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비밀문서로 읽는 한국 현대사 1945~1950 - 우리가 몰랐던 해방·미군정·정부 수립·한국전쟁의 기록
김택곤 지음 / 맥스미디어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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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트 대위와 김구면담)
비밀 보고, 1945년 4월 3일
1945년 4월 3일 아침, 본인은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주석과 약 30분간 면담했습니다. 이 면담은 본인이 전혀 요청하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었습니다.
얼마 전 본인이 군사 관련 업무로 임시정부 본부를 방문했을 때제의를 했었는데 이와 같은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면담은 응접 - P46

김구 주석과 대담하는 동안 한국광복군 이청천 총사령관, 광복군 2지대장 이범석 장군, 최근 조직되어 안휘성 부양에서 주둔 중인 광복군 3지대장 김학규 소장 그리고 통역 정한범이 배석했습니다. 김구 주석은 평범한 중국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응접실에들어왔으며 몸이 불편해 잠시 쉬고 있었다고 양해를 구했습니다.
7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김구 주석은 외모나 몸가짐에서 건강하고 당당해 보였습니다. 품격 있어 보였고 절제와 점잖음을 갖춘가운데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어서 그가 25년 동안 애국적 자객이 - P47

자 테러리스트였다는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아 보였습니다.
대담은 대부분 덕담을 나누는 수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김 주석은 미국의 관심에 감사한다고 말하고(제가 이범석 장군과 관계를 이어온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어 전면적인 협력을 할 의향이 있으며특히 최근 안휘성 부양에서 막 도착한 37명의 한국인을 포함해(광복군) 인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생각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본인은 일반적인 동맹국 간 공유하는 가치와는 다르게 한국과의사이에서는 보다 각별한 가치를 공유해야만 한국-미국 공조를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대담하는 가운데 김구 주석은 두개의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습니다.
1. 김구 주석은 이범석 장군과 본인 사이에 발전되어온 관계에 대해 기쁨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양인과의 관계에서 싹튼 모든것을 승인했다고 말했습니다.
2. 그는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섬에 진격할 때 필리핀 대통령 그리고 고위 관료들과 동행했는데 이는 필리핀 국민들로 하여금 마음에서 솟아나는 협력 정신으로 일본이 점령한 필리핀을 공격하는 미군을 돕게 만들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연합군이한국에 진격할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들과 동행한다면 한국 민중들에게도 같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이와 같은 조치는 한국 민중들로 하여금 기꺼이 일본에 저항해 일어서게 하여 한국 내 미국의 작전을 지원하게 될 것으로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 P48

비밀 전문 수신, 1945년 3월 30일발산: 곤명 헬리웰 대령수신: 중경 버드 중령싸전트 대위와 이범석이 토요일(31일) 중경에 도착한다.
뒤에 언급된 인물은 이글프로젝트의 핵심 인물이니, 모든 예우 - P51

를 다해 정중하게 맞아줄 것을요망한다. 이글프로젝트는 4월15일경 시작될 것이며 첩보 활동은 바로 그 뒤 절차대로 착수하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 P52

본인은 안휘에서 온 37명의 광복군 병사들로부터 강력한 인상을받았습니다. 그들은 이지적이었으며 눈이 초롱초롱하고 열정에넘쳐 있었습니다. 군인 집단으로서 이들은 본인이 본 어떤 집단보다 지적 수준이 높아 보였고, 자질 역시 미국의 어떤 청년 장교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대부분은 대학 졸업자이고 몇몇은 소통 가능한 수준의 영어를 구사했습니다. 중경으로 돌아오는 길에 본인은 이들 전원을 이글프로젝트에 투입해줄 것을 이범석 장군에게 요청했습니다.
(싸전트 대위 보고서) - P52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의 보좌역인 정한범 박사가 오늘 아침 나를 방문해, 김구 주석과 이청천 광복군 사령관, 조소앙 외교부 장관 3인이 웨드마이어 사령관을 면담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기를요청해왔습니다. 이들 모두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최고위 당국자들이며 워싱턴 주재 임시정부 대표가 보내온 전보를 받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전보에 따르면 웨드마이어 장군이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인을 활용하는 문제를 워싱턴에 있는 한국 관계자들과 논의했다는 것입니다. 언제가 괜찮을지 알려주면 본관이적절한 메시지를 상대방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oss중국전구 부책임자 윌리스버드 중령이 미군사령부 윌리엄 맥아피 소령을통해전달) - P56

