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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쉽게 잊고 비슷한 일은 반복될까요? - 기억하는 사람과 책임감 있는 사회에 관하여
노명우 지음 / 우리학교 / 2024년 4월
평점 :
『팽목항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 세월호 이후 바뀔 인문학의 방향과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변화가 올 것임을 기대하던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에 동의했고 기대했었다. 그러면 어떻게 무엇을 공부해야 할까 하고 생각했었다. 10년이란 시간이 흘러 우리가 알고 싶어 했던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고, 오히려 무력감과 무심함과 패배의식만 가득한 것을 목도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만큼은 변했다고 증명하고 설득하려 들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체감하는 것은 애써 외면하는 피로해진 얼굴들이다.
열광했던 인문학은 바람 빠진 공처럼 그 탄성을 잃고 늘어져 있는 것 같다. 당시 우리를 지배했던 자본의 권력에서 자유하게 될, 모두는 아닐지라도 나를 포함한 누군가는 그렇게 될, 방법이라 여겼던 공부는 의미를 상실한 채 습관과 자기만족으로만 남아있는 것은 아닌지. 모임에서도 그 이야기를 꺼내길 주저한다. 상대방을 피곤하게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아니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그 이후로도 또 다른 재난들이 이어졌다. 무력감을 느끼며 거리두기와 버티기를 해야 했던 팬데믹과 그 재난들을 동일한 범주에 넣고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그러다 또 다른 참사 소식이 들려왔다. 흠칫 놀란다. 내 마음 때문에.
노명우 작가는 이 책에서 세월호 사건에서 물어야 했던 “왜?”라는 질문들을 계속 해야 하고, 그 물음 끝에 답을 얻어야 한다고 당위를 주장한다. 우리는 참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은 한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세상의 상식이 침몰한 공동체의 재난이기 때문이다. 낙관론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세상의 ‘어두운’ 이면을 대면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 고통이 되풀이 되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20세기 제노사이드의 시대를 열었던 1915년 튀르키에서의 아르메니아인들 학살과 1948년 제주 4.3 사건, 1989년 힐즈버러 스타디움 참사와 2022년 이태원 참사, 1978년 미국 ‘러브 운하’ 환경참사와 2023년 현재 7,891명의 피해자가 등록된 가습기 살균제 사건 등 그 재난이 닮은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소개 한다. 그리고 질문한다. 대체 왜 재난은 되풀이 되는 것일까? 그것도 같은 원인과 결과로.
“대체 재난은 왜 끊이지 않고 되풀이 되는 것일까요? 인간은 그 자체로 악을 품고 있는 존재여서 그 폭력성이 학살이라는 재난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요? 길을 걷다가 영문도 모른 채 압사당하고, 축구 경기를 보러 갔다가 목숨을 잃고, 건강을 염려해 권장하는 대로 가습기 소독을 하다가 생명을 잃고, 신도시로 이주했다는 이유로 삶을 상실한 사람은 자신의 악운과 가혹한 운명을 탓해야 할까요? (59p)”
우리가 “인간의 역사에 쌓여 있는 이 재난의 파국 앞에서 그 원인을 개인의 운명이나 잔혹함으로 돌려 버린다면” 그 재난은 계속 반복될 것이다. 시야를 넓혀서 그 재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매커니즘을 규명해야 하고 그 반복되는 작동을 중지 시켜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진보에 진보가 더해지는 개선이 아니라 비극에 비극이 더해지는 파국의 역사(63p)”라고 한 발터 벤야민의 말을 인용한다. 아르메니아의 제노사이드는 파국의 시작이었고, 이후 인류의 역사 속에 홀로코스트(1945~48), 난징 대학살(1937), 캄보디아 민간인 학살(1975~79), 르완다 내전 중 투치족 집단 학살(1994), 보스니아인 학살(1995) 등 수많은 집단 살해가 반복되었다. 홀로코스트가 벌어지기 전 그 사회에는 이미 그런 일이 가능해질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그 시스템이 작동한 결과다. 희생자인 유대인들조차도 이 전조를 눈치 채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참사의 경우도 재난의 전조가 있음에도 그 경고를 알아채지 못할 때 일어난다.
눈을 멀게 하는 권력은 무엇일까? 결국 그 시스템을 만든 권력이다. 세월호 당시 많은 소문들이 있었지만,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전조가 있었음에도 눈을 멀게 했던 자본의 권력에 분노했다.
1969년 인도 보팔의 미국의 ‘유니언카바이드’ 공장에서 일어난 가스 누출 사고는 24일 일어난 ‘화성 아리셀 공장 화재’는 노동력의 수요와 공급이 만난 외국인 노동자들의 희생이라는 면에서 다르지 않다. 우리는 공장 건물 붕괴로 천여명이 숨지는 방글라데시의 재난 현장에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을 수 있다. 반복되는 참사와 재난을 지배하는 힘은 자본이다.
우리가 공부를 하고 그 매커니즘을 알았다고 해도 그 거대한 힘에 맞서 중지시킬 힘이 있을까?
1789년 윌버포스가 영국 하원에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첫 번째로 상정했다. 오랜 시간 자료들을 수집하고 거듭 법안을 상정하고 설득했다. 그의 의회 연설은 정의에 가득 차 있었고 강한 설득력이 있었지만 대다수 의원들의 마음은 불편했다. 윌버포스가 제시한 사실에 동요되기는 했지만, 노예무역 폐지가 경제적 재앙을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가 앞섰다. 이 법안이 통과되고 노예제가 폐지 된 것은 1833년이었다. 무려 44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윌버포스라는 한 사람의 각성으로 시작하여 그와 함께 한 친구들과 동료들이 함께 한 결과였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욕망이 모여 만들어진 시스템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중단 없는 투쟁과 연대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변하지 않는 세상 앞에서 때로 무력감에 휩싸여도 공부하자. 그리고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져도 할 말은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