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몰려든 관광객을 향해 내키지 않는 웃음도 지을 줄 알았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자신들의 삶을 살아냈던 것이다. 어쩌면 원형 그대로의 화포를 찾고자 하는 내 욕심으로 화포 이외의 것에서 눈을 돌렸을 것이다. 자신은 온몸으로 문명의 편리를 누리며 전통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는 꼴이었다. 당신들은 언제나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으라고 그래야만 한다며 연신 카메라를 눌러대는 몰염치와 다르지 않았다.
여행은 때로 누군가에게 모독일 수 있었다.
결국 몽족과 그녀들의 화포를 찾아 헤맨 내 발걸음도 내 안의 잣대만으로 다른 것에 눈감아버리는, 순수 혈통에 집착하는 뿌리 깊은 이기심과 닮아 있었는지 모른다. 여기는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동안 그네들이 끝끝내 지켜온 삶의 터전이었고 나는 더운 여름날 시원한바람이나 물 한 모금보다 못한 이방인이었던 것이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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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호프 희곡선 을유세계문학전집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박현섭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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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명동의 극장에서 연극 갈매기를 봤었다. 이 내용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갔던 나는 전하려는 메시지를 대략 짐작만 하고 감동도 공감도 하지 못했었다. 가볍게 던져지는 대화들과 주인공의 자살이 맥락 없이 다가왔다. 연기나 연출의 문제가 아니라 체호프의 작품 자체가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19세기 말 안톤 체호프는 러시아 문학사에 있어 공백 시대에 등장했다. 네크라소프, 도스토옙스키, 투르게네프가 세상을 떠났다. 톨스토이는 절필을 선언했다. 그런 시기에 체호프가 등장했다. 초기에는 코믹하고 가벼운 글들을 썼고, 그레고로비치로부터 칭찬과 격려의 편지를 받고서야 지방의 의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로 들어었다. 그의 단편과 희곡들에서 엿보이는 것처럼 체호프는 개인주의자였고 예술가의 시선을 갖고 있다. 그래서 1890년 강제 유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삶을 취재하기 위해 사할린으로 여행을 간 것은 아이러니하다. 이 여행 때문에 병을 얻었고 그가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이유가 된다. 그는 지방의 의사로 있으면서 관찰한 사람들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고, 그의 작품에는 의사가 등장한다.

 

이 희곡집에는 갈매기, 바냐삼촌, 세자매, 벚나무 동산체호프의 4대 희곡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이 담겨있다. 이 희곡들은 러시아 농촌 사회의 전형적인 인물들과 이 농촌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도시의 귀족 또는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대화의 전반적인 정서는 우울이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당시 정치적 암흑시대의 러시아인들의 무기력과 자기중심주의를 읽게 된다. 사실 체호프는 정치에 무관했기에 지식인들의 이런 정서와 태도는 농촌소외와 더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 철도의 발달과 외국 자본의 유입으로 경제는 호황이었다. 이와 더불어 철도건설은, 농노해방으로 시작되었던 사람들의 도시로 유입은 더욱 가속화했다. 19세기 말 러시아의 도시 인구는 급격하게 팽창했다. 반면 농촌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 패배감으로 인해 우울함을 갖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마샤와 메드베덴코의 우울함은 표면적으로 엇갈린 사랑때문인 것처럼 보이나 이들의 대화를 읽어보면 더 근본적인 이유들을 보게 된다왜 항상 검은 옷을 입느냐고 질문하는 메드베덴코에게 마샤는 불행하기 때문에 입는 인생의 상복이라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메드베덴코는 가난에 대해 토로한다. 마샤는 트레플레프를 사랑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메드베덴코와 결혼한다. 과연 메드베덴코는 그녀를 사랑해서 구애했을까? 그의 구애가 너무 열의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의심을 하게 된다. 아마도 두 사람에게는  체념이 반복되어 습관이 되어 있는 듯 보인다.

 

트레플레프는 여배우 아르카디나의 아들이다. 그녀는 자기애가 강하고, 그래서 아들은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 그는 유명한 여배우의 아들로 항상 사람들의 평가를 의식하고 인정욕구가 강하며 자의식이 강하다. 당시 무대에 올려지는 연극을 구태의연하다고 비판하고 오만하다. 그는 새로운 형식의 희곡을 쓰고 무대를 선보인다. 가정극 공연을 위해 작은 무대가 세워지고 그의 희곡은 올려지지만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어머니의 비웃음을 산다.


