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 운동의 전망
정성진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1. 머리말
현재의 세계와 대안은 무엇인가? 맑스주의자들은 이 해묵은 ‘거대담론’에 대해 “현재의 세계는 자본주의이고 대안은 사회주의이다”라는 답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오늘 정세에서 이와 같은 모범답안을 암기하는 것은 별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오늘 세계를 자본주의로 보기 힘들다고 주장하는 맑스주의자들도 있으며, 1989-91년 소련 동유럽 블록의 붕괴를 근거로 제시하면서 이제 사회주의는 대안이 될 수 없고 자본주의 내에서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진보진영에서도 상당한 공감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나는 이 글에서 먼저 현재의 세계를 자본주의로 인식하는 것에 반대하는 일부 맑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논박하고 오늘 세계는 미제국주의의 헤게모니가 재편 강화되면서 자본의 전지구적 지배가 관철되고 있는 자본주의 세계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 다음 오늘 진보진영 일각의 새로운 통념으로 되고 있는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의 논리적 문제점을 지적할 것이다. 끝으로 시애틀의 반세계화 운동 이후 새롭게 확산되고 있는 반자본주의 정서의 의미를 분석하고 고전적 맑스주의의 정치의 유효성을 재확인한다.
2. 자본주의로서의 현재 세계
20여년전만 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자본주의라고 명명하는 것은 불온시되었다. “자본주의!”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이고 자본이 노동을 착취하는 세계라고 암시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시 지배계급은 우리 사회를 ‘민주주의’라든지 ‘자유세계’, 혹은 ‘현대사회’ 등으로 부르기를 요구했다. 그 당시 우리 사회에 자본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은 지배체제에 저항하는 민중과 비판적 지식인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터부시했던 우리 사회의 지배계급들이 오늘은 대놓고 우리 사회를 자본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예컨대 국제금융자본의 대명사인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는 얼마 전 출판된 자신의 책 제목을 『세계자본주의의 위기』라고 달 정도였다. 자본가들이 기업의 목표가 국부나 공익 증진이 아니라 사적 수익의 극대화에 있다고 거리낌없이 천명하게 된 것은 사실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이는 아마도 소련 동유럽 블록의 붕괴 이후 자본가들의 자신감이 강해진 때문이든지, 혹은 거꾸로 자본주의가 이제는 아예 벗고 뛰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위기가 심화된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지배계급이 자신의 본성이 자본주의임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기 시작하는 마당에 진보진영 일각에서 그것도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이 오늘 세계를 자본주의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 반대하고 있는 것은 당혹스럽다.1) 이들은 현재 세계에서 이른바 노동자계급의 소멸, 디지털혁명 등을 주요 논거로 하여 오늘 세계를 자본주의라고 명명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런데 노동자계급 소멸 명제는 이른바 ‘황금시대’ 자본주의라는 일시적이고 예외적인 정세를 일반적인 경향으로 특권화한 것으로서 오늘은 어떤 진지한 사회과학자도 이를 지지하지 않는다. 오늘 노동자계급은 전세계적으로 엄청나게 팽창하고 있다. 중국 13억 인구가 본격적으로 세계 노동자계급 대열에 편입되고 있는 것만을 보아도 이는 너무나 명확하다. 블루 칼라 노동자가 축소되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미국 등 일부 선진국에 국한된 사태이다. 제3세계와 구소련 동유럽 블록 등 사적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본격적으로 전환하고 있는 제2세계에서 블루 칼라 노동자는 절대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 화이트 칼라의 대두가 노동자계급의 종언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즉 “선진자본주의 세계에서 전통적인 공업노동력 규모의 감소는 수많은 서비스 및 전문직의 프롤레타리아트화와 불안정 임시 고용의 확산을 수반하고 있다.” (Panitch, 2001: 367) 그 동안 제조업은 줄어들기는커녕 더 많은 노동력을 흡수해 왔다. ‘노동의 종말’이 왔다는 미국에서도 일자리 수는 증가했다. 1973-1996년 전체 노동력을 경제활동인구로 나눈 참여율은 68.4%에서 77.9%로 거의 10%나 증가했다. (싱어, 2001: 210) ‘노동의 종말’, 혹은 소외된 노동의 폐지는 오늘 세계의 현실적 경향이 아니라 쟁취되어야 할 사회주의적 과제이다.
