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 지나고까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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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죽음을 경험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에 대한 태도로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된다. 주인공 게이타로는 화자들로부터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역할은 수화기를 귀에 대고 세상을 듣는 일종의 탐방에 지나지 않았다”(344p) 이제 대학을 졸업한 게이타로가 세상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방식이다. 청취자의 역할로 그들의 인생을 관조하고 있다.

 

모리모토, 다구치, 마쓰모토, 지요코, 스나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리모토로 시작해서 마쓰모토로 끝나는 긴 이야기의 중심에 스나가가 있고, 그의 태생과 내향적 성품,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실상 주인공은 스나가라고 할 수 있다. 게이타로는 타인의 이야기를 대충대충 듣고 다녔을 뿐이고 그는 단지 일자리를 얻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청취자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옮긴 것은 에크리튀르(Écriture)의 영도(零度)’, 욕망과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글쓰기에 가깝다.

 

작가는 자신의 자아를 여러 인물들에 투영시키고, 그 인물들의 삶에 자신의 경험을 넣어 번뇌와 마음의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면서 자아를 탐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아에 대한 순수한 에크리튀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글의 곳곳에서 묻어나는 쓸쓸함의 정서는 바르트가 추구했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게이타로는 거의 성공했으나 나쓰메 소세키는 실패했다. 이 작품에서 본 역설이다.

 

일자리를 얻으려고 친구 스나가의 소개로 그의 이모부 다구치를 찾아가고, 일을 얻는다. 그 일 이란 다른 사람의 뒤를 밟는 것, 그 사람은 다구치의 매제 마쓰모토이다. 이 다구치의 장난과 같은 지시를 통해 고등유민마쓰모토를 알게 된다. 그의 조카 다구치의 딸 지요코에게서는 마쓰모토의 아픔을 듣게 된다. 부유하고, 여행을 하고 즐기며 사는 학식이 풍부한 사람 뒤에 고통스런 기억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쾌감을 느낀다.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느낀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지요코와 스나가의 관계를 흥미롭게 보던 게이타로는 두 사람이 어렸을 적, 부모들에 의해 정혼한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스나가로부터 지요코에게 소극적인 이유를 듣게 된다. 정해진 관계라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이모의 딸일 뿐 전혀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앞에 나타난 다카기로 인해 질투를 느끼고 묘한 감정을 드러낸다. 외부로부터 자극받은 욕망이다. 그는 이 삼각관계 밖으로 도망친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들여다보고 의아해 한다.

 

질투심만 있고 경쟁심을 갖지 못한 내게도 그에 상응하는 자만심은 이따금 음침하고 어두운 가슴 어딘가에서 어른어른 피어올랐던 것이다.”(279p)

 

그는 자신의 모순을 충분히 연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요코에 대한 자만심이라니……. 거침없고 자유로운 지요코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고 경쟁을 피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은 정말 그녀에게 끌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다카기의 등장에 질투를 느낀다. 그 질투가 다카기 때문인지 지요코를 정말 좋아해서인지 모호하다. 자신을 흔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 곳을 떠나 홀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의 자만심은 가슴 어딘가에 있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 어딘가에 구체화시키지 못했던 질문, 불안, 외로움이 있었다.

 

이런 감정들을 호소하기 위해 찾아간 외삼촌 마쓰모토에게서 출생의 비밀을 듣는다. 스나가는 여행을 떠나고, 외삼촌에게 매일 편지를 보내온다. 불안해하는 어머니와 외삼촌을 안심시키기 위해 쓰기 시작한 편지는, 안으로만 향하는 생각을 외부의 풍경으로 돌리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거듭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노력이다. 그의 편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에 관한 행복한 서술로 가득 차 있다. 가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일상을 담기도 한다. 이것도 스나가가 시도한 에크리튀르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쓸쓸한 그림자를 남긴다.

