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일생 - 45억년, 시간으로 보는 지구의 역사
최덕근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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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팟캐스트 '독자적인 책수다'를 통해서 최덕근의 '지구의 일생'을 알았다. 재미있게 지구의 역사를 알려주는 방송내용에 매료되어 시간가는줄 몰랐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래, 한번 도전해보자! 지구의 역사를 까마득한 빅뱅에서부터 시작해서 미래 태양계의 사멸까지 읽어보자!  그때 나와 약속했던 것을 지금에서야 지켰다.

 

  138억년전 빅뱅이 있었다. 그리고 우주가 생성되었다. 그리고 45억 6800만년전 태양계가 생성되었고, 약 45억년전 지구가 탄생했다. 무수히 많은 별들 중에서 태양이라는 별이 탄생했고, 그 별을 도는 행성 중에서 지구어세만 생명체가 탄생했다. 그러나, 그 생명체가 탄생하기 이전에 지구는 수억년을 쓸쓸히 지내야했다. 그리고 그 시기의 지구는 우리가 상상하는 지구가 아니었다. 원시지구는 마그마바다가 넘실거렸다. 5시간마다 자전했고, 지구와 달의 거리는 2만 4천 킬로미터이었다. 지금 달과 지구의 거리가 38만 4천 킬로미터인 것을 고려한다면, 그당시 달의 크기는 엄청 커보였을 것이다. 어린시절, 내가 보았던 그당시의 모습은 예전부터 그러했으리라 생각했다. 우리가 보는 지구는 예전부터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러하지 않았다. 지구도 생명이 탄생할 수 없는 뜨거운 마그마 바다였을 때가 있었다. 성공한 CEO를 보면서 그는 예전부터 성공해 있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것과 같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의 생명력 넘치는 지구도 생명을 다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늦어도 10억년 후에는 대기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감소하여 광합성 활동이 일어날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른다. 그리고 지구에는 동식물이 사라지고, 세균과 같은 원핵생물들만 남겨진다. 20억년 후에는 강력해진 태양에너지의 온실효과로 지구에는 어떠한 생명체도 살아갈 수 없게 된다. 50억년 후에는 태양이 수명을 다하게 된다. 태양이 적색 거성이 되어 부풀어 오르다가, 헬륨의 핵융합반응이 끝나가면서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 백색 왜성이 되어 별로서의 일생을 마치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 유한하듯이, 지구의 삶도 유한하다. 그리고 태양의 삶도 유한하다. 우리는 지구와 태양의 일생중에서 아주 작은 점을 차지하고 있다. 그 점 속에서는 지구와 태양이 무한해보인다. 마치 하루살이에게 인간의 수명은 헤아리기 힘든 시간으로 느끼듯이 말이다.

  지구와 태양계의 수명이 있다면, 우주에도 수명이 있지 않을까? 빅뱅으로 시작해서 많은 별들을 만들어낸 우주가, 그 팽창을 멈추면 우주는 사라지지 않을까? 그리고 새로운 우주가 탄생하지 않을까? 지구와 태양의 수명이 유한하듯이, 우주의 생명도 유한할 것이다. 그리고 우주의 생명주기는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상상하기 힘든 기간일 것이다.

 

  이책에는 전문용어가 많다. 팟캐스트를 들을 때와는 다른 수준의 내용이다. 그러나, 팟캐스트를 통해서 책의 내용을 예습했기에, 전체적인 내용은 이해 가능했다. 그리고 단순히 지구의 일생만을 상상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태양계를 거쳐, 우주의 일생까지 상상하게 만드는 책이다. 인문학적 소양은 넘치지만, 자연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독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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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12-24 17: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강나루님, 2019년 서재의 달인 북플마니아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 되세요.^^

강나루 2019-12-24 19:4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도 서재의 달인 되신것 축하드립니다
 
울트라 소셜 - 사피엔스에 새겨진 ‘초사회성’의 비밀
장대익 지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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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피엔스가 지구의 주인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유발 하라리는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믿는 능력이라 말했다. 또한 이 능력을 이용해서 민족, 국가 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을 생산해냈고, 이를 통해서 효율적으로 네안데르탈인, 호모 에렉투스를 비롯한 여타 경쟁자들을 지구상에서 박멸시켰다. 사피엔스의 엄청난 공격성은 지구의 주인에서 그치지 않고 우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라는 책에 대척점에 서있는 책이 바로 장대익 교수의 '울트라 소셜'이다. 역사학자인 유발 하라리의 주장에 대해서, 과학자인 장대익교수는 어떠한 주장을 전개할까?

 

1. 부당한 현실에 원숭이도 분노할까?

  조국 사태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다시 평등과 정의에 대한 이야기가 대두되고 있다. 평등추구는 비단 인간만의 욕구가 아니다. 원숭이를 상대로한 실험에서도 똑같은 일을 했는데도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다를 때는 원숭이도 화를 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원숭이의 경우,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에 대해서만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인간은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안다. 장대익 교수는 이것이 바로 원숭이가 가진 공정성과 인간이 가진 공정성의 차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당한 부당함에만 분노할 줄 알지, 타인이 겪은 부당함에는 무관심한 것이 원숭이의 한계라면 인간은 타인이 겪은 부당함에도 분노할줄 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그러하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오히려 교묘하게 타인의 부당함을 탓하면서 자신이 저지른 부당함에는 침묵한다. 조국에게 분노를 느끼는 젊은이들은 올바른 말을 해오던 조국에게서 오는 배신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조국은 구조적으로 기득권층에게 유리한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이용했을 뿐이다. 그것도 그가 아니라 그의 자녀가..... 어쩌면 법무부 장관을 사퇴하는 조국이 굳지 사과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당시에는 부모의 덕으로 논문 저자로 올라가고, 외고를 통해서 의대로 진학하는 것이 강남 엄마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모습이었으니까... 심지어 모 대학교의 총학생회장도 논문저자로 이름을 올려 합격했다는 것은 조국에게 분노하는 그들에게 과연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그를 비판하는 정치인들 중에 일부는 자녀가 부정입학했다는 의혹을 받기도했다. 자녀 입학을 전수조사하자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유야무야하는 현실을 보며, 과연 그들이 조국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든다. 자신이 누리는 특권은 침묵하며 타인이 누리는 특권에만 비난을 하는 그들은 어쪄면 원숭이보다 못한 도덕성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제를 수행하지 않은 원숭이게는 포도를 주고, 과제수행을 한 원숭이에게는 오이를 주었더니, 수행실패 및 보상 거부 비율이 90%에 이르렀다. 이에 대해서 장대익 교수는 "무위도식하는 금수저 옆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짜증스러운 상황이 되고 말았다."라고 표현한다. 믿었던 조국의 자녀가 합법의 태두리 안에서 누린 가진자들의 특권에 대해서 젊은 이들이 분노하는 것도 일면이해된다. 그러나, 불법의 태두리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으며, 마약을 소지하거나 마약을 투약한 특권층의 자녀가 버젓이 거리를 활부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서는 조국에게 보였던 분노를 터트리지 않는 것에 더 큰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우리 사회는 절대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함부터 절대악이 존재할 뿐이다. 조국이 절대선이라고 믿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환상일 뿐이다. 조국에게 걸었던 절대선의 믿음이 붕괴되어 허탈감에서 그를 돌던지려는 사람에게 한마디하고 싶다. 당신이 돌을 던져야할 대상은 조국이 아니라 "절대악"이라고.... 그래도 조국은 검찰을 개혁해서 사회를 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려했으며, 자신의 가족이 누린 특권에 대해서 사과했다. 그러나 "절대악"의 세력은 자신의 자녀가 누린 불법에 대해서 사과하지도 반성하지도 않았다. 원숭이의 세계보다 인간 세계는 복잡하다. 분명한 선악의 구분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절대선을 추구하지만, 현실에서는 최악을 피하는데 우리가 주력해야한다. 그래야 오늘 한발짝 진보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거울신경 세포계(mirror neuron system)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기 전에 이미 내 뇌에서 저절로 작동하는 공감회로이다. 거울신경 세포계에 이상이 생겼을 경우, 자폐증의 원인이 된다. 타인의 관점에서 그의 고통에 슬퍼하고 그의 기쁨에 기뻐하는 것이 거울신경 세포계가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초사회성을 발휘할 수 있는데는 거울신경 세포계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지위가 높을 수록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지 못한다. 안전장치를 만들면 아까운 생명을 살릴 수 있음에도 돈 몇천만원이 아까워 안전장치를 하지 않고 살인적인 노동을 시키다가 안타까운 생명을 잃은 모 제철소와 모 발전소를 예로들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것은 어찌 설명해야할까? 울트라 소셜에 반하는 지위가 높은 자의 행동이 어찌하여 지위가 높은 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날까? 진화에 반대되는 행동이 유독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일까?

