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禁의 세계 - Japanese Eros Manga, Anime, Game
김봉석, 김의찬 지음 / 씨엔씨미디어 / 2000년 3월
평점 :
절판


<18금의 세계>, 김봉석&김의찬, CNC


일본 성인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왜 우리는 성인문화와 포르노를 동일시하는가? 왜 일본 만화는 유난히 성과 폭력에 관대한가? 성인용 애니메이션의 등급분류와 유해논쟁은? 왜 일본 애니메이션은 미국과 유럽에서 큰 인기를 얻는가? 애니메이션과 게임이 벌이는 치열한 공방전, 혹은 협력은?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싶다면 이 책을 슥 한번 훑어 보면 된다. 이 책은 아니메를 위주로, 만화와 게임에서 성인 등급에 해당하는 작품들을 선정 소개 하고, 그것이 왜 성인물이며 왜 왜곡되어 우리나라에 유입되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장:18禁이란 무엇인가?, 2장:일본의 만화, 영화, 게임의 발전사, 3장:일본만화의 매력, 4장:신나는 일본만화 취재기5장:한국 성인 만화의 가능성 등의 흥미진진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말이 18금이지 일본 만화와 아니메에 대한 총체적인 소개로 보아도 좋을 듯 싶다. 

 이 책은 애니와 게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2장부터, 만화에 더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3장과 4장부터 읽기 시작해도 무방하게 구성되어 있어 취향대로 읽거나, 관심있는 부분만 읽어도 되게끔 구성된게 장점이다.

일본 아니메에 관심이 많은가? <카이트>, <바이올린 잭>을 아는가? 만약 일본 아니메에 관심이 많은데 이런 작품들을 모른다면 이 책을 구해서 읽어보는 게 매우 유익할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추천할 만하다. 일본의 아니메는, 특히 성인 대상 아니메는 그만큼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으니까.

 이 책은 일본 만화와 애니 뿐만이 아니라 만화와 애니에 포함된 문화의 중요성을 수용자측에 인식시키려는 노력을 한 흔적이 책 곳곳에 베어있어, 일본 만화나 애니를 주체적으로 수용하는 시각을 일깨우고 있다. 더 나아가 그런 시각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만화 애니의 성인 지향적 작품을 조심스럽게 진단까지 하고 있다.

<클릭! 일본문화>라는 책 이후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춘 저자들이 이 책에서 강조하는 점은 '난 척'하는 글이 되지 않게 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애니 비평책이 전문가의 위치에서 감나와라 대추나와라 하는 식의 기분 나쁜 글이 아닌, 수용자의 시각을 중요시 했다는 점.

그래서 그런지 쉽게 읽히고, 읽고 나면 일본 성인 애이에 대한 나름의 체계를 잡을 수 있는 좋은 책이라 생각된다. 결코 거부감이 들거나 하지 않는다.

 

[덧붙임]
*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고 새로운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어 나온 <캠퍼스 러브스토리>라는 만화가 있는데, 아실분은 아시겠지만 약간 변태적인 내용을 코믹하게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의 원작이 <동경대학 이야기>라는 사실과 원작자 에가와 타츠야가 고교 선생님출신이라는거. 그리고 그의 작품 대부분이 지나칠 정도로 리얼한 성묘사로 일본에서도 정평이 나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작품은 상당한 양이 짤려서 편집됐다는 군요. 하기야 이 작품을 처음 보시는 분들은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각오해야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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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시작하며]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

이 통쾌하고도 자극적이면서 웬지 불편한 타이틀. 이 4단어 만큼이나 이 책을 집약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건 없을 듯 싶다. 일인칭 관찰자 시점인 내가, 이제... 상대방인 애인나부랭이한테 지겹다고 과거를 날려버린다.. 쿨하게 말하는 이 4단어...정말 타이틀 하나 잘 뽑은 거 같다.

쿨걸 배수아의 장편소설인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5년전에 현대백화점 책코너 가판대에서 잠시 구경했던 책이다. 제목이 하도 재미있어 배수아라는 작가를 내 머리속에 각인 시켜두고 있었다. 그래서그런지 간간히 문학상집에 묶인 그녀의 단편들을 만나보고 배수아 작가를 좋아하게 됐다. 내가 배수아 작가를 좋아하는 건 다름아닌, 작품에 가식이 없다는거. 뭐든지 작가가 쓰고 싶은 대로 쓴다는 거. 그래서 쿨하다는거...항상 배수아를 칭할 때 나는 쿨걸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읽기]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는 작가가 뭐라든, 작가의 자전적 생각이 가장 많이 담겨 있는 소설이라는 게 내 주관적인 평가다. 연애에 대한 배수아식 고찰이라고 해 두고 싶다. 쿨걸인 배수아는 자신이 분신인 유경을 통해 쿨걸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보여진다. 읽으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배수아의 분신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작가의 말에서, 아니라고 두루뭉실하게 말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 유경이 전투적으로 쏘아내는 냉소는 바로 배수아의 생각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수의사 자격시험에 모든 걸 걸고 생화학 시험에 매달리는 유경과 "생각이 앞으로 나가지 않을 때 무한급수와 확률분포 같은 문제를 풀고 있는" 배수아는 닮아도 너무도 닮아있다. 세상에 생각이 앞으로 안나간다고 수학문제를 푸는 사람이 있다니~

