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 겐자부로의 별세 소식을 이제야 보고, 펼쳐든 이 책의 첫페이지에 ˝책을 쓴 작가는 죽습니다˝ ˝저도 그런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노작가 입니다˝라는 문장이 들어온다.

읽어야할 책이 쌓여있지만 오늘은 이 책이 읽고 싶다.








저의 책 《책이여, 안녕!>의 제목은 러시아의 소설가 나보코프가 발표한 대표작 《선물》에서 인용한 구절입니다. 책 속 주인공은 영원히 살지만(작중에서는 죽는다고 해도), 책을 쓴 작가는 죽습니다. 죽기 전 자기가 쓴 책에게 이별을 고하게 되지요.
저도 그런 시기가 코앞으로 다가온 노작가입니다. 게다가 저처럼독서가 인생의 절반을 차지하는 인간은 제가 읽어온 책에게도 마음을 다해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제 인생의 책‘이라 할 만한 이런저런 책들과 이별하는, 그러면서 가능하면 여러분께 그 책을 건네드리는 그런 의식을 치러보고자 합니다.  - P9

우리는 예술을 통해 시공을 초월하고 상실을 상대화하여 살아남고자 합니다(제 경우는 문학 혹은 소설을 통해서라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겠죠).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이미 지나간 것을 회복하기 어렵다는 그 괴롭고 무거운 의미에 대해서도 늘 인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노년에 이르러 소설을 구상하고, 젊은 동료로부터 악의가 뻔히들여다보이는 조롱을 받으면서, 그래도 초고를 써나가는 제 옆에는이미 상실하기 시작한 것들과, 과거가 되어가는 것들의 참으로 강렬한 찰나적 실재감이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떠난 동시대예술가, 사상가, 아울러 더 가까운 친구들, 그리고 거의 끝나가는 저의 시대를, ‘과거의 파토스‘로서 진중하고 깊이 있게 와 닿도록 하는것이기도 합니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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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3-28 01: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에 겐자부로는 어머니가 준 마크 트웨인 책 《허클베리핀》을 읽고 또 읽었다는 말이 여기에 있어요 아홉살에 그 책을 보고 자신이 어떻게 살지 생각하다니, 정말 그때 마음대로 살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에 겐자부로 책은 이 책 한권만 본 것 같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3-03-28 06:39   좋아요 1 | URL
우연히도 마크 트웨인 재독 중이었습니다.^^

서곡 2023-03-28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뇌의 이상을 갖고 태어난 큰아이...염려와 격려하는 마음을 안고 눈 감으셨겠지요. 명복을 빕니다.

그레이스 2023-03-28 09:51   좋아요 1 | URL
ㅠㅠ
작가가 남겨놓은 책을 읽는 것으로 추모를 대신합니다.

베터라이프 2023-04-06 18: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참혹한 역사에 대해서 아주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었던 분이 오에 겐자부로였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정상인이 별로 없는 일본 지성사회에서 저런 분이 다 있구나 싶었죠. 그나저나 그레이스님의 이 글을 보니 문득 구해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들어가보니 절판된 모양이네요 ㅜㅜ

그레이스 2023-04-06 18:34   좋아요 2 | URL

그렇더라구요.
가끔 중고 책방에 올라오긴 하던데요.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
마크 트웨인 지음, 린 살라모 외 엮음, 유슬기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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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어 보기의 장인, 해학과 풍자의 대가다. 유머작가로서 자부심도 느껴진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그의 미시시피 모험 소설들이 더욱 예사로 읽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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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3-04-06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은 책이네요. 품절ㅠ

그레이스 2023-04-06 13:54   좋아요 1 | URL
ㅎㅎ
품절이더라구요 ㅠ
 
톰 소여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3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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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피조물들에게 웃음을 주기 위해 진지하게 끄적거리는 일에 집중하기로 서약했다는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필명:마크 트웨인)은 인쇄공, 미시시피 강의 수로 안내인, 광부, 주식 투기꾼, 언론인 등의 직업을 거쳐 저널리스트이자 유머 작가로 명성을 얻는다. 그의 작품 안에는 그의 이런 이력이 인물과 사건의 소재로 등장한다. 사진 속 그의 모습에는 유쾌함과 당당함이 서려있다. 정작 그는자식을 둘이나 잃고 파산을 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순회강연으로 부채를 갚은 것을 보면, 청중의 사랑을 받는 뛰어난 입담의 소유자였음이 짐작된다. 입담 뿐 아니라 그에게서 후광처럼 비치는 유쾌함 때문에 환영을 받았을 것 같다.

