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체험 을유세계문학전집 2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서은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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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을 통해 오에 겐자부로의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만엔 원년의 풋볼, 아름다운 에너벨리 싸늘하게 죽다를 이어서 읽었지만, 이 작품들의 메시지를 내 것으로 하기가 어려웠다. 일본의 역사, 지역 공동체나 가계 또는 개인의 서사라는 프레임 안에서 메시지를 찾기에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었다. 특별히 그의 작품 곳곳에서 자주 등장하는 성행위 장면은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것은 섹슈얼리티라기 보다는 오히려 비참하고 그로테스크한 욕구영상이라면 눈을 질끈 감게 되는로 다가온다. 개인적인 체험에서 그려지는 성행위 장면 역시 불편했다. 그러나 다른 작품에 비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조금 더 선명하다.

 

그는 소설의 방법에서 문학표현과 낯설게 하기라는 소제목으로 구조화에 대해 설명한다. 말과 단어, 문장과 분절화된 문단들은 중립상태로 있을 수 없다. 소설 안에서 문장은 문체화된 전략적인 문장이 되어 그 문장이 표현하는 사람의 상황을 다 끌어들인다. 그 문장이 그 사람이 갖는 정황, 태도를 표현한다. 그렇게 문장은 낯설게 되고 상황들과 관계를 맺고 여러 의미의 층위를 형성한다.

 

문학표현의 말은, 말과 단어의 수준에서 벌써 이 사회가 세계 나아가서는 우주적인 것으로 넓혀 가는 구조적인 양상에 대하여 그 쓰는 사람이 어떠한 태도로 실재하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힘을 갖고 있다.(소설의 방법오에 겐자부로 28p)”

 

작가는 굳이 구조주의를 언급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가 말한 구조화라는 것은 구조주의적 해석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다. 자연스럽고 친근하던 표현들이 그의 작품 안에서는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다.

 

진열장 안의 아프리카 지도를 들여다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는 버드는 병원에서 출산 중인 아내를 두고 있다. 처음부터 낯설다. 도대체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남자가 왜 이런 곳에서 아프리카 지도를 바라보고 있을까? “아프리카 대륙은 고개를 수그린 남자의 두개골 모양과 닮았다(8p)”고 한 문장은, 이 소설의 1/3 정도를 읽고 나면, 주인공 버드가 특수아실 유리 너머로 아들의 기형적인 머리를 보며 구토를 일으키는 장면, 진열장과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몸을 보고 수치심을 느끼는 장면을 지시하는 상징적인 이미지임을 알게 된다.

 

사실 결혼 후, 나는 그 감옥 안에 있는 것이지만 아직 감옥의 뚜껑이 열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태어날 아이가 그 뚜껑을 꽝 하고 내리덮어 버릴 것이다. (14p)”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는 그의 심정을 그리는 이 글에서 감옥 문이라고 하지 않고 감옥 뚜껑이라고 한다. 관 뚜껑과 죽음을 연상케 한다. 그에게 아이의 탄생이 어떤 의미와 중압감을 주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이런 불만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그에게 뇌헤르니아라는 질병으로 기형의 외형을 지닌 아기는 더 깊이 있던 부정적 감정들을 드러내게 한다.

 

원장의 겐부츠(現物)라고 하는 단어가 버드에게 가이부츠(怪物)’라는 단어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그 괴물이라는 단어에 들러붙은 가시가 버드의 가슴에 온통 할퀸 자국을 냈다. 버드가 자기를 소개하고, 내가 아버집니다, 했을 때 의사들이 동요했던 것은 그들의 귀에 그것이 이런 식으로 울렸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괴물의 아버집니다.(37p)”

 

