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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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신경숙 표절 사건으로 순식간에 일명 ‘듣보잡’ 작가가 되어버렸던 미시마 유키오. 그래도 이 사건으로 인해 일문학의 매우 중요한 한 작가가 대중의 관심을 받는 데는 성공한 듯하다. 책과 친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도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를 알게 됐으니 말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매우 일본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일찍 생을 마감했지만, 그는 소수의 작품만으로도 일문학(뿐만 아니라 세계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작가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그 중에서 <금각사>는 단연 으뜸이지 않을까?


사실 내가 <금각사>를 읽었던 건 2008년 남대문 방화사건 직후였다. 토론 주제도서이기도 했지만, 시사적 이슈에 부합하는 타이밍이 절묘했다. 정말 감명 깊게 읽었고, 이후 지인들에게 최고의 소설이라고 떠벌이고 다녔다. (그래서 <금각사>를 읽은 분들이 꽤 된다!)


그리고 저번 달 독서 모임 주제 도서로 다시 올라와 3번 읽게 되었다. 이번에 보니, 이전에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남천참묘의 공안’이 <금각사>의 주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메타포임을 다시금 심도있게 이해할 수 있었다.


전에도 이 부분을 <금각사> 이해를 위한 하나의 논제로 생각하고 있긴 했었지만, 그리 깊게 생각하고 정리하지 못했다. 도처에 넘치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더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가시와키와 미조구치가 보여주는 세계관의 대립도 한몫했다.


그런데 3번째 읽으면서, 나는 왜 작가가 남천참묘의 공안을 전체 플롯 구조에 적절하게 숨겨놨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공안의 내용은 미시마 유키오가 <금각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미(美)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적 답변이었다.


다음에 정리한 내용은 내 마지막 추론에 대한 근거라 할 수 있겠다.



1


이 소설에서 남천참묘의 공안은 전반부, 중반부, 후반부에 각각 3번에 걸쳐 나온다. 그런데 이는, 주인공이 금각사를 방화할 수밖에 없는 심경의 변화를 미학적 입장에서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우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금각사와 각 인물들 간에 얽힌 거대한 복합적 구조물로써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의 미학적 입장이 무엇인지 이 부분을 테마로 작품을 음미하는 것도 작품을 이해하는데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단어를 대라면 바로 미(아름다움)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남천참묘의 공안은 소설 속에서 매우 중요한 테마라 할 수 있겠다.



2


1945년 8월 15일 패전일. 천황의 안전을 기원하고 전몰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긴 독경이 끝난 후 미조구치를 비롯한 절의 승려들은 노사의 방으로 불려가 강화를 듣는다.(p70) 노사가 선택한 공안(公案)은 무문관 제14칙의 남천참묘였다. 남천참묘란 벽암록에도 제63칙 ‘남천참묘아’, 제64칙 ‘조주두재초혜’의 둘로 나와 있다. 예로부터 난해하기로 소문난 공안이다.


<남천참묘의 공안>

절간 승려들이 모두 나와서 풀베기를 하고 있을 때, 이 한적한 산 속 절간에 한 마리의 새끼 고양이가 나타났다. 신기한 느낌에 모두가 달려들어 이것을 사로잡았으나 그만 동서 양당의 다툼이 벌어졌다. 양당은 서로가 이 새끼 고양이를 자기네가 키우겠다고 다툰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던 남천 스님은 당장에 새끼 고양이의 목덜미를 잡고 풀 베는 낫을 들이대며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올바른 해결책을 구하면 살려 줄 것이고, 구하지 못하면 즉각 베어 버리겠다.” 중들은 대답이 없었다. 남천 스님은 새끼 고양이를 베어 버렸다. 날이 저물어 수제자인 조주가 돌아왔다. 남천 스님은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고는 조주의 의견을 물었다. 조주는 곧바로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서 머리 위에 올린 채 나가 버렸다. 남천 스님은 탄식하며 말했다 “아아 오늘 네가 있어 주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도 목숨을 건졌을 텐데.”




그 제1. 노사의 해석 (p71)

남천 스님이 고양이를 벤 것은 자아의 미망을 끊어 망념과 망상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비정한 실천으로 고양이의 목을 자르고, 일체의 모순과 대립 그리고 자타의 확집을 끊은 것이다. 이것을 살인도라 일컫는다면, 조주의 그것은 활인검이다. 흙투성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천대받는 신발을 무한한 관용에 의하여 올려놓음으로 해서 보살도를 실천한 것이다. (노사는 이렇게 설명하고는 일본의 패전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이 없이 강화를 끝마쳤다. 어째서 패전한 이날에 특별히 이 공안을 선택한 것인지 전혀 몰랐다.)



그 제2. 가시와키의 해석 (pp152-153)

(가시와키가 미조구치에게 퉁소를 준 답례로 금각사의 꽃을 꺾어다 줄 것을 원하자, 미조구치는 꽃을 꺾어 가시와키의 하숙집을 찾아간다. 대화를 하는 중에 미조구치는 이 남천참묘의 공안에 대한 가시와키의 해석을 유도한다.)

공안은 말이야, 그건 사람의 일생에 갖가지 형태로 모양을 바꾸어 몇 번이고 나타나는 거지. 그건 기분 나쁜 공안이야. 인생의 전환점에서 마주칠 때마다 똑같은 공안이 모습도 의미도 바뀌어 있거든. 남천 스님이 베어버린 그 고양이가 예사롭지 않지. 그 고양이는 아름다웠단 말야, 알아? 이를 데 없이 아름다웠지. 눈은 금빛에 털에는 윤기가 흘렀고, 그 작고 부드러운 몸에 이 세상의 모든 향락과 미가 용수철처럼 구부려진 채 간직되어 있었지. 고양이가 미의 결정체였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간과하고 있지. 바로 나를 제외하고 말이야. 그런데 그 고양이는 느닷없이 숲 속에서 뛰쳐나와 마치 고의적인 듯이 상냥하고 교활한 눈빛을 반짝이다가 붙잡혔지. 왜냐하면 미는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만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미라는 것은 충치와도 같은 거야. 그건 혀에 닿아 신경 쓰이고 아프게 하여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더 이상 아픔을 견딜 수 없게 되면 치과의사에게 뽑아 달라고 하지. 피투성이의 자그마한 갈색의 더러운 이빨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이건가? 고작 이런 거였나? 나에게 통증을 주고 나를 끊임없이 그 존재 때문에 고민하게 만들며, 또한 나의 내부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던 것이 지금은 죽어버린 물질에 불과하군. 하지만 그것과 이것이 정말로 같은 것일까? 만약 이것이 원래 나의 외부 존재였다면 어째서 무슨 인연으로 나의 내부와 연결되어 내 통증의 근원이 될 수 있었을까? 이놈이 존재하는 근거는 뭘까? 그 근거는 나의 내부에 있었을까? 하여튼, 나에게서 뽑혀 나와 내 손바닥 위에 놓인 이놈은 이건 분명 별개의 것이지. 결코 그것이 아니야.’ 알겠나? 미란 그런 거야. 그러니까 고양이를 벤 것은 마치 아픈 충치를 빼내서 미를 척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그것이 최후의 해결책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미의 뿌리는 근절되지 않았고 설령 고양이는 죽었어도 고양이의 아름다움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이토록 해결이 안이했던 것을 풍자해서, 조주는 그 머리에 신발을 올려놓았지. 그는 말하자면, 충치의 아픔을 참는 이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중략> 나는 다시 되물었다.

