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다 마쳤다아이들과 매주 도시 2개씩 읽어왔다.(부연: 아이들과 책읽기는 경제활동과 상관없는 독서 활동이다.) 오래전, 문학을 읽다가 지리와 역사에 부딪칠 때마다 맥이 끊기고, 찾아보고는 그것이 아주 일반적인 지식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했었다. 다행히 구글 맵이 등장하고, 검색기능이 좋아지면서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막막하고 답답한 기분은 덜 느꼈지만, 이런 지식의 빠른 휘발성은 또 한번 좌절을 맛보게 했다. 지중해와 세계지도를 손으로 그려보고, 중요한 지명을 표시해가며 암기한 끝에 지중해변은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항상 느끼지만 어린 나이에 습득해야 시간이 덜 걸리고 잊어버리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나의 간절함을 전달하는 일도 쉽지는 않다. 사회과목 시험 볼 때조차 아이들은 페이지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지도를 쳐다보지 않는다. 식사 자리에서 지나가는 말로 지도 꼭 봐라.” 하면 아이들은 선생님이 안 중요하댔어.” 한다. 아이들에겐 이거 시험에 나온다.” 하고 별표를 쳐줘야 중요한 지도다. 이해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들여다 본 지도를 다시 또 돌아가서 확인하고, 고대 해전사를 읽으며, 지중해를 보고 또 보고, 나중에 이런 수고 안 하려면 지금 봐야한다는 것을 어찌 납득시킬까 고민만 하다가 이제 모두 대학생이 되었다. 역사를 전공하는 막내만 조금 내 말을 이해하는 듯하다. 뭐 몰라도 사는 데 지장은 없을 테니까.

 

나와 함께 책읽기를 하는 초등학교 6학년 4학년 형제, 그리고 중학생 아이들. 처음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하며, 지중해 지도를 내밀었을 때, 무심한 얼굴들이 떠오른다. 마침 이 책 30개 도시로 읽는 세계사라는 책을 보고 적당하겠다 생각하고 시작했다. 내 아이들을 이렇게 가르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보지만, 불변의 진리!- 일타 강사도 자기 아이는 못 가르친다.



 

이 책에는 고대 도시들이 등장한다. 바빌론, 예루살렘. 아테네, 알렉산드리아고대 도시가 생겨난 당시의 역사와 그 곳을 차지한 부족과 나라들과 왕조들에 대해 설명한다. 이들 중에서는 지금까지 중요한 도시로서 살아남은 곳도 있고,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지역을 조금씩 이동한 '장안' 같은 곳도 있다. 또한 지금은 유적만 남아있는 '바빌론'이나 '테오티우아칸'도 소개된다. 또한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들도 있다. '튀니스'의 카르타고의 유적지에 대한 설명을 읽으며 나는 구스타브 플로베르의 살람보를 찾아보기도 했다.

각 도시에 대한 분량은 10페이지 정도이다. 지도와 사진자료들도 들어있고, 전달하는 내용은 간결한데 충실하다. 뼈대가 잘 갖춰져 있고, 핵심을 잘 전달하고 있어서, 더 알고 싶은 내용을 찾아서 살을 붙여도 복잡해지지 않는다. 정리하기에 유익한 책이었다.

 

마지막 장은 두바이다. 버즈칼리파더 월드섬이 있는 사막위의 인공도시 두바이와 함께 아랍에미리트의 역사, 구성, 정치, 경제를 소개한다. 두바이에 인공도시를 조성한 동기와 목적, 과정, 위기, 현재의 상황에 대해서도 간략한 설명이 붙여진다. 고대도시에서 시작된 여행은 현대의 인공도시 두바이에서 끝이 난다.


나의 감상은 자연스럽게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a invisibili)>로 옮겨 갔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동방견문록으로 알려진 마르코 폴로와 타타르제국의 황제 쿠빌라이 칸의 대화다. 주로 마르코 폴로가 여행한 도시들의 단상을 그리고 있다. 파편화된 도시들의 기억으로 이루어진다. 이 55개의 도시에 대한 내용은 공간과 시간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있다. 고대 도시는 가상의 공간처럼 보이기도 하고, 현대의 도시의 모습을 반영한다. 도시는 소멸과 생성을 거듭하며 시간 속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담아내고 있다. ‘기억’, ‘욕망’, ‘기호’, ‘교환’, ‘’ ‘이름’ ‘죽은 자’ ‘하늘’ ‘섬세한’ ‘지속되는’ ‘숨겨진으로 은유되고 수식되는 도시들이 순환하며 등장한다.

 

가장 주목하게 된 내용은 도시가 상징하는 기호.

