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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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들어가며]  반성적 사고로서의 본다는 것 

책의 내용을 간단히 하면 다음과 같이 도식화 시켜 볼 수 있다.

도시에 사는 정상적인 사람들 ----> 차츰 눈이 멀어서 수용되는 공간 ----> 백색의 질병의 전 도시로의 확산 ----> 회복; 의사의 집

책은 반성적 사고로서의 본다는 것을 가르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성철스님이 해탈하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데카르트와 같은 철학자도 생각하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을 빼고는 전부 회의를 해보고 나서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양을 시작하면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든다고 한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기존에 있던 것들이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다. 산은 산이 아닌거 같고 물도 물이 아닌 거 같다. 그러다가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사물의 본질을 보게 된다. 깨달음을 통해 보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은 깨닫기 전에 보통 사람이 보는 산과 물과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승화된다. 매일 보던 산이 바로 거기에 있다는 자체만으로 고맙고 즐거운 것, 자연속에서 모든 이를 이롭게 하는 그 자체로서의 산. 물은 거기 있어야 모든 것을 이롭게 하고 자연스러운 그 자체로서의 물. 결국 성철 스님이 한 말은 반성적 사고로서의 사물의 본질을 봐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눈이 있어도 이런 것을 볼 수 없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지만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는 우리들은 눈먼 사람들과 하등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여기 한 편의 멋진 허구가 이 반성적 사고를 가르쳐 주고 있다. 책을 덮고서 무수한 논의들과 상념들이 교차한다. 책 한 권에 이리도 심오한 생각들을 담을 수 있다니...사라마구라는 작가의 역량에 놀라고 말았다.

2. 인식의 근본으로서의 본다는 것

책을 본다. 그리고 이해한다. 지식을 축적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문명을 건설한다. 인간은 보는 것으로부터 일차적으로 배운다. 전통적인 인식론의 관점으로부터도 우리는 보는 것으로부터 대상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인식하는 것이 진실은 아니다. 백미러로 뒤에 있는 차를 보면 현실보다 가깝게 보인다. 물 속에 담겨져 있는 젓가락은 휘어져 보인다. 직사각형의 책상은 보는 각도에 따라서 평행사변형으로 보였다가 사다리꼴로도 보인다. 눈에 의한 착시 현상은 얼마나 많은지 셀 수조차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여지는 것이 진리인양 믿으며 살고 있다. 오히려 눈 먼 장님이 나을 수 있다. 적어도 왜곡된 현실의 모습은 보지 않으니..

사라마구는 눈을 멀게 함으로써 인식의 근본에 도달하는 바른 눈을 가질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바로 보고 올바로 생각하라고..

3. 인간의 조건으로서의 눈

눈이 먼다. 모든 인간의 기능 중에서 눈만이 제기능을 하지 못할 때 인간은 어찌되는가?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서 그것이 엄청난 착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오직 눈만이 제 기능을 잃어버렸을 때 모든 인간은 동물보다 못한 존재로 떨어지고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순식간에 지옥의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린다. 생각해보라. 단지 눈만이 제 기능을 못할 뿐이다! 눈에 뵈는 게 없으면 막 살아가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것이 현실처럼 구현된다고 생각해보라! 인간의 존엄성 운운하기가 우스워진다. 눈이먼 그들은 이전에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던 인간이 아니었다. 생리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언제든지 버릴 수 있을 때, 이 땅에서 지옥은 구현된다.

4. 눈에 의존하는 인간의 문명-가치의 역설

사실 인간의 문화와 문명은 거의 눈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다. 멋진 디자인, 공간을 활용하기 위한 건축양식, 보기 좋은 모양을 낸 음식, 책, 여행, 도시, 영화, 그림, 절경 등 모든 게 눈에 의존하는 것들이다. 보는 것이 즐거운 모든 것들이 문화와 문명과 관련된다. ‘아름답다’라고 평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눈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사실에 흠칫 놀라게 된다. 바로 눈이 멀면 이 모든 것들이 가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가치를 평가하는 일도 거기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무가치하게 된다. 솔직히 이런 것들은 없어도 되는 것들이다.