‘신경제’가 한참 떴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디지털혁명에 따라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이론들, 특히 가치론과 공황론이 적실성을 잃었다거나 혹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진보진영 일각에서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IT 주가의 폭락과 신경제의 종언이 확연해진 오늘 그러한 주장들은 자취를 감추고 있다. 디지털혁명론의 나팔수였던 마이클 만델(Michael Mandel)이 신경제의 붕괴 조짐이 완연해지자 발빠르게 ‘인터넷공황론’으로 돌아 선 것은 그 한 에피소드이다. (만델, 2001) 디지털혁명은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에 기초한 산업순환의 필연성을 무효화시키지 못했다. 디지털혁명은 인터넷쇼핑몰 등에서 보듯이, 유통시간을 단축시키고 자본의 회전속도를 빠르게 하여 자본주의에 내재한 이윤율의 저하경향에 대한 상쇄요인을 강화한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혁명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기본적 사회적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디지털 세계에서도 부를 생산하는 것은 여전히 노동자들이고 이를 착취하여 갈라 먹는 것은 자본가와 금융업자들이다. 디지털혁명은 자본의 지배가 지리적 공간에서 사이버 공간으로까지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 줄 뿐이다. 자본의 지배가 이처럼 전면화되면서 인간의 삶의 모든 측면, 노동력의 재생산, 소비, 욕망 심지어 꿈까지도 상품과 시장의 논리에 포섭되고 있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의 보편화는 자본의 모순의 격화를 의미할 뿐이다. 오늘 자본의 모순은 심화되는 경제위기와 불평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맑스가 ‘자본주의 축적의 절대적 일반적 법칙’으로 정식화했던 부익부 빈익빈의 법칙이 오늘 세계에서 국민국가 내부에서 또 세계적 규모에서 관철되고 있다. 세계화는 세계의 지구촌화가 아니라 각 국민국가 내부 및 세계적 규모에서 양극화 경향 이른바 ‘20 : 80의 사회’ 경향을 심화시키고 있다. 부국과 빈국의 격차는 날로 확대되고 있다. 세계화는 동질화 과정이 아니라 불균등결합발전의 과정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자본흐름의 주요 방향은 ‘북’에서 ‘남’으로가 아니라 ‘남’에서 ‘북’으로 (혹은 ‘북’ 내부에서의 순환)이다. .... 중심-주변 관계의 지리적 차원은 더 현저해지고 있다.” (Silver and Arrighi, 2001: 62-3) 그래서 “모든 나라들이 고소득국의 근대성을 내부화함으로써 그들의 국부의 수준을 따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환상임이 판명되었다.”(Silver and Arrighi, 2001: 65)
경제위기가 심화되고 이 위기를 노동착취의 강화를 통해 돌파하려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강행되면서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도 고양되고 있다. 예컨대 1996년 『뉴욕타임즈』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중 55%가 자신을 노동자계급이라고 정의했으며 자신을 중간계급이라고 간주한 사람은 36%에 불과했다. 또 갤럽에 따르면 영국에서 계급투쟁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1960년대 초 60%에서 1990년대 중반에는 81%로 증가했다. (Panitch, 2001: 390) 사실 인플레와 실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는 미국의 ‘신경제’의 신화에 많은 사람이 미혹되었던 1990년대 말에도 미국 노동자들은 항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노동 지배를 관철시키는 최강의 무기인 실업의 위협 하에 놓여 있었다. ‘신경제’의 신화의 주역인 그린스펀(A.Greenspan) 자신이 다음과 같이 실토한 바 있다. “불황이 바닥에 있던 1991년 대기업 노동자들의 25%가 자신이 해고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데 실업률이 급감하고 노동시장이 핍박해진 1996년 이 비율은 46%로 올라갔다.” (헨우드 외, 2001: 20)
3. 세계화와 미제국주의 헤게모니의 재창출