그는 아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곧 죽을 것이란 의사의 말을 듣고 안도감과 죄의식을 느낀다. 어차피 식물아기이고 곧 죽을 것이라는 자기합리화의 방어기제도 작동한다. 아기가 죽기를 바랐던 그는 자신의 에고이즘에 수치심을 느낀다. 그의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도 온다. 아기가 쇠약사 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런 복합적인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는 대학 친구 히미코를 찾는다. 그녀는 그의 섹스 엑스퍼트가 되어준다. 이 지점에서 나는 독자로서 주인공의 심리를 쫓아가는데 실패할 뻔 했다. 그런데, 지나가듯 말한 이 두 사람의 공감대를 인지하면서 겨우 그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히미코는 남편의 자살 후 여러 남자들과 가벼운 관계만을 이어가고 있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냐는 질문을 했다가 뺨을 맞은,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기억인, 버드, 그의 자기 몸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은 거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대학원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둔 후 2년 동안 만취 상태로 살았었다. 그는 술에 취함으로 도피하려 했던 절망적인 자포자기로 몰아가는 근원적인 불만이(17p)”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술을 끊었다. 이 근원적인 불만이 무엇인지 여전히 알지 못한 채, 어쩌면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더 심각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그의 근원적인 불만과 함께 그의 수치심에서 몸에 대한 사회의 근대적 시선을 발견하게 된다. 장애에 대한 혐오는 자신의 몸을 근대적 시선 안에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 대한 혐오를 갖고 있는 그가 장애를 가진 아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음은 당연한 것이다. 작가는 이 몸에 대한 근대적 사유를 주인공을 통해 부각시키고 낯설게 함으로 고통을 들여다보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고통과 대비되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리는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그가 처한 비극과 대비되지 않았다면 그 문장들이 그렇게 비수처럼 아름답게 느껴졌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건물 안의 상냥한 밤의 자취에 취해 있던 버드의 동공에, 젖어 있는 길 표면과 더없이 무성한 가로수가 반사하는 아침빛이 서릿발처럼 선열하게 닥쳐온다. 그 빛을 거슬러 페달을 밟으며 달려 나가려던 버드는 마치 도약대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42p)”

 

도약대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 때문에 희망조차 느끼게 하는 풍경으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의사를 만나 아들에 대한 설명을 듣고 큰 병원으로 옮기기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집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것을 알기에, 이 글은 비극적 상황에 낀 낯선 문장이 되어버린다.

 

병원 2층의 창이란 창 모두, 거기다 발코니까지를 가득 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막 세수를 마친 듯 하얀 맨얼굴을 아침 햇살에 드러낸 임산부들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특히 발코니에 나와 있는 임산부들은 복숭아뼈까지 닿는 기다란 잠옷을 미풍에 나부끼고 있어 하늘을 날고 있는 천사들의 무리 같았다. 버드는 그녀들의 표정에서 불안과 기대, 그리고 기쁨까지를 발견하고 눈을 내리깔았다.(45p)”

 

아기와 함께 앰뷸런스에 올라타서 창밖을 내다본 순간에 버드의 눈에 들어온 이 광경은, 이런 상황이 아니라 아들을 맞이해서 기쁜 한 남자가 보는 것이라면, 축복하며 배웅하는 거룩하기까지 한 장면이다. 그러나 그녀들의 불안과 기대, 기쁨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독자(讀者)인 나는 그의 격렬한 몸서리침에 공감한다.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말과 달리 상태가 호전되고 있는 아기 때문에 버드는 당황하고, 수치심과 죄의식으로 괴로워한다. 그는 수술을 거부하고 아기를 쇠약사할 때까지 한 개인 병원에 맡기기로 한다. 그러나 약속된 병원에 가는 길에, 우묵배미를 맴돌며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그는 내면의 극심한 갈등이 있음을 보여준다. 차에 함께 타고 있는 히미코와 그는 긴장감 때문에 침묵만을 지키고 있다. 이 갈등의 고조 상태에서 작품이 끝났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작가의 말을 읽다보니, 한 아버지로서 쓸 수밖에 없었던 결말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작가에게 이 글은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과정. 그의 말처럼 그때는 젊은 시절이었고, 자신의 고통을 글로 쓰는 것에도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가이지만 그 한계를 넘을 수 없었던, 한 아버지의 아픔이 보였다.

 

첫아이가 머리에 기형을 지닌 채 탄생하면서 그는 일찍이 없던 동요를 경험하게 되었다.(아사히 신문1994)“고 한다. 그는 거기서 회복되어 가기 위해 이 개인적인 체험을 썼다고 한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도 아들 히카리와 관련된 소재들이 등장한다. 만엔 원년의 풋볼에서는 아기가 죽은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에게 있어 이 고통은 작품에서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남은 인생을 아들과 동행했듯이. 음반을 낸 아들 오에 히카리의 음악 안에서 슬픔의 덩어리를 보는 아버지 오에 겐자부로, 그의 말에서 그 이야기를 되풀이해 쓰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다시 오에 히카리라고 표현된 슬픔의 덩어리는 이전부터 그의 내부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처음 CD가 만들어지고 그것을 스스로 되풀이해 듣는 것을 포함한 교육으로, 그는 이 덩어리를 비로소 대상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슬픈 마음을 되풀이하여 표현하고 그렇게 하여 인생은 깊어진다. 그 슬픔, 혹은 괴로움과의 만남은 비참한 것만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소리를 역시 나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표현에는 그 자체를 만드는 손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힘이 있다고 나는 경험으로써 알고 있다. (소설의 방법오에 겐자부로, 23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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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9-04 13: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진짜 개인적인 체험이네요?? 오에 겐자부로 말만 많이 듣고 한권도 안 읽었는데 갑자기 관심이 생깁니다. ‘여기서 끝냈으면 좋았을‘ 그 뒤에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궁금해요. 읽기 쉽지 않을 것 같긴 합니다만..

