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곡 : 천국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평점 :
La Divina Commedia : Paradiso
브르통은 『신곡』을 저술한 단테를 초현실주의 작가에 포함시켰다. 윌 곰버츠는 『발칙한 현대미술사』에서 이런 초현실주의 명분을 끼워 맞추기 위한 작업은 뻔뻔스럽다고 비아냥댔지만, 브르통이 그렇게 주장할 만한 이유들이 있기는 하다. 지옥의 하강과 연옥과 천국의 상승은 환상적이기도 하고, 제자리를 떠난 단테의 육체나 변형된 영혼의 형태 등 초현실주의적 요소들이 있다는 생각이다.
천국에 오르기 전, 단테는 철학이나 신학의 교양이 부족한 독자에게는 <천국>이 어렵게 보일 수도 있다고 미리 말한다. 잘못하면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으므로 미리 돌아가라고 권한다.
“오, 귀담아듣고 싶어서 작은 쪽배에
앉아, 노래하며 나아가는 나의 배를
뒤따르고 있는 그대들이여,
넓은 바다로 들어서지 말고 그대들의
해변으로 돌아가시오. 혹시라도
나를 잃고 헤맬 수도 있을 테니까.”
(「천국」제2곡 1~6행)
‘넓은 바다’와 ‘해변’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의 첫 번째 장 「코스모스의 바닷가」가 떠오른다. 지구는 그 무한한 우주의 해변이고, 인간의 탐험은 발가락 하나 담근 정도에 불과하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단테의 천국은 지상을 벗어나, 월천(月天)을 시작으로 한 단계씩 오르는 9개 하늘로 이루어져 있다. 9번째 하늘인 원동천(原動天)은 정화천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원동천은 지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가장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으며 그것은 세계를 움직이는 최초의 움직임이다. 정화천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을 따른 최고의 하늘 엠피레오(Empireo)이다. 월천, 수성천, 금성천, 태양천, 화성천, 목성천, 토성천, 항성천, 원동천, 정화천의 단계로 이루져 있는 하늘들이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단테는 잘 알지 못한다. 단테는 계속해서 질문이 떠오르고 베아트리체는 신학과 철학과 물리학의 원리들로 설명해준다. 단테는 구도자이고 베아트리체는 진리로 인도하는 안내자이다.
“그것은 달을 향하는 불에도 있고,
그것은 동물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것은 땅을 뭉쳐 하나로 만들지요.
그 활은 지성이 없는 창조물들만
쏘는 것이 아니라, 지성과 사랑을
지닌 창조물들까지 쏜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배려하시는 섭리는
가장 빨리 도는 하늘을 감싸는 하늘을
자신의 빛으로 언제나 평온하게 만들지요.”
(「천국」제 1곡 114~123행)
‘그것’, ‘활’, ‘섭리’ 모두 이 하늘들을 움직이는 원리를 가리키는 말들로 읽힌다.
“나는 그 모습이 원과 어떻게 합치되고
어떻게 그 안에 들어 있는지 보고 싶었지만,
내 날개는 거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다만 내 정신이 섬광에 맞은 듯했고,
그 덕택에 내 소망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여기 고귀한 환상에 내 힘은 소진했지만,
한결같이 돌아가는 바퀴처럼 나의
열망과 의욕은 다시 돌고 있었으니,
태양과 별들을 움직이는 사랑 덕택이었다.”
(「천국」 제33곡 137~145행)
끝까지 올라간 그는 완전히 이해하거나 설명해주지 못하지만(‘날개’는 그것을 말로 구현할 수 있는 지성을 의미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근원이 사랑임을 알게 된다.
그 근원에 가까울수록 베아트리체는 얼굴에서 광채가 나며 변모한다. 그들이 최고의 하늘 엠피레오로 올라간 후 베아트리체는 더욱 아름답게 빛나며 자기 자리로 올라간다. 그가 『새로운 인생』에서 그리던 베아트리체의 모습이다.
“따라서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주께서 기꺼이 내 목숨을 몇 년 더 연장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그녀에 관해 여태껏 어느 여인에 관해서도 써진 적이 없는 바를 쓰는 것이 나의 희망이다. 그런 후에 은총의 주인이신 주님의 선하심으로 내 영혼이 이곳을 떠나 그 여인의 영광, 즉 세세 만세토록 축복을 받으실 주의 얼굴을 끝없이 바라보고 있는 그 복된 베아트리체를 바라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
(107p 『새로운 인생』 단테 알리기에리)
천국의 각 하늘들에서 본 사람들은 천국과 연옥들과 달리 신약의 사도들이나 후에 오는 신학자들과 성인들이며 개인적인 삶의 고백보다는 논리학,… 천문학, 형이상학, 윤리학, 신학 등을 통한 절제, 지혜, 용기, 정의의 4대 미덕이나 선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단테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 이탈리아의 부패,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고 있다. 단테가 미리 말한 것처럼 조금 어렵다. 하지만 친절한 주석 덕분에 그가 경고한 것처럼 길을 잃지 않았다. 인내심과 탐구심이 조금 더 요구된다.
