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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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요즘 대형 서점의 과학 코너에 가면 진화심리학 계열의 책들이 가장 눈에 잘 띠는 곳에 놓여 있다.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 스티븐 핀커의 <빈 서판>, <언어 본능>,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생명의 미래> 등 두꺼운 하드커버 책들이 즐비하다. 놀라운 것은 모두 스테디셀러라는 사실. 우리 사회에서 진화심리학 계열의 책들이 이렇게 인기가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사실, 이 계열의 책 중에서 가장 얇은 책 중의 하나가 <풀하우스>(사이언스북스, 2002)였기 때문에 이 책을 선택했다. 물론 스티븐 제이 굴드라는 학자의 명성도 한 몫 했다. 올해가 가기 전,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한 유명한 과학책 한 권 쯤은 읽어 둬야겠기에 고른 책이다.

  선택은 소박했지만,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 책은 이러 저런 과학 이론을 쉽게 전달해 주는 단순한 과학 교양서가 아니다. 전통적인 세계관을 뒤엎고 편견으로 가려진 진리를 명확히 드러내 보여주는 혁신적인 책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실이라는 이유만으로 증명할 필요도 없이 무소불휘로 통용되는 지적 독단을 멈추게 한다. 굴드가 제시해 주는 새로운 설명 도구는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어정쩡하게 논해지는 여러 현상들을 마법처럼 풀어내 준다.

  이 책의 두 가지 중심 주제는 ‘야구에서 왜 4할 타자가 사라졌는가’하는 문제와 ‘생명의 역사에서 진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의 해명이다. 굴드는 수수께끼 같고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개의 다른 현상이 ‘풀하우스(=시스템 전체의 변이)’라는 개념적 도구로 얼마나 잘 설명되는지 빼어나게 입증한다. 그리고 후자의 연장선에서 박테리아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방대하고 보편적인 생명의 형태가 바로 박테리아라는 것. 굴드는 이렇게 한 자리에서 다루어진 적이 없는 서로 다른 범주들을 하나로 묶어 포괄적으로 설명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1. 도구적 개념으로서의 풀하우스

  굴드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앞서 ‘풀하우스’라는 개념의 통계학적인 설명 방법을 동원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풀하우스’라는 용어는 간단히 말해서 ‘전체 시스템의 변이’를 의미한다.) 우선 통계적인 특정값이 시스템 전체의 특성을 잘 반영하는지 검증한다. 굴드의 고찰에 따르면, 중심경향성을 나타내는 값 중에서 평균값과 중간값은 집단 전체의 총체적인 변이를 온전히 나타낼 수 없단다. 왜냐하면 소수의 극단값이 평균을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최빈값(가장 흔한 값)은 변화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특정한 값이 시스템 전체의 성질을 대표할 수는 없다고 봐야 한다. 이는 ‘전체 시스템의 변이’야말로 궁극적 현실이며, 평균은 제한적이고 본질적으로 추상 개념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굴드는 ‘풀하우스’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례로써 자신의 개인적 투병생활을 소개한다. 마흔 살 때인 1982년, 굴드는 복부중피종이라는 희귀하고 거의 치료가 불가능한 암 진단을 받았다. 당시 모든 의학 문헌들에 의하면, 진단 후 중간값 생존율이 8개월 이하라는 것이었다. 굴드는 ‘중간값 생존율 8개월’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전체 시스템의 변이(=풀하우스)’ 관점에서 생각했다. 그리하여 변이의 특성을 3가지 개념으로 정리했다. 즉 변이의 확장에는 오른쪽 벽과 왼쪽 벽이라는 한계가 있다는 것, 이 한계에 의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곡선과 왼쪽으로 기울어진 곡선이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중심경향성을 말하는 평균값, 중간값, 최빈값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좀 더 부연하면 이렇다. 진단 후 사망까지 걸리는 시간에 따른 사망자 분포 곡선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종모양의 형태를 보여준다. 통계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곡선 끝을 ‘꼬리’라고 부른다. 따라서 왼쪽 꼬리는 생존율 0의 벽에 닿는 반면, 오른쪽 꼬리는 이론적으로 무한정 연장될 수 있다. 표준정규분포곡선에서는 중심경향성을 나타내는 값들인 평균값, 중간값, 최빈값이 일치하지만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곡선에서는 중심경향 척도들이 일치하지 않는다. 중간값은 최빈값의 오른쪽에, 평균값은 가장 오른 쪽에 위치한다. 결국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중간값이라는 특정한 값으로는 분포 전체를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 통계학적 설명 도구는 ‘생명의 역사에서 진보’의 문제와 ‘4할 타자의 절멸’ 문제를 동일 차원에서 해결하는 열쇠이다.


2. 생명의 역사에서 진보의 문제

  박물관이나 생물 교과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사 그림을 보면, 진보가 생명의 역사에서 중심이 되는 경향이며 특징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림은 최초의 생명체인 박테리아부터 시작해서 무척추동물군-어류-양서류-파충류-포유류 순으로 지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진화의 정점에 인간이 등장한다. 어떻게 생명의 역사에서 진보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굴드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은 ‘경향을 어디론가 움직여 가는 하나의 실체’로 생각하는 진부한 사고의 전형적인 예라고 한다. “생명의 무한한 다양성으로부터 우리는 ‘평균 복잡성’ 또는 ‘가장 복잡한 생물’과 같은 ‘기본적인’ 값을 뽑아내고 이 실체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증가했는가를 추적한다. 우리는 이 증가의 경향을 ‘진보’라고 명명하고 그러한 진보야말로 진화 과정 전체의 추진력임이 틀림없다는 시각에 갇혀버리고 마는 것이다.”(p203) 변화의 역사를 시스템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변이의 확장이나 위축으로 본다면, 진보에 대한 전통적 주장이 편협한 시각임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사 그림에서도 보듯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장 복잡한 생물들이 출현해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까? 분명히 원생동물보다 절지동물이, 파충류보다는 포유류가 더욱 복잡하고 정교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굴드는 “진보의 추종자들은 최대값에만 초점을 맞추어 가장 복잡한 생물의 역사만을 살펴보았으며, 가장 복잡한 생물에서 나타나는 복잡성의 증가를 모든 생물의 진보라고 착각하는 우를 범했다.”고 본다.