그레이스 2023-09-04 13:53   좋아요 4 | URL
가독성은 좋습니다. 다른 작품에 비해서도 잘 읽혀지구요, 무엇보다 난데없이 아름다운 표현들에 감탄하게 되죠. 어떻게 여기서 이런 문장이! 하면서. 오에 겐자부로의 책을 처음 읽으신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청아 2023-09-04 13: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저도 이 책을 읽어보고 싶네요! 그레이스님 만큼 읽어낼 자신은 없지만 몹시 궁금해지는 리뷰입니다.
말, 단어에 대해 그레이스님이 설명하신 부분과 오에 겐자부로의 글 둘다 인상적이에요.

그레이스 2023-09-04 14:04   좋아요 4 | URL
오에의 경험적 내용이어서 그런지 단어 하나하나에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이 느끼는 부정적인 요소들을 두드러지게 해서, 말과 심상이 낯설게 하는, 그렇게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작가의 탁월함이 보이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미미님은 저보다 더 잘 읽어내시겠죠!

서곡 2023-09-04 16: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체험 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는 을유 번역 전에 나온 고려미디어오에겐자부로전집 걸로 읽었죠 말씀대로 오에의 딴 작품에 비해 술술 잘 읽히고요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 기억도 나네요

그레이스 2023-09-04 16:54   좋아요 2 | URL
저도 고려원에서 나온 책 갖고 있다가 을유책 새로 샀습니다. 오에 겐자부로 옛날 책들 읽지도 않고 있다가 새로 나온 책들로 바꿨어요.
<일상생활의 모험>은 절판인데, 다시 나오려나 싶네요
조금 충격이어서

서곡 2023-09-04 1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고려미디어가 아니라 고려원이네요 ㅎㅎ 특유의 집요함이 읽다 보면 질리기도 하다가 때때로 생각나는 성실한 작가입니다 9월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레이스 2023-09-04 16:57   좋아요 1 | URL
예~
서곡님도 행복한 9월 한달 되세요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3-09-05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에 겐자부로 안읽어봤는데 이 책을 읽어봐야겠네요 ㅋ
요새는 어려운책 못읽겠더라구요 ㅜㅜ

그레이스 2023-09-05 09:43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요즘 바쁘신가봐요.
하루키하고도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좋아하실거란 생각이 드네요.

새파랑 2023-09-05 09:41   좋아요 1 | URL
8월에 바빴는데 9월부터는 안바빠서 책읽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

yamoo 2023-09-06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겐자부로 소설 두 권 읽다가 말았어요. 전 되게 재미가 없더라구요. 매우 지루해서 한 내년이나 다시금 읽어보려구요. 그땐 다르겠죠..ㅎㅎ 겐자부로 책은 하도 평이 좋아서 일단 모셔둬요..ㅎㅎ

그레이스 2023-09-06 12:27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럴 수 있죠.
저도 처음엔 힘들더라구요.^^
 
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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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떻게 리뷰를 남겨야 할지 벅찬 책들이 있다. 온통 발췌문만 가득해지고 내 문장을 자연스럽게 연결하기가 힘든……. 보뱅의 책들이 그렇다. 아름답다는 말로만은 표현할 수 없다. 그가 보는 세계는 그에게서 정화되어 글이 된다. 그 글은 아포리즘이 되고 시가 된다. 새롭게 창조된 세상이 된다.

 

원제 ‘La Folle Allure’미친 발걸음정도로 번역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순화하면 무분별한 발걸음이라고 하면 될까? 그러고 보니, 소설의 표제지에 인쇄되어 있는 작가의 글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우리는 이중의 삶을 살아야 한다. 같은 수레에 묶여 서로 자기 쪽으로 미친 듯이 끌어당기는 두 마리 말과 같은, 기쁨과 고통, 웃음과 그늘이라는 두 줄기 피가 우리 마음에 흐르게 해야 한다. 그러니 적절한 보폭을 찾고 올바로 판단하려 애쓰는 눈밭의 기수들처럼 앞으로 나아가자. 그 길에서 만나는 아름다움이 때론 얼굴을 때리는 낮은 나뭇가지처럼 우리를 쓰리게 하고, 목덜미로 달려드는 황홀한 늑대처럼 우리를 물어뜯는다 해도.