 

다른 청소년 문학들과 마찬가지로 완역된 버전을 다시 읽게 되면, 어린 시절에는 놓치고 간 내용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건과 사건 사이에 작가가 말하는 메시지를 생략한 책들도 많고, 설사 완역된 책을 읽는다 하더라도 그 해학을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담장 페인트칠 사건자신이 벌로 받은 페인트칠하기를 놀이로 가장해서 친구들에게 댓가를 받고 미션을 클리어 하는은 톰의 뻔뻔하고 얄밉고 기발함 때문에, 아직도 톰소여의 모험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 이 장() 마지막 부분에 붙인 작가의 말은 가히 철학적이다.

 

톰은 이 세상이 그렇게 공허하지만은 않다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행동에 관한 중요한 법칙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즉 어른이건 아이건 어떤 물건을 갖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려면, 그 물건을 손에 넣기 어렵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점이다. 만약 그가 이 책의 저자처럼 현명하고 훌륭한 철학자였다면, 노동이란 무엇이든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고, 놀이란 무엇이든 의무적으로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런 이치를 알게 되면 조화를 만들거나 물레방아를 밟아 돌리는 일은 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도움이 되리라. 영국에는 여름철에 하루 일정으로 사두마차를 몰고 30킬로미터에서 50킬로미터나 되는 길을 다니는 부유한 신사들이 있다. 그런 특권을 얻기 위해 꽤 많은 돈이 드는 데도 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신사들이 그런 일을 하고 품삯을 받는다면 그 일은 노동이 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곧 그 일을 그만두게 될 것이다.(37p)”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톰은 노동을 뛰어넘는 놀이의 힘을 경험했다는 것인데, 작가의 이 첨언은 요한 하위징아의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를 떠올리게 한다. 생각의 흐름은 방드르디의 원시적 삶에까지 이른다.

 

인전 조라는 인물은 작품 중 긴장과 갈등을 가져다주는 인물이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과 백인 사이의 혼혈이다. 그는 악행을 일삼고, 살인을 저지른다. 톰과 헉은 그의 범죄현장을 목격함으로 사건에 휘말린다. 그로 인해 톰과 헉은 아이들이 할 수 없는 모험을 한다. 그런데 인전 조라는 인물이 단순한 악당으로만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몇몇 사람들에게 복수하려는 의도로 폭행을 하는데, 그 복수의 이유가 아주 상세하게 그의 말로 기술된다.

 

이걸 포기하고 이 마을에서 영원히 그냥 떠나가라고? 지금 포기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지 몰라. 전에도 말했고 지금 또다시 되풀이해 말하네만, 난 저 여자의 돈 따위는 관심 없어. 그건 자네가 가지라고. 저 여자의 남편이 나에게 몹시 못되게 굴었어.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치안 판사로 있으면서 걸핏하면 나를 부랑자로 몰아 유치장에 처넣었거든. 어디 그뿐인 줄 알아. 그건 새 발의 피야! 말채찍으로 나를 마구 갈기기도 했어! 감옥 앞마당에 세워 놓고 검둥이처럼 나를 말채찍으로 때렸단 말이야!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앞에서! 말채찍으로 때렸다고! 이제 알겠어? 그놈은 나한테 실컷 못되게 굴더니만 그만 뒈져 버렸어. 하지만 그놈의 여편네한테라도 분풀이를 해야겠단 말씀이야.(334p)”

 

그 마을에서 그가 어떤 대접을 받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알려 준다. 그를 단순한 악당으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이유를 부여하고 상세하게 설명하도록 하는 것에서 작가의 비판의식을 읽게 된다. 그 대륙에서 벌어진 폭력의 역사를 계승한 자들의 차별과 멸시와 착취를 고발한다. 그러기에 작가는 살인을 저지른 인전 조의 마지막을 비참하고 불쌍하게 그리고 있다.