 가치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다. 경제학의 빌어먹을 개념이다. 생활에 전혀 필요하지 않은 다이아몬드나 명화의 가격이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물이나 공기보다 훨씬 비싼 이유는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압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희귀한게 비싼거라는 거. 눈이 멀면 가치있는 것은 가치없어지고 평소 무가치 한 것이 가치있는 것으로 탈바꿈한다. 가치의 역설이 바로 잡힌다고나 할까. 생존에 필요한 것일수록 귀중한 것이 된다. 먹고, 입고, 배설할 공간. 가장 기초적인 생리현상을 충족시키는 것이 가치의 최 일선에 선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최고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생존만을 위한 상황에서 걸리적 거리는 불편함으로 전락한다. 필요없다는 것이다.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켜야할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없게 된다. 당장 굶어 죽을 판국인데, 무슨 얼어죽을 인간의 존엄성 운운 한다는 말인가. 가치의 전복! 그러고보면 눈은 가장 일차적인 가치를 재는 척도인지도 모른다.

 특히나 인류 문명을 지탱해 주고 지속시켜 주었던 날짜와 시간이란 관념이 공허한 개념으로 날아가 버린다.  눈먼 자들에게 낮과 밤의 변화는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지금이 몇 시이고 몇 일인지 모른다. 살아가는 기준이 순식간에 없어져 버린 삶. 표준시를 알기 위해 그렇게도 노력했던 인간 역사의 모든 노력들이 한 순간에 하찮은 것으로 전락한다. 그들은 몇 시에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른다. 그리고 셀 수도 없으니 수의 과념도 없어진다. 눈먼 자들은 그런 불쌍한 존재이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도 없고 가치를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인간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무색할 정도이다.

5.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

우리는 너무도 불필요한 것에 집착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불필요한지 조차 모르며 살고 있다. 우리의 육체적인 기능이 하나씩 사라질 때 그것과 관계된 가치는 하나 씩 사라진다. 생존에 필요없는 것들을 우리는 너무도 가치있게 생각하고 거기에 매달려 살고 있다. 이 소설은 그런 것들이 무의미 함을 알려준다. 소유양식에서 존재양식으로의 삶의 변화를 가르친다고 할까. 눈이 멀면 우리가 그렇게도 가치있게 생각하던 상당수가 무용지물이 된다. 그런 것들은 생존에 아무 쓸모도 없고 삶을 연명하기 위한 어떤한 도움도 되지 않는다. 사회적 지위, 기능, 어떤 것도 필요 없게 된다.

6. 이 소설의 등장인물에 이름이 없는 이유

 이 소설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름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의사, 의사의 아내, 처음 눈이 먼 자, 그 사람의 아내, 검은 색안경을 낀 여자, 눈에 안대를 한 노인, 사팔뜨기 소년 등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왜그럴까? 그도그럴것이 눈이 멀면 이름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름은 사물에 붙여진 기호나 다름없다. 아무개를 확인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얼굴과 이름이 매치되어야 기억된다. 진달래를 진달래라고 하기위해서는 진달래라는 대상이 눈에 보여야 하고 그 대상에 진달래라는 기호가 일치해야만 우리는 안보고도 그것을 떠올릴 수 있다. 중요한 건 처음에 그 기호에 맞는 대상을 봐야한다는 거. 그렇지 않으면 매칭할 수 없고 진달래를 떠올릴 수가 없다. 눈이 멀어버린 상태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매칭시키기란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장님에게 최신의 가전제품을 설명해주는 것을 생각해보라. 그들에게 각각의 명칭은 아무 의미가 없다. 들을 수 없으면 사물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볼 수 없어도 그 대상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름은 숫자와 같은 기호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 행위를 가장 잘 나타내는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더군다나 모두가 눈이 먼 경우라면 더 말해서 뭘할까.

7. 눈이 멀어도 여전히 건재하는 것들

하지만 눈이 멀어도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있으니 언어와 권력이다. 권력은 인간이 인간이 아닌 존재로 전락해서도 여전히 그 파괴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었다. 권력이 있는 자가 여전히 생존할 확률이 높았다. 적자 생존에서 남을 딛고 살아갈 수 있는 힘. 권력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언어는 더욱 중요해 진다. 보이지 않는 불편함을 언어에 의해 그나마 해소할 수 있기에. 그나마 언어로 말할 수 있고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최소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의 마지노선을 지탱해 주고 있다.

