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일 났다!” ‘내적 입 꼬리’가 올라가고 가슴이 뛰는 게, 예사롭지 않은 책을 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들에 파묻힐 것을 예감하며, 밑줄을 긋고 페이지를 넘긴다. 역시나 챕터마다 작가가 소개하는 책들을 검색하느라 마음이 바빠진다. 그 책들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바쁜 손가락 끝이 흥분으로 떨린다. 아마도 작가가 원서로 읽은 듯, 번역되지 않은 책들도 있었고, 이미 절판된 것들도 있었다. 실망도 되고 살짝 안심이 된다. 이 양가감정을 이해할 사람들이 분명 있을 거란 생각에 웃음이 난다. 한편, 반가움과 부담감을 동시에 느낀 사실! 이 책과 함께 책장 한 칸을 차지할 정도로 갖고 있는 책들이 많았다. 남편이 모아 놓은 것들이다. 몇 년 전 히말라야 14좌 이미지를 화면에 띄워놓고 책을 읽는 그에게 “왜? 올라가려고?” 했었는데, 모아놓은 그 책들을 슬금슬금 뽑아다가 읽고 있는 나를 보고 “그냥 올라가지?” 한다.
제임스 설터의 『고독한 얼굴』을 읽다가, 등반 용어들을 이해하려고 『마운티니어링』을 뽑아들었고, 바로 옆에 있는 『마운틴 오디세이』가 눈에 들어왔다. 책날개에 “《비트》 《태양은 없다》 등의 시나리오가 영화화 되었다.”가 눈에 띄어, 저자 심산의 소개 글을 읽었다. 등반가이면서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소개가 첫 장을 넘기게 한다. 책장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몇 페이지를 읽다가 책상으로 가져왔다. 밑줄 그을 부분이 나타나서!
아직은 유럽인들이 알프스에는 악마가 살고 있고 용이 머무는 곳이라 믿었던 18세기에 알프스의 빙하와 지질과 기압을 연구, 탐색, 측정했던, 천재과학자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1740~1799)를 시작으로 등정의 역사를 소개한다. 과학적 등반을 시작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이 실패했지만 몽블랑의 정상에 오른 사람에게 상금을 주겠다는 1760년의 공언으로, 26년 후(1782년)에 몽블랑 정상 초등을 이끌어낸다. 그 초등의 주인공은 샤모니의 수정 채취업자 자크 발마와 마을 의사 미셸 파카르다. 수정채취업자, 영양사냥꾼, 약초꾼, 군인, 수도승 같은 사람들이 생활의 방편으로 ‘마지못해’ 오르던 산을 ‘산에 오르기 위하여’ 오른 알피니즘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저자는 레슬리 스티븐(1832~1904) 편에서 드디어 산악문학의 포문을 연다. 세계등반사에서 최고의 산악문학으로 꼽힌 작품 에드워드 윔퍼의 『알프스 등반기』(1871), 그리고 두 번째 작품인 레슬리 스티븐의 『유럽의 놀이터』(1871)를 소개한다. 안타깝게도 절판되었거나 번역되지 않아서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나의 주의를 끈 것은 레슬리 스티븐이 버지니아 울프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그는 이 책에서 등반을 지적이고, 우아하며, 고상한 행위로 올려놓았다. “이 책의 출간은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일대 발상의 전환을 일으켜, 이후 ‘지식인이라면 마땅히 산에 올라야 한다’는 식의 풍조를 만연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9p)” 버지니아 울프는 편지에서 아버지와 함께 했던 가벼운 산행을 은근히 그리워한 반면, 사람들이 산에라도 오를 것을 권하면 “산이라면 지긋지긋해요! 어렸을 때 아빠 따라서 지겹게도 올라 다녔다고요!(32p)”라고 했다고 한다.
1865년 에드워드 윔퍼(1840~1911)의 마터호른 초등은 현대등반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다. 그러나 1865년 7월 4일은 등반사에서 비극으로도 기록된다. 하산하는 길에 로프가 끊어지는 바람에 함께 올랐던 일행 중 4명이 추락사 한다.
이 책에서 니체(1844~1900)를 볼 줄이야. 그는 교수 직책을 내려놓고 여행을 하다, 알프스 ‘질스 마리아’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글을 썼고, 코바치봉(3,451m)에 즐겨 올랐다. 이 산의 애칭은 ‘니체의 산’이다. 그의 저서는 후에 20세기에 풍미한 ‘단독등반’에 영향을 주었고, “실제 이 시기에 홀로 산에 오르다 외롭게 죽어간 알피니스트들의 배낭에서 니체의 책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었다.(43p)”
앨버트 머메리(1855~1895)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피해 ‘좀 더 어려운 방식’으로 오르는 ‘머메리즘Mummerism’을 창시한다. 알프스의 149개의 봉우리들이 초등되었고 더 이상 초등의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새로운 ‘등반의 가치’를 제시한 것이다. “어디에 올랐느냐보다 어떻게 올랐느냐를 더욱 중시하는 현대 등반의 역사는 곧 머메리즘의 역사이다.(55p)” 머메리는 히말라야 ‘낭가 파르바트’ 정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머메리 루트를 남겼다. 그의 유일한 저서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를 소개하고 있다. 4천 미터 대의 아이거, 마터호른 등의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오른 알피니스트들은 8천 미터 대의 히말라야 봉우리를 향한다.