오늘 세계는 또 미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자본주의이며 이른바 세계화는 미제국주의의 세계적 지배의 확장과정이다. 그런데 최근 네그리(A.Negri)와 하트(M.Hardt)는 신작 『제국』에서 이 엄연한 현실을 부정한다.2) 그들은 오늘 세계에는 어떤 중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오늘 “제국은 개방되고 확장되는 경계 속으로 전 지구 영역을 점진적으로 포함시켜 가는 탈중심화되고 탈영토화된 규칙의 기구이다. ... 이러한 스무드한 제국의 공간에 권력이 들어 설 자리는 없다. 권력은 모든 곳에 존재하는 동시에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제국은 유토피아라는 단어의 어원이 뜻하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non-place)이다.” (Hardt and Negri, 2001a: xii, 190) 그들은 미제국주의 지배의 현실을 명시적으로 부정한다. “오늘 미국은, 그리고 어느 나라도, 제국주의 프로젝트의 중심을 형성하지 못한다.” (Hardt and Negri, 2001a: xiv)
제국주의 개념의 현실성을 부정하는 네그리와 하트는 민족주의 혹은 제3세계 개념의 의의도 부정한다. “제3세계주의적 전망은 종전에는 좀 쓸모가 있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완전히 무용지물로 되었다. ... 우리는 민족국가의 권력에 향수를 느끼는 것, 혹은 민족을 찬양하는 정치를 부활하는 것은 중대한 실수라고 생각한다. ... 민족국가의 권력 쇠퇴와 국제질서의 해체는 ‘제3세계’라는 용어의 효과성을 결정적으로 종식시켰다.” (Hardt and Negri, 2001a: 264, 336, 333)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의 시대에는 국민국가 자체가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에 세계화에 대해 국민국가를 대립시키는 것은 반동적이라고 주장한다. “혹자는 생산적인 ‘생정치’(biopolitics)의 세계가 이에 대한 어떤 지배형태를 여전히 요청한다고, 또 현실적으로 우리는 거대 정부를 파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 수중에서 통제할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토록 오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전통을 괴롭혔던 이러한 환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Hardt and Negri, 2001a: 349)
네그리와 하트는 포스트포드주의 사회이론과 포스트모더니즘 방법론을 원용하면서 오늘 세계는 자본주의 단계를 넘어서 탈자본주의, 탈근대로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네그리와 하트는 오늘 서비스화, 정보화에 따라 이른바 ‘비물질적 노동’(immaterial labor)3)의 중요성이 증대하고 이에 따라 맑스의 가변자본 개념이 유효성을 상실했다고 주장한다.4)
이들에 따르면 비물질적 노동의 비중 증대는 ‘감정 노동’(affective labor) 혹은 라이시(R. Reich)가 말하는 ‘상징분석가’의 비중 증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정보화의 진행 자체가 소외된 노동과 자본주의의 극복 및 공산주의의 도래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오늘 생산성, 부 및 사회적 잉여의 창조는 언어적, 의사소통적 및 감정적 네트워크를 통한 협업적 상호작용의 형태를 취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창조적 에너지를 표현하는 비물질적 노동은 자발적이고 초보적인 공산주의의 잠재력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Hardt and Negri, 2001a: 294)
그러나 이와 같은 네그리와 하트의 현대 세계의 인식은 근거 없는 주관적 환상일 뿐이다. 그들이 중시하는 이른바 비물질적 노동의 비중 증대는 세계자본주의의 중심부의 일부 노동력에 한정된 현상이다. 오늘 자본주의 세계에서 물질적 노동은 여전히 결정적 의의를 갖는다.5) 또 ‘상징분석가’ 혹은 ‘감정노동’ 등 극소수의 소외되지 않은 노동은 세계의 압도적 다수의 소외된 노동, 혐오스런 노동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 변혁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가 전거로 하는 포스트포드주의론은 “공허한 관념일 뿐이며, 작업장의 현실을 아무런 갈등이 없는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구체적인 착취 수단과 노동과정에 항존하는 갈등과 협동의 변증법을 은폐한다.” (Bellofiore, 1999: 28)
