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스 볼커 이야기 - 유전체 의학의 불씨를 당기다
마크 존슨.케이틀린 갤러 지음, 금창원 외 옮김, 서정선 감수 / Mid(엠아이디)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ver.1.3)

 

<니콜라스 볼커 이야기>

(원제: One in a Billion: The Story of Nic Volker and the Dawn of Genomic Medicine)

마크 존슨(Mark Johnson), 케이틀린 갤러거(Kathleen Gallagher) | 금창원 옮김|  MID

 

<One in a billion>이라는 원제를 가진 책은 아이가 30 개의 염기 서열 하나에 발생한 문제로 겪게되는 드라마를 들려준다. 책의 원제는 일간지 ‘뉴욕 타임즈’의 인기 다큐멘터리 코너 였으며, 2010 에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One in 8 million’에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 뉴욕 인구 8백만 평범한 사람을 선정하여 이들의 삶의 단면을 사진, 인터뷰 음성, 음악을 곁들인 멀티미디어 다큐멘터리 기획으로 내가 아주 좋아하 코너였다. 8백만 명의 뉴욕 인구 중에서 사람과 만나게되는 희귀한 인연의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One in a billion> 마찬가지로 30 개의 염기 하나의 돌연변이로 질병을 앓게 어린 소년의 희귀한 사례와 극적인 치료과정을 담고있어 책의 제목으로 아주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서두의 감수사를 읽기 시작하며 가장 먼저 떠올린 궁금증은 수많은 유전자 관련 실험처럼 어떤 개체가 태어나기 전에 ‘유전자 조작’을 통해 어떤 질병을 치료할 실마리를 얻는 경우가 아니라, 이미 어린 아이에게 발병된 사례를 과연 유전자 분석을 통해 사후 치료가 가능한 일일까 하는 점이었다. 또한 유전체 의학은 우리에게 선인가 악인가하는 일말의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빠르게 읽어나가게 되었다. 책은 주인공인 니콜라스 볼커(이하 )라는 이름의 어린 소년이 겪게되는 치료 과정을 대략 시간 순서대로 따라간다. 2 닉의 아랫 배에 이상한 징후가 발견된 이후 년간 병원이 집이 되었던 볼커와 엄마 애밀린의 힘겨운 나날을 상상해보는 것만 해도 답답하고 조바심이 났다. 

 

 

 

닉의 발병과 치료과정

 

책은 우선 명의 기자가 평이하게 글을 기술해나가긴 했지만, 닉의 치료과정에는 현대의 첨단 유전체 연구와 생리학적 연구를 배경으로 한다. 따라서 닉의 치료과정과 관련한 정보를 먼저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닉의 증상: 닉은 정상적인 음식을 먹으면 내에 누공이라는 구멍이 끊임없이 생겨나 복통을 호소하고, 분비물이 체내 감염을 유발한다.

 

원인: 결론적으로 말하면 닉의 성염색체 유전자 특정 부위에 있는 염기 하나(구아닌, G) 다른 염기(아데노신, A) 치환되어 있었다는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32 개의 유전자 하나에 일어난 변이로 초래된 희귀 면역 질환이었다. 책의 원제목 <One in a billion> 그러한 연유에서 탄생한 제목일 것이다. 아울러 책의 원제목에 나오는 모든 a 빨강으로 표기되어있는 것은 바로 이런 사실을 반영한 디자인일 것이다. 변이로 인해 유전자가 정상적인 단백질을 생성하지 못했고, 면역 관련 기능에 문제가 발생하였다. 다시말해 세포가 죽어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제대로 못하게 되고, 면역 체계가 내부의 장기를 공격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어 내부에 끊임없이 구멍이 생겨났다. 설상가상으로 닉의 유전자 해독 검사를 통해 닉에게는 다른 희귀한 면역 질환이 잠재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로부터 닉은 골수이식을 받을 있는 근거를 얻게 된다. 닉이 보유한 성염색체의 변이 유전자를 포함한 염색체(X) 엄마인 애밀린으로부터 것으로 밝혀졌다. 엄마인 애밀린의 경우, 성염색체는 XX 같은 형태로 존재하여, 변이를 갖지 않은 염색체 X 변이가 있는 염색체(X) 보완해줌으로써 질병이 발현되지 않았다. 반면 남자 아이인 닉의 경우, XY형태의 성염색체를 가지므로, 문제가 되는 변이 염색체(X) 이를 보완해줄 있는 성염색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엄마에게는 발병이 되지 않았어도, 아들 닉에 와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닉의 희귀한 질병은 여자보다 남자에게 주로 문제가 있는 질환이다.  

 

 

치료과정: 우선 닉의 질병을 유발하는 면역체계를 닉의 신체에서 완전히 제거한 골수이식을 진행해야 했다. 항생제와 스테로이드 처방 그리고 타크로리무스라는 면역체계 억제제를 주입하고, 거의 매일 혈액과 혈소판을 투여하여 닉의 신체 내에서 기존의 문제를 일으키던 면역 체계를 완전히 제거한다. 그리고나면 골수를 이식하여 기증자의 새로운 면역 체계가 닉의 내부에 뿌리내리도록 하였다. 

 

기본적으로 닉의 질병은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희귀 질병이었기에,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도 못하고 닉의 통증완화에만 손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의료진과 과학자가 닉에게 해줄 있는 모든 치료책을 시도해본 상황에서 골수이식은 유일하게 남은 방법이었다. 치료가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학제간 연구의 중요성 그리고 팀웍과학 그리고 진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볼커의 치료과정에서 주목하게 점은 닉이 안고 있는 질병의 원인 규명 작업을 가능하게 주변의 환경 내지는 기반이다. 의과대학에서 하나의 연구에 지원할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가는 모습이나, 담당 과학자가 자신의 전공분야가 아닌 의료진 전문가들과 만나 수많은 대화를 나누고, ‘크게 생각하는 법’을 터득해가는 모습은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다. 유전체 연구는 분자생물학적 관점에서 물질을 최소 단위로 분해해 연구하려는 태도를 취하지만, 생리학자인 과학자들은 이러한 관점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의 신체 기능과 어떤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생명체가 유지되는지를 통합하려 하였다. 다시 말해 닉의 치료를 맏았던 과학자들은 DNA염기 서열과 생체기능 사이의 연결고리를 잇는 작업(39) 중요성을 무엇보다 인식하고 있었던 같다. 무엇보다 이들은 ‘스스로 그림에 집중하며, 인체를 연구하는 미시적 관점과 전체를 관장하는 시스템적 관점(복잡게 연구) 연결’해 통합을 추구하였다. 나아가 분자생물학, 생명공학, 컴퓨터공학, 유전체학 등의 연구자들이 닉의 치료에 함께 참여하게 점은 성공적인 팀웍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물론 이런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전문가들이 모여 성공적인 효과를 사례는 현실 세계에서 그리 자주 있는 경우는 아니다. 의료진 과학자들이 자신의 연구에 자부심을 가지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일은 보다 쉬운 일일 있으나, 어느 집단의 공통적인 비전과 이해에 구성원들이 얼마나 공감을 하고 결과적으로 팀웍을 이루어내느냐가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요인이 있음을 보았다. 구성원들이 각자 다른 비전을 가지 있을 , 집단의 존립 자체에 위기를 맞게되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유전체 과학자인 제이콥이 워디를 비롯한 다른 과학자 의료진을 소집하여 닉의 유전체를 해독하고, 치료를 감행하겠다는 결심을 하며 사람들에게 선언했던 다음의 말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우리가 이것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우리는 여기에 있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여기에 있는 모든 이유입니다.(177) 선언은 제이콥을 비롯하여 닉의 치료에 관여하는 집단의 공통적인 비전과 희망에 집중하도록 해주는 동기이자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홍보를 위한 선행이 아니라 이들과 비슷한 비전과 열정을 가진 국내 과학자들이 모여 프로젝트를 수행할 있는 여건과 역량을 가지고 있을까? 그리고 제이콥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무엇보다도 닉의 치료에 일종의 장애가 있는 여러 가지 윤리적인 고민과 법적 절차에 대한 해결책도 모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도 이러한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했을 , 타산지석으로 참고하고 배울만한 점이 분명 있을것이다.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안다는 것의 의미개인의 권리 문제

 

현재 한국인의 개인 정보가 마치 전세계에 공유되듯 유출된 상황임을 누구나 것이다. 앞으로 개인의 염기 서열이 좀더 쉽게 해독되고 1 GB 안되는 텍스트 파일로 저장된다면, 유일무이(일란썽 쌍둥이를 제외하고)하고 근본적인 인간의 정보가 유출된다는 것은 어떤 결과를 낳게될까? 게놈은 개인을 나타내는 상상할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영역(182)이라고 유전자 정보의 중요성을 저자들은 전한다. 만약 개인의 유전 정보가 유출된다면 어떤 문제가 가능할까. 정보가 보험회사에 유출된다면, 그리고 우리가 치명적인 유전자 변이를 지니고 있을 , 우리는 의료 보험에 가입하거나 혜택을 받는데 차별을 받게 되지는 않을까.  그리고 중병에 걸렸을 경우, 적절한 보상을 받을 있을 것인가. 유전자 정보는 사회를 통제할 있는 하나의 권력이자 자본으로 군림하게 될지도 모른다. 요즘 실업률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고용주가 지원자들의 유전정보를 갖게 된다면, 그야말로 청년들은 수퍼 을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결국 취직에도 차별을 받지  않을까. 한편 이제는 상당히 자본주의화 되어버린 우리의 결혼 문화에도 유전자 정보는 변수를 가져올지도 모른다. 과연 어떤 기능을 하게 될까. 아직 변이를 가진 유전자가 발현되어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해도, 변이 유전자를 보유한다는 정보만으로도 파혼을 당하고 새로운 이혼 소송이 시작되지는 않을까. 그리고 유전자는 하나의 자본으로 자리매김하여,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남자들의 ‘정자’가 암시장에서 활개를 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유전자 해독 정보의 보편화가 새로운 우생학의 서막을 알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야말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결함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소외되고 통제되는 상황은 영화만의 상상력은 분명 아닐 것이다. 