"어리석을 정도로 고집이 세고 자기 중심적이고 타협이나 화해를 싫어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에게 특히 냉정하고 자신은 아프거나 빚을 지거나 남의 도움을 빌려야 할 정도로 곤란에 처하는 일은 영영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종교나 도덕이나 사랑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에 관심이 희박하고 앞으로 나가는 것에 대한 욕망이 강한 사람. 생물학적 성별은 피메일이고 나이는 33세. 독신. 건강상태 양호. 중산층 출신이나 노동 의지와 독립심이 특이할 정도로 상당히 강하다. 어떤 점에서는 과겨하기 조차 하다."(217p)

이소설의 주인공 유경의 인물 설정이다. 한 마디로 까칠한 노처녀라고 하면 될 것을.. 이 소설은 이 까칠한 마르크스 걸인 유경이 자신의 직장 부원장인 길과 옛 애인 교진 그리고 그녀들의 친구와 논하는 <사랑과 전쟁>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유경이 다니는 직장에서 새로 부임한 40대의 부원장과 썸씽이 있고 난 후 섹스 파트너로서 유경을 원하는 길과 길에게 끌리면서도 감정에 질퍽거리는 걸 참지 못하는 유경의 내면적 투쟁이 줄거리의 한 축이다. 그리고 옛애인인 교진을 만나면서 갈등이 심화되고 연애의 진정성에 대한  회의와 그 탈출구를 찾는 과정이 쿨하게 그려진다.

 한편 유경과 그녀의 친구 넷이 정기적으로 모여 떠는 수다가 책의 색다른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노처녀의 한탄과 결혼관 그리고 남자에 대한 품평과 서로에 대한 애증섞인 질투와 상처주기. 그리고 동생의 결혼에 쯔음하여 가족에 대한 비판과 자학이 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그 수위를 높이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은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이다. 여기서 나는 유경이고 너는 길과 교진이다. 길은 유경이 다니는 회사의 부원장이고 교진은 유경의 옛 애인이다. 교진과는 쿨하게 헤어졌다. 교진은 연애의 정점에서 연애의 허망함을 알게 해준 사람이었다. 서로 동의하에 쿨하게 헤어졌다. 겉으론 쿨하게 헤여졌지만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짐은 그녀에게도 고통이었나 보다. “....헤어짐이 아프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오만이다.”라고 한 그녀의 추억 속에 잘 나타나 있지 않은가. 아무리 전투적이라도 그녀는 여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교진을 만난다. 비록 쿨하게 헤어졌다 하더라도 그와는 연애의 진정성과 정점 그리고 청춘을 함께 했던 사람이었기에 유경에게는 그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선뜻 전화번호를 불러준 유경의 태도에서도 알 수 있다.

아무리봐도 ‘지겨움’의 대상은 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길은 한 때의 원나잇 스탠드의 대상이기에는 너무 무겁다. 연애의 정점에 올라가 본 그녀에게 또다시 구태를 반복한다는 건 그녀 자신에게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유경은 과거의 애인 교진과 현재의 불안한 관계인 길 사이에서 갈등한다. 길보다 교진은 연애에 있어 더 진정성을 갖췄지만 그는 가난했다. 길은 여자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가졌다. 중후한 멋, 재력, 그리고 사회적 위치. 하지만 그는 유부남이고 그와 연애를 한다는 자체는 유경에게 뻔한 결말이 예비된 불륜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니가 지겹다는 대상은 누굴까? 그것도 바로 이 시점에. 이제 지겨우니 과거에는 지겹지 않았음을 추론해 볼 수 있고, 그 대상은 교진 일수밖에 없다. 하지만 위에서 잠깐 살펴본 대로 교진은 지겨움의 대상이 아니지 않는가. 이미 끝난 상태다. 대상은 길 일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경은 길과 같은 자유주의로 무장한 여자들을 사냥하는 사람에게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라고 쿨하게 날려주고 싶어한다.

 “지금 당장 나에게도 꿈이 있다. 탈한국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프라이드도 아니다. 바로 웨이터가 서 있는 저 문으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것이다. 근사하게 옷을 차려입고 있는 척하는 계급의 그런 사람이. 상대편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거드름과 자신이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 존재라느 오만한 광용으로 뭉친 사람이. 그리고 나를 쳐다본다. 헤게모니의 승자가 된 자신 만만한 미소를 띠고,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에게 아주 쿨하게 말해 주는 것이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나는 이제 니가 기겨워, 하고.”(pp207~208)

여기까지 본다면 유경의 지겨움의 대상은 분명히 길이다. 하지만 갈등하고 고민하다가 유경이 내린 결론은 어처구니 없게도 탈연애주의 였다.

 “나에게 교진과 길이다른 점은 무엇인가. 없다.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나 역시 자유주의자인 삼십대 여자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친구들에게 얘기하는 순간 나 역시도 길에게 상당히 끌리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인격자나 도덕군자하고만 같이 잘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세상 누가 완전한 인격을 가졌을까. 나 자신도 도덕보다는 스스로의 열정을 선택하지 않았는가 말이다.(212p) 계속해서 그녀는 말한다.

때론 나도 남자가 그리운 밤이 있다. 진짜 섹스가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길이라도 괜찮고 교진이라도 상관없다. 그들은 나에게 정도으 차이일 뿐 어차피 마찬가지인 사람들이다. 대개 미덕이라고 생각되는 것들, 더 마음이 끌린다거나 나를 더 생각해 준다거나 도덕적으로 장애가 없다거나 순수하다거나 심지어는 사랑한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다 무의미한 핑계일 뿐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섹스에 명분은 필요없다. 사랑하지 않는 섹스에 죄의식을 느낄 필요도 없다. 길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건 내 알 바 아니다. 그는 그의 입자에 나는 나의 입자에 충실할 것이다. 마무런 책임도 과장도 미화도 없는 진짜 섹스 말이다.(213p)"

"미라: 너를 찾는 데 남자야. 누군데 그래?

