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비극을 처음 읽었을 때는 서사를 놓치게 되는 순간이 많았었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한권 전체를 읽는데 주석(註釋)이라는 돌부리들을 만나 흐름이 깨지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다. 재독(再讀)의 즐거움 중 하나는 처음과 달리 제법 막힘없다는 것이다. 두 독서 사이에 지식을 쌓은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리라. 그럼에도 확인해야 하는 사실들이 있다. 처음 읽을 때보다 오히려 참고할 책들이 많아지기도 한다. 서사는 알고 있으니 처음 겉핥기로 지나쳤던 지식을 더 찾아보는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무엇을 더 읽어야할지 잘 보이기 때문이다.
아폴로도로스의 『비블리오테케 BIBLIOTHEKE』를 번역한 이 책은 토마스 불핀치나 에디스 해밀턴, 그리고 국내작가가 쓴 『그리스 로마신화』와 달리 간결하여 곁에 두고 사전처럼 읽기에 편한 책이다. 호메로스나 기원전 5세기경에 활동했던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와 같은 작가들도 자신의 작품에서 신화나 영웅의 이야기를 각색하고 재구성했다. 이렇게 ‘신화’책들은 구전되거나 극적효과를 위해 재구성된 것들을 기록하다보면 내용이 많아지고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공존하게 된다. 아폴로도로스는 기원전 2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던 아테나이 출신 대학자이다. 이전 기록들을 참고하여 백과사전 형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그래서 제목도 ‘비블리오테케 BIBLIOTHEKE’다. 고대 도시 국가의 탄생과 그 왕들의 계보와 함께 그들과 관련된 신화에 관한 정보를 주고 있다.
그리스 비극을 읽기에 좋은 참고서다. 예를 들자면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의 배경이 되는 고대 테바이의 신화와 역사를 시간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특히 라이오스와 아들 오이디푸스로 이어지는 테바이의 왕위계승자들과 찬탈자들, 테바이 전쟁에 관한 기록은 두 세 페이지 안에 비극의 핵심 내용이 담겨있다. 한 줄의 문장을 비극으로 탄생시킨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한다. 아니, 복잡하고 극적인 사건을 신문기사처럼 간결하고 정확한 정보로 전달하는 아폴로도로스와 같은 기록자에게 감사하게 된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시간적으로 「오이디푸스왕」과 「안티고네」 사이에 위치하지만 소포클레스의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가장 늦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오이디푸스 왕이 분노와 죄책감으로 스스로 눈을 멀게 한 이후 시간이 흐른 후의 이야기다. 격정이 지나가고 절망했던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달라져있다. 콜로노스에 도착한 그는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나는 법 앞에 결백하며 영문도 모르고 그리 했던 것이오.(549행)”라고 말합니다. 진실을 알게 되었던 때, 죽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으나 세월이 흘러 고통이 가라앉고, “홧김에 지난날의 과오를 너무 지나치게 벌주었다고 느끼기 시작했을, 그때서야 비로소 도시가 나를 억지로 나라에서 내쫓으려 했다.(437~440행)”라고 회상합니다. 콜로노스에 도착한 그는 아테나이 시민과 테세우스에 의해 환대를 받는다. 그는 예언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과거 눈이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비웃고 의심했던 오이디푸스는 테이레시아스의 위치에 서게 된다. 눈이 있으나 볼 수 없었던 것을 눈을 잃고 시간이 흐른 후 보게 되는 역설이다.
그를 쫓아온 크레온은, 아리스토파네스가 그의 희극에서 비판했던, 정치적이고 외교적 수사에 강한 인물이다. 그는 부드러운 언변과 태도로 감춘 욕망을 이루어내는 노회한 사람이다. 오이디푸스에게 행한 일들이 정의롭지 않음이 드러나도, 여전히 능란한 말로 변론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정치적인 인간도 안티고네라는 복병을 만나 악수를 두고 후회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 교훈적이다.
자신을 찾아온 폴뤼케이네스를 만나지 않으려하는 오이디푸스의 노여움에서 세월이 흐르고 깨달음이 있다 해도 여전히 성품이 변하기는 쉽지 않음을 보게 된다. 안티고네의 설득으로 내키지 않지만 아들을 만나기로 한 오이디푸스가 퇴장하고 코러스가 부르는 노래는 슬프다.
“경박하고 어리석은 청춘이 지나고 나면
누가 고생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누가 노고(勞苦)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이오?
시기, 파쟁, 불화, 전투와 살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비난받는 노년이
그의 몫으로 덧붙여지지요.
힘없고, 비사교적이고, 친구 없고, 불행 중의
불행들이 빠짐없이 모두 동거하는 노년이.”
(1229~1238행)
힘없고, 불행한 상황은 불가피하다해도, 비사교적이고, 친구 없는, 비난받는 노년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를 생각해보게 한다.