  생물 복잡성의 증가에 대한 굴드의 생각은 술주정뱅이 모델을 통해서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술에 만취한 남자가 술집에서 비틀거리며 나온다. 술집 앞의 보도에 선 남자의 한 쪽에는 술집이 있고 다른 쪽에 도랑이 있다. 이 사람이 완전히 무작위적으로 비틀거리게 내버려두면 그는 도랑에 빠지고 만다. 그 이유는 도랑이나 술집 벽 쪽으로 비틀거릴 확률은 정확히 2분의 1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비틀거림은 독립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이전의 비틀거림은 다음번 사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구조적으로 한쪽이 벽으로 막혀 있는 선형적 운동계에서의 무작위적 움직임은 그 벽의 시작점으로부터 계속 멀어져 갈 수밖에 없다.

  생명의 역사에서 복잡성이 증가하는 모습도 이와 같은 무작위적인 움직임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복잡성의 시작점인 왼쪽 벽은 최빈값을 가진 박테리아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무작위적인 진화 과정은 오른쪽 꼬리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고, 결국 소수의 종이 고도의 복잡성을 나타내게 된다. 오른쪽 꼬리가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그 꼬리에서 어떤 형태의 생물이 생겨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무작위적이고 우발적이며, 결코 진화의 메커니즘에 의해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복잡한 생물들이 살게 될 이 영역에 들어갈 주민이 누구일지는 매번 아주 달라지는 것이며 예측할 수도 없다. 인류는 운 좋게 복권에 당첨된 것뿐이지 복잡성을 향한 추진력이나 진화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필연적 결과가 절대 아닌 것이다.


3. 야구 역사상 최대의 수수께끼; 4할 타자의 딜레마

  야구에서 4할 타자의 절멸 문제도 동일한 원리로 설명된다. 전통적 견해에 의하면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은 타자들이 영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 타격 활동에 반대되는 투수와 수비활동이 더 나아져서 타격 기술이 상대적으로 퇴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굴드는 이를 뒤집는 주장을 한다.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은 타자들의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야구의 전반적인 경기 기량이 향상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투수와 수비 활동이 정말로 타격활동에 비해 꾸준히 우세해져 갔다면 그 영향은 20세기 야구의 역사에서 타율의 전반적 하락으로 측정되어야 하는데, 평균타율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따라서 타자들이 퇴보했다는 견해는 확실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런데 굴드의 주장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4할 타자가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야구가 발전했다는 증거라니, 궤변처럼 보인다. 여기서 잠깐, 굴드가 들려준 병상체험을 떠올려보자. 굴드는 현상을 ‘풀하우스’로 볼 것을 가르쳐주었다. 굴드의 주장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우리가 ‘4할 타율’을 하나의 실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변이로 가득 찬 풀하우스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풀어보면 이렇다.

  야구 경기의 전반적 수준이 향상되면서 종 모양 곡선 전체가 인류의 한계인 오른쪽 벽에 가깝게 다가간다. 그러면서 양쪽 벽의 변이는 감소하게 되었다. 평균 타율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2할 6푼 이지만 20세기 초반의 2할 6푼은 오른쪽 벽에서 한 참 먼 곳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반의 오른쪽 끝에 최고 타자 평균 타율이 4할이 가능했다. 하지만 현재는 양쪽 벽의 변이가 감소하여 최고 타자의 평균이 약 3할 5푼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은 평균타자 2할 6푼마저 인간의 한계인 오른쪽 벽에 다가가면서 야구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된 것의 역설적 결과이다. “다시 말하자면 4할 타율을 따로 떼어내 추적하면 전혀 엉뚱한 결론을 얻게 된다. 그 부분적 꼬리만 보면 안타의 퇴보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체 변이도의 추이를 놓고 보면, 4할 타율의 실종이 경기가 전반적으로 향상된 증거임을 알 수 있다.”(p206) “그러니까 우리는 여태껏 야구 기록에 속아온 셈이다. 평균 타율이 한번도 2할 6푼을 넘어본 적이 없음을 보고, 타격 기량이 한 세기 동안 제자리걸음을 했다고 지레 짐작하여, 4할 타자가 사라지자 위대한 타자가 죽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p165)


4. 박테리아의 힘

  우리는 지금 ‘박테리아의 시대’에 살고 있다. 박테리아야말로 지구 생물체 중에서 가장 지배적인 형태이다. 박테리아는 태초부터 생명의 최빈값이었다. 수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어떤 것으로도 박테리아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 코넬 대학교의 톰 골드 박사는 박테리아의 위대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지구상에는 다른 생물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박테리아가 살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테리아는 지하에 사는 것들까지 합치면 그 생물량에서 숲의 나무를 포함해 다른 모든 생물을 합친 것보다도 더 무겁다. 하나의 무게가 그렇게 미세함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인 사실이다. 박테리아가 그 중요성과 영향력에서 언제나 생명의 중심이었다는 주장에 더 어떤 설명이 필요할까?”(p271) 그렇다. 박테리아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런데, 골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골드는 “우리 태양계 안에 적어도 열 개의 천체에는 지구와 비슷한 미생물이 탄생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는 표면이 언 대부분의 행성들의 내부 환경은 지구 내부 몇 킬로미터 지하와 그렇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란다. 쉽게 말해서 지구에서만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박테리아들은 우주의 보편적 생명 형태를 대표하는 존재 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이다. 정말 박테리아는 위대하다.


5. 새로운 가능성; 오른쪽 벽의 확장

  육상 경기나 수영 경기 등 기록을 단축하는 경기에서 평균(보통) 수준이 오른쪽 벽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면 기록을 갱신하기가 비교적 쉽다. 하지만 평균적인 선수들의 수준이 향상되어 그 수준이 거의 오른쪽 벽에 다가가게 되었을 때, 평균을 초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이 책에 따르면,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음을 뜻하게 된다. "더 나아가 평균 수준이 오른쪽 벽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은 정상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더 높은 완성 단계를 추구하도록 촉구한다."(p181)

  굴드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인간의 문화에 대한 풀하우스적 분석을 시도한다. 생물의 자연적 진화와 문화적 변화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오른쪽 벽에 의해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는 문화  생활의 몇 가지를 살펴보고 있다. 중요한 몇 가지는 과학, 공연 예술, 창작 예술의 3가지다. 저자는 자신의 능력을 탓하며, 여기에 빠진 많은 부분들을 독자에게 유보하고 있다. (과분하지만) 굴드의 유지를 받들어, 다음 두 분야에 굴드의 풀하우스 도구 개념들을 적용해 본다. (다른 분야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

•로스쿨 제도

  책에서도 보았다시피 굴드의 오른쪽 벽 개념은 매우 유용한 도구다. 야구 경기를 포함해서 어떤 시스템이 막 시작 단계일 때에는 엉성하다. 엉성하다는 것은 시스템이 완전하지 않아,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시스템이 정비되고 완성되어 갈수록 개선의 속도는 현저히 둔화된다. 더 나아갈 수 없는 오른쪽 벽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말 많았던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 지 4년이 되었다. 아직도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다. 현재의 사법시험이 존속될 수도 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래서 법조인 양성 교육 시스템의 변이는 여전히 크다. 법조인 선발 시험 체계는 엉성한 단계이기 때문에 시스템의 오른쪽 벽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을 것이며, 변이는 꼬리의 양쪽으로 넓게 뻗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분간은 법조인 자격을 취득하기가 이전의 사법시험 체계보다 좀 더 수월할 것이다.