 

시선이 머무는 경우는 그 사물을 다른 사물의 기호로 인식했을 때뿐입니다. ……

마침내 여행자는 타마라 시에 닿습니다. 폐하는 벽마다 간판들이 튀어나와 있는 좁은 거리들을 따라 도시를 가로지릅니다. 눈은 사물이 아니라, 다른 사물들을 의미하는 사물의 형상들을 바라봅니다. 펜치는 이() 뽑는 사람의 집을 가리키고, 큰 잔은 술집을, 미늘창은 수비대의 막사를, 저울은 채소 가게를 가리킵니다.……상인들이 판매대 위에 진열해 놓은 상품들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물에 대한 기호로서 가치를 가집니다. 수놓은 머리띠는 우아함을, 금도금한 가마는 권력을, 이븐 루슈드의 책들은 학식을, 발찌는 관능을 뜻합니다. 책장을 넘기듯 시선이 거리를 훑고 지나갑니다. ……

도시가 이와 같이 조밀한 기호의 껍질 속에 있기 때문에 여행자는 타마라에서 나올 때에도 도시가 정말 어떤 모습인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숨기고 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도시 밖에는 텅 빈 땅이 지평선까지 길게 뻗어 있고 그 위에 펼쳐진 하늘에는 구름이 떠갑니다. 우연과 바람이 만들어낸 구름의 모습들 속에서 여행자는 어느새 범선, , 코끼리의 형상들을 구별하는 데 열중해 있습니다.” (22~23p)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기호는 무엇인가? 그 기호가 환원되고 있는 정신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서울의 어느 곳에서나 보이는 잠실의 마천루, 유명인들만 산다는 한강변의 고층아파트, ‘경축재건축조합이라는 현수막, 새 아파트들과 변해버린 거리들은 자본주의가 치켜든 기호다. 그 피켓을 따라 사람들이 줄지어 걸어가고 있다. 차를 타고 강남대로를 지나면서 계속해서 보이는 성형외과 간판은 외모지상주의, 여성의 몸, 그리고 돈이라는 기호가 보인다. 대형 전광판 뉴스 오늘 확진자 수는 도시가 앓고 있는 전염병의 기호, 끊임없이 땅 밑으로 들어가고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행렬은 생기 없는 실내노동자들의 극단적인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들어가는 사무실 빌딩과 아파트 건물마다 설치된 차단기들은 우리들 사이의 경계가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물이다.

 

도시들의 순환은 마지막 대화에서 지옥과 유토피아라는 은유로 마친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알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위험하고 주의를 기울이며 계속 배워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게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208p)

 

우리의 도시에서 찾아내고 지속시켜야 할 것은 무엇이며, 저항하고 맞서 싸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물론 사냥꾼의 사회에서 사는 것이 지옥에서 지내는 것처럼 느껴지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다. 대부분의 노련한 사냥꾼들은, 사냥꾼의 대열에 끼어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이 있기 마련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수다수에게 쉬운전략을 선택할 것이며, 결국 그 사회의 일부가 되어 더 이상 그 사회의 괴상한 논리에 어리둥절해 하거나, 어디서나 제시되는 강압적이고 대체로 허무맹랑한 요구에도 자극 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또한 분명한 것은, ‘누가 그리고 무엇이 지옥이 아닌지를 알아내려고 고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들이 고집스럽게 지옥이라 부르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온갖 종류의 압력에 맞서 용감하게 싸워야만 할 것이라는 점이다.” 

(모두스 비벤디: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지크문트 바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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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07 21:5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책 찜! .🖐

그레이스 2021-09-07 21:56   좋아요 5 | URL
하이파이브! 🙌 😁 ~♡

scott 2021-09-08 00:39   좋아요 3 | URL
지도를 사릉하는 1인!🖐
어렸을때부터 세계 도시 퍼즐 맞추는 재미로(실은 아부지가 돈을 베팅하셔서 ㅎㅎ) 살았고 구글이 영리 해지기 전에는 도시에 첫 발을 디딜때마다 지도를 손에! ㅎㅎ

지금도 벽 한쪽은 세계 지도를 붙여 놨습니다
지구본은 LED조명 ㅋㅋㅋ

저도 이책 살펴보다가 보이지 않는 도시 떠올렸는데! 보르헤스의 알렙과도 맞닿았네요
그레이스님의 깊이 있는 독서 광할한 지식에 탐복 합니다. ^ㅅ^

그레이스 2021-09-08 09:28   좋아요 2 | URL
어릴때부터 환경이...!
보르헤스 알레프, 제 독서 리스트에 있는 책이예요. 조금 앞으로 데려와야겠네요.
감사합니다 ~

새파랑 2021-09-07 22: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가 학교다닐 때 이런 책이 있었으면 세계사 공부가 재미있었을텐데 😅