 

제가 이렇게 잡다한 일을 신기한 듯이 알리면 외삼촌은 별난 놈이라며 필시 쓴웃음을 짓겠지요. 하지만 이는 여행 덕분에 제가 나아졌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자유로운 공기와 함께 교제하는 일을 처음 배웠습니다.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일일이 쓰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게 된 것도 결국은 생각하지 않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요? 생각하지 않고 보는 것이 지금의 제게는 가장 편한 것 같습니다. 짧은 여행으로 제 신경이나 버릇이 고쳐졌다면 그 방법이 너무 천박해서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보다 열 배나 천박하게 어머니가 저를 낳아주었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343p)

 

얼마나 쓸쓸한가 하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보내오는 편지는 마음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이 한 줄을 읽는 순간, 모든 글은 다 사라진다. 앞글의 심상이 바뀌어 읽히게 된다.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고통과 외로움을 보게 된다.

 

마음이란 때로 가볍고 천박해보이기도 하고, 주체할 수 없이 무겁기도 하다. 상념이 가득한 마음에 돌을 던져 파문이 일면 저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았던 존재의 불안과 두려움, 고독, 공포와 같은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 돌이 타인의 말이 될지, 열등의식을 느끼게 되는 사람의 출현이 될지, 상실이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 거대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놀라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슬픔에 압사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전의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여행을 떠난다.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그 여행지에서 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자신 안으로 끝없이 파고 들지 않도록. 그리고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훌륭한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자상한 사람을 찾아”(312p)내기를 바란다.

 

소세키가 이 작품에서 마음과 자아를 멀찌감치 떨어져 관조했다면, 행인에서는 거리가 더 가까워진다. 그 탐사는 마음에서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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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27 15: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마음에 관한 책이군요. 그런데 약간 거리를 둔 마음이라니~ 뭔가 출생의 비밀도 등장하고 어려운 느낌이 드네요 😅

그레이스 2021-09-27 21:04   좋아요 5 | URL
어렵지 않아요
제가 그렇게 써놓아서 그럴까요?
행인과 마음을 먼저 읽어서... 이 작품 읽는게 어렴지 않았어요
순서대로 하면 이 작품이 먼전데 제가 나쓰메 소세키를 행인으로 입문해서...^^ 순서가 바뀌었네요

소세키의 유년기가 불행해서 그 상처가 곳곳에 배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mini74 2021-09-27 16: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스나가의 편지가 뭔가 너무 슬픈데요 ㅠㅠ

그레이스 2021-09-27 16:15   좋아요 5 | URL
굉장히 밝고 가볍게 썼는데 여기서만큼은 ...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아요^^

scott 2021-09-27 16:2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롤랑 바르트의 에크리튀르ecriture‘ 개념이 소세키 작품 분석에도 등장 하네요
랑그-스틸 그리고 에크리튀르

얼마전에 읽었던 우치다 다쓰루의 글에서 일본 문학가들이 사회적 행동 전체를 규정하는 집단 사고형식으로 계층화 시켰다는 글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그레이스님의 리뷰를 통해서 소세키의 춘분 새롭게 읽혀지네요. ^ㅅ^

그레이스 2021-09-27 16:33   좋아요 5 | URL
잘은 모르지만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제가 잘 적용했는지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scott님 리뷰 잘 읽었어요~♡

막시무스 2021-09-27 17:1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제목이랑 리뷰 읽고 소세끼작가(‘소세끼가‘라고 표현이상해짐요ㅠ)가 영국인가에서 유학했다더니 바르트의 영향을 받았은 건가 생각했습니다. 근데, 마침 사무실에 <갱부>가 있어서 연표를 봤는데 <춘분지나고>고가 1912년 연재작이고, 바르트는 1915년 생이네요! 대박!ㅎ 소세끼님에 대한 기대가 점점 더 올라가고 있습니다.ㅎ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소설적 글쓰기에서는 적시하신 에크리트리의 영도가 사실상 불가능하거나 가능하더라도 왠지 독자에게 받아 들여지기는 어려워 질 것 같은 느낌인데 이 소설이 더욱 더 궁금해 지네요!ㅎ

그레이스 2021-09-27 17:18   좋아요 4 | URL
불가능하죠
바르트 자신도 시인한걸로 알고 있구요^^
고백을 듣고 그 사실을 옮기는 게이타로가 그 시도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저의 해석)

막시무스 2021-09-27 17:21   좋아요 5 | URL
그래도 문학적으로 이런 시도를 해볼수 있다는 자체가 대가인것 같아요!ㅎㅎ..관심지수가 좀 더 상승했습니다..이 형님 막 좋아지는데요.ㅎㅎ..즐건 저녁시간되십시요!ㅎ

그레이스 2021-09-27 17:22   좋아요 4 | URL
막시무스님도 즐거운 저녁시간 되시구요, 또 즐거운 독서 하시길요!