  '구조의 모순'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경제학에서 개인으로서는 현명한 선택이 거시경제학적 입장에서는 불행한 행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개인이 소비를 줄이고 절약한다면 가정경제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현명한 행동이 국가경제의 입장에서는 소비를 위축시켜 국가 경제의 위축을 가져온다. 타인의 불행에 측은지심을 발휘하지 못하는 능력이 국가의 입장에서는 위해한 일이지만, 개인의 입장에서는 돈을 벌 수 있다. 타인을 밟고 자신이 일어설 수 있다. 조국사태를 통해서 우리는 깨달아야한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젊은이 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조국과 자녀의 부정입학 의혹과 재단비리 의혹을 받으며, 기존의 검찰특권을 지키려 무리수를 두는 사람중에서 어느쪽이 거울신경 세포계가 살아있는 사람인지 알아야한다. 자신의 몸에 똥이 묻었음에도 겨묻은 자를 비난하는 자와 자신의 몸에 겨는 묻었으나, 사회의 똥을 치우려는 사람 중에서 누구에게 응원을 보내야하는지를 깨달아야한다.

 

2. 인간은 고독을 두려워해야하는가?

  '마키아벨리적 지능 가설(Machiavellian intelligence hypothesis)'이 있다. 영장류의 고등 인지가 일차적으로 그들이 처했던 사회생활의 특수한 복잡성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생겼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복잡성 때문에 두뇌를 더욱 발전시켰다는 주장이 진실이라면, 인간은 '소외'를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우리 뇌에 있는 '배측 전대상피질'은 신체적 고통과 사회적 고통 모두를 담당한다. 사회적인 '소외'를 하면 신체적 폭력을 당한 것과 같은 고통을 우리는 느끼게 된다. 눈으로 보이는 육체적 고통과 눈에 안보이는 정신적 고통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는 셈이다. 인간은 집단에서 소외 당했을 때 육체적 고통과 같은 고통을 당한다. 그래서 동조현상이 일어나는 지도 모른다. 명백히 잘못된 대답을 주변사람들이 하는데도 그 무리에서 소외되기 싫은 개인은 주변의 행동에 동조하게 된다. 집단에서 배척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에게 거짓을 말하게 한다. 전체주의 국가, 집단의 문화가 강한 곳에서 이러한 동조현상이 잘 나타난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 스탈린 치하의 소련, 일본제국주의 치하의 조선과 일본, 박정희 치하의 대한민국에서 동조현상이 많이 나타났다. 이중에서 일본제국주의 치하의 일본은 미국에 의해서 벗어났고, 박정희 치하의 대한민국은 대한민국인에 의해서 벗어났다. 외부에서 주어진 민주주의와 내부의 힘으로 이뤄낸 민주주의는 순응하는 일본과 스스로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대한민국으로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

  핵발전소가 폭발하고 제대로된 제염작업을 추진하지 못하면서도 후쿠시마 주민들을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조치하고 있는 일본과 촛불혁명을 통해서 정권교체을 이뤄낸 대한민국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용기 있게 "NO"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가 진행한 추가 실험에서도 "NO"를 외칠 수 있었던 사람이 있는 경우, 자신의 주장을 용기있게 말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순응적인 성격이어서 가장 통치하기 쉬운 일본인에 비해서, "아니오"를 외칠 수 있는 대한민국사회가 더 밝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를 내야한다. 기래기들이 조국가족에 대한 악마적 기사를 쏟아낼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법개혁", "검찰개혁"이라고.... 내주변에 나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없다할지라도 용기 있는 나의 행동이 침묵하는 수많은 개인을 일깨울 수 있음을 명심하자. 고독을 즐기며, 다수의 침묵하는 개인을 깨우자!

 

3. 과학의 힘으로 인간을 완벽히 해석할 수 있을까?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영역이라 말한다. 과학과 종교는 서로 다른 영역이기에 종교로 과학을 설명하려하지 말고, 과학으로 종교를 말하려하지 말라!! 라는 말이 상식처럼 회자되었다. 그런데, 과학이 종교를 분석하고 해석하려하고 있다. 종교를 '정신 바이러스'로 보는 견해부터 '감시자 역할', '인지 적응의 부산물', '진화적 적응'으로 해석하려하고 있다. 이제 과학의 힘이 종교를 앞도할 것인지 흥미롭다.

