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닌 단편선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29
이반 부닌 지음, 이상철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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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자체가 러시아어라는 사실만 알아볼 정도로 러시아어에 문맹이다. 아마도 남편이 들여왔을 이 손바닥 보다 작은 책이 러시아어로 된 시집이라는 짐작만 했다. 장식품으로 놓여있던 책의 표지에 우연히 스마트폰 번역기 화면을 갖다 대고서야 И. Бунин이 이반부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시집의 제목 Холодная весна』차가운 봄이라고 번역된다. 곧 이 시집의 위치는 몇 안 되는 이반 부닌의 작품들 곁으로 정해졌다. 사실 작품들이라고 말했지만 부닌 단편선아르세니예프의 인생두 권뿐이다. 그 외에는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없기도 하다.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은 마음으로 부닌 단편선을 뽑아 읽게 된 나의 사정은 잊었다. 부닌의 명징한 글에 사로잡혔고 복잡한 마음이 깨끗하게 씻기는 느낌이었다. 이 단편들의 과거의 지나간 사랑을 기억하는 화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맑고 간결하지는 않다. 그런 이야기를 작가는 시리게 아름답고 깨끗한 문장으로 전달하고 있다. 러시아라는 배경이 주는 정서도 있을 것이다. 또한 기억 속에 남은 것은 다른 부수적이고 복잡한 사건들이 희미해져 사라진 한 줄기의 선명한 느낌일 테다.

 

이 책은 원래 첫 번째에 위치한 소설의 제목 어두운 가로수길로 출간되었던 단편집에서 선별 수록한 책이라고 한다. 한 가지 주제로 연결되어있는 옴니버스 영화를 생각나게 한다. 부닌 단편집의 주제는 지나간 사랑을 기억함이라고 해야 할까? 기억하는 화자들의 생각에 달려있고, 기억하지 않으면 그것은 글이 될 수 없기에 지나간 사랑보다는 지나간 사랑을 기억함이라고 하고 싶다. 어떻게 기억하는가는 화자의 사회, 종교, 문화적 배경과 개인의 상황에 좌우되겠지. 그 총합이 작가의 사유일테고.

 

수록되어있는 작품의 화자들은 대부분 남성이고 상류층이다. 한 작품만이 주인공인 여성의 삶과 사랑을 되짚어 간다. 남자들이 젊은 시절 사랑한 여인들은 대부분 하녀, 농민의 딸, 가난한 집 출신들이다. 그들은 신분의 격차, 아버지, 정착하지 못하는 불안한 삶 때문에 그녀들을 떠날 수밖에 없다. 여인들은 남겨진다. 이후 그녀들의 실존적 삶이 불행했음이 당연하지만 화자(혹은 주인공)의 기억만 존재할 뿐이다. 몇 편의 작품에서 해후가 이루어지지만 그녀들의 삶은 발화되지 않기에 남성의 회환만이 남는다. 그 회환은 시적이고 사랑의 기억은 아름답다.

 

인생의 어느 시점을 되돌아보며 그 순간의 선택이 달랐다면 하고 생각한다. 어두운 가로수길의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는 춥고 비오는 어느 가을날 지친 여행길에서 들른 주막에서 사랑했던 나데지다를 만난다. 그녀는 이 주막의 여주인이고, 그가 버리고 떠난 농노 신분의 소녀였다. 그가 떠난 후 그의 아버지가 농노 해방증을 주었다는 말에서 부모의 개입으로 그녀와 헤어져 떠날 수밖에 없던 그의 사정을 짐작하게 된다. 자신도 불행했다고 용서해달라는 그의 말에 그녀는 무덤에서 시신을 꺼낼 필요는 없다고 한다. 기억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무의미한 시점이다. 기차역을 향하는 그는 자신이 그녀를 선택했더라면 지금처럼 불행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욕망으로 인해 최후를 맞이한 어느 공작의 후회와 교훈의 발라드는 한 편의 전설이다. 기차가 멈춘 곳에서 젊은 시절의 사랑을 회상하는 주인공의 우울함은 그를 바라보는 부인조차 바깥에 존재하는 타인이 될 수밖에 없다.(루샤) 차가운 가을의 화자는 여성이다. 이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여성이 화자(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쟁이 시작되고, 차가운 가을날 그녀의 약혼자는 전선으로 떠나 한 달 후 전사한다. 그가 떠나기 전 산책길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한 편의 시()이다. 이후 그녀는 결혼하고 피난하고 크림의 내전에서 홀로 남아 조카의 어린 딸을 데리고, 콘스탄티노플, 불가리아, 세르비아, 체코, 벨기에, 파리, 니스 등을 유랑한다. 인생을 마감하는 시점에서 그녀는 질문한다. ‘대체 내 삶에 무엇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오직 그 차가운 가을 저녁만이 있었을 뿐이야.’라고 대답한다. 그녀는 처음 사랑했던 그와의 약속을 기억한다. 단편 전체가 시().

