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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로기완을 만났다 (개정판)
조해진 지음 / 창비 / 2024년 2월
평점 :
타인을 향한 얕은 공감과 거짓된 연민, 금방 지치고 바닥을 보이는 나의 위로와 수고를 떠올리고 얼굴을 붉히게 하는 글들이었다. 열띤 위로로 가장된 자기만족과 담담함으로 감춘 무심함을 들키고, 나에게 기대하며 다가온 그들은 다시 원래 있던 거리만큼 떠나가던 순간들을 기억하게 했다. 진심을 들켜버린 그 순간조차 외면하고 잊어버린 나의 위선을 고발하는 글이었다.
화자(話者) ‘나’가 묻듯 “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그 연민이라는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30/123)”가를 생각했다. 답은 가깝고 명료함에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시간, 수고, 공간, 관계, 돈 등 내가 쌓아올린 것, 소중히 여기는 나의 것을 내주고 포기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거기엔 정량이란 것이 없다는 게 문제일지 모르겠다.
‘나’는 죄책감 때문에 행복해질 수가 없다. 아니 행복하게 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혐오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너를 혐오해. 생전 처음 본 사람이 적의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쏘아붙인다 해도 그리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새벽이다.(18/123)”
‘나’는 다큐프로그램의 메인 작가였다. 형편이 안 좋은 사람들의 사연을 미니 다큐로 내보내고 ARS로 후원을 받는 프로그램이다. 출연자들을 미리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려 애썼다. 윤주는 뺨에 신경섬유종이 크게 자리 잡고 있어 얼굴 대부분을 머리칼로 얼굴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엄마는 떠나고 아빠는 돌아가시고 동생은 행방불명으로 홀로 살아가는 열일곱살 고등학생 윤주에게 ‘나’는 조금 특별하게 마음을 기울였다. ‘나’는 욕심을 부렸고, 윤주의 방송날짜를 시청률이 높은 추석으로 정하고 수술날짜도 의사와 상의해서 미뤘다. 수술실에 들어간 윤주의 종양은 신경섬유종이 아닌 악성으로 밝혀졌다. 화자는 죄의식에 갇혀버렸다. 수술을 미룬 그 세달 동안 악성으로 변한 것일지 모른다는 가학적 의심 때문에 ‘나’는 괴로웠다. 윤주를 대했던 마음이 자족적이고 가식적인 연민에 지나지 않았던 거라는 의심과 선의에서 나온 결정이었다는 위로 사이에서 덧없어한다.
‘나’는 브뤼셀의 L의 인터뷰를 떠올렸다. 글을 쓴다는 구실로 브뤼셀을 향한다. 그것이 도피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는 ‘L’과 면담했던 브뤼셀의 의사 박씨에게서 받은 L의 자술서와 일기를 통해 그의 행적을 따라가며 복기한다. 여기에 윤주의 어린 시절과 암 투병 중인 현재의 불행, ‘나’의 죄의식이 오버랩 된다.
“가방에서 로의 일기를 꺼내 이번만큼은 행간의 의미, 단어와 단어 사이의 여백까지 꿰뚫는 독서를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섣불리 연민하지 않기 위하여, 텍스트 외부에서 서성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내부로 스며들어가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고통과 뒤섞인 진짜 연민이란 감정을 느껴보기 위해서.(35/123)”
L의 이름은 로기완, 북한에서 연길을 거쳐 브뤼셀로 망명한 탈북인(북한이탈주민)이다. 연길에 어머니와 불법 입국했고, 어머니의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시신을 판 돈으로 베를린을 거쳐 브뤼셀에 도착했다. 호스텔 ‘굿 슬립 good sleep’ 리셉션 직원의 냉랭함 앞에서 뒤돌아 가슴에서 방수포에 싸인 650유로를 꺼내 세던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묵직한 통증이 가슴속에 내려앉았다는 화자를 따라 나 역시 먹먹함을 느꼈다. 일주일을 머뭇거리던 로기완은 한국대사관을 찾아가지만, 밀입국할 때 버렸던 신분증이 없어 북한인임을 증명할 방법이 없어, 아무 도움을 받지 못한다. 159센티미터 단신, 47킬로미터의 왜소한 몸인 그는 ‘헬로’나 ‘봉주르’ 조차 알지 못하는 무국적자이자 이방인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할 수 있는 단서들은 생각보다 허술하다. 일상에서는 요구받지 않는 그 증명서들이 로와 같은 이주민, 망명자들에게는 그들 존재를 입증하는 단서들이 된다. 그것이 주는 위로는 영원한가? 개인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증명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저 나무둥치에 주저앉은 날개가 젖은 새처럼 하늘로 날아갈 수도 땅으로 떨어질 수도 없는 순간순간을 살고 있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8/123)”
‘나’를 브뤼셀로 이끌었던 로의 문장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입증하지 못하던 시절의 로가 그러했을까? 아니 우리 모두가 인생의 많은 순간 그렇게 살아간다. 입국허가를 받지 못한 채 그 사회의 터미널에 있는 이방인이 된다. 대사관을 나와 담장에 기대 설움을 토해내고, 우연히 들어간 성당에서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들으며 오열하던 로의 모습에서 외로움의 극치를 본다.