주목하게 되는 지점은 트레플레프 주변인들이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있고, 이해하려고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인 니나도, 그의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도른조차도 그런 듯 보인다. 그의 고통의 깊이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심지어 죽은 갈매기라는 복선, 광기를 보이는 그의 행동들에서도 그의 자살 시도에 대한 아무런 전조를 읽지 못한다. 죽음을 가져온 두 번째 자살은 더욱 갑작스럽다. 관객조차도 그의 이런 심리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관심과 문제에 몰두해 있어 누군가의 말을 듣고 들여다볼 여유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들의 스몰토크, 날씨 이야기, 농담 속에 외로움이 묻어나고 있다. 많지도 않은 사람들이 각자의 고민에 빠져 있으면서 그들 속에서 서로 소외시키고 소외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트레플레프는 왜 그런 무대를 올렸을까? 아르키디나가 어렴풋이 느낀 것처럼 모친인 그녀를 조롱하기 위해 난해한 작품을 올린 것이 아닐까? 모친으로부터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과 증오하는 마음이 뒤섞여 있음을 보게 된다.

 

트레플레프는 왜 죽음을 택했을까? 니나가 그의 곁을 떠나고, 그는 절망감에 자살시도를 한다. 시간이 흐르고 그는 글을 써서 성공한 작가가 된다. 새로운 형식의 글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도른은 그 사람은 이미지를 통해 사고할 줄 알아요. 그 사람 소설은 색감이 풍부하고 선명해요. 나는 그걸 강하게 느낍니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분명한 쟁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인상을 던져 줄 뿐, 그 이상이 없어요. 사실 인상 하나만으로는 멀리 나갈 수 없거든요.(체호프 희곡선을유출판사, 96p)”라고 말한다. 그렇듯 트레플레프는 한계를 느낀다.

 “새로운 형식에 대해 그렇게 떠들어 댔지만, 지금 보니 나 스스로 점점 타성에 빠져들고 있어.(체호프 희곡선을유출판사, 98p)”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오래 멀리 끌고 갈 수 없다. 그는 작품에서 진부함과 따분함을 지우기 위해 다시쓰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트레플레프 뿐 아니라, 그가 라이벌이라 생각하는 트리고린의 말을 통해서도 작가로서의 고통을 전하고 있다. 아마도 체호프의 작가로서 고충이 녹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모친 아르카디나는 데카당하다고 비판하고, 관객의 호감을 사지 못했던 그의 작품이 후에는 사람들의 높은 평가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모더니즘, 이미지나 상징, 허무의 냄새가 가득한 전위적인 작품을 시간이 지나고서야 대중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른의 말처럼 전달하는 메시지와 분명한 쟁점을 던지지 못함으로 그는 한계에 부딪친다. 애초에 그의 글쓰기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질문하게 된다.

 

또한 도시로 갔다가 트리고린에게 버림받고 배우로도 성공하지 못한 니나가 찾아왔을 때, 그는 니나에게 곁에 있어줄 것을 호소한다.

 “나는 외롭습니다. 내 마음에 온기를 전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나는 마치 지하에 있는 것처럼 추워요. 그래서 무엇을 쓰든 간에, 내 작품은 모두 메마르고, 딱딱하고, 음울해져요. 여기 남아 줘요, 니나, 제발 부탁해요, 아니면 당신과 함께 가도록 해 줘요!(98p)” 

얼마나 외롭고 처절한 부탁인가?

 

그는 작가로서 한계와 상실의 심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죽음의 갑작스러움에서 체호프에게 감탄하게 된다. 아무 정보 없이 봤던 연극에서 내가 너무 개연성이 없다는 생각을 했던 이유인 듯하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이 체호프의 의도였다.

 

트레플레프의 사랑의 결핍으로 인한 구멍은 작가로서의 성공, 사람들의 인정과 같은 것으로 메꿀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누군가는 글을 씀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지만, 그는 그렇지 못했다. 한계를 만나고 더욱 깊은 절망에 빠졌다.