 

모래시계를 뒤집어 모래가 밑으로 흐르면 그 속에 파묻힌 것들이 드러나듯, 시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랑의 기억들은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살 희망을 잃게 만든다. 그 때 어떻게 사랑했는가가 기억하는 현재의 마음을 결정할 것이다. 그들이 저버리거나 때론 어쩔 수 없이 빼앗긴 혹은 떠나버린 사랑, 한 순간 불태우고 버린 범죄와 같은 욕망들을 말하는 화자들에게 판결봉을 두드리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다. 왜 여성들은 실존적 삶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남성들은 자신의 과오조차도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을까? 그들 사회적 지위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부닌의 소설은 시적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단어, 문장, 그것들이 모여 그리는 풍경 모두 그림이고 시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덮으며 나의 마음은 아르세니예프의 인생으로 향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반 부닌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서 더욱 더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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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4-05-04 1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도 이 책을 읽으셨군요. 러시아 특유의 감성 너무 좋습니다 ~!! 전 아르세니예프보다는 부닌 단편집이 더 좋았습니다~!!

그레이스 2024-05-04 17:40   좋아요 1 | URL
아!
전에 새파랑님 리뷰를 본 듯도 하네요.
부닌 단편선 좋아요~
아르세니예프도 좋은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4-05-05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닌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는데~~
(한두개가 아니지만 ㅎㅎ)
어떤 러시아의 느낌을 줄지 궁금해요^^

그레이스 2024-05-05 17:50   좋아요 2 | URL
ㅎㅎ
읽을 책이 너무 많아요
ㅠㅠ

서니데이 2024-05-07 06: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어린이날 연휴 잘 보내셨나요.
작은 크기의 시집은 러시아어 원서로 된 책이군요. 러시아어 배우기가 어렵다는데, 원서 읽을 수 있는 분들 부럽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4-05-07 06:49   좋아요 1 | URL
그니까요!
러시아어로 문학을 읽는 것 저도 넘 부럽네요.
무슨 언어든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린이가 없어서 어제는 어버이날을 대체했습니다.
비가 계속 오네요.
서니데이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자운영 2024-05-14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즘 번역이나 독해는 독서와 똑같이 편리하고 쉬운 일인 시대입니다.

yamoo 2024-05-14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닌 단편선 읽어보고 싶네요! 그레이스 님의 멋진 리뷰 덕분에 아르셰니에프의 인생을 새롭게 봅니다. 원래 있던 책인데, 그레이스님이 가치를 새롭게 불어넣어주셨네요!!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4-05-14 15:43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예요.
작품 하시느라 바쁘셨나봐요.
감사합니다 ~~

젤소민아 2024-06-06 12: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그레이스 2024-06-06 13: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조선미술사는 전기·중기·후기·말기 로 나눈다. 초기는 중종 연간까지, 중기는 숙종 연간까지, 후기는 순조 연간까지 ,말기는 대한제국까지이다. 찾아보니 안휘준 교수의 책에서 역시 그렇게 나누고 있다.

초기에는 하직 고유의 화풍은 형성되지 않았고 안견의 <몽유도원도> 중국으로부터 유래된 <소상팔경도>의 유행으로 볼 수 있듯 사대부 사회를 중심으로 관념산수를 즐겨 그렸다. 중기에는 북종화의 영향으로 절파화풍이 유행한다. 후기는 문예부흥기로 문자향 서권기가 짙은 서화가 유행했다. 더불어 풍속화도 함께 발전한다. 말기에는 단원 화풍을 그대로 답습하는 매너리즘에 빠지지만, 추사 김정희을 통해 서화라는 화풍이 등장한다.

 

조선 초기 왕실을 중심으로 하는 궁궐 장식화와 기록화가 먼저 소개된다. 그리고 어진과 함께 공신 초상과 선비 초상 등 많은 초상화들과 자화상들이 출현한다. 조선시대는 초상화 왕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초상화가 제작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초상화에는 외형적인 모습을 사실적이고 정확하게 담았을 뿐 아니라 그 인물의 내면적 정신세계를 담아내려 했다. 그 내면의 정신세계를 담는 것을 전신사조라고 한다.

 

“‘전신이란 정신을 전한다는 뜻으로 5세기 남북조시대 인물화의 대가였던 고개지가 전신사조라고 한 것에서 비롯된 말이다. 고개지는 전시의 핵심은 눈동자의 표현에 있다고 했다.(65p)”

 

이런 초상화의 대가로 소개된 인물 중 인상적인 화가는 단연 이명기이다. 그의 체제공 초상을 보면 그 사실적 표현이 놀랍다. 조선초기에서 중기와 후기를 거치면 초상화를 보면 그 복식의 변천사를 알 수 있고 그들의 자세나 배경에 따라 변화와 파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인물의 자세와 복식 배경은 모두 도상이 되어 정신과 상황을 알려준다. 자화상으로는 단연 윤두서의 자화상이 인상적이다. 터럭 하나조차 그의 인물됨을 가리키는 그의 자화상은 사실 반신을 그렸지만 얼굴 아래쪽의 몸의 형태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래서 사라졌음이 밝혀졌다. 시간이 완성한 강렬함이라고 할까?