현재 우리가 교육하고 있는 한국광복군 요원 개개인에게는 많은정보 잠재력이 있습니다. 우리 미국 기간 요원들은 이들로부터 첩보를 얻어내기만 하면 됩니다. 요원 가운데 50명은 지난해 한국또는 일본 점령지역 곳곳에서 제각기 다른 시간대에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 65퍼센트는 일본군에서 탈출했습니다. 이들이갖고 있는 온갖 종류의 전략적 · 전술적 정보의 가치는 엄청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이들로부터 끌어내려면 현재의 제한된 미군의 인력으로는 매우 더딜 것입니다.
(싸전트 대위보고서) - P61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그들의 지원을 받게 되면 일본과의대결에서 달성하게 되는 효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919년 한국혁명(3·1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곳곳에 있는 한국인들의 헌신적인 지원을 받으며 한국 국내외에서 대일 파괴 활동과 게릴라전 등 갖가지 대일항전을 벌여왔습니다. 때문에 세계의 다른 어느국가들과 달리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조직은 혁명과 파괴 활동에 대한 경험과 기술을 갖추고 있습니다.
(도너반장군의 루즈벨트에게 건의한 임정승인 요구) - P107

수산: 러치 부인, 제국호텔, 도쿄
발산: 이승만, 워싱턴 DC. 1946년 12월 14일
이 전문을 러치 장군에게 건네주시기 바랍니다.
직접 문병 드리지 못해 유감입니다. 장군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저희는 장군의 계획을 지지합니다. 입법의원을 지명한 것은 실책입니다. 한국 국민은 그들을 직접 선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 사령관이 공산주의자들과 협력하겠다고 고집하는데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좌익 입법의원들은 입법을 방해하고국민을 분열시킬 것이며 그 결과는 비참할 것입니다. 하지 사령관에게 제발 좌우합작 노력 중단을 명령하라고 조언하십시오. - P224

하지 사령관은 미국 점령지역인 남한에서 온건우파와 온건좌파의정당 간 합작을 구축하고 과도입법회의를 구성하도록 노력해왔습니다. 그렇게 되면 남한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실행해야 하는 자치정부 수립의 기반을 갖추게 됩니다. 한국 국민의 다수는 현실을 보다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좌우합작은 지난해 10월 초 발표되었으며 지난 12월 과도입법의원 구성을 위한 선거가 치뤄졌습니다.
-1947.1.3. CIG 가 트루만에게 제출한 한곡의 실태 보고서 - P229

경찰이 정치에 개입해 선호하는 한 편을 지원하고 다른 편을 가해한다면 민주주의의 이상을 현실로 만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한국 경찰들이 목전에서 벌어지는 테러를 못 본 척하고, 실제 테러를 저지르지 않고 있다며 테러단체들을 묵인하고 있는 사례들을 얼마든지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회 불안과 미군정에 대한 불신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좌우합작위원회의 계획도실현될 수 없습니다.
현재까지 한국 경제는 친일파들이 좌지우지하고 있습니다. 친일파 처리에 관한 법이 법제화되어 시행되지 않는 한 조국을 위해헌신할 애국적인 한국인은 없을 것입니다. 또다시 말씀드리지만경찰 개혁이 이루어진 후에야 공정한 선거를 치를 수 있습니다.
-미군정 정치고문 로버트 키니의 정책 보고서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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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르 티무르 - 닫힌 중아아시아를 열고 세계를 소통시키다
성동기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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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제국이 무너지고 나서 먼지처럼 그 흔적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몽골제국의 후예들은 그 영광을 되찾기 위해서 분투했다. 그 한사람이 바로 티무르 제국을 건설한 아미르 티무르와 무굴제국을 건설한 바부르이다. 무굴 제국에 대해서는 인도관련 서적을 통해서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 역사에 관한 책들이 너무도 적기에 아미르 티무르에 대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래서 성동기 교수의 '아미르 티무르'라는 책을 본 순간 너무도 반가웠다. 