그레이스 2021-09-07 22:11   좋아요 5 | URL
맞아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중학교 역사선생님이 수업 전에 칠판 한가득 세계지도를 그리고 시작하시던 기억이 나서 지금도 그 쌤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초란공 2021-09-07 22: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앗 <보이지 않는 도시들> 꼭 읽어보고 싶네요~ 찜해두었습나다~

그레이스 2021-09-07 22:45   좋아요 5 | URL
리뷰 기대해요~

초란공 2021-09-07 22: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엉뚱하다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 어떤 계기로... 개인적으로 쿠빌라이칸의 유물하나를 찾고 있어요~ 하지만 제 생애에 이룰 수 잇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마르코폴로와 쿠빌라이 칸은 이 여정에서 제게 중요한 인물이지요^^ 재미있겠는데요~

그레이스 2021-09-07 22:58   좋아요 5 | URL
초란공님 혹시 고고학자세요?
북플 하면서 눈이 휘둥그레 커지는 순간 많이 경험합니다.@@ 놀람

초란공 2021-09-07 23:02   좋아요 5 | URL
ㅎㅎ 전혀 아닙니다^^ 그냥 어떤 계기로... 흥미가 생긴 것이 있어서 자료를 모으고 하는데 훈련받은 바도 없어서 갈피도 못잡고 더디기만 하네요~ 아마 한 10년 쯤 후에 발표를 할 수 있을까요~ ㅋㅋ

그레이스 2021-09-07 23:07   좋아요 5 | URL
그래도 일단 그런 꿈을 갖고 계시다니 놀랍습니다.^^
역사랑 고고학에 관심이 있어서...ㅎㅎ
실크로드 관련된 책은 조금 읽었구요
강인욱 작가 책도 세 권정도 갖고 있어요
다 모으면 읽는게 제 버릇이라서...ㅋㅋ
초란공님 소원 꼭 이루시길 바랍니다

초란공 2021-09-07 23:16   좋아요 5 | URL
감사합니다~^^ 일단 코로나 때문에 여행도 못가고 그동안 쿠빌라이 칸의 외손자에 해당하는 충렬왕 전후의 고려사도 찾아보고 있지요. ^^;; 흥미로운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scott 2021-09-08 00:40   좋아요 4 | URL
아! 이런 이야기, 주제 넘ㅎ 좋습니다!

다큐 비비씨 샅샅이 보고 있지만 이 분야에 권위자들은 전부 옥스퍼드에 있어서
혹쉬 초란공님 자료는 영쿡에 아주 많습니다 ^ㅅ^

청아 2021-09-07 23:2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요즘 지구본 사려고 알아보던 중이라 솔깃합니다~♡저도 찜!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그레이스님 멋지심! 알라딘 굿즈로 세계사 분야별 인물, 사건, 전쟁, 미술사, 음악사 연대기표 테이핑 나왔으면 좋겠어요. 쭉 펴서 여러개 나란히 놓고 같은 시기 미술사는 뭐였고 등등 비교해봐도 재밌을듯🤭

그레이스 2021-09-07 23:30   좋아요 5 | URL
제가 갖고 있는 큰 책 연표가 있긴한데 미술사 음악사 전쟁사 함께 펼쳐놓고 보면 좋겠네요^^
만들기에는 항목이 넘 많네요
같은 간격으로 나와 주면 비교 가능하겠네요
저도 미미님 의견 찬성!

붕붕툐툐 2021-09-07 23: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런 책을 아이들과 함께 읽어내시다니 존경을 보냅니다!! 진짜 대단하셔요~~

그레이스 2021-09-07 23:42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
응원과 격려로 받을께요~!

희선 2021-09-08 03: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세계 지도를 그려보시다니... 지도 같은 거 보기는 해도 그렇게 잘 알지는 못하는군요 그곳을 잘 몰라도 지도를 그려 보면 어디쯤 있는지는 알겠네요 그러고 보니 만화에서 지리를 아주 잘 아는 아이가 나왔는데, 뭐가 어디 있는지 잘 알더군요 시간이 많이 흘러서 지구가 달라지기는 했지만...


희선

그레이스 2021-09-08 07:08   좋아요 4 | URL
그 만화가 궁금하네요

다락방 2021-09-08 09: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학교 다닐 때 세계사, 국사, 한국지리, 세계지리 이 네 과목 점수가 제일 낮았거든요. 너무 못했었어요. 그렇지만 지금은 <걸어서 세계속으로>보면서 지구본을 돌리는 사람이 됐죠. 저도 이 책 읽어보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09-08 09:23   좋아요 2 | URL
요새 지구본은 축척대로 고도랑 해저 깊이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던데 언젠가 그거 하나 장만해보려고 해요^^~♡

단발머리 2021-09-08 09: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덕분에 좋은 책 소개받았어요. 저는 역사, 지리를 좋아하지만 꼭 기억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아합니다 ㅎㅎㅎ 읽고 바로 잊어버리는데도 읽는 그 순간이 좋아요.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기호는 무엇인가? 이 문단 너무 좋네요. 지리와 역사와 문화가 우리 삶과 딱 닿아있는 부분을 꼬집어 주셔서요.

