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 현대 일러스트 미술의 선구자 무하의 삶과 예술
장우진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향에 돌아온 무하는 아버지가 일하는 법원의 서기로 취직하지만… 사건의 명부는 그가 그린 낙서나 장식 무늬, 공소인들의 초상화로 그 가장자리가 메워졌다.” 34p

카프카… 그리고 많은 예술가들의 그림자를 본다.

미술사 공부를 하면서 생소한 예술가들과 작품들이 낯설고 헷갈리는 상황을 자주 겪는다. 그런 중에도 잊혀지지 않는 작가들과 작품들을 만날 때가 있다. 무하와 그의 작품도 그 중 하나이다. 알폰스 마리아 무하. 아르누보 화가. 그의 그림을 만난 첫인상은 ‘예쁘다. 예쁜 일러스트 같은데?’ 였다. 다시 자세히 본 그림들에서는 여인의 눈빛과 포즈, 그리고 배경으로 장식된 이미지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읽게 되었다. 그 이미지들은 계속해서 기억을 붙잡는다.

처음 무하를 알고, 그가 모라비아 태생이라는 것 때문에 끌렸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그 사이를 흐르는 블바타 강, 얀 후스, 30년 전쟁, 합스부르크의 통치, 슬라브인들의 애환의 역사… 아마도 이런 끌림은 내 피에 흐르는 우리 역사 때문인가 싶다.

1860년 체코 모라비아 이반치체에서 태어난 무하의 시대는 아직 합스부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절이었다. 모라비아 왕국시절을 기억하는 그 곳은 애국적인 도시였다고 한다. 이곳을 떠나 빈, 뮌헨, 파리, 뉴욕에서 30년 동안 활동하던 무하는 말년에 이곳으로 돌아와 <슬라브 서사시The Slave Epic>를 탄생시킨다. 예술가의 작품 세계의 원형은 고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물 한 살의 무하는 빈에서 극장을 장식하는 화가로 첫발을 내딛는다. 화가 한스 마카르트를 만나 그의 작품에서 많은 인상을 받는다. 당시 많은 재능 있는 작가들이 그렇듯이 그 재능을 알아보는 후원자를 만나고, 그는 뮌헨을 거쳐 파리로 향한다. 그가 만난 벨 에포크의 파리는 신고전주의, 사실주의, 상징주의, 낭만주의,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공존하고 있는 곳이었다. 여기서 그는 예술적 시야를 넓히고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후원이 끊어지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신문 일러스트를 그리면서, 그의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재능이 꽃피기 시작한다. 아마도 아르누보 화가로서의 첫 발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 아닐까 한다.

파리에서 만난 샤를로트 부인의 카페 ‘크레므리’는 ‘탕귀영감’이나 ‘바토 라부아’의 가게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많은 예술가들에게 만남과 인연을 제공해주는 곳. 1890년 이 곳에서 고갱을 만난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장소와 시대에 사는가는 예술가들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동시대(1980년 4년후, 동학혁명과 갑오개혁이 있었다), 조선에서 살았던 예술가들의 삶까지 거슬러 올라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이어진다.

무하가 여배우 사라 베르나르의 포스터를 그리게 된 것은 그의 인생에 있어 아주 극적인 장면이다. 1895년 사라 베르나르를 그린 무하의 포스터는 파리 전역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녀는 무하의 그림을 통해 아르누보 여인의 전형이 된다. 무하는 이 그림들로 쏟아져 들어오는 의뢰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유명해진다. 그의 광고 포스터는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사람들의 욕망을 꿰뚫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영역은 장식 예술, 보석세공, 잡지, 책의 삽화, 조각에까지 넓혀진다. 1900년 파리 박람회에서 거둔 큰 성공은 아르누보 장식예술가로서 알려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장식예술가로서 규정되는 정체성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고민은 거기에 만족할 수 없게 한다.
그는 뉴욕으로 떠나 그 곳에서 유화 붓을 잡지만 오랫동안 놓았던 작업이라 만족스러운 성과를 얻지 못한다. 그곳에서 찰스R 크레인을 만나고 슬라브인들을 위한 작업을 계획하고 있는 무하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할 것을 약속받는다. 크레인의 딸을 모델로 그린 <슬라비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지폐에 사용되기도 한다.