  이 책은 얇고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절름발이 티무르의 출생부터 시작해서 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재미있는 동화책을 읽들이 술술 읽혔다. 아미르 티무르 정도라면 600쪽 정도의 벽돌책을 써야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성동기 교수는 300쪽도 되지 않는 얇은 책을 펴냈다. 

 이 얇은 책에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대륙을 공포에 떨도록 만든 아무르 티무르가 절름발이라는 사실이다. 보통의 영웅이 자신의 약점을 잘 드러내지 않는데, 아미르 티무르는 자신이 절름발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칭기스칸의 후예 답게 고난에 굴하지 않고 사막을 달리며 죽음의 고비를 넘겼다. 그리고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한 대제국을 건설했다. 한편의 장엄한 인간 승리 드라마였다. 

  아미르 티무르는 잔인한 학살자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성기동 교수는 그가 실크로드를 재건하고 올로제니아라는 아미르 티무르법전을 편찬하의 통치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오아시스 크레센트라 불리는 중세 최대의 메트로폴리탄을 건설하고, 아름다운 사마르칸트를 건설했다고 칭송한다. 서구인의 시각에서 그는 두려운 학살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인이나 우즈베키스탄인으로서는 위대한 정복군주일 것이다. 우리가 너무도 서구의 시각에 익숙해져있기에 외눈박이 역사인식을 갖을 수밖에 없었다. 아미르 티무르의 또다른면을 우리는 볼 수 있어야한다. 

  이책에 아쉬운 점도 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가 아미르 티무르의 전략을 계승하여 영국을 경영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아미르 티무르의 전략을 여왕은 다른 무엇보다 사랑하였던 것이다."(32쪽)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러나, 아미르 티무르의 전략을 어떻게 여왕이 계승하고 영국을 경영했는지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개정판을 낼때 반드시 보강해주었으면 좋겠다. 

  아미르 티무르는 33세에 처음 원정을 떠나기 시작하여 67세에 떠난 원정길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초라하게 죽는 것 보다 전사는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인지도 모른다. 칭기스칸의 위업을 다시 재현하기 위해서 명나라 원정을 떠났으나 그것이 그의 마지막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아미르 티무르를 떠나 보내면서 책장을 덮는다.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를 공부할 때, 그를 다시 만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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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직후사 - 현대 한국의 원형
정병준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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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은 희망찼다. 1945년 8월 15일 민중은 광복이 찾아온줄 몰랐다. 그러나, 이 시기 조선총독부 관리들과 접촉하며 광복을 준비한 여운형은 8월 16일 서대문감옥 문을 열고 독립투사들이 새시대의 빛을 보았다. 환희에 찬 민중들은 온몸이 땀으로 젖는데도 만세를 불렀다. 건국 준비위원 안재홍은 경성중앙방송국을 통해 라디오 연설을 했다. 광복의 기쁨을 용솟음치게하는데 여운형과 건국 준비위원회가 그 중심에 있었다. 8월 17일 전국에서 해방경축식이 열렸다. 일제의 패망을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로 이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칼자루는 우리 민족의 손에서 벗어나 미군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칼자루를 쥔 미군은 1945년을 광복의 환희에 찬 해에서 뒤틀리고 비틀린 한국사의 시작으로 기억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여운형이 총독부와의 협상을 통해서 행정권을 이양받았고,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기반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고 배웠다. 그러나, 이 설명에는 수많은 진실들이 묻혀있었다. 여운형이 일제강점기에 건국동맹을 만들어 광복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총독부는 치안협조를 여운형에게 요청했고 그 협상장에서 여운형은 5개의 요구조건을 관철시켰다. 광복이 다가오자 민중의 열망을 등에 업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환희에 찬 광복의 물결은 여운형이 준비하고 대비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 환희의 순간에도 총독부는 가만있지 않았다. 자신들이 원하는 치안유지를 위한 협조가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자 곳곳에서 공작을 시작했다. 우리 교과서에 적혀있지 않지만 경무국장 니시히로 다다오는 조선은행에서 돈을 찍어내어 비자금을 만들었다. 미군은 이를 경제적 사보타주라고 말했다. 경제적으로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만들었고, 정치적으로는 친일파를 위한 공작을 초래했다. 친일파 김계조, 한치진, 박석윤 등에게 제공된 이들 돈은 공작금으로 활용되었다. 친일파뿐만 아니라 일본 헌병대와 경찰의 공작이 지속되면서 광복의 그날에도 총독부는 현실이 자신들이 의도한 방향으로 진행되도록 악마의 칼날을 휘둘렀다. 일제는 광복된 그날에도 순순히 물러가지 않았다!!