 

한편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안다는 것은 우리 조상이 고민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를 가져올 수도 있다. 누군가 자신의 유전자 해독 결과를 알게되는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있다. 결함 유전자를 누가 자녀에게 전달했는가에 대한 책임 소재 문제나 이에 수반되는 비난 가능성, 그리고 당사자가 갖게 죄책감의 문제가 그러하다(183). 개인이 자신의 게놈 정보를 알게 됨으로써 우리에게 가지 불행한 일이 추가된다면 이는 우리가 감수해야만 하는 과정일까? 또한 환자 자신의 입장에서 환자의 알권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도 여전히 남아있다. 가족 중에 누군가 힘든 질병, 그리고 오랜 기간 병원에서 고통을 받은 사람이 있었다면 환자 보호자의 심리적 상황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것이다. 그런데도 환자는 모든 진실을 알아야 할까? 아니면 어느 선까지 환자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알려줘야 옳을까? 이런 끝도 없는 문제점들이 우리의 미래에 놓여있다. 걱정이 많은 나로서는 이런 우울한 상황에 보다 민감한 모양이다.

 

닉의 질병 치료를 담당했던 과학자들과 의료진들이 직면해야했던 현실적인 문제점 하나가 윤리적인 사항과 관련한 절차의 문제였다. 닉의 염색체 해독을 통해 병의 원인 규명과 치료까지 영역을 확대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과정이 ‘의료 행위’인지 아니면 ‘순수한 연구’를 위한 과정인지에 대한 논란과 이에 관련한 엄격한 규제를 눈여겨보게 된다. 과정이 순수한 연구 목적이면 무관하지만 치료라는 명목에 적용되려면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 표준 게놈을 확보하여 비교하기 위해 보다 많은 사람들의 게놈 정보를 얻어야 했던 상황은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문제이다. 볼커 가족이 겪는 고통에 공감하며 2200명의 유전 정보와 비교할 있도록 허락을 해준 담당 과학자들 또한 많은 고민을 했으리라. 물론 여기에는 앞으로 개인의 유전 정보를 누가, 어떻게 관리해야하는가 하는 보다 중요한 문제가 남아있다. 조만간 우리에게도 직면하게 상황인 것이다.

 

 

 

진화론과 유전체학의 접목

 

책을 읽어나가며 흥미를 가졌던 부분은 학창 시절에 배웠던 고전적인 진화론의 지식과 유전자 발견 이후 진화론이 어떻게 새롭게 해석되고 있는가였다. 100 콩의 형질 유전에 관한 멘델의 연구방법을 적용한 첨단 유전체 연구 결과도 흥미로웠다. 특히 닉의 염기 서열을 해독한 , 사람이 아닌 닭이나 초파리의 염기 서열과 비교한 부분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지구 상의 다양한 생명체는 모습을 달리해도 상당한 부분의 유전자를 서로 공유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특히 초파리는 사람의 유전자와 60% 공유한다는 사실이나, 침팬지는 사람의 유전자와 99% 가까이 공유한다는 점은 통상 일어나지 않는 닉의 ‘희귀한 유전 변이’를 확인해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어떤 염기 변이가 자연계에 존재할 있는지의 여부를 알려주는데 사용되었다. 닉의 경우, 이러한 염기 변이가 다른 어떤 종에서도 발견되지 않음을 확인해주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발견했던 기존의 지식을 앞으로 어떻게 접목하고 활용할 있을지에 대한 실마리를 주고, 연구자들의 직관과 안목 그리고 건설적인 토론이 중요함을 일깨워 준다.

 

만약 모든 종에 걸쳐 닉의 염기 변이의 위치에서 시스테인만이 발견된다면 이는 기나긴 진화의 시간동안 시스테인이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225) 유전자 분석 전문가인 워디의 말이다. 말은 인간의 유전자와 60% 공유하는 초파리의 유전자와 비교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줄 있는지 시사한다. 분자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유전체 연구의 발전도 진화론의 시각에서 그리고 생리학적 시각에서, 다시말하면 보다 틀에서 검토될 필요가 있음을 가르쳐 준다. 유전자 연구는 닉의 치료과정에서처럼 중요성은 날로 커져가는 반면 환원주의적인 시각에 매몰될 우려도 있다. 이런 우려에 대한 보완점으로서 생리학과 진화론적 관점은 새로운 시각에서 균형잡힌 시야를 갖도록 도와줄 것이다.

 

 

 

저널리즘적인 글쓰기

 

책은 <밀워키저널센티넬> 기자 마크 존슨과 케이틀린 갤러거가 5년이 넘는 기간동안 볼커 가족과 의료진 주변 친인척 등을 취재하고 써나간 역작이다. 어려운 생리학 유전학적인 지식을 배경으로 하는 닉의 치료 과정을 일반인이 쉽게 따라갈 있도록 쉬운 말로 풀어쓴 노력이 엿보인다. 어려운 용어의 사용을 최소화하고 반복적으로 표현을 달리하여 설명함으로써 어려운 개념에 대해 책을 읽어나가면서 점점 익숙해지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명의 기자가 글을 나누어 써서 그럴까, 여러 같은 설명이 나오는 대목을 만나게 되면 다소 지루한 인상을 준다. 점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글은 서사적인 흡입력이 강하고, 나의 호기심을 끊임없이 붙들어 매었다. 그만큼 저자들은 논픽션 글쓰기에서 일반적인 보도 기사와 사뭇 다른 스토리텔링 기법 숙련된 베테랑들일 것이다. 주인공인 닉과 볼커 가족이 겪는 극심한 고통과 가족 해체의 위기, 의료진 과학자들이 맞닥드리게 되는 문제점 경력의 위기와 같은 순간을 통해 긴장을 늦추지 않고 유지하고 있다. 다만 군데 군데 보이는 반복적인 설명은 흐름을 오히려 방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저자의 글쓰기를 통해 가지 배운 것은,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가치 판단을 배체하려고 노력한 점이었다. 책은 단순한 보도 기사와는 다른, 하나의 구체적인 스토리를 끌고나가는 글이었으므로, 객관적인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데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저자는 닉의 치료과정을 따라가며 닉의 상황에 주목하고, 닉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하였고, 때로는 엄마인 애밀린의 입장에 주목하여 다양한 관점에서 두루 살피고 있다. 이와 함께 과학자 의료진의 관점과 상황을 함께 기술하며, 닉을 치료하려는 과학자 의료진의 입장 뿐만 아니라 이들과 입장을 취한 회의적인 과학자 의료진의 입장도 가치판단 없이 균형있게 배치하고 있다는 점이 돋보였다.

 

아울러 저자의 균형잡힌 ‘보도’를 지향하는 점은 유전자 염기 해독이 가져오는 장점과 문제점을 (깊이는 제한적이지만) 골고루 언급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유전자 염기 서열의 해독으로 맞춤형 치료의 가능성을 확보하였다. 현재 미국 인구의 10% 해당하는 2500 - 3000 명이 희귀질환을 앓고 있다고 추산되는데, 닉의 사례는 이들에게 앞으로 희망이 있을 것이다. 과거 유전자 해독 초기에는 32 개의 염기들 1.2% 해당하는 엑솜(단백질 생성에 중요한 정보를 보유하는) 분석하는 데에 개월이 걸리던 염기 분석 시간이 이제는 24시간으로 줄어들어 환자들은 이러한 혜택을 보다 빨리 받게될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그리고 환자의 부모로서애밀린의 일기쓰기

 

닉의 치료에 결정적인 역할을 사람들은 물론 의료진과 과학자들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능하게 사람은 닉의 엄마인 애밀린이다. 그리고 애밀린의 사랑과 헌신적인 노력이 닉의 치료 과정 내내 함께 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녀는 의료진의 선택과, 보험문제, 자금모금, 아이와 관련 있을 법한 질병에 대한 정보 등을 수집하기도 하였으며, 아이의 치료에 손을 쓰지 못하는 의사들을 상대하고, 장례식장을 알아보라는 친척들의 권유를 무시하고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나아가 애밀린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시선으로 인해 아이의 치료에 영향을 주지 않기를 바라며 타인의 비난과 눈길을 무릅쓰고 성형수술까지 감행하는 용감한 여인이었다. 

 

무엇보다  나의 주목을 끌었던 것은, 부모로서 손을 쓰지도 못하고, 고통받는 아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고통을 감내하며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온라인에 일기를 쓰던 모습이었다. 고통스러워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며 힘들어하던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애밀린은 자신의 일기장에 ‘신은 언제나 옳다’라고 적었던 어머니였다. 힘들고 지쳐있었지만, 그녀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 무엇보다 놀라웠다. ‘대체로 비관적’인 나로서는 애밀린이 가질 있는 한계란 과연 어디까지 였을지 놀랍기만 했다. 결국 어머니는 강했다. 하지만 애밀린을 ‘버티도록’ 해준 것은 그녀의 일기쓰기도 몫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통과 번민, 공포, 슬픔을 모두 일기장에 담아내는 행위는 어머니를 더욱 강하게 지탱해준 근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글쓰기의 힘을 다시금 주목해본다.