 

초상화나 자화상뿐 아니라 고사나 역사인물, 풍속을 그린 그림 속 인물들, 사상을 담은 인물 그림 등 조선시대 인물화를 총망라한 책이 바로 조선시대 인물화이다. 엮은이가 안휘준·민길홍으로 되어있지만 여러 저자가 연구한 글이 담겨있다.

 

조선초기의 회화는 안견의 몽유도원도로 시작한다. 국초부터 도화서 화원제도가 확립되어 안견과 같은 화원들이 활동하며 이름을 남겼다. 이 시대 회화는 관념적 화풍을 따르고 있다.

점차 중기로 가면서 북종화의 절파화풍이 자리를 잡고 도화서 화원들뿐 아니라 그림이나 서예가 문인들의 일과예(一科藝)가 하나의 전통으로 발전한다. 탄은의 대나무, 어몽룡의 매화, 이계호의 포도 그림과 같은 것을 일과예라고 한다. 눈길을 끈 것은 화법을 가르치는 교본이다.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그림의 교본을 제시하는 책인데, 그 교본 안에 있는 그림을 따라 그리도록 하는 것이다.

 

후기에 이르면서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등장하고 문인화가의 그림은 남종화풍을 따르면서 화제가 중요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림 안에 문자향 서권기가 짙게 서려있다.

 



조선시대 미술사에는 남태응의 청죽화사나 김광국의 석농화원이 자주 등장한다. 이들은 개인이 수집한 그림을 엮은 화첩이다. 또한 평론집이기도 하다. 그림에 담긴 화제들과 제발문, 그리고 수집가의 평론을 싣고 있다. 항상 그림을 보게 되면 그림 한쪽에 쓰여 있는 화제들이 궁금해 그 의미를 찾아보곤 했는데, 김광국의 석농화원이 출판되어 있어 반가웠다. 김광국은 조선 말기에 의관을 지낸 석농이 자신이 수집한 그림을 여러 번 여러 권에 걸쳐 증보한 화첩이다. 모두 10권으로 되어 있고 화첩 9권과 대작 1권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국립박물관 소장 화원별집역시 석농화원<별집> 편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어왔다고 한다.

 

주저 없이 구매해서 받아 본 이 두껍고 크고 비싼 책은, 거기 수록된 그림의 종류와 양, 궁금해 했던 화제와 화평들에 대한 해석들 때문에 그 이상의 만족감을 준다. 박지원과 홍석주의 서문 역시 반갑다. 조맹부의 제어는 미소를 짓게 한다.

 

책을 모으고 책을 소장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잘 보는 자는 마음과 생각을 맑고 단정히 가다듬고 깨끗한 책상에 향을 사르고서, 책등을 말거나 책 모서리를 꺾지 말고, 손톱으로 글자를 긁거나 침을 책장에 묻히지도 말려, 베개로 삼거나 옆구리에 끼지도 말아야 하며, 손상되면 즉시 수리하고 펴본 후에는 바로 덮어야 한다. 훗날 내 책을 얻은 자들에게 두루 이 방법을 권하노라(79p)”

 

석농화원에 담긴 그림들은 낙질되어 그 양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석농화원에서 떨어져 나온 작품으로 확인된 그림은 57폭이라고 한다. 그래서 석농화원에 그림은 없고 김광국의 발문만 남아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를 읽기 전에 『옛그림을 보는 법』이란 책을 읽었다. 전통미술의 상징세계라는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림 속에 나타난 상징과 관련된 이야기다. 예를 들자면 <노안도>는 갈대와 기러기를 그린 그림인데 그 한자어의 같은 음가때문에 노년의 평안을 기원하는 그림으로 선물했다고 한다. 게를 그린 그림은 장원급제하라는 기원이 담긴 그림이다. 장수, 부귀, 자손, 부부애와 같이 그림에 담겨 있는 상징을 알려 주고 있어, 우리 전통 미술을 공부하기 전에 읽어두면 유익한 책이다. 더불어 재미가 있다.