유경: 길

미라: 만나러 간단 말이니? 그런 거구나

진숙: 마음을 정리했다고 하지 않았어?

유경: 그와 관계를 갖기로 정리했어.

진숙: 그를 사랑해

유경: 무슨 바보 같은 소리.

나는 코웃음 치며 일어섰다. ····겁낼 것이 무엇인가. 나는 연애라는 게임에서 패배하지 않는 방법을 안다. 그것은 ‘탈연애주의’이다.(pp214-215)"

이렇듯 그녀는 마지막에 가서 길의 정부가 되기를 결심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의 대상은 교진이고 그녀를 거쳐간 연애라는 이름하의 모든 대상이 지겹다는 말로 귀결된다. 유경은 말은 쿨하게 했는지 모르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쿨하지 못했다. 결론에 이르는 추론 과정이 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탈연애주로 포장하기에는 너무 어설픈 추론이다. 결론은 마광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입장보다 나을게 없어 보인다. 마교수의 다른 작품에서도 보여지는 자유연애주의와 탈연애주의는 무엇이 다른건지. 본질은 똑같은데 말이다. 과대포장이랄까..

 
[나오며]

책을 너무나 재미있게 읽었다...읽으면서 막 웃었다. 유경의 입을 빌어 말하는 배수아의 냉소적인 말이 너무도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막다른 골목에서 외치는 결혼을 일종의 폭력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가난한 대학 강사에게 시집갈 결심을 하는 친구 자연에게 "너 청록파 시쓰니?"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부분에서 푸하하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배수아식 자유주의적 독신관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자유란 더 이상 읽은 것이 없는 고독한 상태'라는데...(이웃 블로그에서 좋은 표현이 있어서리..) 자유의 부산물일수밖에 없는 고독을 피해 쾌락으로 몸을 던지는 유경의 어설픈 철학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단 말이다. 독신은 다그런가? 독신은 무엇으로 살지?...라는 대답에 유경처럼 대답하는 게 삶의 쿨한 대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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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어차피 인생이 초이스라고 말한다면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것이 문제가 아닌가. 난 가정경영 따위에 관심이 없고 요리나 육아도 하고 싶지 않다.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다. 난 다른 것이 더 좋다. 땀을 흘린다면 다른 것을 위해서 흘리고 노동한다면 다른 것을 위해서 하고 싶다. 난, 다른 것에 걸겠다. ........세상을 너 마음대로 사느냐구? 그래, 난  마음대로 살고 싶어. 남들 하는 대로 살고 싶지는 않아. 아, 난 그래서 결혼 안 해. 남자가 필요하다면 같이 자겠어. 하지만 결혼을 전제로 남자를 만나고 싶지는 않아. 난 그게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동물을 학대하는 것보다 더 이상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어. 절대로." (72p)


 

덧붙임..

나는 배수아의 소설이 좋다. 비록 그녀가 나와 다른 생각으로 작품을 쓰지만 약간 어설퍼 보이는 문제의식이 좋다. 대부분 해답이 없지만 서도..작품의 완숙기로 접어들어 소설이 세련된 맛을 풍기더라도 데뷔때의 이런 문제의식을 지속적으로 가져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 작품은 그녀의 첫 장편소설 데뷔작이란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문자화 됐다나... 하지만 그런 면이 더 좋다. 완전하지 않더라도 항상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면을 신랄하게 비꼬고 풍자하는 ...그 속에서도 유모가 빛나는 그런 시도가 밋밋한 완성도 높은 작품보다 훨씬 값지다는 게 내 생각이다. 씩씩하고 대담한 그녀의 글을 계속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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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 비판 - 우리시대의 부끄러움을 말하다
김상태 지음 / 옛오늘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저번주 회사에 나가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간만에 들른 서점에서 획기적인 책을 만나볼 수 있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비판서를 읽는 게 몇년 만인지..시간상 서점 마감시간이 임박해서 더 읽을 수 없었지만 대충 끝까지, 타치바나씨가 가르쳐준 속독법으로 완독했다. 완독한 이후 사기친 사람에 대한 분노를 넘어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

바로 도올 김용옥 비판서다. 비판의 대가 강준만 교수도 비판을 피해간 유일한 사람이었는데(인물과 사상시리즈), 한 서울대 출신 수학도로 인해 만천하에 발가벗겨진 느낌이다.

예전에 도올이 티비에 나와 엔터네이너의 기질을 마음껏 발휘할때 이경숙씨나 서지문 교수 그리고 일부의 동양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이 도올의 이상한 논리를 비판했지만 주로 인신공격이 주를 이루어...도올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도올 왈, "내 책도 안 읽은 것들이 어디서 대가에게 함부로 지껄이느냐"였다. 적어도 나 도올을 비판하려면 내가 쓴 책을 전부 읽고 뭐라 말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데, 누가 도올의 머리아픈 책을 읽겠는가..

도올을 비판하고 싶어도 비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도올이 너무도 방대한 사유체계의 저작물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 생물학, 물리학, 사회학 등 도올은 그의 학분적 영역을 넘어 여러 영역에서 '씨부린다'(책의 표현을 살렸다). 언어도 영어, 일본어, 중국어, 히랍어, 라틴어 까지 씨부린다. 티비에서도 정도전에 대해서 강의할 때 불씨잡변을 중국어로 씨부린 도올이었다. 잘난척 하면 정말 알아주는 도올..