 

 

 

결론

 

처음 서두의 감수사를 읽을 품었던 궁금증인 ‘닉의 치료 결과는 어떻게 되었고,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하는 의문은 해소되었다. 닉이 골수이식을 통해 치료를 받고 나서 여러 작은 문제점들을 겪기는 했으나, 2015 10 26 기준[초판(271)에는 2016 10 26일로 나와있다. 아직 3 앞의 미래이다!]으로 10세가 되었다고 한다. 저널리스트인 저자의 흡인력있는 글쓰기를 통해 어려운 유전체 의학의 위치와 가능성을 쉽게 접할 있었다. 무엇보다도 많은 의료진과 과학자들이 모여 하나의 공통 목표를 향해 함께 나아간 사례는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다. 한편 희귀질병을 접하게되는 의사들은 언제나 좌절과 함께 겸손함을 배운다는 말을 기억한다. 무엇보다 건조해보이는 과학계의 일화에서 사람에 대한 신뢰와 따뜻한 인간애마저 피부로 느낄 있었다. 아울러 유전자 염기 해독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도 언젠가는 직면하게 여러 문제들(윤리적인 문제, 절차상의 문제) 또한 다시금 살펴보게 시간이었다.    

 

 

(참고)

번역에 관한 잡생각

 

1. 우선 역자가 4명이나 되는데, 감수사는 있어도 역자의 말이 없다. 심지어 대표 역자의 말도 없는 점이 독자로선 아쉽다. 물론 서구에서는 역자의 말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번역 문화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말로 번역되는 책에 역자의 말이 없는 책에는 왠지 모르게 호감이 가지 않는다. 한편 군데 군데 조금씩 다르게 느껴지는 문체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분명 느낄 있어 다소 아쉬웠다. 정도 분량과 읽히는 텍스트라면 명이 일관되게 했으면 어땠을까.

 

2. 닉의 어머니인 애밀린의 가족과 종교 배경이 나오는 대목이 있다. 필리핀계 아버지와 프랑스계 미국인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애밀린은 필리핀과 프랑스 모두 카톨릭 국가라는 공통점으로 미루어, 애밀린도 카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아들의 이름인 니콜라스가 아이들의 수호 성인의 이름이라 더욱 맘에 들어 했다는 대목만 보아도 닉의 가족은 카톨릭을 믿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따라서 66면에 교회의 ‘목사’라고 번역하기 보다는 ‘사제’로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애밀린이 기도하는 대목이나 성경구절을 인용한 대목에서도 단순히 God 신이라고 일괄적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하느님’이라고 번역해도 좋았을 같다.

 

3. 용어선택에 대한 제안 (168) ‘정부와 사립’이라고 대목보다는 ‘정부와 민간’이라고 하는 것이 좀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4. 사람의 이름을 읽는 Michael Stephens(123) 역자는 ‘마이클 스테픈스’라고 표현했다. 만약 그렇게 읽는다고 하면, 작가 Stephen King 스테픈 킹으로 번역해야할텐데, 보다 많은 책과 역자들이 ‘스티븐 킹’으로 번역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관례’에 따라 ‘마이클 스티븐스’라고 하는 것이 좀더 자연스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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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 무엇이 과학인가
팀 르윈스 지음, 김경숙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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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원제: The Meaning of Science)

르윈스(Timothy Lewens) | 김경숙 옮김  |  MID

 

 

 

     당신은 과학적인가?

   

     우리가 의심없이 사용하는 과학적이라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우선 물음에 답하기 위해 과연 과학은 무엇인가를 먼저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 케임브리지 대학 과학철학 교수인 르윈스는 권의 책에서 과학이란 학문의 정체성(1) 과학의 가치(2) 다양한 논쟁점들을 소개하며 폭넓게 고찰한다. 르윈스는 대중에게 과학철학분야의 논점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중에서도 무엇을 과학이라 부를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과 이에 관련한 논점들을 엮어 놓은 것이다. 실로 다양한 과학분야를 떠올려볼 있는데, 중에서도 물리학과 생물학 특히다윈의 <종의 기원>둘러싼 오랜 논점과 유전학의 발전 이후 새로 해석되고 보강된 생물학 분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과학의 요건 포퍼의 관점

     우리가 무언가를 과학이라 정의할 있을까를 물었을 , 르윈스는 포퍼의 과학론부터 소개를 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포퍼는 귀납법 자체를 비합리적이라 믿을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포퍼는 과학이 연역적 추리를 통해서만이 진보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39)’ 하였다. 반면 르윈스는 과학체계로서 귀납적 접근방식에 대해 포퍼의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르윈스는 포퍼가 귀납법을 포기하고 연역법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어떤 이론가도 현실에서 손을 떼는 것과 같다.’라고 비판한다. 누군가 과학은 자체로 완전한가라고 묻는다면 결국 과학도 인간이 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르윈스가 말한바대로 과학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말은 개방적이고 창의적이며 예민해야한다는 말이면서 동시에 어떤 경우에는 눈을 가릴 필요도 있다’(68)라고 하는 것처럼 과학은 스스로 완전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결국 과학은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그렇다. 따라서 누군가 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라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나는 약간 달리 표현하여 그럴 필요 없다.’라고 말하겠다. 다시말해 과학이 가치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충분조건이지만 필요조건은 아니다라고 말할 있을까.

          

     과학적 방법에 있어서 귀납적 추론을 인정하지 않는 포퍼의 관점에서 과학이 과학일 있는 요건 추정과 반박’(혹은추측과 논박’)이라고 저자는 소개하고 있다. 포퍼에게 진정한 과학이란 반증될 가능성을 지닌 학문만이 과학이다’(41)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이해할 있는 자료로 저자는 파인만의 강의(유투브 비디오 자료) 언급하고 있다(42). 포퍼의 추정과 반박이라는 관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는 말은 파인만의 강의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있다. 우리가 수행하는 과학적 작업 과정에서 흔히 단계로 어림짐작(guessing) 통해 가설을 세우게 된다. 물론 어림짐작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어야하며 필요한 경우 수학적인 논리가 있어야 것이다. 파인만에 따르면 어림짐작을 통해 세워진 가설은 실험결과에 따라 판가름난다는 말이다. 짐작이 실험과 일치하지 않으면 틀린 겁니다. 과학은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라는 말에서 포퍼의 추정과 반박이라는 간결한 과학의 요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무를 반듯하게 자르듯 과학의 요건을 포퍼의 주장대로 따르기 어려운 경우도 발생한다. 르윈스가 과학의 딜레마라고 언급한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과학자들이 눈가리개를 하고 있을 가장 발전을 이룬다’(68)라고 있는 부분이 생겨난다. 예컨대 소립자의 하나인 뉴트리노가 빛의 속력을 능가한다는 그란사소 실험 결과에 대해 과학집단이 보인 반응(156) 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있다. 대부분의 과학집단은 우선 결과를 그대로 믿고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폐기했던 것이 아니라 실험기구의 조작이나 절차에 있어서의 문제 가능성, 이론적 적용에서 생겨날 있는 문제점들을 우선 의심했다. 물론 결론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실험 결과에 대한 해석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과학자들이 세운 가설이 과학자의 세계관, 가치관, 경험이나 문화의 차이로인한 영향으로부터 과연 무관한가라고 묻는다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니다라는 점이다. 따라서 포퍼가 주장한 과학의 요건(‘추정과 반박’) 자체로 중요한 요건의 하나로 받아들여질 있으나 자체로 완전하지 않다라고 결론을 내릴 있을 같다.

 

 

     학창시절 읽었던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믿음직스럽지 못한 나의 기억에 의하면, 토마스 쿤이 주장했던 과학혁명은 불연속적이고 단계적 특성을 띄고 있었다. 달리 표현하면 변증법적 구조와 유사했다고 기억한다. 당대의 과학 집단이 신뢰하는 정상과학이 존재()한다면, 소수의 집단에 의해 참신하고 혁명적인 혹은 반대되는 의견() 나오고, 만약 여러 재현 실험을 통해 설득력있는 증거가 많이 나오면 기존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뀌는 혁명() 일어난다는 순환적이고 단계적인 과학 발전의 모습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처럼 유명한 과학사의 저서에도 후대의 연구자들에 의해 수많은 논의가 있었으며 비판이 가해졌다. 르윈스가 언급하는 이론의 한계는 물리학이 전공인 토마스 쿤의 이론은 물리학 분야에 적용하면 설명할 있는 부분이 많은 반면, 패러다임 전환 이론을 다른 과학, 예컨대 생물학 내에서의 이론의 변화를 설명하는데는 적합하지 않다는 (141)이다.

 

     다시 기억에 의존하면 처음 <과학혁명의 구조> 읽었을 기억나는 개념이 “incommensurability” 라는 용어였다. 당시 번역된 책에는 개념이 동일선상에서 비교 불능으로 번역되었다고 기억하는데,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에서는 공약불가능성으로 번역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어려운 단어에 대한 번역은 동일선상에서 비교 불능이라는 해석이 이해하기 쉽게 느껴진다. 개념에 대해 르윈스는 쉬운 (120) 들어 설명하고 있다. 자신의 아이를 각각 다른 단위의 자로 키를 잰다고 하자. 아이는 키가 120센티미터였으며, 작은 아이는 키가 3피트 2인치로 측정되었다고 하면, 누구의 키가 큰지 어떻게 있는가? 결과를 모두 미터 단위 또는 피트 단위로 통일하여 비교해야 서로 비교할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같은 기준에 맞추어야 서로의 키를 견주어볼 있다. 쿤의 패러다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과연 뉴튼의 연구와 아인슈타인의 연구 어느 것이 뛰어난가라고 물었을 , 패러다임의 언어를 다른 패러다임의 언어로 통일해 있다면 서로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쿤의 입장은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같은 기준(언로) 통일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서로 비교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서로 비교할 있는 가능성이란 것이 전혀 없는가라고 묻는다면, 이는 새로운 토론의 주제가 수도 있겠다.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대한 비판을 떠올려볼 , 물리학과 생물학의 학문적 방법론에서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가 궁금했던 적이 있다. 아마도 접근 방법의 차이로인해 쿤의 이론에 대한 비판의 빌비를 제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의 의문에 대한 답은 아니더라도 가지 실마리를 찾아볼 수는 있었다. 물리학의 경우, 흔히 물리학은 실험실이라는 통제된상황에서 연구를 복잡하게 있는 요인을 최소화한다는 (78)이다. 예를 들어 뉴튼의 역학을 설명하는 , 우선 하나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좀더 통제된상황을 만든다면, 공을 하나의 부피가 없는 으로, 그리고 공기저항도 고려하지 않는 이상적인 진공의 공간에서 상수 중력이 있거나 혹은 없는 가정하에 이동하는 가장 단순화된 모델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나면 좀더 현실적인 상황들을 고려하여 실제 물체의 운동까지 설명할 있다는 것이 (전통적인) 물리학의 연구방법론이라고 있겠다. 반면 생물학의 경우는 어떤가? 생물은 기본적으로 복잡계다. 수많은 원소들이 응집되어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생명현상이라는 현상이 발현된 존재다. 따라서 비교적 간단한 세포로 이루어진 생물도 있겠지만, 간단한 생물도 물리학과 같이 단순화 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생명의 본질에 대해 논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라는 책에서도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생명 현상을 열역학적인 물리학적 패러다임에 근거하여 탐구하였다. 단순한 아미노산의 배열인 단백질의 1, 2 구조와 달리 새로운 기능 생겨나기 시작하는 단백질의 3 구조의 원인과 해석에 대해서도 우리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물리학적 방법만으로는 무언가 생명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해보인다. 하지만 생물학적 방법론에서 무엇보다 포퍼가 부정했던 귀납적 추론 방식이 많이 적용된다는 점이 물리학적 방법론과 다른 차이점이지 않을까. 나아가 호주의 철학자 프랭크 잭슨이 주장하는 바대로 과학적인 연구로도 도저히 알아낼 없는 어떤 유형의 진리가 존재’(344)하는 것은 아닐까? 회색지대의 존재가 많은 이들이 쿤의 패러다임 이론에 대해 비판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둘러싼 논점들