조선시대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벽돌 책만 쌓아가고 있다. 그 벽돌책 만큼이나 정말 모르는게 많았다는 깨달음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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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4-29 15: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부가 끝이 없네요.
제가 우리 미술에 대해 무식함의 벽돌책 입니다^^

그레이스 2024-04-29 15:10   좋아요 1 | URL
ㅎㅎ
그러네요.
요즘 벽돌책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yamoo 2024-05-14 1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제를 거쳐 해방 그리고 6.25로 조선화는 끝났다는 게 요즘 미술계의 중론이더라구요..ㅎㅎ
이게 현대적으로 계승되어 담론화 됐으면 괜찮았는데, 전부 맥이 끊겼어요. 중국과 일본은 그래도 명맥은 유지하는데, 우리나라는 완전히 단절됐다네요..
개인적으로 좀 안타까운 느낌이 들어요. 멋진 그림이 많은데 말이죠..^^

그레이스 2024-05-14 16:27   좋아요 0 | URL
그것조차 모르고 있는게 너무 많아요~
이번에 공부하면서 조선의 미술 경지를 새삼 느꼈습니다.
 
골짜기의 백합 을유세계문학전집 4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정예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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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의 소설을 읽는다면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읽을 것을 권하겠다.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항상 마지막 부분의 반전에 있다. 통속과 순문학 사이에서 모호함을 띄며 여러 번 책을 덮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문학에서 많이 마주친 식상한 사건들 속에서 순간순간 빛나는 문장들과 번뜩이는 시선은 들었던 책갈피를 내려놓게 한다.

 

발자크는 부인했다고 하지만(초판 서문에서), 이 소설에는 발자크의 전기()적 사실과 감정이 녹아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펠릭스가 지닌 부모로부터의 사랑 결핍은 발자크의 그것과 닮았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발자크 평전에서 이 소설 『골짜기의 백합 속 주인공 펠릭스의 사랑하는 여인 모르소프 백작 부인의 모델이 드 베르니 부인이라고 쓰고 있다. 그녀는 발자크에게 어머니 같은 보호자, 부드러운 안내자, 헌신적인 협조자였고, 그 만남은 이후에도 같은 사랑의 유형을 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편지형식을 띄고 있다. 화자인 펠릭스의 연인 나탈리 드 마네르빌 공작부인의 요구에 대해 지나간 사랑을 들려주는 내용이다.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면서 부모의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했던 유소년기 에피소드는 어린 나이에 느꼈을 고독과 고통을 가슴 아프도록 공감하게 한다. 청년이 된 그는 법학을 공부하고 고등교육을 받던 도중 파리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투르로 가서 홀로 지내게 된다. 그곳 축제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외로움을 타던 그가 그녀에게 끌림은 모성이 엿보이는 순간의 태도 때문이었다. 잠시 후 그가 보인 행동은 성에 눈뜬 청년의 충동이었을까? 어쨌든 그 행위로 인해 그는 사랑에 빠진다.

소녀처럼 솜털이 난 목 위로 매끈하게 내려오는 윤기 나는 머릿결, 상상력이 뛰어다니는 산뜻한 오솔길처럼 빗이 그 위에 새긴 흰 선들, 이 모든 것이 내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어머니의 품속으로 뛰어드는 아이처럼 이 등 위로 달려들어 머리를 부비며 어깨 전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30p)”

 

모르소프 백작은 18세기 대혁명 이후 10년의 망명생활과 10년의 농촌생활로 인해 늙었고 정신적인 병을 얻는다. 모르소프 백작 부인(앙리에트)은 숙모로부터 금욕주의적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의 결합은 출발부터 한쪽의 헌신과 인내가 일방적으로 요구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삶은 백작의 광증과 두 아이들의 병약함으로 인해 걱정과 불안을 안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펠릭스의 등장은 숨통을 트이게 하는 사건일 수도 있고, 자녀나 남편에게 죄의식을 느낌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자학하게 되는 이유가 될 수도 있었다. ‘골짜기의 백합은 이 앙리에트를 가리키는 펠릭스만의 은유이다.

 

유년시절의 상처와 모성에 대한 결핍을 지닌 펠릭스는 모르소프 백작 부인(앙리에트)에게 자연스럽게 끌린다. 앙리에트 역시 자신의 고단함에 공감하는 그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그들에게서 결핍을 투사하고, 상대방의 상처에 전이되는 사랑의 유형을 본다. 한편, 사랑은 많은 경우 이런 전이와 투사로 시작되는 것을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앙리에트는 펠릭스의 고백을 거절하고 친구 또는 어머니로 대할 것을 요구한다. 펠릭스는 그녀를 성녀와 순교자로 숭배한다. 앙리에트를 향한 절대적인 사랑-“중세의 기사도를 연상시키는 사랑(252p)”-을 마음에 담고 돌아간 파리 사교계에서 펠릭스는 영국 귀부인 레이디 더들리와 관능적이고 육체적인 사랑에 빠진다. 이를 알게 된 앙리에트는 찾아와 변명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펠릭스에게 다정하지만 가혹한 태도로 대한다.

 

상심으로 인해 죽게 된 앙리에트, 죽음이 임박한 그녀를 바라보는 펠릭스의 시선이 안타깝다.