  9월 6일 미군이 한반도에 왔다. 미24군단이 남한에 진주하고 군사적으로는 유능할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무능한 하지가 한국운명을 결정하는 칼자루를 쥐었다. 하지는 한국어를 할줄 몰랐다. 인종적 편견에 빠진 그는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이해하려하지도 않았다. 결국, 영어를 할줄 아는 한민당과 연희전문학교 출신, 기독교인들을 가까이하려했다. 미군 통역을 맡으면서 문고리 권력을 쥔 이묘묵이 대표적이다. 광복후에도 나가사키 유조의 지시를 받아 공작활동을 한 그가 친미파가 되어 항일투자 여운형을 친일파,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했다. "미영타도, 귀축영미"를 열성적으로 외치던 친일파가 문고리권력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적으로 무능하다 못해서 어리석은 하지가 강력한 미4군단을 이끌고 한국의 정치을 마음대로하려했기 때문이다. 프로이센 군사 격언에는 유능한데 게으른 지휘관을 최상으로 쳤으며 무능한데 근면한 지휘관을 반드시 사라져야할 인물로 꼽았다. 하지는 무능한데 근면한 지휘관이었다. 

  결국 무능하면서도 근면한 하지는 친일 반공집단 한민당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법조, 경찰, 학무, 도지사등 거의 모든 요직을 한민당 혹은 한민당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자들에게 넘겨주었다. 소위 미군의 자문위원회를 한민당 인사들이 장악했고 그들에 의해서 엽관행위가 벌어졌다. 한민당은 초기 임시정부 절대지지를 외쳤으나 이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레토릭이었을 뿐이다. 임시정부 요인이 귀국하자 종래의 태도를 바꾸었고 자신들이 모든 권력을 쥐려했다. 그랬기에 이승만은 한민당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으려 대통령이 되자 한민당을 팽시켰다. 기독교를 믿으며 외국 유학을 갔다온 친일파 출신의 인사들이 미군정에게 사탕발림말을 하여 권력쥔 우리의 해방직후사는 너무도 슬프면서도 우습다. 

  놀라운 일은 한민당에 친일파들만 있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항일변호사 이인, 한국 사법계의 살아있는 전설 김병로, 사도법관 김홍섭은 1946년 한민당 사람이었다. 버치중위 같이 하지의 최측근 조차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그들은 이승만과 한민당을 위해서 부자들을 사법적으로 협박해서 강제로 정치자금을 모금했다. 항일투사가 친일파가 득실대는 한민당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결국 그들의 행위는 민족분단과 친일파의 권력장악, 나아가서 이승만 독재의 길을 터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항일 투사였던 그들에게 광복된 순간부터 친일은 트집잡을 꺼리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던 것일까?

