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가 알베르토 망구엘에게 공명하다-


서재를 떠나보내며를 읽고 망겔(알베르토 망구엘)에게 반해버렸다. 책을 사랑하고 아끼는 독서가들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결국 그의 다른 책들을 검색하고 독서의 역사를 찾아서 장바구니에 넣는 과정도 생략하고 바로구매 버튼을 누른다. 책을 받고 표지를 비닐로 싸고, 줄 그을 펜을 정하는 의식을 치른다. 한 번에 읽기 아까운 책들이 있다. 한 문장 한 페이지를 아끼듯 읽게 되는 책. 이런 책들은 몇 줄만 읽어보면 알게 된다. 거기 담겨있는 보화와 같은 문장과 지식들을 흡혈하듯 빨아들이고 싶은 책이다. 난하주조차 그냥 넘길 수 없는 지식들이 가득한 책. 그래서 오래 걸리는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내 자리 가까운 곳에 꽂는다. 항상 뽑아서 찾아보게 될 자료가 가득한 책이다. 망겔의 책이 그렇다. 다시, 나는 그의 다른 책을 검색한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문자의 역사, 책의 역사, 독서법의 역사와 관련된 기록과 에피소드와 독서가들이 등장한다. 책을 덮고 읽은 내용들이 체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사라져 버릴까봐 조바심이 난다. 한 번의 짧은 글로 리뷰를 남기기에도 각 장 마다 받는 영감이 아깝다.

 

독서가들의 몸짓, 기술, 독서를 통해 얻는 기쁨과 책임감과 지식이 망겔 자신이 것과 똑같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자신은 외롭지 않다는 문장을 읽고 웃음이 난다. 문자를 읽어내고 그 안에서 감()을 읽어 내는 것은 독서가의 몫이라고 한다. 뭔가를 읽지 않고는 배겨 내지 못하고 그것은 숨 쉬는 행위만큼이나 필수적인 기능이라는 그의 이야기는 나의 자존감을 높여 준다.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작가 보르헤스를 이어 국립 도서관장까지 역임한 이 시대의 독서가 알베르토 망구엘의 말에 공감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 운명적인 만남 -

 

아버지의 서재에서 어른들의 책을 몰래 읽던 망겔은 자신만의 독서 세계를 만들어 간다. 그만의 독서법을 통해 탐독의 취미를 만들어간다. 일종의 종교 행위와 같은 책을 대하는 자세를 갖게 되는 모습도 보게 된다. 책에 파묻혀 살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있던 16세의 망겔은 1964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서점에서 방과 후에 근무하게 된다. 그가 하는 일은 꽂혀진 책들을 뽑아 먼지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여기서 그는 토마스 만, 솔 벨로, 파르 라게르비스트, 샐린저, 브로흐, 허버트 리드, 이탈로 스테보, 릴케, 딜런 토머스, 에밀리 디킨슨, 저라드 맨리 홉킨스, 에즈라 파운드 들을 만난다. 이것은 작품을 통해 그들을 만난 것이고, 그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운명과 같은 만남! 당대 작가 보르헤스를 만난다.

 

시력을 잃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노모의 손에 이끌려 그가 일하는 서점을 찾아왔다. 망겔은 유명한 작가 보르헤스의 시 몇 편과 소설을 읽었을 뿐 그다지 압도감을 느끼지 않았을 때라고 한다. 보르헤스가 원하는 책을 구매하고 서점을 떠나기 전, 망겔에게 글을 읽어 줄 것을 제안한다. 그 후 2년 동안 보르헤스를 찾아가 책을 읽어 주었다. 망겔에게는 아주 큰 행운이었다. 하지만 인생에서 운명과 같은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기 전에 망겔 자신은 보르헤스에게 읽어주는 책들 때문에 가슴이 뛰는 행복감을 느꼈다. 아라비안 나이트와 같은 새로 구입한 책을 들고 계단을 뛰어올라가던 때에 대한 그의 기억은 나조차 설레게 한다.