희선 2021-09-28 0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나가와 지요코는 《마음》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하네요 마음이라는 말을 봤을 때도 《마음》을 떠올렸군요


희선

그레이스 2021-09-28 05:15   좋아요 2 | URL
🙂
 
춘분 지나고까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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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로서 인간의 삶을 관조하고 마음을 탐구한 소설이다. 작가의 자아가 여러 인물들에 투영되어 있다. 인간의 자존심은 존재의 외로움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거듭되던 생각과 번뇌를 끝내고, 여행지에서 보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복한 편지는 에크리튀르, 쓸쓸한 그림자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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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 2021-09-26 10:0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요즘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을 하나씩 독파하고 계시는 것 같아요.ㅎ
이 작품은 새해 첫날부터 춘분 지나고까지 쓸 작품이어서 이 제목을 붙였다고 하죠.
<문>은 니체의<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아무데나 펼쳐서 ‘문‘이란 단어가 눈에 띄어 그걸 제목으로 썼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어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 그레이스님.^^

그레이스 2021-09-26 13: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제가 알기로는 제목을 지어달라는 요청에 소세키가 그냥 출판사에 맡겼다고...
그후도 문도 다 그렇게 지어졌다고 합니다.^^
원서로 읽으시는 모나리자님 부럽습니다.

막시무스 2021-09-26 12: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존심이 존재의 외로움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말씀이 맘에 와 닿네요!ㅎ 제목이랑 표지가 잘 어울리구요! 즐건 휴일되십시요!ㅎ

그레이스 2021-09-26 13:32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부분에 대한 깨달음이 수확이예요.
질투심은 느끼나 경쟁심은 싫고 자만심은 갖고 있는 스나가라는 사람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니 외로움이 보였어요
자존심에 대해 생각해보았구요.

mini74 2021-09-26 12: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현암사전집은 볼때마다 예쁘고. 소장욕구를 자극하는, 거기다 그레이스님 글까지 ㅎㅎ

그레이스 2021-09-26 13:08   좋아요 2 | URL
저는 오래된 다른 출판사 책들 처분하고 이것만...! 기분좋은 전집이예요^^

모나리자 2021-09-26 1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네..신문사가 제목을 재촉하자 제자에게 시켜서 얼른 짓게 했다죠.ㅎ

그레이스 2021-09-26 13:31   좋아요 1 | URL
신문사! 맞아요^^
제자였군요
편집부인줄 알았는데...
 
갱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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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인생이란 말이 있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 삶을 의미한다. 그만큼 갱도에서 노동하는 삶은, 인생의 막다른 길을 만난 사람들의 희망 없는 선택이었다. 그런 갱부가 되기 위해 주인공은 걸어가고 있다. 19세의 방황하는 청년은 길에서 죽더라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고 집을 떠났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갈 생각이었던”(26p) 그가 임자, 일할 생각 없나?”(25p)라고 말을 던진 사내 쪽을 돌아본다. 자기도 모르게 그를 향해 가는 발걸음은 사람의 인력(引力)이 그만큼 강하다는 사실”(26P)자신이 박약한 존재”(27P)라는 것을 입증한다고 생각한다. 19세의 청년은 홀로 길에서 불안했다. 갱부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자신이 그 생활에 적합한 사람인지 상관없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또 다른 불안함으로 향한다.

 

갱부가 되기 위해 가는 길은 기차를 타고, 걸어서 산을 넘고, 낯설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는 기행문의 페이지가 된다. 역에 내려 마주친 낯선 고장의 경치는 숙취에 시달리는 몸처럼 흐리멍덩했던 영혼을 깨우는 명료한 풍경이었고, 역참을 나서서 큰길 한가운데서 바라본 길은 한없이 길고 끝까지 외줄기”(79p)로 이어졌다. 인생에서는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강렬한 인상을 받는 그런 순간이 있다.

