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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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난 아파트 11층에서 이불에 싸여 던져졌다. 아파트 아래를 지나는 아저씨는 나(유원)를 받고, 언니는 나를 던진 그곳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죽었다. 아저씨는 나를 받으면서 장애를 입었다. 나는 이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던져졌다.
내가 나의 존재를 찾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전에, 무엇이 되고 싶은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알아내기도 전에, 사람들은 나의 존재에 의미를 덧입혔다.
나는 이 두 사람의 희생으로 살았고, 그 희생은 나에게 계속 무엇인가를 요구한다.

유원이 되어 독백을 해보았다.

청소년문학이다. 아이들은 어떤 감상으로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던져졌다‘는 말은 나에게 실존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던져진다는 것. 나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 관습이나 의무성 따위에 의해 이미 결정된 현재에 ‘던져진 존재’이다. 이렇게 자신의 선택과 결정이 아닌 임의성속으로 던져져서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불안함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그 임의성 때문에 나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 임의성은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이러한 세상에서 나의 존재를 찾아내서 그 본래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 화재는 유원 자신이 일으킨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였던 유원을 이불에 싸서 던진 언니의 의지도 유원의 선택 밖에 일이었다. 언니를 기억하는 엄마, 아빠, 언니의 친구 신아언니, 당시 사건을 기사로 기억하는 사람들. 유원이 던져진 세계에 함께 던져진 사람들이고, 유원의 존재에 의미를 가중시키는 사람들이다. 예쁘고 착하고 공부도 잘하고 모범적이었던 언니의 몫까지 잘 살아내야 하는 의무를 얹어 준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말들이 유원을 옭아맨다.

유원을 받아주었던 아저씨는 삶의 불행이 그 사건 때문인 것처럼 부모님에게 돈을 받아간다. 아저씨는 불시에 집에 찾아와 유원과 가족들에게 죄의식과 부채의식을 확인한다. 그 방문은 유원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부모님은 아저씨가 불행한 것이 항상 마음에 쓰여 거절하지 못한다. 유원은 부모님이 그 아저씨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갖는 것을 이해하지만 그 아저씨를 보며 상처받는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 것이 슬프고 고통스럽다.

특별한 시선들 때문에 항상 외톨이었던 유원이에게 친구가 생겼다. 수현과의 만남은 마음속에 감추어두었던 의문들을 끄집어내게 한다. 아무에게도 하지 않던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언니 아는 사람들은 다 그래. 언니는 뭘 해도 됐을 앤데 너무 아깝대. 그렇게 갈 사람이 아니래. 분명히 크게 됐을 거래. 나를 11층에서 던진 거 말이야. 그것도 언니가 영리하고 용감해서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거래.”
“나 자랑스러우라고 더 언니를 띄우는 것 같기도 해. 근데 왜 나는 그런 말 듣는 게 싫지? 어쩌라는거야 , 나보고.”
-112p

수현은 유원에게 가볍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준다. 수현이가 아저씨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둘의 관계는 잠시 주춤대지만 유원이가 자신을 가둔 의미들로부터 벗어나려는 결심을 하고 하나씩 풀어가면서 수현과의 사이도 회복되고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유원은 ‘던져진 존재’로서 살지 않기로 결심한다. 자신을 무겁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더 이상 나를 통해 언니의 삶을 요구하지 말아달라고.
그리고 아저씨를 만나서 이야기 한다.

“그때, 제가 너무 무거웠죠.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다리가 으스러진 거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무거워서, 아저씨를 다치게 해서 불행하게 해서.”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저한테 그래요.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요.”
-198p

자신에게 항상 같은 자리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움직이는 존재로 다가가는 것이다.

패러글라딩. 세상에 다시 한 번 자신을던진다. 패러글라이딩하는 유원이는 던져진 아이와 대비를 이룬다. 던져짐에서 던짐으로. 기투.
이 세상에서 자신이 원하는 존재로 살아가기위해 한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함께 던져진 모든 존재자들과의 본래적 관계를 회복한다. 사랑에 존재를 던진다고 해야 할까?

유원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연결된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아픔에서 벗어난 수현의 응원이 있기 때문이다.