•철학

  과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오른쪽 벽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그래서 굴드의 표현대로 오른쪽 벽을 걱정할 틈이 없다. 하지만 철학은 다른 듯하다. 인간의 정신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예술의 분야와 비슷하게 인류의 한계인 오른쪽 벽에 바짝 다가가 있을 것이다.

  서양의 철학사는 플라톤(굴드는 플라톤을 맹렬히 비난했지만)을 비롯한 그리스 철학의 주석사라(엄밀히 말하면 플라톤이지만)는 말이 있다. 20세기 이후 현재까지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 베르그손, 하버마스, 푸코, 들뢰즈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왔지만, 결국 그리스 사상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철학에서 그리스 사상은 오른쪽 벽이다.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으려면 선배 저명 철학자들을 뛰어넘어야 하는데 뛰어넘고 보면 그리스 철학을 조금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철학은 고통스러운 딜레마에 빠져 있는 듯하다.


나오며

  한 권의 책을 보았지만 ‘야구의 역사’와 ‘생명의 진화’ 그리고 ‘통계적 사고’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서를 겹쳐서 읽은 느낌이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점은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 주고 편견을 바로 잡아 주는 성찰에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스캇 펙의 명저 <아직도 가야할 길>이 어떤 오류가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역사상 최고의 성공을 거둔 책 중의 하나 이기에 존경심을 담아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굴드가 <풀하우스>에서 엔트로피에 대한 오해와 진보주의적 편견이 가진 중대한 오류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진보주의적 편견을 진리로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굴드가 제창한 ‘풀하우스’ 개념은 풀리지 않는 현상을 해결해주고, 증명 없이 통용되는 이론들의 맹점을 지적해 주는 훌륭한 도구이다. 더욱이 ‘풀하우스’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틀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굴드는 매력적인 사상가이다. 현대에 있어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에 필적할 만한 도구적 개념은 아마도 ‘풀하우스’이외에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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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4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잘 정리해줘서..^^

페크pek0501 2011-12-09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 덕분에 풀하우스를 꼭 사게 될 것 같군요. 그런데 349쪽이 얇다니요. 저는 더 얇았으면 해요. 큭큭...

그런데 어제 알라딘에 책 5권을 주문과 입금한 상태예요. 이 페이퍼를 진작 봤어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 다음 기회로 미루고...

어쨌든 좋은 정보를 얻었으니 제가 왔다간 흔적은 남겨야 하겠기에 몇 자 적고 갑니다.ㅋㅋ
좋은 글, 잘 읽었어요.

oren 2011-12-2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서평글을 남겨 주셨군요. 아주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스티븐 제이굴드의『인간에 대한 오해』를 먼저 읽었었는데, 그 책 역시 `인간이 지닌 편견`에 대해 놀랄만큼 예리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어서 대단한 감동을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굴드는 진화론자들한테는 오래도록 `이단자` 혹은 심지어 `이물질`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는 게 안타까운 점인데, 굴드 스스로 그런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을만큼 언제나 자신감이 넘쳐 흘렀고, 그만의 놀라운 혜안으로 진화 분야의 남다른 통찰을 차별적으로 보여준 위대한 과학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2012-01-01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幻魔大戰 神話前夜の章 2 (秋田文庫 5-41) (文庫)
이시노모리 쇼타로 / 秋田書店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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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받은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환마대전>을 봤습니다. 결론적으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 감상을 쓰기 전에 의외로 이 작품을 모르시는 분이 많은 거 같아 일단 설명부터 드리겠습니다. 이 요상한(?)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좀 재미있습니다.

아니, 좀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1980년대 초, 일본 메이저 출판사 카도카와와 린타로는 당시 일본 영화 시장을 초토화 하고 있는 할리우드 SF 대작 영화에 맞설 수 있는 일본식 SF 대작 애니메이션을 만들기로 의기투합 합니다.

한 마디로 일본 영화 시장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탄생된 영화가 바로 <환마대전>이죠. 이 영화를 만든 멤버들이 얼마나 화려한지는 그 스탭 구성만 봐도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은하철도 999> 극장판1,2 감독인 린타로, 현 매드하우스 대표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 최고의 미술감독으로 일컬어졌던 무쿠오 타카무라, <에이트 맨>의 히라가 가즈마사와 <가면 라이더>의 이시노모리 쇼타로 공동원작, 그리고 <아키라>의 오토모 가츠히로의 캐릭터 디자인까지.

출판메이저 카도가와 쇼텐의 야욕에 찬 데뷔작답게 정말 가공할만한, 일본 아니메 정예 멤버들이 모여 만든 영화입니다. 정말 그 당시 이런 대작은 없었을 겁니다.

기라성 같은 멤버들과 엄청난 투자 그리고 수장인 린타로의 탁월한 수완(?) 덕택에 <환마대전>은 1983년 일본 개봉 흥행 랭킹 8위에 오릅니다. 그리고 제1회 일본 아니메 대상 작품상과 미술상까지 수상합니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나무랄 데 없는 대작입니다.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보더라도 관심을 동하게 하는 작품이죠. 전체적인 기본 설정은 꽤 괜찮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검은 악의 세력 환마가 지구를 침공합니다. 주인공 루나와 베가는 이에 맞서 세계의 초능력자들을 모아 빛의 세력을 구성합니다. 그리고는 어둠의 세력인 환마와 일대 격전(아마게돈 전쟁)을 치룬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절대 ‘저주 받은 걸작’이 아닙니다.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수준입니다. 정말 이렇게 재미없는 아니메가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일본에서 상을 받고 흥행한 것은 참여 멤버들에 대한 일본 관객들의 무한한 존경과 애정의 표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다가 지루해서 몇 번이고 보기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그 난해하기로 소문난 오시이 마모루의 <천사의 알>보다 더 지루하다면 말 다했지요.