오늘 세계화가 미국 자본이 중심이 된 미국 자본의 지배력의 세계적 확장이라는 것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너무나 분명하게 체험하고 있다. 네그리와 하트가 주요한 전거로 삼고 있는 제임슨(F. Jameson)도 미제국주의 지배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민족문학이 미국의 베스트셀러로 대체되는 데서, 또 민족 영화산업이 헐리우드에 밀려 붕괴되고 민족 텔레비전 방송이 미국 수입품의 홍수로 붕괴되는 데서, 미국 패스트푸드 체인이 들어서면서 동네 식당들이 문을 닫는 데서, 일상생활에 대한 세계화의 깊은 무형의 효과가 우선적으로 또 가장 극적으로 보여진다. .... 우리가 확산되고 있는 세계화의 힘과 영향력을 말할 때, 우리는 실제로는 확장되고 있는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우리가 국민국가의 약화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실은 동의와 협조를 통해서이든, 노골적 폭력과 경제적 위협의 동원에 의해서이든, 미국의 권력에 대한 다른 국민국가들의 예속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기에서 표출되고 있는 분노 뒤에 어른거리는 것은 흔히 제국주의라고 불리었던 것의 새로운 모습이다. ... 이 제국주의의 최종형태에는 단지 미국 (그리고 영국처럼 미국에 철저히 예속된 위성국가들)만이 포함된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의 역할을 자임하면서 다양한 이른바 위험지역에서 선별적 개입 (대개는 고공폭격)을 통해 자신의 규칙을 강제한다.” (Jameson, 2000: 66-67, 50-51)
베트남전쟁 이후 미국의 세계적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있다는 신화는 1980년대 미국 경제의 상대적으로 열등한 성과를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미국의 구조적 권력은 미국의 수출이나 GNP만으로는 측정될 수 없다. 생산영역에서의 구조적 권력뿐만 아니라 금융, 전쟁, 정보 및 문화에서 미국의 압도적인 세계적 우위를 고려하면 미제국주의가 약화되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닉슨부터 클린턴에 이르는 시기는 미국의 세계적 헤게모니가 약화되는 과정이 아니라 재조직되고 강화된 시기이다. (Panitch, 2000; Gowan, 1999) 오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전통적인 미국의 세계지배기구인 군산복합체(military industrial complex)에 중첩된 ‘월스트리트-재무성-IMF 복합체’(Wall Street-Treasury-IMF Complex), 즉 ‘달러-월스트리트 체제’(Dollar-Wall Street Regime)이다.
오늘의 제국주의가 19세기말 20세기초의 고전적 제국주의와 다른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오늘 제국주의는 지구가 사실상 자본주의로 전일화된 조건에서의 제국주의라는 점에서 고전적 제국주의와 구분된다. 따라서 제국주의를 주로 자본주의와 비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의 지리적 접합 및 정치군사적 지배관계로 정의한 레닌의 고전적 제국주의론과 이를 교조화한 소련 정치경제학 교과서로는 오늘 제국주의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 오히려 자본주의의 보편화로서의 오늘 제국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맑스의 자본주의 정치경제학비판으로 복귀하는 것이 요구된다.6) 즉 예컨대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와 덜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 간의 가치이전을 분석하는 맑스의 국제가치론은 오늘 제국주의를 설명하는 중요한 방법론을 제공한다. 그러나 네그리와 하트는 오늘 세계화를 고대 로마제국에 유추하면서 제국주의의 자본주의적 본질을 부정하고 오늘 세계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을 포기했다. 하지만 전술했듯이 오늘의 세계가 가치론의 경계를 넘어 선 세계, 즉 자본주의를 넘어 선 세계는 아니다. 그렇다면 “세계화에 대한 어떠한 토론도 분명히 궁극적으로는 이런 방식으로든 저런 방식으로든 자본주의 그 자체의 현실과 대결하여야 한다.”7)