  과학은 더 나아가서 인류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윤리적 소비'에도 과학이라는 매스를 들이댄다. 아라비안 노래꼬리치레의 보초 역할을 근거로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들이 번식 성공뉼이 더 높아진다는 결론을 내렸다. '짝짓기의 성공을 높이기 위해서 인간은 행동 한다.'라는 관점에서 '윤리적 소비'를 해석한다. 그러나, 자신의 선행을 평생 드러내지 않는자가 있다. 충남대학교에는 '정심화홀'이 있다.  김밥을 팔며 살아온 이복순 할머니가 자신이 모은 전재산을 충남대학교에 기증했고, 이를 기리기 위해서 충남대학교는 '정심화 국제 문화회관'을 만들었다. 정심화 이복순 할머니의 선행을 '진화심리학'적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을까? 단순히 자신의 생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서 선행을 한다는 일차원적 해석으로는 풀리지 않는 숭고함이다. 개인의 생식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행동이라기 보다는 인류애적 숭고함이 정심화 이복순 할머니의 선행을 이끌어 냈다고 설명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

  '자살 폭탄 테러'를 과학에서는 어떻게 설명할까? 장대익 교수는 밀그램의 실험을 예로들며 권위에 복종하는 행동이라고 설명한다. 권위에 복종해서 자살 폭탄 테러를 한다면, 일제강점이 '가미카제 특공대'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 일어나는 '자살 폭탄 테러'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들은 권위에 복종하기 보다는 자발적으로 자살 폭탄 테러를 하고 있다. 그들은 종교적 신념(?)이든, 개인적 원한이든 스스로 자살 폭탄 테러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를 실행했다. 자신의 자녀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팔레스타인 할머니가 자살폭탄테러를 감행한 적이 있다. 그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타인에게 복종했다는 생각이들지 않았다.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잃은 분노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가면서 보복을 하려는 행동으로 나타났다. 자살 폭탄 테러에 대한 장대익 교수의 설명은 너무도 허술하다. 자살 폭탄 테러의 일부를 설명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나머지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종교, 윤리적 소비, 자살 폭탄 테러에 대한 과학적 설명은 불완전하다. 시간이 지난다면 이부분도 명백히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이 모든 부분을 설명하는 것이 아름다워보이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신비로움이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4. 사피엔스가 침펜지와 다른 길을 걸었던 까닭은?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가 지구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을 '이야기'에서 찾는다. 거짓말을 하고 그 거짓말을 스스로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통의 이야기가 있어야한다. 그러면서 신화가 만들어진다. 민족이라는 신화, 자본주의라는 신화 말이다. 장대익 교수도 이야기의 중요성을 말한다. 이야기는 가치판단을 공유하고 삶을 예행연습한다. 한국인이 드라마를 좋아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쾌락을 줄뿐만 아니라, 각자의 삶에 힌트를 주기도 한다.

  사피엔스가 침펜지와 다른 길을 걸었던 또다른 큰 이유는 '남으로 부터 지식과 지혜를 끊임 없이 전수 받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교육 시스템은 지식의 축적과 다음 세대에게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현대 문명의 처절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20년이 넘도록 학생들을 학교에 가둬 놓고 인류의 지식을 전달한다. 인류가 지구라는 행성을 정복한 댓가는 가혹하다. 학습의 기간도 시간이 지날 수록 늘어가만가고 있다. 이제는 평생학습이라는 말이 유행한지 오래되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탄생했다. 지적인 능력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을 앞섰다. 그렇다면 인간은 학습을 포기할 것인가? 인간이 학습을 포기한다면 인간은 AI에게 지적 종속될 것인가? 자율 주행차에게 운전대를 넘긴다면 인간은 안락해질 것이다. 그러나 지적 운전대를 인공지능에게 넘긴다면 인간은 행복해질까? 스타이넷이 인류를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은 나만의 공상일까?

 

 

  "인류가 초사회성을 진화시켜 지구의 정복자가 되었다."라고 장대익 교수는 주장하고 있다. '타종족을 박멸하며 지구의 정복자가 되었다.'라는 유발하라리와 대비되는 주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장대익교수와 유발할리의 주장은 동전의 양면처럼 보인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는 초사회성을 발휘하지만,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에 대해서는 배척과 침략, 파괴를 자행한다. 이 양면중에서 인류는 초사회성의 범위를 끊임 없이 넓혀갔다. 인종과 신분을 뛰어 넘어 일류 보편의 가치를 실현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지구 환경보호와 생물 다양성 보호로 그 관심사가 넓어지고 있다. 이것이 사피엔스의 위대성일 것이다. 물론, 초사회성의 범위를 넓혀가려는 노력에 야유와 비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현명한 인류는 이를 넘어설 것이다.

  이글을 마치며 장대익 교수의 글을 소개하겠다.

 

  "다른 사람과 협력하고 싶은가? (중략) 그 사람이 보는 곳을 보라, 상대의 마음을 알고 싶은가? 그 사람의 동공을 보라. 마음이 흔들렸다면 동동에도 지진이 일어났으리라."-29쪽

 

  초사회성의 범위를 넓히려는 노력에 야유와 비난을 하는 사람에게 초사회성을 발휘한다면 인류는 그 높은 벽을 넘어 설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에 닥친 위협을 넘어설 열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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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 정재승 + 진중권 - 무한상상력을 위한 생각의 합체 크로스 1
정재승, 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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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승과 진중권이 만났다. 미학자와 과학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21가지 문화키워드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한다. 흥미있어 보이는 이 책을 읽게된 이유는  정재승의 '12발자국'을 재미있게 읽었기에 그의 책을 더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재승을 만나기 위해서 덤으로 진중권을 만나게 되었다. 두사람의 관점은 어떻게 다르고 얼마나 같을까? 두사람의 안내를 따라 21가지 문화코드를 살펴보자.

 

1. 정재승과 진중권 서로를 디스하다.

  정재승과 진중권이 각자 자신의 관점에서 문화코드를 해석한다. 서로가 상대방을 디스할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글을 읽는 나로서는 마치 정재승과 진중권이 서로를 디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주제들이 있었다. 두사람은 서로를 디스한 것일까?

  생수라는 주제로 정재승은 생수에는 환경호르몬과 세균이 많기에 사람에게 수돗물보다 생수가 좋을 리가 없다고 단언한다. 반면, 진중권은 한의사들의 관점을 빌어서, 수돗물과 끓인 물은 죽은물이라 말한다. 미생물과 산소, 무기질이 수돗물과 끓인 물에는 적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쯤되면, 생수를 마셔야할지, 수돗물을 끓여 마셔야할지 햇갈리기 시작한다. 물론, 두사람이 생수를 '패션 악세사리'라고 보고 있다는 점은 일치하고 있다.

   생수와 수돗물에 대한 견해는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생수라는 문화코드에 대한 두사람의 견해차는 애교로 볼 수 있다. '레고'에 대한 두사람의 견해하는 애교로만 볼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보통의 아저지들은 자녀에게 레고를 사주며 창의력이 계발되기를 바란다. 정재승은 레고보다 더 창의적인 장난감을 소개한다. 그것은 '쓰레기 더미와 자연'이다. 레고라는 틀을 벗어나 새롭게 새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은 자연이다. 반면, 진중권은 레고를 조립하듯이 좁쌀만한 모래로 만다라를 그리는 티베트 수도승을 소개한다. 정밀한 모래 만다라를 그린 티베트 수도승은 일시에 완성된 작품을 헤체한다. 이부분에서 진중권은 불교와 레고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레고 자체에 얽매인 정재승의 관점보다 인문학적 발견이 첨가된 진중권의 글이 큰 매력을 내뿜는다.