미조구치: 그러면 너는 어느 쪽이냐? 남천 스님쪽이냐 조주냐?

가시와키: 글쎄, 어느 쪽일까. 지금으로서는 내가 남천이고 네가 조주지만 언젠가는 네가 남천이 되고 내가 조주가 될지도 몰라. 이 공안은 그야말로 ‘고양이 눈처럼’ 변하니까. (결국 미조구치는 남천이 되어 금각사를 불태우게 된다.)



그 제3. 가시와키의 심화된 해석;

        인식 vs 행동 (조주의 행위에 대한 해석) (pp226-227)

(녹원사로 빌린 돈을 받으러 온 가시와키는 묘한 웃음을 흘리는 미조구치의 이상한 환대에 불편하게 반응하면서 미조구치의 방으로 안내된다. 거기서 가시와키는 미조구치에게 핵심적인 몇 가지 말을 하는 중 다시 남천참묘의 해석에 대한 부분을 들먹이면서 미조구치가 앞으로 행하게 될 방화의 예언적 기반을 마련해 주고 있다. 가시와키가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은 인식이라는 말에 대해서 미조구치는 강하게 반발하며,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은 행위라고 말한다. 그 말에 대한 반응이 바로 남천참묘의 변화된 해석이다. pp226-227)

“언젠가 말했던 남천참묘의 그 고양이 말이야. 비길데 없이 아름다운 그 고양이 말이야. 양쪽 중들이 다툰 것은 각자의 인식 속에서 고양이를 보호하여, 기르고, 편히 쉬게끔 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남천 스님은 행위자니까, 단숨에 고양이를 베어 버렸지. 나중에 온 조주는 자신의 신발을 머리 위에 올렸지. 조주가 하려던 말은 이거야. 역시 그는 미가 인식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 하지만 개개의 인식, 각각의 인식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인식이란 인간의 바다이기도 하고, 인간의 벌판이기도 하며 인간 일반의 존재양식이지. 그는 그것을 말하려 했다고 생각해. 너는 이제 와서 남천이 되겠다는 거니?  미적인 것, 네가 좋아하는 미적인 것, 그건 인간의 정신 속에서 인식에 위탁된 나머지 부분, 잉여 부분의 환영이야. 네가 말하는 ‘삶을 견디는 다른 방법의 환영’이야. 인식에 있어서 미는 결코 위안이 아니라구. 여자이고 아내이기도 하겠지만 위안은 아니야. 하지만 결코 위안이 아니면서 미적인 것과 인식과의 결혼에서는 무언가가 생겨나지. 덧없는 물거품과도 같은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지만 무언가가 생겨나지. 세상에서 예술이라고 부르는 게 그거야.”

이 말에 주인공 미조구치는 드디어 말한다. “미는······미적인 것은 이미 나에게는 원수야.” (p227)



에필로그


결국, 남천참묘 공안의 해석으로부터 주인공 미조구치는 인식가에서 행동가로 변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조구치는 가시와키의 말대로 인식자, 줄곧 조주의 역할자였다. 하지만 여자와의 관계에까지 간섭하고 있는 ‘금각의 존재(=미의 화신)’로 인해 미조구치는 지치고 점점 변해간다. 급기야 “미는······미적인 것은 이미 나에게는 원수야.” (p227)라고까지 말한다. 이로부터 미조구치는 행동가인 남천의 역할 쪽으로 급선회한다. 남천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고양이를 죽였듯, 미조구치는 자신에게 있어 절대 미인 금각을 방화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안다. 미조구치가 금각을 불태웠을지언정 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가시와키가 공안의 해석(조주의 행위)으로부터 나온 ‘미는 충치같은 거야’라는 말이 작가 미시마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해주고 싶어 했던 ‘미의 본질’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덧]

토론회에서 오고간 얘기들을 듣고 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아무도 이 공안을 주목하지 않아 좀 아쉬웠다.

그리고 알라딘이고 예스고 무슨 리뷰를 보던지 간에 이 작품에서 이 공안을 언급한 리뷰를 본 적이 없다. 사실 봤다면 애써 쓰는 수고를 덜었을 것이다. 물론 <금각사>를 보는 시각을 여럿이 있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부분 언급이 없어 리뷰로 남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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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버에 따르면...
    from Value Investing 2015-07-15 00:07 
    yamoo 님께서 이번에 소설 『금각사』를 무려(?) 세 번째로 읽고 나서 쓰신 '남천참묘의 공안'이라는 글 내용이 한동안 제 머리를 떠나지 않네요. 비록 그 소설을 전혀 읽어본 적이 없는데도 말이지요. yamoo 님께서 올려주신 흥미로운 글들을 읽으니 마치 그 소설 속에서 펼쳐지는 내용이 금방이라도 제 눈 앞에서 그려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랍니다. 그런데 저는 yamoo 님의 글을 읽으면서 생뚱맞게도 (제가 최근에 읽었던) 막스 베버의 글 내용 가운
 
 
oren 2015-07-14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도 yamoo님의 페이퍼를 통해 이 소설을 극찬하시는 걸 본 기억이 나네요. 이번에 다시금 흥미로운 시각으로 이 소설을 들여다본 글을 읽으니 더욱 관심이 생기고요. `남천참묘의 공안`이 벽암록에 나온다니 그 책을 다시 들여다봐야 겠습니다. 그 부분만요. 그 책은 너무 너무 어려워 도저히 통독이 불가능한 `벽` 같은 느낌이 들더라구요. 도저히 오를 수 없을 듯한 거벽 말이지요..

yamoo 2015-07-14 22:44   좋아요 0 | URL
<금각사>는 상찬받아 마땅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작품이 최고의 소설 가운데 하나라는 걸 의심의 여지없이 수긍할 수 있어요. 네, 정말 그렇습니다. 꼭 읽어 보세요. 저도 지인으로부터 수없이 많은 닥달을 받은 후에야 읽었는데, 이 소설을 읽으니 저도 그렇게 되더라구요..ㅎㅎ

벽암록이 그렇게 어엽다니, 전 아직 구경도 못했봤네요^^;;

붉은돼지 2015-07-14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엄청난 깊은 뜻이 있었군요.
저는 금각사 옛날에 읽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기억이 안나는군요. ㅜㅜ

yamoo 2015-07-14 22:45   좋아요 0 | URL
붉은 돼지님, 기억이 가물거리시면 일독해 주시는 것도 좋을 거 같습니다. 전3번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좋았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7-15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그냥 불타는 금각사만 떠오르지, 전혀 생각 않고 있었는데 이거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yamoo 2015-07-16 19:30   좋아요 0 | URL
전혀 생각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읽은지 오래 됐다면 당연하겠지요. 기회가 돼서 다시 읽으시면 남천참묘의 공안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공안을 보는 시각은 다양하니, 곰발님만의 시각으로 다시 볼 수 있겠지요~^^
 
내가 공부하는 이유 - 일본 메이지대 괴짜 교수의 인생을 바꾸는 평생 공부법
사이토 다카시 지음, 오근영 옮김 / 걷는나무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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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스포츠 여왕이라고 회자되는 사람 중 하나. 전 여자 탁구 대표팀 감독인 현정화. 그녀는 한국 탁구계에서 유남규, 유승민과 더불어 전설로 통한다. 왜냐, 바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이기에.