고향에서 20년 동안 6x8미터의 거대한 캔버스에 템페라로 <슬라브 서사시>를 제작했다. 고령의 나이에 이 제작과정은 엄청난 고역이었다고 한다. 그가 그린 20개의 에피소드는 그동안 파리에서 보여주었던 작품들하고는 느낌도 메시지도 다르다. 범슬라브인들을 위한 작업. 5개의 알레고리적 테마와 5개의 종교적 테마, 5개의 전쟁 장면과 슬라브 문화에 관한 5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책에 수록된 몇 편의 <슬라브 서사시>를 보면 슬라브인들의 삶을 직관적으로 알게 된다.. 예술의 놀라운 힘이라고 할 수 밖에…….

톨스토이의 작품들에 아우스터리츠 전투나 슬라브 민족 독립전쟁이 나온다. 멀리서 들려오는 전쟁 소식과 러시아의 참전에 관한 논쟁, 그 전쟁에 참전한 인물의 인식의 변화만을 읽었을 뿐이었다. 그 곳에 살았던 민족의 오래된 역사와 전통, 30년 전쟁 이래로 아니 그 이전부터 전쟁터의 한복판에 살았던 사람들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었다. 그의 작품은 20개의 에피소드를 통해 그 이야기를 전달하고 있다. 그것은 피 속에 역사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무하처럼.

일러스트 미술의 선구자, ‘무하 스타일’을 만들어낸 작품만 수록되어 있었다면 알고 있었던 화가를 좀 더 자세히 아는 것에 불과 했을 것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현대의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화가, 당대의 선구적인 길을 걸었던 화가로서도 그 이름과 잊을 수 없는 환상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슬라브 서사시>를 통해 그의 영혼 안에 새겨져있는 블바타 강과 모라비아를 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슬라브인들의 역사를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또 하나의 과제를 갖게 되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1-02-20 17: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https://m.blog.naver.com/randomhouse1/222249152686
RHK에서 알폰스 무하 그림 핸드폰 배경화면을 제공하네요 다운 받아서 깔았어요~~^^

새파랑 2021-02-20 17: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책 구매하면 주는 북마크도 좋아 보이더라구요. (북마크 때문이라도 읽어야 할 듯)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 가랑비메이커 단상집 1
가랑비메이커 지음 / 문장과장면들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립출판 책이다. 독립출판 5년간 베스트셀러, 스태디셀러라는 말에 주저 없이 구입했다.

노래가사처럼 쉽게 읽히는 시(詩)들이었다. 읽다보면 그렇게 쉽게 쓰여 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는 명료한 말들 앞에서 더 자주 복잡해지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쓸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쓰고야 마는 사람이라고... 그녀가 한 줄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덜어내고 수많은 생각의 층위들을 벗겨내야 했는지를 알려주는 독백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가다가 눈이 머문 詩들.

끝이라는 것이 단번에 쿵, 하고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한다. 뒤돌아볼 미련도 없을 줄 알았다고….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이라는 이름으로 끝을 잡고 늘어졌다고, 결국 끝이 아닌 끄으으으읕만이 남겨졌다는 표현에 나는 슬며시 웃음 지었다.
그렇지! ‘이제부터 끝이야‘ 하고 뒤돌아선다고, 한 번에 끝나는 게 아니지. 한 번에 매듭을 지을 수는 없지. 수많은 밤을 뒤척이고 낯익은 거리를 서성거리면서 매듭을 짓다가 풀고 할 것이다.
어떻게 사람사이가 한 번에 끝나? 헤어지고 나서도 혼자 오랜 시간이별을 할 것이다.
「마지막의 마지막」 이건, 이별한 당신을 위해!


자신을 둘러싼 이들로부터 거부당한다 해도 그것이 온 세상으로부터 내팽개쳐진 것은 아니란다. 나와 나를 둘러싼 이들은 한 점에 불과하니까. 숨을 고르고 뒤돌아보면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에게 집중하면서 타인과 나 사이에 발견한 사막을 당당히 외치며 나아가라고 한다.
「관계라는 사막에서」 이건, ‘나 지금 혼자야?’ 라고 생각하는 당신을 위해!


바쁘게 살다가 허기보다는 속이 더부룩한 것이 더 괴롭다는 것을 아는 때가 있다. 출발점에서 멀어진다고 목적지와 가까워지는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가야 한다. 젊음의 때에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방향을 잃은 채 내달리는 것에 중독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돌아가는 길」 이건, ‘나 제대로 가고 있어?’ 라고 묻고 있는 당신을 위해!


