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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덴마크 선생님 - 불안과 우울의 시대에 서로 의지하는 법 배우기
정혜선 지음 / 민음사 / 2022년 1월
평점 :
덴마크의 폴케호이스콜레(folke Højskole), 줄여서 호이스콜레는 누구나 갈 수 있는 교육기관이다. 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년들이 대학에 가거나 본격적인 직업을 갖기 전에 다니는데, 이들은 여행이나 자원봉사를 하며 1~2년간의 갭 이어(gap year)를 보낸다.
“19세기 중반부터 덴마크에 세워지기 시작한 호이스콜레는 그당시 덴마크 민중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농민을 위한 학교로 출발했다. 초기 호이스콜레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덴마크의 시인이자 신학자, 정치가, 역사가, 철학자, 교육자 그룬트비는 교육받을 기회가 흔치 않았던 덴마크 농촌 청년들이 사람대접을 받으며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배우기 바랐다. 그리하여 왕정이 끝나고 막 태동하고 있던 민주주의 사회 체제에서 농촌 민중이 도시 엘리트 계층과 나란히 시민적 주체로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런 역사를 가진 호이스콜레는 오늘날에도 누구나 갈 수 있는 대중 교육 기관이다.”(22p)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덴마크어를 쓰는 대부분의 학교와 달리 IPC에서는 영어를 사용한다. ‘행동하는 세계시민의 양성’을 목표로 삼는 IPC에는 세계각지에서 100여명의 학생들이 온다. 학교는 코펜하겐에서 기차로 한 시간쯤 걸리는 셀란섬 북쪽의 조그마한 해안 도시 헬싱외르(Helsingør)에 있다. 햄릿의 배경인 크론보르 성이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다.
저자 정혜선은 1916년 서른아홉에 대안학교 교사직을 내려놓고 이 IPC, 덴마크 세계 시민 학교(Internatinal People’s College)에 두 학기를 다녔다.
이 학교의 교사들의 면면도 존경스럽다. 유엔 산하 기관에서 케냐와 스리랑카 빈곤 지역 주거 환경 개선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의 거트루트, 유엔에서 20년 넘게 일하며 전 세계를 돌아다녔고 젊었을 때는 프랑코 독재 정권하의 스페인에서 민주화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는 스페인 출신의 오십대 후반 앙헬 등의 교사들의 이력이 그렇다.
영어로 발표하는 ‘프로젝트 개발과 행동 연습’ 수업, 덴마크를 비롯하여 독일·체코·폴란드·노르웨이 등으로 여행, 농업과 화단 가꾸기, 저녁시간마다 이루어지는 파티 등을 통해 저자가 배운 것들은 “평생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것 같아 세상에서 학생이 가장 행복하다는 나라에 왔다”(48p)는 그녀의 말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활동들이었다.
한국에서 영어 교사였지만 영어로 이루어지는 모든 수업에서 저자가 첫 번째로 느낀 것은 자신이 느린 학생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먼저 도움을 청하면 이런 느린 학생에게 손을 잡아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많다. 왜냐하면 경쟁에서 이겨 살아남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좋은 교사는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학생에게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를 빨리 알아채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녀는 이곳에서 당연히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
“길을 떠나온 목적이 스승을 찾는 것이었다면 나는 지금 이곳에서 만족한다는 느낌이 몰려든다. 선생님인 동시에 몇 권의 책을 낸 소설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 교장 선생님이면서 여전히 무대에 가수로 서는 사람, 일 년의 반은 네팔, 인도에서 수행자로 살다가 나머지 반은 덴마크에서 명상을 가르치는 사람, 수업할 때는 한없이 진지하다가도 망가질 때는 보는 사람 창피할 정도로 몸을 던져 학생들을 웃기는 사람, 나보다 스무 살이 어린 관대한 어른들.”(111p)
저자는 그들의 일상을 옆에서 보는 것이 배움이라고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나라에서 태어났어도 역시 인간인 그들 역시 화가 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다. 그녀에게 선생님은 그곳에서 만난 그런 불완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선생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경쟁이 아닌 성장, 논쟁이 아닌 토론, 평가가 아닌 헤아림, 성과가 아닌 과정 등을 중요시하는 교육과 사회적 환경이어서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각자 자기 나라의 인권, 평화, 정치, 환경 등의 문제를 조사하고 발표하고 함께 토론하면서, 서로의 생각의 차이를 발견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저자는 자신 안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경험했다. “학교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만남들이 어떤 울림을 만들고,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131p) 있었다고, 그것은 행운이었다고 고백한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 저자의 눈에 비친 덴마크는 느려도 불안하지 않고, 성취보다는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는 안전망이 갖춰진 사회다. 청소년 약물 중독 치료센터에서 일하는 플래밍씨의 말이 내게는 인상적이었다.