즉 세계화라는 새로운 특징을 갖는 오늘 제국주의는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모순에 주목하여 자본과 노동의 모순의 문제설정으로 분석해야 한다. “세계화가 자본주의의 양상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면, 그 분석의 중심은 노동이 되어야 한다.” (Radice, 2000: 13) 세계화와 함께, “국가는 ‘침식’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발전 프로젝트에 따라 재구조화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나라들이 희생되면서 사적 이윤이 증대되고 있다.” (Radice, 2000: 10-11) 세계화는 자본의 세계화로서 고삐 풀린 국제금융자본의 운동이 지구를 휩쓸면서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논리를 세계에 강요하는 과정일 뿐이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와 같은 맑스주의의 핵심 개념의 현실성을 부정하는 네그리와 하트는 맑스주의 정치의 핵심인 노동자운동의 중심성도 거부한다. “오늘 우리는 19세기와 20세기 주요한 부분을 통해 발전해 온 제도적 노동자 조직들과 같은 전통적 저항 형태들이 힘을 잃고 있음을 본다. 다시 한번 새로운 저항의 유형이 발견되어야 한다.” (Hardt and Negri, 2001a: 308) 그들은 전세계 노동자운동이 새로운 공세로 전환하는 획기로 이야기되는 1990년대 후반 프랑스와 한국에서의 총파업도 다음과 같이 폄하한다. “파리와 서울에서의 총파업은 우리를 대공장 노동자 시대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 같다. 이는 죽어 가는 노동자계급이 마지막 숨을 몰아 쉬는 것 같은 형국이다. 이들 투쟁은 처음부터 이미 늙었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Hardt and Negri, 2001a: 56)
네그리와 하트는 결론적으로 ‘제국’의 대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① 세계시민권
② 사회적 임금권
③ (지식정보) 재점유권
그런데 이 권리들은 실제로는 국민국가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들이다. ‘제국’에서는 국민국가가 투쟁의 장소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네그리와 하트가 국가를 전제로 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위의 권리들을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그리고 이 요구들은 ‘제국’에 전혀 무해한 체제내적 요구들이다. 또 네그리와 하트는 진보진영이 세계화의 흐름에 맞설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제한된 국지적 자율성을 목적으로 하는 프로젝트로는 제국에 저항하지 못한다. ... 자본의 세계화에 저항할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가속시켜야 한다. ... 제국은 오직 자신의 일반성의 수준에서 그것이 제공하는 과정을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압박함으로써만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다. 우리는 세계화의 흐름을 수용하여 글로벌하게 사고하고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세계화에는 ‘대항-세계화’로 대처해야 하고 제국에는 ‘대항-제국’으로 대처해야 한다.” (Hardt and Negri, 2001a: 206-7) 네그리와 하트는 세계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오늘 벌어지고 있는 반세계화는 잘못된 투쟁 방식이라고 비판한다.8) 네그리와 하트가 보기에 ‘제국’에 대항하는 것은 ‘제국’의 길에 동참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하여 네그리와 하트는 ‘제국’을 찬양한다. “우리는 제국이 ‘다중’(multitude)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전의 권력 패러다임에 비해 덜 나쁘다고, 혹은 더 좋다고 생각한다.” (Hard and Negri, 2001a: 353) 네그리와 하트는 세계화의 대안을 미국 헌법(!!)에서 찾기조차 한다. 사실 이와 같은 이들의 ‘제국’에의 투항은 외관상으로는 급진적이었던 1970-80년대 이들의 ‘노동거부’ 혹은 ‘유목민’(nomadism) 전략의 논리적 귀결이다.