 

갈매기의 트레플레프의 자살(갈매기)도 바냐삼촌의 절규(바냐삼촌)도 모두 갑작스럽다. 겉으로 드러나는 그런 갑작스러움만 본다면 체호프가 그리려는 인물들을 지나친 것이다. 그의 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나보코프는 "체호프는 등장인물을 교훈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고, 인물을 미덕의 전형으로 만들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인간상 그대로를 정치적 메시지나 문학적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그려낸다"고 말한다. 한 인물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가 관찰한 필부 필녀를 그대로 그리고 있다. 이들이 만나 어떤 사유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체호프의 등장인물들은 진정한 도덕과 정신문화, 물질적 안정과 풍요가 러시아 민중에게 뿌리 내리지 않는 한, 고매한 지식인들께서 선술집 옆에 다리나 학교를 짓느라 아무리 고군분투하더라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나보코프, 러시아 문학 강의 456p)”

 

사람은 다 자신의 문제에 몰두해 있다. 가까운 사람이라도 타인의 고통에 오랫동안 관심을 두기란 어렵다.- 나의 문제가 가장 크고 당면한 문제이기에.  당연히 트레플레프와 같은 사람은 소외된다. 개인주의가 이제는 삶의 규범처럼 되어서 개인의 사생활은 침해당할 수 없는 영역이 되었다. 그 영역들의 모임에서 트레플레프와 같은 사람들은 원하지 않는 추방을 당하게 된다. 19세기말 러시아 농촌 소도시 체호프가 그려내는 사람들은 다 외로웠다

 

나는 고통받는 타인에게 어느 정도 얼마나 지속적으로 관심을 둘 수 있을까? 그의 요청이 없다면 무관심해도 괜찮을까? 혹시 내가 놓쳤던 사람들은 없을까? 등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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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10-16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통 받는 타인들에 대한 지속적
관심을 유지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가진 백만 한 가지 문제들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죠.

나는 외롭고 싶지 않지만 또 타
인의 외로움은 잘 모르겠다 -

아, 쉽지 않은 명제입니다, 참말로.

그레이스 2024-10-16 19:09   좋아요 1 | URL
^^ ㅠㅠ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인간의 고통은 변함이 없죠
표면적 이유만 달라졌을 뿐!
 
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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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축하,,,,
대단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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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10-10 2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레이스 2024-10-10 20:37   좋아요 1 | URL
어제 방송에서 후보에 올랐으나 가능성은 낮다고 하더니,,, 항상 틀리는 듯요. ㅎㅎ

독서괭 2024-10-10 2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굉장해요!!

그레이스 2024-10-11 09:10   좋아요 0 | URL
진짜 예상도 못했는데,,,
역시 그 해의 이슈가 될만한 주제가 던져져야 하는듯요
인간의 폭력성!

jenny 2024-10-10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집에 있는데도 이 책을 아직 못 읽었어요
읽어야겠어요

그레이스 2024-10-11 05:13   좋아요 0 | URL
한강 책 찾느라 한참 여기저기 뒤졌네요 ㅎㅎ
애들이 이제서야 달라고 해서!

레삭매냐 2024-10-16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박으로 축하합니다, 고저.
 

인간은, 지향(指向)이 있는 한, 방황하느니라.(파우스트전영애역 317)”

발자크를 보며 나는 파우스트적 인간을 생각한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자서전적이라는 루이 랑베르를 보며 더욱 그렇다.

송기정 교수는 발자크의 거듭되는 실패와 그로 인한 부채는 그의 창작의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정체성을 늘 찾아 나섰던 그의 삶은 방황으로 보일 수 있으나, “선한 인간은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파우스트전영애역 317)” 있듯, 그 역시 글쓰기에서 길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방황이라 보였던 것들이 글을 쓰기 위한 지식들을 담는 시간들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다 어떤 때는 그의 이 방대한 지식이 빼어난 묘사들을 훼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견자로서의 자질을 보였던 루이 랑베르는 사제인 삼촌의 집에서 천착했던 영성 서적들과 방돔기숙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있는 시간동안 깊숙이 빠져들었던 신비주의는 파리에서 환멸감을 느낀 시간동안 더욱 빠져 든 사유의 대상이었다. 그의 천재성은 한 가지 주제에 과도하게 빠져 고립됨으로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과연 그가 삼촌의 신비주의 관련 책을 가까이 접하게 된 것, 그리고 스탈남작부인의 후원을 받아 방돔 기숙학교에 가게 된 것이 그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는가에 대한 물음이 남는다.