플롯 구조가 얼마나 엉성한지 보고 있으면 짜증이 쓰나미처럼 몰려옵니다. 거기다가 그림. 아, 진짜 이건 아니메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붕붕 뜨는 그림체에, 움직임도 형편없고 설정과 관계없는 내용들이 보는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린타로가 감독한 다른 작품들, <은철 극장판1,2>, <카무이의 검>, <캡틴 하록>, <메트로폴리스> 등과 비교했을 때 그 보다 훨~~~씬 못 미치는 퀄러티에 실망만 더할 뿐, 뭐하나 건질게 하나도 없는 졸작입니다.  

 

그런데, ‘대작’이라고 열라 긴 러닝타임은 보는 사람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것 같아 여간 고약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최악의 영화’란 말 이외에는 그 어떤 표현도 떠오르지 않는군요~

****

원래 이 작품은 일본 SF 만화계의 전설이라 불리우는 만화가의 원작을 전면 각색한 것입니다.  1968년 <소년 매거진>에 발표했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한 것인데, 각색과 연출을 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망한 케이스라 보여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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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1-11-15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한개라니, 어지간하기도 하나봅니다 ㅋㅋ 제가 지금껏 본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는 꽤나 다 볼만하거나 그 이상이었는데 이런 작품이있다니요. 최악의 작품 ㅋㅋ 상상만 해도 진저리쳐 집니다. 포스터를 보니 1980년대 라고 보기엔 꽤나 섬세한 면이 있는데, 실제 영화는 그렇지 않나보군요.

yamoo 2011-11-15 20:48   좋아요 0 | URL
실제 영화는 그림이 엉망입니다. 아마 소이진님이 보셔도 중간에 하품을 하면서 꺼버릴거에요~ ㅎㅎ

저도 이런 작품인지는 몰랐습니다. 명성에 비해서 완전 형편없더라구요~
린타로 감독 작품이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완전 배신~ㅎ

프레이야 2012-11-14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각 차이 일까요? 전 개인적으로 괜찮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어릴적 국내 비디오 더빙판을 먼저 보고 나이가 들어서 제대로 찾아도 봤습니다.
그 당시의 일본 애니의 퀄리티를 전반적으로 따지자면 그림체나 그런게 맘에 안들수도 있겠지만 작품의 성격을 잘 나타 냈다고 보고 그리 떨어진다고는 생각해본적이 없는데..
1983년 제작 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림체나 기법 내용등 상당한 수작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그 이후 지금까지 애니를 봐 온 분들의 시각에서는 말로 표현 못할 조잡함이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제작 년도를 생각해 보면 그 당시는 .. 만화라는 그런 개념보단 영화같은..그런 느낌이랄까요.. 개인 차이겠지만 평에 휩쓸리기 보단 관심이 있으면 개인적으로 보고 판단하는게 좋을꺼같네요.
(개인적으론 극장판 이기에 내용전개나 구성들이 미흡한게 많기도 합니다 , 제한된 시간에 다 담으려니..무리..그 당시에는 또 그걸 표현할 기술도 미흡했고..설정은 좋았는데...지금 보면 많이 아쉽기는 한 작품이네요..그 당시에는 굉장했다고 생각합니다)

yamoo 2013-07-28 12:09   좋아요 0 | URL
흠, 그런 점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작품이 나오기 전에 은하철도999 극장판은 79년에 개봉됐지만 작품의 퀄러티는 환마대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극장판 캡틴하록도 마찬가지구요. 그래서 명성에 비해 망한 작품이라 생각해서 쓴 글입니다^^

메가맥 2013-03-09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역시 고전을 지금의 관점에서 보고 평가하는 것은 맞지 않는것 같습니다.
환마대전이 만들어졌던 시절 일본의 애니 수준은 데즈카 오사무 망하고, 도에이가 찍어내던 만화원작 저예산 애니들만 판치던 시절이죠. 그 시절에 저런 작품 나온것은 분명 대단한 것이고, 거기에 자극을 받아서 이후 양질의 극장 애니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전기가 되었던 거죠.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지금 다시 보면 어떨지 모르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 국내 출시판 '정의의 로봇 베가'로 감상했을 당시의 흥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yamoo 2013-07-28 12:17   좋아요 0 | URL
지금의 관점에서도 충분히 평가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의 작품들이 비교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작화, 스토리, 사운드, 음악 등..
79년 극장판 은철 생각해 보세요. 은철 극장판의 성공으로 극장판 애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환마대전은 그런 트렌드 속에서 제작된 작품이죠. 저는 이 작품 전에 퀄러티 뛰어난 몇 편의 작품이 있었는데, 그보다 화려한 스텝으로 떨어지는 작품을 내놓은게 의아해서 쓴 글입니다~

다그온 2013-04-15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쎄요...제작시점을 감안하셔야죠...

저 만화는 이른바 현대 에니메이션에 있어서 제대로 된 작품이라는 말이 붙을정도의

작품이 된 시발점입니다..(그전까지 애니메이션은 그냥 애들 만화취급이었습니다.)

83년 당시를 감안하셔야죠..

yamoo 2013-07-28 12:19   좋아요 0 | URL
하하~ 1979년 은철 극장판은요? 82년 작인 극장판 캡틴 하록은요?? 제작시점을 감안해도 이 작품은 졸작입니다~

그리고 현대 아니메 극장판의 시조는 은하철도999 극장판입니다.

손지상 2014-07-03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나가다 덧붙입니다만, 저는 원작소설을 쓴 히라이 카즈마사의 팬입니다. 작가 본인도 혹평했습니다. 아니, 화를 많이 냈습니다. 특히 오오토모 카츠하로가 디자인한 무기질적인 캐릭터는 본인의 작풍인 파토스가 가득담긴 굴절된 것과 정 반대였다고. 플롯의 문제는 저도 느끼고 있는데, 사실 이는 원작 소설의 문제기도 합니다.

린타로 2017-01-28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지나가다 남깁니다.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에 대한 변명을 좀 하자면, 이 작품은 스토리나 주제의식, 메시지로 평가하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니의 미적 표현 기법, 시각적인 부분을 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또한 세기말적 분위기나 이런 것들이 주가 되는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 시대에 보면 그런 기법들도 진부해 보일 수 있겠으나 은하철도 999나 캡틴 하록에서도 이런 기법들이 선보이진 않았죠.

나발 2018-05-17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저주받은 걸작이라니요. 이작품은 83년도 당시에 센세이션적인 반향을 이끌어낸 성공작입니다. 저주받은 걸작은 완성도에 비해 성공을 못했을때나 하는 말이지요. 본작의 흥행으로 인해 비슷한 플롯의 아류작들이 쏟아지기도 했고 두시간 러닝타임 극장판 애니의 제작이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개인적인 취향과 지식으로만 83년도 애니를 평가하신것 같네요.