유원은 이제 가볍게 사는 것을 연습중이다. 수현과 함께.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던져진다. 우리가 선택하는 세상이 아니다. 가족, 사회, 관습, 문화는 우리가 던져짐과 동시에 존재에 의미를 만들어내고 가둔다. 나는 어떤 의미에 포획당하고 있을까? 벗어나야 할 의미들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떤 존재로 살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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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1-03-23 01: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누군가의 치명적인 희생으로 내가 여기 살아남아 있다니, 아 너무 슬프고 무거운 시작이네요. 뭔가 위로가 될 것 같은 책입니다.

그레이스 2021-03-23 01:21   좋아요 2 | URL
제게는 실존적 질문을 하게되는 소설이었습니다.
청소년문학인데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생각해봤는데 어려울수도 쉬울수도 있겠단 생각입니다.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속에 던져진 아이들의 질문과 답!
 


















사진 위에는 커다란 활자로 ‘달에서 온 제초의 남자!‘ 라고 찍혀있었다. 쉐백은 정신없이 읽어나갔다.

지구에 내디딘 그의 첫 발자국! 
170년 만에 아나레스 정착지에서 우라스에 온 첫 방문지 위에 박사가 어제 정기 달 화물선으로 파이어 우주항에 도착한 모습을 찍었다. 
과학 부문에서 전 국가 대상으로 주어지는 세오 오엔 상을 수상한 이 특별한 과학자는 외부 세계인에게는 한 번도 주어진 적이 없는 명예로운 이유 윤 대학 교수직을 받아들였다. 
우라스를 처음 본 소감을 묻자 이 키가 큰 뛰어난 과학자는 답했다.
"당신들의 아름다운 행성에 초대받아 무한한 영광입니다. 지금부터 쌍둥이 행성이 형제애 속에서 함께 나아갈 모든 세티 인의 우정의 신세기가 시작되기를 희망합니다."

"하지만 난 아무 말 안 했는데!"
쉐벡은 과에에게 항의했다.
"물론 그렇죠. 그 패거리가 가까이 가지도 못하게 했는걸요. 새모이 (대중 신문을 가리키는 속어. 옮긴이) 기자들의 상상력이란 어떻게 할 수가 없다니까요!"
선생님이 실제로 뭐라고 말하건 간에 자기들이 바라는 대로 써 대는 거예요.
쉐백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마침내 말했다. - P96

그러나 가장 작은 시골 마을에서 만나고 본 사람들도 다들 잘 입고 잘 먹었으며, 그의 기대와 달리 근면했다. 그들은 뭔가를 하라는 명령을 기다리며 무뚝뚝하게서 있지 않았다. 아나레스 인들처럼 그들도 바쁘게 이것저것 할 일을 찾아다녔다. 그 점이 그에게는 수수께끼였다. 그는 사람에게서 결단이나 자발적 창조력같은 내적인 동기를 없애 버리고 외부적인 동기와 강제성을 불어넣으면 게으르고 부주의한 일꾼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부주의한 일꾼이 그런 사랑스러운 농장을 가꾸고 우수한 자동차며 편안한 기차 같은 것을 만들 수 있겠는가. 재산이라는 미끼와 강요는 분명 그가 믿었던 것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내적인 동기를 대체하고 있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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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프스키에 관심을 두고 읽고 있다.
<파노프스키와 뒤러>라는 작품을 읽고 그의 책들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은 르네상스미술에서의 인문주의적 주제들이라는 표제에서 볼 수 있듯이 르네상스 화가들의 그림을 해석하고 있다.
서점검색으로는 품절 상태다.
도서관에서 빌려읽고 있는데 2주안에 다 읽는것은 무리다. ㅠ
밑줄도 못 긋고 옆에 두고 계속 읽어야 할것 같은데...
알라딘 중고 책을 검색했다. 십만원, 십오만원... 개인판매자들의 판매가이다. 품절 책이라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하지만,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가의5배, 8배라니...
빠른 시간내에 재출간되길.
시공사든 한길사든.