-크리스티앙 보뱅


이 소설에는 가벼움과 무거움에 대한 글이 많이 담겨 있다. “나는 진지할수록 웃는 게 좋고,……이름들은 진지하다. ()은 태어날 때부터 당신 위로 떨어지고, 나이가 들수록 두툼한 옷 속으로 스미는 가랑비처럼 점점 더 무거워진다.(29)” 타고난 혈통에 덧입혀진 의미들로 말미암아 무거워진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밀란 쿤데라는 자신의 소설에서 존재의 가벼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독자에게 사유의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보뱅은 이 소설 가벼운 마음에서 계속해서 탈주하는 주인공을 그리고 있다. 무거움으로부터 탈주다. 무거움을 견디지 못한다.

 

화자이며 주인공인 뤼시는 나는 오로르다라고 소개하고는 곧 아니 농담이다. 내 이름은 벨라돈이다. 그리고 마리 뤼드밀라, 앙젤, 에밀리, 아스트레, 바르바라, 아망드, 카트린, 블랑슈다.(29p)”라고 한다. 그녀는 그 누구도 아니고 그 누구도 될 수 있다. 한 가지 이름으로 규정되길 거절하고 규정 될 수 없다는 뜻이리라. 모비딕“Call me Ishmael”이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짧은 문장의 번역과 해석을 놓고도 독자들은 많은 의미들을 만들어 냈다. 이름으로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표적 소설이다. 반면 보뱅의 이 소설에서는 화자가 지나가며 가볍게 농담하듯 여러 가지 이름으로 자신을 소개하며, 오히려 웃음이 자신보다 강하다고 말한다. 이름조차 말할 필요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뤼시의 영혼의 친구는 늑대다. “내 첫사랑은 누런 이빨을 가지고 있다.” 두 살 때 늑대의 우리 안에서 늑대의 배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어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들이 공포에 떨었던 것은 우리 안에서 졸고 있는 짐승이 아니라 우리 위에 적힌 빨간 글씨의 안내판이다. “두렵게 만드는 건 이름이다. 이름이 없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실체 자체도 없다.(11p)” 늑대의 죽음과 함께 그녀의 가출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많은 이름들을 지어냈다.

 

뤼시는 서커스단에서 태어나 자랐다. 부모가 있지만 특별히 누가 부모랄 것도 없이 그 공동체 내의 열세 가정에서 동시에 자랐다. 어릿광대나 곡예사 아주머니 등 어른들에게서 자랐다.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은 직관적이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늑대와 같고 어머니는 고양이 참새, 넝쿨식물, 소금, 꽃가루 같다.

 

뤼시는 네 살짜리 쌍둥이 동생들을 물속에 빠뜨리고, 머리위로 비둘기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싶어 세례를 주었다고 말함으로 어릿광대 아저씨의 교육을 무화시키지만, 그의 몸짓과 표정으로 표현된 복음서 이야기들을 승화된 아름다운 예술적 장면으로 기억한다.

종교에 관한 한, 나는 향유, 맨발, 머리카락, 이 눈부신 삼위일체에 머물러 있다.(41p)”

 

그녀는 글을 쓸 때 잉크로 쓰지 않는다. 가벼움으로 쓴다. 가벼움은 어디에나 있다. “여름비의 도도한 서늘함에 침대 맡에 팽개쳐둔 펼쳐진 책의 날개들에, 일할 때 들려오는 수도원 종소리에. 활기찬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음에, 풀잎을 씹듯 수천 번 중얼거린 이름에, 쥐라산맥의 구불구불한 도로에서 모퉁이를 돌아가는 빛의 요정 안에,…… 저녁마다 덧창을 느릿느릿 닫는 의식에,……(68p)”

 

아름다운 글이다. 그녀가 말하듯 어디에나 가벼움이 있지만, 찾기 힘든 게 우리다. 그렇게 희박해서 찾기 힘들다면, 그 까닭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기술이 우리에게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받아들이기! 나로서는 실천하기 힘든 태도다. 그런 기술을 장착할 수 없는 것은 불안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해도 될까? 이렇게 생각나는 대로 말해도 될까? 그 뒤에 다른 의미들이 또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서커스단에서 태어나서 이리저리 유랑하고, 다툼이 일상인 부모가 불편하면 다른 트레일러를 찾아가고, 가출이 습관이 되어버린 아이 뤼시는 불행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 속에 감추어진 가벼움으로 글을 쓰는 능력은 그러한 삶에서 갖게 된 것이다. 누구에게나 그렇진 않겠지만 그녀에겐 축복이 되었다.

