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흥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탐색한 초기 기독교 성장의 요인
로드니 스타크 지음, 손현선 옮김, 이현수 감수 / 좋은씨앗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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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입한 지 제법 된 책으로, 책장에서 기다리다 이제야 손에 들었다. 그런데 첫 몇 장을 읽어나가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 이 책 이미 읽은 책인데?’ 그랬다. 이건 읽은 책이었다. 초반에 저자가 제시하는 초기 기독교 신자의 수와 증가율 등의 인상적인 수치가 이미 내 머릿속에 있었다. 하지만 뭐 한 번 읽은 책이라고 해서 다시 읽지 않는 이유가 될 수는 없으니까. 무엇보다 책이 흥미로우니까.


그래도 예전에 읽었다는 확인(?)을 하기 위해 이전에 쓴 리뷰를 찾아봤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놀라운 사실. 이 책에 관한 리뷰가 없었다. 읽은 책 전부를 리뷰로 쓰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혹 누락됐나 싶어서 블로그가 아닌 파일 폴더를 뒤져봐도 없다. 혹 책의 제목이 바뀐 건가 싶어서 저자명으로 검색해도 없다. 이 정도면 정말 신기한 일이다. 난 이 책을 안 읽었던 걸까? 하지만 책 후반부까지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 계속 나온다. 이게 무슨 일인지...


엊그제 한 지인이 한 가지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어쩌면 다른 책에서 이 책의 내용을 많이 인용한 것을 본 걸지도 모른다고..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왠지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진실은 뭐였을까...




책은 기독교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물이다. 흔히 기독교 관련 책 하면 신학적인 관점이나 신앙적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이 두 관점은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기독교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를 한다는 점은 공통점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충분히 제대로 된 분석과 평가가 있느냐 하는 게 관건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그냥 있는 자료를 쭉 가져다 모아놓는 것만으로 해석이 되는 건 아니다. 필연적으로 어떤 도구를 동원해 분석을 해야 하는데, 신앙적 관점은 “지금의 나”가 더 중요하기에 이런 분석에 애초에 별 관심이 없고, 신학적 관점을 띠고 있는 책들의 경우에도 제대로 된 분석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신앙을 드러내는 식의 결론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신학계가 사회와 유리된 채 연구를 지속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특히 보수성을 강조하는 보수 교단이나 교파에서는 더더욱 교회의 일에 대한 어떤 사회적인 해석이나 접근을 터부시하는 경향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의 놀라운 부흥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물이 나온 건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의 저자는 신학자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니다. 소개를 보면 원래는 언론학을 전공하고 기자로 활동하다가 UC 버클리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얻은 후 사회학자와 비교종교학자로 수십 년간 교수직을 맡은 사회학자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도구를 가지고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바라본 것이니 내용도 충실하다. 그리고 당연히 교회사만 읽던 사람들에게는 조금 낯선 부분도 있다.




책에는 온통 신선한 관점들 투성이다. 1장은 초기 기독교회의 놀라운 성장 속도에 관한 내용인데,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저자는 기독교가 10년에 40%의 성장률을 이어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고 보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했던 시기 로마 인구의 거의 절반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흔히 생각하는 “바닷물의 염도와 비슷한 3~4%의 기독교인” 같은 개념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다.


2장에서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계급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예와 같은 하층민들이 주류가 아니라, 오히려 중류층과 상류층에서 광범위한 개종자를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존 신앙체계의 모순점을 깨닫고 새로운 신앙으로 개종하는 부류는 어느 정도 교양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3장에서는 교회와 유대인의 관계에 대해 다룬다. 역시 여기에서 일반적인 그림은 교회가 일찌감치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독립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이 책의 저자는 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기독교는 꽤 오랫동안 유대인들을 첫 개종 대상자로 여겨왔고, 실제로도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4장과 5장은 초기 기독교의 급성장에 영향을 준 요인들을 다룬다. 4장은 만연한 역병과 그로 인해 파괴된 인적 네트워크. 결과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선택하기에 적합한 사회적 상황이 만들어졌음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또 5장은 교회 내 여성들의 위상이 꽤 높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러운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유아(주로 여아나 장애아) 유기나 살해, 낙태, 유산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당시 교회는 이런 여성에 대한 학대적 조치들을 반대했고, 그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교회에서 위안을 얻고, 나아가 신자들의 출생율과, 비신자 남편들의 전도까지 용이해졌다는 것.