 

문을 열어젖히자 어슴푸레하고 어두컴컴한 동굴 안의 처참한 광경이 드러났다. 인전 조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유로운 바깥세상의 빛과 자유를 그리워하는 눈빛으로 문틈에 바짝 얼굴을 갖다 대고 엎드린 채 죽어 있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이 가련한 인간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을지 짐작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톰을 가슴이 뭉클했다. 그 사람에 대해 동정심을 느끼면서도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377p)”

 

주인공 톰 외에 중심 되는 인물은 단연 허클베리 핀이다. 그들의 미시시피강 모험은 이 소설에서 중요한 이벤트다. 무인도에서의 며칠간 생활에서 보여준 톰의 기지와 함께 두드러지는 것은 헉의 자유로움일 것이다. 두 사람의 이러한 성격은 당시 성인들의 위선과 탐욕을 드러내는 효과를 거둔다. 허클베리 핀과 달리 조 하퍼와 톰 소여가 느끼던 죄책감이 어느새 사라지는 장면에서 그들이 받은 교육이 그러한 기초에서 이루어진 무너지기 쉬운 것임을 시사한다.

 

마침내 많은 주민들의 정신이 건강하지 못한 흥분에 짓눌려 비틀거렸다. 혹시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보물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세인트피터스버그와 인근 마을에 있는 모든 유령의 집을 찾아다니며 마루의 판자를 모두 뜯어내고 주춧돌마저 파헤치며 샅샅이 뒤졌다. 그것도 나이 어린 아이들도 아닌 어른들이 그랬던 것이다. 그 중에는 꽤 점잖고 현실적인 사람들도 끼어 있었다. 톰과 헉이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와서 그들을 칭찬하고 또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이들 기억으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자신들의 말이 그렇게 존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사람들은 그 말을 하나같이 존중하고 되풀이했다. 두 아이가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간에 모두 특별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두 아이는 평범한 말이나 일상적인 행동조차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과거 역사까지 들추어내서는 그것을 특별한 독창성의 표시로 추켜세우기도 했다. 마을 신문은 그 아이들의 삶에 대한 기사를 싣기도 했다.(400p)”

 

일상으로 돌아 온 두 소년은 어른들의 생각과 달리 다시 산적단을 만들고 비밀서약을 하며 앞으로 있게 될 모험을 예고한다. 어쩌면 이 서약은 오염되지 않으려는 맹세로 보이기도 한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앞으로 하게 될 모험의 주인공은 허클베리 핀이다.

 

작가의 비판이 예리하다. 이야기 사이사이 작가의 메시지를 교묘하게 숨겨놓는 재치와 필력 때문에 그것을 그냥 지나칠 정도로 매끄럽게 읽혀진다. 해학과 풍자가 한수 위라는 진리를 새삼 확인한다. 작가의 표현처럼, 웃음을 주기위해 진지하게 끄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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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03-25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책 학생때 읽어본거 같은데 기억은 전혀 안나네요 ㅋ 별 다섯개라니 단순 청소년 문학이 아닌가 봅니다~!

모험 시리즈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그레이스 2023-03-25 12:30   좋아요 1 | URL

단순한 청소년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당시 청소년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금서가 되기도 했다고 읽었습니다
 
짝 없는 여자와 도시 비비언 고닉 선집 2
비비언 고닉 지음, 박경선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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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마주쳤다. 한 아파트에 살고 있으면서도 2년 동안 안부를 몰랐다는 당황스러움을 감추려 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톤이 높아진다. “어떻게 지냈어요?”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가득한 그녀는 그냥 그렇죠.”라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우리는 아파트 주차장에 조금 더 머물며 좀 더 자세한 안부를 물었다. 당시 힘들었던 문제가 어느 정도는 해결된 듯하나, 누군가를 원망하던 마음이 냉랭하게 얼어붙어 있다. 이내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는 마지막 만남을 떠올리게 했다. 맞다. 그 기억 때문에 문득 생각이 나도, 먼저 연락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녀는 당시 자신의 문제를 말하면서 화를 내고 있었고, 그 분노가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님에도 나의 마음은 움츠러들고 뒷걸음질 쳤다. 콘크리트 벽처럼 냉랭해진 마음 앞에 절망감을 느끼면서, 조만간 만나 차라도 한 잔 하자며 헤어졌다. “심리적으로 조금이라도 불편한 건 절대 참아줄 수 없다는 이유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우연적 타자 취급을 받은 적도 역사상 없었다(25p)”는 작가의 말을 기억하면서.