그레이스 2021-09-08 09:2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
코로나가 지나가고 나면 이 도시는 어떤 기호를 갖게 될지...!
두렵네요!

mini74 2021-09-08 09: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겠어요. 저도 찜! 그러네요. 진짜 중학교 사회책이나 역사책은 참 재미없는데 ㅠㅠ

그레이스 2021-09-08 10:16   좋아요 2 | URL
어투 이런걸 좀 재밌게 하면 안됄까요?
요즘엔 말풍선으로 된 대화나 삽화도 들어가던데...^^

bookholic 2021-09-08 13: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이들과 함 도전해 봐야겠어요~~^^

그레이스 2021-09-08 14:10   좋아요 1 | URL
화이팅 하세요
˝🤜🤛˝

steal0321 2021-09-14 1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두스 비벤디: 유동하는 세계의 지옥과 유토피아‘의 한 구절로 마무리하는 기승전결이 돋보이는 그레이스 님의 글 덕분에 세계와 지도와 도시와 현재와 지옥과 용감함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골몰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1-09-14 10: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반갑구요~!
 

내 눈앞에는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해서 거의 집정정부 시대에 끝나는 당시 유행했던 의상들을 보여 주는 일련의 판화들이 있다. 생각 없는 사람들 진정한 진지함 없이 진지한 사람들에게 우스꽝스러울 이 의상들은, 예술적이며역사적인 이중적인 성격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이 의상들은 종종 매우 아름답고 재치 있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모든면에서 내게 중요한 것, 모든 또는 거의 모든 의상에서 내가다시 찾아서 기쁜 것은 그 시대의 윤리와 미학이다. - P9

즉 예술의 이원성은 인간의이원성의 숙명적인 결과이다. 원한다면 영원히 존속하는부분을 예술의 영혼으로, 가변적인 요소를 그 육체라고 생각해 보라. 그래서 오만하고 짓궂고 혐오감을 주기까지 하는 스탕달이 그의 오만함은 가끔 명상에 유리한 자극을 주기도 하였는데 "아름다움은 단지 행복의 약속일 뿐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진리에 가장 접근했었다. 분명 이 정의는 목표를 뛰어넘고 있다. 왜냐하면정의는 미를 행복의 무한하고 가변적인 이상에 너무 종속시키고, 너무 교묘하게 미로부터 미의 귀족적 성격을 제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의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오류와 확실히 단절하였다는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 P13

나는 여러분에게 그를 순수 예술가로 부르기를 원하지 않고, 그 역시 사실 스스로 귀족주의적 절제가 섞인 겸손함으로 이 명칭을 거절했다고 말했다. 
나는 기꺼이 그를 댄디(dandy)라고 부를 것이고, 그렇게 부르는 데는 그만큼 타당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댄디라는 말은 인간 성격의 본질과 세계의 모든 정신 구조에 대한 섬세한 이해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댄디 본질의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댄디는 무관심을 동경한다. 바로 그런 점에서 보고 느끼는 이 만족할 수 없는 정열에 지배되는 G씨는 댄디즘과분명하게 구분된다. - P26

댄디는 모든 일에 흥미가 없고, 또는 정치적인 이유나 귀족적인 이유로 흥미가 없는 척한다. G씨는 흥미 잃은 사람들을 혐오한다. 그는 냉소적이지 않으면서도 진실할 수 있는, 그 어려운 섬세한 정신의소유자들은 무슨 뜻인지 이해할 것이다 예술의 대가이다. 만일 조형 예술의 상태로 집약된, 보이고 만져지는 사물들에 대한 그의 과도한 사랑이, 형이상학자의 보이지 않는 왕국을 이루는 사물들에 대하여 어떤 혐오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나는 기꺼이 그에게 철학자란 명칭 그는철학자란 명칭 이상의 자격이 있다—을 부여할 것이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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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9-07 1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옮기면서 독서하면 좋은 공부가 될 것 같아요. ^^
 

도입부에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역사, 가족관계, 종교, 관습, 심지어 전통댄스 등 알고 가야할게 많다. 그래서 좋기도 하다.
조금 속도가 더디지만, 문장이 간결하고 전달력이 있어서 잘 읽힌다. 영국식 유머와 하위의식에 흐르는 시니컬한 말투가 시선을 다음 문장으로 끌고 간다.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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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05 2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미 문학을 알기 위해 팔요한 큰 부분 같습니다. 근데 전통 댄스까지 ㅎㅎㅎ
하위의식의 시니컬한 말투 궁금합니다 ㅎㅎ
 
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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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의 친척들은 모두 앞에 자를 붙여 칭한다. 외조모, 외외증조모, ……. 4대를 거슬러 올라간 여자들의 서사를 이야기할 때 이 자는 탈락한다. 좋았다. 유전자가 대물림 되듯 당연하게 생각되던 삶의 태도, 말하지 않고 견디던 여성들의 삶이 만들어놓은 토양은 여전히 우리에게 같은 열매를 요구한다. 매서운 현실 속에서도 서로의 울음을 받아주었던 소매는 서사를 기록하는 페이지가 되고, 대물림에서 벗어나는 치유가 된다.