 

 

다른 종목이면 그러려니한다. 하지만 그 종목이 탁구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스포츠 종목에는 절대 아성을 쌓은 국가들이 있다. 양궁하면, 대한민국인것처럼, 탁구하면 중국이다. 한국 양국은 세계양국계에서 독보적인 1위를 수성하고 있다. 양궁이 올림픽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이후 한번도 세계선수권과 올림픽 우승을 놓친적인 없다. 적어도 여자 양궁에서는.

 

 

마찬가지로 탁구는 세계 1위가 중국이다. 70~80년대 유럽과 일본세가 대항마로 반짝 했지만 80년대 중반부터 중국 독주가 시작되었다. 중국을 이기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세계선수권이나 올림픽에서 남녀 종목 대부분의 금메달을 중국 선수들이 독차지 해 왔다. 그 와중에 간간히 중국 독주를 막은 게 그나마 우리나라였다. 특히 중국 여자 탁구는 한국 여자 양궁에 비견될 만큼 극강으로 적수가 없었다.

 

 

이런 세계 최강 중국 탁구계에 덩야핑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잘 모르지만 30대 중반 이후 사람들 중 덩야핑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 이유는 바로 현정화 때문이다. 현정화가 바로 이 덩야핑이라는 선수를 이기고 올림픽 금메달과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한 차례씩 땄기에.

 

 

당시 올림픽과 세계선수권과 같은 큰 대회에서 덩야핑을 이긴 유일한 선수가 현정화였다. 덩야핑은 세계탁구계에서 별명이 마녀로 통했다. 거의 무적이었다. 나가는 대회마다 모든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한 선수가 바로 덩야핑이다. 그녀가 세계대회에서 받은 금메달 수만 18개이고, 국내외 대회에서 우승한 횟수는 무려 132회나 된다.

 

이런 선수 앞에서 현정화도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수 많은 작고 큰 대회에서 현정화는 덩야핑을 만났다. 하지만 맨날 졌다. 1세트라도 따면 다행이었다. 역대 전적이 아마도 내가 기억하기론 20여 패 정도 됐다. 딱 2번 이겼는데, 그게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결승 이었다.

 

 

개인적으로 탁구를 매우  즐겼기 때문에 당시 대부분의 큰 대회 영상은 녹화를 떠서 보곤 했다. 내가 생각한 덩야핑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선수였다. 150 센티도 안 되는 키에 상대를 압도하는 눈매와 높은 스카이서브는 당시 모든 선수를 두려움에 떨게했던 덩야핑만의 전매특허였다. 빠르기는 얼마나 빠른지 도저히 칠수 없는 코스로 공을 보내도 그녀는 단숨에 따라잡아 이겼다고 여긴 상대선수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곤 했다.

 

 

세계탁구를 평정하다시피 한 그 덩야핑도 부침을 겪었다. 키가 너무 작아서 중국에서도 세계적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해 중국 대표로 선발하기를 꺼렸다고. 하지만 무서운 스피드를 발판으로 자기만의 색깔로 무장하여 결국 중국 대표 선발전에서 1등으로 통과했다. 그렇게 하기까지 그녀가 흘러야했던 좌절과 노력은 아마도 당사자가 아니면 모를 것이다.

 

그리고 스포츠는 항상 결과로 보여지기에 그녀가 어떻게 노력했는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오직 세계 최고라는 신화만 회자될 뿐이다. 모든 스포츠 스타가 마찬가지겠지만 그녀도 시간과 함께 추억으로 사라진지 오래다. 그녀의 이름은 간간히 탁구 중계에서나 들을 수 있을 뿐, 그녀가 현재 뭘 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리가 아시아의 인어 최윤희가 현재 뭘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그런데, 그녀의 근황이 소개된 책이 있어 내 관심을 끌었다. 스포츠와 관련된 책이 아닌 공부에 관한 책이라서 매우 신선했다. 일본의 괴짜 교수로 널리 알려진 사이토 다카시의 <내가 공부하는 이유>(걷는 나무, 2014)라는 신간에서 였다. 한 달 사이에 6쇄나 찍었다. 읽어 보니 좋은 내용이 참 많았다. 자게서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인데도 불구하고 저자의 박식함과 독특한 이력이 개성과 맞물려 알찬 내용들이 줄줄 쏟아진다. 무엇보다 권위적이고 고리타분하지 않아 좋다.

 

그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덩야핑의 근황은 한마디로 압권이었다.

 

나는 신문에서 그녀의 소식을 다시 접했다. 그녀가 영국의 켐브리지대학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는 소식이었다. 어린 시절 탁구 연습만하느라 제대로 공부할 시간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켐브리지에서 박사학위를 딸 수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운동을 그만둔 뒤 중국 칭화대에 특기자로 입학했다고 한다. 그 당시 알파벳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영어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지독한 노력 끝에 졸업을 하고 영국으로 유학까지 떠난 것이다. 그녀는 켐브리지대학 800년 역사상 세계 정상급 운동선수 출신으로는 최초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 됐다. (p216)

 

켐브리지 800년 역사상 엘리트 운동선수 출신으로 최초의 경제학 박사. 이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공부좀 한다는 사람들도 따기 어렵다는 영국 켐브리지 경제학 박사 학위를 운동만 한사람이 땄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나따위가 가늠할 수조차 없다.

 

중국에서도 나처럼 많이 놀란 사람이 많았나 보다. 그래서 한 기자가 지커닷컴[인민일보 계열 검색엔진] 총경리(CEO)로 변신한 그녀에게 "탁구와 박사 학위, 그리고 비즈니스 가운데 무엇이 가장 쉽고, 무엇이 가장 어려운 일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세상에서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안 되는 일도 없다." (p217)

 

 

역시 탁구 마녀다운 답변이다. 안 되는 일도 없지만 불가능한 것 같은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노력, 그 지속적인 노력이 그녀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저자가 평생 공부로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자세인듯하다. 그래서 마지막 장에 이 에피소드로 대미를 장식한 것 같다.

 

 

사실 이 책에는 평생 공부로서 득이 되는 말들과 사례들이 꽤 많다. 책을 읽으면서 줄도 많이 쳤다. 특히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는 멈춰서 음미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만의 개성, 바꿔 말하면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강점을 갖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강력한 무기를 하나 얻는 것과 같다. 누구도 회사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게 살다가는 오래 버틸 수도 없다. 하지만 평생 공부를 하다 보면 오랜 시간 공부가 내 안에 쌓여서 누군가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지식 세계, 나만의 아우라가 생긴다. 그게 바로 긴 인생을 살아야 하는 우리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요소가 아닐까. (p107)

 

하지만 덩야핑의 사례만큼 강렬한 에피소드는 없는 듯하다. 6페이지에 걸쳐 있는 덩야핑 에피소드를 읽는 것만으로도 책값은 하는 책이다.