누군가 자꾸만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하루를 밟아보라고 한다. 그 하루에 어떤 표정들이 들어차 있는지. 한숨은 몇 번이나 내쉬고, 푹 파묻은 고개는 몇 번이나 흔드는지. 그 하루를 밟고도 그를 미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미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이건 미워지는 사람이 있어 괴로운 당신을 위해!



전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나는 시(詩)들 이다.

그늘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헤아리고 마음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개인의 연애사나 청춘의 아픔을 담은 것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헤아린다. 등을 쓸어주고 함께 가자고 한다.

양손 가득 쥐고 달려온 사람들은 모르는 가을이 있다고 한다. 빈 손으로 터덜터덜 걸어온 이들에게는.(「가을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러나 그 연약한 사람들끼리 힘이 되어주기 위해 그들의 고단한 삶을 헤아려 보라고 그리고 꼭 안아주라고 이야기한다.


나의 가난이 당신의 부유를 노려 볼 이유는 없다고... 우리는 그저 각자의 식사를 할 뿐이라고……. 반대로 당신의 부유에 내 가난을 조롱할 자격도 역시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접속사가 붙여지며 시원한 감정의 폭로가 뒤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벅차오르는 착각이 확신처럼 번져, 서로의 머리채를 잡고 싶어질 때면 조용히 접시를 들고 일어서면 된다. 내 몫의 식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곳을 향하여.’(「각자의 식사」)
명쾌하기도 하고, 마치 내가 한 말이 아닌데 시원하게 한판승을 거둔 것 같다. 저들이 달리고 있는 경주로 밖으로 탈주하는 기분! 이건, 나를 위하여!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은 진심이 담긴 시들로 작은 책을 채웠다. 그냥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앓고 난 뒤 그 병세를 알려주는 선배 같다고 해야 하나? 의사는 절대 알려주지 않는 세세한 것들을. 마음을 앓은 흔적들이 있다. 감정에 침몰당하지 않고 담담하게, 연약하지만 심지 있게 위로를 전하고 있다.


우리가 놓칠지 모를 것들에 대하여,
나는 놓쳤지만 당신은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놓쳐도 돼. 어쩌면 우리는 많은 것을 놓칠거야. 그게 우리야. 라고 말하는 듯하다.
지나온 시간에 나를 구겨놓고 사라질 것들을 찾아 헤매지 말라고…….

시들을 읽으며 ‘그래, 그래’ 하고 마음이 말했다.


“허름한 삶을 입은 것 같아도 대화를 나눌 때면
얼마나 근사한 태도와 건강한 미소를 지녔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장래희망」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 전에는 「해방 전후사」에 관심을 두고 이 책을 읽었다. 작가의 개인사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더 눈길이 갔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혼란, 전쟁을 경험했던 이들의 삶과 의식에 더 무게를 두며 읽었다. 분단선, 개성, 서울의 현저동, 사직동, 서대문형무소 등 역사가 훑고 지나간 아픔의 공간들을 찾아보며, 그 시대를 살았던 보통 사람들의 역사의식에 더 집중했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장면에 눈이 머물고, 다른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을 경험했다. 물론 동일한 곳에서 동일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지만……. 전혀 다른 책을 읽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오래 전 이 책을 읽던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건들이 나를 훑고 지나가며 흔적을 만들고, 그 흔적들은 마음의 무늬가 되었다. 타인의 마음에 공명하는 무늬!
독서(어슐러 르귄의 표현을 빌자면, 귀 기울이기)와 시간에 의해 짜여진…….

다시 지도를 펴놓고 내가 찾아본 것은 박적골에서 개성역까지 걸었던 길, 서울역에 도착해서 지게꾼에게 짐을 지게하고 현저동까지 걸었던 길, 현저동에서 매동 초등학교까지 가려면 넘어가야할 산, 숙명고보 가는 길, 그녀가 놀았다던 서대문형무소 앞마당, 피난을 가려면 어디로 해서 한강을 건너야 했을지……. 지도를 찾아봤다기보다 상상을 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 더 마음이 갔다.