비판을 하려면 도올에 버금가는 수준이 되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그런 정도의 교양수준과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없기에 도올은 우리사회에서 지식인으로 활기치고 다닐 수 있었다. 이경숙씨나 서지문찌의 도올비판에 대해서 도올은 한 마디로 일축했다. '어디~ 9급이 9단을! 예끼~!~' 하는 식이었다.

논의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모두 단발성으로 그쳤고, 도올도 거기에 콧방귀만 뀌었지 대응조차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이경숙씨나 서지문교수 모두 도올의 논어와 노자의 단일텍스트만을 비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두 분의 비판은 일리가 있었지만 동양학 원전의 텍스트를 여러 방향으로 해석하는 도올의 박식함에 유야무야 되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텔레비전에 나와 강의할 당시, (물론 지금도) 도올의 인간성은 싫어하지만 그의 학문적 자세는 받아들이는 나였기에 두 분의 도올 비판이 그리 탐탁지 않게 여긴것 또한 사실이었다. 도올 논어 티비 특강 1강에 도올은 화이트 헤드의 철학을 끌어들이면서, 동양학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지평을 열어가야 함을 역설했다. 그런 부분을 도외시한 서교수의 비판은 그리 잘나 보이지 않았던게 그때의 느낌이었다.

여기, 드디어 도올의 모든 저작을 샅샅이 읽고 가장 기본적인 의문점으로부터 도올을 비판하는 저작이 나왔다. 이 저서의 논리대로라면 도올은 반드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 저자가 도올의 책을 전부 읽고 이런 책을 낸데에는 저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도올의 책으로 동양학에 입문하려고 그의 책을 사서 읽다가 충격을 받으면서부터 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문제의 출발은 도올 논어 첫문장에 있었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유리를 밟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얇게 아는 대학 초년생이 치기어린 지식을 과대포장하려는 문장이라는 것이다. 그 첫문장이 아마도  "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였고 두번째 문장이 "공자는 실제로 존재했을까?"였을 것이다.(기억력이 가물거려 확실치가 않다) 여기서부터 저자는 충격을 받는다.

나름대로 저자는 서울대 수학과를 나와서 자신이 독서 아우라를 가진 분이다. 열정적인 탐독가이고 진지한 독서가이다. 그런 그에게 김용옥의 저작들은 모두가 저열했다. 수박겉핥기식 책이 대부분이란 것. 50여권을 모두 읽고 내린 결론이 김용옥의 저작들은 모두 "위대한 서설"뿐이라는 사실. 저작에서 얘기한 도올의 어떤 약속도 그는 지키지 않았다고 일갈한다.

사실 도올은 지금까지 동양학 텍스트에 대한 어떤 논문도 발표한 적이 없고, 또 그가 주장하는 방식(철저한 고증을 통한 해석방식)으로 동양철학의 원전들을 한권도 번역하지 않았다. 저자는 바로 이점을 맹렬히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판서가 나름의 의의를 갖는 것은 도올의 아킬레스를 집요하게 파헤쳤다는 점이다. 미심적지만 누구도 감히 하지 못했을 것을 저자가 해 냈다. 그것은 바로 도올이 지식이라고 떠들면서 논문하나 쓰지 않았고, 그가 그렇게도 학계를 비판했던 고전번역서를 그 자신이 한권도 내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학자가 아니라 일반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단, 저자처럼 책을 많이 읽는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지식인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저자는 통탄을 했고 그게 우리의 아픈 자화상이라고 했다.

도올 김용옥이 박식한 지식이라는 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걸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가 하는 모든 얘기들은 단편적이고 깊이가 없다는 내용이다. 그 사실을 저자는 레래드 다이아몬드의 <제3의 침팬지>라는 저서를 통해 입증한다. 도올이 생물학과 생태학을 씨부릴때 그 분야의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인 책조차 읽지 않았다고 일간한다. 그 책을 읽었으면 범하지 않을 심각한 오류를 도올이 저지르고도 그것이 오류인지 모르고 있는 사실에서 저자는 비웃음을 참지 못한다.

이것 뿐만이 아니다. 도올이 기독교를 비판할 때 하는 얘기들은 신학대학 학부생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도 아울러 알려줬다. 틸리히나 해방신학을 애기하는 것도 저자에 따르면 일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참고로 저자는 이 모든 저작들을 독서토론을 통해 모조리 읽었다고 한다. 근데, 도올의 씨부리는 얘기가 그 때 읽었던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이다.

책은 도올을 황우석에 빗대어 국민을 사기친 대형 지식 사기꾼으로 매도하고 있다. 좀 어폐가 있긴 하지만 그동안 보여준 도올의 만행을 낱낱히 파헤친 면에서는 사기꾼이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게 바로 대중이었음을 지적한다. 바로 우리 사회의 척박한 권위주의 의식이 황우석과 도올 같은 사람들 만들었다는 것이다. 뭐, 그렇게 일리가 박약한 말은 아닌듯 싶다.

도올이 나이 40에 원광대 학의과대학 학생으로 입학해서 진짜 열심히 공부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고, 동양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그 해석의 지평을 열어준 것에 열광하여, 그의 돼먹지 않은 인간성에도 불구하고 그를 좋아했는데....이 책을 읽고나서 도올이 사기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적어도 사기는 치지 않았더라도 도올은 그가 말한 것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다. 후레자식이라고 욕하는 대상과 도올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단 말이다.

