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타 - Ava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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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과학자인 형이 비운의 죽음을 맞게 되어 그 대신 판도라로 날아오게 된 제이크. 전직 해병인 그는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사용할 수 없는 두 다리를 고칠 수 있는 막대한 돈을 벌게 될 것이라는 말에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수락한다. 하지만 그가 도착한 기지 사람들은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원을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쿼리치와 이에 반대하며 대화와 설득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레이스 박사의 의견이 충돌되고 있었던 것. 자신에게 협조하면 금방 다리를 고쳐 주겠다고 약속하는 쿼리치의 제안을 받아들인 제이크는 나비족들 사이로 들어가지만, 나비족 처녀인 네이티리를 만나 그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면서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어 버린 미래의 어느 날. 인간들은 ‘판도라’라는 이름의 새로운 행성에 엄청난 에너지 자원이 있음을 알게 되고, 그 자원을 탐사하고 채굴할 사람들을 파견한다. 하지만 이미 그 행성에는 ‘나비족’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있는 그곳을 쉽게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이에 사람들은 나비족과 인간의 유전자를 섞어서 일종의 복제인간(아바타)을 만들어 낸다. 이 복제 나비족에게 유전자를 빌려준 인간은 특수한 장치에 들어가 아바타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 나비족처럼 살 수 있게 된다.

 



 

2. 감상평 。。。。。。。

 

     이 엄청난 흥행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는 참 단순한 해석코드를 제시한다. 사람에 따라서 이 영화를 보며 자신의 관심에 맞는 문제를 얼마든지 해설해 낼 수 있으니 말이다. 북미나 중국의 소수민족들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하는 미국이나 중국의 폭력성을 떠올릴 수도 있고(도둑이 제발 저린지, 중국에서는 실제로 이 영화가 상영중지 되었다나..), 이 땅의 사회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작년 겨울 도시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른 폭력에 희생된 어떤 철거민들의 모습을 대입할 수도 있다. 불교계에서는 최근 단체 관람을 한 후 영화 속 세계관이 이원론적 세계관이나 기독교 세계관과는 달리 모든 것은 서로 통한다는 불교의 일원론적 관점과 유사하다는 감상평을 내기도 했단다. 하지만 나비족을 구하기 위해 그들의 모습이 된다는 설정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기독교의 오래된 ‘성육신’이라는 메시지의 21세기 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어린이 관객들에게는 그냥 상상력을 자극하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면, 영화의 흥행은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보고 싶어 하는 존재이니까. 어떤 이들은 이 영화를 단순한 짜깁기로 평가절하하기도 한다지만, 원래 이야기(내러티브)라는 것이 그 구조를 분석하면 사실 몇 개 되지 않는 법이다.(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이런 영화를 아직 못 만들어 낸 걸 보면, 말하는 것과 실제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것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격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영화의 대박 흥행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사이의 끊임없는 갈등이라는 구조가 좀처럼 깨지지 않고 반복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 경제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가진 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그 힘을 의지하며 원하는 것을 더 가지려고 하고, 힘이 없는 사람들은 영화 속 나비족처럼 활같은 ‘원시적인 무기’밖에 들고 나올 것이 없는 게 현실이니까. 사람들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자신들의 매일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영화 속에 투영하고, 나비족을 통해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는 한 편으로 ‘연대’의 힘에 대해 말하고 있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죽어가는 그레이스 박사를 앞에 두고 나비족 사람들 모두가 서로의 몸에 손을 댄 채 거대한 하나의 파도를 만들어 그녀를 위해 기도하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물리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온전한 연대를 이루어낸다. 비록 그레이스 박사를 되살리는 것은 실패했지만, 나비족의 진정한 힘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이런 ‘모두를 살리는 진정한 연대’가 단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영화가 담고 있는 철학적, 신학적 함의는 단지 영화의 메시지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 3D에 이어 4D로도 상영되기 시작한 이 영화의 상영방식은 영화 속 소재와 더불어 ‘무엇이 진정한 나인가’, ‘어떤 것이 진짜로 사는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가볍지 않은 무게감을 담아 던져준다. 영화를 보고 한 스님이 불교적으로 해석하는 메시지를 남겼다는 이야기도 이런 차원을 엿보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리라. 기술이 발전하면 영적인 차원이 퇴색할 것이라는 단편적인 예상은 지난 200년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앞으로도 빗나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기술이 철학과 종교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를 본격적으로 고민하도록 만드는 영화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 번쯤 볼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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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어프루프-사랑의 도전 - Fireproof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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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지역 소방대 대장인 캘럽은 동료와 부하들과의 관계도 원만하고, 사고 현장에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고 열성적으로 뛰어들어 구조활동을 벌이는 남자다. 하지만 최근 자꾸 엇나가기만 하는 아내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건지,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하는 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병원에서 홍보 담당을 맡고 있는 캘럽의 아내 캐서린은, 늘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집안일은 하나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남편이 못마땅하기만 하다. 그러던 중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의사에게 조금씩 관심이 가기 시작하면서 결혼 생활에 대한 열의는 점점 상실되어 가고..