 

사나운 애착에서 작가 비비언 고닉의 어머니는 타인의 문제에 개입하고 도움을 주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작가가 살던 브롱크스는 게토였다. 그들 스스로가 만든, 보이지 않는 높은 담장 안의 공동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이웃 부부의 성생활까지 알 정도로 울타리가 없는 삶을 살았다. 이웃의 가정사에조차 조정자로서 군림하는 어머니에게 작가는 경외심과 부끄러움, 분노 등이 뒤섞인 감정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작가에게서 타인들과 분리되지 않은 생활로 인한 애증과 환멸을 읽는다.

 

이제 그녀는 뉴욕 시내에서 살고 있다. 그곳에서 그녀는 낯선 이의 눈에 되비치는 자아를 찾아(13p)” 거리를 걷는다. 걷다가 브롱크스 시절의 사람들과 우연히 만난다. 그 만남은 그녀에게 과거의 기억들을 가져다준다. 자신의 존재를 관통하는 엄마의 애착은 여전히 그녀에게 어려운 주제다. 서로를 참을 수 없어 싸우고 생채기를 내며 엄마와 걸었던 길들을 홀로, 때로는 둘이서 걷는다. 친구와, 때로는 엄마와.

 

그녀는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엄마에게 청해 듣는다. “엄마 그 얘기 좀 해봐.”하고. 노인들의 반복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운 일은 아니다. 작가는 글의 소재를 생각하며 듣고 있을 것이다. “가끔 이렇게 한발 떨어져서 보는 순간에 우리 인생도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닐까?(사나운 애착93p)”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면, “영락없는 엄마의 딸이다. 사람들의 잘못을 똑 부러지게 지적해야 하고, 사랑의 성배를 찾았던, “엄마가 원판이면 그녀는 현상본(70p)”이었다.

 

어릴 적 기억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제조해낸 울분을 붙들고 있었던 어리석음을 깨우친 순간, 그녀는 이 나이를 먹고도 이렇게 아는 게 없어.(122p)”라고 엄마의 말을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렇게 그녀는 길을 걸으며 기억하고, 엄마인 자신과 화해하고, 엄마와 화해하는 길을 걷고 있다. 어린 시절의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미완의 과제임을 받아들이면서.

 

그녀가 갈수록 사회 변두리로 향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응어리진 쓰린 가슴을 달래기 위해 도시를 가로지르는 산책(20p)”은 습관이 되고, 자신과 타인을 읽는 응시가 되고, 글이 되었다. 그녀는 매일 집을 나설 때마다 더 조용하고 깨끗하고 널찍한 동쪽을 걷겠다고 다짐하지만, 어느새 번잡스럽고 지저분하고 어수선한 서쪽에 와있는(120)” 자신을 발견한다. 그곳에는 삶이라는 것에 주체가 있다는 느낌(120p)”이 든다. 군중의 물결 속에서 사람들의 표정과 행동을 보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 거리에는 폭언과 무례함, 폭력의 위험도 존재한다. 동네 약국 대기석은 낯선 남자를 큰소리로 웃게 하는 넉살 좋은 수다를 떠는 장소다. 한 겨울 꽁꽁 언 빙판 길은, 손을 내미는 작은 친절을 통해, “난감한 상황에선 누구나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할 권리가 있고, 그 광경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손을 내밀 의무가 있다는 평범한 인식(41p)”을 상기시키는 곳이다. 그렇게 거리에서 삶의 통찰이 이루어진다. 산책에서 돌아온 그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몸짓이 보이도록 생기를 불어 넣는다. 그들은 그녀의 동행, 근사한 동행이 된다. 그녀에겐 사랑과 우정으로 이어진 한 시절의 동행들, 친구와 애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는 사람들보다 함께 하느니 차라리 익명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밤을 선택한다. 홀로 외로움을 즐기며 글을 쓰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녀에겐 그녀를 아주 잘 아는 친구 레너드 한 사람과의 통화면 족하다.