4.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 비판
1989-91년 소련 동유럽 블록의 붕괴 이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역사적 대결에서 자본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함으로써 역사는 끝났고 ‘새로운 세계질서’(New World Order)가 열렸다고 주장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이제 자본주의 밖에 대안이 없다는 이른바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TINA; There is no alternative!)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그 ‘새로운 세계질서’가 1990년 걸프전쟁과 함께 시작된 데서 보듯이 ‘새로운 세계질서’는 착취와 억압, 전쟁과 살육으로 얼룩진 구세계의 재판에 불과했다. 또 1990년대 이후 소련 동유럽 블록의 시장경제로의 본격적 전환과 함께 자본주의가 세계를 거의 석권했지만, 결과는 세계경제위기, 복지국가의 해체, 세계적 불평등의 심화였다. 1997-98년 동아시아 경제위기 및 1998년 세계경제위기, 최근 미국 ‘신경제’의 종언은 과연 자본주의가 인류의 바람직한 삶의 방식인지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제기하고 있다. 정반대 의미의 TINA(This is no alternative!), 즉 “이것(즉 자본주의)이 대안은 아니다”라는 공감대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사실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은 논리적으로도 성립되지 않는 주장이다. 이 주장이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소련 동유럽 블록에서 사회주의의 실험이 실패로 끝났다는 가설 자체가 타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1989-91년 붕괴했다고 주장되는 소련 동유럽 블록은 고전적 맑스주의9)의 사회주의상, 즉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자본주의 체제였다. 어떤 사회의 근본적 성격을 그 사회의 법적 소유제도의 형태가 아니라 생산관계의 성격에 비추어 규정하는 고전적 맑스주의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즉 잉여가치의 착취관계로 정의되며, 생산수단의 국유와 계획경제가 이루어진 체제도 잉여가치의 착취관계가 존재하는 한 자본주의로 규정된다. 이에 따르면 소련 동유럽 블록은 자본주의의 한 유형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되며,10) 1989-91년 이후 소련 동유럽 블록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태는 이 관료적 국가자본주의가 사적 자본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과정으로 파악된다. 오늘 소련 동유럽 블록에서는 과거 국유재산의 관리자였을 뿐인 기업장, 당간부 등 노멘클라투라 국가자본가계급이 국유재산을 대규모로 사적으로 착복하면서 스스로 법적 소유자, 사적 자본가계급으로 전화하고 있다. 1989-91년 이후에도 이전의 지배계급의 정치경제적 지배는 연속되고 있다. (Haynes, 1996) 이는 1989-91년 이후 소련 동유럽 블록에서 전개된 사태를 스탈린주의와 신자유주의가 합창하듯이 사회주의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부활이라고 해석할 수 없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1989-91년 이후 소련 동유럽 블록의 사적 자본주의로의 전환과정은 동시에 이들 경제가 미국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제3세계’로 편입되면서 고삐 풀린 국제금융자본과 국내 ‘마피아 자본’의 무차별적 수탈을 받으며 초토화되는 과정이었는데,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인류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입증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Gowan, 1999: 9장)
또 소련 동유럽 블록의 붕괴 혹은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실패가 사회주의의 역사적 불가능성을 입증하는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캘리니코스(A. Callinicos)가 말했듯이, “스탈린주의와 집권 사회민주주의가 현실에서 구성했던 모델들이 지난 2세기에 걸친 사회주의 사상의 모든 범위를 소진시켰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는 마치 ‘장기지속’(longue durée)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역사에서 단지 한 순간에 존재했던 체제가 미래의 가능성을 모두 다 보여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Callinicos, 2000: 123-4)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은 사회주의의 불가능성의 근거로 세계화를 흔히 제시한다. 즉 오늘 세계화된 세계에서는 세계시장으로부터의 이탈, 자력갱생 등을 중요한 특징으로 하는 스탈린주의는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세계화의 성격을 오해한 것이다. 세계화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객관적인 필연과 같은 것이 아니다. 세계화는 특정한 목적을 위해 특정한 이해당사자들이 추진하는 정치적 과정이다. 세계화 자체가 정치적 과정이기 때문에 세계화는 역전될 수도 있다. “국민국가는 세계화의 희생자가 아니라 세계화의 저자들이다. 국가는 세계화되는 자본에 의해 전위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화되는 자본 특히 금융자본을 대표한다.” (Panitch, 2001: 374)
