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패배 동문선 현대신서 3
알렝 핑켈크로트 지음, 주태환 옮김 / 동문선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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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속에서 우리는 거북스러움을 느낀다. 왜냐하면 문화란, 사유하면서 살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나날 사유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제반행위를 흔히 문화적인 것으로 규정해 버리는 조류가 확인되고 있다. 정신이 위대한 창조에 필수적인 동작들. 이 모두가 이렇게 문화적인 것으로 잘못 여겨지고 있다. 무슨 이유로 소비와 광고, 혹은 역사 속에 뿌리박은 모든 자동성이 가져다주는 달콤함을 탐닉하기 보다는 참된 문화는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이런 물음을 던지는 사유의 패배(알랭 핑켈크로트, 동문선)는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일단 형이상학적이고도 사변적인 색깔이 강렬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런류의 철학책은 읽는 사람만 읽고, 쥐도 새도 모르게 절판된다. 특히 우리나라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는 지금으로부터 20년전이나 지금이나 그리 큰 차이가 없다. 쉬운 책 위주로 1위부터 20위까지 점철된다. 압도적인 소설의 우위 속에 간혹 무게 있는 에세이류 정도나 여행기가 그리고 경영 경제 서적이 구색맞추기식으로 간신히 껴들어가 있다.

그런데 제목도 현학적인 이 <사유의 패배>는 1987, 88년 프랑스 최고의 베스트셀러로서 프랑스 지성계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고 한다. 책많이 읽는 프랑스 녀석들이라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십다. 뭐, 데리다의 책이나 푸코의 책을 읽고 벤취에서 열변을 토하는 그네들이고 보면 정말 프랑스 사람들의 독서력은 경악을 넘어 경외감까지 느끼게 된다.

 하여간 이 책은 쉬운 책이 아니다. 사유를 문화와 연결 짓는 것부터가 수상하다. 철학을 대중문화 분석에 끌어쓴 학자는 많지만(특히 프랑스 문학가들이나 정신분석학자들) 좀 더 거대한 ‘정신’을 현대 문화 분석의 주요 모티브로 삼은 사람은 이 사람이 처음이 아닐까 한다.(물론 내가 아는 일천한 지식에 한해서지만..)

그런데, 이 문제의 책을 쓴 사람이 내가 처음 듣는 저술가 였는데, 오늘날 프랑스 대중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사람이라는 걸 보고 상당히 놀랐다. 아니, 왜 이런 사람을 나는 여태 모르고 있었던 거지?? 하여간 이 프랑스의 유명 인물의 대표작이 이 책이라니, 문외한인 사람도 한 번쯤 거들떠 보는 게 좋을 듯 싶다..

핑켈크로트(아씨, 발음하기도 어렵고 철자 쓰기도 어렵네..)는 오늘날의 거대한 야망이 문화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저자에 의하면, 문화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소아병적 증상과 더불어 관용이 없는 사회 분위기가 확대되어 왔단다. 이제는 기술시대가 낳은 레저산업이 인간 정신이 이루어 놓은 문화적 유산들을 싸구려 유희거리로 전락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핑켈크로트는 정신이 주도하던 인간 삶은 마침내 ‘집단의 배타적 가치에 광분하는 인간’과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리는 ‘뼈 없는 인간’, 이 둘 사이의 무시무시하고도 우스꽝스런 만남에 자기 자리를 내주고 있다고 통박하고 있다.

 그는 본서를 통해 정신과 의미가 구체적 역사 속에서 부상하고 함몰하는 과정을 그려내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서 여기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일관된 논리로 비판하고 있다. (헌데 쉽지 않다)

참고로,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프랑스 문단을 발칸 뒤집어 놓은 문제작인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와 순환사관을 정립시킨 오스왈드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같이 읽으면 금상첨화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전자는 성과 사랑 그리고 가족의 의미로부터 지금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됐는지 심각하게 되묻는 소설이기 때문이며, 후자는 서구 정신이 왜 몰락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방대한 역사관을 통해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 이 더운 여름, 짜증이 나는 한 낮에 <사유의 패배>를 읽으면서 짜증의 급피치를 올리는 것은 어떨지..어느새 짜증에 패배하여 몸이 나른해져 잠에 빠져들 것이다...아주 좋은 여름 나기일듯..

 

<주의>

평소 이런 철학적인 생각에 몰두하거나 인문서 읽기가 취미인 사람에게는 정신에 해로울 수 있으니 가급적 낮에 읽기를 당부한다. 괜시리 밤에 읽어 그 다음날 눈이 벌겋게 충혈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으니 각별히 주의를 요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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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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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소설을 읽는 것은 불편하다. 일단 내용이 빨리 빨리 들어오지 않아 몇 줄 읽고 그냥 던져버리기 딱 좋은 작품들이다. 짧은 단편일수록 그런 열망은 가속화된다.

하지만 조금만 끈기를 갖고 읽어보면 카프카의 작품들이 왜 현대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 연유를 가슴 깊이 느낄 수가 있다.

그의 작품이 빼어난 것은 소설을 허구의 이야기로만 쓴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고민을 상징적인 이야기 속에 담아냈다는 데 있다.

그 이전의 작가 누구도 카프카처럼 쓰지 않았다. 읽는 독자는 그냥 캐릭터나 작가의 생각에 동의 여부를 생각하면 됐고, 이야기에 감동을 느끼면 만사 오케이였다.

<백년동안의 고독>의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말하기를, ‘소설을 카프카처럼 쓸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가르쳐 준 사람’이라고 했다.

카프카 이전의 인간 소외와 부조리 그리고 고뇌에 찬 인간의 실존 문제는 철학에서 다루는 영역이었다. 카프카에 와서야 비로소 이 주제를 문학에서 다루기 시작했다.  

카프카가 있었기에 사무엘 베케트와 카뮈의 작품이 가능했다.

무엇보다 카프카의 작품은 난해하다. 그도 그럴것이 순전히 개인적인 고뇌가 담겨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지점이 있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고뇌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내면에 도사린 깊은 고뇌에 공명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카프카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지만 유대교나 기독교도가 아니었다. 독일어로 작품을 썼지만 독일인이 아니었다. 체코 태생이지만 결코 체코 국민이 아니었다.  

이렇게 카프카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회색인 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최대 숙명은 어디에 소속되는 것이었다. ‘존재는 그냥 스스로 존재할 수 없다. 존재는 어디에 소속되어야 한다.’ 카프카의 말이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캐릭터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직업을 가진 자의 이야기가 소설의 중심 축을 이룬다.

중편인 <변신>, <판결>, <시골의사>, <만리장성 축조 때> 등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어디에 소속되고자 하는 카프카의 바람이 그대로 작품 속에 투영되어 있다.

특히 카프카의 단편들을 읽다 보면 꿈속에서 악몽을 꾸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실체 없는 것에서 허우적거리다가 깨어나는 그런 찜찜한 기분. 책의 2부가 그렇다.

<작은 우화>, <옆 마을>, <돌연한 출발> 등을 읽으면 짧지만, 도대체 실체가 잡히지 않는다. 마치 사진의 원판 필름을 보는 느낌이랄까. 한번 봐서는 흐릿하여 그 실체를 도저히 잡을 수가 없다.

자세히 볼 때에야 비로소 그 자체의 의미가 드러나며 카프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썼는지 직접적으로 깨닫게 된다. 카프카의 작품을 읽는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품을 음미해 볼 때에야 비로소 그 독자가 누구이건 그 존재 자체만의 고뇌와 고민을 작품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카프카가 문학사에서 위대한 점이며 지금도 널리 읽히는 주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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