     마침내 이혼이라는 실제적 문제 앞에 서게 된 두 사람. 캘럽은 어떻게든 관계를 회복하고 싶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그런 캘럽에게 아버지가 책 한 권을 보내준다. 하루에 한 장(章)씩, 40일 동안 하나씩 실천해보고 그때까지라도 이혼을 미루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를 따라보기로 한 캘럽. 너무나 간단한 지침들이었지만, 하루하루 그것을 진심으로 실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2. 감상평 。。。。。。。

 

     이 영화에는 두 가지 메시지가 등장한다. 하나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진지하게 달라질 필요가 있다는 관계에 관한 메시지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신앙적) 메시지로 하나님이야말로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도 끝까지 사랑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메시지는 자연스럽게 하나로 수렴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좀 더 큰 메시지를 던져준다.

     딱히 많은 사람들이 본 것은 아니지만, 이 영화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시선이 존재하는 것 같다. 한 가지는 기독교적 전제 위에서 꽤 괜찮은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기독교 메시지가 들어있기 때문에 싫다는 것. 하지만 단지 ‘기독교’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좋고 나쁘다는 식의 접근은 영화 자체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물론 특정한 세계관(기독교적 세계관, 혹은 유물론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자신의 세계관에 맞는 영화가 좋거나 싫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세계관이 달라도 우리는 그 안에서 충분히 어떤 ‘지혜’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덮어놓고 기독교 내용이 담겨 있으니 싫다는 내용이야말로 유물론만이 진리라는 지독한 독선에 다름 아니다.

     저예산 영화답게 스펙터클한 영상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영화 중 가장 극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캘럽이 화재가 난 집에서 어린 아이를 구조해 나오는 장면조차도 텔레비전 드라마 시리즈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박진감을 느끼기 어렵다. 또,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직설적인 화법은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약간 거부감을 주게 할 소지도 있어 보인다. 하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메시지나 큰 구멍 없이 스토리를 진행시키는 것을 보면 그런대로 무난한 연출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스도인 부부라면 한 번 쯤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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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 Breathles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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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세상 무서운 것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용역 깡패 상훈. 15년 만에 출소한 아버지를 보며 그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행패를 부리다가 하나뿐인 여동생을 칼로 찔러 죽게 만들었고, 그런 여동생을 병원으로 옮기려다 어머니마저 차에 치여 돌아가신 과거가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상훈과 만나는 연희는 겉보기에는 여느 여고생과 다름없지만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노점상을 하던 어머니는 사고로 돌아가시고, 베트남전 참전 용사인 아버지는 치매가 들어 날마다 행패를 부린다.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한 남동생은 날마다 삐뚤어져가기만 한다.