 

임자, 일할 생각 없나?” 조조씨의 제안은 광산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서 계속되고,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을 잘 알아보는지, 그의 시도는 실패하지 않고, 두 사람이 합류한다. 빚을 지고 길로 내몰린 붉은 담요’, 배고픔을 해결하는 본능만 남은 꼬맹이’, 이들은 시선을 의식하거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예의라고는 없는 부류다. 불편하다. 좋은 집안의 도련님인 주인공과는 다르다. 그런데 이들을 만나고 주인공의 갈팡질팡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고 고백한다. 이들은 광산으로 안내하는 조조씨를 따라, 거듭해서 다가오는 산등성이를 넘고 밤길을 걷는다. 높은 산 고개를 향해 밀려오는 구름에 휩싸인 네 사람의 풍경은 압권이다.

 

네 사람 다 구름에 떠밀리는 듯한, 휩싸이는 듯한 모습으로 구름 속을 올라갔다. …… 산 채 묻힌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일을 말한다. ……내 몸으로 내 몸을 보증할 수 없는, 또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의 구름은 정말 기쁜 것이었다. 네 사람이 떨어지기도 하고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고 뭉치기도 하면서 구름 속을 걸어갈 때의 경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세계에서 분리된 네 개의 그림자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고 네 개인 그대로 끌리어 합치듯이, 튕겨져 멀어지듯이, 또한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개가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구름 속을 오르지 걷기만 할 때의 경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138p)

 

동행의 뒷모습은 여행자의 불안을 사라지게 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고, 기억에 각인된다.

 

마침내 구리광산에 도착한 그가 숙소에서 만난 갱부들은 그를 당황스럽게 한다. 


고개를 들고 보니 조금 전의 그 얼굴들의 눈이 모두 이쪽을 보며 빛나고 있었다. “이봐!”하는 소리가 어떤 얼굴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얼굴에서 나왔다고 해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어떤 얼굴이나 다 사나웠고, 자세히 살펴볼 것도 없이 그 거친 얼굴에 경멸과 조롱과 호기심이 분명히 새겨져 있다는 것은 고개를 들자마자 발견한 사실이었다.”(169p)

 

이 장면은 시각과 청각을 사용해서 주인공의 두려움을 극대화시키는 탁월한 유미주의적 표현이다. 나도 이봐!”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고, 사나운 낯빛으로 일제히 이쪽을 보고 있는 얼굴들의 집합 속에서 당황하는 주인공이 된다.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소설에도 그렇듯 이 작품에서도 그림 같은 표현은 탁월하다. 항상 숨을 멈추고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들의 조롱 속에서 갱부가 되겠다는 주인공의 고집은 젊은 날의 치기일지 모른다. 이 광산에서 갱부가 되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가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불안일 수도 있다. 굿길(갱도)을 따라 들어간 주인공의 끝없는 하강도 동행의 뒷모습을 따라가는 길이다. 가이드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굿길의 가장 밑바닥에서 만난 한 사람은 그에게 여행을 끝내고 자신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 “청년기는 정()의 시절이야.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정의 시절에는 실패하는 법이네. 자네도 그럴 거야. 나도 그랬어.”(279p)라고 한 그는 자신의 실패를 통해, 청년기의 괴로움을 공감해주고 조언해줄 수 있는 어른이었다. “야스씨의 훈계가 나의 초지(初志)를 단번에 뒤집을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갖고”(283p) 주인공의 귀에 울렸다.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당분간은 이 사람 곁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인생에서 누구와 만나는가 누구와 동행하는가는 중요한 사건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만나고 동행했던 사람들이 다 소중한 사람이었고, 알게 모르게 나는 그들을 의지했다는 사실이다. 19세의 청년에게는 더욱 중요하다향방이 없는 인생의 길에서도 동행은 잊지 못할 아름다운 순간을 만든다. 그리고 인생의 좌표는 수정된다.