 

지연은 10살 무렵의 기억이 있는 희령의 천문대 연구원으로 지원해서 직장을 옮긴다. 엄마랑 할머니의 관계가 단절된 이후로 찾아온 적이 없는 곳이다. 집을 구해 이사한 후, 우연히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할머니를 만나게 되고, 함께 식사를 하고, 엄마(미선)와 할머니(영옥), 증조모(삼천)의 이야기를 듣는다. 증조모는 백정의 딸이다. 일제 강점기였고, 증조모는 위안부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천주교 순교자 집안의 자녀인 증조부는 사람은 빈부귀천이 없음을 믿었고 실천한다. 처음 본 증조모에 대한 연민과 끌림으로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부모의 반대를 거역하고, 증조모와 결혼을 하고 삼천을 떠난다. 증조모는 병상에 있는 자신의 엄마를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왔다.”(34p) 두 사람은 개성에 자리를 잡고, 증조모는 삼천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백정의 딸이라는 신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더구나 남편을 가족들과 의절하게 했다는 이유로 이웃들과 성당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는다. 증조부는 가족과의 단절과 친지들의 외면과 비난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의 마음속에 노여움과 억울함이 생겨났고, 그로 인한 죄책감을 울화를 가슴에 품게 된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체념을 배우고, 남편의 의중을 살피는 삶을 살게 된다. 그 체념은 고조모가 가르쳐 준 사는 법이다. 그녀들에게 기대는 사치뿐 아니라 위험한 무엇이었다.

 

이것이 대물림된 체념의 역사다. 백정과 여성이라는 신분 중에 어떤 것이 고조모나 증조모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미쳤을까? 1887년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가 되었던 박서양을 떠올려 보면 드물기는 하지만 신분제가 폐지된 이 시기 특히 기독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는 천민 남성들에게는 기회가 있긴 했었다. 여성인 삼천은 양민인 남편과 결혼했어도 백정의 딸이라는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기독교적인 신념도 그들의 공동체를 설득하지 못했다. 남편에게로 귀속되는 결혼제도를 받아들여 도피와 안전을 도모했던 그녀는 오히려 침묵 속에 갇힌다. 거부했던 엄마의 삶의 태도를 몸에 새기고 있다.

 

그 체념은 영옥에게 이어진다. 그녀에게는 백정의 핏줄이라는 꼬리표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아버지의 정서, 아들이 아닌 딸이어서 받는 무심함이 덧붙여진다. 아버지의 인정과 사랑이 결핍되었던 영옥은 그의 결정과 명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중혼인 줄 알면서도 남선과 결혼시키고, 아버지는 오히려 남편을 붙잡아놓지 못한 딸의 무능을 비난한다. 영옥과 남선 사이에 낳은 딸 미선은 남선과 전처의 호적에 올려지고, 영옥은 홀로 미선을 키운다.

 

미선 역시 벗어나지 못한다. 남편의 횡포에도 침묵하고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불행을 참는 여성이다. 큰 딸의 죽음에 대해 평생 죄의식을 지닌 엄마다. 유방암이 다시 재발해서 병원에 입원했어도 문병조차 하지 않는 남편의 무심함을 견딘다. 딸에게도 이혼하지 말고 참고 살 것을 종용한다.

 

엄마는 남자와 사는 삶에 희망이 있는 것처럼 말하곤 했지만, 그 말을 가만히 들어보면 도리어 엄마야말로 남자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 같았다. 때리지 않고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만 되어도 족하다니, 인간 존재에 대한 그런 체념이 또 어디 있을까.”(17p)

 

이혼 후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지연에게 미선은 딸의 이혼 때문에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얼마나 괴롭고 우울한지 호소”(18p) 한다. 모든 문제는 마음먹기 마련이라고 약 없이 이겨보라고 한다. 캐럴라인 냅이 인용했듯 자신의 열망과 야망과 좌절감을 억누르고 있는 어머니가 자녀의 기쁨과 실패에 감정이입하며 공감할 수 없다”(134p 욕구들). 어쩌면 그녀들은 자녀가 성공하기를 바라고 안정적으로 평안하게 살길 바라는 것이 잘못된 것이냐고 질문할 것이다. 자녀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는 당신은 행복한가? 당신이 굴복하고 있는 체념이라는 삶의 태도는 정말 안정과 평안을 주는가? 하고 묻게 된다.