티치아노 그림의 두 여인은 리파가 영구한 지복(Felicita Eterma, EternalBiss)과 짧은 또는 일시적인 지복(Felicita Breve, Brief or Transient Bliss)이라는표제어 아래 설명한 한 쌍의 의인상과 밀접한 유사성을 지닌다. 영구한 지복은금발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며, 그녀의 벌거벗은 몸은 그녀가 결국 소멸하고야 마는 현세의 사물들을 경멸함을 뜻한다. 그녀가 오른손에불꽃은 신의 사랑을 상징한다. 짧은 또는 일시적인 지복은 품위 있는 숙녀 의 모습이며 드레스의 노랑과 흰색은 ‘만족‘ 을 의미한다. 귀금속으로 치장하고손에 든 그릇에는 헛되고 짧은 행복의 상징인 금과 보석이 가득 차 있다.
- P286

도상학은 미술작품의 주제나 의미를 형식과 대별하여 다루는 미술사의한 분야이다. 그러므로 이 서문에서는 주제와 의미가 형식과 어떻게 구분되는지 그 차이점을 규정해 보고자 한다.
아는 사람이 길에서 내게 모자를 벗고 인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먼저 형식적 관점에서만 말한다면, 내가 눈으로 보는 것은 한 집합체의 세부요소들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모습 이상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집합체는 색과 선, 입체가 어우러져 발생하는 일반적인 시각 현상의 한 부분에 속하는것이며 따라서 나의 시각세계를 구성하는 것의 일부이다. 내가 그 집합체를자연스레 하나의 사물(한 신사)로 확인하고 세부 요소의 변화를 사건(모자를 벗는 행위)으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이미 순수하게 형식적인 인식 행위의 한계를 넘어서서 주제 혹은 의미의 첫 영역에 들어서 버린 것이다. 이렇게 인지된 의미는 기본적이고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성격을 지닌다. ...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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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아버지와의 불편하고 소원했던 관계를 설명하면서,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고양이를 먼 해변에 버리고 온 일을 기억한다. 그 고양이가 자신들보다 먼저 집에 돌아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고양이를 버렸지만 집을 찾아온 고양이를 다시 버릴 정도로 무정하지 않다는 것일까? 상황에 수동적이라는 것일까? 그 시절에는 그것이 비난을 받을 행동이 아니었다고 덧붙인다그러면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설명한다. 불운했던 삶과 중일 전쟁 참전까지

아버지가 난징함락 전위부대인 보병 제20연대 소속이었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보급부대인 치중병 제 16연대 소속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게 된다. 그로 인해 아버지의 군인시절 정보를 더 알아볼 용기를 내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하이쿠를 좋아했던 아버지의 글들을 찾아보며, 전쟁으로 인해 괴로웠을 아버지의 심정을 더듬어 헤아리는 아들의 마음을 읽게 된다. 전쟁에서 겪었던 포로처형 경험을 짧게 말한 것이 다였음에도 그 상처를 자신이 계승했음을 고백한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 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의 의미가 어디에 있겠는가

- 51p 고양이를 버리다

 

자신은 그저 평범한 아버지의 평범한 아들이라고 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세상은 다르다. 아버지가 세상을 보는 방식과 아들의 것은 다르다. 하지만 그 사이에 단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세상은 연속되고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산둥성 가오미 둥베이, 붉은 수수밭으로 피바다를 이루는 곳이다. 1927년과 19392번에 걸친 항일전과 관련한 비극적인 역사가 있었던 곳이다. 이 전투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피와 할머니의 피로 적셔진 검은 흙과 붉은 수수밭의 대비는 이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와 그 참혹함을 짐작하게 한다.

이렇게 전쟁터 한가운데서 학살을 목격한 사람들은 피비린내와 차라리 붉은 수수밭으로 대치되는 시체로 가득한 풍경의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장소는 …… 장소는 더 이상 사랑과 욕망으로 취했던 옛날의 붉은 수수밭이 아닌 유린당한 사람들의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곳이 되어버렸다.