8. 결론

이 소설의 백미는 모두가 눈이 먼 상태에서 단 한 사람만 볼 수 있다는 설정이다. 소설은 눈먼자들의 모든 행위를 의사의 아내 눈을 통해 고발한다. 때로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때로는 의사의 아내 눈으로. 인간 본성의 모든 추함과 악랄함과 더러움의 극치를 본 단 하나의 눈은 부끄러운 눈이다.

 부끄러운 눈은 반성적인 눈이다. 눈이 멀었다 다시 뜬 사람들은 결코 사물의 본질을 볼 수 없다. 눈 먼 사람들은 결코 인간 본성의 사악함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눈은 부끄러운 눈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라마구는 이 소설을 통해서 눈을 떠도 보지 못하는 인간들의 무리에 속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다. 눈을 뜨고 있으면 사물의 본질을 바로 보라고, 마음의 눈으로 인간을 바라보라고, 그러면 참 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충고한다.

 비트겐 슈타인은 '내 언어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우리에게 있어 내 눈은 내 세계의 한계이다. 우리들은 아는 만큼 보고, 본 만큼 안다. 하지만 사마라구는 그것을 뛰어 넘으라고 이 눈먼자들의 실험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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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을 위한 변론 - 세계 최고의 석학이 펼치는 공직에 대한 변론
찰스 T. 굿셀 지음, 황동원.박수영.김동원 옮김 / 올리브(M&B)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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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제는 사회학과 경영학 그리고 행정학의 주요 연구테마이다.

대학에서 관료제라는 수업을 들으면 관료제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병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무사안일, 복지부동, 훈련된 무능 등 관료제를 비판하는 어휘는 수십가지다. 현대사회에서 관료제는 병리적 진단을 받은지 오래다.

거기다가 정부가 더해진 정부관료제는 곧 부패와 동일시 되는 것까지 전락했다. 파킨슨의 법칙, 밀레의 법칙 등 정부관료제를 묘사하는 부정적인 법칙들이다.

한마디로 관료제는 사람을 무능하게 한다는 것. 생산적인 일을 하는 대신에 대부분의 시간을 관료제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불필요한 일을 한다는 것. 정작 해야할 일을 안하니 특권의식과 권위주의 의식이 생겨 시민과 유리된다는 게 현대 정부관료제를 보는 통설적인 시각이다.

헌데, 여기 겁대가리를 상실한 학자가 있다. 바로 찰스 굿셀이라는 버지니아 주립대 폴리테크닉  행정학과 교수가 그 장본인. 오래 전 그가 쓴 <공무원을 위한 변론>(올리브. 2006)이 2006년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 되먹지 않은 글을 쓰는 나도, 학부때 관료제 수업을 들으면서 도대체 관료제를 옹호하는 학자들의 정신구조가 무척 궁금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행정학과 사회학 교과서에서 이 책이 언급됐을 때 상당히 흥미가 갔다. 굿셀 교수의 책을 거들떠 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책을 구할 수 없었다.(비싼 돈 주고 원서를 구입할 수 없지 않은가? --;;) 그런데, 작년에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 것이다~

굿셀교수가 주장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다. 모든 사람들이 관료제를 비판하고 있는데, 진짜 소수의 사람들만이 관료제를 옹호하고 있다. 위르스톤 카우프만, 밀워드와 레이니 그리고 찰스 굿셀이 바로 그런 학자들이다. 굿셀이 조명받는 이유는 논문에서 끝나지 않고 책으로 공무원을 변호했기 때문이다.

좀 무모해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는 책의 1장 처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관료제를 변호하다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이 책의 저자는 분명 인간의 탈을 쓴 악마 대왕 루시퍼든지 아니면 정신 나간 사람이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오직 악마만이 악마를 변호하려고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하려고 하는 나의 성품과 정신상태에 관해 독자들이 가질지 모르는 이와 같은 의심이 사라지려면 이 책의 몇 페이지 정도는 넘겨야 할 것이다."