그녀는 더 이상 내 사랑스런 앙리에트도, 고귀하고 거룩한 모르소프 부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보쉬에가 말했던 이름 없는 무엇인가였다. 그것은 허무와 싸우고 있었으며 갈망과 충족되지 못한 욕망 때문에 삶으로 하여금 죽음을 상대로 이기적인 맞대결을 하도록 시키고 있었다. (344p)”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고 인내한 자신의 삶을 후회하고 거짓이 아닌 실제의 삶을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그녀, “미친 듯한 교태를 부리는 그녀를 바라보고 아연실색하는 펠릭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자신의 진심을 보이는 그녀 앞에서 당황하는 그는 누구를 사랑한 것일까? 시몬느 보바르의 2의 성을 떠올린다. 남성의 여성을 향한 숭배적 사랑은 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을 타자로서 신화화하고 있는 것이다.

 

앙리에트(모르소프 백작 부인)을 향한 펠릭스의 숭배는 그 언어가 자칫 통속으로 읽힐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자면,

달빛의 조명을 밝은 두 줄기 굵은 눈물이 그녀의 눈에서 나와, 볼을 타고 얼굴 끝까지 흘러내렸다. 나는 그 순간에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마셨다. 남몰래 흘린 눈물, 지쳐 버린 감성, 한결같은 정성, 끊임없는 불안으로 보낸 10년의 세월과 여성의 가장 고귀한 용기가 묻어 있는 그녀의 말들은 내 안에 경건한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이것이 사랑의 첫 영성체입니다. 그래요, 저는 지금 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성혈을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 교감하듯이 부인의 영혼과 결합했습니다. 가망 없는 사랑도 행복입니다.” (103p)”

이런 내용들이다.

이런 과잉된 감정과 언어들 때문에 그가 전하려는 고통과 괴로움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발자크에게 실망할 뻔 했다.

 

반전은 에필로그처럼 붙어있는 나탈리의 답장이다. 통속적으로 읽혔던 장황한 문장들과 생각이 발자크가 아닌 펠릭스의 것이 되면서, 발자크의 메시지가 선명해진다.

당신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읽어보니 …… 당신은 모르소프 부인의 미덕들을 자랑함으로써 레이디 더들리를 상당히 성가시게 하셨고, 영국식 사랑의 기교들을 과시함으로써 백작부인을 많이 아프게 하신 것 같군요. 게다가 당신의 마음에 들었다는 장점밖에 없는, 저라는 가엾은 여인을 배려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앙리에트처럼, 또는 아라벨처럼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하신 셈이죠.(382~387p)”

나탈리는 펠릭스가 상대방을 대상화하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글쎄……과연 발자크가 펠릭스와 같은 사랑을 하지 않는가에 대해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아니, 부정적이다. 작가는 삶에서 넘을 수 없는 한계를 글 안에서 넘는다.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노출 본능 때문에 글을 쓴다는 말은 거짓이다. 더 정확하게는 위장이다. 사람은 왜곡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현실이 행복해 죽겠는 사람은 한 줄의 글을 쓰고 싶은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오직 불행을 자각하고 있는 사람만이 글을 쓰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때 그는 펜을 들어 자신의 불행한 현실에 마취제를 주사한다. 독자들 또한 마취제를 얻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뿐이다.(생의 이면이승우 24p)”

 

발자크는 펠릭스를 화자로 등장시켜 숭배와 같은 사랑의 고백들을 장황하게 펼쳐놓고 독자를 질리게 한 후, 마지막 나탈리의 답장으로 그런 낭만주의 사랑의 종언을 선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도 실천할 수 없고, 잘못이라고 생각해도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이 연민을 자아내는  모순덩어리 인간 발자크는 연인의 비난을 통해 자신의 삶과 일치하지 않기에 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있다. 이 나탈리 드 마네르빌 공작부인의 답장은 발자크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하는 에필로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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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4-22 16: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재미로만 치면 진짜 죽이지 않습니까? ㅎㅎㅎ 열세 살 짜리 꼬마처럼 보이는 스무 살 청년이 모르소프 백작부인한테 홀딱 빠져서 부인의 목을 기습, 입을 맞추었으니, 당시에 양치나 했나, 아이구, 침 냄새 그거 어땠을까요? ㅋㅋㅋㅋ
참 다양하게 잡놈들 많이 나오는 작품입니다.

그레이스 2024-04-22 16:18   좋아요 0 | URL
ㅎㅎ
저는 그 장면에서 깜놀했는데...^^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기도 하고... 모성에 대한 그리움과 성적 충동이 마구 뒤섞여 있는것 같기도 해서 안됐기도 하고 그랬어요 ^^

새파랑 2024-04-22 17: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표지는 처음 보는데 재미있어보입니다~!! 게다가 서간문이라니~!!

그레이스님은 진정한 발자크 마니아 이십니다. 발자그레이스~!!