  여운형, 김규식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좌우합작운동을 미군정도 지지했다고 교과서에서 배웠다. 그러나, 미군정의 속내는 그러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극우 이승만보다 중도우파 김규식이 한국의 대통령이 되길 바랬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정병준 교수는 그것이 우리의 착각임을 미군정이 이들에게 보낸 정치자금 액수를 통해서 증명했다. 미군정을 이승만에게는 +1,000만원을, 김규식에게는 +300만원을, 김구와 여운형에게는 0원을, 그리고 박헌영에게는 -240만원을 정치자금으로 제공했다. 미군정의 좌우합작운동과 김규식 지지는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들의 속내는 이승만과 한민당 절대지지였다. 교과서에서 드러나지 않은 미군정의 검은 손길이 얼마나 더 클까를 생각하며 소름이 돋는다. 


  정치적으로 어리석은 하지는 이승만과 한민당을 절대지지했다. 불법을 저질러가면서 이승만에게 =1,000만원의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자신의 간과 쓸개를 모두 이승만에게 바쳤으니 이승만의 절대 신임을 얻었을 것이라 그는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 9단 이승만은 하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미국에 가서는 하지를 공산주의자라고 매도했다. 어리석은 하지는 현실 정치의 매서움을 맞닥드리고는 깊은 좌절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회고록 한장 남기지 않은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광복이라는 환희의 순간을 민족의 자주독립으로 이끌려했던 여운형은 극우파 한지근의 총탄에 저세상으로 갔다. 어리석은 하지는 떠나고 이승만은 절대권력을 쥐었다. 우리의 비틀리고 뒤틀린 역사를 이제는 바로잡아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죽은 이승만을 소환하며 친일 발언을 쏟아내는 뉴라이트 인사들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1945년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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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선생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은 8.15 해방 직전인 8월 10일경이었다. 장소는 혜화동의 남상일(南相) 씨 자택이었다. 그는 당시어느 통신사의 사장이었는데, 몽양과의 관계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거기서 조동호를 위시해 이강국, 최용달 등건국동맹의 대물급이 출입하고 있는 것을 보고 몽양이 신뢰하는 아지트임을 알았다. 나에게 말한 것은 "인간관계를 정리해보게"라는것이었다. 인간관계라는 것은 각계각층 인명의 정리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해방 후에 등장 배치될 인명록을 만드는 것이었다. 단 무엇보다 친일파는 배제하고 유능하고 청결한 (흠결이 없는), 우선 중앙부터, 이어서 전국에 달하는 독립운동에 공로가 있는 인물의 명부를만드는 것이었다. (...) 몽양이 알고 있는 것은 1923~1929년까지로당시 서대문감옥에 빽빽이 들어차 있던 제1, 제2, 제3(ML당), 그리고 신간회의 광주학생대회사건, 간도공산당의 폭동에 관련되어 연행되었던 무리 등의 인명과 그 인품을 내가 점검하는 것이 목적이었을지 모른다.
-이천추 8월 10일경 건준 활동 시작 - P57

A우선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일시적으로 조선에무정부상태가 이어질 것을 걱정했는데, 민중의 안녕질서를 어떻게지킬 것인가가 제1의 목적이었다. 나는 19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운동의 정황과 조선 민중의 마음속에 잠복해 있는 독립의 열망을 알고 있었기에, 만약 해방된 기쁨과 동반해 흥분하게 되면 무질서한 폭동도 일어날 우려가 다분했기에, 날짜는 분명히 기억할 수 없으나 확실히 13일에 경무국장을 중심으로 최고재판소의 검사장, 헌병대장등 치안 관계자의 회의를 소집해 그 대책을 토의했다. 거기서 당시조선 민중 사이에 명망이 높고, 과거 독립운동의 경력으로도, 그리고나도 깊은 우정을 가지고 있고, 내가 평소 씨의 민족운동에 대한 이해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여운형 씨에게 치안 문제를 위탁하게 되었다. 그래서 8월 15일에 씨를 총독부에 초빙해, 정치범을 석방하는 것과 동시에 치안 문제에 대해 책임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원등유작 - P60