라고 우려섞인 푸념를 하고 있다. 그도그럴것이 우리나라에서 누가 이런 주장을 한다면 비판의 십자포화를 맞기 때문이다.

 

공직자는 시민의 삶을 조율하는 진정한 예술가다!
행정은 종합과학이며 예술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두 명제이다. 과연 그런가? 예술인지 쓰레기인지 어디 확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행정과 공직자가 모두 예술인지 노교수의 이 말도 안돼는 주장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몫일 것이다.

미국 최고 석학 중 한사람이 펼치는 독보적인 공직에 대한 변론을 거들떠 보는 것도 교양을 위해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쓴 찰스 T. 굿셀에 대해서...

칼라마주대학을 거쳐 하버드대학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마치고 버지니아 폴리테크닉 주립대학교와 푸에르토리코대학교, 남일리노이대학교에서 교수로 제직했다. 그는 행정학과 더불어 라틴아메리카 문제와 공공건축 등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잇으며 이 책 이외에 <미국의 주의회 의사당>, <예술에 조명받고 영감받는 행정>, <시민공간의 사회적 의미>, <공적인 만남>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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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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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자살 시도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 천재 작가”

“청춘의 한 시기에 통과 의례처럼 거친 뒤 잊히는 작가”

“일본 데카당스 문학의 대표작”

“오시모토 바나나,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존경하는 일본 작가”

“인간의 나약함을 드러내는 데 가장 뛰어난 작가”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얼마나 대단하기에 “우리를 위해 부(負)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라고까지 극찬할 수 있을까? 한없는 의구심에 휩싸여 그의 책을 읽어보기로 했다. 여러 저작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에곤 실레의 그림이 그려있는 민음사판 <인간 실격>을 골랐다.

한 번 읽었다. 불편했고, 주인공 요조가 보여주는 자기파멸적 삶에 나는 주저 없이 인간 실격 판정을 내렸다. 볼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불편한 뭔가가 켕긴다. 재독을 하고 삼독을 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어떤 실체를 갖고 다가오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위선이라는 가면을 쓴 다른 “인간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요조는 그 위선의 세계와 타협하기 위해 ‘익살’을 연기하지만 번번이 좌절하고 불안에 떤다. 어떻게든 부조리한 사회와 인간을 이해하려고 애쓰지만 믿었던 사람들에게 배반당하고, 결국 알코올에 중독되어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른다. 거듭된 동반 자살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요조는 마지막 희망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마음의 고향까지 잃어버린다. 정신병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외딴 시골집에서 쓸쓸히 죽음만을 기다리는 “인간 실격자”가 되고 만다.

<인간실격>은 작가 자신이 겪었던 충격적인 체험을 소설화한 작품이란다. 한 편으로는 자기 해명의 책으로도 불린다는데, 거듭 책을 읽은 지금 ‘나를 해명하는’ 책으로 다가왔다. 소리치지도 못하고 아파하는 내 순수가 요조라는 거울을 통해 여과 없이 비쳐지고 있었다. 불편했던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내가 내린 요조에 대한 가혹한 판단은 유보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요조를 실격에 이르게 했을까. 바로 우리들로 대변되는 넙치와 호리키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닐까. 우리가 요조를 보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와 다른 바보 같은 순수함의 원형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이 여인을 돌로 치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누가 요조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우리가 적어도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나약함을 극복하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요조에게 돌을 던질 수 있고 그의 삶이 인간 실격이라고 단호히 심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불안에 떠는 그 나약한 순수함 마저도 마주하길 꺼린다. 그래서 요조와 같은 사람을 보면 나약한 존재라고 서슴없이 비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가는 호리키와 넙치와 같은 인간들이기에.