 

한편 4대에 걸친 여자들의 감옥같은 삶에 한 줄기 빛은 바로 사람이었다. 개성에서 모두가 외면할 때 새비는 삼천을 위해주었고, 죽음과 같은 출산을 겪을 때 손을 잡아주었다. 이름이 아닌 떠나온 고향의 이름으로 불리던 두 여자는 일제강점기와 히로시마 원폭, 6.26 전쟁을 겪으며 만남과 헤어짐을 거듭한다. 헤어짐의 고통을 겪고 때로는 서로에게 서운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밤이 새도록 서로의 슬픔과 원통함을 끌어 안아주었다. 삼천에게 새비는 자신을 귀애해주고, 애지중지한”(116p) 유일한 사람이었다. 영옥과 희자는 3년 터울로 태어나 어머니들의 우정을 이어받지만 성장 후 그들의 처지가 달라짐에 따라 소원해진다. 영옥은 자신과는 다른 길을 가는 희자에 대해 느꼈던 질투를 기억하며, 마음을 다하지 못했던 후회를 갖고 있다. 그녀가 기억하는 새비 아저씨, 명숙 할머니, 희자에 대한 회환은 김소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내게 무해한 사람에서 보여졌던 헤어진 사람들에 대한 감정- 헤아리지 못했던 타인의 슬픔, 오해, 착각, 꺼내지 못했던 말들, 질투와 같은 못난 감정들에 대한 후회-을 소환한다. 전작에서와 달리 삼천과 새비,, 영옥과 희자의 해후는 서로의 아픔을 공감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다름 때문일 것이다. 미선은 명희가 숨통이 되고, 지영에게는 지우라는 친구가 가끔씩 찾아온다. 자신의 아픔을 알고 있고 위로가 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나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지연은 할머니의 설화(說話)에서 치유를 경험한다. 어머니에게 대물림된 체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자신에게 지워진 억압의 근원을 찾아낸다. 그녀가 희령을 떠나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짐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이혼녀임을 당당히 밝힌 것이 상처로 돌아오는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인 것 같지만 떠날 수 있는 자유함과 새로운 곳으로 향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할머니에게 들을 수 있는 역사는 4대까지이지만, 우리는 그 이상의 역사- 동서양을 불문하고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거부할 때 공동체는 그녀를 비난하고 고립시키고 학대해 온 역사-를 알고 있다. 맘모스가 출몰하는 시대, 세상의 모든 딸들의 주인공이 여성에게 요구되는 태도를 벗어나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려 할 때, 공동체로부터 따돌림 당하고 홀로 아이를 낳다가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그 굴레는 원시적이고 강력하다. 아이를 낳는 몸에 새겨진 왜곡된 시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리라.

 

이제는 한사람이 한사람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을 넘어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서사를 말하고 있다. 그 것은 텍스트가 되고 역사가 된다. 아프리카인들의 노예 해방사를 기록함으로 인종갈등에 대한 옳은 시각을 만들어 가듯이, 지속적으로 말하고 귀 기울임으로 만들어진 여성의 역사는 강요된 침묵과 견딤의 시간들을 증언하고, 덧입혀진 의미를 보게 할 것이다. 그리고 타인이 아닌 자신 안에 갇힌 상처받은 여자와 이야기를 할 것이다. “나야. 듣고 있어. 오래 하고 싶었던 말을 해줘.”(33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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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04 17:5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1등.🖐 ^@^

그레이스 2021-09-04 17:58   좋아요 5 | URL
😍🖐👍

scott 2021-09-04 20:38   좋아요 3 | URL
[, 지속적으로 말하고 귀 기울임]
이 문장 공감! 합니다
끊임없이 공론화 시켜야 합니다
참고만 사는게 미덕인 세상이 아뉨 ^ㅅ^

그레이스 2021-09-04 20:43   좋아요 3 | URL
읽어 주셔서 감사해요

페크pek0501 2021-09-04 18:0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뿌듯한 독서하셨네요. ^^

그레이스 2021-09-04 18:21   좋아요 6 | URL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1-09-04 20: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3등~!! 역시 답은 사람인것 같아요. 사람 때문에 받은 아픔은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 치유한다~!! 이 책 완전 👍

그레이스 2021-09-04 20:34   좋아요 4 | URL
맞아요~♡

붕붕툐툐 2021-09-04 22: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진짜 얘기합니다. 그레이스님~ㅋㅋㅋㅋㅋㅋㅋ
이 책 리뷰 많이 봤는데, 그레이스님 리뷰에는 몰랐던 내용도 실려 있네요~ 더 기대가 됩니다~😉