     상훈은 어느 날 길에서 시비가 붙자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달려드는 여고생 연희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연희와의 만남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차 나이와 경험을 초월한 우정을 느끼게 된다. 조금씩 삶을 정돈하기 시작하는 상훈. 하지만 삶의 비극은 그가 편안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2. 감상평 。。。。。。。

 

     시작할 때부터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상훈. 그는 시종일관 분노하고 있다. 그는 그의 그런 분노를 돈을 빌려간 사람들에게 폭발시키고, 분노를 터뜨릴수록 그는 더욱 더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는 생각하고 주저하는 대신 분노하고 폭력을 가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의 분노의 원인은 조금씩 밝혀지지만, 그래서 감독은 그것이 그의 폭력성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영화 속의 그 설명은 그의 폭력에 대한 충분한 이유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똑같은 불행을 겪었다고 해서 모두가 폭력적으로 변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감독의 지나친 환경 결정론적 설명은 (감독 자신이 연기하고 있는) 주인공의 행동에 어떤 면죄부도 부여할 수 없다.

     영화는 과도한 폭력의 노출을 감행하고 있고,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내가 욕을 듣고 맞는 것 같은 아픔을 느꼈다. 절제되지 않은 폭력의 단순한 배출은 영화 속에서 어떤 미적 가치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보는 내내 영혼에 생채기만을 내는 듯했다. 어떤 이는 주인공이 내뱉는 욕설에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를 발견하는 것처럼 감동을 받았다는데, 내가 보기엔 지나치게 포장된 감상인 것 같다.
 

 

     영화 속 깨어진 가정은 깨어진 인격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렇게 깨어진 인격을 회복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의 가족(상훈과 연희, 그리고 상훈의 조카 형인이 이루는)이었다. 사회의 최소단위는 역시나 가족이었고, 건강한 가족은 건강한 사회분위기를 이루어내는 시발점이다. 하지만 지나친 경쟁과 과도한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는 가정 구성원의 분열과 고립을 초래하고 있지 않은가.

     몇 해 전 대선 때 한 정당의 대통령 후보는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구호를 가지고 선거에 나왔지만, 결국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에 밀려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물론 단순화시켜 말할 수는 없겠지만, 경제가 가정을 누른 시대, 이것이 현 시대의 중요한 단면이 아닐까. 이런 경향이 가속화되면 될수록 가정의 회복이라는 목표는 요원해지기만 할 것이다. 온갖 감성에 호소하는 아이 낳기 캠페인을 벌여도 물질에 대한 집단적 환각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주제를 나름대로 정리해 본다면 ‘그래도 가정이다’ 정도? 하지만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 지나치게 날카로운 도구들은 관객의 손에 상처를 내기에 충분할 정도로 예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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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시민 - Law Abiding Citi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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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갑자기 들이닥친 2인조 강도들에 의해 아내와 딸이 살해당하는 일을 겪은 클라이드. 하지만 사건을 담당한 검사 닉은 둘 모두를 사형에 처하기 위해 기소를 하다가 자칫 재판에서 패하는 것을 염려해 강도 중 한 명과 형량 협상을 한다. 공범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워 확실히 사형을 받게 하는 대신 그는 짧은 형기만을 받게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아내와 딸의 살해범들과의 협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클라이드는 조용히 자취를 감춘다.

     10년 후, 사건을 저지른 강도 두 명이 비참하게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닉은 클라이드를 체포하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어 기소를 하지 못한다. 급기야 감옥에 갇혀 있는 클라이드는 지속적으로 사건과 관련된 관계자들을 살해하고, 닉은 공범의 존재를 확신하지만 좀처럼 사건의 단서는 잡히지 않는다.