 

보르헤스가 선택하는 책을 따라 망겔은 새로운 작가들을 경험하게 되고, 낭독 중간 중간 그 문장이나 작품에 대한 보르헤스의 논평과 감탄을 옆에서 듣는 것은 도제수업 그 이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 이것은 기묘한 경험이었다고 한다. 자신이 읽어주는 데도 불과하고 실제로 그 텍스트의 주인은 언제나 듣는 입장인 보르헤스였기 때문이다. 책도 보르헤스 자신이 선택했고, 책 읽기를 멈추거나 계속하라고 지시하는 것도, 논평을 하기 위해 참견하는 것도 보르헤스였다.

보르헤스의 선택으로 읽었던 책은 다른 작품을 기대하게 했고, 그 작품들은 보르헤스의 반응과 망겔 자신의 기억으로 더욱 풍요롭게 되었다. 그리고 보르헤스의 책을 선택하는 방법들 독서법등에 영향을 받게 된다.

 

보르헤스의 픽션들이라는 소설을 먼저 경험했었다. 정말 난해한 책이고 그의 마음과 환상적인 흐름을 쫓아가기 혼란스러워서 다시 돌이켜 처음에서 다시 읽기를 반복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알베르트 망구엘의 책들을 보기 시작했다. 정말 보고와 같은 지식과 책에 대한 높은 식견을 갖고 있는 시대의 독서가다. 그리고 보르헤스와 망구엘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 라는 감탄밖에 나오지 않는 운명적 만남이다. 알베르토 망구엘(1948~)은 보르헤스(1899~1986)가 역임(1955~1973)했던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직을 2015년에 제안 받고 고국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서재를 떠나 보내며를 읽어보면 그는 도서관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도서관을 통해 사람들과 만나고 모임을 만들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활동을 하며, 일상의 만남들과는 다른 특별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같은 책에서 간직한 텍스트가 다르고, 그 책을 통해 기억하는 자신의 서사가 다르고, 같은 페이지를 읽어도 들숨과 날숨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경험한다. 하지만 어느 덧 우리의 호흡은 같은 리듬을 타고, 서로의 감동이 배가 되며 충만해진다.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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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8-01 21: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보르헤스와의 만남은 정말 운명적이군요~!! 도서관의 만남에 대한 그레이스님 글 너무 공감이 가고 그런 경험을 하셨다는게 정말 부럽네요~!!

그레이스 2021-08-01 21:45   좋아요 4 | URL
귀한 만남과 모임이죠^^

붕붕툐툐 2021-08-02 00: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세 권 다 담았어요~ 너무 재밌을 거 같아요!! 도서관 모임 사랑하는 사람 여기도 있어용!! 얼른 대면 모임을 다시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그레이스 2021-08-02 06:57   좋아요 4 | URL
저두요~♡
줌으로 하고 있는데 한공간 안에 모여서 하는거랑 다르죠?!

바람돌이 2021-08-02 00: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끝내주는 괴물들 읽고 이 작가에게 급 관심이 가는 중인데 독서의 역사 꼭 읽어봐야겠네요. ^^

그레이스 2021-08-02 06:58   좋아요 4 | URL
저는 끝내주는 괴물들 읽어봐야겠어요~!

mini74 2021-08-02 14: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저 이 책 읽고 있어요. 그레이스님 글처럼 무지 재미있어요. ㅎㅎ 나머지 두 권도 살포시 담아갑니다 *^^*

그레이스 2021-08-02 14:10   좋아요 4 | URL
와! 함께 읽는 분들 계신다는 건 신나는 일이죠~~♡

서니데이 2021-08-03 0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소설은 아니지만, 유명한 소설가가 등장해서 그런지, 소설처럼 느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 시원하고 좋은 밤 되세요.^^

그레이스 2021-08-03 05:16   좋아요 2 | URL
제게는 소설처럼 재밌어요
아침이지만 서니데이님도...!

scott 2021-08-04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망구엘의 매력은 무한대 입니다!

그레이스 2021-08-04 12:41   좋아요 1 | URL
^^ 무한대에 갇혀계신 분들이 많네요.^!~
저포함!
 