     르윈스는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 쿤의 관점에서 과연 혁명적인가를 묻는다. 물론 아니다 르윈스의 답이다. <종의 기원>에서 다윈이 주장하는 변이론 당대의 박물학자들에게 새로운 이론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윈의 자연선택 신선한 설명이었음을 인정한다. 반면 인문학자 양자오가 저술한 <종의 기원을 읽다> 보면 다윈이 <종의 기원> 저술할 당시 출간을 둘러싼 여러 정황들을 설명해두었는데, 일반인들이라면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을 만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종의 기원> 신화화된 입지/지위를 고려하면 반드시 그럴까라고 의구심이 들게 정도의 사안이긴 하다. 특히 다윈의 조부의 미출판 원고의 제목이 <종의 기원> 원제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는 , 그리고 조부의 원고가 이미 있었음에도 다윈이 조부에 대해 <종의 기원>에서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은 점은 과연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말에 보다 신빙성을 주는 실마리가 있다. 물론 다윈이 중요한 저술을 것은 사실이지만, 커다란 업적이 과연 혼자만의 업적이냐라고 한다면 그렇지 않다라고 말할 있겠다. 다윈이 오랜기간 작업하던 <종의 기원> 원고를 어느 순간 급하게 출간 정황도, 사실은 비슷한 내용의 책을 출간하려는 다른 학자보다 먼저 책을 내려고 노력한 정황도 양자오 교수가 소개하였는데, 돌이켜보면 다윈의 연구도 결국 다윈이 디딜 있게 어깨를 내어준 거인의 존재(다윈 이전의 과학자, 인류의 지적 발견을 축적, 경쟁하는 과학자) 역시 고려해야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도 양자오 교수는 다윈의 업적이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는 관점을 바꾸어 놓았다 평하고 있으며, 르윈스 역시 (쿤의 관점에서 혁명적 업적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윈은 기존의 연구를 인정하고,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데 썼으며 새로운 해석까지 내놓았다.’(181)라고 평하고 있다.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5년에 가까운 시간을 탐험하면서 수많은 생물들을 관찰하고 자료를 수집할 있었다. 그의 과학적 방법론을 고려할 다윈은 포퍼가 부정한 귀납적 추론 크게 의존했다. 수만 개의 생물 표본을 수집할 있었던 다윈은 당시 주도적이던 생물의 분류 방법을 다른 각도로 바라보았다는 점도 그가 <종의 기원>에서 새로운 해석을 있었던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불완전성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귀납적 추론 평생 색채 대한 연구를 하기도 했던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과학적 방법론의 근간이었다. 괴테는 치밀한 관찰과 방대한 자료 수집을 통해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을 중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에 귀납적 추론 매우 중요한 과학 연구 절차로 받아들여졌다고 이해할 있다. 물론 사물을 보다 깊이 관찰할 있는 도구와 지식이 오늘날과 달리 크게 부족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결론을 도출했을 것이다. 따라서 연역적 방식과 달리 관찰에 대한 해석에 영향을 있는 요소가 많을 있고, 특정 과학자 과학집단의 이해 내지는 패러다임을 너머서는 해석을 내리기 힘든 경우가 생긴다. 포퍼가 신뢰를 보였던 연역법은 최초의 가정이 옳지 않았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 밝혀지면 근거부터 흔들리고 심지어는 무너질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퍼의 과학체계는 말뚝 위에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공중누각이다.(55)’라고 르윈스는 비판하고 있다. 결국 과학적 방법론에는 어느 쪽도 영원불변한 도그마처럼 규정되어야할 것이 아니라 각각 불완전함을 가진 방법론이 서로 상보적 역할을 해야만 같다. 권을 책을 읽는 사람마다 다른 이해도와 해석을 보여주듯, 과학에서도 수많은 해석, 견해, 오독이 모여 서로 충돌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윈의 업적을 생각할 잠깐 옆길로 빠져보면,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아웃라이어> 관점에서 다윈은 혜택받은 자임에 틀림이 없다. 당시 여러 과학자들 중에서도 영국에서 유일하게 과학자로서 비글호에 승선할 있었던 기회, 5 간의 (무사고) 항해를 통해 관찰한 생물들과 수집해온 만가지 생물 견본에 대해 접근할 있었다는 점은 글래드웰의 관점에서 보면 누구나 누리기 힘든 혜택이라 말할 있다. 물론 오랜 시간 진지하게 연구를 하고 지식을 쌓아온 시간이  전제되어 있었고, 명망있는 집안이라는 신분의 보장이 있었기에 이런 기회를 누릴 있었음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나아가 종교집단의 견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종의 기원> 발표할 있는 시대적(역사적) 여건과 공간적 여건(비교적 자유롭고 반항적으로 과학적 결과를 발표할 있었던 영국이라는 공간) 무시할 없을 것이다. 단순히 그의 천재성에 대한 신화화만으로 그의 업적을 평가하기에는 무언가 석연치 않다. 물론 다윈의 업적을 폄훼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평생 준비했던 다윈의 업적이 앞에서 언급한 여러 조건에 힘입어 중대한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점과 개인의 건강문제(평생 고통을 받던 두통과 신경증적 소인) 극복하고 이루어진 인류사의 커다란 업적이라는 점을 부인할 없다. 결국 과학도 장대한 인류 역사의 증거물인 인간이 하는 것임을 언제나 고려해야한다.  

 

 

 

 

책의 2부에서는 과학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고민한다. 공교롭게도 과학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화두로 다윈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과학하는 자는 어떠한 소망도 어떠한 애착도 가져서는 안된다. 그는 돌과 같은 마음을 지녀야 한다.”(188) 오늘날이 과학자를 비롯하여 교양있는 일반 대중들에게 말이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겠지만, 당대의 다윈은 나름 확고한 과학에 대한 관점, 철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반면 르윈스는 과학자는 가치 개념을 지닐 더욱 현명한 조언을 있다’(192)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핵무기 개발 정황을 떠올려 있다. 2 세계대전이 한창일 , 헝가리 물리학자 레오 질라드와 함께 아인슈타인은 당시의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이 핵무기 개발을 하도록 촉구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핵무기의 파괴력을 실감한 사람은 다시 당시의 대통령인 트루먼 대통령에게 핵무기 개발 중단을 탄원하는 편지를 보낸 것은 과학자가 가치 개념을 지니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사례라고 있다.

 

     만일 과학자가 엄격하게 가치 중립적이어야한다는 다윈의 원칙을 지켜야한다면, 또한 보다 재앙 초래할 수도 있다. 만약 과학자가 히틀러의 나치 정부 아래서 히틀러의 명령을 성실히 따르기만 했다면 수많은 유대인 학살에 관여했던 아이히만처럼 2 아이히만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과학자도 결국 독립적인 개인으로서 가치중립적일 없으며, 나아가 가치판단을 하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여기에는 스탈린 치하 소련의 유전학 사례(192) 생물학자의 그릇된 가치관(혹은 폭력적으로 강요받는 상황에서 묵인하거나 답습하는 과정을 통해 형성된 가치관) 떠올린다면 과학자가 단지 가치 개념을 지니는 문제를 넘어, ‘어떠한가치관을 갖는지의 문제가 선과 악의 행위를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가 것이다. 과학 역시 이를 수행하는 사람( 과학자 정치인) 의해 양날의 칼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타적 행위에 대해

     생명체의 이기성, 이타성에 관한 문제는 나의 개인적인 관심대상이기도 하다. 과연 인간 다른 동물의 이타적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있을 것인가? 이타성을 설명할 , 르윈스는 이타성을 생물학적 이타주의(238) 심리학적 이타주의(235)로서 구분하여 소개하고 있다. 생물학적 이타성은 현대 유전학의 발전으로 인하여 유전적인 증거에 크게 의존하고 있으며, 인간을 비롯한 다른 모든 생물체에 모두 적용할 있다. 물론 르윈스는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생물학적 (유전적) 이기성/이타성에 대해 논하고 있음을 재확인하고 있는데, 도킨스의 유전자 중심 관점에 대해 비판한다(244). 유전자 자체가 어떤 동기를 가지고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특성/경향성만을 갖고 있다.’라는 점에서 인간의 행동이 사실은 유전자가 의도한 동기를 위한 것이라는 도킨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반면 심리학적 이타성은 행위의 심리적 동기에 초점을 맞추며, 심리적 상태를 지닌 생명체에만 적용이 가능하다는 제약이 있다. 다시말하면 박테리아가 심리적으로 이타적인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지만, 생물학적으로 이타적인가는 물을 있다는 것이다.