해방 직전 당시 여운형은 분망해서, 때때로 엔도 류사쿠(조선총독부정무총감)로부터 호출이 있으면 회합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8월15일 아침, 또한 엔도로부터 전화가 있어서 몽양은 엔도의 관사에 갔다. 그날 정오에 일본 천황의 ‘포츠담선언‘을 무조건 수락한다는 방송을 나는 남상일의 자택에서 들었다. 때는 왔다. 나는 준비를 완료해서, 후에 몽양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다음 날 계동의 임용상의 옛 저택(건국준비위원회 사무소)의 작은 서양식 건물로 출근했다.
-이천추 - P61

조선 민족해방의 날은 왔다. 어제 15일 아침 8시 엔도 조선총독부무총감의 초청을 받아 지나간 날 조선 일본 두 민족이 합한 것이선 민중에 합당하였는가 아닌가는 말할 것이 없고 다만 서로 헤어오늘을 당하여 마음 좋게 헤어지자. 오해로서 피를 흘린다던지 불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하여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이에 대하여 다섯 가지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즉석에서 무조응락을 하였다. 즉(1) 전 조선 각지에 구속되어 있는 정치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2) 집단생활인만치 식량이 제일 문제이니 8월, 9월, 10월의 3개월치 식량을 확보 명도하여달라.
(3) 치안유지와 건설사업에 있어서 아무 구속과 간섭을 하지 말라.
(4) 조선 안에 있어서 민족해방의 모든 추진력이 되는 학생 훈련과청년조직에 대하여 간섭을 말라.
(5) 전 조선 각 사업장에 있는 노동자를 우리들의 건설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 괴로움을 주지 말라.
이것으로 우리 민족해방의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에 아프고 쓰렸던 것은 이 자리에서 모두 잊어버리자. 그리하여 이땅을 참으로 합리적인 이상적 낙원으로 건설하여야 한다. 이때 개인의 영웅주의는 단연코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
-8월16일 휘문중에서 여운형 연설 - P72

아가자. 머지않아 각국 군대가 입성하게 될 것이며 그들이 들어오면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부끄럽지 않게 하여야 한다.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피자. 물론 우리들의 아량을보이자, 세계 신문화 건설에 백두산 아래에 자라난 우리 민족의 힘을바치자. 이미 전문대학 학생의 경비원은 배치되었다. 이제 곧 여러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는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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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읽는 손자병법 - 싸우지 않고 이기는 심리 전략
이동연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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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명을 할때, 무조건 좋은 이름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그에게 좋은 이름이다. '심리학으로 읽는 손자병법'이라는 책이름은 너무도 좋왔다. 그러나, 책의 내용이 책이름의 무게를 따라가지 못했다.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손자병법을 새롭게 재구성한 책으로 기대했으나, 손자병법에 관한 해설에 심리학을 약간 언급한 정도의 책이다. 손자병법 원전을 공부하고, 손자병법에 관련된 책을 꾀 읽었다고 자부하는 나로서는 실망감이 크게 감도는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키루스의 교육'이라는 책을 읽었다. '키루스의 교육'에서 제시되는 수많은 키루스의 말들이 사실은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내용과 흡사한 내용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그중 한가지 예를 들겠다. 키루스는 자신이 거느린 장졸들과 자신의 동맹들에게 많은 선물을 준다. 특히 자신의 장졸들 중에서 가장 용감히 싸운 사람에게는 특히 많은 상을 내려주었다. 자신이 많은 것을 가지고 이를 지키기 위해서 금고를 만들고 금고를 지키기 위해서 창고를 짓고 병력을 배치하는 수고를 하기 보다는 자신의 것을 나눠줌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얻는다. 제국의 모든 것이 키루스의 것이기에 신하들과 장졸들의 것은 키루스의 것이기도했다.