가면으로 나약함을 가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내 순수함이 얼마만큼 상처를 받게 되는지는 모른다. 내 순수의 자아가 상처받아 너덜너덜 해질수록 내 가면은 더 두꺼워진다. 서로 두꺼워진 가면을 쓰고 아무 문제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살고 있는 세계가 바로 우리들의 세계일 것이다. 이 작품이 아직도 귀중한 보편적 가치를 갖고 계속 읽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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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 경제학 - 30대를 위한 생존 경제학 강의
유병률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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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는 20대에 배운 전문지식으로 세상에서 홀로 서는 시기라고 하네. 30대는 20대의 좌충우돌하는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세상을 진심으로 살아가는’ 인생의 전환점이란 말일세. 진정으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생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 그렇기에, 여기서 삐긋 했다가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네. 

생존을 위해 자립해야 하는 30대.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30대가 있다. 경제를 아는 30대와 경제를 모르는 30대” 그대는 어느 부류에 속해 있는가?

만약 그대가 경제를 모르는 30대의 부류에 속해 있다면 ‘30대를 위한 생존 경제학 강의’를 듣는 게 매우 이로울 것이라 생각되네. 왜냐하면 우리는 생존해야 하는 30대이기 때문이네. 내 여기 그 강의를 집약한 <서른살 경제학>(인물과 사상사. 2005)을 대략적으로 소개할 테니 얼른 경제를 아는 30대의 대열에 편승하여 나락으로 떨어지는 우를 범하지 말게나.

“경제학은 지식이 아닙니다. 사고하는 방식입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학창시절 수학공식만큼 무의미했던 경제학이 30대인 여러분의 가슴에 연애시처럼 꽂히게 될 것이라 감히 자신합니다.”

책의 머리말에 30대에 경제를 모르는 그대에게 날리는 말이네.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가? 걱정하지 마시게나 나도 이 책을 읽기 전 반신반의 했다네. ‘교양 경제학 책이 뭐, 다 뻔하지. 그래 속는 셈 치고 읽어주자. 얼마나 대단하기에 그리 잘난 척 하는 문구를 써놨는지 한 번 확인이나 해 보자’는 다소 냉소적인 생각으로 이 책을 펴들었다네.

그래서 어땠냐고? 한 마디로 충격적이었네. 경제학을 모르는 30대는 그야말로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음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네. 경제부 출신 기자답게 피부로 와 닿는 현실경제를 콕콕 집어서 얘기해 주니, 경제를 모르는 30대가 얼마나 위태위태한지 바로 알 수 있었다네.

책에 따르면, 경제학을 모르는 30대는 전략에 약하고, 경영을 알지 못하며 돈의 길을 보지 못한다네. 그뿐만이 아니네. 불황을 예측하지 못하고 고령화 시대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지도 파악하지 못한다고 하네. 더군다나 중국이 왜 겁이 없고, 미국이 왜 잘났는지 정확히 비판할 수도 없다네. 경제학을 모르거나 피상적으로 알면 이런 총체적 난국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는군.

음, 너무 막연한가? 내 여기 무시무시한 현실적인 예를 소개해 보겠네. 이 책의 4장은 우리나라 인구론에 대해서 다루고 있네. ‘인구론’하면 보통 인구조사를 떠올리거나 조금 유식한 사람이면 멜더스의 <인구론>을 떠올릴 것이네. 그렇지만 그리 큰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게 우리들의 사고 폭이라네. ‘그게 뭐~’라는 생각. 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네.

우리나라 인구론을 들여다보게 되면 우리나라가 점점 노령화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네. 일명 실버시대. 언론과 각종 매체에서 자주 접해 익숙한 용어가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갑갑하고 우울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는 게 실버시대의 실상이라네.

“고령화 시대는 저성장과 저소비의 시대이다. 노령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고부담의 시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중산층이 설자리를 잃게 되는 양극화의 시대이다. 상류층의 대열에 서든지, 서민층의 대열에 합류하든지 둘 중 하나로 분화하게 된다.” “고령화 시대에는 소비트렌드에도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평균은 도태하고 웰빙과 결합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주니어 시장은 바닥을 드러내고 시니어 시장은 대지처럼 열린다.”