나발 2018-05-17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주받은 걸작에 부합돼는 애니는 이후에 환마대전으로 이름을 알린 오토모 카츠히로가 환마대전을 만들 당시의 테이스트를 매니아적 시각에서 극대화한 아키라에서나 쓰일 법한 얘기지요. 아키라는 비주얼적인 면에서 예술성을 평가받았지만 지나치게 난해하고 매니아적 취향으로 애니 자체의 흥행에는 실패했습니다.
 
완득이 - Punch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그러니까 10월 14일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친구가 시사회에 당첨이 돼서 보기 싫다는 나를 억지로 불러냈습니다. 내키지 않았지만 꽁짜표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러 갔지요. 

책은 이미 재미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지만 볼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영화 포스터도 디게 재미 없을 것 같은 포쓰가 마구 발산되는 것 같아, 그냥 어떤 내용인지 확인만 할 요량이었습니다. 

하지만, 보기 시작하자 영화의 재미에 금새 빠져들었습니다. 저예산 영화라는 티가 팍팍 났지만, 재미 면에서는 역대 성공한 한국 영화에 전혀 뒤지지 않았습니다. 5분마다 한 번씩 폭소를 터뜨렸던 것 같습니다. 

동주 선생을 열연한 김윤석 씨와 도완득 역을 훌륭히 소화한 유아인 군의 연기가 발군이었습니다. 특히 김윤석 씨는 이 영화에서 처음 봤는데, 연기 내공이 장난이 아니더군요. 이 영화가 성공한다면(아마도 성공하리라고 확신합니다만) 이 두 배우의 탁월한 연기력 때문일 것입니다. 

이끼에서 이미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 김상호 씨의 옆집 아저씨 역은 정말 많은 웃음을 선사해 줬습니다. 조연 이었지만 옆집 아저씨 캐릭터가 없었다면 그 많은 웃음의 미학은 반감됐을 겁니다. 

영화를 보고 나니, 문득 완득이에게 호를 붙여주고 싶더군요. 영화 속에서 완득이는 이름 앞에 붙는 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유명한 사람 이름 앞에 남들이 불러주는 호. 완득이는 동주 선생으로 인해 그 염원하는 호를 저도 모르게 얻게 됩니다. 다름 아닌, '얌마'라는 호이지요. 담임 선생인 동주선생은 완득이를 그냥 이름대로 부르지 않습니다. 항상 '얌마, 도완득~!'하고 부르죠. 언제나, 항상 그렇게 부릅니다. 그래서 도완득의 호는 '얌마'입니다..ㅎㅎ 

한편, 이 영화는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웃기는 영화이긴 합니다만, 내용 자체는 만만치 않습니다. 이 영화는 주로 소외된 사람들의 일상을 들추고 있습니다.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를 조심스럽게 비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시종일관 유머와 따뜻함을 잃지 않습니다. 

영화는 보기드물게 재미와 감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데 성공합니다. 왜냐하면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내내 웃었지만 완득이가 자신의 필리핀 어머니를 만나 구두를 사주면서 '엄마'라고 부르는 대목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으니까요. 완득이의 어머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실상을 대변하는 것 같아 보는 내내 마음이 싸~했습니다. 

영화가 해피 엔딩으로 끝나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왔던 기억이 엊그제 같습니다. 마지막 완득이의 웃는 모습이 어찌나 밝고 깨끗한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

어찌나 재밌에 이 영화를 봤는지, 시사회 당첨된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거, 참 재밌네~ 진짜~ 재밌네'라는 말을 지하철을 타고 오는 내내 했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에게 초강추 하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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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0-23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엉, 저는 영화본지 너무 오래되었는데
이렇게 마구 유혹의 메시지를 날리는 리뷰라니! 그런데
김윤석 씨의 연기를 처음 보셨단 말이예요? 으아, 야무님두 영화랑 담 쌓고 사셨군요. ^^

완득이 무척 좋은가봐요, 아직 책도 못 읽었는데...... ㅠㅠ

yamoo 2011-10-24 00:13   좋아요 0 | URL
네~ 김윤석 씨 첨 봤어요..ㅎㅎ 한국영화하고 그리 친하지가 않아서여..^^;;
좀 친해지려고 요즘 열심히 보고 있습니다..

완득이, 완전 재밌습니다. 책 읽은 친구가 책보다 훨씬 낫다고 해요. 책 안 보고 보는 것이 더 좋을 거 같다는...이거 꼭 보시길 권해드려욤!

가연 2011-11-03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좋은가봐요, 저도 볼까 생각중인데.

yamoo 2011-11-04 01:24   좋아요 0 | URL
완전 재밌어요! 전, 안보려고 했었다니깐여!ㅎ 보고나서 이 영화 광고인이 됐다는..ㅋㅋ 가연님에게두 강추~~^^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 - 개정판
이재정 외 지음 / 예경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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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계열의 책들을 읽다가 보면 의외로 숨겨진 일급 비서(秘書)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린다. 도널드 노만의 <디자인과 인간심리>, 커트 행크스외 2인 공저 <재미있는 디자인 여행> 그리고 루이스 멈포드의 <역사 속의 도시>와 같은 책들을 보면 디자인을 넘어 ‘인간’에 대한 어떤 통찰 같은 것을 던져 준다. 생각의 폭을 넓혀 주며 전혀 다른 학문들을 이어주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고 할까.

그래서 디자인과 패션에 관한 책들은 즐겨 찾게 되며, 이 분야의 책들은 항상 읽는 즐거움과 보는 즐거움을 동시에 충족시켜 준다. 거기다가 편견과 고정관념까지 깨주니,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최근 우연히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 하나가 이런 유익함을 듬뿍 얻어 주었다. 바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예경, 2004)이다. 어찌 보면 딱딱하고 멋대가리 없는 책인 듯 보일 수 있다. 나도 디자인 코너에서 책을 빼어들고 첫 장을 열어보기 전에는 교과서 느낌이 물신 풍겼으니까.

하지만 몇 장을 넘겨보니, 트렌드를 대표하는 사진에 눈이 즐거워졌다. 책을 뺀 곳에서 순식간에 40여 페이지를 읽었다. 서서 읽을 책이 아니었다. 대출하여 황급히 집으로 가져와 단숨에 읽어버렸다.

이 책은 실로 유익하다. 타이틀이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이지만, 이 책의 본질은 ‘트렌드 개념어 사전’쯤 된다. (책의 부제가 ‘패션 디자이너를 위한 트렌드 키워드 130’이다.) 그래도 개념 자체가 인문 사회학에서도 두루 통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에 ‘트레드 개념어 소사전’이라 불러도 무방하겠다.