  故車戰 得車十乘以上 賞其先得者 而更其施旗 車雜而來之 辛善而養之 是謂勝敵而益强(손자병법 작전편)


  적의 물자를 빼앗으려면 물자를 상으로 주어야한다. 키루스는 부하들과 상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방법을 토론하고, 그 약속을 지켰다. 자신의 식사에 중대를 초청한 것도 상을 주어 군대를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키루스는 탁월한 전략가임을 손자병법을 읽으며 새삼 깨달았다. 

  손자병법에는 학급의 학생들을 어떻게 대해야하는가에 대한 조언도 있다.


  厚而不能使 愛而不能令 亂而不能治 臂如驕子 不可用也-306쪽


  후하게 대하면 시킬 수 없고 사랑하면 명령을 내릴 수 없으며, 혼란이 발생하여 다스릴 수 없다. 비유하자면 교만한 자식이되어 쓸모없어진다. 그렇다. 학생에게 너무 잘대해주면 학급일을 시킬 수 없다. 학기초에 홈베이스 청소를 맡은 한학생이 교실 청소지도를 하고 있는 나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했다. 나의 딸같아서 홈베이스에 갔더니 사물함 위에 올려져 있는 책을 내려달란다. 이를 내려주고 나서 과연 이것이 내가 잘한 일인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여학생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담임 교사에게 요청만한다면 이 학생은 과연 자신이 맡은 일을 스스로하는 책임감을 언제 배울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랑으로 대하되 규율을 엄격하게 하라(엄율자양)는 손자의 원칙으로 학급을 운영했다. 학교의 교칙을 지켜야하며 자신이 맡은 일은 스스로 완수하도록지도했다. 손자병법은 우리 생활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한 지침을 지시하고 있었다.

  손자병법은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에 대한 안목을 넓혀주기까지한다. 


  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백번싸워 백번 이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선이다. 레이건이 1982년 소련붕괴작전(NSDD-66)에서 사용한 방법이 싸우지 않고 이기는 최고의 승리였다. 원유를 4배 증산하여 유가를 30달러에서 7달러로 추락시켰다. 원유수출로 지탱하고 있던 소련은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받았고 결국 소련은 무너졌다. 

 이러한 현상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무리하게 전쟁을 끌고 있다. 이제는 헤즈볼라에 까지 도발을 이어가고 있다. 인구가 얼마되지 않는 이스라엘이 미국에 기대어 1년이상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도 마찬가지도 전쟁초기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않고 중립국으로 남는 것을 조건으로 전쟁을 끝내려했다. 그러나, 영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의 지원약속만 믿고 어이없게도 러시아 불곰과 전쟁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그 결과는 참담하다. 전투병력의 씨가 말라가고 있다. 전쟁을 이어가려해도 전쟁을 할 수 있는 인력이 없어서 우크라이나가 패배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내몰리고 있다.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선이이라는 손자의 격언을 따르지 않고 전쟁의 길을 걷고 있다. 이는 이들 국가가 비록 승리하더라도 치유하기에는 너무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커다란 상처를 남길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때 처음 손자병법을 읽었다. 그리고 대학에서 손자병법 원전을 읽었다. 그 후로도 손자병법을 해설한 책들을 탐독했다. 때로는 k-mooc에서 손자병법 강의를 들으며 손자병법의 심오한 뜻을 머릿속에 새기려했다. 심리학이라는 새로운 시각으로 손자병법을 읽으려는 나의 기대는 무너졌지만, 새롭게 손자병법과 열애의 시간을 보낸 것은 행복했다. 


ps. 이책에 옥의 티도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조조는 삼국 통일의 위엄을 세울 수 있었다."-150쪽


  중국 삼국통일은 조조가 이루지 못했다. 조조의 후손이 세운 위나라에서 우리지도 못했다.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에 의해서 삼국통일이 이뤄진다. 바로 진나라가 촉을 멸망시키는데 역사적 사실에서 오류가 있어 허술함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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