  '생수'라는 문화코드가 누구의 관점이 더 높은 차원인지를 겨루었다면, '개그 콘서트'는 정재승과 진중권이 서로를 디스하는 듯한 분위기를 표출한다. 정재승은 '"개그는 개그일분 오해하지 말자" ....(중략)... 이것을 제대로 못배우면 나중에 웃자고 한 애기에 죽자고 덤벼드는 '똥오줌 못 가리는' 인간이 되고 만다.'라고 말한다. 즉, 개그는 개기일뿐인데 이를 현실과 연관시켜 개그를 비난한다면, 그사람은 '똥오줌 못가리는 인간'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 진중권은 무어라 말할까? "교양과 반성이 없는 개그는 쓸데 없이 비열해질 수 있다."라며 특정 계층을 비하하는 내용의 개그를 "쓸데 없이 비열"하다고 꼬집는다. 정재승의 눈에 진중권은 '웃자고 한 애기에 죽자고 덤벼드는 '동오줌 못가리는' 인간으로 보일 수 있으며, 진중권의 눈에 정재승은 '쓸데 없이 비열'한 개그를 두둔하는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 두사람이 이 책을 쓰고 멱살을 잡고 헤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들 정도다.

 두사람의 갈등은 '박사'라는 주제에서 더 극명하게 갈린다. 진중권은 자신이 석사임을 밝히며, '학위를 따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이 있다면, 차라리 미국에 가서 조종사 면장을 따고 곡예비행을 배우는 게 내 삶을 더 풍요롭게'할 것이라 주장한다. 반면, 정재승은 박사과정을 밟으며 바쳤던 자신의 열정에 자랑스러워한다. 두사람이 서 있는 위치가 석사와 박사라는 차이에서 빗어지는 관점의 차이가 여실히 커보인다. 박사라는 문화코드를 바라보면 진중권은 학벌사회 타파를 주장했고, 정재스은 학문에 대한 열정을 떠올렸다. 이 부분을 읽기에 따라서는 진중권이 자신의 학력에 상당한 컴플랙스를 가지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진중권의 본심은 무엇일까?

  서로 다른 두사람의 관점을 서로를 향한 부러움과 질투의 시선에서 바라보니 남모를 긴장감이 느껴진다. 물론, 두사람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에게 배우려하겠지만 말이다.

 

2. 서로에게 끌리는 두사람

  정재승과 진중권 두사람이 서로를 디스하는 것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때로는 서로에게 끌리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문화코드에 대해서 말하면서 정재승은 인문학에 관심을 보인다. "'머저리의 리포트'에 의지해 세상의 모든 불행을 예방할 수 있다고 믿는 '머저리의 세상'을 극복하는 것. '소수의견'이라고 해서 함부로 삭제되지 않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이 영화를 두고 두고 봐야하는 이유다."라며, 기술문명에 절대성을 부여하기 보다는 인간이 만든 기술문명에 인간의 오만과 편견을 배제하고 인간성을 회복할 것을 외친다. 반면, 진중권은 '마이너리티 리포트' 속에 펼쳐진 첨단 과학기술에 관심을 갖는다. '창의적이지 못한 기술은 기능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기술도 이제 예술과 문학의 지원을 받아야한다는 애기다.'라며 기술이 예술과 문학과 결합해야합을 강조하고 있다. 기술에 매몰되어 인간성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강조하는 과학자 정재승, 과학의 발전 방향을 제시하는 미학자 진중권!! 어쩌면 서로가 자신의 활동분야보다는 상대방의 활동분야에 더 관심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두사람의 태도는 '제프리 쇼'라는 문화코드에서도 나타난다. 진중권은 '가상과 현실, 혹은 은유와 현실이 어지럽게 뒤섞인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가 오늘날 디지털테크놀로지에 힘입어 점점 현실화되고 있다.'라며 과학 기술의 발전에 감탄한다. 반면 정재승은 '뒤늦게 깨달은 것은 과학자가 예술가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과학자가 되어간다는 사실'이라며 예술의 위대성에 감탄한다. 미술평론가는 과학에 과학자는 미학에 관심을 더 갖고 있다. 그러서면서 자신의 분야에서 창조적 영감을 타 분야에서 얻고 있다. 진중권과 정재승은 서로에게서 창조적 영감을 얻고 있었다.

 

3. 과학적인 글쓰기가 매력적인 정재승

  사람은 보이는데로 보기보다는 보고 싶은데로 본다는 말이 있다. 정재승과 진중권은 과학자와 미학자라는 차이 때문에 같은 문화코드를 보면서도 보고 싶은데로 보는 면이 있다. 이것이 두사람의 글쓰기에도 차이를 만들어 낸다. 특히, 정재승의 과학에 근거한 글쓰기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구글'이라는 문화코드에 대해서 진중권이 구글의 놀라운 검색기능을 이용해서 '21세기 글쓰기'를 한다고 가벼운 소개를 한 반면, 정재승은 세상의 모든 정보를 담으려는 구글의 노력에 주목한다. 진중권이 구글을 이용하는 이용자의 느낌을 주었다면, 정재승은 전문가로서 놀랍게 변화와 발전하는 현실을 날카롭게 분석한 글이라는 느낌을 준다. 정재승의 글이 더 끌리는 이유이다.

  '스타벅스'라는 문화코드에서도 정재승의 설득력있는 글쓰기는 빛난다. 진중권이 '취향의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스타벅스의 인끼를 설명해서 너무 뻔한 내용을 서술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반면, 정재승은 작은 것을 시키면서도 'tall'이라고 주문하면서 소비자의 자존감을 높이는 스타벅스의 전략을 소개한다. 나는 감탄했다. 이 방법을 수업시간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적용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문화를 팔아라'라는 전략을 뇌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뇌과학자 답다는 감탄이 나왔다. 뻔한 말을 하는 진중권보다는 과학에 근거한 정재승의 글이 보다 설득력을 갖았다.

  '쌍커플 수술'이라는 문화코드를 설명하면서 정재승의 글쓰기의 설득력은 최고조에 달한다. 진중권이 '사회의 온전한 일원이 되기 위해, 유대인남성은 성기에 할례를 받고 한국인 여성은 눈두덩에 할례를 받는다.'다는 매력적인 글로 '쌍커플 수술'을 설명했다. 정재승은 진중권의 글을 어떻게 넘어설까? 진화 심리학적으로 보았을 때 "쌍커풀은 성선택에 유리한 신체기관"이라는 사실을 설명한다. 과학적 근거에 바탕을 둔 정재승의 글은 설득력을 높여주었다. 진중권이 쌍커풀 수술을 설명하면서 불필요하게 포경수술 경험을 말하는 우를 범했다면 정재승의 글을 깔끔하면서도 논리적이었다. 지금은 과학 혁명의 시대이다. 과학적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는 설명을 설득력이 약할 수 밖에 없다.

 

4. 진중권 글쓰기의 심오함.

  그럼, 진중권의 글은 설득력이 없는 공허한 글들로 가득차있을까? 과학자가 보지 못하는 관점을 미학자 진중권을 보고 있다.

