고, 이 형조에 넣은 원서로 인해 왕을 청대하게 된다. 1차, 2차 고변서의 내용은 읽고 불에 태워서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1차 원서에 왕을 청대할만한 심각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은 역모에 관한 것 외에는 없다. 그러나 아무리 심각한 내용이라도 일개 상민이 왕을 만나기위해서는 누군가 중간에서 힘을 쓰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품에서 흉서를 꺼낼 때 까지 아무런 제지를 당하지 않았다는 것은 배후의 존재를 추측케 한다. 2차 고변서의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세자의 비행에 관한 일이다. 영조는 나경언을 무고죄로 죽인다. 그러면 세자의 비행에 대한 고변이 거짓이란 말인가? 문제는 1차 고변의 내용인 것이다. 고변의 핵심은 ‘변란이 호흡사이에 있다’는 말이었다. 즉 세자가 군사정변을 일으키리라는 고변이었다. 영조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보다는 나경언의 고변에 대한 예단을 지니고 있었다. 나경언의 고변 20여일 후 세자는 뒤주 속에 갇히게 된다.
노론의 힘에 의해 왕위에 오른 영조는 경종독살설에 시달렸다. 대표적인 사건이 ‘나주벽서사건’이다. 영조의 탕평책은 이 사건으로 무너지게 된다. 영조의 군주로서의 정체성은 노론의 힘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소론에 가까웠다. 세자의 대리청정 기간에 보여준 친소론적 모습은 영조나 노론이 위기를 느끼게 했을 것이다. 세자의 죽음을 전후로 노론의 영수인 혜경궁의 아버지 홍봉한의 행적은 나경언의 고변의 배후에 그가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정조 즉위 후 처분들은 정조가 이것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작가는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역사에 숨어있던 진실을 드러냄으로 다른 시각과 추론을 제시한다. 그는 이 책의 다른 제목 『사도세자의 고백』 1판과 2판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가해자와 피해자는 역사 속에 묻혔다. 그리고 240년의 세월이 지나 나의 손에 의해 재구성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 담긴 것이 역사의 진실이라고 강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독일의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가 『진리와 방법』에서 ‘하나의 작품은 일단 형태화하고 난 후에는 그 창작자나 해석자의 의식으로부터 독립되어 자기 자신의 고유한 존재방식을 갖는다.’라고 말했듯이 독자적인 생명력을 얻어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한중록』이 그랬던 것처럼.”
읽은 지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 이 책을 떠올려 보면 조금은 편향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의 문제제기는 한 가지 관점으로 알고 있던 사건을 정치, 외교, 군사 등 보다 넓은 시야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창덕궁 규장각이 있는 후원으로 가는 입구에 정조 때 동궁전이 서있다. 아마도 경희궁과 창덕궁에 머물던 영조와 창경궁에 있던 사도세자의 거리가 너무 멀어 그 사이에 신하들의 당쟁이 끼어든 것은 아닐까하여, 정조가 아들을 가까이 하기 위해 창덕궁 안에 동궁전을 두었다는 해설사의 말이다. 잠시 가슴이 저릿했다.
『한중록』을 통해 알고 있던 사도세자의 모습은 기억된 과거는 역사가 되고 망각된 과거는 역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세검정에서 사초를 씻는 행위는 이 사실을 의미하는 퍼포먼스다.
로마사에 대한 기번과 몸젠의 시각이 다르고, 시오노 나나미에게는 제국주의 사관이 숨어있다. 역사가는 자신의 역사관을 입증하기 위해 사료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하는 사료들을 최대한 수집하고 그것들을 통해 진실에 가까운 역사를 재현하려 한다. 하지만 그 작업이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기록의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결국,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역사를 읽는 사람에게도 철학과 균형 있는 사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