도올의 책을 모조리 읽고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비판서... 신랄하고도 기본적이기에 비판서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일단 그의 저작을 모조리 읽고 도올이 사기치는 넘이라고 평하는 이 사람에 대해서 도올은 적어도 대응은 해야 할 것이리라.

왜냐하면 그가 '도올은 허풍쟁이다' 라고 이전의 사람들이 비판한 것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비판에 직면하여 도올은 내 책 전부 다 읽고서 그런말을 하라고 했는데, 진짜 도올 책 전부를 읽고 도올이 '너저분한 넘'이라고 하는데 이제는 도올이 말해야 할 때가 아닌지...그리고 뭐라고 할 지 무지 궁금하다. 책을 보면 도올은 더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거의 없어보이기 때문이다. 아...위대한 서설만 있으니 이제 쓰면된다고?!

 

* 개인적으로 그를 좋아했기에, 그리고 그의 저서들을 읽고 매번 시원시원한 비판의 재미에 빠져있었기에,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의 충격은 상당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충격은 가시지 않고, 그래서 도올이 더 괘씸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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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화뇌동 2011-03-02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보쇼...

1.수학과나온 서울대 학사가 고전문학 전공박사의 글을깐다는 것자체가 모순이다.

2.수학과나온 서울대 학사는 고전문학에 대한 논문이나 번역집하나 쓴 경험도 없는사람이 고전문학 전공자를 깐다는것 자체가 모순이다.

3.수학과 나온 서울대학사가 ....도올의 완역번역집 금강경을 `이건 논외로 하자 시중에 많으니 `라고 말하는것 자체가 모순이다.

도올의 금강경텍스트는 한국최고 팔만대장경판을 원본으로 한거이기 때문이다.

4.황우석사태를 들먹이며 자신이 고전문학전공박사를깔수 있다고 하는데
황우석 사태의 논문조작을 밝혀낸 사람들도 그 분야의 생명공학분야전문가들 이였다.

좀 알고 부화뇌동하시길...

하지만빨랐죠 2020-05-02 23:42   좋아요 0 | URL
이보쇼...

1. 저자는 도올을 비판하면서 그 기저에 깔린 학벌주의적 맹목이 만들어낸 허상을 비판하고 있다. 글쓴이가 후기처럼 쓴 글 역시 이를 말하고 있다. 자네는 반박처럼 무슨 말을 씨부리지만, 그 무뇌적 태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뿐이다.

2. 충분한 서치능력만 갖고 있다면 학위나 전공은 별 상관이 되지 않는다. 이건 지식의 창출, 편집의 과정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텍스트를 발굴해내고, 면밀한 검토를 통해 타당함과 그름을 따지는 과정이다.

3. 한국 최고.. 이런 열받는 말투는 올군에게서 옮겨 왔는가? 어떤 텍스트가 해석될 때엔 대상 텍스트의 가치가 ˝시장˝에 끼칠 영향력과 필요성이 따져져야 한다. 이는 기존의 관련 텍스트가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 지 역시 포함된다.

모순이라는 말이 모순이다. 그런 건 없다. 그냥 이 글도 도올느님 비판한 책도 자네 마음에 안들고, 더 못되고 현란한 비판을 끄적임으로써 글쓴이를 굴복시키고 마음의 상처도 좀 주고 싶은데, 평소에 공부가 부족했던 탓인지, 무언갈 더 생각하긴 귀찮고, 자기 속에 더 내보낼 수 있는 단어가 없어서 대충 문장 끝에 쿨한 척 첨가한 게 자네가 말하는 모순의 참뜻이다.

4. 황씨와 올군의 업적은 대중에게 인정을 받았고, 까보니 그럴싸한 구라였더라. 이 점에서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직관적인 이해를 놔두고 뭐 이 말 저 말 돌아서 먼 길을 가는가. 돌았는가?

좀 부화뇌동하지 마시길...
 
작은 것이 아름답다 범우사상신서 35
E.F.슈마허 지음 / 범우사 /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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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이나 고급음식점 같은 곳에선 차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 주차안내원이나 종업원들은 작은 차를 타고온 사람에게 "어이"라고 호칭하고, 소형차는 "아저씨", 중형차는 "선생님", 대형승용차는 "사장님"이라고 부른다는 속설도 있다.

또한 대형차를 탄 재벌 아들이 자기 앞에 끼어든 작은 차의 무엄한(?) 행동에 격분하여 그 운전자를 폭행, 중태에 빠진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진 적도 있다.

사회에서 흔히 경험하는 이런 일들은 우리가 큰 것에 약하기 때문이다. 일명 '사이즈 컴플렉스'. 큰 사이즈라면 무조건 주눅이 드는 경향. 이런 큰 것 선호의식은 큰 것은 무조건 좋고, 작은 것은 안 좋은 것이라는 편견을 만들어 낸다.

그런데, 우리의 편견과 정 반대의 주장을 펼치는 석학의 명저가 있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범우사, 2004)가 바로 그것.

크기가 좋고 나쁨의 척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 했을까? 

 작은 것은 가치개념이 개입되면 큰것보다 열등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이후 작은 것은 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사회가 거시적인 것, 공업화를 추구하면서 작은 것은 끊임없이 개선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작은 것은 무조건 크게 해야만 가치있는 일로 생각되었다. 오죽하면 '성장의 신화'라고 까지 했겠는가.