예이츠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

저것은 노인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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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7-31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오늘은 7월 마지막 날입니다.
즐겁고 좋은 일들 가득한 한 달 보내셨나요.
8월엔 더 좋은 시간 되시면 좋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1-08-01 08:33   좋아요 0 | URL
어제는 일찍 자느라.^^
저는 8월 1일
이번주 토요일이 입추네요.
일주일 정도 지나면 지낼만 하겠죠?
건강하세요~♡
 
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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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젊은 여성의 구원을 향한 여정과 그 길에서 만난 불행한 사람들, 그리고 몸으로 관통해간 시대의 현상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역사를 불러와 거기에 기인한 사회의 신념과 전통을 배설排設하고, 한 가족사를 통해 들여다보게 한다.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 아래서 개인은 개별자가 아닌 가족이나 공동체란 단위로 묶이기도 하고, 이방인이 되기도 한다. 자유 하고자 하는 욕망은 억압당하고, 억압당한 욕망은 이탈을 이끌어내고 탈주하게 한다그렇게 떠난다. 그 길에서 누군가의 악의는 덫을 놓기도 하고, 선의는 쉴만한 경유지를 제공한다. 그 여정은 떠날 때 생각했던 곳을 넘어 더 멀리 나가고, 많은 시간이 걸린다. 어쩌면 살아있는 동안 계속 될 것이다. 떠날 때 바랐던 구원은 사라지고 이리저리 부유한다.

 

펠리시아의 이름은 그녀의 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다. 1916년 부활절 봉기 때 죽은 여성 혁명가의 이름이다. 할아버지가 아일랜드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은 아버지가 고집스럽게 지켜낸 자부심이다. 카톨릭 전통과 관습이 지배하는 마을에서 펠리시아는 수녀원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졸업하고, 특별한 기술 없이 통조림 제조 공장에 다니다가 공장이 폐업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자유도 함께 잃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읜 그녀는 아침을 차리고, 누워계신 할머니를 돌보고, 일터에서 돌아오는 아버지와 오빠들의 저녁식사를 차리는 일상을 살게 된다. 역사, 전통, 관습이 여성인 펠리시아의 삶을 규정짓고, 불황은 그녀를 가둔다.


펠리시아는 조니 라이서트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간 후 아이를 가진 것을 안 그녀는 그의 주소조차 알지 못한 채 그를 찾아 영국 버밍햄을 향한다. 펠리시아의 여행은 위태해보이기만 하고, 이어서 등장하는 힐디치씨의 일상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조성한다. 힐디치씨는 듀크 오브 웰링턴 로드 3번지, 관목 숲에 둘러싸인 단독주택에 홀로 살고 있다. 오래 전 어머니를 여의었다. 공장 직원들 사이에서 그는 유쾌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통한다. 그의 사생활은 평범하고 예상 가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비밀스럽다”(19p)는 말이 불길하다. 조니를 찾기 위해 공장으로 찾아왔던 펠리시아와 길에서 다시 마주친 그는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녀가 조니를 찾는 것을 도와주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녀의 돈을 몰래 빼돌리고 자신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든다. 호의를 거절했던 펠리시아는 그의 도움을 받게 되고, 절망가운데서 그의 권고대로 낙태시술을 받는다. 뒤늦게 후회를 하고 떠나려는 그녀에게 그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그녀는 비슷한 또래의 소녀들이 그에게서 달아나지 못했음을 알아챈다.

여기까지는 연쇄 살인범 힐디치의 덫에 걸려든 펠리시아를 주인공으로 한 범죄추리소설이다

펠리시아는 그에게서 도망쳐 나오고, 다른 도시에서 거리의 사람으로 살아간다. 힐디치는 망상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로 끝을 낸다. 잡목들 밑에 묻힌 소녀들은 영원히 비밀이 된다. 펠리시아 역시 침묵한다.

많은 질문의 과정을 거쳐야 메시지가 잡힐 것 같다.