 

마주할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바로 그때가 되면 생각하는 것, 어떤 일을 할 때 왜 하는지 몰라도 할 수 있다는 것, 가벼움으로 본 삶에 대한 깨달음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 “사실 감정의 깊이는 사랑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가 많다.” “부부생활을 더딘 죽음을 견뎌내는 커다란 짐승과 같다.” 그리고 궁극적인 질문 영혼은 무엇인가?”이른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은 그녀에게 이런 질문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녀는 자신의 질문들에 바람을 쐬어 주고 응시하기 위해 자주 홀로 머문다. 그녀는 누군가의 구속을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다.

 

나의 늑대를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눈에 비치는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며, 그들이 다가오는 것 같을 때라도 실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는 것과, 모든 건 처음부터 사라지며 소멸해간다는 것이다. …… 그 때문에 오히려 주저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으며, 그 생각으로 나는 이 순간에도 노래 부를 수 있다.(154p)”

 

누군가에게는 미친 발걸음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가벼움을 찾아가는 걸음이다. 그만큼 무게를 덜어내기가 쉽지 않으므로 갈지자로 보인다. 유목민처럼 태어나고 살았던 그녀일지라도. 수많은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보면 그 가벼운 마음의 행보가 미친 듯 보인다. 그녀와 달리 오늘도 모든 상황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나를 본다. 무겁다. 무엇이 나에게 더 좋은 삶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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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3-07-31 15: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너무 좋아서 주변에도 선물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에게는 웃다가 벅차서 눈물 나는 가벼움이었어요.
설명하기 힘들어서 독후감 쓰지 못했는데 그레이스님의 리뷰로 대리만족합니다.ㅎㅎㅎ

그레이스 2023-07-31 15:07   좋아요 3 | URL
미미님도 그러시군요.
그냥 책 한권으로 간직하고 싶은 그런 글들이죠. 뭔가 감상을 쓰는게 훼손하는 것 같은! ㅎㅎ

거리의화가 2023-07-31 15: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순하게 받아들이기, 생각만큼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문장들이 참 아름답네요. 저도 언젠가 보뱅 만나보겠습니다^^*

그레이스 2023-07-31 15:28   좋아요 2 | URL

정말 넘 아름다운 문장들이예요
제 책상에는 환희의 인간이 올려져 있습니다.
절판된 책들도 다시 나왔으면 좋겠네요.

페넬로페 2023-07-31 15: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 이 책 다 읽었는데~~
다시 읽으려고 해요.
제 나름의 의미를 아직 찾지 못했어요.

그레이스 2023-07-31 15:29   좋아요 3 | URL
예~
저도 다시 읽게 되면 놓친게 많은걸 알게 될 것 같아요

얄라알라 2023-07-31 1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영광입니다!!!!

[가벼운 마음] 마지막 페이지까지 다 읽고, 바로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었을 정도로 보벵의 문체와 매력적인 인간형에 반했었는데요. 그의 문장에 압도되다 보니, 찬탄만 나오지 독자로서 어떤 문장으로 정리해야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저는 주인공이 남편을 떠나 계단을 내려올 때 내던 그 소리가, 책 읽은지 몇 달 지나고 난 지금 가장 먼저 생각납니다 그레이스님께서는 ‘이름‘에 주목하셨네요. ˝ 이름조차 말할 필요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그레이스님 말씀)___ 혹 제가 이 책을 또 읽을 기회가 생긴다면, 그 땐 그레이스님의 시선을 상상하며 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다시 읽고싶어지네요

그레이스 2023-07-31 20:16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댓글에 감동받았어요
저도 말씀하시는 그 부분 너무 인상적이었어요.
티타티티타티, 티타티타타티...~♡

제가 영광입니다^^

얄라알라 2023-08-01 12:43   좋아요 1 | URL
아!!! ㅋㅋ맞아요 그레이스님

˝티타티티타티, 티타티타타티....˝

자꾸 그 부분에서 무용수의 몸짓을 상상했는데

티타티티타티, 티타티타타티..
요거 였군요^^

2023-08-01 10: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8-01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은오 2023-08-02 18: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 가벼운마음 진짜 좋죠!!!!! 🥹🥹🥹🥹🥹🥹🥹🥹🥹🥹🥹🥹🥹🥹🥹🥹🥹
저도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보뱅 에세이도 한권 읽었는데 이것도 좋았지만 역시 가벼운마음이 최곤거같아요.. 진짜.. 너무 좋아....ㅠㅠ

그레이스 2023-08-02 21:31   좋아요 1 | URL

다들 좋다고 하시니, 저도 뿌듯합니다.
보뱅읽기는 계속되어야 할듯요.