그레이스 2021-09-04 22:41   좋아요 4 | URL
감사한 말씀이네요!
툐툐님 말씀에 진심 감사합니다☺

han22598 2021-09-05 12: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최은영 작가님 완전 팬이라서...이 책 리뷰를 제가 직접 읽어보기 전까지는 보지 않으려 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ㅎㅎ 많은 분들이 읽고 쓰는 걸 보니, 역시나 좋은 글을 내놓으셨구나 하는 확인정도만 하고 지나치고 있습니다. ㅎㅎ

그레이스 2021-09-05 15:10   좋아요 2 | URL
예 리뷰 올려주시면 읽어보겠습니다~^^

mini74 2021-09-05 20: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소매 ㅠㅠ 서로의 울음, 아이의 울음 다 받아주던 엄마 할매의 소매가 생각나게 하는 글이네요. ㅠㅠ 요즘 아이들은 친 외 라는 말대신 동네이름을 붙여 할머니를 부르더라고요. 땡땡동할머니 이런 식. 저 어릴때 할머니가 내가 진짜 친이고 외할머니는 가짜라고 그래서 울었거든요 ㅎㅎㅎ

그레이스 2021-09-05 21:19   좋아요 2 | URL
외자 붙이는거
조금 억울해요.
그쵸?!
그것도 나름 괜찮은 방법.!
땡땡동 할머니...♡

서니데이 2021-09-06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책이 알라딘 서재에서 자주 보이네요.
최은영 작가의 책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 같아요.
그레이스님, 좋은 하루 되세요.^^

그레이스 2021-09-06 22:44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도 굿밤요!

희선 2021-09-07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하고 그걸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거겠습니다 백정딸은 여전히 백정딸로 보고 백정아들은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었군요 70~80년대도 생각납니다 누나나 여동생은 돈 벌고 오빠나 남동생은 공부하던 거... 이제는 그렇지는 않겠지만 여전히 차별은 있군요 갈수록 나아지면 좋겠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1-09-07 06:39   좋아요 0 | URL
감사해요! 희선님.
그런 시절이 있었지...! 하고 지나갈 수 없는 것도 있어요. 그쵸.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고 바라만 볼수 없는...
반드시 말하고 고쳐야 하는...!
 
발터 벤야민 : 1892-1940
한나 아렌트 지음, 이성민 옮김 / 필로소픽 / 2020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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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는 아렌트가 사용한 은유들을 번역함에 있어 어려움이 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에게는 은유에 대한 통찰이 있었지만, 정교한 은유를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한다.

 

처음부터 평판의 여신 파마Fama를 등장시킨다. 이익을 보아야할 당사자인 벤야민은 죽어있고, 전후 독일에서 발터 벤야민의 이름과 저작을 찾아왔다고 한다. 아마도 벤야민이 죽기 전 자신의 원고를 아렌트에게 맡김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명성은 그가 죽은 후 오랜 후에 그에게 돌아간다.

 

벤야민의 집필은 항상 독보적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시도들이 실패한 이유는 그가 정한 정체성 때문이라고 한다. 아렌트는 이것을 위치로 표현한다. 그가 독일어로 프루스트를 번역하고, 보들레르의 <파리풍경>을 번역했지만 결코 번역가가 아니다. 서평을 쓰고, 작가들에 대한 에세이를 썼지만 문학비평가도 아니다. 바로크에 관한 책을 쓰고, 프랑스에 관한 미완의 연구를 남겼지만 미학자나 역사가도 아니다. 그는 시인도 철학자도 아니다. 그 자신은 어떤 것으로 규정되기를 거부했던 것 같다. 유용한 사람이라는 말을 끔찍하게 여겼다는 보들레르의 생각과 상통한다. 드문 순간들에 벤야민은 자신을 문학비평가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시적으로 생각한 반면, 은유를 위해한 언어의 선물로 생각했. 벤야민이 생각하던 비평조차도 독보적이었다. 잘못된 위치 선정이다.

 

비유를 위해, 어떤 자라나는 작품을 불타오르는 장작더미로 본다면, 그 앞에 주해자는 화학자처럼 서 있고, 비평가는 연금술사처럼 서 있다. 주해자에게는 나무와 재만이 분석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반면에, 비평가에게는 오로지 타오르는 불꽃 자체가 수수께께를. 그처럼 비평가는 진리를 묻는데, 이 진리의 살아 있는 불꽃은 존재했던 것의 무거운 장작더미와 체험된 것의 가벼운 재 위에서 계속 타오르고 있다.” (괴테의 친화력 발터벤야민 선집10)

 

아렌트는 벤야민의 삶이 잔해더미의 연속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고 한다. 그가 천재이지만 동시에 삶에서는 약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프루스트의 비유를 인용하면 불을 어떻게 지피고 창문을 어떻게 여는지 몰랐기 때문에 죽었다”(39p)