 

펠리시아는 왜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그녀의 여정 중 마음에 떠오르는 집에 대한 회상은 아버지로부터 오는 부정적 메시지였다. ‘칠푼이’, ‘나사 빠진 인간같은 비난, 희생에 대한 암묵적 요구, 조니 라이서트가 영국군이라는 소문을 알려 주며 했던 아버지의 경고, 그리고 조용히 내뱉은 말 창녀’. 밤마다 꾸는 꿈에 자신을 비난하는 아버지와 사람들이 등장하고, 돌아간 후의 삶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만일 지금 돌아간다면 그녀는 또다시 그 침실에서 깨어날 것이다. 같은 절망 속에서 또다시 찾아오는 새벽, 여섯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눈을 뜨는 고단함, 또다른 하루의 시작, 화요일이면 다시 그 비좁은 계단을 닦아야 하고, 주말에는 노인의 침대 시트를 갈아야 한다. 만일 지금 돌아간다면 아버지는 비난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호기심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냉정한 표정으로 쳐다볼 것이다.” (73p)

 

그래서 그녀는 조니와 함께 있는 것만이, 둘의 사랑만이 구원을 가져오리라”(73p)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애써 외면했던 조니의 진심을 깨닫게 되고, 그를 찾는 것을 단념한다. 미혼모의 가능성은 없어졌지만 그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버지를 비롯한 사람들로부터 강화된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고 있던 그녀는 조니의 데이트 신청에 눈물이 날 정도로 행복했다. "근사하네"(49p)라고 말해주는 그가 달라보였다.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은 그녀에게는 정말 구원이었던 것이다. 잠깐이지만 행복감과 희망을 맛 본 그녀가 과연 절망을 들고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녀는 이미 길을 떠났고 과거의 자신으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그리고 사람들은 길에 머물게 된다.

 

그녀는 이제 예전의 자신이 아님을 안다. 가을날 결혼식 신부 들러리도 아니고 자동차 뒷좌석에서 담요를 뒤집어썼던 아이도 아니다. 한때 그녀의 것이던 순수함은 시간이 흐르며 이제 어리석음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고, 상실을 경험한 예전의 그녀는 지금의 자신으로 이끈 사람이기에 소중하다.” (312p)

 

펠리시아는 여정 중에 사람들을 만난다. 도움을 줄 것 같았던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다른 구원을 전하는 사람들의 말들은 들어오지 않았다. 리나와 조지와 같은 거리의 사람들이 사는 방식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저마다 구원을 찾아 생존하기 위해 이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펠리시아는 그들처럼 길에서 잠을 자고, 구걸을 하고, 몸을 팔기도 하면서 서서히 그들이 되어간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여자들과 노숙자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치과의사를 보고 그녀는 힐디치의 사악함을 떠올린다.

 

힐디치는 사생아였고 어머니로부터 받은 성폭행의 기억을 갖고 있다. 자신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녀들을 만나고, 그녀들에게 호의를 베풀지만 이내 떠나려는 그녀들을 살해했다. 남자들은 어머니에게서 육체적 욕구만을 채우고 떠났다. 어머니에 대한 동일시 혹은 망상일까그는 과거에서 떠나지 못하고 망상에 갇힌 존재이다. 

그는 규칙을 깨뜨리고 펠리시아를 집으로 데려 온다. 그리고 그녀를 놓쳤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그로 인해 자각이 일어난 것인지 모르겠다. 상처입고 우울한 그는,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그녀들의 불행한 처지를 유독 알아차리는 눈을 가졌다조니와의 잊지 못할 만남의 순간을 떠올리고 있는 불행한 그녀를 길에서 발견한 사람은 힐디치다.


과연 순수한 선의는 존재할까? 

 

일자리를 잃으면서 다이아몬드 커피 독에 앉아 있을 자유, 비용 먼저 따져보지 않고 투스크린 리츠에서 저녁을 보낼 자유”(42p)를 빼앗겼던 펠리시아는 어느 도시의 길에서, 죽은 자의 이름이 새겨진 벤치에 앉아, 누군가가 버리고 간 커피를 마시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다.