7장은 당시 동방의 중요한 도시였던 안디옥(안티오키아)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끊임없는 파괴가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안정감을 줄 수 있었을 지를 묘사하는 장이다. 그리고 아마도 8장은 가장 논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내용인데, 바로 순교자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의 교회사적 관점에서는 그들의 깊은 신앙심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는 순교가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꽤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만한 보상이 있었단 말이다.




한 장 한 장 따로 날을 잡아서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고 싶을 정도다.(유튜버 직업병이다) 그만큼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는 책이라는 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기 제시된 내용이 완전히 입증된 것은 아니다. 사회학적 연구라는 게 그런 식으로 뭔가를 입증해 내는 게 아니다. 나름의 논리에 따라 어떤 가설을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다. 또 이미 지나간 일, 그것도 2천 년이나 지난 일을 확실하게 입증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확실히 초기 기독교 시기의 다양한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의 저자나 여느 교회사가들이나 볼 수 있는 자료는 한정적일 텐데, 이렇게 서로 다른 관점으로 그림을 그려내는 게 흥미롭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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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국가를 선언하다 - 식물이 쓴 지구의 생명체를 위한 최초의 권리장전
스테파노 만쿠소 지음, 임희연 옮김, 신혜우 감수 / 더숲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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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독특하다. 식물이 국가를 선언하다니, 이젠 어디서 말하고 사고하며, 심지어 조직까지 만들 줄 아는 똑똑한 식물이 태어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물론 다행히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니다. 식물이 국가를 선언한다는 말은 일종의 비유적인 표현으로, 식물을 포함한 다양한 생물들이 사는 지구의 생태계 전체를 고려한 새로운 생활 패턴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책이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일각에서 주장하는 “동물권” 운운하는 식의 과도한 감상주의가 담겨 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도 살짝 들었다. 동물에 대한 학대를 줄이자는 주장에는 공감하지만, 인권에 대한 정의도 제대로 힘든 마당에 동물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쳐 보이는 게 사실. 하지만 이 책의 경우 “식물(의 정치적)권(리)” 같은 걸 말하는 건 아니다.



저자가 지적하는 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는 인간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개체수로만 보면 식물 쪽이 훨씬 더 많다. 또, 지구의 환경을 지금처럼 유지하는 데에도 식물이 가장 큰 공헌을 하기도 한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것은 오롯이 식물이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우린 지구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그런 식물은 별로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또, 책은 환경을 파괴하는 다양한 행위들에 대한 경계를 담고 있다. 그리고 동물적 방식보다 식물적 방식(예컨대 비중앙집중적인 네트워크 형태, 지속 가능한 자원의 소비 등)이 생태에 좀 더 적합하다는 내용도 보이고. 이런 내용을 읽다 보면 옳지, 옳지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래서 현대인들이 과연 현재의 편리함을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식물적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면 모두가 정말 행복해 질까 하는 의심도 든다.





식물에 관한 책이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영역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개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오히려 천문학과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을 묻는 “페르미의 질문”에서 저자는 우주에 생명체가 흔할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 행성을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지구가 이토록 멋진 환경을 갖고 있기에, 이 정도는 어디든 가능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일 뿐이라는 지적.


언제부턴가 지구에서 쓸 만한 게 다 사라지면, 혹은 지구가 살기 힘들 정도로 망가지면, 지구 밖 다른 행성을 찾아 이주를 하면 될 거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굉장히 편한 기대다. 여기에 필요한 기술적 문제도 문제지만, 인류가 그렇게 지구를 가볍게 떠날 수 있을까. 이곳을 망쳐놓은 것도 인간인데, 그걸 교정할 생각을 못하고 또 다른 곳으로 간다면 그곳 또한 망가지기만 하지는 않을까.(전 우주적인 민폐족이 될지도...)