얄라알라 2023-08-03 01: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제 보뱅의 파란책을 빌려왔는데 제목이 갑자기 기억이 안남이요...혹시 은오님 말씀하시는 에세이일까?^^ 기억력을 구박하며 서가로...가봐야겠습니다 ㅎ

그레이스 2023-08-03 05:14   좋아요 1 | URL
환희의 인간!
저도 그거 읽으려고 해요~~

얄라알라 2023-08-05 03:54   좋아요 1 | URL
^^ 그레이스님

온통 파란 그 책 제목은 <인간, 즐거움>이네요 저도 이후 찾아봤어요

1984books처럼 편집이 예쁘지는 않아서 말 그대로의 파란색이예요^^

저도 나중에 <환희의 인간> 읽어볼게요 그레이스님

그레이스 2023-08-05 07:59   좋아요 0 | URL
그건 없는데...
찾아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ㅠㅠ
절판된 책이군요.
도서관으로....!
 

그녀의 글은 너무 솔직하고 디테일해서 당황스럽다. 자신을 소재로 한 글인데, 이렇게까지 밝혀도 괜찮을까 하는 염려가 된다진정한 장소를 읽고서야 그녀의 의도와 글의 의미들을 조금 더 선명하게 알게 되었다. 

세월을 읽을 때는 그런 난감한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떠올리게 하는 사진 속 그녀를 불러내어,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과 개인의 사건을 서술하는 방법이 인상적이었다.

다음으로 읽은 책, 단순한 열정에서는 작가 서론부터 난감했다. 이 소설에서 어떤 메시지를 발견해야 하는가?’에 답을 찾는데 조금 지체 되었다. 연인을 만나기 전까지의 기다림, 설레임, 무기력함, 열정, 상실감, 그리움, 나이 차, 국적, 외도와 같은 일들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그동안 지향해왔던 사유를 무시하고, 지양해왔던 태도를 연인에게서 수용하는 듯한 모습이 특별하다. 그래서 아마도 비평가들의 비판을 받게 된 것은 아닐까? 이 작품중간에 그러므로 자기가 겪은 일을 글로 쓰는 사람을 노출증 환자쯤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노출증이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는 병적인 욕망이니까.(36p)라고 덧붙이는 이유일 것이다.

 

그럼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항상 자신이 제물이 되어 자신이 속한 종()이 처한 사회적 상황을 서술하는 작가다. 50에 들어선 경계에 서있는, 단순히 열정을 불태우려면 사회적 관념을 뛰어넘어야 할 여성 지식인이 가진 욕망을 드러낸다. 헤어진 후 그녀의 아픔은 육체의 상실에 대한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빈옷장부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첫 장면 역시 불법 낙태 시술을 받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하고 있다. 식료품점의 딸 드니즈 르쉬르는 진통이 오길 기다리며, 그녀의 부모, 살고 있는 환경, 사립학교, 남자(아이)들과의 위험한 만남에 대해 서술한다. “언제나 우등생이며, 일요일에는 짧은 발목 양말을 신는 얼간이이자 장학생(12)”인 그녀가 낙태진통을 기다리는 상황까지 오게 된 과정이다. 첫 페이지에 적힌 텅 빈 옷장에 가짜 보물을 간직해 두었지로 시작하는 폴 엘뤼아르의 시는 유년의 유산들-부모로부터, 어른들로부터, 학교교육으로 받은-이 거짓된 것들이었음을 상징한다. 그녀는 사방에서 농락당했다(15p)”고 말한다. 바칼로레아를 통과하고, 남자를 가볍게 만나는 것조차 사회적 격차에서 온 열등감, 모욕감을 가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자의 자리아버지의 죽음과 장례식은 그에 대한 기억과 글을 불러낸다. 그녀가 갖고 있는 열등감과 수치심의 근원에 부모님이 있다. 그녀가 빈옷장에서 밝혔듯이 그들의 계급이 갖고 있는 삶의 습관과 특징들로 인해, 부모님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 나이의 소녀에게 많은 독서와 성찰과 수업이 필요하다. 공부를 하고 사립학교를 다니며 부모와의 격차를 경험하게 되고, 특히 아버지와 소원해 지게 되었다. 책을 전혀 읽지 않는 그의 사투리가 섞인 언어는 그의 계급을 특징 짓는다. 이 언어는 두 사람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할아버지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버지의 삶, 아버지에 대한 추억, 아버지로 인해 겪었던 부끄러움, 그로 인한 자신의 수치심과 죄의식……. 그녀는 교양 있는 부르주아의 세상으로 들어갈 때, 그 문턱에 두고 가야 했던 유산(103p)”을 밝히는 일을 마쳤다.