공저자인 이재정과 박은경 씨는 모두 미국 뉴욕 주립대 F.I.T에서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들이다. 이 씨는 현재 국민대 의상디자인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박 씨는 패션 컨설턴트로 활동 중이다. 패션계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 이러한 책을 출간한 이유가 머리말에 제시되어 있다.   


두뇌한국 21 정책 지원을 받아 출범한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 대학원 패션디자인 랩실에서는 독자적인 프로젝트로 라이프스타일을 연구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국내외 시장을 조사한 것은 물론이고 해외 현장과 서점에 나와 있는 방대한 자료도 접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러한 정보를 집대성한 책이 있어서 디자이너가 참고하며 영감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국내외의 자료를 수집, 요약, 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수백 개의 주제어 중에서 효용성을 고려해 다시 130개 주제어를 추출하여 정리한 것이 이 책이다. (p8)

   

디자이너들에게 필요한 책으로 집필되었지만 일반인들이 보아도 쉽게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소사전’이다. 예컨대 패션 잡지나 기사를 보다보면 생소한 개념어들이 부지기수로 등장한다. 아르데코, 옵아트, 레트로, 그런지 등이 바로 그러 단어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 패션과 디자인에 관련된 최근 기사를 옮겨 본다.


세련된 패셔니스타들은 베이지 톤의 트렌치코트와 함께 브라운과 베이지컬러가 매치된 머플러로 포인트를 준다. 좀 더 모던한 느낌을 주려면 내추럴한 캐주얼룩에 브라운 컬러 슈즈로 표인트를 주어   OSEN,  2011.10.14

베이직하우스의 조홍준 마케팅 팀장은 “올 가을은 ‘레트로 클래식’의 영향으로 그런지룩의 대표적인 아이템인 필드점퍼와 복고적인 감성이 살아있는 체크셔츠가 빼놓을 수 없는 패션아이템이다”  2011.8.30 [아주경제] 패션 면

북유럽의 자연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표현했다. 다양한 재단을 통해 의외의 즐거움을 주면서도 기능성을 놓치지 않은 그의 컬렉션은 실용적인 미니멀리즘을 보여주었다. [패션저널] 2011.10.13

지난 9월말 국내에 발매된 잼박스는 최첨단 스피커이다. (중간 생략) 스테인리스스틸의 기본 구조에 고무 케이싱, 사면 전체가 하나의 그릴형으로 이루어진 잼박스는 미니멀리즘 미학을 추구하면서 내구성까지 확보했다.  [IT/디지털 미디어 케이벤치] 11.10.18

  

 

 외국어가 한국어 문법을 무시한 채 무지막지하게 나열된 기사이다. 패션계의 언어는 이렇다. 뭐, 모두가 패션잡지에서 많이들 보아 온 익숙한 기사이니 외국어 남용 문제는 제쳐 놓고 기사에 묻혀 있는 개념어들을 놓치지 말자.  

 

‘모던(모더니즘)’과 ‘캐주얼’ 그리고 ‘그런지’와 ‘미니멀리즘’ 등의 개념들은 익숙하지만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한 단어들이다. 이 책은 이러한 궁금증을 시원하게 해결해 준다. 의미와 기원 그리고 문화현상으로서의 해석이 사진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의 일부만 발췌해 본다.

 

모더니즘 ; modemism 
  Key Words ; Form follows Function, Bauhaus, Futurism, De Stijl 
  P(인물) ; Thomas Elyot
-보편적으로 모더니즘은 근래의 스타일, 취향, 태도, 표현을 일컬음.
-넓은 의미의 모더니즘은 르네상스 이후에 생겨난 개념으로 보편적인 근대적 감각을 나타내는 문화, 예술의 여러 경향을 일컬으며 19세기 예술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주의에 대한 반항이자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일어난 아방가르드 운동의 한 형태임
-순수한 미를 표현하고자 단순성을 추구하며 기능적 구조를 위해 장식을 제거하고 비례와 리듬감을 살려 디자인을 재구성하며 새로운 소재와 기술을 사용함. (p48)

미니멀리즘 ; minimalism 
  Key Words ; ABC Art, Primary Structures, Specific objects, 3S(small, slim, simpl) 
  P(인물) ; Kasimir Malvich, Frank Stella, Josef Albers, Prada 
  Color ; 오렌지바미리온, 팔 그레이, 알루미늄 그레이, 슬레이트 그레이, 담수색, 퍼머넌트 그린, 커피 브라운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젊은 작가들이 최소한의 예술을 뜻하며, 미학적인 범위에서 극도로 단순화하는 것이 특징임.
-미니멀리즘은 주관적이며 풍부한 디자이너의 감성을 고의로 억제하며 디자인에서 최소하의 장식을 통해 미감을 최소한으로 줄여 나타내려는 것으로 그 시각적인 특성은 화려한 색상을 절제하여 대개 검은색이거나 단색, 때때로 금은색을 사용함. 미니멀 디자인들은 그 절제된 단아함 속에서 더욱 세련된 면모를 보임. (p50)

레트로 ; retro 
  Key Words ; Classic tradition, Historicim, Rvivalism, remake image 
  Color ; 프렌치 그레이, 와인, 핑크, 밝은 청자색, 다크 브라운, 베이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담은 복고적 분위기와 가상을 의미함. 또한 상징적인 복고적 표현 또는 과거 스타일에 대한 새로운 분석에서 비롯된 감성적 표현임.
-방법론적 고찰에서의 가치보다는 ‘시대적 이념 혹은 이상의 계승’이라는 측면이 강하며 레트로의 표현은 고대부터 1980년대 풍의 이미지까지 다양하나 주로 가까운 과거인 20세기에 대한 복고적 경향을 일컬음. (p126)  


그런지 : Grunge
  Key Words ; Ecology, bricolage, layering&shabby, recycle fashion 
  P ; Pearl Jam, Nirvana 
  Color ; 프렌치 그레이, 올리브 그린, 와인, 다크 블루, 베이지, 라이트 브라운
-그런지라는 용어는 1980년대 말 미국의 시애틀 지역에서 최초로 발전한 그런지 록(Grunge Rock)에서 출발하였으며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대중적인 면모를 갖춘 얼터너티브 음악이자 문화를 일컬음.
-80년대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되었고 근원은 도시적인 보헤미아니즘에 있음. 실용적인 가치관이 낳은 이 문화는 히피에서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젊은이들의 염세주의와 불안을 잘 표현한 거칠고 분노에 찬 감정적인 노래처럼 현실에 대해 냉소적임.
-특별한 형식  없이 아무렇게나 입거나 혹은 여러 가지 스타일을 섞거나 반대되는 소재를 사용하여 다양함을 표현함. 또는 중고 의류를 재활용한 에콜로지의 표현이나 색상에 서로 반대되는 것을 혼합하여 세련된 스타일을 연출하기도 함. (p 230)   

 

 (왼쪽부터 미니멀리즘, 레트로, 그런지를 보여주는 이미지 컷들. 책의 왼쪽 면에는 개념 설명을 그리고 오른쪽 면에는 해당 주제어를 잘 보여주는 이런 이미지 컷들로 구성됨)

 

 위에서 살펴보았다시피 이 책은 다양한 문화 현상에 주목하여 디자인 소스를 찾아내고 정리한 사전이다. 사회, 문화, 예술 일반에 드러난 130가지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였으며,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도록 풍부한 사진자료를 곁들인 게 최대 장점이다. 핵심 개념어 설명도 기원과 함께 응용 분야를 명시하여 간결하게 정리해 주고 있다.

