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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지붕집의 마릴라
세라 매코이 지음, 손희경 옮김 / 클 / 2020년 5월
평점 :
절판
“빨간 머리 앤” 시리즈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앤의 명랑함을 조용히 감싸주고 지지하는 두 명의 어른들을 보았을 것이다. 매튜와 마릴라가 그 주인공인데, 두 사람은 남매로, 결혼도 하지 않고 에이번리의 초록지붕 집에서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오고 있었다. 앤 시리즈에서는 이 두 사람이 핵심적인 보조인물로나 등장하는데, 이들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 왜 그들은 결혼도 하지 않고 오랫동안 함께 살고 있는지 같은 물음이 나올 만도 하다. 이 작품은 바로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쓰인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앤 시리즈의 정식 스핀오프나 프리퀄 같은 작품은 아니다. 일단 작가가 다르니까. 80년 전 세상을 떠난 앤 시리즈의 루스 모드 몽고메리가 아니라 앤 시리즈를 사랑하는 현대의 작가가 상상해서 쓴 마릴라를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팬픽이다. 하지만 단순히 인터넷에서 떠도는 그저 그런 수준의 잡문들과는 달리, 나름 역사적이고 문학적인 조사 끝에, 실제 마릴라라는 인물이 살았을 법한 시대와 장소를 배경으로 입체적인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이 정도면 성공한 덕후라고 할 만하다.
우선 가장 궁금한 건, 19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에서 왜 매슈와 마릴라가 당대의 일반적인 관습과 달리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초록지붕집에서 살아오고 있는가이다. 작가는 여기에 그들도 젊은 시절 사랑에 빠졌던 적이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아픈 결별을 겪었기 때문일 것이라는 대답을 제안한다. 사실 이런 대답은 너무 뻔해 보이기도 하지만, 뭐 딱히 좀 더 설득력 있는 추측도 많지 않으니까.
다만 두 사람의 결별 과정은 조금은 달랐는데, 매튜가 마음에 들어했던 소녀는 ‘시골 농부의 아내 따위는 되기 싫다’며 도망쳐갔지만, 마릴라의 연인은 조금 더 복잡한 사건들이 연속되며 멀어져갔다는 설정이다. 이건 아주 엉뚱한 생각이 아니라 “빨간 머리 앤의 한 구절”이 단서가 되었다고 한다. ‘존 블라이드와 마릴라가 좋은 친구였으며, 사람들은 그 둘을 연인이라고 했다’는.
10대의 남녀가 만나고 다투고, 오해하고 화해하는 과정들을 지나가면서, 마음과는 다르게 조금씩 거리가 생기는 모양이 퍽 안타깝다. 하지만 이걸 단순히 10대의 충동적 행동으로만 돌리기에는 조금 가벼은 이야기가 될 터. 때문에 작가는 이 지점에 마릴라의 집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하나 더한다.
이야기에서 마릴라에게는 한 명의 오빠만이 아니라 동생도 있었다. 아니, 있을 뻔 했다. 그러나 출산 과정에서 마릴라의 엄마와 동생이 모두 세상을 떠나버렸고,(그 때 마릴라의 나이가 겨우 13세였다.) 그 충격으로 마릴라의 성격에도 극적인 변화가 생겼던 것 같다. 그녀는 ‘초록지붕집’을 지키기로 굳게 결심했고, 그 결심은 그녀 자신에게 지지가 되어주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마릴라와 앤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았던 마릴라에게도 ‘아이’에 대한 소망은 늘 있었던 듯한데, 그건 그녀의 친구인 레이첼이 열두 명의 아이를 낳는 것을 옆에서 보면서 점점 커져만 갔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후에 우리가 잘 알듯이 초록지붕집에 앤이 도착하게 된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나니, 앤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마릴라가 느꼈을 감정이 어땠을 지가 훨씬 더 강렬하게 떠오른달까.
책의 배경에는 이런 인물들 사이의 교차하는 감정선과 함께, 당시 노예제를 두고 벌어졌던 미국 내의 갈등들, 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에이번리가 속한 캐나다 안에서 군주제와 공화제를 두고 벌어지던 극심한 싸움 등도 잘 묘사되고 있다. 에이번리 같은 시골 마을에서도 문제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고, 부분적으로 이는 마릴라와 존 사이의 오해와 갈등의 한 원인이 되기도 하고, 결국 두 사람이 다시 친구가 되는 데 결정적인 사건을 불러오기도 한다.
원작이 따로 존재하는데다가 팬심으로 쓰인 작품이라는 태생적 한계 때문에 그 평가가 어느 정도 깎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무래도 독창성이라는 부분에서 덜 평가를 받게 될 테니까. 하지만 작품 자체만 봐도 충분히 시대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즐겁게 볼 수 있을 만한 작품이다. 특히 루이스가 말했던 것처럼 문학이 주는 핵심가치인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 서볼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마련해 줄 수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빨간 머리 앤의 팬이라면 한 번쯤 읽어 볼만한 작품인데, 시기적으로 이전을 다루고 있지만, 일단 앤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은 꼭 읽어본 다음 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