위에서 보는 것처럼 미래는 결코 낭만적인 시대가 아님을 알 수 있다네. 내가 노인이 될 20년 후에는 고작 1.7명이 나를 벌어 먹인다는 암울한 상황. 한 창 일할 때 벌어놓지 않으면 노년에 고생길이 훤~함을 보여주고 있네. 참고로 2004년 현재는 10명이 한 명의 노인을 위해 일하고 있다네. 어째, 등골이 오싹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40세가 젊은이라는 소리를 듣는 시대가 도래 할 거라니,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네.

자, 어떻게 할 텐가. ‘아~ 난 아직 30대가 되려면 멀었다구요?’ 그래도 경제를 모르면 이 책을 봐야 한다네. 비록 책이 30대로 한정하여 기술하고 있지만 내용은 어떤 연령층이 읽어도 신상에 매우 이롭다네. 30대의 경제학을 모르는 그대. 무시무시한 시대가 도래한다는데, 아직도 경제학의 비타민을 안 드실려고 하는 그 고집은 대체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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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진실 - 갤브레이스에게 듣는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이해준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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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이라는 게 있다. 방송 3사에서 얼마 전에 신설한 뉴스프로그램으로 상당한 시청률을 자랑했다. 최근에는 케이블 텔레비전에도 비슷한 프로그램이 전파를 타고있다. 소비자 고발 프로그램을 보는 목적은 감추어진 사기행각을 들춰내서 소비자들에게 그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시청자는 자기가 어떻게 속았는지 그 프로그램을 통해 확실히 인지한다.

소비자가 사기 당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알든 모르든 제품에 대한 정보를 모르는 소비자는 당하게끔 돼 있는 것이 후기 자본주의 시대이다. 일명 정보의 비대칭성. 사는 사람은 어떤 게 좋은 제품인지 모른다. 아는 것은 광고뿐이 없는데, 그 광고가 허위광고이거나 과대 광고가 대부분이다. 빙과류와 라면 그리고 화장품과 건강식품이 그 대표적이다. 제품이 바뀌지 않았음에도 가격은 오르고 독이 들어있는 것을 미의 화신 운운하면서 화장품을 팔아먹고 싸구려 불량품을 건강식품으로 둔갑시켜 팔아먹고 있다.

 광고로 쉽게 소비자를 등쳐먹는 시대이다 보니 이런 것을 고발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했고 이런 고발프로그램은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다. 모르는 실상을 알게해 주니, 꽤 좋은 프로그램인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그 본질을 파헤쳐 자본주의 구조가 사기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물론 일부 경제학자 중에서 이런 면을 파헤치지 않은 학자는 없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분들도 자본주의의 사기 행각을 조심스럽게 진단한 분들도 있다.

경제학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면 이마트가 최저가격보상제를 시행한다고 할 때 '우리는 담합을 하고 있습니다'라는 이면의 본질을 파악하여 매우 불쾌했을 것이다. 최저가격보상제야 말로 우리사회에서 가장 뻔뻔하게 소비자를 우롱하는 조치였다. 소수의 사람들이 알고는 있었지만 이것을 대중에게 알리는데에는 미흡했다.

그런데, 여기 거시경제 구조를 움직이는 그런 사기행각을 고발한 석학의 유고가 있다. <갤브레이스에게 듣는 경제의 진실>이 바로 그것이다. 시니컬한 풍자와 신랄한 비판의 대명사로 불리는 경제학계의 전설 토스타인 베블런의 문체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만큼 비판의 수위는 상당하지만 재미있다. 그가 가고 없으니 신간을 읽는 재미는 이제 마지막이리라. (아마도 이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크루그만일 것이다.)

그의 주저에서도 그렇듯이 이 책에서도 신랄한 비판은 여전하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가 움직이는 본질을 사기로 보았다. 이 사기 행각이야 말로 미국 경제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경제 이면의 본질이라고 한다. 그가 보는 사기행각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미국보다 우리가 그 본질에 우선함을 알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더 사기 경제학의 첨단을 걷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어떻게 사기 행위가 무죄일 수 있는가? 어떻게 결백한 사기성이 짙을 수 있는가?" 하지만 갤브레이스는 이에 대한 대답이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왜냐하면 결백하고 적법한 사기행위가 사적이나 공적인 대화에 의심할바 없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이런 신념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는 이들은" 죄의식이나 책임감은 눈꼽만큼도 없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경제학적 매카니즘이 이 사기행위에 권위를 덧입혀 주기 때문이다.