  '9시 뉴스'라는 문화코드를 설명하면서 진중권은 신경민 앵커의 클로징멘트의 사회성을 지적한다. 이명박근혜시대에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제대로 밝힐 수 없었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과감하게 하는 신경민 앵커의 멘트가 갖는 의미를 제대로 조명하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의미있는 일이다. 반면, 정재승은 9시 뉴스에 과학자들의 인터뷰가 갖는 한계와 아쉬움을 적고 있다. 정재승의 글은 과학자들에게만 흥미를 끌 수 있는 소재였다. 이명박 정권하에서 자유롭지 못한 언론문제를 지적한 진중권의 글이 당연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스티브 잡스'라는 문화코드를 설명할에도 정재승은 "'전전두엽'에서 담당한다고 알려진 21세기형 창조적 기능들은 사회화가 많이 될 수록 또 일찍될수록' 오히려 들어드는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교육에서 스티브 잡스를 길러낼 수 없다는 정재승의 과학적인 글은 우리에게 허탈함으 안겨준다. 반면 진중권은 현실 왜곡장, 예술가형 CEO라는 관점에서 잡스를 분석하고 있다. 정재승이 잡스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점에 촛점을 두었다면, 진중권은 잡스로부터 우리가 배울점이 무엇인지에 주목하고 있다. 정재승이 허탈감을 주었다면, 진중권은 희망을 주었다. 잡스를 우리교육에서 만들어 내기는 힘들어도 만들기 위한 노력은 해야하지않을까? 그리고 잡스에게서 우리가 배울점을 찾는 것이 더 의미있지 않을까? 진중권의 글이 더 가슴에 와닿는 이유이다.

  '앤절리나 졸리'라는 문화코드에 대한 관점에서도 정재승은 '고딕시대 여신'이라 설명하는 것에 그쳤다. 반면 진중권은 '자신의 도덕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간다.'라며 앤절리나 졸리의 삶과 매력을 집중 탐구했다. 앤절리나 졸리에 대한 정보가 없는 나에게 진중권의 풍성한 정보전달은 더큰 설득력을 안겨주었다.

  사람은 감성적인 동물이라는 점을 벗어날 수 없다. 정재승이 아무리 과학에 근거한 글쓰기를 한다할지라도, 인간의 감성을 건드리지 못한다면 머리로는 설득되지만, 가슴으로 공감을 얻지는 못한다. 두사람의 글쓰기는 글쓰기가 어떠해야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으로 잘 알려진 유명인사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자신의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는 진중권과 정재승의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도 흥미롭다. 두사람이 때로는 반목하면서도 때로는 서로의 영역에 매력을 느낀다. 때로는 머리로 말하는 정재승에게 끌리지만, 때로는 가슴에 와닿는 진중권의 말에 공감한다. 그렇다고 두사람의 주장이 항상 상반된 것만은 아니다. '헬로키티'라는 문화코드를 설명하면서는 키티의 '개인사'가 인끼를 얻는 원인중에 하나임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진중권이 바비와 키티를 비교하며 키티에 깔리 일본적 특성을 지적하는 반면, 정재승은 키티의 입모양을 보고 감정을 읽는 서양인과 눈을 보고 감정을 읽는 동양인의 특성을 설명한다. 정재승과 진중권의 글은 서로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잘해주었다. 한권의 책을 읽으면 한가지 1관점을 갖게 된다. '크로스'라는 책은 한권의 책으로 두가지 관점을 갖게하는 흥미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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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발자국 - 생각의 모험으로 지성의 숲으로 지도 밖의 세계로 이끄는 열두 번의 강의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는 과학자! 정재승! 역사의 대중화에 이덕일이 있고, 철학의 대중화에 강신주가 있다면, 과학의 대중화에는 정재승이 있다. '차이나는 클라스'를 비롯해서, 각종 대중 강연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과학을 쉽고 재미있게 알려주는 과학자! 정재승을 12발자국으로 만났다. 과학에는 문외한이라 자칫 어렵지 않을지 걱정부터 생겼다. 그러나 이는 나의 기우였다. 정재승의 글에는 정재승만의 매력이 있었다. 그는 단순히 딱딱한 과학지식만을 전달하려하지 않았다. 과학지식을 통해서 인문학적 통찰을 이끌어내는 것이 그의 글이 다른 과학자와의 차이점이었다. 미신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겨난다는 과학적 지식을 소개한다. 보통의 과학책은 여기에서 끝마칠 것이다. 그러나 정재승은 우리가 미래 일을 예측한다면 행복이 없어질 것이라는 과학지식을 알려주고, 과연 우리의 삶의 태도는 어떠해야하는지를 반문한다. 그리고 우리 인생을 성찰하게 한다. 12발 자국은 과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인생을 성찰하게 하는 책이다. 12발자국을 따라가 보자.

 

1. 젊은이여 방황하라!

터키의 작은 도시 테키르다라는 도시에서 학회가 열리는 장소를 찾아해매었지만, 정재승은 목적지를 찾지 못했다. 그런데, 정재승은 그 방황덕분에 테키르다라는 도시의 곳곳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우리 인생에 대입시키다. 방황하지 않고 삶을 살아가다보니,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신의 머릿속에 인생지도를 그리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정재승은 '장황하라!'라고 말한다. 학회 장소에 대한 정확한 장소를 확인하지 않고 출발한 실수로 빚어진 방황을 통해서 정재승은 삶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은 것이다.

 

학교현장에서 학생들과 학부모에게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꿈이 없어요.', '좋아하게 없어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이다. 자기 자신을 자신이 모른다고 하소연한다. 고등학교에 올 때까지 부모의 명령과 안내대로 삶을 살아온 학생들에게, 고등학교 1학년 시기부터 학생부 종합전형을 하는 첫걸음은 진로를 정하는 것이다.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학생들에게는 자신을 아는 일은 커다란 짐덩어리 일 것이다. 이때 나의 답변은, '진로체험을 해보세요.', '여러 책들을 읽어보세요.'라고 조언한다. 여러 체험을 하고, 책을 통해서 간접체험을 통해서 자신이 진정 무엇을 좋아하는지 스스로 찾아한다고 말하지만, 언제나 2%가 부족한 조언으로 느끼고 있었다. 여기에 정재승은 방황을 통해서 인생의 지도를 그리라고 조언한다. 그렇다. 지금의 학생들에게 부족한 것은 '방황'이 없다는 것이다. 방황하지 않고, 부모의 조언 데로 인생을 살다보니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혼란스러워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터널비젼현상(Tunnel vision)에 빠져 주위를 둘러보지 않고 내달려 왔다. 이제 나도 정재승을 따라 외치고 싶다. '젊은이여 방황하라!, 스스로 인생의 지도를 그려라!'

2.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은?