 

 

그의 태생에 있어서도, 이것은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독일 유태인의 가정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카프카나 그 외 지식인들과 달리 유대적 유산을 버리지 않았다. 그이유는 가정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의 자리는 어정쩡한 곳에 위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하루 전까지는 그가 갖고 있던 비자로 통과할 수 있던 국경이 그가 당도했을 당시 프랑스 출국 비자 없이는 넘을 수 없도록 막혀버렸다. 걸어서 기진맥진해서 도착한 그는 스페인 국경이 폐쇄되었음을 알고 그날 밤 목숨을 끊었다. 그 후 몇 주 뒤에 다시 비자정지는 해제된다. 하루만 빨랐어도 그는 국경을 통과할 수 있었고, 하루만 늦었어도 소식을 듣고 국경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시간의 위치였다.

 

 

삶을 능숙하게 헤쳐 나갈 수 없는 자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절망을 조금이라도 막아내기 위한 손 하나가 필요하다.그러나 다른 한 손으로 그는 잔해 속에서 본 것을 기록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리고 더 많이 보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살아 있을 때 죽었으며 진정으로 살아남은 자다.”(프란츠 카프카 일기1921 10)

 

 

그는 문학비평가로서 글을 썼으나 독일에서는 문학비평이 50년 넘게 진지한 장르로 간주되지 않았다. 또한 세례 받지 않은 유대인이었으므로 연구와 강의를 할 수 있는 대학교수의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단지 정원외교수가 허용되었을 뿐이다. 그는 오랫동안 시온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 있었다. 그는 언제나 문학적, 학문적 기득권층 바깥에 있음으로 고립과 외로운 상태였고, 위험을 무릅쓰고 노출된 위치로 나아갔다. 그가 선택한 위치이다.

 

 

그의 학문적 연구는 프랑스에서는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있었지만, 그 이전 독일에서 하빌리타치온의 주제는 바로크였다. 독일에서 바로크는 인정받기 힘든 주제였다. 그는 그의 정신세계안에서 소요객이었다. 어느 한 가지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지적인 탐사를 했다. 그래서 그의 장서는 수집가의 그것과 같다. 그의 초기 철학적 사유는 신학적 배경에서 언어철학으로부터 비극이 상연되던 고대로, 다시 실존철학으로 탐험을 했고, 아렌트는 그를 마치 깊은 바다에서 진주를 캐는 잠수부에 비유한다.

 

 

시로 철학하는 벤야민을 은유로 기록한 아렌트의 글을 읽어가기에 쉽지 않았지만, 벤야민이라는 사람은 조금 알게 된 느낌이다. 시대, 장소, 직업, 시간, 사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지 못한 천재 소요객 발터 벤야민, 머무르려 하지 않았던 그의 걸음이 너무 빨랐던 것은 아닐까?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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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04 00: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간결하네요. 카프카의 일기가 인상적이네요. 살았을 때 죽었으며 진정으로 살아남은 자다

그레이스 2021-09-04 08:31   좋아요 3 | URL
카프카도 그렇고 벤야민도 불길에 탄 잔해 속에 본 것을 기록하느라 자신은 죽음에 이르렀다는... 그러나,...

scott 2021-09-04 00: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벤야민 작품 이책 가격이 착하네요 ㅎㅎㅎ
[삶을 능숙하게 헤쳐 나갈 수 없는 자는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절망을 조금이라도 막아내기 위한 손 하나가 필요하다.]
스맛폰 손에서 내려 놔야 할것 같습니다.
ʕっ•ᴥ•ʔっ

그레이스 2021-09-04 08:32   좋아요 4 | URL
😅
눈도 멀게 생겼어요. ㅋㅋ

새파랑 2021-09-04 09: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벤야민이 누구인지 몰랐었는데 그레이스님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다재다능하더라도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네요 ㅜㅜ 그래도 본인 스스로 규정되기를 거부하는 천재라니 대단한거 같아요~!!

그레이스 2021-09-04 10:31   좋아요 3 | URL
천재들이 그런것 같아요.
걸음이 너무 빠르거나, 한곳에 머물러있거나 그래서 외롭고, 불행하기도 하지만 독보적인 유산을 남기는!

mini74 2021-09-04 09: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고 알고 싶은데도 어려워서 ㅠㅠ 이 책은 다시 도전하게 할 용기? 를 주네요. 그레이스님 ㅎㅎ

그레이스 2021-09-04 10:29   좋아요 3 | URL
읽은지 한달이 되었는데 쓰질 못하고 있었어요. 이제야 쓰고 이 책은 자기자리를 찾아 꽂혔습니다^^
어렵겠지만 벤야민책을 조금씩 읽어갈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