 

부엌 바닥에 쓰러진 어머니에게로, 그 후 다정한 위로의 마음을 담아 사람들이 바닷가에서 가져다준 조개껍데기에게로, 녹색 점박이 알들, 존 카운트의 노래, 그 무렵 어떤 기색도 내비치지 않던 아버지의 쓸쓸한 눈, 떠나버린 남편이 안긴 치욕에 대한 답이었던 형벌 같은 상처, 아들을 향한 암처럼 조용한 사랑. 살인을 한 남자의 저 깊은 곳에도 다른 영혼과 다를 바 없는 영혼이, 한때는 분명 순수했을 영혼이 있었을 것이다.” (319p)

 

의미도 규칙도 없이 시간과 사람들이 뒤섞여 들어가는 사색이었지만, 그녀는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된다. 다른 존재인 것이다.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 일들은 사소한 사건과 우연한 만남일 수 있다. 모든 일은 다 처음이 있기 마련이고, 그 시작은 긴 여정으로 이어진다. 어느 도시의 거리와 도로에나 그들은 존재한다. 그들이 길을 떠난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저마다의 서사를 갖고 있다. 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실종자. 거리의 사람들. 밑바닥 인생과 같은 단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존재이다. 대상화할 수 없다.

 

나의 삶을 움직인 선택들과 현재의 정체성을 갖게 된 삶의 과정들을 되새기며, 예상하지 못했던 우연한 사건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억울했던 감정들, 답답한 시간들, 구원이라 여겼던 것들의 허상들, 이런 것들을 떠올려보며, 다시 생각은 거리의 사람들에게로 옮겨간다.

그들이 그곳까지 이르게 된 서사는 무엇일까과연 자유로울까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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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31 11: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펠리시아도 그렇고 힐디치도 그렇고 감정의 극단에 몰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은 참 서글픈거 같아요 ㅜㅜ 그래서 여정을 떠나는 구나 생각이 드네요~~

그레이스 2021-07-31 11:08   좋아요 4 | URL
두사람이 조금 결이 다르지만 새파랑님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scott 2021-07-31 15:43   좋아요 4 | URL
아ㅜ.ㅜ 저도 새파랑님 말씀에 공감 합니다

미미 2021-07-31 11: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도 이 작품 읽으셨네요?!! 우째 저만 안 읽은 듯한 기분;;;ㅋㅋㅋ8월엔 꼭 봐야겠어요~♡♡

그레이스 2021-07-31 11:32   좋아요 4 | URL
꼭 숙제한 기분이예요
리뷰 쓰느라 새벽에 잤거든요
낮에는 올림픽중계 소리에 생각이 끊어져서...^^
오늘까지라니까 가망은 없지만 암튼 써서 올려봤어요 ;;;;;

scott 2021-07-31 15:43   좋아요 4 | URL
저도 올림픽 울 선수들 경기 영상 넋 놓고 보느라 일상에 균열이 ㅎㅎㅎ

2021-07-31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31 1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1-08-01 01: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펠리시아 엄마가 살아 있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없는 엄마를 찾으면 안 될 텐데... 다시 집으로 돌아가도 그렇게 좋지 않겠지요 아버지가 펠리시아를 기다린다 해도... 집을 나가 거리에서 사는 사람을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앞으로 펠리시아한테 안 좋은 일 없기를 바라지만, 그것도 바랄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든 살아가겠지요


희선

그레이스 2021-08-01 08:10   좋아요 2 | URL
펠리시아가 아버지의 무심함을 대할때마다 엄마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하긴 했어요.

mini74 2021-08-01 14: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펠리시아가 전혀 친하지 않은 이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모습에서 참 슬펐어요. 돌아갈 이유가 없었을 것 같아요. 리뷰가 정말 좋아요. 공감도 가고~ *^^*

그레이스 2021-08-01 16:08   좋아요 1 | URL
저두요
그 장면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감사합니다
 

William Buttler Yeats (1865~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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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01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쉬운 단어들로만 씌여진 것 같은데
읽기는 쉽지 않네요 ^^
그래도 이렇게 쉬운 단어로 조합해내는 것이 대단해 보입니다.

그레이스 2021-08-01 08:29   좋아요 0 | URL
어쨌든 시는 어렵죠
아일랜드 부활절 봉기가 배경이예요
펠리시아의 여정에 아일랜드의 부활절 봉기가 나와서...
예이츠의 시가 읽기 편하네요^^
 

George Gorden, Lord Byron(1788-1824)

오랜 시간이 흐른뒤
당신을 만난다면
나는 어떻게 인사를 할까?
침묵과 눈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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