 

 

 

[덧글]

저자의 관심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이 자극받을 수 있는 에피소드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분명히 자게서로 분류될 수 있는 책이지만 결코 식상하지 않고 가볍지 않다. 더군다나 평생 인문학자로 살아온 교수가 인생의 선배로서 들려주는 자기체험적인 글이기에 솔직함과 학자로서의 아우라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몇 자 적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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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4-10-21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어제 교보가서 이 책이 들어가는 입구에 싸여 있어 보니, 벌써 12쇄...ㅎㄷㄷ
예상을 깨고 선전하는 중..ㅎ

카알벨루치 2018-07-11 0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덩야핑 대단하네요! 우아~공부하는중이라 다카시의 이 책은 내가 읽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도서관에 어제 반납했었는데. 배울게 없는 책은 없네요!

young026 2019-06-03 0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정화는 덩야핑에게는 이긴 적이 없습니다. 올림픽 우승(단식은 아니고 복식)은 덩야핑이 국제무대 데뷔하기 전이었고 93년 세계선수권 우승은 덩야핑이 초반 탈락했을 때였죠. 결승 상대는 88년 올림픽 단식우승자였던 천징이었습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6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오종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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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2년여 간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1년에 많아야 2-3권 쯤 읽었나 보다. 읽고 나도 뭘 읽었는지조차 모를 정도이다. 물론 재미는커녕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소설 읽기를 중단한 듯하다. 아니, 그냥 읽기 싫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겠다. 하지만 와중에 명작이라는 소설들은 계속 사재기를 하고 있었다.

 

2013년 1월 10일에도 역시나 습관 차 알라딘 중고서점 신림점에 들렀다. 콜렉션하는 책이 들어왔나 하고 둘러본 것이다. 한 주에 한 두 번 정도는 내가 원하는 아이템을 건지곤 한다. 이날도 그랬다. 위에서 밝혔다시피 소설은 좀처럼 읽지 않지만 수집은 꾸준히 하는 편이라 유럽 소설 코너에 자주 기웃거린다. 그러다가 열린책들의 미스터노 세계문학 시리즈 두 작품을 발견한 것이다. 체홉의 단편선과 까라마조프의형제들 2권(1권은 그 다음날 구매).

 

10일 날 알라딘에 들러 책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집에서 나올 때 책을 챙겨 오는 걸 깜빡했기 때문. 버스에서 읽을 책을 꺼낼 순간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크로스백을 갖고 나오면서 백팩에 있던 문고본을 옮겨 넣는 다는 걸 잊었던 모양이다.

 

지하철을 탔을 때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알라딘에서 구매한 소설을 읽는 것 외에는 갖고 있는 책이 없으니. 뭐, 소설을 읽지 않고 멀뚱하게 가는 것 보다야 10배 쯤 낫다. 휴대폰 갖고 노는 것 보다는 2배 쯤 유익하고. 분량 상 비교해 보니, 딱 결정이 나 있었다. 체홉 단편선인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열린책들, 2003)을 보기로 했다. 단편집이라 짧은 호흡의 작품들 위주로.

 

이 책은 내가 읽는 첫 체홉 작품이다. 그가 어떤 소설들을 썼고 또 어떤 스타일의 작품을 쓰는 작가인지 전혀 몰랐다. 아는 것이라곤 체홉이라는 작가의 유명세 정도. 그래서 아주 오래 전 고전읽기 모임의 주제 도서였다는 사실 뿐. 당시 소설은 읽기 싫었기에 책은 사지 않고 모임도 패스했다. 그러하기에 책은 진작에 구입했어야 했다.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 체홉을 만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다. 그리고 새 책이 3200원 이라니, 얼마나 착한 가격인가!

 

어쨌든 신림역을 출발함과 동시에 펴든 첫 번째 단편이 「어느 여인의 이야기」였다. 전철에 그날따라 떠드는 인간들이 많아 읽는데 집중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러시아 사람 이름들은 왜 그렇게 길고 기억하기 어려운지. 그냥 데면데면 글자들을 읽고 줄거리를 대충 파악해 가며 읽고 있었다. 극히 짧은 분량(47면~51면)밖에 안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중간쯤에 이르니 처음 상황을 도저히 기억할 수 없는 거다. 다시 집중해서 처음부터 읽어야 했다.

 

아, 그런데 당산역 부근을 지날 때 쯤, 줄거리를 완전히 파악하며 단편을 다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뭐시냐.....꽤 오래 전에 키냐르의 <혀 끝에서 멤도는 이름>을 읽은 직후의 느낌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직관적으로 느껴지지만 말할 수 없는 뭔가로 인해 한 동안 멍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3개의 역이 그냥 지나가 있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랐다. 내가 어디 있고, 뭐 하러 가는지 까맣게 잊고, 오로지 ‘삶’에 대한 생각만 가득했다.

 

그리고는 심히 불편했다. 나만 홀로 멈춰 버린 듯한 삶의 실체를 마주하는 느낌 때문에. 급기야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고’, ‘무엇을 위해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지’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 삶의 비루함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간신히 참으며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그냥 무참히 서 있었다. 손에 든 책은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체홉의 소설은 그렇게 나에게 왔다. 단 다섯 페이지만을 읽고 나는 그가 천재 작가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주 심플한 이야기 속에 어떻게 삶의 본질적 단면을 담담히 담아 낼 수 있는지 놀랍고 놀라웠다. 평이한 이야기에 삶의 페이소스를 얹는 것은 아무 작가나 할 수 없는 재능이다.

 

이날 집에 와서 단편 몇 개를 더 읽어 봤지만 역시나 명불허전이었다. 「농담」과 「쉿」을 읽고 나서는 작가의 유머와 기지 그리고 풍자의 극한을 맛볼 수 있었다. 정말 그는 미시적인 이야기로도 거시적이고 보편적인 풍자를 능숙하게 플롯에 담아 낼 줄 아는 소설가 중의 소설가였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본 직후에는 ‘다른 작가의 작품은 모두 펜이 아닌 막대기로 쓴 것처럼 여겨진다.’는 고리키의 전언이 내가 하고 싶은 지점을 명확히 짚어 줬다. 체홉의 단편집을 읽고 나니, 내가 전에 그리도 열독했던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들이 그렇게도 초라하게 여겨지는 거다. (뭐, 이상문학상 수상작뿐이겠는가)

 

소설 읽기가 따분해 질 때 만난 체홉의 단편들은 소설 읽기의 재미를 다시 발견하게 해 주었고, 단편 소설의 매력을 다시금 일깨워주기 충분했다. 그의 작품을 읽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정신’을 온전히 드러내 준다. 그래서 돈이 제일이라는 이 시대에 적어도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갖는 가치를 생각하며 살 수 있게 된다.

 

[덧]

* 이 리뷰는 지난 1월 체홉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을 읽고 노트에 써 놓은 글을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과는 두어 달 정도의 시간 차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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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
J. D. 샐린저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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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을 오래 전에 읽었다.(오래 전이라도 불과 3년 전이다.) 여러 단상들을 적어 놓았던 기억이 있다. 며칠 전 이 단상들을 마구 적어 놓은 노트를 발견했다. 주로 물음으로만 점철된 감상이었는데, 지금 보니 꽤 치열하게 문제의식을 갖고 텍스트를 읽었던 모양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영미 문학에서 샐린저의 이 작품만큼 많이 읽혀지고 수많은 평론가들로부터 상반된 평가를 받은 작품은 별로 없다고 한다. 당대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많이 읽혀져 왔고, 매우 철저하게 논의되어 왔단다. 청소년, 교수, 그리고 전문적인 비평가 모두 이 작품에 찬사(또는 혹평)를 보내고 있다.