갤브레이스는 자본주의에 가려진 사기행각을 추적한다. 우선 용어부터가 사기라고 한다. 품위를 떨어뜨리는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버리고나서 쓸만한 타당한 명칭을 발견했는데 그게 바로 '기업경영'과 '시장체제'라는 온화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이 용어의 혼상은 이 시대에 가장 교모한 것이고 최근에 와서는 가장 명백한 사기 행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이 용어로부터 시작해서 갤브레이스는 사기의 행각을 차례로 들춰내 보인다.

"경제적 민주주의는 교과서에서조차 계속 유지되기 어려울 정도로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했다."(26)

"소비자의 선택은 수요곡선에 맞춰진다. 투표 제도 덕분에 시민이 권력을 갖게 된 것처럼, 경제생활에서는 수요곡선이 소비자에게 권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사기성이 농후하다. 투표와 구매행위 모두 돈으로 대중을 조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광고와 마케팅의 세계에서는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이는 대학 교육에서도 용인하는 사기행위다."(33)

"GDP의 규모와 구성 그리고 명성에서 우리 사회에 가장 널리 퍼진 사기의 한 형태가 발견된다. 즉 GDP의 구성은 일반 국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요소를 생산하는 이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이다."(36)

"일이라는 단어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을 묘사하는 경우에도, 그리고 스스로 열렬히 추구하고 그 자체를 만끽하며 충분한 명성과 급료를 받는 일을 묘사하는 경우에도 공통적으로 쓰이는 단어다. 두 개의 다른 상황에 대해 같은 단어를사용하는 데서 이미 사기 행위가 분명히 드러나는 셈이다."(41)

"소규모 기업들, 특히 가족농업 형태로 남아 있는 기업들은 지난 몇 백년간 교과서에 고전적으로 묘사된 경제체제 그 자체인데, 이것은 현대세계가 아니다. 이 모든 체제에 가격과 비용의 압력이 반복해서 가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소규모 기업과 가족 농업을 정치, 사회적으로 계속 찬양하는 것 또한 사기 행위다.(50)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이 하나로 합쳐졌다는 더욱 극적인 증거를 더이상 물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 됐다. 기업들은 이제 물류 지원에서 전투 훈련까지 현역 군인들을 위해 모든 부문을 지원하고 있다. 다른 기업들은 군복을 입고 신병모집관으로 활동하면서 차세대군인들을 선발하고 훈련 시키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게 바로 현실이고, 평화의 때와 마찬가지로 전시에도 민간부문이 공공부문의 역할을 한다."(64-65)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이 나뉘어져 있다고 더이상 사기치지 말라는 것이다.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의 그럴싸한 차이가 허위라는 점이 닷 밝혀진 셈이다. 바로 여기서 유리한 계약을 따냄으로써 이득을 보는 기업 세력의 존재가 분명히 입증되는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경고한 군산복합체가 바로 그것이다."(91)

"가장 널리 알려진 사기의 세계는 바로 금융계로서, 사기 행위는 명백하지만 대체로 무시되고 있는 현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미래경기와 경기변동의 추이는 예측과 추측이 난무하지만 어느 누구도 확실한 것을 모른다. 모든 예측은 정부의 불확실한 움직임, 기업과 개인의 알 수 없는 행동, 그리고 더 큰 맥락에서 전쟁같은 다양한 요인들이 결합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금융계에서는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일에 대해 예측하는 작업이 호응을 얻고 종종 두둑한 보상을 받는다.(67-68) "과거의 우연한 성공차트, 방정식, 자신감 같은 요소들은 그들의 인식의 깊이를 확인시켜 준다. 이러니 사기행위인 것이다."(69)

"FRB의 거짓된 명성에는 단단한 토대가 있다. 여기에는 은행과 은행가들의 권력과 명성, 그리고 금전에 부여된 마법이 존재한다. 문제는 아주 그럴 듯하고 전적으로 찬성할 수 있는 교과서상의 이론이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회사들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을 때 대출을 받는 것이지 금리가 낮다고 해서 대출을 받는 것이 아니다."(75-76)