 

     이기성/이타성의 문제에서 흥미로운 논의 주제는 과연 생물체에서 이타성이 발현되는 것은 유전적 기제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문화적 기제에 기인하는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이타적 행위와 관련하여 문화적인 (후천적 영향)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관점(258) 더욱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문화적인 영향 좀더 폭넓게 적용할 있다면, 전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핵가족화/혹은 가족의 해체 현상을 떠올려본다. 수럽-채집 시대와 농경 시대, 그리고 산업 혁명 시대 이후 급격하게 변화된 인간의 삶의 양식으로 인하여 이타성이라는 행위는 유전적이라기 보다는 문화적 영향에 따라 영향을 더욱 크게 받는다는 관점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소식이다. 핵가족화 가족의 해체에 따라 우리가 겪는 이타적인 행위는 오히려  SNS등의 통로를 통해 모인 동호회 사람들의 연대 행위가 더욱 이타적인 행위로 보인다는 점은 이타적 행위에 대한 문화적 힘의 영향을 더욱 설득력있게 나에게 다가온다.

 

 

     인간의 본성은 고유한가?

 

     이타적 행위를 이야기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문화적 역할은 역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최근의 주장들 처럼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자연보다는 문화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데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269). 그러면 인간의 본성 Nature이라는 막연한 개념을 이해하는데 과학은 어떤 도움을 있을까. 르윈스에 따르면 인간의 마음, 본성 등에 대해 연구를 해온 스티븐 핑커는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는 입장이다(263). 반면 르윈스는 최근의 과학적 연구가 인간의 본성 대해 의구심을 표하는 관점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인간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에 의문을 표한다. 인간이 고유한 본성 갖고 있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수많은 철학자들이 논쟁을 해왔던 주제이기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거나 악하다는 점에 대해 논쟁한 동양의 철학자도 있으며, 이는 서양철학의 전통도 주제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런데 현대 과학에서 주도권을 얻고 있는 입장은 인간의 본성자체를 미신이라고 말한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현대 과학이 인간의 본성 부정하는 것은 인간만의 고유한 본성을 인정하고 있는 서양의 기독교 전통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라고 명하는 구약성서의 신은 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죽음의 밥상>에서 사용한 개념인 종차별주의 존재의 근원이 것이다. 피터 싱어에 따르면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 고유의 특징이 있고 따라서 인간만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생물계의 (species) 개념을 고려하여 종차별주의자라고 하였다. 인간에게 고유한 본성이 존재하고 인간은 다른 생물체보다 우월하다는 서양 기독교 관념은 이런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하는 사람에 대한 비판을 하게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고유한 본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 복제 윤리를 인간 본성에 대한 모독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아닌 생명체에 대한 통제권을 용인해주는 빌비를 제공할 있다. 말하자면 밀란 쿤데라가 그의 소설 <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언급한 인간이 염소를 죽일 권리 신이 아닌 인간이 저술한 <구약성서> 공표함으로써 인간이 스스로 다른 동물을 지배할 권리를 부여하는 아이러니를 낳게 것이다. 자연의 질서를 이야기하면서 무성생식이 유성생식보다 열등하며,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라고 주장하는 레온 카스는 그대로 종차별주의자라고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논리로 우월한 종인 인간 복제의 윤리적인 허용에 반대하는데 적용하고 있다. 생물종의 우열을 성적인 방식에 의해 구분하는 것은 다분히 자의적이고 지나치게 인간중심적인 시각이다. 르윈스는 이렇게 인간 중심적인 인간 본성 개념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이 윤리적 토론에서 사용되면 혼란을 일으킬 있으며, 집단의 본성에 따른 사고가 특정 인종, 성에 대한 적형적인 사고를 강화하기도 한다는 점이다(296).

 

 

     당신의 자유의지(free will) 허구다?

     이제 마지막 장에 이르러 다른 흥미로운 주제를 저자는 책에서 던지고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란 있는가? 현대의 신경과학 분야의 연구에 기반한 흥미로운 주장은 주관적인 자유 체험은 환상에 불과하다’(300)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모양이다. 나의 혼란스러운 마음처럼 저자인 르윈스도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아니고 어떤 의미에서는 신빙성있게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다고 말할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리벳의 실험과 같은 신경과학적 연구에 의하면 팔을 굽히기와 같은 순간적이고 자발적인 운동이 일어나기 준비 전위 알려진 뉴런 활동이 증가하는 것을 발견했다(327)’ 결과적으로 준비 전위가 실험참가자가 팔을 굽히고 싶다는 욕구를 느끼기 350밀리초 , 그리고 팔을 굽히는 행동을 하게 되는 시점보다 550밀리초 전에 이미 시작된다는 말이었다(328). 흥미로운 결과는 결국 우리의 자유의지가 우리가 하는 행동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며 나아가 자유의지는 허구다라는 주장을 지지하고 있는 것같다. 르윈스는 현대 신경과학이 자유의지란 없다라는 입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데, 우선 준비 전위 본질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뉴질랜드의 연구진이 행한 실험을 들면서 준비 전위는 행동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결심이라고 보기 힘들다라고 말한다(332). 아울러 우리는 실험 참가자들처럼 개개인의 욕구와 무관하게 통제된 환경에서 결정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인위적인 지시를 받아 행동해야만 했던 것인 반면, 일반적인 경우는 엉뚱한 결정도 그만큼 적절한 상황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울러 자기공명영상을 통해 뇌를 연구하는 경우처럼 장비의 높은 정확성 과장해서는 안된다(335) 르윈스는 말한다. 뇌의 활동부위의 지역적 차이가 개개인의 습관, 무의식적 편견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있다고 의문을 표한다. 따라서 이런 방식, 자료들은 인간의 의식적인 결정이 허구임을 증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이렇게 르윈스는 신경과학분야가 주장하는 바처럼 인간의 자유는 환상이다라는 것을 입증하는데 실패했으며 여전히 의식적인 욕구가 행동의 원인이 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인간에 대해 설명을 하려는 과학의 시도를 살펴보면 역사적으로 철학자들이 했던 궁극적인 물음, ‘인간이란 무엇인가?’ 대한 궁금증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과학도 예외가 아니어서 과학적 연구 방법이나 도구가 진보함에 따라 과학자들도 결국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지에 대한 탐구를 이어나가게 되는 모양이다. 다만 신경과학 분야의 연구결과를 보면 인간은 기계와 다를바가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인간을 기계와 같은 존재로 보는 관점은 이미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가 생각했던 모양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기계, Machina Animata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인간관은 어떤면에서 보면 오늘 날까지도 프랑스 철학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보다 다양한 인간관이 존재하겠으나, 인간이 하나의 기계라는 관점은 서양철학이 바라보는 인간관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도 있겠다. 다시 말하면 시대와 공간에서 자유로울 없는 인간이 완벽하게 가치중립적일 없다고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주장도 이러한 문화적, 역사적, 환경적 맥락에서 자유로울 없다고 생각한다.

    

     원제가 과학의 의미 고찰해보려는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과학을 둘러싼 여러 폭넓은 논쟁점들을 아우르고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적극적으로 논쟁에 뛰어들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로서 나는 그의 주장이 독자를 강요한다고 느끼지지는 않는다. 르윈스가 책을 마무리하면서 과학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것은 과학이 혼자서 답변할 있는 문제가 아니다.(350)”라는 열린 자세로 오히려 독자에게 결론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하나의 정답만을 얻는데 익숙한 우리로서는 다소 맥빠지고 실망스럽다고 느낄 있지만,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은 시대에 따라, 인간의 지식의 수준에 따라, 그리고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를 있음을 책에서 배웠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어떤 답을 설정한다고 해도 후대에는 과학의 가치는 달라질 있지 않을까?

 

     책은 폭넓은 주제를 소개하고 있는 만큼 깊이 있는 논의의 과정을 보여주는 데는 지면의 한계가 있을 것이다. 다만 르윈스는 책이 과학이 가져야하는 요건이나 과학의 의의를 생각해보는데 막연하게 느끼는 독자에게 좋은 안내가 있을 것이다. 관심이 가는 주제는 참고문헌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이해를 있도록 소개하는 과학철학분야의 카타로그 같은 책이 아닐까하는 인상을 받게 되었다. 물론 나의 부족한 지식과 이해로 인한 오독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다양한 오독을 거치고, 새롭게 이해를 하고 고민을 하는 과정을 통해 보다 온전한 전체상이 드러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따라서 나는 나의 오독을 걱정하기보다 앞으로 흥미있는 생각거리가 늘어난 같아 오히려 반갑다. 한가지 배우게 점은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인문학 뿐만 아니라 과학도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해주는 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말하면 개인적으로 <과학한다, 고로 철학한다> 읽고 재확인 과학의 가치는 과학도 인간의 이해를 더해주는 인류의 업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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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전쟁
반다나 시바 지음, 이상훈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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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 뉴스에서 심각한 가뭄으로 30여년 만에 수몰되었던 마을과 바닥이 드러난 모습을 기억이 난다. 수자원 관리 담당자는 현재 남아있는 물로 내년(2016) 봄까지 버텨야 한다고 말했다.  다시 11월이 되자 여전히 계속되는 가뭄에 정부, 내년 6 전까진 가뭄해소 어렵다!’ 타이틀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정부에선 내년 봄까지 가뭄해소가 어려울 같다고 발표하더니 이제는 초여름이 되는 6 말까지 이어질 전망이라고 슬쩍 늘여서 말하고 있었다. 가뭄이 심각한 모양이다. 우리는 집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것만 보게되는 상황이기에 물부족이 얼마나 심각한 사항인지 쉽게 와닿지 않는다. 그래도 지난 며칠간 내린 가을 단비로 가뭄이 조금은 해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세계적인 환경주의 사상가이자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인도를 비롯한 세계의 환경문제, 그리고 세계화에 맞서 저항해온 반다나 시바 여사의 책을 들게 되었다. 반다나 시바가 저술한 책은 대개 분량이 많지는 않으나 세계화의 질서 속에 놓인 우리의 자연환경 자원의 약탈 문제를 독자에게 고발한다. <물전쟁> 역시 전통적으로 공유하던 물이 어떻게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상품으로 변해버렸는지를  얘기한다. 책의 제목에는 물전쟁이란 제목과 함께 영문P 시작하는 개의 단어가 보인다. 민영화(Privatization), 오염(Pollution), 영리(Profit) 단어가 부제로 붙어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물전쟁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3개의 단어로 요약되어 있었다. 반다나 시바 여사의 원래 전공은 물리학이었다. 하지만 어렸을 물장구치며 놀던 히말라야 지방의 개천이 사라진 것에 충격을 받고 환경문제를 비롯한 생태학에 눈을 돌려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만큼 물은 저자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과 분리될 수는 없는 존재이면서도 오염이 되거나 훼손이 되어야 우리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곤한다.