사실 이 책의 특징은 책의 구성 형태다. 책 제목이 국가를 선포한다는 내용이고, 내용은 여기에 맞는 일종의 헌법과 비슷한 권리장전을 선언한다는 식으로 꾸며져 있다. 1조는 “지구는 생명체의 공동주택으로 모든 생물이 그 주권을 가진다”라는 내용이고, 나머지도 비슷한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조문은 책의 각 장의 내용으로 이어지는 식.


자연과 환경보호 등을 다룬 책 치고는 수월하게 읽힌다. 나름의 위트도(이 책의 구성 형태 자체가 그렇다) 담아내려고 하고 있고. 다만 수준 높은 위트는 그걸 알아듣는 사람에게 필요한 걸 텐데 얼마나 (특히나 여기 나온 이야기들을 들어야 할 사람들 중에서) 알아들을까 싶은.(아.. 사람이 점점 비관적이 되어 간다. 하지만 환경 문제에 대해선 그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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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선택한 사람들 - 탈교회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회심하고,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회탐구포럼 시리즈 11
정재영 외 지음 / IVP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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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읽었던 책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과 제목 면에서 정반대인 책이다. 하지만 방법론에 있어서는 완전히 반대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앞서의 책이 최근 교회를 떠난 8명을 인터뷰해서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한 책이라면, 이 책 역시 다양한 종류의 사회학적 조사를 통해, 최근 5년 안에 새롭게 교회를 선택한 사람들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정리해 낸 책이다.


물론 그 연구 방법에 있어서, 이쪽이 좀 더 체계적이고 그 대상도 많다. 거의 500명에 달하는 교회를 선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광범위한 설문 조사 결과(1장)와 그 중 연령과 성별로 뽑은 8명을 인터뷰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눠 본 인터뷰(2장)가 이루어졌으니까. 4장도 비슷한 설문을 담고 있는데, 이쪽은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한 신앙형태에 관한 설문인 FFT라는 조사의 내용을 담고 있다.


3장은 그렇게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회심의 요소들을 신학적으로 정리한 내용이고, 5장의 경우는 회심에 관해 출판된 다양한 책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서 한국교회에서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보는 내용이다.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나온 기획물을 몇 번째 읽어본 것 같다. 그리고 읽을 때 늘 드는 생각은 노력이 눈으로 보이는 괜찮은 기획이라는 것이다. 우선은 한국교회에서 잘 하지 못하는, 아니 하지 않는 통계적 조사를 충실히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고, 그 결과를 가지고 단지 몇몇 사람들의 감이 아니라 사회학적 결론을 내려고 있다.


이런 종류의 자료들은 그 자체로 무엇인가를 말한다기 보다는, 그 자료를 가지고 어떤 식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지가 중요하다. 물론 여기에 나온 조사 결과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 아주 다른 내용이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객관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조사의 결과를 보는 건 좀 다른 느낌이니까.


몇 가지 통계가 눈에 들어온다. 교회 출석 전 다른 종교 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대답한 결과가 30%를 겨우 넘길 정도였다는 것(종교 탐색 후 기독교를 선택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과 신앙을 갖게 된 주요 이유로 삶에 생긴 여러 가지 문제들을 꼽은 인원이 거의 90%에 달한다는 점이다. 또, 주요 전도자로서 가족이나 친척이 30%, 이웃이 10%, 직장동료가 8%로 “아는 사람”이 하는 거의 절반에 달했는데, 흔히 교회에서 하는 노방전도나 지하철을 오고가며 주문을 외우는 식의 전도가 효과가 그리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 두껍지도, 어렵지도 않은 내용이다. 목회를 하고 있다면 한 번쯤 참고삼아 볼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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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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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시노오 나나미 십자군 시리즈의 마지막 책이다. 앞서 1권과 2권이 제1차와 2차 십자군을 다뤘다면, 이번 세 번째 책은 제3차부터 마지막 9차 십자군까지의 이야기를 한 권에 담았다. 뭐랄까, 후반부로 갈수록 십자군의 성과가 미미했던 것도 있고, 저자가 자세히 설명할 수 있을 만한 사료도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해서 3차 십자군 이후는 아주 별 볼일이 없었던 것만은 아니다. 당장 3차 십자군은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가 살라딘과 일전을 벌여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으니까. 팔레스타인 해안 지역에 다시 기독교 거점들을 항구를 중심으로 확보해 냈다. 비겁하게 먼저 본국으로 돌아가 리처드의 영토를 야금야금 먹어간 프랑스의 필리프 2세만 아니었다면 예루살렘을 재탈환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리처드와 맺은 불가침 협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심지어 성지에서 싸우고 있는 리처드의 왕위를 흔들기 위해 그의 동생인 존까지 부추겨 쿠데타를 일으키게까지 했던 필리프는 십자군 전체의 성공이나 리처드의 입장에는 비겁하게 느껴지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필리프 2세도 프랑스 입장에서 보면, 영토를 크게 넓힌 왕이기도 하니 참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지는구나 싶다.