     마침내 클라이드의 부동산 거래 내역을 살피던 중 발견한 충격적인 사실은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였고, 닉은 시장을 비롯한 주요 요인들을 살해하려는 클라이드를 막기 위해 달리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감독은 뭘 말하려고 했던 걸까. 영화 마지막에 올라가는 자막을 통해 미국의 법체계가 얼마나 모순되어 있는 지를 지적하려고 했다면, 굳이 이런 쓸데없이 긴 영상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영화는 미국의 사법체계의 모순을 치밀하게 묘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피해자의 감성을 섬세하게 추적해 나가며 복수를 통한 심리적 변화를 그래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아가 딱히 교훈까지 없으니 가히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깡통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독은 영상을 통해 미(美)를 창조해내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고, 그저 끊임없이 따끔따끔한 충격만을 주는 전자 침 정도로 전락시켰다. 쏘우 시리즈 정도의 구역질나는 하드코어까지는 아니지만, 복수를 위해 산채로 팔다리를 자른다는 설정은 그냥 끔찍할 뿐이었고, 영화 속 사건의 핵심적인 열쇠는 그냥 닳고 닳은 소재였다. 오히려 마지막의 자막이 생뚱맞은 느낌을 주었다고나 할까.

     영화를 보는 내내 등장인물 중 어느 누구와도 심리적인 일치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자신의 기소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범죄자와 타협을 하는 검사 닉이나, 복수를 위해 관련자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클라이드 모두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 캐릭터들이었기 때문이다. 통상 이런 구도의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사건을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도록 만드는데, 이 영화에서는 객관적으로 볼만한 ‘내용’이 없다는 게 문제.

     어서 영화가 끝나 극장 밖으로 나가기만을 바라게 만드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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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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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출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한 남자. 그 사건은 14년 전 인천의 한 배 안에서 일어났던 살인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살해당한 남자의 아들과 그 유력한 용의자의 딸이 같은 학교, 같은 반이었다는 것. 하지만 얼마 후 둘은 헤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사건은 묻어지는가 싶었다.

     14년이 지난 지금 이제 미호라고 이름을 바꾼 지아는 한 기업의 총수의 아내가 될 정도로 화려하게 빛나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요한은 그런 미호를 위해 여전히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결혼을 앞두고 미호의 과거를 조사하고 있던 비서실장 시영과 요한을 뒤쫓는 형사 동수가 만나면서 미호와 요한 사이의 보이지 않던 끈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그림은 좋다. 새하얀 손예진과 시종일관 그늘져 있는 고수. 백야행이라는 제목에 걸맞은 이 극단적인 색의 배치는, 극도로 제한되어 있는 두 배우들의 대사와 함께 강렬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이런 백과 흑의 극단적인 대조는 자연스레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주제를 떠올리게 하는 데, 이는 영화 속 내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인공 요한의 살인행위를 통해 표현되고 있다.

     ‘살인’은 이 영화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핵심적인 소재 중 하나이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끊임없이 살인을 하며, 그럴수록 더더욱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하지만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지적하고 있듯, 남자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영화를 통해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말은 적어도 이 경우에는 어울리지 않는 대답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지만, 여기서 ‘죽음’은 ‘살해’가 아니라 ‘희생’을 가리키는 것일 때에야 가치가 있을 터. 



 

     영화는 존속살해로 시작해 자살로 마친다. 딱 일본식 통속 소설에서나 등장할만한 이 과도한 죽음의 남발은 인간 생명에 대한 어떤 존중도 인정하지 않고 그저 도구로 전락시키는, 그래서 인간의 생명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빼앗을 수 있다는 유물론적 사상의 일그러진 표현이다. 자연히 영화에서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 그 기반이 되어야 하는 ‘사랑’에 대한 감동이나 위대한 자기희생과 같은 숭고한 가치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으며(심지어 슬프지 조차 않다), 수려한 외모와는 다르게 일그러진 내면을 가지고 있는 두 명의 괴물만 보일 뿐이다.

     그림은 좋았다. 하지만 내용은 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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