     역사적으로 물은 성스러운 , 생명을 잉태하게 해주는 존재, 어머니,  치유와 정화의 이미지 등으로 우리에게 각인되어있다. 책의 앞에도 생명의 이라는 고대 인도의 문헌 <리그 베다> 나오는 시로 시작한다. 신성성과 생명의 상징으로서의 . 신화와 상상력이 결부된 질료서의 물이 언젠가부터 상품이 되어 팔리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5년에 민간에게 병에든 생수를 판매하도록 허가가 났다고 한다. 역시 생수를 판다는 사실에 생소했고, 당시 어른들은 봉이 김선달처럼 물을 판다고 황당해하기도하고 혀를 차기도 했던 것을 기억한다. 당시에는 수도물을 먹었고, 수도꼭이제 정수필터를 달아서 먹기도 했지만, 이제 우리는 상품이된 물을 구입하여 이것에만 의지해서 먹고있는 것이다. 반다나 시바의 다른 저작들처럼 책은 세계화 진행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물과 연관된 가혹한 운명에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선 물과 관련하여 세계화의 전형적인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 차관을 받은 개발도상국은 강물을 막아 댐을 만든다. 과정에서 지역적으로 물을 관리하던 분권화된 물통제 구조는 정부주도의 중앙집권적인 구조로 전환된다. 차관을 제공하던 경제 기구들은 협정 조항에 외국 기업이 나라에 진입하여 사업을 있도록하는 조항을 집어넣는다. 따라서 차관을 받고, 댐과 같은 국책사업을 벌인 국가에서는 이런 공공의 자원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권한이 민영화되어 외국의 기업에게 넘어가게 된다. 다시말해 엄청난 국민의 세금으로 건설해놓은 댐과 여기에 있는 수자원은 외국 기업의 통제하에 전적으로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민영화 과정을 통해 수자원에 대한 소유권 외국의 기업으로 넘어가게 되면 이들은 마음대로 나라의 자원을 이용할 있게 된다. 이들은 물을 제조하여 판매하기 위해 지역의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관정을 뚫고, 동력을 이용하여 지하수가 채워지는 것보다도 많은 물이 끌어올려 최대한의 생산성을 확보한다. 수자원에대해 염두해야하는 중요한 사항은 자연이 주는 물의 양에는 제한이 있다는 , 그리고 물은 대체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물은 전통적으로 공유재로서 지역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공동관리가 되어왔다. 하지만 외국의 기업에서 이런 사정을 인도적으로 고려해주지는 않는다. 아울러 댐을 만들면 수천에서 수만명의 수몰민이 발생하여 강제이주를 강요받게된다. 민영화를 주도한 기업의 탐욕으로인해 수많은 이들이 조상대대로 살아오던 고향을 떠나야한다. 세계적으로 댐건설로 인해 자신의 삶의 터전을 떠나야했던 수몰민이 ( 책이 저술되었던 2000년대 초를 기준으로) 4000-8000만명 정도 된다고 한다. 정치적, 종교적 문제 혹은 전쟁으로 고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물에대한 권리를 박탈당하고 떠나야하는 새로운 형태의 디아스포라 생겨나는 것이다. 앞으로 자유무역 여파로 고향을 떠나야하는 새로운 디아스포라는 꾸준히 증가할 같다. 반다나 시바가 책을 저술할 당시에는 아직 중국의 삼협댐 완공되지 않았을 터인데, 중국의 삼협댐이 완공되면 하나만으로도 1000만명의 수몰민이 고향을 떠나야한다는 대목에 말을 잊었다.

     반다나 시바는 댐건설로 인하여 해당지역의 집단적인 수리권이 지역 공동체 지방 의회 내지는 지방정부에서 중앙정부로 이전되는 문제를 지적한다. 전통적인 지역의 수리권이 물을 사용할 있는 권리에서 물을 소유할 있는 소유권 되기 때문이다. 물을 사용할 있는 권리가 중앙권력에 귀속되면 과거에 융통성을 가지고 지역특색(기후나 이용가능한 물의 ) 맞는 작물을 기르거나 개별적인 관개사업을 하기가 어려워지게되, 결국 민주주의 치명적인 위협이 수가 있다.

     물이 상품화 되고 수리사업이 민영화되면 수몰민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댐건설로 인한 유량의 변화로 하나의 강에 여러 지역, 혹은 여러 나라가 걸쳐있는 경우, 이는 새로운 정치적 분쟁의 씨앗이 된다. 한편 녹생혁명이라는 구호아래 물소비는 많아도 생산량이 높은 작물을 지역의 특색을 고려하지도 않고 단일 재배하게 된다. 결국 이는 물이 풍부했던 지역도 물이 부족한 지역으로 만들어버리게 되고, 토지의 표토 유실이 심해져 토지의 황폐화를 초래하며, 농장과 주변 지역의 생물 다양성을 감소시킨다. 그렇다면 어업관련해서는 어떤가? 예를 들어 세계은행, 국제무역기구등의 차관으로 인도에서 성행한 새우양식 경우, 주변 지하수에서 새우양식에 필요한 물을 과도하게 사용함으로써 주변 지역의 지하수를 고갈시키고, 지하수의 염분화를 촉진시키는 사례를 있다. 결과 물이 풍부하던 마을에서 물을 구하기 힘들어 마을을 떠나거나, 주정부가 급수차를 동원하여 제한적으로 물을 공급받고, 심지어는 여성들이 킬로미터에 해당하는 거리를 물항아리를 이고 물을 구하러 시간씩 걸어 다니게 되었다. 염분화된 지하수는 주변 농장의 토지의 염분화를 촉진한다. 토지가 황폐화되어 작물의 수확에도 커다란 차질을 빚는다. 지역과 공동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지 않은 집약적 사업이 세계의 자원을 수탈하고, 환경오염을 가중시키며, 지역민의 삶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세계적으로 빈부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이 상품화되면서 가난한 이들은 무료로 얻을 있었던 물을 이제는 사먹어야하는데, 돈이 없으면 갈증을 해소할 권리마져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있다. 이것이 세계화의 구호속에 자유무역을 추진하고, 외국의 민간기업에게 국가의 핵심적인 사업의 권한을 넘겨주어 발생하는 전형적인 결과가 것이다. 이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맺은 우리 나라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프랑스 미국의 거대 기업이 민영화과정을 통해 물사업에 뛰어든 결과, 일자리가 줄고, 수질 악화로 인한 피해자가 오히려 늘었으며, 물값은 예외없이 올랐다. 물값을 통제하는 것은 나라의 정부가 아니라 외국의 회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캐나다 온타리오의 지역에서 세균에 오염된 물을 공급하여 대장균 감염으로 소비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을 , 물공급을 담당하던 회사 측에서는 수질시험 결과를 지적소유권이 적용되는 기밀사항이라는 구실로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자유무역협정의 조항에 의해 캐나다의 정부는 회사에게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자료를 공개하라고 명령할 없다. 만약 이를 강제할 경우, 회사는 캐나다 정부를 상대로 회사의 예상 영업 이익에 반하여 압력을 행사한다는 이유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런 일들은 이제 우리 나라 정부도 충분히 겪을 있는 일이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이미 체결했고, ‘현재로선 문제는 없어보인다라고 말하는 무책임한 정부관리가 있는 , 언젠가 미국의 대기업들로부터 우리 정부는 끊임없는 소송을 제기당하거나, 아니면 민영화의 결과 감당해야할 비용들을 국민들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강요하게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같다. 최소한 인도, 멕시코, 남미 등의 여러 나라를 비롯한 사례들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예외적으로 문제없이 지혜롭게 지낼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과거의 전통적인 제조 산업 아니라 대기업이 운영하는 현대적인 집단공장식 농업 형태 또한 오염을 심각하게 유발하며, 물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방식임을 반다나 시바는 다른 책에서도 누누이 언급했다. 우리의 실정을 고려하면 우리 나라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역할을 하는 나라이기에 <물전쟁>에서 반다나 시바가 언급한 반도체 산업에서의 과도한 물사용에 관한 언급은 쉽게 지나칠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리콘 웨이퍼 제조와 회로 패터닝에 수많은 맹독성 화학물질 아니라 엄청난 양의 중화된 물을 사용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어야하겠다.