  

낯선 사내를 무작정 따라 나서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며, 인신매매를 떠올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그 여정을 쫓았다. 그가 그 길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는 여러 번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며 그가 도착할 곳이 궁금하고 걱정이 되었다. 조조씨의 무심한 듯 능숙한 제안은 도덕 감정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막장인생처럼 보이는 태도는 보는 사람을 더욱 초조하게 한다. 광산에 도착한 주인공의 외로움이 내게로 전이된다. 갱도의 밑바닥으로 내려가는 그의 이동은 추락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동행의 존재는 그를 혼자 걷게 하지 않았고, 충동으로 치닫지 않도록 해주었다는 깨달음에 이른다. 갱도의 바닥에서 만난 야스씨가 중요한 의미가 되듯, 우리는 절망의 가장 밑바닥에서 큰 전환을 만나기도 한다. 사람으로 인해서! 그리고 갱도에서 올라가는 것이 더 힘든 것처럼, 삶의 제자리로 가는 길도 멀고 힘이 든다. 그럼에도, 돌아가려는 의지를 갖게 된다. 갱부의 삶을 엿본 주인공은 제자리로 돌아갔을까?

 

손을 놓치기라도 하면 시커먼 어둠 속으로 거꾸로 곤두박질칠 것이다. 놓치지 않으려고 하면 어깨가 빠질 것만 같았다. 나는 일곱 번째 사다리의 중간쯤에서 화염과 같은 숨을 내뱉으며 노동의 어려움을 절감했다. 그러자 뜨거운 눈물이 눈 안 가득 차올랐다.”(2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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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19 2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그레이스님의 독서 👍
갑자기 왜 책 제목이 광부가 아니고 갱부인지 궁금해져서 찾아봤어요 ㅎㅎ 인터넷에는 안나와 있는 같아요 ㅜㅜ

그레이스 2021-09-19 23:10   좋아요 3 | URL
광부는 광산의 형태에 따라 갱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 경우도 있을테고 갱안으로 들어가서 일하는 광부를 갱부라고 표현하는것으로...
여기서는 갱도를 굿길이라고 번역했어요
굿길은 순우리말!

사금을 캐던 사람들도 광부!^^

그레이스 2021-09-19 23:10   좋아요 3 | URL
광산에서 광물을 캐는 노동자는 광부,
갱도내에서 작업을 하는 사람은 갱부.

새파랑 2021-09-19 23:18   좋아요 3 | URL
아하 ㅋ 저는 왠지 갱도 안에 들어가야만 광물을 캘수 있다는 선입견이 있었나봐요. 저런 차이가 있었군요 🙄

막시무스 2021-09-19 23: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삶의 제자리로 돌아갔나요? 의지만 가지고 끝났나요?ㅎ 근데 뜽금없이 소설의 구성이 단테 신곡을 닮았다는 느낌은 왜 드는건지!ㅎ 소세키 소설에 대한 편견으로 뭔가 우리 개화기 분위기 같을꺼라 생각했는데 올려주신 후기보면서 깜짝 놀랍니다. 전작까지 즐겁게 정주행하시고요!ㅎ

그레이스 2021-09-19 23:55   좋아요 4 | URL
여행을 한다는 면에서는 그럴 수 있겠네요 ^^
질문하신 답은 스포가 될듯하여...!^^
감사합니다.

막시무스 2021-09-19 23:55   좋아요 4 | URL
ㅎㅎ 클래식한 구성상 빛이 살짝 비치는 제자리쪽을 바라보는데서 막이 내리는 걸로!ㅎ

그레이스 2021-09-19 23:57   좋아요 4 | URL
소세키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것을 잘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어느날 자신을 찾아온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서 소재를 얻었다고 합니다.

막시무스 2021-09-20 00:03   좋아요 4 | URL
주인공이 이야기 해 줬군요!ㅎ 산시로부터 볼려고 했는데 요즘 탄광이야기를 너무 마니 만나서 인연인듯 하니 갱부로 소세키 입문해야 겠네요! 구매완료!ㅎ

파이버 2021-09-20 00: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을 보고 굿길이 무슨 뜻일까 궁금했는데 갱도였군요... 힘든 일임에도 사람이 좋아 떠나지 못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거 같아요

주인공이 결국 돌아갔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속물?이라서 주인공이 좋은 집안의 도련님이라면 갱부로 남기에 아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레이스 2021-09-20 05:13   좋아요 4 | URL
좋은 집안 도련님이어서라기보다 그 시대 갱부들은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었나봐요. 그래서...!

mini74 2021-09-20 2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글에 막 빨려들겠는데요. 소세키 소설인데 좀 낯설게 느껴져요 ~~