 특히 각 주제어를 대표하는 컬러, 키워드, 중요 인물, 영화 등이 함께 제시되어 있어, 디자인과 문화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이점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이 책만의 미덕이다. 디자인과 문화에 관심이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인문학적 사고를 넓히고자 하는 분들에게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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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6 14: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yamoo 2011-11-16 15:08   좋아요 0 | URL
늘 아껴 읽는지 아닌지는 저로서는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구여~~ㅋㅋ
저는 좋은 리뷰를 쓰는 인간이 절대 아니랍니다~~ㅎㅎ

2011-11-16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 - The Unforgive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지난 주 일요일. 2005년 부산영화제에서 PSB관객상을 비롯 4개 부분의 상을 휩쓴 그 명성도 자자한 <용서받지 못한 자>를 드디어 봤다. 감독의 졸업 작품이라는 점도 이색적이었지만 작품이 얼마나 대단했기에 이듬해 2곳의 국제영화제에 초청될 정도인지 자못 궁금했다.

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영화 속 주인공 승영(서장원)이 자대배치를 받아 친구인 병장 태정(하정우)을 만나는 장면에서 부터 몰입하기 시작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화면만 쳐다보았다.

그리고 영화를 본 이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절대 잊을 수 없었던 군 생활의 안 좋은 기억들이 영상처럼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충격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감독이 미시적인 군대문화와 그 속에서의 인간관계를 어찌도 그리 섬세하게 파헤쳤는지 놀라웠다.

이 영화에 바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영화 속 인물 승영 때문이다. 그가 자대배치 받아 신병 생활을 하는 초반에 보인 행동과 말은 내가 군 생활 하는 내내 가졌던 생각과 꼭 같았다.


승영은 막내의 성기를 만지며 장난을 치는 고참에게 단호히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개념 없는 이등병이다. "왜 쓰레빠를 후임병이 갖다줘야해? 자기가 꺼내 신으면 되잖아." "그런 게 다 폭력이야." 그리고 항상 말한다. "내가 바꿀 거야."

이렇게 승영은 군 문화의 폭력성에 저항하고 이런 잘못된 폐단을 자기가 바꾸겠다고 결심한다. 나 또한 그랬으니, 나의 군 생활을 다시 보는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갈굼 당하는 이등병은 누구나 승영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이후 극의 전개는 서서히 바뀌어 가는 승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등병 시절 처음 가졌던 승영의 결심은 점점 무디어져 간다. 승영의 보호막이었던 병장 태정은 승영 때문에 심한 갈굼을 당하자, 부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승영에게 폭력을 가하게 된다.

"이승영, 대가리 박아. 그리고 너네, 이 새끼한테 잘해 주지 마."

이 사건을 기점으로, 승영은 군대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어 간다. 고참들에게 갈굼 당하지 않고 인정받는다는 것은 자기도 폭력에 익숙해진다는 의미이다. 승영은 자신의 후임병인 지훈에 대한 태도도 달라진다. 처음에는 잘해 주었지만 고참들의 압박이 심해지자 편한 군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지훈을 갈구기 시작한다. (이건 제대한 대한민국 남자이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승영의 폭력은 결국 지훈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여자 친구와 헤어져 힘들어하던 지훈은 어느 날, 승영에게 심한 갈굼과 함께 구타를 당하게 된다.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공황상태에 빠진 지훈은 결국 전투화 끈으로 목을 매어 자살한다.

이 충격적인 사건 이후, 승영은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이미 제대한 친구 태정에게 용서를 받고 싶어 한다. 휴가를 이용해 둘은 만나지만 태정은 승영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고, 승영은 끝내 지훈 죽음의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 결국 죄책감에 의해 갈등하다가 승영도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내가 본 이 영화는 리얼리티가 돋보이는 단순한 군대 영화가 아니었다. 이 영화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군대 문화의 폭력성과 인권 유린에 대한 고발이다. 군대 문화의 인권 유린과 폭력성은 매년 끊임없이 재생산 되고 있다. 이 영화가 2005년에 나온 이후 지금까지 승영과 지훈과 같은 병사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지난 여름 해병대 2사단 A 모 이병의 자살 소식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다. 해병대 총기 난사 사건으로 묻힐 뻔한 사건이 참으로 우연히 공개된 것이다. 그리고 어제 광주의 모 부대에서 선임병의 가혹행위로 인해 김 모 이병이 군화줄로 목을 매 자살했다는 소식이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리고 오늘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이름 모를 병사가 조용히 자살로 삶을 마감할 것이다. 군대 내의 폭력과 구타로 인해.

이 영화의 고발성은 실로 가공할만하다. 승영과 지훈은 이름 없고 얼굴 없이 죽어간 자살자들의 생생한 증언이다. 현실에서 수많은 병사가 자살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영화를 보면 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자살자의 자살 매커니즘을 명백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자, 이쯤해서 현재 진행형인 대한민국 군대의 인권유린과 폭력성이라는 사실을 거들 떠 보기라도 하자.

• “말한다고 맞고, 말 안한다고 맞고…” 육군 이병 “선임병 괴롭힘 못견뎌” 외박 나와 자살  [2011.10.18 YTN]

• 식칼로 부하 얼굴 면도질...군 간부 가혹행위, 올해만 35명. 강제로 담배 씹어 먹게한 중사, 비누·음식 찌꺼기 먹인 간부도 있어  [2011.09.29 오마이뉴스]

• 軍내 성범죄 심각. 매주 1건 꼴 발생  [2011.07.24 연합뉴스]

 


군대에서 인권 유린을 당하면 하소연 할 때가 한 군데도 없다. (폭력적인 군대문화로 인해 금새 은폐되고 하소연 한 자만 매장된다) 자살만이 병사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는 유일한 수단이다. 그 이외에는 어떠한 탈출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부를 비롯해 정부와 법원은 이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다.