가이드, 셰르파들이 없었다면 등정의 역사는 없었다고 강조한다. 그들의 시체를 넘어 오른 등정의 역사가 그들을 무명으로 남긴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먼저 소개되는 사람은 알프스의 가이드였던 마티아스 추르브리겐(1856~1917)이다. 다음으로는 1953년 에드문드 힐러리(1919~2008)와 함께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텐징 노르가이(1914~1986)다. 그들은 단순한 고용관계가 아니라 자일 파트너고 깊은 우정을 나눈 관계다. 힐러리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순간 자신이 아닌 텐징 노르가이의 사진을 남긴 것은 유명한 일화다. 질문하는 기자에게 “텐징은 그때까지 한 번도 카메라를 사용해 본 적이 없었어요. 에베레스트 정상은 그에게 카메라 작동법을 가르쳐 주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지요.(156p)” 라고 대답한다. 그의 몸에 익은 겸손과 위트는 불가침이다. 힐러리는 히말라야 지역을 위해 재단 ‘히말라야 트러스트’를 설립했고, 학교와 병원 등 지역을 위한 사업이 운영되고 있다. 에베레스트 정상 직전에 있는 고난이도의 암릉 구간은 힐러리 스텝으로 불리고 있다.
이 책에는 등반역사의 기념비적인 사건들과 37명의 그 기록의 주인공, 그들과 동료, 경쟁자들이었던 등반가들이 등장한다. 정상 정복보다는 생명과 윤리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등반가, 하켄과 같은 장비를 직접 만들어 썼던 등반가, 왕족 출신 등반가, 외다리 등반가, 히피처럼 노숙을 하거나 헛간에서 지내지만 최고의 장비를 소유한 등반가 등 등반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다양한 사람들의 정상을 향한 길거나 짧은 삶이 소개되고 있다. 성차별의 산에 맞섰던 여류 등반가들이 소개된다. 반다 루트키에비치, 카트린 데스티벨, 린 힐 등이 그들이다. 카트린 데스티벨이 손가락의 힘으로 암벽에 매달리는 영상은 예술의 경지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2명! 헤르만 불(1924~1957)과 라인홀트 메스너(1944~)의 책이 책장에 있었고, 읽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히말라야 낭가 파르바트 정상을 단독등정으로 오른 인물들이다. 두 사람 다 티롤 태생이다. 헤르만 불은 1953년에 초등했고, 메스너는 동생과 함께 오르고, 다시 다른 루트로 올랐다. 이들의 글을 읽고 있으면 빙벽을 오르는 낙석과 눈사태와 추락의 아슬아슬한 순간 발가락에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하늘과 만년설밖에 보이지 않는 산을 오르고, 벽에 기대어 어두워진 세상을 내려다보며 밤을 지새우는 그들의 고독과 두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헤르만 불의 8000미터 위와 아래는 그의 자전적 에세이로 그가 태어나고 자란 알프스에서 산악회 소년부에 들어가면서 암벽을 타며 알프스의 봉우리로 시작하여, 히말라야 낭가 파르바트에 초등으로 오른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 소년시절 멋모르고 오르던 암벽에서 자일 친구를 잃기도 하고, 앞에 오르던 사람이 떨어지는 사건을 목격하면서도 등반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산악인의 혈관과 세포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낭가 파르바트 원정대에 합류한 그는 초등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견제하는 등반대장과 일부 동료들의 견제를 받는다. 마지막 정상을 앞둔 캠프에서 후퇴하라는 명령을 듣지 않고 단독등반으로 최초로 정상에 오른다. 기상악화로 하산이 지체되고, 굶주림과 동상, 벽에 기대어 잠들지 못하고 동이 트기를 기다리는 고통을 지나 하산한 그의 얼굴은 41시간 만에 노인의 얼굴이 되었다. 이 얼굴은 등반사에 유명한 사진으로 남았다.
1970년 로체를 마지막으로 사상 최초로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오른 라인홀트 메스너(1944~)는 남 티롤 사람이다. 공식적으로는 이탈리아 국적이다. 1978년 단독으로 낭가 파르바트에 오른다. 메스너의 글을 읽고 있으면, 그가 경험하는 고독에 전율하게 된다. 이 책 『검은 고독 흰 고독』에서 그가 느끼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잘 표현하고 있다. 글을 정말 잘 쓴다. 유려해서가 아니라 담담한 짧은 글 안에 내면의 깊이를 잘 담고 있어서다. 정상을 밟고 서둘러 내려오는 길에 겪는 고난은 마치 산이 살아있어서 그를 따라오며 집어삼키려고 하는 듯한 느낌을 전달받는다. 환청과 환시에 시달리며 발가락에 동상을 입고 내려온 그에게 정상에 올랐다는 것은 아무 감동도 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메스너는 많은 작품을 썼다. 심산 작가는 메스너의 입문으로 『벌거벗은 산』을 추천하고 있는데, 이 책 『검은 고독 흰 고독』이 같은 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내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에 더 이끌린다. 그리고 많은 산악문학을 번역한 김영도 작가를 기억하게 되었다.
그들이 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천지에 홀로 있는 그 때 그들은 또 다른 존재가 된다. 처절한 고독 가운데 타자가 되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죽음보다는 그 고독을 두려워하는 것이 두렵다는 고백에서 니체의 그림자를 보기도 한다. 어쩌면 그들은 손가락과 발가락에 온 힘을 주어 오른 그 산에서 내려오며 철학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