여기 알라딘 리뷰만 봐도 정말 많은데 대부분 찬사 일색이다. 명사 추천 리뷰도 어찌 그리 많은지. 피츠제럴드 하면 <위대한 개츠비>이듯이(그래도 피츠레절드의 여타 작품은 꽤 된다.) 샐린저 하면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샐린저는 이 책으로 명성을 얻은 이후 다른 어떤 작품도 쓰지 않은 듯하다. 작품 하나로 이렇게나 유명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어찌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설 한 권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이리도 많이 읽고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는지. 그 실체가 무척 궁금했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듯하다.


도대체 샐린저가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기에 영미권에서 그렇게도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일까? <호밀밭의 파수꾼>에 집약되어 제시되고 있다고 하는 그 문제의식이 뭘까? 샐린저는 이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한 것이었을까? 이따위 문제의식을 갖고 작품을 읽어 나갔다. 답은 얻지 못하고 아래와 같은 나만의 질문들만 쏟아낼 뿐이었다.


<1>

이 작품은 주인공 홀든 스코필드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기 전 몇 주의 자신의 행적을 회상해 보는 형식으로 돼 있다. 홀든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정신구조를 갖고 있다. 우리의 관심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상한 질문을 해대고, 세상을 좋은 놈과 나쁜 놈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으로 세상을 인식하고 있다. 정신도 꽤 불안하다. 그래서 후반부에 보면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된다. 그런데 과연 홀든은 정신병원에 입원할 만큼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일까? 병든 사회가 건전하고 순수한 개인을 이상자로 몰아간 건 아니고?


 

<2>

이 작품에서 홀든 코울필드는 자주 뜬금없이 뉴욕 남부 센트럴파크에 있는 오리 얘기를 하곤한다. 선생님에게 혼나거나 훈계를 듣는 와중에도 역시 오리가 처한 상황을 생각한다.홀든이 택시를 탔을 때 그는 운전사에게 오리에 대해 묻는다. 첫 번째 택시 운전사는 무시했고, 두 번째 택시 운전사 호르비츠는 오리의 향방에 대해서 답해준다. 코울필드는 묻는다. “뉴욕 남부 센트럴파크 연못 위에 있는 오리들은 겨울이 되면 어디로 갑니까?” 이에 택시 운전사 호르비츠는 물고기로 화제를 바꾼다. 그러나 홀든은 물고기와 오리는 다르고, 설령 물고기라고 한들 그들은 얼음으로 덮인 연못에서 뭘 하느냐고 또 묻자 호르비츠는 홀든과 물고기 사이를 분명히 관계시켜 준다.

 이렇게 홀든의 입을 통해 센트럴파크 공원 연못의 오리가 자주 언급되는 데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 같다. (근데, 명확히 뭔지 모르겠다.) 이 뜬금없는 오리 얘기는 홀든 자신의 상황이 오리와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상기하려는 메타포 같은 것이 아닐까?


<3>

이 책의 제목은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읽는 내내 책 제목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책 중간에 책의 타이틀과 연관된 내용이 나오기는 한다. 홀든의 동생 피비가 “오빠는 도대체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홀든 코울필드는 낭떠러지 바로 옆에서 떨어지기 직전의 어린아이들을 잡아주는 캐쳐가 되기를 바란다고 대답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뉴욕에서 산 기다란 챙이 달린 사냥모를 항상 거꾸로 쓰고 있다. 야구에서 캐쳐가 모자를 거꾸로 쓰는 것처럼 그는 모자를 쓰는 것에서 캐처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책 전체를 봐도 그는 캐처로서의 삶을 전혀 살고 있지 않다. 오히려 끝에 가서는 캐처로서의 삶을 그만두는 것으로 그려진다(통나무집을 짓고 혼자 살겠다는 결심을 접고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책 중간에 어떤 초등학생이 흥얼거리는 로버트 번즈의 시로서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핵심어구는 잠깐 언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샐린저는 왜 이 책의 타이틀을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명명했을까? 호밀밭은 낭떨어지도 아닌데..


<4>

홀든 코울필드의 감수성과 직관력은 어른들의 교훈적인 태도 속에서 오히려 ‘가짜’를 발견해 낸다. (실로 대단한 통찰력이다.) 이 책에서 가짜에 대한 반응은 어떤 이론에 기반한 비판이 아니라 거의 직관에 가까운 지각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코울필드는 이 가짜라는 말을 절제되지 않은 자기중심주의와 뒤따르는 이중적인 가치 기준, 다시 말해서 허세, 폭력 등으로 대변되는 ‘물질주의적 가치’를 가리키는데 사용한다. 그런데, 그의 옛 스승인 안톨리니 선생이  뉴욕에서 방황하는 둘째 날 저녁에 그에게 들려주는 말은 애써 가짜가 아니라고 부인하려 한다. 선생님들의 훈계는 홀든의 생각대로라면 가짜인데 말이다. 어떤 말인지 안톨리니 선생이 16세 먹은 소년의 목적없는 방황과 가짜에 의한 정신의 시달리는 홀든에 대한 충고를 거들떠 보자.


“무엇보다도 너는 네가 최초로 인간행동에 의해 당황하고 상처받고 병드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 그런 문제로 괴로워한다는 점에서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야. 지금 네가 그런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아 오고 있어.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그들의 고통 받은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두고 있는데, 너는 네가 원한다면 그런 기록으로부터 배울 수가 있을 거야······ 그건 참으로 서로 주고받는다는 아름다운 과정 일 테지. 그리고 그건 교육이기도 해. 그건 역사이고 시(poet)지.”


과연 이와 같은 일반화된 교훈적 말은 진실인가? 아니면 (홀든의 생각처럼) 가짜이고 위선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인간형을 만들기 위한 훈육?