 하지만 언제 부터인가 '절약과 능률'이라는 모토아래 그 전도가 서서히 뒤바뀌어지고 있다. 이런 조류를 존 네이스 빗은 "세계경제가 거대화 될 수록 소규모 경제주체들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글로벌 패로독스라는 개념으로 형상화 시켰다.

이것은 거대화된 경제구조 속에서  작은 기업이 세계경제를 주도한다는 것. 그렇게해서 일본은 1980~90년대 축소지향적 산업으로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바야흐로 작은 것이 가치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작은 것을 지향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한정된 에너지로 작은 것을 움직이는 것이 큰 것을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바로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에 에너지라는 개념이 개입되면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

이 한정된 현재의 기술을  제레미 리프킨은  엔트로피 법칙으로 풀어냈다. 그의 명저 <엔트로피>에서 우리 지구는 폐쇄체제로서 에너지가 한정되어 한방향으로만 흐른다고 했다. 쓸 수 있는 에너지에서 써버린 에너지로 이행하는 에너지 고갈을 그는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보았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이와 같은 엔트로피 법칙의 연장선상에 있다. 과학과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자원은 고갈되었다. 무분별한 개발은 자연 스스로 치유할 능력을 상실하게 할 정도로 황폐해졌다. 하지만 '발전'이라는 신화의 논리는 이 모든 행위를 정당화 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 댓가는 만만치 않았다. 에너지 문제가 전 지구적 문제로 확대되었고, 이때부터 환경파괴에 대한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하여 산업화와 도시화의 진행은 인간소외와 인구문제를 심화시켰다.

이에, 슈마허는 이 책의 반을 할애하여 우리시대의 암울한 미래상을 보여주고 있다. 홀크하이머과 아도르노가 쓴 우리시대의 가장 암울한 책이라 일컬어지는 <계몽의 변증법>이 우리시대의  철학의 부재와 가치관의 혼동을 보여주었다면, 이 책은 그 정신적 혼란이 야기시킨 물질적인 면을 경제학적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다. 

헌데 그 경제학적 시각이 독특하다. 슈마허는 경제학의 역할이 경제학을 위한 경제학이 아닌 인간을 위한 경제학이 될 것을 주창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제학은 복잡한 수식으로 가득찬 이론의 정치함 속에서만 안주해 왔다는 게 그가 주장하는 것. 경제학이 수많은 천재들을 집어삼키고서도 해답없는 문제가 지속되는 것은 그 가운데 인간을 위한 시도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슈마허는 경제학이 주류와 비주류를 지양하고 인간중심의 경제학으로 바로설 것을 역설한다. 

 이 작은 책 속에서 인간중심의 경제학을 위해 슈마허는 방대한 형이상학적, 종교적 성찰을 시도한다. 그 성찰의 결과로서 슈마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설득력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압권이라 할 수 있는 스몰사상 즉 중간기술의 개념이다.

 이 책에 따르면 중간기술은 기계적 대량생산체계가 아닌 대중의 손에 의한 대중생산에 초점을 맞춘다. 경험과 지식을 활용하는 대중생산체제는 분권화를 촉진하고 생태계법칙에 적합하며 인간을 위한 기술이라는 것. 다시말해 이것은 필요한 만큼만 소비한다는 불교의 구도자적 사상을 그의 대안 철학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이 중간기술의 철학적 기반은 '중도'개념이다. 슈마허가 불교에 심취했을 때 그 사상에 매료됐다고 한다. 인간이 물질과 정신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에 이것의 끝(물질적인 것)과 저것의 끝(정신적인 것)이 아닌 그 중간(중도)을 이용한다는 것은 매우 인간적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현대 대량생산체제에서 인간은 소비자로 전락했다. 경제학책 어디에도 인간의 개념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소비만을 하는 소비자만이 있을 뿐이다. 이런 경제학적 사고방식이 우리의 의식을 점점 황폐화 시켜 부지불식간에 소비주의적 생활 습관에 익숙하게 했다. 매일 우리가 접하는 신문과 TV가 그런 소비에 익숙하도록 우리를 훈련시켰다.

이것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미국식 산업구조를 반성적 사고 없이, 소비주의적 생할양식을 그대로 받아들인 폐습이다.

  결국 우리는 작은 것과 적은 것에 고마워 할 줄도, 만족할 줄 모르게 되었다. 국민총생산과 같은 단순한 수량적 척도로 발전의 기준을 삼는 산업문화 속에서 인간은 점차 도구화 되어 가고 있다. 성장 제일주의와 정신적 가치가 부재한 물질적 번영은 심리적 빈곤과 불안 그리고 생명력의 상실을 가져온다. 인간이 아닌 소비자만을 배운 당연한 결과이다. 

이 책을 쓴 슈마허는 독일 출신으로  독일 영국 미국 등지에서 슘페터, 케인즈, 윌리스 등 저명한 학자들로부터 경제학을 배웠다. 22살에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나치스의 유태인 탄압으로 영국에 건너가 개인 기업의 재무고문 신문사 프리랜스 기자 등으로 근무했다.1946~1950년까지 경제통으로 활동했다. 국제결제제도에 관한 그의 구상은 케이즈로부터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1964년 이후 이른바 중간기술이론을 제창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농촌 개발에 대한 그의 권고안은 수많은 외국 정부로부터 주목받았으며 활발한 학술 활동으로 1974년에는 대영제국 지도자 훈장(CBE)을 받았다.

현대 환경 운동사에서 최초의 전체주의적 사상가로 평가되는 슈마허는 매우 다양한 관심사를 하나의 참조 틀 속에 버무릴 줄 아는 위대한 경제학자였다. 바로 이런 시각에서 탄생한 책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이다. 이 책은 그의 독특한 이력과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슈마허 사상의 결정체이다.