비슷한 이야기로, 물론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살라딘을 궁지로 몰아넣은 리처드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지만, 반대로 무슬림측에서 보면 멀쩡하게 살던 땅을 침략해 온 프랑크인들을 몰아낸 살라딘이 또 영웅이다. 하지만 우리는 평소에 내가 서 있는 곳이 절대적인 기준인 양 착각하곤 한다.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던 제4차 십자군과 이집트를 공격하다 실패했던 제5차 십자군을 넘어, 제6차 십자군으로 넘어가면, 십자군 세력은 다시 예루살렘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싸움이 아니라 협상을 통해 얻어낸 성과였고, 여기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의 외교력이 있었다.


하지만 성지는 오직 피를 흘려 얻어내야만 한다는 약간은 변태적 사고에 빠져있었던 교황과 그의 대리자들은 이미 확보한 예루살렘을 인정하지 않기로(?) 고집하면서 황제와 적대관계를 이어간다. 예컨대 예루살렘 대주교는 자신의 교구인 예루살렘에 끝까지 들어가지 않는다. 전형적인 판단력이 어두운 사람들의 모습인데, 이 시기 교회가 그랬다. 너무 높이 올라가다 보니 발밑이 보이지 않는 상황과 비슷했던 거다.


이미 손에 들어온 예루살렘을 부정할 건 또 뭔가. 적을 악마화 하는데 열심을 내다보면, 내가 어떤 꼴이 되는지 모르기 십상이다. 다 이것도 그만큼 자신이 모든 걸 결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 혹은 자만심 때문인 거고. "그런즉 선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그리고 마침내 교황의 눈에 쏙 든 인물을 중심으로 또 다른 십자군이 이어지는데, 바로 프랑스 왕 루이 9세다. 하지만 그는 신앙심은 강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영 능력이 없는 인물이었고, 결과는 대참사로 끝나고 만다. 그는 단지 자기가 가져온 병력만 날린 것이 아니라,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성지의 기독교 세력마저 소진시켜버렸고, 결국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일어선 맘루크 왕조에 의해 성지에 남아있던 마지막 기독교의 도시 아코가 함락되면서 상황은 1차 십자군 이전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여기서 또 하나 아이러니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십자군의 마지막 힘을 다 쥐어짜서 시원하게 말아먹은 루이 9세가 얼마 후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 책에는 설명되지 않은 정치적인 문제가 깔려 있긴 했지만, 그가 십자군과 관련해서 남긴 소득은커녕 피해만 입혔던 걸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다. 실은 “성인”이라는 제도가 결국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 운영에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이용했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랄까.


책에는 팔레스타인의 모든 십자군 기지들이 사라지고 난 후의 간략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템플기사단의 최후가 퍽 서글프다. 200년 넘게 성지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워왔던 기사단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계략과 교황청의 묵인 아래 말 그대로 순식간에 파멸된다. 모든 재산은 압류당하고, 소속된 기사들은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하다 처형되었던 것이다.