유년기의 기다림과 서러움, 환희와 비애를 보며 원시적 감정들을 경험했다.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려보며 가슴 저 밑바닥에서 묵직하게 감정들이 올라왔다. 어느날 유난히 새빨간 노을에 비친 마을 풍경이 낯설게 느껴지고, 엄마 등에 업혀 있던 다섯 살 아이는 울음을 터뜨린다. 홀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노을의 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너울대는 수수이삭을 바라보며 그녀는 설명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런 감정의 체험들이 그녀의 앞날을 예견하는 것이지 않을까? 작가로서의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사건들이다.

그녀가 느꼈다는 환희야 말로 나를 전율하게 했다. 그녀가 자란 넓은 들판이 있는 자연이 아니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축복이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실개천이 합쳐져서 냇물이 된 동구 밖까지 원정을 나갈 때도 있었다. 그럴 때 만나는 소나기는 실로 장관이었다. 서울 아이들은 소나기가 하늘에서 오는 줄 알겠지만 우리는 저만치 앞벌에서 소나기가 군대처럼 쳐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노는 곳은 햇빛이 쨍쨍하건만 앞벌에 짙은 그림자가 짐과 동시에 소나기의 장막이 우리를 향해 쳐들어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기성을 지르며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장막이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자꾸나 뛴다.
불안인지 환희인지 모를 것으로 터질 듯한 마음을 부채질하듯이 벌판의 모든 곡식과 푸성귀와 풀들도 축 늘어졌던 잠에서 깨어나 일제히 웅성대며 소요를 일으킨다. 그러나 소나기의 장막은 언제나 우리가 마을 추녀 끝에 몸을 가리기 전에 우리를 덮치고 만다. 채찍처럼 세차고 폭포수처럼 시원한 빗줄기가 복더위와 달음박질로 불화로처럼 단 몸뚱이를 사정없이 후려치면 우리는 드디어 폭발하고 만다.
아아, 그건 실로 폭발적인 환희였다.」
32p

어릴 적 학교 운동장에서 만난 소나기를 기억했다. 군대처럼 쳐들어온다는 표현은 어린 시절 운동장에서 경험한 소나기의 장막을 떠올리게 했다.

서울로 온 그녀는 산을 넘어 학교를 다녔다. 서울의 산에서 싱아를 찾으며 박적골 뒷동산에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이러한 혼동은 아카시아의 비린 맛이 일으킨 헛구역질 때문이 아니라, 몸에 사무치는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 방학 때마다의 귀향은 싱그러운 들판의 생명을 마음껏 호흡하는 시간이다.
그를 제일 반겨주고 아껴주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그녀에게 또 다른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사랑마루에 서까래로부터 늘어져있는 삼 줄을 남몰래 어루만지며 심장의 균열이 가는 아픔은 내게도 전달되었다. 그 줄을 붙들고 떨리는 다리로 댓돌을 디디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있는 것처럼 …….

한편 더 배웠다고 자부하고, 양반이라는 것을 내세우던 할아버지가 오빠의 총독부 취직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던 것, 큰 아버지를 면서기 시키기 위해 역사책에도 기록될 만한 친일 족적을 남긴 먼 친척에게 청탁을 하는 모습을 기억하며 당시 집안의 근지라는 것이 역사의식을 상실한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어머님에게서도 부조리함을 경험한다. 탁월한 감수성과 예민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가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해방 후 대학 첫해를 좌우로 갈라져 싸우는 혼란 속에서 맞이한다. 6.25가 터지고 좌익 활동을 전력이 있던 오빠는 의용군이 되어 북으로 간다. 서울이 수복되고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혀 어려움을 겪는다. 서울이 다시 함락될 위기를 맞이하며 피난을 떠나야 하는 그때 오빠가 돌아오고, 부상을 입은 오빠와 함께 가족은 서울에 남게 된다. 모두가 떠나고 텅 빈 골목에서 갑작스런 사고의 전환을 경험한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311p

그래서 그녀의 책은 전쟁과 분단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리라. 막다른 골목에서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의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의 전복, 사고의 전환을 경험한 후, 그녀는 자신이 살고 있던 세계의 문턱을 넘어 새로운 인식의 첫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일제강점시대 말과 전쟁, 분단의 시대에 대해 공부하고 새롭게 인식 했을 것이고, 그 인식의 창을 통해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글로 증언했을 것이다.