로의 국적이 북한임을 판별하기 위해 인터뷰했던 의사 박 역시 탈북인이다. 그는 남한에서 벨기에로 왔다.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죄의식과 함께 아내의 죽음으로 인한 상처를 갖고 있다. 상처(喪妻) 후 그는 의사를 그만두고 북한에서 온 난민신청자들의 국적을 판별하기 위해 면담을 하는 봉사를 하고 있다. 박이 로의 자술서와 함께 주 벨기에 한국대사 앞으로 쓴 코멘트는 로와 같은 난민신청자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저는 귀하께 로기완의 글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보냅니다. 그는 비록 북한 신분증을 갖고 있지 않지만, 저는 그가 북한 사람임을 확신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를 돕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무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이 아니라 정서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그를 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정치적인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놓치게 되는 것은 개개인의 고통이며, 이것이 우리의 비극임을 부디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의심되는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저에게 연락하십시오.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함께 전합니다.(91/123)”
이 코멘트를 쓰고 있는 박과 그것을 인용하고 있는 ‘나’의 분노가 느껴진다. 그렇게 ‘나’는 이방인 로의 행적을 쫓으며 냉담하고 폭력적인 태도를 보였던 이들에게 분노의 감정을 느끼고, 그의 외로움과 슬픔에 전이된다. 그러면서 자신의 슬픔에까지 진심이라는 잣대를 들이밀어 어리석은 검열을 했음을, 진심이나 진실을 지키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음을 깨닫는다. 타인인 이상 현재의 시간과 느낌을 오해와 오차 없이 나눠 가질 수는 없다는 불변의 진리는 어쩔 수 없기에 인정하고 슬픔은 슬픔으로 반응해야 했다. 타인이 내 삶으로 걸어 들어온 거리만큼 나 역시 그에게 다가감으로 내 인생을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깨달아 가는 동안, 환상처럼 보이기 시작했던 ‘그것’이 ‘귀’의 형태로 선명해지는 시각적인 장치는 ‘나’의 생각의 변화와 함께 멀리 있는 윤주의 상황을 암시한다. 성공적이었지만 귀를 살리지는 못했다는 윤주의 수술 소식과 함께 ‘그것’은 ‘귀’의 형태를 선명하게 갖춘다. 그리고 ‘나’는 그 귀에 그동안 할 수 없었던 말들을 그 귀에 대고 고백한다. 그것은 윤주의 대체물이기도 하다. 그 귀에 대고 말하는 것은 단절됐던 통화이기도 하다. 다의적이며 탁월한 시각적 장치다.
이 소설에서 의사 박의 삶 역시 ‘의료 조력 사망(MAiD, Medical Assistance in Dying)’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박의 고통을 다 알 수는 없기에 아무것도 물을 수 없다. ‘나’는 윤주, 박, 로에게 진심으로 공감했을까? 이것이 읽고 난 후 드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진심이란 잣대는 누구 혹은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일까?
처음으로 돌아가 태생적으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성되는 그 연민이라는 감정이 거짓 없는 진심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포기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가깝고 명료하다. 그런데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시간, 수고, 공간, 관계, 돈 등 소중히 여기는 나의 것이 필요하고 포기되어야 한다. 거기엔 정량이란 것이 없다는 막연함 때문에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글을 읽고 공감했다고 해서 나는 현실의 로기완, 윤주, 박에게 거짓 없는 연민과 환대를 보일 수 있을까? 그들은 이 소설 속의 정제된 표현들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닐 텐데.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