     반다나 시바는 세계화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회 속에서 수리 사업과 물의 사용권을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사업을 전개해나가야한다고 역설한다. 생태학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하면 계획된 수리 사업에 숨겨져 있거나 파악하지 않았던 비용들을 고려할 있고 이를 사업에 반영할 있는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나는 특히 인도에서 수세기 동안 토착 기술자와 지역 공동체에 의해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형성된 물관리시스템 조직과 거미줄처럼 연결된 물저장소에대한 이야기가가 인상깊었다. 이는 심지어 인도에 건너온 영국식민주의 시대의 관개기술자들도 인도의 물관리시스템과 조직적인 저장소를 보고 광범위하고 완벽하게 배치된 상태에서 새로운 저장탱크를 찾기는 무척 어렵다.’라고 말할 정도로 감탄하였다. 나아가  팔라르라는 커다란 그릇을 이용하여 빗물을 받아 모아 마을에서 공동으로 물을 확보하려는 지혜를 배우게 되었고, 아울러 하리잔이라는 카스트의 가장 하층 계급의 사람들에게 관개관리인의 역할을 맡겨 수리시스템의 중립성을 유지해온 사례에서 무척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인도인의 전통적 수리관리 시스템은 지혜롭게 분권화된 양식으로 경제적 강자로부터 수리시설을 지키는 민주주의가 이미 오래전에 체계화되었던 것이다.

     앞부분 에서도 언급했지만 물은 전통적으로 성스러움의 대상이었고, 생명과 치유 정화의 힘을 갖는 근원이었다. 하지만 물이 상품화가 되어 생수병에 넣어지면서 물은 자체로서의 신화적 상상력을 상실하였다. 물은 자연과 인간을 신화와 이야기로서 연결해주었다. 하지만 이제 인간은 물에 대한 상상력을 잃어버리고 물은 단순히 H2O 되어버렸다. 물리적으로 오물을 씻어줄 있으나, 우리의 영혼을 정화해줄 수는 없게 것이다. 카톨릭 신부이자 사상가였던 이반 일리치는 물의 상품화를 통해 물에 일어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 적이 있다.

   지금도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소위 음용수라는 이름의 , 아이들에게 냉장고 생수병 물을 마셔라,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그건 마시지 말고라고 말하는 물을 받아서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현실이다. 바로 그게 오늘날 질료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나는 세례에 대해 의문을 품는 아니다. 그저 오늘날을 살아간다는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지, 얼마나 끔직한지 한번 보라는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고나면 순간의 열정과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게 것이다.” [<이반 일리치와 나눈 대화> 274면에서 발췌]

     반다나 시바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이 거대 기업들의 그늘 밑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어떻게 지키고 살아야할지 몸소 저항함으로써 그리고 끊임없이 배우고 참여함으로써 모범을 보이고 있다. 물을 비롯한 우리의 자원, 우리의 자연을 지키기 위해서는 영성의 회복과 공동체의 회복이 중요함을 다시금 강조한다. ‘성스러운 물항아리 쿰브를 지켜라라고 글을 끝맺으면서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창조할 것인지 우리는 각자의 책임이 있음을 호소한다. 반다나 시바의 <물전쟁> 읽으며 인도인의 물에대한 지혜를 새롭게 배우게 되었고, 내가 매일 마시는 생수에 대해 다시금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할을 무엇이 것인가? 아마도 이것이 앞으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가 것이다. 끝으로 십년 마하트마 간디가 의미심장한 말을 되새겨본다. “지구가 가진 자원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소수의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  

"20세기의 전쟁이 석유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었다면, 21세기의 전쟁은 물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될 것이다."
- 세계은행 부총재 이스마일 세라겔딘의 말(1995년)

"댐이나 핵폭탄이나 모두 대량 살상 무기다. 모두 정부가 국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다. 둘 다 20세기의 상징으로서 인류 역사에서 인간의 지성이 생존의 본능을 포기한 시점을 나타내는 기념물이다." (122면)
- 세계적인 소설가 아룬하티 로이의 말

"16년 동안 우리는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주민들은 관개, 물, 생산량의 증가 등 아무 것도 얻지 못했으며 생활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117면)
- 1986년 간디 수상의 보고서

"댐은 권력을 의미한다. 물을 소유하게 되면 권력을 소유하는 셈이다."
- 터키 경찰 간부의 말

"댐 개발로 인한 편익을 얻기 위해 받아들일 수 없고, 때로는 불필요한 돈이 자주 사회비용 또는 환경비용의 형태로 지불되었다. 이런 비용은 대개 수몰민, 하류의 공동체, 납세자 그리고 자연환경이 부담하게 된다."
- 세계댐위원회의 보고서

"지구가 가진 자원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위해서는 충분하지만 소수의 탐욕을 위해서는 부족하다."
- 마하트마 간디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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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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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밥상>

피터 싱어 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창세기 첫 머리에 신은 인간을 창조하여 새와 물고기와 짐승을 다스리게 했다고 씌어 있다. 물론 창세기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쓴 것이다. 신이 정말로 인간이 다른 피조물 위에 군림하길 바랐는지는 결코 확실하지 않다. 인간이 암소와 말로부터 탈취한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신을 발명했다고 하는 것이 더 개연성 있다. 그렇다, 염소를 죽일 권리, 그것은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쟁 와중에도 전 인류가 동지인 양 뜻을 같이 하는 유일한 권리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옮김/민음사, 445면에서 발췌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이자 실천 윤리학자인 피터 싱어와 농부에서 변호사가된 짐 메이슨의 두 번째 공저 <죽음의 밥상>의 원제목을 우리말에 가깝게 번역하자면, 우리가 먹는 것의 윤리학정도 될 것이다. 위에서 쿤데라의 가장 유명한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인용한 부분은 <죽음의 밥상>에서 저자들이 언급하는 윤리적 쟁점 중의 하나인 종차별주의(speciesism)를 그대로 표현하는 대목이다. 인간의 기본 욕구에는 흔히 성욕과 식욕을 언급한다. 이 두 가지 기본 욕구는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볼 때, 거의 언제나 윤리적인 문제를 중요시 해왔다.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 혹은 먹지 말아야할 지를 규정하는 것이 윤리적인 문제의 맥락 속에 있었다.

   <죽음의 밥상>을 관통하는 주제는 아주 단순화하면, 먹을거리의 선택은 윤리의 문제다. 하지만 광신은 필요없다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세 가정의 먹거리 선택을 들여다보고 이들이 먹는 식품에 기반하여 먹거리의 윤리학을 이야기한다. 첫 번째 가족의 식단은, 전형적인 미국인 가정의 식단으로 맥도날드를 이용하고, 월마트에서 닭고기, 소시지 베이컨 등의 장을 보고 디저트로 선데 아이스크림을 먹고, 캔콜라를 마시곤하는 가정이다. 어쩌면 현재 한국의 도시에 사는 전형적인 4인 가정의 먹거리 선택과 많이 유사한 면이 있다. 두 번째 가족의 식단은 좀더 세심하게 선정된다. 부부는 칼럼니스트이자 환경운동가, 생물학자로서 교육 수준이 높고, 상대적으로 부유한 지역에 살고 있으며 환경문제나 먹거리 선택에 상당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채식위주의 식단을 유지하되, 인도적으로 대우를 받는 동물로 육식을 하는 가족이다. 세 번째 가정의 식단은 아이들까지 모두 온전한 채식주의자 가족이다. 유제품 뿐만 아니라 벌의 도움을 받는 벌꿀마져 먹지 않는다. 이 책은 미국의 세 가지 유형의 먹거리를 선택하는 가정을 통해 현대 미국인의 먹거리 문화와 식품이 만들어지는 환경, 그리고 이 먹거리의 선택이 타자(동물, 노동자, 소비자, 자연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윤리적인 관점에서 따져보고 있다. 미국인의 가정과 식단을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다소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요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까운 우리의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고, 음식을 생산하는 과정은 더이상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고 전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윤리적인 문제다. 따라서 미국인의 식단을 통해 우리가 배울점은 여전히 많다고 할 수 있다.

   현대 미국인의 육고기 소비는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순으로 이어지며, 해산물은 새우, 연어 등으로 이어진다. 우선 육고기 생산과정에서 닭, , 돼지는 일반적으로 공장식 집약 농장에서 길러진다. 이 말은 곧 농가의 수가 급속하게 줄어드는 대신, 수많은 동물들이 한 농장에서 상당한 밀집도로 모여 길러진다는 의미다. 또한 대기업형 농장이 점점 독점화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동물들로부터 얻어내는 고기 생산 방식에는 상당한 윤리적 문제가 있다. 동물의 처우에 관한 문제는 물론이고,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문제, 심각한 공공의 자원 수탈 및 환경 파괴 및 오염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러한 제반 문제들의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공장식 집약 농업 방식에 있다. 저렴한 고기 생산을 생산하는 일은 결국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는 이들이 이러한 농업 방식에서 불거지는 문제들에 대한 대체 비용을 타자에게 전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환경 오염을 완화하기 위한 연방 정부의 추가 예산(곧 세금 증가로 이어진다)의 필요, 환경오염 및 저질 음식으로인한 건강 문제와 의료비 및 보험료 수가 인상 등의 비용을 생각해볼 수 있다. 공장식 농장을 운영하는 인간의 탐욕 은 또 새로운 대가를 많이 요구하기도 한다. 우리도 익히 경험하여 알고 있는 조류 독감과 같은 문제가 그렇다. 공장식 집약 운영하에서 닭들은 조류 독감 바이러스가 더 악성으로 변이되기 쉽고, 유전적으로 동질적인 닭들이 대부분이기에 감염 이후 집단에 대한 확산력이 매우 크다. 또 밀집되고 불결한 환경에서 자라나는 닭들의 스트레스 증가 및 저항력, 면역력의 약화로 훨씬 더 조류독감 같은 문제에 취약한 것이다. 곧 조류 독감 가능성에 대비하려면 또다시 백신이나 약품을 확보하는 문제 등을 비롯하여 연방 정부 및 주 정부의 예산이 들어가고, 결국 이러한 비용은 또  다시 우리에게 전가되는 덧이다. 따라서 이제는 더이상 우리 개개인의 이익만을 챙기려는 시야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 내가 사는 환경을 생각하여 더불어 살아야하는 입장이 필수불가결해지고 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저자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동물들의 인도적 처우 문제와 육식을 하는 일의 윤리성에 관해서이다. 윤리적으로 정말 중요한 문제는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주지 말아야한다이며, 저자는 끊임없이 농장에서 자라는 동물들의 고통과 관련하여 윤리적인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 나아가 저자는 연체동물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에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윤리적인 문제를 따지고 있다. 문어와 오징어는 고통을 느낄 수 있다고 인정해야하며, 따라서 이들을 먹는 일에는 윤리적인 문제가 따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토막나 꾸불꾸불 움직이는 산낙지를 먹는 한국인의 경우, 아마도 피터 싱어는 낙지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므로 피하라고 권고할 것이다. 문어의 고통까지 생각하는 저자는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윤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한 좀더 윤리적인 먹거리를 선택하여 먹어야한다는 것이다.