창의력을 길러라! 이 말은 우리 교육의 과제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서라도 창의력을 길러야한다. 그렇다면 창의적인 인재는 어떻게 길러야할까? 정재승은 창의적인 사람의 특징을 친전하게 알려준다. 첫째 운동을 하고, 둘째 충분한 수면, 셋째, 여행과 독서, 자신과 관심분야가 다른 사람만나기 다섯째, 3.3미터의 천장 높이, 여섯째, 상관없어 보이는 두 분야의 만남, 일곱째 다르게 보기이다. 3.3미터의 천장 높이라는 것 외에는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었던 창의력을 높이는 비법들이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우리는 생각과 운동을 하지 않으려한다.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하기에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생각과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이다. 생각과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창의적인 사람이 되기 힘들다. 현대사회는 에너지 과잉의 시대이다. 각종 성인병으로 병원신세를 지고, 헬스클럽이 번성하고, 지방흡입을 통해서 운동하지 않고 살을 빼려는 사람도 있다. 이제 생존을 위해서라도 에너지를 소비해야한다. 열심히 운동하고, 끊임없이 생각해야한다. 그래야 생존 가능성이 상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중년이여! 운동하자! 생각하자! 그것이 생존확률을 높이고, 창의적인 사람이 되는 비법이다.

 

이 책에는 창의적인 글쓰기 비법도 제시되어 있다. 전혀 상관없는 단어를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도록 하는 방법이다. 실패할 확률도 많지만, 성공한다면 창의적인 글이 완성된다. 정재승도 DNA 글을 쓸 때, 문학서적을 뒤적였다고 한다. 정재승의 글에는 인문학적 성찰의 냄새가 난다. 딱딱한 과학지식을 인문학으로 승화시키는 정재승의 비법이 여기에 있었다. 상관없는 것에 인과성을 부여하라! 위트와 웃음도 상관없는 것에 인과성을 부여하여 만들어지지 않는가! 정재승이 창의적 글쓰기의 비법을 나에게 전수해주었다. 감사해요 정재승!!

 

3. 반항하라! 도전하라!

정재승은 재미있는 실험하나를 소개한다. 마시멜로 챌린지라 이름 붙여진 이 실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MBA학생과 변호사, CEO그룹보다 유치원생들이 마시멜로 탑을 높이 쌓는다. 계획만 세우기보다는 도전하고, 실행하면서 배우는 것이 보다 좋은 성과를 얻는다는 점을 정재승은 말하고 있다. 정재승의 이 말은 이미 미국의 듀이의 '행함으로써 배운다.(Learning by doing)'로 명명한 교육방법이다. 행함으로써 배운다는 너무도 유명한 교육방법을 우리 교실에서는 외면하고 있었다. 가장 쉽게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공식이 유도된 과정을 배우기보다는 공식을 외워서 문제를 빨리 풀도록 교육받았다. 실패도 자신이다. 실패를 통해서 성공으로 가는 길을 배운다. 우리 교육 현장은 이것을 외면하고 있었다.

 

정재승은 미국 해병대의 '70퍼센트 룰'을 소개한다. 70퍼센트 정도 확신이 들면 95퍼센트 확신이 들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실행에 옮기라는 규칙이다. 죽을 때 우리가 하는 후회는 대부분 '~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라 한다. 나의 인생을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그때 하지 않은 것에 후회를 많이 한다. 그때 지금 너무 바쁘다는 이유로 하지 않은 많은 일들을 후회한다. 결국 지금 하지 않으면 그 일을 다시 할 기회는 다시는 오지 않는다. '저질러 놓고 보자!'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외쳤다. 일을 저질러 놓고 보면, 수습책이 마련된다. 못할 것 같은 일도 하다보면 해결책이 보인다. 이것이 내가 살아온 인생에서 얻은 교훈이다. 도전하지 않아서 이루지 못하는 것들을 후회하기 보다는 실패하더라도 도전하자!

 

우리 학교 현장은 어떠할까? 상위권학생들은 자신의 스펙을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각종 교내 대회에 참가한다. 그러나 하위권 학생 중에는 너무도 무기력한 학생이 많다. 야간 자율학습을 하는데, 사회과 부도를 펴놓는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지 않는다. 2시간을 잠자지 않고 사회과 부도의 같은 페이지만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너무나도 무기력한 학생! 부모가 야간 자율학습을 하라고 하니, 반항하지 않고 하지만, 전혀 자율학습을 하지 않는다. 정재승은 과잉 순응하는 학생의 경우 우울증이 있을 수 있고, 자존감도 낮다고 한다. 문제 학생으로 보일 정도로 자기주장이 과잉인 학생이 순응학생보다 났다는 생각이든 다. 학습화된 무기력에 빠져있으며, 과잉 순응의 덧에 걸린 학생들을 보며, 차라리 반항하라고 외치고 싶다!! 반항한다면, 최소한 자아가 살아있다는 반증이니까!!

 

4. 4차 산업혁명! 막아야할 것인가? 다가가야 할 것인가?

카카오 택시의 도입을 두고 정부와 택시업계가 날선 대립을 하고 있다. 택시 업계는 생존권이 달렸기에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으려한다. 택시업계와 정부의 대립을 바라보면서, 4차 산업혁명의 길을 가야하는지, 막아서야하는지를 고민한다.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사라질 직업이 택시기사이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무인자동차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공유경제는 자연스러운 시대의 대세이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직업들이 사라지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자동차를 먼저 개발한 영국이 자동차에 대한 규제를 강하게 한 결과 자동차 기술은 발전하지 않았다. 그 혜택을 누린 것은 마부도 영국 시민도 아닌, 독일과 미국의 자동차 업계였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인위적으로 막는다면, 영국과 같은 신세로 추락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렇다면 택시업계의 생존권을 무시하고 카카오 택시의 도입을 밀어붙여야하까? 정재승에게 그 해답을 물어보자.

 

정재승은 말한다. '직업이 아니라 작업이다.' 사회가 변하면 직업의 성격도 변해야한다. 무인 마트가 생기면, 만남의 장소로 마트의 성격이 변화해야한다. 약국도 마찬가지이다. 사회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돌입하고 있는데, 기존의 생활방식을 고수하면서 기술의 발전을 가로 막는다면, 일시적으로 자신의 생존권을 지킬 수는 있으나, 4차 산업혁명시대 공유경제라는 커다란 파도 속에 외국의 공유경제 기업에게 한국의 내수시장을 내주어야할 것이다. 달리는 말과 경쟁하기 보다는 그 말에 올라타라는 이어령 선생의 말을 기억해야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4차 산업혁명을 막아서는 만용이 아니라,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에 올라타는 창의성과 적응성이다. 4차 산업혁명으로 많은 직업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직업이 창출될 것이다. 기존 직업이 사라지는 대신 새로운 직업이 창출되기 위해서는 '규제'를 완화내지, 철폐해야한다. 정재승 교수에 의하면, 한국은 개인정보 규제가 엄격해서 데이터분석을 하지 못하고, 데이터 분석을 하지 못하니, 인공지능을 발전시킬 수 없다고 한다. 그에 비해서 미국은 개인식별 내용을 빼면 개인정보를 분석가능하고, 따라서 빅데이터를 분석해서 인공지능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한다. 정재승 교수는 소개하고 있지 않지만, 중국의 경우, 중국정부가 자유롭게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며, 개인정보를 이용해서 개인 신용평가를 하고, 빅데이터를 활용하는데 개인정보를 사용한다. 마치 빅브라더의 출현을 보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중국은 공산국가라는 특수성을 잘 활용해서 4차 산업혁명시대를 앞서가고 있다. 인터넷 강국이던 한국이 이제는 중국을 비롯한 후발국가들에게 그 자리를 내주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씁쓸한 우리의 현실이다.