 

글을 쓰며 하류라 여겨지는 삶의 방식에 대한 명예회복과 그에 따른 소외를 고발하는 일 사이에서 좁다란 길을 본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우리의 것이었고 심지어 행복하기도 했으며, 우리가 살던 환경의 수치스러운 장벽들(우리 집은 잘 살지 못 한다는 인식)이기도 했으니까. 행복이자 동시에 소외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아니 그보다도 이 모순 사이에서 흔들리는 느낌이다.(남자의 자리48p)”

부끄러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던 장면으로 시작한다. 역시 충격적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싸움이 끝나고 모두 산책을 나갔다 돌아와 다시 식당 문을 열었다는 것이다. 이런 다툼이 그들에게는 일상이었단 의미일까? “1952615일의 일이다. 내 유년 시절의 정확하고 분명한 첫 번째 날.” 그 사건이 그녀의 부끄러움의 핵이 되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그녀의 사춘기와 청년기에 자리 잡고 있는 주된 정서는 수치심과 분노다. 식당과 잡화점을 잇는 통로에서 숙제하고 책을 읽으며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던 기억 역시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게 하는 환경이었다.

그녀는 사립학교에 들어가면서 스스로를 그곳의 품위와 완벽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105p)”이라 인식한다. 그리고 부끄러움 속에 편입(105p)”되었다고 고백한다.

 

나에게 가장 슬프게 기억된 장면은 비아리츠 해변에서의 그들이다. “옷을 다 입고 신발을 신은 채 비키니 차림의 그을린 몸들 사이로 해변을 걸어 다니던(117p)” 딸과 아버지는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자본을 소유하지 못한 소외당한 계급임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책이 나온 뒤에는 다시는 책에 대해 말도 꺼낼 수 없고 타인이 시선이 견딜 수 없게 되는 그런 책, 나는 항상 그런 책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열두 살에 느꼈던 부끄러움의 발치에라도 따라가려면 어떤 책을 써야할까?(126p)”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쓴 글이다. 돌아가시기 전 잠시 자신과 함께 살던 어머니,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서 장기체류하던 어머니, 그리고 어린 시절의 어머니에 대해 쓴 일기 형식의 글이다. 딸이 느끼는 주된 감정은 죄책감이다.

다른 딸에서 다른 딸이란, 자신이 태어나기 전 어린 나이에 죽은 언니다. 사진으로밖에 보지 못했던, 어른들의 기억에만 존재하던 다른 딸이다. 언니의 사진과 자신에게 감추던 어른들의 비밀스런 대화 속에서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착한 딸은 작가의 정체성을 이루는 어두운 부분이다. 다른 딸에게 편지를 쓰며 과거를 회상한다. 어른들은 죽은 다른 딸의 모습과 성품을 작가에게 투영했고 그것은 그녀의 일부가 되었다.

사진의 용도는 내가 가장 난감해했을 만한 작품이었지만, 가장 마지막에 읽어서인지 그냥 수월하게 넘어갔다. 61세의 아니 에르노와 22살 아래 마크 마리가, 그들의 사랑의 흔적을 사진과 그 사진에 대한 글로 남긴 책이다. 61세의 아니 에르노는 유방암 치료 중이었다. 카테테르를 꽂고 방사선 치료를 위한 표식을 그려넣은 몸의 묘사, 수술 후 베네치아로의 여행에서의 이벤트는 드러냄의 의지다. 감추고 억압한 여성의 몸을 폭로하는 것이다.

 

프랑스 여성들의 11%가 유방암에 걸렸고, 유방암을 앓고 있다. 삼백만 여성이 넘는다. 꿰매고, 스캔하고 붉은색, 파란색 그림으로 표시하고, 방사선을 쬐고, 재건한 삼백만의 가슴이 셔츠와 티셔츠 안에 감춰져 있다. 보이지 않는다. 정말이지 언젠가는 과감히 보여 줘야 할 것이다. [내가 내 가슴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이 드러냄의 의지에 동참하는 것이다.](85p) 

진정한 장소야 말로 아니 에르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가이드북이다. 대담 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에서, 그녀는 현재 살고 있는 세르지에서의 생활과 파리로부터 벗어나 있는 일상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 한다. 공간과 인간에 대한 그녀의 사유를 엿보게 된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주거환경과 지역에 관한 이야기는 여러 작품에 기록된 사실들을 통합해서 볼 수 있게 해준다. 가족이 그녀에게 미친 정서들, 독서, 그리고 글쓰기……. 빈옷장』 『남자의 자리』 『얼어붙은 여자』……『세월등 작품에 관한 대담이 이어진다. ‘진정한 장소란 작가의 정체성과 항구성을 갖게 하는 그녀를 그녀 되게 하는 진정한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저를 최후의 참호로 몬다면, 그래도 스스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느끼는 곳은 역시 거기(글쓰기)이니까. 저만의 진정한 장소이죠.(138p)” 

이 책에서 그녀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과 삐에르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를 읽었다. 구별짓기는 아직 상권만 읽었지만 그녀가 여기서 무엇을 길어냈는지 짐작하게 된다. 계급과 취향과 아비투스에 관한 사회학자의 글은 계급 전향자로서 자신과 부모의 갈등과 유년기에 형성된 수치심에 대해 객관적으로 들여다 볼 창을 만들어 주었다는 생각이다.