 

반쯤은 군사적이고 반쯤은 종교적인(21p)”인 기숙학교는 루이와 같은 소년에게 합당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발자크의 기억 속에 있는 방돔 기숙학교에서의 시간이 자신의 어머니를 비난할 만큼 불행했음을 알게 된다. 발자크는 이 근대학교의 비인간성과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다. 발자크는 화자로서 루이 랑베르의 삶을 말해주고 있지만 두 인물 다 발자크임을 추측할 수 있다.

 

루이 랑베르가 이 학교 시절부터 계속 천착하여 연구한 주제는 인간의 정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 그것은 보는 것이라고 한다. 영적인 세계를 주변에 흐르는 자기로 설명하려 한다. 지금의 지식으로 보면 허황돼 보이지만 당시 과학의 한 흐름이었다고 한다. 그는 <의지론>을 쓰기 시작하지만 완성하지는 못한다. 그 의지론은 쇼펜하워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 고통으로 가득 찬 생()의 세계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첫째 모든 욕망을 떠난 예술적 관상(觀想)을 통해서이다.” 

결국 그렇게 꼼짝 않고 먹지도 말하지도 않는 상태, 정신만 남은 것 같은 상태로 있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결국 나약한 인간의 그릇에 담을 수 없는 '절대'를 담으려 했기에 그는 분열된 자아로 광기를 일으킨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면, 발자크는 왜 이런 소설을 썼을까? 이 작품이 그의 인간희극의 철학분야에 속해 있다는 것이 그 답을 어느 정도는 알려준다. 발자크는 철학자를 추구했다. 또한 과학에도 심취해 있었으며, 실험실을 마련하기도 했다고 한다. 철학과 과학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철학적 명제를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이 소설은 그가 진리를 추구해왔던 과정, 그리고 유소년기의 상처와 그를 좌절시킬 수밖에 없었던 환경들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것이라 생각된다.


 그의 저널들 현대 생활의 발견이란 책의 우아하게 사는 법, 발걸음의 이론, 현대의 자극제론은 발자크 <인간희극>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들이 있다. 나는 발걸음의 이론에서 루이 랑베르의 연구와 집착, 광기의 위험한 순간들을 엿보았다.

 

발자크는 인간의 겉모습을 뚫고 나오는 의지가 전기 물질로서 드러난다는 루이 랑베르의 이론을 인용하며, 이런 인간 정신사를 증명하는 이론이 다루어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또한 발걸음이 그의 직업, 정신, 심리 등을 드러내는 체계를 만드는 연구를 하겠다고 한다. 하루 종일 한 자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그의 집요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 발걸음에서 사람의 내면을 파악하는 작가로서의 탁월한 관찰력이 뛰어난 표현력으로 이루어진 작품을 만들어내는 능력임을 알게 된다.

 

나는 학자의 엄밀함과 바보의 미망(迷妄) 사이에 머무를 것이다. 나는 내 책을 읽으려는 사람에게 그 점을 충실하게 알려야 한다.(현대생활의 발견』「발걸음의 이론97p)”

 

여기서 바보는 구덩이를 보고도 빠지는 사람이고, ‘학자는 그 깊이와 거리를 측정한 뒤 계단을 만들어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서 만족하는 사람이라고 발자크는 말한다. 이 둘 사이에서 그 글을 쓰려면 두려움 없이 광기를 상대하고 겁 없이 과학을 상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 구덩이였을까?

 

그의 연구도 난관에 봉착하는 순간이 있다.

 

내 지식의 혼돈 상태를 두고, 내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그로부터 나는 단지 보잘것없는 콩트를 끌어냈을 뿐이고, 혼돈 상태는 거기에서 인체 생리학을 불러냈다. 나는 우리를 극단으로 내모는 법칙들을 연구하며, 신이 그 힘의 중심을 우리 마음속 어느 곳에 두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그 능력이 각 피조물의 환경에 부여한 현상들을 밝힐 수 있었다.(현대생활의 발견』「발걸음의 이론105~106p)”

 

루이 랑베르의 좌절이 보인다.