그런데  '슈마허 사상'의 실체를 확인할수록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슈마허가 지향하는 가치라는 것이 우리가 너무도 쉽게 버린 가치, 다시말해 물아일체되어 안빈낙도하며 안분지족의 생을 누린 우리 선조들의 시조와 사상적 자취에 고스란히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문제해결의 열쇠를 위한 기본철학은 우리의 한국사상 내면에 면면히 흐리고 있는 것들 이었다.

 슈마허가 제시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명제는 결국 우리의 전통적 가치인 '안분지족'의 삶을 배우라는 소중한 충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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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란트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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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며]

나는 럿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책들은 좋아한다. 사상가를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저서를 좋아하는 유일한 이유는 저서들이 모두 쉽다는 거. 나는 그의 <서양철학사>와 고 박종홍 선생의 <철학개설>로 철학에 입문했다. 그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는 어떤 것을 나누기를 좋아하고 싫고 좋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일반사람이면 취향이거니 하겠지만 사상가쯤 되면 자기가 싫어하는 것에 맹렬한 비판을 논리적이고도 철학적으로 가하기 때문이다. 그가 <서양철학사>로 책의 이름을 명명한 것도 동양 사상과 구분되는 점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동양철학사를 인정해주는 것같은 인상이지만 뒤집어 보면 논의할 가치가 없어서 빼버렸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행복의 정복 읽기]

 여기 <행복의 정복>이라는 아주 겁대가리를 상실할 정도로 오만한 책이 있다. 행복의 정복이라니...하지만 럿셀은 책의 제목을 정할 때 항상 책에서 그 이름을 정한 이유를 밝힌다. 이 책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방자한(?) 제목을 달 때에야 충분히 납득을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이름을 붙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남자나 여자는 피할 수 있는 불행과 피할 수 없는 불행, 병과 심리적 갈등, 투쟁과 가난의 악의로 가득찬 세계 안에서, 각 개인에게 맹공을 퍼붓는 불행의 무수한 원인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보면 행복은 필연적인 것도 아니며 우연적으로 주어지는 행운도 아니다. 운이 대통하여 행복의 자기 수중에 그냥 굴러들어오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을 럿셀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무수한 불행의 원인을 극복한다’라는 말 속에는 행복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요, 행복은 정복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게 이 책의 핵심사상이다.

 <행복이 정복>은 럿셀이 노년기로 들어설 무렵에 출간한 책이다. 58세 때인 1930년에 출간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삶의 원숙미와 지성이 곳곳에 묻어 있다. 영국 경험론의 전통을 이어받은 사상가 답게 풍부한 생활의 경험을 통해 행복의 본질을 끌어내고 있다. 럿셀은 현대인은 왜 행복할 수 없는지.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묻는 동시에 현대인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묻는다.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 럿셀은 너무도 쉽고 명쾌하게 규명한다. 문제의 핵심을 잡아 결코 형이상학적이거나 현학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생활 속에서 불행의 원인을 치유할 방법을 찾고 회복해야 할 행복의 원리를 일깨워 준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처음에 불행해 질 수밖에 없는 원인을 고찰한다. 럿셀이 진단한 현대인의 불행의 요인은 경쟁, 권태와 자극, 피로, 질투, 죄악감, 피해망상증, 여론의 두려움 등이다. 이와 같은 불행의 요인을 검토한 다음 럿셀은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인생에 적극적이고 외부사물에 흥미와 열정을 갖고 대하고, 서로 진정한 사랑을 공유하며 자신의 사업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 자신에게 집착하는 실존주의적인 비좁은 태도를 버리고 다양한 세계, 흥미가 가득한 세상사에 관심을 가지라고 한다. 그래야 번민과 우울함과 같은 조그만 불행을 능히 초극할 수 있다. 결국 인생은 살만하다는 신념, 외부의 광할한 세계야말로 우리 행복의 원천이라는 외부지향적 생활태도 그리고 어떤 불행이 닥쳐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용기와 낙천적인 인생관만 있다면 누구나 행복에 이를 수 있고 이러한 것들은 각자의 노력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책장을 술술 넘기면 너무도 쉽고 평범한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알 수 있다. 누구나 생활 속에서 한 번쯤 생각했던 것을 자명하게 제시함으로써 뛰어난 설득력을 제시하는 책이다. 그도 그럴것이 60평생 행복을 정복하기 위해 럿셀 자신이 스스로 경험하고 사색한 철학적 흔적이 고스란히 글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경험적 사상이 삶 속에 반영되어 체험적인 진술의 지혜가 담겨 있기에.

[책에 대한 비판]

 방대한 행복의 논증으로부터 결론적으로 럿셀이 느끼는 참된 행복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행복한 인간이란 무엇일까? 마지막 장에 보면 럿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행복의 일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자기 자신에 달려 있는 부분을 고찰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행복은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외부적 여건이 마련될 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행복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의 조합이라는 견해가 도출된다. 이게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고 럿셀은 생각하는 거 같다. 하지만 이것은 럿셀이 한 단면만을 보고 있다는 게 내 주관적인 생각이다. 일반적으로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외부환경이 좋아도 어떤 이유로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너무도 많다. 또한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 또한 많다. 어떤 기관이 조사한 결과만 보더라도 가장 못사는 나라의 행복지수가 선진국의 행복지수보다 높다는 사실은 외부적 환경보다는 개인적으로 느끼는 행복에 대한 기대감이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인 거 같다. 아무래도 럿셀의 이 부분에는 동의할 수 없다. 