사물들은 그녀가 부르주아를 향한 문턱을 넘어가 파리 생활을 할 때 경험했을 자본주의를 떠올리게 했을 것이다. 나처럼 전율했는지 모르겠다.

 

쁘띠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사회세계에 대한 쁘띠 부르주아적 경험은 우선 자신의 신체와 언어를 아주 수줍어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곤란함으로부터 시작되는데, 이들은 신체와 언어를 한 몸처럼 느끼는 대신이 양자를 타인의 시선으로 외부에서 바라보며, 스스로를 감시하고, 교정하고, 수정한다. 그리고, 소외된 대타 존재 un étre-pour-autrui aliéné를 재소유화하기 위한 절망적 시도에 의해 과잉교정과 서투른 시도 속에서 계속 헤매다 스스로를 타인의 신체와 언어의 소유대상으로 노출시켜 버리고 만다.(구별짓기삐에르 부르디외,334p)”

 

아니 에르노의 작품 읽기는 잠정적으로 여기에서 멈추기로 했다. 오늘도 출판 소식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조만간 몇 권을 보게 될 거라 생각된다. 조르주 페렉 읽기가 이어질 듯하다 오늘도 두 권을 더 주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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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05-31 04: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가에 관해 유익한 정보를 배워 갑니다.

그레이스 2023-05-31 06:48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3-05-31 08: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기서 멈추기로 했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시지만, 소논문 쓰셔도 될 수준으로 섭렵하셨는걸요. 저는 달랑 1권이지만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두 번 읽을 독자로서 무슨 의미로 그레이스님께서 이야기하시는지 조금은 알것 같아서 좋았어요.

근데 저 새물결의 [구별짓기]는 절판이던데, 그레이스 님께서는 가지고 계시네요^^ [단순한 열정]에서 음악취향에 대한 묘사였던가? 저도 브루디에를 떠올렸어요.

그레이스 2023-05-31 08:22   좋아요 3 | URL
ㅎㅎ
과찬 감사합니다^^
구별짓기 좋은 책인데, 번역을 좀더 친절하게 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더라구요.
다시 재출간 하기엔 프랑스 사회에 대한 진단이 시간이 많이 흘러서 out of date 한 면이 있죠.
읽을 필요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히 부르디외의 책 몇권을 갖고 있었네요.

페크pek0501 2023-05-31 16: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완전 독서광이십니다. 저는 아니 에르노 작품 중 무엇부터 읽어야할지 모르겠던데, 좋은 참고가 되겠습니다.

그레이스 2023-05-31 16:40   좋아요 3 | URL
^^
언제부턴가 한 작가 시작하면 연결해서 읽게 되더라구요
감사합니다 ~

2023-05-31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3-05-31 16:47   좋아요 1 | URL
아!
감사합니다.
고민해볼께요~~^^♡

레삭매냐 2023-06-01 0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K문고에서 선 자리에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
을 다 읽고 나서 거의 충격...

노벨상 받은 다음에 산 책은
아직 펴 보지도 못했네요.

페렉의 책들도 수집해 두었지만
여전히 -

그레이스 2023-06-01 12:42   좋아요 0 | URL
<단순한 열정>은 첫 페이지 빼고는 그래도 괜찮은듯요^^
<사진의 용도>는 더 충격이죠^^
저는 페렉 두권 더 받았습니다.^^

베터라이프 2023-06-22 1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레이스님의 분석대로 진정한 장소는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

그레이스 2023-06-22 23:40   좋아요 0 | URL
응원합니다~♡
 
사물들 마카롱 에디션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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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너무 거대하고, 보이지 않는다. 도처에 있고, 우리 안에 있다. 우리의 혈관에 흐르고, 생체화되어 있는 무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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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5-30 0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시무시한데요, ㅠㅠ

그레이스 2023-05-30 09:54   좋아요 1 | URL
ㅎㅎ
작가가 우리 안에 있다라고 한 적은 자본주의!
상대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잘 썼어요^^
 
코스타리카 라 알퀴미아 #4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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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열면서 풍겨나오는 내가 좋아하는 향, 함께 온 책에도 배었으면. 조바심내며 드립한 후, 한모금. 산미가 있다고 해서 망설였는데, 부드럽고 신선하다. 입안에 남는 체리 감미, 잔향때문에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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