<5>

이 작품의 주인공 홀든 코울필드는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다. 양면성을 가진 이 인물을 이해하는 것이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키(key)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주인공 코울필드는 이른바 엉터리들, 위선자들, 속물들, 지저분한 인간들로 가득 찬 학교를 그만둔다. (와우!) 감수성이 예민하고 순수한 홀든 코울필드는 그의 주변 인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 한다. 홀든은 소통할 수 없는 그들로부터 고립된다. 그럼으로써 소외감에서 비롯되는 긴장감을 어쭙잖은 우월감으로 해소하려 한다. 오로지 소통 가능한 이는 그의 여동생 피비뿐이다. 그런데 문제를 더욱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사실은 홀든의 이율배반적인 태도에 있다.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이해를 갈구하면서도, 그의 갈망은 하나의 제스처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너무도 소극적이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접근하지 못하며, 그들과 교제를 맺는 일에 매우 수동적이다. 좋게 말하자면 너무 섬세하다고 할까. 하지만 그의 그런 면이 문학적인 글쓰기로 연결되어 독창적인 면을 보인다. 모든 과목에서 낙제를 하지만 작문에서만큼은 제대로 된 선생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좀처럼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다.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인물로만 보기에는 한계가 있는 거 같다. 소위 말하는 청소년의 성장 소설로 가볍게 분류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보다는 오히려 카뮈가 말한 ‘부조리’에 관한 소설이 아닐지? (개인의 삶과 사회의 갈등에서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삶의 부조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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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 2013-10-16 1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호밀밭의 파수꾼, 을 정말 좋아했었기에.. 그나마 조금 생각한 부분을 적어보자면, 1번의 경우 yamoo님이 생각하신 것이 맞는 듯 합니다. 그러나 홀든 본인이 정말 건전하고 순수한 인물인지는 조금 의문의 여지가 있을 듯 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정신병원에 입원할 정도는 아니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 반항하는 인물의 재사회화, 정도의 강압적인 의미로 정신병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3번의 경우 catcher를 홀든 콜필드가 잡는 사람, 으로 여겼기 때문에 저런 비유가 나온 것으로 압니다. 호밀밭의 파수꾼, 을 호밀밭의 잡는 사람, 으로 여겼던 콜필드는 잡는 사람, 이 아니라 파수꾼의 뜻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잡는 사람, 이라는 뜻을 포기하지 않았지요. 이 잡는 사람, 이라는 의미에서 홀든의 꿈이 확장됩니다. 어떤 위험지대에서 서서 순수함을 잡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라는 식으로. 그리고 그건 마지막의 피비, 에 의해서 구현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5번의 경우.. 이건 제 개인적 생각입니다만, 청소년때의 제가 저 호밀밭의 파수꾼, 을 읽었을때는 홀든 콜필드가 스스로와 정말 비슷해보였습니다. 청소년들은 거의 대부분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가지던 것 같으니.. 청소년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하다못해서 소설의 진의와는 멀어질지라도 어른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문장이라도 떠올릴 수 있는 한 청소년 소설로 보아도 무방할 듯 합니다.

사실 저도 그다지 많이 아는 편이 아니라.. 그러나 특히 3번의 경우는 저도 한 번쯤 생각해본 부분이라서 이렇게 몇 마디 끄적여보았습니다. 홀든에 공감을 하느냐, 공감을 하지 못하느냐, 가 이 소설의 평에 영향을 줄 듯 합니다.. 저같은 경우에는 처음 읽었을때는 홀든에 너무 깊이 공감을 했고.. 두번째 읽을때에는 피비가 너무 좋았습니다. 세 번째 읽었을때는 옛날에 읽었던 그런 느낌이 제대로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홀든에 공감하기에는 너무 커버린 것 같기도 하고.. 어떤 틀을 떠올리지 않기가 힘이 드는 나이가 되버린 것 같기도 하고

yamoo 2013-10-18 17:07   좋아요 0 | URL
저의 문제의식에 이렇게 답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가연님!
무려 3번을 읽으셨군요~ 우와~!
전 이거 작가가 뭘 전하려는 건지, 또 저 제목 때문에 답답해서 연속으로 2번 읽었습니다. 근데,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저런 물음만 가득히~~ㅜㅜ
가연님의 답변 때문에 1번과 3번을 잘 정리했습니다.
정성된 고견 정말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13-10-17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유명한 작품을 아직 읽어 보지 못했어요. 읽어야 할 책으로 찜해 놓기는 했는데...

제도권 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인물이 또 있으니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이죠.
저는 이 작품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주인공(한스)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사회(학교)에 대한 비판으로 읽었죠. 아무도 한스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읽으면서) 주인공 한스에 대해 연민과 애정을 가졌어요. 고독해 보여서 친구가 되어 주고 싶을 정도였어요.

님의 글을 읽으니 그 작품이 생각났다는...
꼭 <호밀밭의 파수꾼>도 읽고 싶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

yamoo 2013-10-18 17:12   좋아요 0 | URL
아, 페크님은 아직 못 접해 보셨군요!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이지만, 홀든과는 많이 달라보여요. 이거 읽으시면 같으면서도 다른 두 인물을 비교해 보실 수 있는 기회를 얻으시겠어요~^^

저도 이게 하두 유명세를 탄 작품이라 읽어 봤는데, 왜 유명한지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이보다 더 좋은 작품들도 많은데....어쨌건 페크님이 이 소설을 읽으신다면 어떤 느낌이실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빨리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니, 읽으신다면... 한스와 홀든의 비교 리뷰가 가능하실 거 같습니당~ 여튼 어여 읽어보시어요~^^
 
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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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요즘 대형 서점의 과학 코너에 가면 진화심리학 계열의 책들이 가장 눈에 잘 띠는 곳에 놓여 있다.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 <만들어진 신>, 스티븐 핀커의 <빈 서판>, <언어 본능>,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생명의 미래> 등 두꺼운 하드커버 책들이 즐비하다. 놀라운 것은 모두 스테디셀러라는 사실. 우리 사회에서 진화심리학 계열의 책들이 이렇게 인기가 있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사실, 이 계열의 책 중에서 가장 얇은 책 중의 하나가 <풀하우스>(사이언스북스, 2002)였기 때문에 이 책을 선택했다. 물론 스티븐 제이 굴드라는 학자의 명성도 한 몫 했다. 올해가 가기 전, 고전의 반열에 오를만한 유명한 과학책 한 권 쯤은 읽어 둬야겠기에 고른 책이다.

  선택은 소박했지만,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 책은 이러 저런 과학 이론을 쉽게 전달해 주는 단순한 과학 교양서가 아니다. 전통적인 세계관을 뒤엎고 편견으로 가려진 진리를 명확히 드러내 보여주는 혁신적인 책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실이라는 이유만으로 증명할 필요도 없이 무소불휘로 통용되는 지적 독단을 멈추게 한다. 굴드가 제시해 주는 새로운 설명 도구는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어정쩡하게 논해지는 여러 현상들을 마법처럼 풀어내 준다.

  이 책의 두 가지 중심 주제는 ‘야구에서 왜 4할 타자가 사라졌는가’하는 문제와 ‘생명의 역사에서 진보란 무엇인가’하는 문제의 해명이다. 굴드는 수수께끼 같고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두 개의 다른 현상이 ‘풀하우스(=시스템 전체의 변이)’라는 개념적 도구로 얼마나 잘 설명되는지 빼어나게 입증한다. 그리고 후자의 연장선에서 박테리아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방대하고 보편적인 생명의 형태가 바로 박테리아라는 것. 굴드는 이렇게 한 자리에서 다루어진 적이 없는 서로 다른 범주들을 하나로 묶어 포괄적으로 설명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1. 도구적 개념으로서의 풀하우스