 

신의 목소리를 가장 잘 들었던 수학자가 천부적인 분석적 재능으로 주장하였듯이, 지중해 해안에서 쏜 총알 하나가 중국 해안에서도 감지되는 움직임을 일으켰다면만약 우리가 우리 박으로 큰 힘을 발산한다면 말이다.우리는 주위 환경의 조건을 변화시켰거나, 제자리를 찾고자 하는 활력의 효과를 통해, 우리를 둘러싼 생물과 무생물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현대생활의 발견』「발걸음의 이론106p)”

 

루이 랑베르의 자기 이론을 연상하게 한다.


18세기 말 메스머의 동물 자기론1830년대 프랑스에서는 신비주의가 유행했다. 루이 랑베르가 천착했던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은 프랑스어로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다시 빛을 보았다. 자기에 관한 이론이 가장 많이 언급된 소설은 루이 랑베르.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은 루이 랑베르가 천착하며 읽었던 것들이다.

 

당시의 지적 분위기로 보아 신비주의에 대한 믿음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발자크의 입장은 아주 특별한 것이 아니다라고 오노레 드 발자크의 저자 송기정 교수는 말한다.

 

당시 실증주의와 신비주의를 결합하려는 연구는 수없이 많았다. 스베덴보리도 메스머도 라바터도 과학자인 동시에 신비주의자였다. 인간과 땅과 우주의 통일성을 추구했던 발자크에게 과학과 신비주의의 결합만큼 유혹적인 것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과학에 몰두했지만, 과학자들보다 더 대담하게 우주와 인간과 과학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는 실증주의자였지만 신비주의적 실증주의자였던 것이다. 많은 작가가 그의 생각에 동참했다. 그러나 아무도 발자크처럼 시대의 신비주의와 과학의 관계를 묘사하지 않았다. 19세기 풍속연구가다운 그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느끼게 된다.(오노레 드 발자크154-169p)“

 

나는 모든 것을 배웠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나는 걸었다. 나와 같은 가슴, , 두개골을 가지지 못한 어떤 사람은 이러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다른 도리가 없어서 아마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발걸음의 이론111p)”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비서 역할을 하는 천재가 있다.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타키투스, 셰익스피어, 아레티노, 마키아벨리, 라블레, 베이컨, 몰리에르, 볼테르는 시대가 말해 주는 대로 펜을 들었다.(발걸음의 이론 117p)”

 

좌절의 순간에도 골상학과 신체과학으로 자신의 뛰어남을 피력하는 발자크!

그는 스스로를 자신의 시대의 비서 역할을 하는 천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주제를 연구하는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인간희극>에는 그가 문학인 이상(以上)의 정체성을 추구했음을 알려주는 철학·과학·역사·예술 분야의 방대한 지식이 담겨있다. 읽어갈수록 로댕의 <발자크>가 오버랩 된다. 좌절과 고단함, 지식으로 가득 찬 머리를 이고 가는 자만심 섞인 고뇌의 발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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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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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로 만난 키건의 문장은 간결함과 그 함축성 때문에 충격을 주었다. 읽어가면서 만나는 단서들은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게 하고, 지나쳐버린 조각을 찾아 퍼즐을 완성하게 했다. 그렇게 반복되는 되읽음으로 말들은 억양을 갖고 감정을 드러낸다. 단순하고 짧지만 한 문장도 허투루 읽을 수 없다. 그렇게 작가를 만났기에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는 작은 자취에서도 누군가의 비극을 읽어내는 남자의 시선을 놓치지않고 쫓으려 했다. 그리고 그의 심상에 일어나는 파문에 함께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단편집 푸른 들판을 걷다맡겨진 소녀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비하면 노골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작별 선물에서 모호함으로 가려져 있는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범죄다. 묵인이 있었고 입에 올리지 않는 그것,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집과 아일랜드를 떠나는 딸이 공항 라운지 화장실 칸막이에 안전하게 들어가문을 잠그고서야 울음을 터뜨리는 마지막 장면은 두 작품 맡겨진 아이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짐작한 가정 내 비극은 폭력, 학대, 성 착취 혹은 그 이상이었을 수도 있음이 드러난다. 또 다시 책장 펴 다시 읽게 된다. 고통의 현장은 가정이고 그 테두리 안에서 비극의 주인공들은 주로 여성과 아동일 수밖에 없다. 가정이기에 이 고통은 비밀이 된다. 이 비밀이 외부로 은밀히 알려지더라도 그들을 둘러싸는 것은 수군거림과 따돌림 혹은 방관이다. 그들은 생존에 대해 불안할 수밖에 없고, 실존은 없다. 그러기에 떠나는 것이다.