박완서 작품을 많이 가지고 있다. 작가가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하고 있다는 생각에 몇 권 읽은 후 전작 읽기를 중단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많은 것을 놓쳤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책장에 꽂힌 작품들을 뒤적이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읽는 모임에서 책을 정하고 보니 ‘박완서 타계 10주기’라는 이름으로 개정판이나 특별판 홍보가 인터넷 서점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오늘,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 백기완 선생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이제 그 세대는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박완서 작가가 이 소설의 말미에서 ‘증언할 책무가 있다’고 깨달은 것처럼,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시대에 고해야만 했던 증언자들이 있다. 그들이 한 사람씩 일을 마치고 있다.
2021년 2월 15일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막시무스 2021-02-16 18: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ㅠ 엄중했던 한 시대를 견뎌냈던 증언자들이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증언의 촛불을 꺼가니 마음이 무거워지네요!ㅠ 따듯한 저녁시간되십시요!

겨울호랑이 2021-02-16 19: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돌이켜보면 지난 2009년에도 시대의 큰 어른들이 많이 우리 곁을 떠나셨는데, 그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요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듯 합니다. 2009년과는 다른 변화이길 바라봅니다 ^^:)

바람돌이 2021-02-17 01: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백기완선생님이 타계하신 소식을 들으면서 마음이 먹먹했습니다. 제게는 백기완 선생님이 제 청춘의 상징같은 분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코로나때문에 그리고 이 도시에는 분향소가 없어 마음으로만 그분을 추모하면서 젊은 시절 보았던 그분의 여러 모습이 떠오르네요. 박완서 작가님의 책도 좀 더 읽어봐야지라는 생각이 이 페이퍼를 보면서 또 들기도 하네요.

JK 2021-02-17 16: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친구 신청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이 책에서 느낀 바가 적지 않았는데 쓰신 글을 보니 정말 많은 생각을 하며 읽으신 것 같네요. 후속작에 해당하는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를 언젠가는 읽겠다 생각만 하고 한참 시간이 지났는데 그레이스님의 글을 계기로 삼아 올해 안에는 읽어봐야겠습니다.

그레이스 2021-02-17 16:34   좋아요 2 | URL
후기 기대할께요
함께 읽는 분들이 계셔서 정말 기분 좋은 곳이예요~

고양이라디오 2021-02-22 17: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친구추천하고 갑니다^^ 후속작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어서 읽고 싶네요.

그레이스 2021-02-22 17:38   좋아요 2 | URL
글로 후기 나누죠~^^
감사합니다~

scott 2021-03-05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이달의 당선 추카!
그레이스님의 다음편 박완서 작가님의 작품 기대합니다. ^.^

그레이스 2021-03-05 15: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 아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타당해 보이는 선을 따라가는 삶을 상상하며 살았으면서도어느 정도 자유를 허용하는 다른 사람들을 찾아내어, 그 사람들의말에 귀 기울이는겁니다. 수동적으로 듣는 게 아니라, 귀를 기울여야 해요.
귀를 기울인다는 건 공간과 시간과 침묵이 필요한 공동체행위지요.
읽기는 귀 기울이기의 한 방법이고요.
읽기는 그냥 듣기나 보기처럼 수동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행동이죠. 여러분이 하는 행동, 끊이지도 않고 알아들을 수도 없이 지껄이고 외쳐 대는 매체의 돌격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여러분의 속도대로 읽는 겁니다. 여러분을 압도하고 통제하기 위해 빠르고 거세고 큰 소리로 밀어붙이는 내용이 아니라, 여러분이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이고 싶은 내용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야기를 읽으면서 여러분이 어떤 당부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강매를 당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읽을 때는 보통 혼자라 해도 다른누군가의 정신과 교감하지요. 세뇌를 당하거나, 조작당하거나, 이용당하는 게 아니에요. 상상력의 현장에 함께한 거죠. - P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인간, 동물, 식물, 밤, 땅거미, 고원, 증세, 분노, 두려움, 이론, 도구, 형벌 등 두꺼운 글씨로 쓰여진 이 단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작가가 만일 생명에 방점을 찍고 있다면 살인은 그 메시지의 힘을 잃게 할 것이다. 탐욕적이고 파괴적이며 너무 많은 생명을 죽인 자들이지만, 그들의 죽음이 당연시 여겨진다면 이 소설의 은유와 시적 언어들은 빛을 잃을 것이다. 반면, 두셰이코의 소외와 분노, 이상심리에서 메시지를 찾으려 한다면, 그 많은 분량을 할애한 생명의 주어들이 그저 숲이라는 공간에 갇힌 소재로 전락할 것이다. 토카르추크는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작은 유충과 미생물도 그렇게 기록하지 않았다. 『태고의 시간들』에서 이미 그 의도는 드러나고 있었고, 이 책에서는 훨씬 선명하다.