병영 내에서 병사들의 인권을 유린하는 실체는 국가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선임병과 후임병 사이에 행해지는 제도적 악습이다. 이러한 인권 유린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해마다 70명 이상에 이른다니,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통계수치가 아닐까? 단지 몇 달 먼저 입대했다고, 폭력을 정당화 하는 군대는 비민주적 군대의 전형이다. 군대의 시간은 1960년대에 멈춰있는 가 보다.

하지만 매우 슬프게도 우리 군의 시간은 멈춰있기는 커녕 거꾸로 가고 있다. 지난 여름 해병대 총기 난사 사건 보도가 한창 일 때 한 신문의 논설위원은 1962년 최영오 일병 사건을 들춰내는 칼럼을 썼다. 다음은 그 칼럼의 일부이다.


강화도 해병 부대의 총기 난사를 보며 낡은 신문 속의 ‘최영오 일병 사건’을 떠올렸다. 1962년 7월 8일 오전 8시의 일이다. 서울대 문리대 4학년을 다니다 입대한 최 일병은 고참 2명의 등을 향해 M1 소총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여자친구가 보내온 12통의 사랑 편지를 같은 내무반의 병장과 상병이 뜯어보고 희롱하자 대들었다. 고참들에게 거꾸로 흠씬 얻어맞은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한 채 총을 쏘고 자살을 기도했다. 군사법정에 끌려온 최 일병은 “두 사람을 살해한 순간 나 또한 죽은 지 이미 오래다. 다만 아무리 군대라 해도 인간 이하의 노리개처럼 갖고 노는 잔인함을 향해 총을 쏘았을 뿐”이라고 울부짖었다.

 수많은 서울대 학생들과 문인(文人)들이 구명운동에 나섰으나 소용없었다. 이듬해 3월 19일, 그는 서울 수색의 군 사격장에서 총살당했다. “나의 죽음으로 비인간적인 군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군대로 거듭나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남편과 사별한 뒤 20년간 혼자 그를 뒷바라지한 모친(당시 61세)이 한강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평소 자주 빨래하던 마포 강변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 안에는 “높으신 선생님들, 내가 영오 대신 가겠으니 제발 내 아들은 살려주십시오”라고 적힌 유서가 들어 있었다. 온 사회가 눈시울을 붉혔다.

 

온 사회가 눈시울을 붉혀도, 언론이 떠들고 시사고발 다큐가 사건을 파헤쳐도 전혀 변하지 않는 군대가 대한민국의 군대다. (우리는 이를 해병대 총기 난사 사건과 천안함 사건에서 이미 경험하고 있다)  영화에서 선임병의 폭력에 저항하던 승영에게 태정은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너가 틀린 건 아닌데, 그러면 너만 힘들어져.”

최 일병 사건 이후 50년이 지났지만 똑같은 사건을 거의 매주 마주하니, 슬픔을 넘어 분노하게 된다. 어째서 우리는 이런 똑같은 비극을 되풀이 하고 있는 걸까? “나의 죽음으로 비인간적인 군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군대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한 최일병의 유언을 우리는 어쩌자고 방치했는지 모르겠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죽음이 됐으니.

군의 폭력과 구타 그리고 인권유린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병사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영화 속의 승영과 지훈의 죽음이 오버랩되곤 한다. 그리고 태정이 승영에게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 말이 계속 귓가에 멤돈다.

“너가 틀린 건 아닌데, 그러면 너만 힘들어져.”

우리가 태정이 되어 우리 스스로에게 이 말을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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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20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한민국 군대를 나온 사람이라면 아마도 누구나 이 영화를 보면서 자신의 군대 시절을 떠올렸을 겁니다. 저도 그랬구요. 그리고 운좋게도 제대한 사람이라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겠지요.
yamoo님이 강조하신 말씀이 저도 마음에 걸리네요. 한국의 남자들은 이런 군대 문제에서만큼은 말씀하신 바대로 이중적이 되니까요. 분명 잘못된 부분을 인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그런 것이 어쩔 수 없다, 혹은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하니까요(그런 생각들이 사회에서까지 연결이 되구요).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 같은 것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태도만 보아도 어느정도는 알 수 있구요.
무엇을 바꾸어야만 바뀔까요? 혹은 무엇을 더 이야기하여야만 나아질까요?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마음이 복잡해지네요..^^;

yamoo 2011-10-20 23:18   좋아요 0 | URL
그렇죠. 이 영화를 보면 생각이 복잡해 지고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아마도 군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대한민국 예비역 남자들의 비애 같습니다~^^;

근데, 맥거핀님두 이 영화 보셨나요? 맥거핀님 영화리뷰에서 못 본거 같아서요..ㅎㅎ

노이에자이트 2011-10-22 16: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 환상도 없이 너무나 적나라한 영화라서 직시하기가 힘든 영화였습니다.이 영화는 대학에서 남녀학생들이 함께 보고 토론했으면 좋겠습니다.어떤 반응이 나올지...아마 여학생들은 주변의 남학생들에게 너도 저랬냐 하고 물어볼 것 같아요.

그런데 여학생들이 이 영화를 통해 군대의 실상을 아는 것에 대해 남자들이 찬성할지...그것도 궁금하네요.여자들은 이런 영화에 애초에 관심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yamoo 2011-10-22 19:59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이거 학교 수업시간에 함께 보며 토론 자료로 삼으면 금상첨화 겠어요^^

아마도 여학생들은 이런 영화에 관심이 별로 없을거 같긴 하네요. 군대갈 쯔음의 동생을 두거나 막 갔다가 온 동생을 둔 여자분이 아니면 많은 관심을 받긴 힘든 영화라고 생각이 들긴합니다만..그래두, 하정우가 나오는데..헤~

릴케 현상 2011-11-1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전 개봉관에서 봤어요. 꽤 세월이 지났군요. 그무렵 동호회 사람들이랑 봤는데 남자들은 숙연해져서 나오고 단 한 명이던 여자는 지루해서 혼났다고 하면서 우리더러 뭔 내용이냐고 하더군요. 사실 영화애호가라 할 만한 사람은 그날 그분이 유일한 모임이었는데도 그날은 그렇더군요.

yamoo 2011-11-20 10:0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꾸벅~^^
그쵸, 이 영화 개봉한 날짜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났어요~
당시 상황이 그려져서, 웃음이 납니다..ㅋㅋ 하기사, 여자분들은 지루하겠지요..ㅎㅎ 영화애호가 한 사람의 지루함이라..ㅎㅎ 남녀의 반응이 극과 극인 영화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