주인공이 하데스를 향하는 장면은 호머의 『오디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단테의 『신곡』의 장면과 오버랩 된다. 또한 노년의 주인공이 욕망, 수치심, 분노 등을 내려놓고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템페스트』에서도 보게 된다. 오이디푸스의 죽음은 그의 비극적인 삶에 대한 보상처럼 보인다. 아폴로도로스는 비블리오테케에서 “앗티케의 콜로노스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탄원자로 앉아 테세우스의 환대를 받았으나 곧 죽었다.(『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211p)”라고 짧게 말하고 있으나, 소포클레스는 믿음과 상상력을 통해 재현한다. 고대인들에게 죽음은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이 땅에서의 삶과는 영원히 이별하는 것이므로, 죽음을 앞둔 인간은, 모든 정념(情念)이 사라지고, 안식을 맞이한다. 인간에게 죽음은 실존이며 영원한 숙제이고 철학적 주제일 수밖에 없다. 문학의 주제로 반복 재현되는 이유일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죽고 안티고네는 테바이로 돌아간다. 크레온은 테바이를 위험에 빠뜨렸던 폴뤼케이네스의 시체를 장사지내지 말라고 명령을 내린다.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이 벌였던 왕권다툼과 추방된 폴뤼케이네스가 아르고스의 군대를 이끌고 조국 테바이를 쳤던 ‘테바이 전쟁’이라는 역사가 배경이다. 그러므로 크레온의 명령은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안티고네』는 안티고네가 이 명령을 어기고 오빠의 시체 위에 흙을 덮으러 나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명령을 어긴 안티고네를 체포해서 무덤에 가두는 크레온 앞에 다시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등장한다. 소년을 의지해서 등장한 그는 ‘올바른 숙고(생각)’이 가장 값진 재산이라고 말합니다. 그 올바른 숙고의 결과는 ‘양보’, 자기 의지를 바탕을 한 완고함을 거두고 유연해짐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올바른 길은 하나밖에 없음을 주장(796, 685행)하는 크레온에게 하이몬이 한 충고(710, 723, 712-14, 715-17행)와 맥락을 같이 한다. 하이몬과 테이레시아스 모두 배움과 양보, 그리고 실천적 지혜와 유연한 융통성을 강조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세계에 대해 완고하기보다는 유연하게 반응하면 세계가 품은 가치의 풍부함을 인식하는 길을 여는 한편, 충분한 만큼의 안전과 안정으로 향하는 길도 함께 열 수 있다.(『연약한 선』 208p)” 고 말한다. 그가 말한 것처럼 크레온이 주장한 에토스의 단일성은 어리석고 추악하고 빈곤하다.
강태경 교수는 크레온은 페리클레스를 가리키고 있다고 한다. 당시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 아테네는 패권주의를 추구했습니다. 기원전 5세기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동맹국인 밀레토스(Miletus)와 사모아(Samoa)의 분쟁에 개입하여 사모아와 전쟁을 벌인다. 분쟁국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전사자가 속출하자 가정장례를 국가 장례절차로 치르게 한다. 사모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한 후 페리클레스는 전몰자를 위한 장례의식에서 연설을 한다. 애도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연설을 했다. 페리클레스의 통치적 의도를 엿보게 된다.
“이 작품이 디오니소스 연극축제에서 처음 상연되었을 때 아테네인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그 공로로 극작가를 사모아의 총독으로 추대했다. 이 작품은 첫 상연 이후 32년에 걸쳐 연속적으로 연극축제에 출품되었다.(『고전문헌목록』 J. 랑프리에르)”
이 작품에 페리클레스를 비판하는 의도가 있었다면, 작가인 소포클레스가 사모아의 총독으로 추대됐다는 사실 또한 아이러니하다.
지금까지 “『안티고네』에 대한 거의 모든 해석들은 헤겔의 논의의 변주와 반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헤겔의 영향력은 절대적(『안티고네』39p)”이라고 한다. 그는 비극이란 동등한 두 권리 내지는 윤리적 요청의 충돌이며 『안티고네』는 그러한 충돌의 역학과 그것이 종합적으로 해결되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개괄적 이해를 제시한다. “상대적으로 동등한, 궁극적으로 일면적인”이 두 윤리적 행위는 각자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상호배제적이라는 점에서 “참된 정의”, 곧 보다 높은 윤리적 차원을 획득하지 못하고 상호 파멸에 이른다는 것이 헤겔의 설명이다.
『안티고네』는 시대와 함께 재해석되어 왔다. 18~19세기 계몽주의 시대, 『안티고네』는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의 이미지로 열광 받았다. 양극화와 극단적 진영논리가 팽배한 현대 상황에서 마사 누스바움의 해석이 적용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다.
“완전히 수동적인 희생자는 다른 사람을 돕는 행위를 할 수 없고 크레온과 같은 행위자는 타자를 보지 못한다. ‘운명의 칼날’에 서려면 반드시 이런 식으로 질서와 무질서, 통제와 연약성 사이에서 극도로 섬세하게 균형을 잡아야 한다.(『연약한 선』 20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