  굴드는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앞서 ‘풀하우스’라는 개념의 통계학적인 설명 방법을 동원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풀하우스’라는 용어는 간단히 말해서 ‘전체 시스템의 변이’를 의미한다.) 우선 통계적인 특정값이 시스템 전체의 특성을 잘 반영하는지 검증한다. 굴드의 고찰에 따르면, 중심경향성을 나타내는 값 중에서 평균값과 중간값은 집단 전체의 총체적인 변이를 온전히 나타낼 수 없단다. 왜냐하면 소수의 극단값이 평균을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최빈값(가장 흔한 값)은 변화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의 특정한 값이 시스템 전체의 성질을 대표할 수는 없다고 봐야 한다. 이는 ‘전체 시스템의 변이’야말로 궁극적 현실이며, 평균은 제한적이고 본질적으로 추상 개념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굴드는 ‘풀하우스’의 개념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례로써 자신의 개인적 투병생활을 소개한다. 마흔 살 때인 1982년, 굴드는 복부중피종이라는 희귀하고 거의 치료가 불가능한 암 진단을 받았다. 당시 모든 의학 문헌들에 의하면, 진단 후 중간값 생존율이 8개월 이하라는 것이었다. 굴드는 ‘중간값 생존율 8개월’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전체 시스템의 변이(=풀하우스)’ 관점에서 생각했다. 그리하여 변이의 특성을 3가지 개념으로 정리했다. 즉 변이의 확장에는 오른쪽 벽과 왼쪽 벽이라는 한계가 있다는 것, 이 한계에 의해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곡선과 왼쪽으로 기울어진 곡선이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중심경향성을 말하는 평균값, 중간값, 최빈값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 좀 더 부연하면 이렇다. 진단 후 사망까지 걸리는 시간에 따른 사망자 분포 곡선은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종모양의 형태를 보여준다. 통계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곡선 끝을 ‘꼬리’라고 부른다. 따라서 왼쪽 꼬리는 생존율 0의 벽에 닿는 반면, 오른쪽 꼬리는 이론적으로 무한정 연장될 수 있다. 표준정규분포곡선에서는 중심경향성을 나타내는 값들인 평균값, 중간값, 최빈값이 일치하지만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곡선에서는 중심경향 척도들이 일치하지 않는다. 중간값은 최빈값의 오른쪽에, 평균값은 가장 오른 쪽에 위치한다. 결국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중간값이라는 특정한 값으로는 분포 전체를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 통계학적 설명 도구는 ‘생명의 역사에서 진보’의 문제와 ‘4할 타자의 절멸’ 문제를 동일 차원에서 해결하는 열쇠이다.


2. 생명의 역사에서 진보의 문제

  박물관이나 생물 교과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사 그림을 보면, 진보가 생명의 역사에서 중심이 되는 경향이며 특징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림은 최초의 생명체인 박테리아부터 시작해서 무척추동물군-어류-양서류-파충류-포유류 순으로 지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진화의 정점에 인간이 등장한다. 어떻게 생명의 역사에서 진보를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굴드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은 ‘경향을 어디론가 움직여 가는 하나의 실체’로 생각하는 진부한 사고의 전형적인 예라고 한다. “생명의 무한한 다양성으로부터 우리는 ‘평균 복잡성’ 또는 ‘가장 복잡한 생물’과 같은 ‘기본적인’ 값을 뽑아내고 이 실체가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증가했는가를 추적한다. 우리는 이 증가의 경향을 ‘진보’라고 명명하고 그러한 진보야말로 진화 과정 전체의 추진력임이 틀림없다는 시각에 갇혀버리고 마는 것이다.”(p203) 변화의 역사를 시스템 전체에 걸쳐 일어나는 변이의 확장이나 위축으로 본다면, 진보에 대한 전통적 주장이 편협한 시각임을 깨닫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사 그림에서도 보듯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장 복잡한 생물들이 출현해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을까? 분명히 원생동물보다 절지동물이, 파충류보다는 포유류가 더욱 복잡하고 정교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굴드는 “진보의 추종자들은 최대값에만 초점을 맞추어 가장 복잡한 생물의 역사만을 살펴보았으며, 가장 복잡한 생물에서 나타나는 복잡성의 증가를 모든 생물의 진보라고 착각하는 우를 범했다.”고 본다.

  생물 복잡성의 증가에 대한 굴드의 생각은 술주정뱅이 모델을 통해서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술에 만취한 남자가 술집에서 비틀거리며 나온다. 술집 앞의 보도에 선 남자의 한 쪽에는 술집이 있고 다른 쪽에 도랑이 있다. 이 사람이 완전히 무작위적으로 비틀거리게 내버려두면 그는 도랑에 빠지고 만다. 그 이유는 도랑이나 술집 벽 쪽으로 비틀거릴 확률은 정확히 2분의 1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비틀거림은 독립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이전의 비틀거림은 다음번 사건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구조적으로 한쪽이 벽으로 막혀 있는 선형적 운동계에서의 무작위적 움직임은 그 벽의 시작점으로부터 계속 멀어져 갈 수밖에 없다.

  생명의 역사에서 복잡성이 증가하는 모습도 이와 같은 무작위적인 움직임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복잡성의 시작점인 왼쪽 벽은 최빈값을 가진 박테리아가 버티고 있기 때문에 무작위적인 진화 과정은 오른쪽 꼬리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고, 결국 소수의 종이 고도의 복잡성을 나타내게 된다. 오른쪽 꼬리가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그 꼬리에서 어떤 형태의 생물이 생겨날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무작위적이고 우발적이며, 결코 진화의 메커니즘에 의해 미리 예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복잡한 생물들이 살게 될 이 영역에 들어갈 주민이 누구일지는 매번 아주 달라지는 것이며 예측할 수도 없다. 인류는 운 좋게 복권에 당첨된 것뿐이지 복잡성을 향한 추진력이나 진화의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 필연적 결과가 절대 아닌 것이다.


3. 야구 역사상 최대의 수수께끼; 4할 타자의 딜레마

  야구에서 4할 타자의 절멸 문제도 동일한 원리로 설명된다. 전통적 견해에 의하면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은 타자들이 영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즉 타격 활동에 반대되는 투수와 수비활동이 더 나아져서 타격 기술이 상대적으로 퇴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굴드는 이를 뒤집는 주장을 한다.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은 타자들의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야구의 전반적인 경기 기량이 향상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투수와 수비 활동이 정말로 타격활동에 비해 꾸준히 우세해져 갔다면 그 영향은 20세기 야구의 역사에서 타율의 전반적 하락으로 측정되어야 하는데, 평균타율은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따라서 타자들이 퇴보했다는 견해는 확실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런데 굴드의 주장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4할 타자가 없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야구가 발전했다는 증거라니, 궤변처럼 보인다. 여기서 잠깐, 굴드가 들려준 병상체험을 떠올려보자. 굴드는 현상을 ‘풀하우스’로 볼 것을 가르쳐주었다. 굴드의 주장을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우리가 ‘4할 타율’을 하나의 실체로 보았기 때문이다. 다양한 변이로 가득 찬 풀하우스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풀어보면 이렇다.