단테가 만난 영혼들 중에 흐름을 환기시키는 이는 그의 고조부 카차구이다이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피렌체의 검소함과 십자군 원정에서의 순교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마도 단테가 「지옥」편에서 고리대금업자들이 있던 구렁에서 금융업을 했었던 선조의 불분명한 형체에 대해 침묵했던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했다. 망명자로서 피렌체에 오랫동안 이어진 가문과 거기에 뿌리를 둔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리고 카차구이다의 말을 빌어 자신의 망명의 의미를 확인한다.
“그렇게 평온하고, 그렇게 아름다운
시민들의 생활, 그렇게 믿음직한
시민 의식, 그렇게 감미로운 집에다
큰 외침의 호소에 마리아께서 나를
보내셨으니, 오래된 너희 세례당에서
그리스도교인이자 카차구이다가 되었지.
모론토와 엘리세오가 내 형제였고,
내 아내는 파도 계곡에서 왔으니
거기에서 너의 성이 나왔단다.”
(「천국」 제15곡 130~138행)
『신곡』을 통해 단테는 그리워하던 베아트리체를 만남으로 그가 소망했던 사랑을 구현했고, 구도하던 진리에 다다르고, 스틸 누오보 작업으로 인생을 완성해갔다.
“『새로운 삶』은 단테의 내면생활에 본질적 빛을 던진다. 단테가 스틸 누오보의 연애 신비주의로부터 사고방식의 구조를 추출해낸 사실과, 단테가 문학 동료들 사이에서 누린 지위를 잘 보여 준다.
……
베아트리체는 육신으로 오신 신성한 완벽함이라는 동방 교회의 모티프, 혹은 이데아의 파루시아(parousia: 임재)를 구현한다. 이 모티프는 모든 유럽 문학에 아주 심오한 영향을 끼쳤다. 진리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려는 열정적 기질과 지칠 줄 모르는 욕망 때문에, 단테는 이성과 행위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 비전적 체험만 받아들였다.
……
신학적 지혜와 동일시되는 축복받은 여인 베아트리체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남자와 천상의 구원 사이에 서서 중개하는 여인이고 그 남자의 구원에는 그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137~138p 『단테』 에리히 아우어바흐)
무엇을 쓴다는 것, 더구나 새로운 문체를 통해 새로운 정신을 찾아가는 것은 쓰는 사람에게 구원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특별히 단테와 같은 망명자에게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었을테니. 작품의 완성과는 달리 그는 피렌체로 돌아가지 못하고 1321년 라벤나에 묻혔다. 1519년 단테의 유해와 유물을 라벤나로부터 양도받으려는 움직임이 피렌체에서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르네상스의 문을 연 단테의 작품들에 대한 복권이 이루어지고, 그가 생전에 찾으려했던 피렌체인으로서의 권리가 인정되었던 것 같다.
15세기 르네상스의 전성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피렌체에 머물던 시기, 길에서 만나 벌인 신경전에 단테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제 그는 피렌체의 일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어느 날 밀라노에서 돌아온 레오나르도가 길을 걷고 있는데, 모여서 잡담을 나누던 사람들이 레오나르도에게 단테의 글 중 난해한 부분에 관해 의견을 물어왔다. 이때 마침 미켈란젤로가 나타나자 레오나르도가 살짝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저기 미켈란젤로가 오고 있구먼. 저 친구가 말해줄 걸세.”라고 하자 까칠하고 성질 있는 미켈란젤로는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스스로 답하시죠. (…)밀라노인들이 어리석어 당신을 믿었던 거예요!”라고 받아쳤다. 이에 뻘쭘해진 레오나르도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133p 『르네상스』 민혜련)
단테는 문학과 독서의 역사에 긴 그림자를 드리고 있다. 지옥의 가장 밑바닥 온통 얼어붙은 주데카에서 천국의 가장 높은 하늘 불(빛)의 정화천에 이르는 단테의 여행은 인생의 여정에 대한 은유와 알레고리와 영감을 전하고 있다. 인생의 어느 순간 맞닥뜨리게 될 광경 앞에서 나는 단테의 외침과 독백을 기억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