그레이스 2024-04-22 22:04   좋아요 2 | URL
ㅎㅎ
넘 재미있네요
읽어가다보면 서간문인지 잊어버려요,
나탈리를 부르는 돈호법이 나올때 아! 편지 였지... 합니다.

페크pek0501 2024-04-28 12: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 을 읽다 말았던 것 같아요. 끝까지 읽겠습니다.^^

그레이스 2024-04-28 20:22   좋아요 2 | URL
네 ~~^^
끝까지 읽으시면 별점이 하나 올라갈거예요

서곡 2024-05-01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골.백. 읽으면 리뷰 자세히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레이스님 오월 잘 보내십시오 ~

그레이스 2024-05-01 13:1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서곡님도 오월 잘 보내세요

yamoo 2024-05-14 15: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재밌나보군요. 아직 읽지는 않았는데, 이것두 얼른 읽어야 겠습니다...발자크는 그러고보니 버럴책이 없네요..ㅎㅎ

그레이스 2024-05-14 15:46   좋아요 0 | URL
예~~
재밌어요 ㅎㅎ
 
[eBook] 로기완을 만났다 (개정판)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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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향한 얕은 공감과 거짓된 연민, 금방 지치고 바닥을 보이는 나의 위로와 수고를 떠올리고 얼굴을 붉히게 하는 글들이었다. 열띤 위로로 가장된 자기만족과 담담함으로 감춘 무심함을 들키고, 나에게 기대하며 다가온 그들은 다시 원래 있던 거리만큼 떠나가던 순간들을 기억하게 했다. 진심을 들켜버린 그 순간조차 외면하고 잊어버린 나의 위선을 고발하는 글이었다.

 

화자(話者) ‘가 묻듯 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그 연민이라는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30/123)”가를 생각했다. 답은 가깝고 명료함에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시간, 수고, 공간, 관계, 돈 등 내가 쌓아올린 것, 소중히 여기는 나의 것을 내주고 포기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정량이란 것이 없다는 게 문제일지 모르겠다.

 

는 죄책감 때문에 행복해질 수가 없다. 아니 행복하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혐오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너를 혐오해. 생전 처음 본 사람이 적의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쏘아붙인다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새벽이다.(18/123)”

 

는 다큐프로그램의 메인 작가였다. 형편이 안 좋은 사람들의 사연을 미니 다큐로 내보내고 ARS로 후원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을 미리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려 애썼다. 윤주는 뺨에 신경섬유종이 크게 자리 잡고 있어 얼굴 대부분을 머리칼로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엄마는 떠나고 아빠는 돌아가시고 동생은 행방불명으로 홀로 살아가는 열일곱살 고등학생 윤주에게 는 조금 특별하게 마음을 기울였다. ‘는 욕심을 부렸고, 윤주의 방송날짜를 시청률이 높은 추석으로 정하고 수술날짜도 의사와 상의해서 미뤘다. 수술실에 들어간 윤주의 종양은 신경섬유종이 아닌 악성으로 밝혀졌다. 화자는 죄의식에 갇혀버렸다. 수술을 미룬 그 세달 동안 악성으로 변한 것일지 모른다는 가학적 의심 때문에 는 괴로웠다. 윤주를 대했던 마음이 자족적이고 가식적인 연민에 지나지 않았던 거라는 의심과 선의에서 나온 결정이었다는 위로 사이에서 덧없어한다.

 

는 브뤼셀의 L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글을 쓴다는 구실로 브뤼셀을 향한다. 그것이 도피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L’과 면담했던 브뤼셀의 의사 박씨에게서 받은 L의 자술서와 일기를 통해 그의 행적을 따라가며 복기한다. 여기에 윤주의 어린 시절과 암 투병 중인 현재의 불행, ‘의 죄의식이 오버랩 된다.

가방에서 로의 일기를 꺼내 이번만큼은 행간의 의미,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까지 꿰뚫는 독서를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섣불리 연민하지 않기 위하여, 텍스트 외부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내부로 스며들어가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고통과 뒤섞인 진짜 연민이란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서.(35/123)”

 

L의 이름은 로기완, 북한에서 연길을 거쳐 브뤼셀로 망명한 탈북인(북한이탈주민)이다. 연길에 어머니와 불법 입국했고, 어머니의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시신을 판 돈으로 베를린을 거쳐 브뤼셀에 도착했다. 호스텔 굿 슬립 good sleep’ 리셉션 직원의 냉랭함 앞에서 뒤돌아 가슴에서 방수포에 싸인 650유로를 꺼내 세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묵직한 통증이 가슴속에 내려앉았다는 화자를 따라 나 역시 먹먹함을 느꼈다. 일주일을 머뭇거리던 로기완은 한국대사관을 찾아가지만, 밀입국할 때 버렸던 신분증이 없어 북한인임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한다. 159센티미터 단신, 47킬로미터의 왜소한 몸인 그는 헬로봉주르조차 알지 못하는 무국적자이자 이방인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들은 생각보다 허술하다. 일상에서는 요구받지 않는 그 증명서들이 로와 같은 이주민, 망명자들에게는 그들 존재를 입증하는 단서들이 된다. 그것이 주는 위로는 영원한가? 개인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나무둥치에 주저앉은 날개가 젖은 새처럼 하늘로 날아갈 수도 땅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8/123)”