 

정재승교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를 부식시키기 위해서 인공지능의 한계를 설명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데이터에 근거해서 작동하고, 데이터 오류를 스스로 수정하지 못하며, 데이터에 바대 의견을 제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데이터에 없는 영역을 찾아 스스로 데이터를 만드는 능력이 약하다. 뿐만 아니라, 사람과 물건, 환경과 상호작용을 하지 못한다. 아직까지 인공지능이 가지는 한계가 많다. 이러한 인공지능의 한계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정재승의 '열두 발자국'을 읽으면서 심리학책을 읽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심리학에서 하는 인간에 대한 연구를 뇌과학에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뇌과학과 심리학이 통합되는 날이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 둘 다 인간을 이해하려한다는 점에서 나의 흥미를 끄는 분야이다. 글을 마치면서 정재승 교수에게 동의하지 않는 점 한가지를 지적하려한다. 정재승 교수는 미신을 설명하면서, 미신이 사라지고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를 소망했다.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 조상들이 말하는 '미신'이라는 것들 중에는 생활의 지혜가 담겨있는 것이 있다. 한 예로 '밥 먹고 누우면 소된다.'라는 말은 밥을 먹고 바로 누우면 진짜로 소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이다. 역류성 식도염에 걸리기 딱 좋은 행동을 우리 조상은 경험으로 알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말들이다. 우리 인간을 과학이라는 방법으로 연구한다는 점에서 정재승교수가 하는 일은 엄청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언어로 해석이 되지 않는다고, 조사의 지혜 모두를 무시한다면 나는 이에 동의할 수 없다. 과학이라는 언어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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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saint 2019-01-02 22: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뇌과학과 심리학의 통합, 과학이라는 언어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지적에 깊이 공감합니다.
 
교양으로 읽는 뇌과학
이케가야 유지 지음, 이규원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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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 되고 잘한 것이 있다면, 뇌과학에 많은 투자를 했다는 점이다. ADHD알고 있는 부시는 그의 부인과 참모들이 있기에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미국의 대통령으로 재임할 수 있었다. 그도 아마 자신에게 어떠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ADHD가 보이는 충동적이고 과잉행동적인 모습이 아마도 뇌 과학을 발전시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그가 갖게 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부시행정부 시기 연구가 시작되어, 그로부터 10년후부터 뇌과학의 성과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육학과 심리학, 그리고 일반 사람들의 대화에서도 뇌과학적 지식은 첨단을 걷는 세련된 지식이 되었다.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서 뇌과학을 접하기도 했지만, 이제 책을 통해서 깊이 있는 뇌과학 지식을 얻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뇌과학자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내용이라면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확신을 갖고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1. 유발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의 흔적

  유발하라리는 그의 저서 '호모 데우스'에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고귀할 수 있는 '의식'과 '자유의지'에 대해서 부정될 수도 있다는 내용의 서술을 했다. 현대과학의 발전된 최신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라는 도발적인 물음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선명하게 기억되는 유발 하라리의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회의적인 글은, 과학의 발전이 때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수 있다는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이 책에도 '호모 데우스'에서 제기했던 질문을 우리에게 다시 던진다. 전기 자극을 통해서 쥐를 무선으로 마음데로 움직인다. 책찍과 당근으로 쥐를 유인한 것이이다. 단지 전기자극으로 쥐를 움직인다면, 쥐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쥐의 자유의지마져도 전기자극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그 결과는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쾌락을 주는 전기자극을 이겨낼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만약 있다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럼, 우리의 뇌는 자유의지에 따라서 생각하고 몸을 움직일까? 실험결과는 충격적이다. 운동전령이 움직이고 난 이후, 1초후에 '움직이자'라는 의식이 나타난다. 자유의지는 잠재의식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세계에 지배받는다고 말했듯이, 어쩌면 무의식이 '운동전령'을 움직이고, 그에 따라서 의식의 세계의 자아가 스스로의 행동을 주체적이라 하면서 행동하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서 한발자국 더 나가보자. 상대방의 의지를 데이터화 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만약 특정 사람이, 인간의 의지를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변할까? 상대방의 기분을 데이타를 통해서 알 수 있다면, 그 시대는 행복한 시기일까? 만약 인공지능이나 사업주가 데이터화된 사람들의 마음을 눈으로 본다면, 이 세상은 유토피아가 될까? 디스토피아가 될까?

  유발하라리와 이책의 저자, 이케가야 유지가 말하고 있듯이, 인간의 진화는 이제 멈추었다. 그대신 인류는 '환경'을 진화시킨다. 의족에서 인터넷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발명품들은 환경을 진화시키는 전형적인 예이다. 유발 하라리가 말했듯이, 환경을 진화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은 신이되겠지. 그럼, 극대화된 환경의 진화, 그리고 호모 데우스가 된 인류, 그들에게 행복이 찾아올까? 유발 하라리의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질문이 다시 샘솟는다.  

 

2. 뇌과학에서 만나는 동양고전

  심오한 각각의 학문의 결국은 한곳에서 만난다는 말이있다. 어느 학문이나 심오하게 깊이 사유하고 연구하면 그 진리는 한곳에서 만난다는 이말을 뇌과학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가. 당신은 같은 물에 두번 발을 담글 수 있을까?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 BC 544?--484?) "당신은 같은 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자연은 시시각각 생셩 변화한다. 물은 흐르고, 물도 변화하니, 방금 전에 내가 담갔던 물이 바로 그 물일 수는 없다는 말이다. 이말을 뇌과학 책을 읽으면서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은 몰랐다. 무슨 말일까?

  인간의 기억은 완벽해선 안된다. 인간의 기억이 완벽하지 않다가 아니라, 완벽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하등동물일 수록 오히려 기억이 완벽한데 반해서 인간은 기억이 완벽해서는 안된다니 무슨 말일까? 인간은 기억이 모호하기 때문에 다양한 기억들 중에서 공통요소를 추출해서 기억한다. 그러하기에 더 많은 사실을 보다 효율적으로 기억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애매한 기억 때문에 글자를 읽고, 어제만난 사람을 오늘 알아 볼 수 있다. 우리가 쓰는 글자도 글자 폰트 및 서체에 따라, 각자의 개성에 따라 수 많은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글자를 읽는다. 그것은 우리 기억이 애매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어제 만난 사람은 오늘 머리모양이 변화했고, 옷을 갈아입었고, 어제보다 늙었지만, 우리는 어제 만난 사람을 애매하게 기억하고 어제의 그와 오늘의 그의 공통요소를 파악해서 오늘의 그를 어제의 그로 알아 볼 수 있는 것이다. 만물은 변화한다. 변화하는 만물을 모두 완벽하게 기억하는 것은 오히려 비효율적이다. 인간의 애매한 기억은 이러한 만물의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효율성을 주었다. 도덕경 11장에 "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에 모여 있는데, 그 바퀴통 속의 비어 있음으로 인해 쓸모 있는 것이요, 그릇도 비어있음으로 쓸모가 있는 것이다. 집을 질 때에도 빈 공간이 있어 방안의 쓰임새가 생기는 것이니 쓸모 있음은 비어 있음에서 오는 것이다.(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 埏埴以爲器, 當其無, 有器之用. 鑿戶牖以爲室,  當其無,  有室之用.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라했다. 우리의 뇌와 눈은 그 비어있음으로 세상을 보다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나. 일체 유심조, 만물은 뇌에서 만든 것!