여기엔 십자군 실패에 대한 희생양을 찾으려는 목적과, 템플 기사단에게서 빌린 거액의 돈을 갚지 않으려는 프랑스 왕실의 검은 속내가 끈적끈적하게 붙어 있었다. 용기와 명예가 탐욕과 비겁함에 의해 더럽혀지는 일은 뭐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들의 최후는 왜 십자군이 결과적으로 실패했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책으로는 3권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작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책이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 관해 쓸 때마다 늘 더하는 표현이지만, 정말 글은 재미있게 잘 쓴다. 물론 십자군이라는 종교성 짙은 이야기를 신앙이 없는 작가가 써 내려간다는 게 좀 어색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거리감이 상상력을 좀 더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한 게 아닌가 싶다. 재미있는 글은 기록된 사실만 모아놓는 게 다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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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씨, 이어령입니다 -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 C.S. 루이스와 '최고의 지성' 이어령 박사의 가상 만남
이태형 지음 / 국민북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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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S. 루이스의 이름을 빌린 책이 한 권 또 새로 나왔다. 당연히 내 레이더망에 걸렸고, 결국 구입했다. 그런데 이 책은 제목이 흥미롭다. 루이스의 이름에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어령 교수의 이름까지 더해져있다. 그것도 마치 친근하게 이어령 교수가 루이스를 부르는 것처럼.


이 책은 실제로는 만난 적이 없었던 이 두 사람이 한 자리에서 대화를 한다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을 바탕으로 쓰인 책이다. 두 분의 생몰연도를 계산하면 스무 몇 해쯤 함께 살아계시던 기간이 있었지만, 이어령이 오랫동안 무신론자였다가 노년에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굳이 찾아가서 만났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뭐 상상이니까. 상상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두 사람이 만난다면 어떤 대화를 할까 고민해 보는 건 즐거운 일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바로 그 작업을 했는데, 물론 두 사람의 대화는 완전 임의로 만들어 낸 건 아니고, 그들의 저서에서 뽑아낸 주제들을 배열하는 식으로 이어진다.





사실 이와 비슷한 책은 여러 권 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도 『C. S. 루이스와 점심을 먹는다면』이라는 책에서 자신과 대화하는 루이스를 쓰기도 했고, 피터 크리프트가 쓴 『C. S. 루이스 천국에 가다』라는 책에서는 루이스와 존 F. 케네디, 그리고 올더스 헉슬리가 천국에서 만나 서로 대화하는 그림을 만들어 낸다.


직접적인 대화의 형식은 아니라도, 루이스와 또 다른 인물을 함께 비교, 대조하는 책으로는 스콧 버슨과 제리 월즈가 쓴 『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우리나라 저자인 김병제가 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여정』(이 책에서는 필립 얀시가 소개된다), 아맨드 M. 니콜라이의 『루이스 vs. 프로이트』, 그리고 콜린 듀리에즈가 쓴 『루이스와 톨킨』 등이 보인다. (와, 쓰고 보니 이런 정보는 어디 다른 데서 듣기 힘들지 않을까?)





이 책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될 듯하다. 그리고 루이스와 비교되는 인물로 우리나라 학자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독특한 점도 있고. 이런 종류의 책은 소개하는 인물의 저작을 얼마나 충실하게 요약, 또는 발췌해서 소개하느냐에 그 완성도가 달려있는 법이다. 워낙에 훌륭한 인물들을 가지고 왔으니 사실 정리만 잘 해도 어느 정도 기본을 먹고 들어갈 수 있으니.


이번 책의 경우에는 크게 나쁘지 않다. 몇 가지 주제에 따라 두 사람의 책에서 주요 문장들을 가져와 정리했고, 크게 틀렸다고 생각되는 묘사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주 깊게 까지 들어가지는 않지만, 오히려 어떤 사람에게는 이 정도의 쉬운 설명이 좀 더 와 닿을 수도 있겠다 싶다.


다만 중간에 저자 자신이 또 하나의 캐릭터로 등장해서 일종의 사회자 비슷한 역할을 맡는데, 종종 사회자를 넘어 대화의 참가자로 등장해 자신의 말을 너무 길게 늘어놓는다는 게 살짝 아쉽다. 물론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책 제목도 그렇고 독자가 관심을 갖는 건, C. S. 루이스와 이어령의 생각이었으니까.


기독교 교리보다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에게 권해 줄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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