 

당신 문제 있어요.(푸른 들판을 걷다)” 중국인의 반복된 말에서 키건을 읽는다. 결혼식, 신부, 파티를 벗어나 사제는 자신의 죄의식, 욕망, 후회를 동반하는 산책을 한다. 들판을 걷다가 만난 중국인병을 치료한다고 소문난이 사제의 몸 여기저기를 만지는 치료 전후로 하는 이말! 영어가 미숙한 중국인의 반복된 이 말은 사제의 몸 뿐 아니라 영혼의 고통을 지시하는 것으로 사제가 받아들이고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그의 산책은 이어지고 들판의 풍경은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생각으로 그를 이끌어 간다. 글쎄, 사람은 모두 비슷한가? 그가 서원을 한 사제일지라도, 욕망에 몸을 맡겼던 격정을 잊지 못하고, 그 기억을 맴돌고, 사제로서 일상의 일들은 생각함으로 그의 죄의식을 덮는다.

 

키건이 그리는 세상은 범죄가 받아들여지는 곳이다. 가정이기도 하고 작은 시골마을이기도 하다. 선량한 사람들은 그것을 관습과 질서 속에 은폐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이다.

 

삼림 관리인의 딸마사와 디건 사이의 그들의 문제는 아이들이 툭 내뱉는 말들 속에서 드러난다. 아이들이 따라하는 질투해요?”, “누가 신경이나 쓴대요?”는 부모의 관계를 드러내는 일상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침묵의 뚜껑이 덮여있는 집에서 마사의 권태와 생각, 그리고 마사의 외도로 태어난 빅토리아에만 초점이 맞춰지던 부부의 문제는 불타는 집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그 근원이 드러난다. 부부의 내밀한 공간에서 행해지는 폭력과 그렇게밖에는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던 남자의 무지와 독선에 대해 확인하게 된다. 떠날 준비를 해 왔던 마사의 허탈한 마음조차 이해하지 못해서 불타는 집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이제 미안해?”라고 하는 디건의 원망은 빗나간 화살처럼 힘없이 땅에 떨어진다. 상대방의 마음에 무지하고 자신의 감정에만 몰두한 연인이나 부부의 말과 행위는 폭력적이다.

 

물가 가까이에서는 그런 폭력적인 말들이 등장한다. 새아버지의 말은 청년에게 상처를 주는 듯하다. 바다수영을 하다가 익사할 뻔한 경험은 새로운 가정에 대한 공포를 상징하는 듯하다. 강에서 수영을 잘했던 할머니가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를 몰라서바다에 들어가지 않았던 기억을 떠올린다. 떠나려고 항공사에 전화하던 그는 어머니를 보고 잠시 머뭇거린다.

 

어떤 이들에게 가정은 벗어나고 싶은, 그러나 한편 묶여 있을 수밖에 없는 곳이다. “가족이 병()”인 사람들은 가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끝없이 되묻는 존재가 될 것이다. 나는 예외일까? 유년기로부터 시작된 이 이중적인 욕망과 오래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았는가?

 

키건의 작품 곳곳에서 얼룩을 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멍이고, 깊게 베인 상처이고, 흉터다. 간결한 문장들 속에 담긴 서사는 그 상처와 흉터를 가진 사람들의 마음에 동요하게 만든다. 공항 화장실 칸막이 문을 닫아 걸고 참았던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유년기를 어둠속에 가뒀던 가족과 이별하는 소녀, 걷고 있는 푸른 들판 어딘가에서 신음하고 있는 자신의 분신을 보는 사제, 불타는 집을 바라보는 허망한 눈의 여자, 여전히 떠난 여인을 기다리며 그녀의 검은 말을 생각하는 침대 위에 움츠린 남자. 그들의 슬픔은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그것이 키건이 남겨 놓은 얼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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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10-10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송 기다리는 중입니다~저도 읽고 리뷰 쓸게요~

그레이스 2024-10-10 17:11   좋아요 0 | URL
리뷰 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