그레이스 2021-09-20 22:25   좋아요 1 | URL
조금 느낌이 다르긴하지만 사람의 마음, 풍경을 그리는 묘사는 소세키 맞습니다^^

희선 2021-09-21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한테 도움을 주는 말을 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행운이겠습니다 만나는 사람이 다 스승이다는 말도 있지만... 죽어도 좋다고 집을 나오다니, 이젠 그런 생각 안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그레이스 2021-09-21 17:45   좋아요 1 | URL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요~♡
 
갱부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6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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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을 향하게 된 여로. 산정상에 내려앉은 구름 속을 걷는 네사람. 향방없는 삶의 순간도 사라졌다 나타나는 동행의 뒷모습으로 인해 아름다울 수 있다. 갱도에 난 굿길을 따라들어가, 칠흙같이 어두운 밑바닥에서 만난 한 사람은 그 여정의 의미가 된다. 만남은 인생을 바꾼다는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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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19 01:0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 별 다섯!🖐

막시무스 2021-09-19 0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판화 비슷한것 같은데 표지가 제목이랑 후기랑 잘 어울리는것 같습니다! 왠지 느낌 좋은데요!ㅎ

그레이스 2021-09-19 10:03   좋아요 2 | URL
갱부라고 해서 막장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여행기처럼 느껴졌어요^^
 
꿈 (2021 서울국제도서전 리커버 특별판)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배수아 옮김, 신신 디자인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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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가 곤충으로 변한 자신의 몸을 보며 아직도 꿈을 꾸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처럼 그의 글은 꿈속인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리고 고독과 괴로움이 묻어있다. 꿈에서 일어난 일에서조차 죄의식을 느끼는 그, 꿈에서도 사유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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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17 21: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다른 평들도 찾아 보니까 이 책 대단한 책이라는 느낌이 드네요. 꿈과 같은 글이라니 ^^

그레이스 2021-09-17 21:20   좋아요 5 | URL
꿈에 대한 글이예요
카프카의 글을 보면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할때가 많다고 생각해요
그의 무의식의 세계가 꿈이라는 소재로 많이 등장하죠
그는 꿈에서조차 고뇌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mini74 2021-09-17 21: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배수아작가님? 이 번역하셨군요. 오 뭔가 다를 것 같은 *^^*

그레이스 2021-09-17 21:45   좋아요 4 | URL
^^
특별판이라 커버도 폭신폭신해요^^
무슨의미일까 잠깐 생각했어요
어렸을때 꿈에서 높은곳에서 떨어져도 구름위에 떨어진듯 다리만 쭈뼛하고 만 것을 재현한것일까? 하는 생각?

청아 2021-09-17 21: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배수아님 믿고 찜합니다~^^*♡

그레이스 2021-09-17 21:48   좋아요 4 | URL
자칫 모호하기 쉬운 상황의 문장들을 잘 전달한것 같아요
배수아님 글은 안 읽어봐서 잘 모르는데 의미전달은 잘되고 있어요
100자평만 쓰고 리뷰는 언제쓸지...^^;;

그레이스 2021-09-17 23:10   좋아요 2 | URL
배수아 작가는 번역으로만 봤네요
페터 한트케의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도...^^

청아 2021-09-17 23:13   좋아요 2 | URL
저는 페소아의 <불안의서> 배수아님 번역으로 샀어요. 워낙 많은 분들이 좋다고들 해서요ㅎㅎ

그레이스 2021-09-17 23:17   좋아요 2 | URL
저도 그 책 리뷰 여러 번 봤어요.
이제 믿고 보는 번역가가 되겠네요^^

독서괭 2021-09-17 22:5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오 찜합니다!! 그레고르랑 연결시켜 주시니 더 궁금하네요.

그레이스 2021-09-17 23:08   좋아요 2 | URL
사실 <소송>과 다른 작품들도 연상됩니다. 꿈에 대한 기록은 편지나 일기 형식이고 , 이 내용은 그의 작품속에 나타납니다.

희선 2021-09-18 0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카프카 글을 알기 어려울 것도 같습니다 읽지도 않고 그런 생각을 하네요 카프카 평전만 봤어요 그걸 쓴 사람이 한국 사람이어서 신기했습니다 그것도 몇해 전이네요


희선

그레이스 2021-09-18 09:47   좋아요 3 | URL
저는 다른 작가가 쓴 평전 봤어요
명절연휴,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