 

이제 더 이상 블롱크스와 같은 장소는 그녀의 도시에도 나의 도시에도 없다. 도시는 변했고 과거의 장소는 사라졌다. 그곳으로 이어진 다리는 현재의 산책길처럼 걸어서 건널 수 없다. 개인의 삶에 밀고 들어오는 타인의 침범은 우리를 화들짝 놀라게 한다. “외로움은 우리에게 고통을 안겨 주지만 불가해하게도 우리는 그 외로움을 포기하길 망설인다.(105p)” 아마도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순간에 이르면 블롱크스와 같은 장소에 머물게 될지 모르겠다. 앨리스의 요양원처럼. 거기서 다른 종류의 외로움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암담하고 쓸쓸한 이야기인 듯하나, 많은 지인들이 앨리스를 찾아가서 말벗이 되어준 것을 그녀가 죽은 후에야 알게 된 것처럼, 생각보다 세상엔 사랑이 넘치고(89p)”, “다들 마음을 쓴다(90p)”.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보며 마음을 쓰는 것, 도시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생각이다.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이 일을 길 위에서 했다. 익명의 군중들과 동행하고 있는 그녀의 걷기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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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3-18 0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제가 아는 이 도시를 자주 산책해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말잘보내십시오 ~

그레이스 2023-03-18 09: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서곡님 잘 아시는 도시가 궁금하네요^^
주말 잘 보내세요~~

서곡 2023-03-18 09: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도시도 기회 닿는 대로 그리고 기회를 만들어 가 봐야겠습니다 ㅎㅎ 네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3-03-18 16: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역시 그레이스님!👍
다들 리뷰가 한 편의 에세이로 읽힙니다^^

그레이스 2023-03-18 23:11   좋아요 2 | URL
저도 이 리뷰 쓰고 다른 분들거 하나씩 읽고 있는데 다들 너무 잘 쓰셔서.. 전 명함도 못내밀겠어요ㅠ

책읽는나무 2023-03-18 17:11   좋아요 2 | URL
아니에요!
그레이스님의 글도 넘 좋습니다.
잘 쓰셨습니다^^
다들 잘 쓰시긴 했는데, 다들 막상막하라...누가 뽑힐지? 저도 기대가 큽니다.

제가 꼭 무슨 심사위원이 된 마냥~ 읽고 있네요?ㅋㅋㅋ
 

타국에서 발생한 재앙을 구경하는 것은 지난 1세기하고도 반세기 동안 언론인과 같다고 알려진 전문적인 직업여행자들이 촘촘히 쌓아올린 본질적으로 현대적인 경험이다.(수전 손택 타인의 고통39p)” 


밤의 여행자들을 읽다가 생각의 흐름은 수전 손택을 향하게 되었다. 재난을 당한 지역의 이미지를 이용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그 재난을 여행상품으로 만드는 스토리 때문이었다. 오래 전 읽었던 전쟁과 같은 재난을 당한 사람들의 고통의 이미지 앞에서 우리는 연민이 아닌 수치심을 느껴야한다는 수전 손택의 말이 기억났고, 다시 타인의 고통을 펼쳐 들었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을 이미지화 시켜 상업적 목적이나 이념이나 권력화 시키는 것에 대한 경계를 할 뿐 아니라, 그 이미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과 사유에 대해 쓰고 있다. 주로 전쟁과 관련된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지만, 다른 재난에도 해당되는 부분이 있다.


상업적 가치를 우선적으로 보는 현대의 이미지는 신경을 거슬리고 소란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 다양한 운명과 필연성이 모든 인간의 영혼을 어느 정도로까지나 종속시키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우연이 만들어 낸 심연에 의해 자신과 분리된 사람들을 이웃으로 여기거나 자신처럼 사랑할 수 없습니다.(시몬느 베이유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60p)” 


수전 손택에게서 소개 받은 책, 처음 몇 페이지를 읽다가 마주친 부분이다. 일리아스를 폭력과 힘이라는 방향에서 풀어낸 책이다.  어떤 책을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몇 줄 읽어보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 책 역시 그런 느낌을 주고 있다. 어느새 시몬느 베이유의 다른 작품을 검색하고 장바구니에 옮겨 담는다.

 

수전 손택은 버지니아 울프의 3기니타인의 고통을 시작하지만, 조금은 비판적이다. 익명의 희생자들의 사진은 그 사진을 보고 있는 우리와 그들 사이에 심연만 깊게 할 뿐이다.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은 그 심연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건들은 그 깊이와 거리를 없애고 재난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고 있다.