 계속해서 마지막 장에 럿셀이 말한 바를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음을 본다.

“참된 행복은 현실도피의 수단인 유흥이나 일시적 오락이 아닌 무엇보다 인간과 사물에 대하여 호의적인 관심을 느끼는 것이다. 외부의 환경이 그다지 불행하지 않을 경우에는 정렬과 흥미가 내부로 향하지 않고 외부로 향하게 될 때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살아가고 자유로운 애정과 광범위한 흥미를 갖고 이를 통해 자기의 행복을 소유하는 자요 남에게 흥미와 애정의 대상이 되어 행복을 느끼는 자이다. 행복한 인간은 자기가 사회의 통일이 이루어 지지 않아 괴로워하는 일이 없다. 그의 인격인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분열되지 않으며 세계에 대하여도 대립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주의 시민’ 이라고 생각하고 우주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마음껏 향락하며 자기들 뒤에 오는 생명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함으로써 죽음에 대하여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이처럼 생명의 큰 물줄기와 본능적으로 깊이 결합될 경우에 우리는 가장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p368) 

 외부적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가? 그런 사람만이 우주적인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마음껏 향락할 수 있는가? 럿셀은 자기 자신으로 침잠하는 실존주의를 극렬하게 비난했다. 옹졸하고 생산성이 없는 무용한 것이라고까지 폄하했다. 럿셀의 주장대로 자기를 분석해 보아 나올 것이 없다면 문학에서 실존주의가 꽃피울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할까? 실존주의로 인해 문학은 더욱 풍부해 졌으며,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을 깨달아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은 외향적 인간만 있는 게 아니다. 자기 자신을 모를 때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것을 염두 해 두지 않고 내부지향적인 사람을 매도하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철학적이지도 않아 보인다.

 럿셀은 이 책에서 참된 행복의 전제를 정렬과 흥미가 외부로 향해지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그런지 정치를 인간이 참된 행복에 이르기 위한 최고의 것으로 보았다.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정치라고 서슴없이 결론 내렸다. 거기까지의 럿셀의 추론을 반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럿셀은 행복하지 못했다. 말년에 궁극의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 참여한 정치는 불행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럿셀은 자기 자신의 주장을 그 자신이 멋지게 반증했다. 행복의 정복이라는 제목이 무색할 정도.

 어떻게 럿셀은 행복의 정복이라는 오만한 타이틀을 붙였을까? 그렇게 까지 확신이 들었을까? 생활 속에서 여러 가지 빛나는 혜안을 보여줬지만, 다양한 인간의 한 단면만을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착각한 그 대전제가 잘못된 것을 그는 몰랐을 것이다. 왜 그렇게도 실존주의를 싫어했는지..왜 그렇게도 외향적인 면에 집착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럿셀의 이 책은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 생활 속에서 행복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는 그 탁월한 비교와 혜안이 럿셀의 명성을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형이상학적인 행복이라는 관념을 너무도 쉽고 평이하게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게끔 해 준 이 책은 고전으로 남아 여전히 꼽십어 볼 수 있는 그런 책이라 할 수 있다.

[책을 덮으며]

사람들은 항상 말한다. '그때가 좋았다'라고. 그때는 곧 과거이고 항상 현재와 대비해서 과거를 평가한다. 그래서 좋았다면 '행복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 아닐런지.

 현재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서 ‘행복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현재를 느낄 수 있고 즐길 수 있으며 그냥 보낼 수는 있지만 현재 행복을 누릴 수는 없을‘거라 생각한다. 행복은 매우 미래지향적이라서 에른스트 블로흐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선취하는 의식'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기에 일종의 유토피아니즘하고 비슷하다는 생각이다. 현재 행복하다고 한 순간 곧 과거가 되 버리기에, 아~나 행복해~라고 말하는 순간 행복은 다시 저 멀리 있게 된다.(시간을 붙잡아 멜 수 있으면 모르겠지만) 그리고 시간과 함께 과거로 빠져나가 버린다. 어떻게 행복할 수 있을까?

 순간에 충실하고 순간을 의미 있게 살며 깊이 느낄 수는 있지만 그런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어느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수많은 철학자들이 행복을 찾아 헤멨지만 '아파테이아'(정념이 없는 마음의상태)와 '아타락시아'(궁극적 쾌락), 물아일체..라는 개념만을 말 할 수 있을 뿐이었다.

 행복을 정의하고 그에 삶을 맞추는 것은 럿셀처럼 불행을 초래하는 거 같다.(말년에 정치에 참여하여 불행했다) 정의할 수 없는 걸 애써 정의해서 그렇게 행복한 삶을 만드게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그것도 모자라 행복의 정복이라니...정말 터무니 없다고 생각한다. 굳이 행복을 말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건 아닌지...생각해 본다. 행 불행을 나누는 거 자체가 ‘행복’에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노자는 도덕경 첫 장 첫 구절에 '도가도비상도'이라 했다. 도라고 말할 수 있는 건 도가 아니라는...절대적 진리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행복도 그와같은 게 아닐런지....20세기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말들하는 비트겐슈타인(아이러니 하게도 비트겐슈타인은 럿셀의 제자였다)이 암으로 죽어가면서 한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을 거 같다.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사람이 이땅에 와서 잘~ 살다 간다고' 죽을때 이런 정도의 말을 할 수 있는 거....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가 있다면 바로 이와 같은 태도가 아닌지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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