 일체유심조라는  ‘만일 사람들이 삼세일체불을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이 모두가 마음의 짓는 바에 달려있음을 보라’는 화엄경에서 나온 말이다. 깃발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요. 깃발이 바람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나의 마음이 깃발을 흔들리게 하는 것이다. 불교의 이 화두가 뇌과학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우리 인간의 신체는 완벽하지 않다. 우리눈은 100만 화소정도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우리는 선명하게 세상을 바라본다. 왜? 그럴 수 있을까? 그것은 뇌에서 100만 화소의 세상을 선명한 세상으로 보정처리했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는 맹점이 있다. 어느 거리가 되면 보지 못하는 지점!! 그런데 우리 눈의 이 결점을 우리의 뇌는 수정보완하여 선명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한다. 사실은 우리의 뇌에서 수정보완된 세상이다.

  인간은 빨강과 파랑, 초록밖에 볼 수 없다. 시신경이 이것 밖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외선을 본다면 세상은 엄청달라져 보일 것이다. 우리가 보는 세계가 엄청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잠자리가 보는 세상과, 박쥐가 보는 세상은 우리가 보는 세상과 무척 달라져보인다. 우리가 보는 세상은 뇌에 의해서 재창조된 세상이다. 빛의 3원색인 빨강 파랑 초록으로 세상의 색을 창조하고, 자외선을 보지 않았기에, 건물뒤의 세상을 보지 않도록 했다. 절대적인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뇌가 창조한 세상이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그 세계는 각각의 존재들마다 다를 수 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그 마음은 뇌에서 만든 것이다.

 

다. 정신과 육체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종교적으로 심취한 친구가 있다. 육체는 존재했다 사라지지만, 영혼은 불멸한다. 유한한 육체보다 영원한 영혼의 안정을 추구해야한다. 라는 주장을 하며, 종교에 심취한 친구다. 그런데, 과연 정신과 육체 중에서 정신(영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고, 육체는 학대해도 되는 것일까?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Juvenal)는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Orandum est ut sit means sana in corpore sano)"라는 말을 했다. 어찌 정신과 육체가 분리될 수 있겠는가? 뇌과학 이야기를 하는데 왜? 갑자기 유베날리스의 말을 할까?

  마음은 뇌가 만든 것이다. 몸이 없으면 뇌도 없다. 즉, 몸과 마음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뇌과학에서 말하고 있다. 건전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 건전한 뇌와 건전한 마음의 조화는 필 수 이다. 정신과 육체, 마음과 뇌의 관계는 어느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아니다. '뇌 지도'는 뇌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정하는 것이다. 손가락이 4개인 사람에게는 5번째 손가락에 대응하는 장소가 뇌에는 없다 그런데, 붙어버린 4번째 손가락을 4번째 손가락과 5번째 손가락으로 분리하는 수술을 하면, 5번째 손가락에 대응하는 장소가 뇌에서 생성된다. 몸이 변하면 뇌가 변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은 너무 과잉되게 진화하였고, 이 과잉 진화된 뇌는 환경이 변화할 때 대응할 수 있는 여유분이기도 하다. 우리의 뇌는 손발이 열개여도 충분히 콘트롤 가능할 정도로 과잉 진화되었다. 수두증에 걸린 사람이 보통사람의 1/10 정도의 뇌로 보통의 일상을 무리없이 살아간예는 우리 뇌가 얼마나 몸이나 환경에 따라 '자기 조직적'인지를 알려준다. 그리고 우리의 몸이 변화하거나 환경이 변화하면 우리의 몸은 자신의 조직과 능력을 변화하면서 세상에 대응할 것이다. 이것이 정신과 육체, 몸과 뇌의 역동적인 상호의존성을 확인케힌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고, 건전한 정신에 건전한 육체가 담겨야 한다.

 

라. 불립문자! 인간은 언어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선불교에서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다.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문자가 지니고 있는 형식과 틀에 집착하거나 빠지지 않는다는 표현이다. 선불교는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족쇄, 언어의 한계를 일찍이 깨닫고 이를 뛰어 넘는 수행방법을 모색해 온 것이다.

  이책에서도 인간은 언어의 노예라고 말한다. 인간이 연상하는 단어는, 자유롭게 연상하는 것처럼 보여도, 언어에 속박되어 있다. 이시대의 지성 촘스키는 "언어를 알면 그 나라나 사회의 구조와 체계를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언어의 노예이며, 이를 벗어나기 힘듬을 언어학자와 뇌과학자가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언어의 노예를 탈피하기 위해서 선불교에서는 '불립문자'를 수행의 방법으로 내세운 것이다.

 

마.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다.

  서양의 철학은 쪼개고 쪼깨면서 분석한다(환원주의). 그러면 진리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에 4원소설 등의 다양한 학설들이 이러한 관점에서 전개되었으며, 근대 서양과학의 발전에 '환원주의'가 일조했음은 널리 알려져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전체는 부분의 합이 아니라고 말한다. 즉 복잡계를 예로든다. 인간은 개인일 때와 집단일때 행동이 전혀다르다. 물고기 한마리 한마리를 연구하여 몇백마리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다. 물고기 무리의 경향성을 파악해야만 그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 전체를 파악하지 않고 쪼개기만하려는 서양철학에 대해서 뇌과학은 전체를 보라고 말하고 있다.

 

 

  뇌와 컴퓨터의 차이를 아는가? 소프트웨어가 변한다고 하드웨어가 변하지 않는다. 컴퓨터의 하드웨어는 절대 변하지 않는데, 그러나, 우리의 뇌는 외부세계에 열려있다. 몸이나 정보가 달라지면 뇌의 구조와 기능은 달라진다. 외부에 열려있는 것! 그 유연성이 인간뇌의 생명력을 결정한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달리말하면, 외부세계에 대한 유연성을 잃게 되면 그 뇌는 죽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제가 공부하며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뇌를 유연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과학지식의 나열만을 하는 수준의 책이아니다. 철학과 과학을 넘나들도록 우리를 안내해주며, 끊임 없이 새로워지라고 책찍질 하고 있다(일일신 우일신 (日日新 又日新) ). 새로워지고 생명력을 잃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책을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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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30 05: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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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2018-01-30 06:00   좋아요 1 | URL
어렵지만 그래도 끌리는 분야가 뇌과학 이에요
감이불취 라는 말이있어요 느끼지만 취하지않는다 책을 읽지만 책의 모든 내용을 머리속에 넣으려 하지 말자구요 저도 읽고나면 많이 잊어버려요^^

2018-01-30 06: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