  야구 경기의 전반적 수준이 향상되면서 종 모양 곡선 전체가 인류의 한계인 오른쪽 벽에 가깝게 다가간다. 그러면서 양쪽 벽의 변이는 감소하게 되었다. 평균 타율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2할 6푼 이지만 20세기 초반의 2할 6푼은 오른쪽 벽에서 한 참 먼 곳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반의 오른쪽 끝에 최고 타자 평균 타율이 4할이 가능했다. 하지만 현재는 양쪽 벽의 변이가 감소하여 최고 타자의 평균이 약 3할 5푼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4할 타자가 사라진 것은 평균타자 2할 6푼마저 인간의 한계인 오른쪽 벽에 다가가면서 야구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된 것의 역설적 결과이다. “다시 말하자면 4할 타율을 따로 떼어내 추적하면 전혀 엉뚱한 결론을 얻게 된다. 그 부분적 꼬리만 보면 안타의 퇴보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체 변이도의 추이를 놓고 보면, 4할 타율의 실종이 경기가 전반적으로 향상된 증거임을 알 수 있다.”(p206) “그러니까 우리는 여태껏 야구 기록에 속아온 셈이다. 평균 타율이 한번도 2할 6푼을 넘어본 적이 없음을 보고, 타격 기량이 한 세기 동안 제자리걸음을 했다고 지레 짐작하여, 4할 타자가 사라지자 위대한 타자가 죽었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p165)


4. 박테리아의 힘

  우리는 지금 ‘박테리아의 시대’에 살고 있다. 박테리아야말로 지구 생물체 중에서 가장 지배적인 형태이다. 박테리아는 태초부터 생명의 최빈값이었다. 수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어떤 것으로도 박테리아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다. 코넬 대학교의 톰 골드 박사는 박테리아의 위대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준다. “지구상에는 다른 생물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수의 박테리아가 살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박테리아는 지하에 사는 것들까지 합치면 그 생물량에서 숲의 나무를 포함해 다른 모든 생물을 합친 것보다도 더 무겁다. 하나의 무게가 그렇게 미세함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인 사실이다. 박테리아가 그 중요성과 영향력에서 언제나 생명의 중심이었다는 주장에 더 어떤 설명이 필요할까?”(p271) 그렇다. 박테리아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런데, 골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골드는 “우리 태양계 안에 적어도 열 개의 천체에는 지구와 비슷한 미생물이 탄생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는 표면이 언 대부분의 행성들의 내부 환경은 지구 내부 몇 킬로미터 지하와 그렇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란다. 쉽게 말해서 지구에서만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박테리아들은 우주의 보편적 생명 형태를 대표하는 존재 일지도 모른다는 추정이다. 정말 박테리아는 위대하다.


5. 새로운 가능성; 오른쪽 벽의 확장

  육상 경기나 수영 경기 등 기록을 단축하는 경기에서 평균(보통) 수준이 오른쪽 벽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면 기록을 갱신하기가 비교적 쉽다. 하지만 평균적인 선수들의 수준이 향상되어 그 수준이 거의 오른쪽 벽에 다가가게 되었을 때, 평균을 초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될까? 이 책에 따르면,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음을 뜻하게 된다. "더 나아가 평균 수준이 오른쪽 벽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은 정상에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더 높은 완성 단계를 추구하도록 촉구한다."(p181)

  굴드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인간의 문화에 대한 풀하우스적 분석을 시도한다. 생물의 자연적 진화와 문화적 변화의 차이를 언급하면서, 오른쪽 벽에 의해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는 문화  생활의 몇 가지를 살펴보고 있다. 중요한 몇 가지는 과학, 공연 예술, 창작 예술의 3가지다. 저자는 자신의 능력을 탓하며, 여기에 빠진 많은 부분들을 독자에게 유보하고 있다. (과분하지만) 굴드의 유지를 받들어, 다음 두 분야에 굴드의 풀하우스 도구 개념들을 적용해 본다. (다른 분야는 이 책을 읽는 이들이..)

•로스쿨 제도

  책에서도 보았다시피 굴드의 오른쪽 벽 개념은 매우 유용한 도구다. 야구 경기를 포함해서 어떤 시스템이 막 시작 단계일 때에는 엉성하다. 엉성하다는 것은 시스템이 완전하지 않아,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시스템이 정비되고 완성되어 갈수록 개선의 속도는 현저히 둔화된다. 더 나아갈 수 없는 오른쪽 벽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말 많았던 로스쿨 제도가 도입된 지 4년이 되었다. 아직도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다. 현재의 사법시험이 존속될 수도 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래서 법조인 양성 교육 시스템의 변이는 여전히 크다. 법조인 선발 시험 체계는 엉성한 단계이기 때문에 시스템의 오른쪽 벽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을 것이며, 변이는 꼬리의 양쪽으로 넓게 뻗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분간은 법조인 자격을 취득하기가 이전의 사법시험 체계보다 좀 더 수월할 것이다.

•철학

  과학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오른쪽 벽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그래서 굴드의 표현대로 오른쪽 벽을 걱정할 틈이 없다. 하지만 철학은 다른 듯하다. 인간의 정신을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예술의 분야와 비슷하게 인류의 한계인 오른쪽 벽에 바짝 다가가 있을 것이다.

  서양의 철학사는 플라톤(굴드는 플라톤을 맹렬히 비난했지만)을 비롯한 그리스 철학의 주석사라(엄밀히 말하면 플라톤이지만)는 말이 있다. 20세기 이후 현재까지 하이데거, 야스퍼스, 사르트르, 베르그손, 하버마스, 푸코, 들뢰즈 등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왔지만, 결국 그리스 사상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철학에서 그리스 사상은 오른쪽 벽이다. 철학자로서 명성을 얻으려면 선배 저명 철학자들을 뛰어넘어야 하는데 뛰어넘고 보면 그리스 철학을 조금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철학은 고통스러운 딜레마에 빠져 있는 듯하다.


나오며

  한 권의 책을 보았지만 ‘야구의 역사’와 ‘생명의 진화’ 그리고 ‘통계적 사고’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서를 겹쳐서 읽은 느낌이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점은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 주고 편견을 바로 잡아 주는 성찰에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스캇 펙의 명저 <아직도 가야할 길>이 어떤 오류가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역사상 최고의 성공을 거둔 책 중의 하나 이기에 존경심을 담아 읽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굴드가 <풀하우스>에서 엔트로피에 대한 오해와 진보주의적 편견이 가진 중대한 오류를 알려주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진보주의적 편견을 진리로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굴드가 제창한 ‘풀하우스’ 개념은 풀리지 않는 현상을 해결해주고, 증명 없이 통용되는 이론들의 맹점을 지적해 주는 훌륭한 도구이다. 더욱이 ‘풀하우스’라는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틀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굴드는 매력적인 사상가이다. 현대에 있어서,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에 필적할 만한 도구적 개념은 아마도 ‘풀하우스’이외에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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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4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잘 정리해줘서..^^

페크pek0501 2011-12-09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무님 덕분에 풀하우스를 꼭 사게 될 것 같군요. 그런데 349쪽이 얇다니요. 저는 더 얇았으면 해요. 큭큭...

그런데 어제 알라딘에 책 5권을 주문과 입금한 상태예요. 이 페이퍼를 진작 봤어야 하는 건데 하는 생각... 다음 기회로 미루고...

어쨌든 좋은 정보를 얻었으니 제가 왔다간 흔적은 남겨야 하겠기에 몇 자 적고 갑니다.ㅋㅋ
좋은 글, 잘 읽었어요.

oren 2011-12-2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서평글을 남겨 주셨군요. 아주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스티븐 제이굴드의『인간에 대한 오해』를 먼저 읽었었는데, 그 책 역시 `인간이 지닌 편견`에 대해 놀랄만큼 예리한 통찰을 보여주고 있어서 대단한 감동을 느꼈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쨌든 굴드는 진화론자들한테는 오래도록 `이단자` 혹은 심지어 `이물질`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는 게 안타까운 점인데, 굴드 스스로 그런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을만큼 언제나 자신감이 넘쳐 흘렀고, 그만의 놀라운 혜안으로 진화 분야의 남다른 통찰을 차별적으로 보여준 위대한 과학자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2012-01-01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