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마침내 교황의 눈에 쏙 든 인물을 중심으로 또 다른 십자군이 이어지는데, 바로 프랑스 왕 루이 9세다. 하지만 그는 신앙심은 강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영 능력이 없는 인물이었고, 결과는 대참사로 끝나고 만다. 그는 단지 자기가 가져온 병력만 날린 것이 아니라,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성지의 기독교 세력마저 소진시켜버렸고, 결국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일어선 맘루크 왕조에 의해 성지에 남아있던 마지막 기독교의 도시 아코가 함락되면서 상황은 1차 십자군 이전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여기서 또 하나 아이러니한 장면이 나오는데, 그렇게 십자군의 마지막 힘을 다 쥐어짜서 시원하게 말아먹은 루이 9세가 얼마 후 교회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 책에는 설명되지 않은 정치적인 문제가 깔려 있긴 했지만, 그가 십자군과 관련해서 남긴 소득은커녕 피해만 입혔던 걸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다. 실은 “성인”이라는 제도가 결국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 운영에 도움이 되느냐에 따라 이용했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랄까.
책에는 팔레스타인의 모든 십자군 기지들이 사라지고 난 후의 간략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그 중에서도 템플기사단의 최후가 퍽 서글프다. 200년 넘게 성지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워왔던 기사단은 프랑스 왕 필리프 4세의 계략과 교황청의 묵인 아래 말 그대로 순식간에 파멸된다. 모든 재산은 압류당하고, 소속된 기사들은 죽을 때까지 고문을 당하다 처형되었던 것이다.
여기엔 십자군 실패에 대한 희생양을 찾으려는 목적과, 템플 기사단에게서 빌린 거액의 돈을 갚지 않으려는 프랑스 왕실의 검은 속내가 끈적끈적하게 붙어 있었다. 용기와 명예가 탐욕과 비겁함에 의해 더럽혀지는 일은 뭐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들의 최후는 왜 십자군이 결과적으로 실패했는가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책으로는 3권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작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책이었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에 관해 쓸 때마다 늘 더하는 표현이지만, 정말 글은 재미있게 잘 쓴다. 물론 십자군이라는 종교성 짙은 이야기를 신앙이 없는 작가가 써 내려간다는 게 좀 어색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런 거리감이 상상력을 좀 더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한 게 아닌가 싶다. 재미있는 글은 기록된 사실만 모아놓는 게 다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