 

모옌의 붉은 수수밭을 읽으면서 중국대륙을 훑고 간 1937년 중일전쟁을 자세히 알아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함께 읽은 것이 난징대학살이었다. 난징에서 있었던 민간인 학살이다. 난징뿐만 아니라 중국의 여러 곳에서 이러한 양민학살이 자행되었다. 난징은 오, , 양나라 때의 성도이었다. 장제스의 군대와 일본군의 격전지였다. 19371213일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의 민간인에 대한 만행에 대한 자료와 사진은 끔찍한 것이었다. 난징에는 이 전쟁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잔인한 살인을 명령하게 된 의도는 전쟁에서 감정을 무디게 하기라는 설명을 읽었다. 전투에서 두려움 없이 적군을 살상하기 위해 방어능력이 없는 양민을 죽이는 것으로 훈련을 한다는 것이다. 분개를 떠나 전쟁과 인간의 잔인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를 생각하며 할 말을 잃게 된다. 아연실색.

 

그런데 이러한 학살의 가해자 편의 서술이 담담한 것은 더욱 우리를 당황시킨다. ‘국가의 전쟁이었고, 자의적인 것이 아니었고 징병이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윗세대가 벌인 전쟁이고 나도 그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투 말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에서 일본의 청년들을 태평양전쟁에 보내기 위한 선동적인 활동을 했던 늙은 화가의 초상을 그리고 있다. 회환과 자긍이 오가는 그의 마음은 자신이 살았던 세계가 무너지고 부유하는 세상에서 존재하기 위해 사라지는 가치를 붙들고 있는 인간의 누추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쟁은 모두에게 상흔을 남긴다. 그러나 그 상처를 말할 때 태도와 내용은 분명히 달라야할 것을 요구받는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의 질문이 떠오른다. ‘조상의 죄에 대한 후손의 책임에 대한 질문.

혈연에 대하여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려했던 작가 하루키도 결국 자신 안에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정체성과 역사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을 본다.

 

역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의식의 안쪽에서 또는 무의식의 안쪽에서, 온기를 지니고 살아있는 피가 되어 흐르다 다음 세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쓰인 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  97p 고양이를 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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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프스키는 역사학의 과제와 난점을 지적할 뿐, 그것을 정면에서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중세로 논의 영역을 좁혀서 이 문화적 유비가 나타나는 한 사례를 조명하려 한다.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이 바로그 사례다.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유비의 내용이 밝혀질 때, 양자는 정당하게 ‘평행현상‘ (parallels)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파노프스키는 유비성의 내용에 대한 본격적 설명을 잠시 미뤄두고, 먼저 두 문화 현상의시공간적 일치라는 대단히 특기할 만한 사실을 그 유비성을 방증하는일종의 예비적 논거로서 제시한다. 
- P23

"그러나 모든 내적 유비를 접어두더라도, 시간과 공간이라는 순전한 사실 영역에서 고딕건축과 스콜라철학은 결코 우연이라고는 할 수없을 뚜렷한 동시발생(concurrence)을 보여준다. 그 누구도 이 동시발생을 못 본 척 넘어갈 수는 없다. 그래서 중세철학사학자들이 자신의연구 재료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은, 그들이 여타의 고려 사항들에 영햐을 반지 않았음에도, [중세]미술사학자들이 시대를 구분하는 방식과 똑같았돤 것이다 - P24

파노프스키는 서로 무관한 양극단인 것처럼 보이는 신비주의와 유명론이 사실은 주관주의라는 한 경향의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철학적 주관주의에 상응하여 등장하는 예술 현상이 원근법적 공간 해석이라고 진단한다. 또한 그는 후기 고딕예술에서 나타나는초상화, 풍경화, 실내화의 장르적 특성을 철학적 유명론의 정신과 연결시키고, 이 시기의 성화(Andachtsbilder)를 신비주의와 연결시킨다. "초상화, 풍경화, 실내화가 응시자로 하여금 신의 창조가 지닌 한없는 다양성과 무제약성을 의식하게 함으로써 무한성의 감각을 일으키는 데 비해,
성화는 응시자로 하여금 창조자의 무한성에 자신의 존재를 침잠하게 만듦으로써 무한성의 감각을 일으킨다. 이러한 후기 고딕예술의 복잡다기한 경향은 마침내 14세기 플랑드르 화파로 융합된다. 그리고 이는 유명론과 신비주의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64)의 철학에서 융합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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