밤의 여행자들』의 주인공 요나는 여행사 정글의 직원이다. 벚꽃이 한창이었던 진해를 휩쓴 쓰나미와 봉사활동을 결합한 상품을 계획하는 그에게 재난은 상업적 이미지와 아이템이다. 다른 직원이 진행하고 있는 퇴출위기의 여행상품을 조사하고 보고하기 재난여행에 직접 참여한다. 그곳은 베트남의 한 섬, 무이에 있는 사막의 씽크홀 현장이다. 그곳이 운다족과 카누족은 사막에서 잔인한 전쟁 중이었고 그 참극은 곧 모래 구덩이 속으로 사라졌었다. 무이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을 위해 그곳의 주민들은 이 사건을 재현한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을 렌즈에 담았다. 사고로 이곳에 낙오된 요나는 이곳에서 이라는 기업의 음모를 알게 된다. 이 섬의 여행지로서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재난을 조작한다. 이 조작에 가담하는 요나는 실재로 사람들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폭로하는 것을 망설인다. 갑자기 들이닥친 쓰나미에 의해 그는 재난의 희생자여행 아이템이 된다쓰나미는 그와 저들 사이의 '심연'을 쓸어간다


무이 사람들에게 실제로 살육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 요나는 니느웨의 멸망을 경고하기를 거부한 성경의 '요나'를 소환한다. 트럭에 치인 사람을 무심히 치워버리는 장면을 그저 이상히 여기는 정도로 눈감아버리는 요나는 심장이 이미 식어버린 것일까?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재앙의 이미지를 상업적 목적의 광고로 활용했던 그 시간 동안 서서히 식어버렸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시기에 비해, 지금 그 뉴스를 보고 듣는 나의 마음 상태를 생각해보게 된다. 탈출하던 사람들과 기차역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의 영상들에 마음이 아팠고, 폭탄이 떨어지는 캄캄한 도시의 공포에 전율했었다. 지금은 뉴스에서도 그런 영상이나 이미지보다는 유럽과 미국, 러시아의 이해관계를 따지는 내용들을 주제로 한 기사들이 더 많이 보인다. 전쟁의 소식에 지쳐갈 때 쯤 뉴스의 화면들은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 영상으로 교체되었다. 우리는 영상들의 홍수 속에 살면서, 우리는 새로운 자극으로 이전의 비극을 잊는 것을 반복하면서, 마음이 굳어가는 것을 눈치채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태원참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가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당시 자신이 무심했던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가슴이 저릿했다. 울컥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한편 우리 사이에 있는 그 심연을 생각하며 마음은 끝없이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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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3-09 01: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재난 지역이 여행지가 되는 건 참... 그런 일이 소설속에서만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현실에서도 일어나겠군요 사람은 잘 잊어버리기도 하네요 여전히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자연재해로 많은 사람이 죽고... 자주 생각하지 않더라도 아주 잊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희선

그레이스 2023-03-09 13:23   좋아요 1 | URL
매번 반복되는 뉴스때문에 잊지는 못하지만 마음엔 굳은살이 박히는 듯요

페크pek0501 2023-03-10 14: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수전 손택의 책을 읽으며 새로운 세계에 진입하는 느낌이 들던 기억이 나네요.
어느 책에선가 사진에 관하여, 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는데 인상적으로 읽었어요.^^

그레이스 2023-03-10 14:37   좋아요 2 | URL

저도 사진에 관하여라는 책 좋아합니다.
렌즈를 통해 사유하는 작가라는 생각입니다.
제 생각에 이 책은 그 사진에 관하여를 바탕으로 더 발전시킨 책인듯 합니다

페넬로페 2023-03-10 16: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밤의 여행자들,
저도 넘 좋게 읽었어요
수잔 손택도 더 많이 읽고 싶은데~~
매번 이런 말만 하고 다녀요 ㅎㅎ

그레이스 2023-03-10 16:31   좋아요 2 | URL
^^
저두요~;;
시간있을때 미리미리 하라는 말 아이들한테 하지 말아야 할듯요.
ㅋㅋ

서니데이 2023-03-11 17: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밤의 여행자들, 출간되고 몇 년 된 것 같긴 했는데, 찾아보니까 2013년 작이니, 올해가 거의 10년이 되는 책이네요.
그 때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읽으면 또 다른 점이 있을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조금 더 잘 보이는 것도 있으니까요.
잘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따뜻한 주말입니다. 좋은 오후 시간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3-03-11 17:05   좋아요 3 | URL
예~
감사합니다 .
이제야 빛을 보는건가요, 아님 제가 이제야 읽는걸까요?^^
서니데이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