를 브뤼셀로 이끌었던 로의 문장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지 못하던 시절의 로가 그러했을까? 아니 우리 모두가 인생의 많은 순간 그렇게 살아간다. 입국허가를 받지 못한 채 그 사회의 터미널에 있는 이방인이 된다. 대사관을 나와 담장에 기대 설움을 토해내고, 우연히 들어간 성당에서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들으며 오열하던 로의 모습에서 외로움의 극치를 본다.

 

로의 국적이 북한임을 판별하기 위해 인터뷰했던 의사 박 역시 탈북인이다. 그는 남한에서 벨기에로 왔다.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죄의식과 함께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다. 상처(喪妻) 후 그는 의사를 그만두고 북한에서 온 난민신청자들의 국적을 판별하기 위해 면담을 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 박이 로의 자술서와 함께 주 벨기에 한국대사 앞으로 쓴 코멘트는 로와 같은 난민신청자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저는 귀하께 로기완의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보냅니다. 그는 비록 북한 신분증을 갖고 있지 않지만, 저는 그가 북한 사람임을 확신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를 돕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무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적인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놓치게 되는 것은 개개인의 고통이며, 이것이 우리의 비극임을 부디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의심되는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저에게 연락하십시오.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함께 전합니다.(91/123)”

 

이 코멘트를 쓰고 있는 박과 그것을 인용하고 있는 의 분노가 느껴진다. 그렇게 는 이방인 로의 행적을 쫓으며 냉담하고 폭력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들에게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그의 외로움과 슬픔에 전이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슬픔에까지 진심이라는 잣대를 들이밀어 어리석은 검열을 했음을, 진심이나 진실을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닫는다. 타인인 이상 현재의 시간과 느낌을 오해와 오차 없이 나눠 가질 수는 없다는 불변의 진리는 어쩔 수 없기에 인정하고 슬픔은 슬픔으로 반응해야 했다. 타인이 내 삶으로 걸어 들어온 거리만큼 나 역시 그에게 다가감으로 내 인생을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깨달아 가는 동안, 환상처럼 보이기 시작했던 그것의 형태로 선명해지는 시각적인 장치는 의 생각의 변화와 함께 멀리 있는 윤주의 상황을 암시한다. 성공적이었지만 귀를 살리지는 못했다는 윤주의 수술 소식과 함께 그것의 형태를 선명하게 갖춘다. 그리고 는 그 귀에 그동안 할 수 없었던 말들을 그 귀에 대고 고백한다. 그것은 윤주의 대체물이기도 하다. 그 귀에 대고 말하는 것은 단절됐던 통화이기도 하다. 다의적이며 탁월한 시각적 장치다.

 

이 소설에서 의사 박의 삶 역시 의료 조력 사망(MAiD, Medical Assistance in Dying)’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박의 고통을 다 알 수는 없기에 아무것도 물을 수 없다. ‘는 윤주, , 로에게 진심으로 공감했을까? 이것이 읽고 난 후 드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심이란 잣대는 누구 혹은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일까?

 

처음으로 돌아가 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그 연민이라는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가깝고 명료하다. 그런데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시간, 수고, 공간, 관계, 돈 등 소중히 여기는 나의 것이 필요하고 포기되어야 한다. 거기엔 정량이란 것이 없다는 막연함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을 읽고 공감했다고 해서 나는 현실의 로기완, 윤주, 박에게 거짓 없는 연민과 환대를 보일 수 있을까? 그들은 이 소설 속의 정제된 표현들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닐 텐데.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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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4-04-04 06: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머 저 이거 표지 때문에 연예인이 썼거나 드라마 대본집 같은 건 줄 알았어요;;; 이런 내용이었다니..! 😱

그레이스 2024-04-04 08:11   좋아요 1 | URL
^^
넷플릭스에 영화가 올라오고 광고가 있어서 그런듯요.
잠깐 스쳐가는 광고 영상으로 본 송중기 배우때문에 읽는 내내 방해가 됐어요.
159센티미터 47킬로의 로기완과 배우가 매칭이 되지 않아서....
배우의 이미지를 지우느라 애쓰면서 읽었네요.
영화는 안보려구요 ㅠ
책이 넘 좋았거든요^^

새파랑 2024-04-05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리뷰를 보니 흥미롭네요. 타인에 대한 나의 연민이 진심인지 아닌지 자주 고민했었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의 작품인거 같네요~!! 마지막 질문에 공감합니다~!!