“덴마크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나라에요. 그래서 이 나라 젊은이들은 실패했을 때 온전히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이나 불공정한 사회 구조를 탓할 수가 없는 거죠.”(149p)
나는 여기서 희망을 보기도, 반대로 우리의 젊은이들의 상황을 떠올리기도 했다. 항상 화가 나있는 댓글들과 양극화의 극단에 서있는 위태한 모습들이 더욱 안타깝게 떠오른다.
텃밭에 허브를 심으며 쌓아놓은 모종을 다 심지 않아도, 하루 일과 시간이 끝났으면 내려놓고 휴식을 갖는 느림의 미학과 삶을 즐기는 태도를 배우며 저자는 그들과 함께 놀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나는 이제라도 좀 놀아 보게 되어 다행이다. 조금 덜 진지해도 된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시간을 허락해야 한다는 것, 긴장을 내려놓고 쉴 줄 알아야 한다는 것.”(166p)
덴마크인들 정서에 깊이 뿌리내린 성냥팔이 소녀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기억하려는 동정심, 돈 있는 티를 내는 행동을 창피하게 여기는 자세, 촘촘하고 탄탄한 복지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돈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세금을 많이 내는 정신, 여성의 지위 등은 하루 아침에 정책을 수립하고 시스템을 바꿔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저자가 만난 덴마크 친구들이 말한 것처럼 그들 유전자에 새겨져 정서와 미덕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들이 오랜 시간동안 해온 일이 활발한 자치 모임과 시민사회가 태동하면서 함께 시작된 민중교육 운동이다. 스스로를 조직하고 스스로를 교육한다. “민주주의와 복지 제도는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재교육하는 일이 중요”(230p)하다. 피곤함을 마다하고 조직하고 싸워서 얻어지는 것이다.
앙헬 선생님은 젊은 학생들에게 정치에 도전해보길 권하면서 “네가 정치를 선택하지 않더라도, 정치는 언제나 너를 선택한다”고 말한다. 요즈음 정치뉴스가 나오면 피곤해하며 채널을 돌리는 나 자신을 반성했다. 깨끗하게 살려면 정치를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에게는 정말 신선하고 생소한 도전이다.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간 스카겐 여행은 나에게 그림같은 노르웨이의 바닷가 풍경을 찾아보게 했다. 힘들지만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를 매번 찾는다는 선생님의 말은 깊은 울림이 있었다. 영혼이 항상 깨어있도록.
공들여 그림을 그리다 길을 잃은 것 같다고 낙심하는 저자에게 친구는 묻는다. “길을 잃는 것을 싫어하니?” 그 질문의 울림이 오랫동안 그녀의 가슴에 남아있다. 그녀는 헬싱외르의 마지막 날 파티장에서 결심한다. “한국에 돌아가도 이렇게 살리라. 내 삶에 예상치 못한 융단 폭격이 떨어져도 이렇게 춤추며 살리라”(306p)라고.
덴마크 사회에 대한 지식이 많은 독자들에게는 특별히 감동점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특별히 세련되거나 아름다운 문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저자 한 개인이 사람들과 부딪치며 배운 유일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 좋았다. 그것이 IPC여서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시민사회 교육수준이 부러웠다. 우리나라에 만들어질 이런 교육기관을 상상해본다. 결국 나는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책 제목을 떠올린다.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