"현대 대기업 경영진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최상의기회를 부여받았으며, 자기 재산 불리기를 경제적으로 뛰어난 성과를 거둔 이들에 대한 기본적 보수로 인정하는 세상이었기에 기업 스캔들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82) "수익성 있는 경제적 활동을 할 자유는 필요하지만, 이러한 자유가 수입이나 부를 합법적 또는 불법적으로 횡령하기 위한 은폐장치가 되어서는 안된다. 기업경영은 행동의 권한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겉으로는 결백해 보이는 사기행위를 위해 그 권한이 부여된 것은 아니다. 기업권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85)

"세금 감면 정책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소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소비할 이들에게는 이를 박탈하는 정책이 지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공공 정책이 없는 불경기는 바로 이런 상황을 뜻한다. 경기가 호전되더라도 어떤 분명한 효과적인 조치를 취해서 이루어진 상황은 아니다. 불경기에는 구매력이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는 타개책을 찾아야하며, 특히 소비활동을 할 빈곤층이 구매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런 정책이 확실한 효과를 내지만, 이는 쓸모 없는 동정에 불과하다는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사회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누리는 자들에게는 종종 세금감면이라는 금전적 보상이 주어진다. 하지만 드들에게는 절박한 필요라는 게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돌아간 보상은 소비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이 돈을 확실히 소비할 빈민들은 이런 금전적인 보상을 받지 못한다. 그 돈을 저축할 것이 확실한 사람들에게만 그 금전적 보상이 주어지는 것이다."(96-98)

 


조금 장황하지만 갤브레이스가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사기라고 주장하는 핵심을 뽑아 본 것이다. 과거 통계와 분석자료 그리고 수학적 모델의 환상에 사로잡혀서 현실을 제대로 못보고 엄청난 손실을 보면서도 전문가의 권위로 그 모든 책임을 면제받는 사람들. 작게 사기치면 감방가고 크게 사기치면 경제학자라는 우스개 소리가 현실로 나타나는 것을 보니 씁슬하다.

97년 외환위기가 오고 공적자금으로 부실채권을 막으면서도 결국 책임지는 경제학자나 관료는 없었다. 정말 이상했다. 문제가 있고 막대한 손실이 있는데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알고보니 희대의 대사기였다. 이 책으로부터 명백해졌다. 그런데, 잡아서 족쳐야 속이 시원하겠는데 경제학의 기묘한 전문적 권위가 이것을 가로막고 있다. 오호~ 통재로다~!

또 하나의 통재로 다가오는 게 있다. 여전히 사기를 쳐먹는 애널리스트들. 그들에게 돈을 갖다 받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연민이 느껴진다. 로또 예측 기계를 산다는 사람들을 보면서 콧방귀를 끼는 작자들이 증권이나 주식 전문가들의 예측을 믿고 투자를 한다는 게 너무도 아이러니 하다. 본질은 똑같은데 말이다.

이 책의 7장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금융계의 예측은 사기다. 갤브레이스가 말한것처럼 경기변동과 증시를 예측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로또 번호 예측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한마디로 애널리스트들의 분석은 보기좋은 뻥이다. 애널리스트들의 과거의 우연한 성공차트, 방정식, 자신감 같은 요소들에 혹하여 투자를 한다면 그 투자가들은 사기를 당하는 것이다.  그 명백한 증거로서 증권 애널리스트가 추천한 종목에 종자돈을 걸어 날린 사람들에게 그 애널리스트가 보상을 해주지 않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기치는 넘들은 절대 돈을 되돌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가 사기당하는 줄도 모르고 당하는 사람들. 사기당하는 것을 못참는 사람들. 그리고 국가를 움직이는 자본주의 경제학이 어떤 사기 구조로 국가의 부를 사기치는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굉장히 유용하리라 믿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 해결책까지 제시해 주고 있지는 않다. 현대의 자본주의가 이렇게 당신을 사기치고 있으니 그 본질만 파악하라는 것이다. 대책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라나 뭐라나~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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