제목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천국과 지옥의 결혼」이란 시에서 가져왔다. 오래 전 C.S.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라는 책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시가 인용되기도 하고 시집 번역이라는 소재로 사용되고 있어서 다시 읽어보는 계기가 되었다. 언제나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때 읽었던 것을 지금 다시 읽는 것은 다른 작품을 읽는 행위이다.

‘블레이크의 시’가 날실로 놓이고 그 사이를 플롯을 담은 베틀 북이 오가며 씨실을 놓아 이야기를 직조하고 있다. 각 장의 첫머리에 ‘블레이크의 시’가 희미하게 부양하며 전개될 내용을 암시한다. 이 시 위로 사건들은 시간을 뛰어넘기도 하고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선명한 패턴을 만들어 간다. 아니! 어쩌면, 폴란드의 국유림과 별들이 운행하는 천궁으로 직조된 천위에 ‘블레이크의 시’와 숲의 생명들이 수를 놓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으려나? 인간들은 그 위에 얼룩을 남기고….

전직 교량 건설 엔지니어, 영어 교사였던 두셰이코는 폴란드의 국유림 근처 별장들을 관리하며 마을 학교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타인들과 거리를 두고 홀로 사는 삶에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사람들도 그를 조금 다른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불편해 하지는 않는다. 숲을 바라보며, 계절의 변화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생명을 느끼며 고독을 즐긴다. 사람들에 대한 분노, 실망, 소외 때문에 숲의 생명들에 더 애정을 갖는 것은 아닌가 잠시 생각해보았다. 강화시키는 면은 있을 것이다.

사냥터에서 탐욕스럽게 총을 쏘아대는 사람들과 그 뒤에 오고갔던 어두운 거래들이 연쇄 살인사건으로 드러나게 된다. 두셰이코는 그들의 죽음이 동물들의 복수라고 주장하고, 이로 인해 그는 더욱 사람들로부터 소외를 당한다. 그녀는 함부로 생명을 파괴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에 분개한다.

자연을 그리는 시어의 환각(hallucination)과 심상을 그리는 중의어의 환상(illusion)은 진실을 희미하게 부상시켰다가 가라앉히곤 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몰랐다. 사람이 가끔 분노를 실감하게 되면 모든 게 단순 명료해진다. 분노는 질서를 만들고, 세상을 간략히 요약해서 인식하게 만든다. 또한 분노는 다른 감정 상태로는 얻기 힘든 ‘선명한 시야’를 우리에게 확보해 준다.」
50p

이쯤에서 어떤 단서를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기엔 너무 초반이었다. 자연을 그리는 언어가 아름답고 환상적이다. 이 환상이 진실을 알아채지 못하게 가리고 있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세심하고 애정이 느껴진다. 그래서 힌트를 놓치게 된다.

「그곳에서는 오드라 강이 최면에라도 걸린 듯 계속해서 북쪽으로 물을 실어 나르는 광경을 몇 시간이고 바라볼 수 있다.」
120p

「우리는 고원을 가로질러 초원과 멋진 황야를 지나 마을을 향해 달렸다. 사방이 조금씩, 소심하게 녹색으로 변하는 중이었다. 연약하고 작은 새싹들이 뾰족한 머리를 땅 위로 내밀려고 안간힘을 썼다. 앞으로 두어 달만 지나면, 저 작은 싹들이 초록빛 씨앗이 들어 있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꼬투리를 주렁주렁 매단 채, 빳빳하고 당당하고 위협적인 자태를 뽐내리라는 게 상상이 되질 않았다. 도로변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데이지의 자그마한 얼굴들이 보였다. 나는 그들이 이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묵묵히 쳐다보면서 하나하나 엄격하게 평가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177p

묵묵히 쳐다보면서 오가는 사람들을 엄격히 평가하는 데이지는 두셰이코 자신을 이입시킨 것인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상징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데이지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착시와 환각을 일으킨다.

두셰이코가 아니, 작가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잠시 마을을 방문한 곤충학자 보로스가 말하고 있다.