그레이스 2024-04-05 15:46   좋아요 2 | URL
^^
참 어려운 문제인듯요
함께 슬퍼하고 할수 있는 만큼 도와주는 것조차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얄라알라 2024-04-07 19:17   좋아요 1 | URL
남 얘기처럼 소비할게 아니라 뜨끔뜨끔 자기를 돌아봐야만 읽을 수 있는 소설인거 같아서 읽기가 겁나기도 하네요^^:

그레이스 2024-04-07 19:31   좋아요 1 | URL
예~
내내 저 스스로를 비추고 각성하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하지만 따뜻하기도 해요
 

부산행 기차 안에서 <샤이닝>, 서울행 기차 안에서 <메모의 즉흥성과 맥락의 필연성>을 읽었다. 얇은 책들을 가져간 것은 집에 돌아가면 읽고 논제를 만들어야 할 다른 책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마저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읽다 중단한 채로 미뤄두기 싫어서, 이동 중 완독 가능한 분량의 책을 선택했다. 노란 책은 넘 빨리 읽어서 시간이 남았다.ㅠㅠ
욘 포세는 다른 책을 더 읽어봐야 나만의 평가가 나올듯 하다.
어쨌든 독서는 기차가 최적의 장소!
아직 천안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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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3-26 2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욘 포세 전에 읽으려다 포기해서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있습니다.
저 메모에 관한 책은 무슨 철학책 같습니다. ㅎ

그레이스 2024-03-26 21:20   좋아요 1 | URL
ㅎㅎ
메모에 관한 책은 잠자냥님 소개하신 글 보고 리뷰를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에 샀습니다.
제목을 끌리게 참 잘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레이스 2024-03-26 21:22   좋아요 1 | URL
욘 포세는 다 사놨는데,,, 다들 평이 달라서,,, 겁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것 같아요.
저는 좀더 읽어봐야겠습니다.

stella.K 2024-03-26 22:03   좋아요 1 | URL
허어, 욕심이 넘 많으신 거 아닙니까? 지금도 잘 쓰시는데 더 잘 쓰시려고 읽으시다닛! ㅎㅎ
그런 거라면 오히려 제가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전 리뷰를 넘 오래 쓰고 쓰다보면 삼천포, 또랑에 자주 빠지고 난리도 아니거든요. ㅠ

그레이스 2024-03-26 22:13   좋아요 0 | URL
;;;;;

페넬로페 2024-03-26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행 가셨군요.
잘 다녀 오세요^^

그레이스 2024-03-27 00:0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벌써 다녀 왔어요
매년 엄마모시고 부산 다녀오는 여행이예요
비도 오고 이제는 엄마도 나이드셔서,
거의 호텔 안에만 있다가 바다보고 와요^^

희선 2024-03-27 0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차 타시다니 기분 좋으셨겠습니다 바다도 보시고 오셨군요


희선

그레이스 2024-03-27 09:36   좋아요 1 | URL
예~
희선님 감사합니다.
비오는 바다도 좋았어요^^

샤이닝 보면서 희선님 글이 생각났는데,,, 어딘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단발머리 2024-03-27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며칠전에 교보 갔는데 샤이닝이 진짜 작아서 깜짝 놀랐어요 ㅎㅎ책 집중해서 읽고 싶기도 하지만 기차를 타고 싶네요 ㅋㅋㅋㅋㅋ
기차여행과 고르신 책이 찰떡입니다!

그레이스 2024-03-27 09:39   좋아요 1 | URL
예^^
샤이닝은 단편 분량이예요.
뒤에 노벨상 수상소감도 좋았어요
작가를 조금 더 알려줘서 다음 작품 볼 때 도움이 될 듯해요
오만원짜리 독서실 ㅋㅋ
기차여행은 가끔 기분전환에 최고예요

새파랑 2024-03-27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욘포세는 <샤이닝>으로 시작하면 되는건가요?

기차가 정말 책읽기에는 가장 좋은 곳인거 같아요. 지하철은 좀 힘들다는...

그레이스 2024-03-27 14:21   좋아요 1 | URL
제가 다른 책은 안읽어봐서...샤이닝이 얇아서 부담이 없긴 해요 ㅎㅎ
지하철도 좋긴한데,,,

책친놈 2024-03-27 14: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책이 기다리고 있어 얇은책을 읽는다는게 공감되네요 ㅋㅋㅋㅋㅋ
저도 샤이닝 사놨는데 욘포세 작품마다 평이 갈리는 리뷰를 보며 겁나기도, 할게 많기도해서 아직 미루기만 했네요. 그래도 분량이 짧으니 이번주중으로 읽어봐야겠어요 ㅎㅎㅎ 여행 잘다녀오세요👋

그레이스 2024-03-27 14:22   좋아요 1 | URL
^^
저 말고 또 계셨군요
선뜻 못읽고 계셨던...!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