   해산물 또한 육고기 생산과 크게 다를바가 없다. 규모가 커진 상업적 어로는 어족을 붕괴하고, 환경을 오염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점점 증가하고 있는 양식 수산물은 육지에서의 대규모 농장처럼 엄청나게 밀집된 개체들로부터 나오는 오물 등으로 환경오염이 극심한 수준에 이르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먹어보곤 했던 대구는 이제 전 세계적으로 어족이 붕괴되어 원래 수준으로 회복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안타까운 예이다. 특히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는 대구는 레이더를 이용한 공장선에의해 싹쓸이 당하다시피 지구의 바다에서 사라져버렸다. 이제 2000년 이후에 태어난 디지털 네이티브인 젊은 세대들은 대구를 앞으로는 먹어보지 못할 것이다.

   현재 미국에서 현재 가장 많이 소비되는 해산물은 새우라고 한다. 새우를 잡는 어로 방식은 트롤망 어선을 이용하여 무거운 추가 달린 그물이 해저를 훑어 가며 잡아들인다. 수만년 형성된 산호초를 초토화 시키는 것은 물론, 그물코가 작기에 원하지 않는 부수적 포획물이 새우 수의 14-15개까지 잡히고 있다. 그물에 걸리는 해양생물에는 대형 포유류를 비롯, 멸종 위기인 바다 거북 등도 포함한다. 아울러 새우 양식은 바닷가의 해안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망그로브 숲을 벌채하기도 하고, 물을 끌어들이기 위해 마을의 지하수를 고갈시키기도 한다. 텅 빈 지하수에는 염수가 들어차 마을이 황폐화된기도하고, 결국 사람이 떠나버리는 마을을 만들어버리기도 하는 것이다. <죽음의 밥상>을 읽으며, 새우를 먹는 일에 이렇게 심각한 윤리적 문제가 있으리라고는 책을 읽기전까지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피터 싱어와 짐 메이슨은 육고기 및 해산물 등의 먹거리 윤리를 얘기하면서, 윤리적인 문제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베건 식단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베건은 채식주의자 중에서도 동물성 음식을 일체 거부한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그렇다치고 아이들을 베건으로 키우는 일은 합당한가에 대한 물음에 저자들은 문제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 소아과 협회와 영양협회의 발표를 인용하며, 베건 식단이 정상적인 아동의 성장을 촉진할 수 있으며, 이들 식단은 인생의 모든 시기에 적절하다. 심지어 임신, 수유기, 아동기, 청년기에도 말이다. 이런 베건 식단은 동물과 관련한 제반 윤리적인 논점에서 자유롭다. 나아가 저자들은 잘 짜여진 베건 식단을 통해 단백질, 철분 섭취에도 문제가 없다고 한다. 콩류의 음식이 들어간 식단을 통해 추가의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하지 않아도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고 말한다. 단 체내 생성이나 음식물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비타민 B의 경우, 보강제를 먹으라고 권하고 있다. 아울러 베건인 운동선수(울트라 마라톤 우승자, 육상 메달리스트 칼 루이스 등)를 예로 들며,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 곧 베건 식단은 우리에게 건강한 식단이며, 환경문제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곧 저자들은 여러 먹거리의 선택과 이 행위가 주는 영향등을 고려하며 먹어도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의 경계가 모호한 양심적 잡식주의자들보다도 명확하게 선을 그어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윤리적인 식생활을 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아지만 이런 논점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의 경우, 곧 유기농산물이나 인도적으로 길러진 고기나 달걀등에 추가로 값을 지불할 여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더 적절한 윤리적 쟁점으로 보인다. 물론 저자는 개발도상국에서 이런 조건에 접근하기 힘든 점을 고려하여, 얼마간은 육식을 하여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허용하는 보다 유연한 자세를 견지한다. 이쯤되면 우리는 피터 싱어와 짐 메이슨의 너무나 유연한 윤리관을 비판할 수도 있겠다. 이런 가능한 비판에 대해 저자들은 역시 분명한 입장을 제시한다. 윤리적 사고는 상황이 관건이다.라는 것. 예컨대 부유한 사람들이 유기농 식품을 구입하는 일이 가난하여 이를 구입하지 못하는 이들보다 더 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먹을 거리에 대해 보다 타당한 접근은 우리가 무언가를 먹거나 먹기를 선택할 수 있을 때,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이 음식을 안먹는 다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나의 선택은 나와 타자 곧 다른 이들이나 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의문을 제기하라는 것이다. 곧 이것을 나는 태도의 문제라고 이해했다. 저자는 개인이 규칙을 얼마나 철저하게 지키는가가 핵심이 아니다. 동물 학대를 지지하지 않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하는 것이 바로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죽음의 밥상>은 고착화된 원칙을 지키느라 도그마에 빠지지말고, 주어진 상황을 언제나 민감하게 고려하여야 윤리적으로 판단이 가능하다는 교훈을 던저 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러므로 저자는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선택하는 것은 곧 윤리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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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세계를 약탈하는가
반다나 시바 지음, 류지한 옮김 / 울력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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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선 책의 내용을 언급하기 전에 가지 이야기를 상상해보자. 가령 여러분이 농부이고 규모는 아니지만 전통적 방식으로 다양한 작물과 과일 등의 농사를 지어 자신과 가족의 먹거리를 해결해왔고, 아울러 판매를 통해 자식들의 교육까지 그럭저럭 해결해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어느날 미국의 몬산토라는 회사가 등장하여, 여러분이 비축해둔 쌀이나 , 옥수수등의 종자를 문제삼으며 종자들을 심는 것은 불법이다. 농사를 하려거든 앞으로 우리의 종자를 구입해야한다.’라고 경고한다. 여러분의 텃밭에 몰래 작년에 비축해 종자를 뿌려두었는데, 몬산토 회사가 마을에 무상으로 설치해둔 감시 카메라 전화를 통해 누군가가 신고를 했다. 신고자는 회사로부터 포상 받았지만, 여러분은 몬산토 사가 지정하지 않은 종자를 몰래 자신의 텃밭에다 심었다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범법자가 되어 미국의 회사로부터 고소당하고, 재판을 통해 징벌적벌금을 회사에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억울해서 항소를 하니 자유무역협정(FTA)’ 이후 국가가 농민을 보호해줄 있는 여지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정부나 시민단체에 호소를 해도,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 11조항, “수출입에 대한 일체의 규제는 불법이다. 심지어 문화적, 생태학적, 경제학적 이유에서 규제가 불가피한 경우에도 불법이다.” 의거하여 여러분은 도움을 받을 길이 없다. 결국 엄청난 액수의 벌금을 지불해야하는 일이 고스란히 여러분의 몫이 되었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나아가 앞으로 여러분의 밭에 심을 있는 종자는 몬산토 사가 지적 재산권으로 보호 받고 있는 유전자 변형 작물뿐이다. 수확량이 많아 지는 것도 아닌데, 기존의 해충에는 더욱 취약하여 제초제는 더욱 많이 사야한다. 그것도 몬산토 회사가 유전자 변형 작물에 기반하여 최적화 제초제를 사야만 한단다. (참고로 몬산토 사의 수입원은 종자 판매가 아니라 제조제 판매를 통해서이다.) 제초제의 가격은 기존에 쓰던 국내 회사의 제품보다 2배나 비싸다.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여러분은 다시 빚을 내어 제초제를 몬산토 사로부터 대량 구입해야 했다. 여러분의 빚은 해부터 끝없이 증가하기만 한다. 여러분은 끝없이 이어지는 폭력 악순환 속에서 어떻게 것인가?

   실제 미국이 멕시코와 FTA 체결한 이후 빛이 늘어나고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진 농민들이 대기업의 농약을 마시고 자살하는 경우가 있었다. 끝이 나지 않는 절망 속에서 택한 결단이었다. 정부가 농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자유 무역 감옥 속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있을까? 평생을 일궈온 땅을 버리고 도시로 떠날 것인가? 나의 가정은 단순한 상상일지는 몰라도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현재, 혹은 앞으로 우리 농민들이 충분히 겪을 있는 개연성 있는 이야기이다. 특히 반다나 시바의 <누가 세계를 약탈하는가> 제시하고 있는 세계화 식량문제 관련한 사실들을 기반으로 한다면 말이다.

   위의 이야기는 신자유주의 질서 속에서 거대 다국적 기업이  세계를 무한 경쟁체제로 몰아가는 상황을 통해 우리들이 앞으로 충분히 겪을 있는 일이다. 반다나 시바의 책은  ‘세계화라는 허울 좋은 슬로건에 우리는 그저 생각없이 좋아요 클릭하고 있지나 않은지 다시 생각해보게 해준다. 앞에서 지어낸 에피소드에는 어설프고 극히 제한적이긴 하지만, ‘세계화과정을 통해 우리가 어떤 영향을 받을 있는지에 관해 핵심적인 내용을 담았다. 책과 관련한 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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