「보로스의 손이 마술을 부리며 신비한 신호를 보내자 곤충과 유충, 그리고 조그만 알들이 모인 덩어리들이 나타났다. 그중 어느 것이 유용한지 물었더니 보로스가 격분했다.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 어떤 생물도 유용하거나 무용하지 않아요. 그것은 그저 사람들이 적용하는 어리석은 구별일 뿐입니다.˝」
223p

보로스의 말은 마치 작가가 우리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두셰이코가 사냥꾼들에게 했었던 것처럼, 보로스의 격분을 빌어 외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분노와 두려움에 몸서리치는 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무엇에 대한 분노이고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 인간이 끝도 없는 탐욕으로 움직이는 모든 생명에 총을 쏘아 대는 행위. 전리품처럼 동물의 사체를 전시하는 행위. 올가미를 놓아 동물들을 잔인한 죽음으로 내모는 행위.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대한 분노. 그리고 생명은 반드시 복수하리라는 것, 생명 파괴 행위가 무시무시한 죽음으로 덮쳐 오리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

분노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두려움은 죄악을 중단하게 한다.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으로 바꿀 기회 역시 우리에게 있다. 별들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가두었기에 우리를 도울 수 없다. 그들은 그저 그물을 디자인할 뿐이다. 그들이 우주의 베틀로 날실을 짜면 우리는 거기에다 우리의 씨실을 엮어야 한다.」
294p

또 한번의 단서. 이중적인 메시지.
별은 어떤 진실을 가리킬 뿐 그것을 실제로 행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말한다. 세상은 고통스럽고 별자리는 불행을 암시하지만 그것을 사람은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바꾸려고 그녀가 무엇인가를 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무엇을 했고 무엇을 바꾸었을까?

작가 스스로 이 소설을 ‘모던 스릴러‘로 규정했다고 한다. 만일 스릴러 소설이라는 장르 안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모순의 덫에 걸려 그 생명을 잃을 것이라 생각된다.
생명을 위해 분노하던 주인공의 마음이 이상 징후를 보이는 것은 이 소설이 윤리적인 함정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리고 아름답고 황홀하기까지 한 문장들이 빛을 발하게 하는 최고의 짜임이라는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걸음을 멈추고 질문을 던지게 한 작은 돌부리와 같은 장면이 있었다. 그냥 걷던 보폭과 리듬으로 걸어가도 걸려 넘어지지 않고 지나치게 될 돌부리와 같은 스쳐간 상념!
죽어가는 생명에 가슴 아파하고 그 존재를 느끼고 숨쉬는 그녀가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는 장면이다.

「보로스의 존재는 내게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일깨워 주었다.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어색한 일인지도 실감케 했다. 그것이 얼마나 자신을 산만하게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사색을 방해하는지도 말이다. 또한 상대가 굳이 어떤 짜증나는 일을 저지르지 않더라도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신경을 건드릴 수 있다는 것도 알게 해 주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그가 숲으로 떠날 때마다 나는 나의 아름다운 고독을 축복했다. 대체 사람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함께 생활하며 수십 년을 함께 보내는 것일까?」
225p

그저 같은 공간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편해 하는 모습이다. 숲이나 들과 같은 오픈된 공간이 아니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가 오랫동안 홀로 지내는 것에 익숙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서 한 가지 그에게 있는 대비를 본다. 자연과의 친밀함과 사람과의 낯설음.

우리시대에 질문을 던진다.
반려동물 문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동거의 개념을 가져왔다. 애완이 아닌 반려라는 용어가 적절하다. 유기견이나 유기묘를 돌보는 일에 대한 관심도 높아가고 있다. 이것이 반드시 생명을 사랑하는 정신을 증명하는 것일까? 우리는 ‘강아지가 제 입술을 핥았는데 무심코 닦은 것이 강아지에게 상처가 될까요?’(어느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하고 질문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반려동물의 내적 상처를 걱정하는 단계까지 왔지만,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 의도적인 말과 행동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에는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사람이 있는데도 멈추려 하지 않는다.

두셰이코의 분노는 이런 균형이 깨진 경도된 모습은 아닐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의 마음에서 낯선 징후를 읽게 되고 불안해졌다.

반려견과는 함께 살아도 노부모와는 함께 살 수 없는 우리 삶의 모습. 이런 우리 세계에 던지는 질문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불편하다.

“좋은 소설이란 그 외피가 스릴러이든 로맨스이든 상관없이 세상을 향해 지혜로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 올가 토카르추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