그리고 스탈린주의에 특징적인 자력갱생과 일국사회주의는 고전적 맑스주의의 사회주의상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고전적 맑스주의에서 사회주의는 항상 세계혁명의 과정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세계화는 오히려 세계혁명으로서의 사회주의의 물질적 조건을 성숙시키고 있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아울러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를 상기한다면, 자본 지배의 보편화 과정으로서의 세계화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전가할 비자본주의 영역의 소멸을 의미하므로, 자본의 최종적 승리가 아니라 반대로 자본주의의 붕괴와 사회주의의 임박을 알리는 신호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다니엘 싱어(Daniel Singer)의 언급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론적 결함과 상관없이 경청할 만하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대로 자본주의 체제가 살아 남기 위해서는 항상 정복할 새로운 땅이 있어야 한다면,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것은 자본의 지배가 황혼기에 접어들었다는 말이 아닐까? 자본주의 체제가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갈수록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 같고 금융자본이 암세포처럼 급격히 팽창하고 있으며 엄청난 규모의 투기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파멸이 임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가 아닐까? ... 이런 투기 열풍, 금융상의 지표로만 나타나는 허구 세계로의 도피 행각을 볼 때 우리는 자본의 지배는 새로 정복할 땅이 있을 때까지만 지속될 수 있다고 주장한 저 로자 룩셈부르크의 선견지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중국과 러시아를 삼켰으니 - 물론 완전히 소화해 버린 것은 아니지만 - 더 이상 갈 곳이 많지 않다. 의제자본의 터무니없는 팽창은 어쩌면 궁극적인 전복을 예고하는 첫 번째 조짐, 예컨대 인위적 수단으로 생명을 연장하려는 몸부림을 보여주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싱어, 2001: 246-7, 269)
5.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혹은 진보적 경쟁력론 비판
일부 진보진영은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얼굴 없는 자본주의’, 즉 비인간적인, 냉혹한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적 미국식 자본주의의 대안을 이른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전형이라는 라인(Rhein) 자본주의 (독일식 자본주의, ‘이해당사자’(stakeholder) 자본주의라고도 한다)에서 찾는다.11) 즉 미국식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투기적 비생산적인 금융자본주의를 생산적이고 사회협약적인 독일식 자본주의로 대체하자고 주장한다. 이들은 ‘20: 80의 사회’로 집약되는 1990년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문제점의 근원이 자본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특정한 유형, 즉 미국식 자본주의, ‘주주’(stockholder) 자본주의 모델의 세계적 확산에 있다고 주장하고, 이에 대한 처방을 ‘이해당사자’ 자본주의, 즉 독일식 자본주의, 라인 자본주의 모델의 부활에서 찾고자 한다. 라인 자본주의론자들은 대부분 케인즈주의, 국가주의자들로서 자유시장 만능주의가 지배하는 영미식 자본주의의 ‘국가 부재’(statelessness)와 대조되는 동아시아와 북유럽 라인 자본주의의 ‘강한 국가’의 성취를 찬양한다.
라인 자본주의론의 핵심은 노동참여적 노사관계가 생산력 향상과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다는 이른바 진보적 경쟁력론(progressive competitiveness)이다. 진보적 경쟁력론은 중도좌파 정부 및 이른바 민족적 기업 엘리트와 함께 하는 사회적 합의 체제에 노동자들도 참여하여 경쟁력 강화에 기여하자는 제안이다. 진보적 경쟁력론은 생산에서 노동자들의 협동과, 동반자 의식, 노동자들의 기업경영 참여를 통한 경쟁력 강화를 주장하며, 이와 같은 노동참여적 진보적 경쟁력 강화 방안이 미국식 자본주의의 노동배제적 구조조정, 즉 반노동자적 반동적 경쟁력 강화 방안보다 생산성과 경쟁력 향상에서 우수하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진보적 경쟁력론은 2차대전 이후 수요주도적 조합주의, 즉 케인주의적 조합주의와는 구별되는 “조합주의의 공급주의적 형태” (Panitch, 2001: 373)라고 할 수 있다. 진보적 경쟁력론은 세계화의 조건에서 국부의 증진은 세계화된 자본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여전히 국민국가의 경계 내에 있는 노동에 대해 교육훈련 투자를 증대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는 클린턴 시기 미국 노동부장관 라이시 등의 주장을 전거로 내세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라인 자본주의가 다른 나라들이 본받을 수 있는 하나의 모델, 즉 대안으로 제시되기에는 다음과 같은 한계가 있다. 우선 라인 자본주의는 매우 특수한 예외적 정세(제2차세계대전 시기 역사상 미증유 규모의 군비경제와 자본파괴 및 세계적 규모로 고양된 노동자계급의 혁명투쟁의 분쇄)에서 성립했던 ‘황금시대’ 자본주의의 모델이기 때문에 이를 다른 사회역사적 조건에서 재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에서 라인 자본주의 자체가 급속하게 미국화되고 있다. 즉 대안으로 설정한 라인 자본주의 모델 자체가 붕괴되고 있다. 그리고 라인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자력갱생 모델이 아니라 수출주도형 개방경제 모델이기 때문에 일국적 자력갱생 모델과는 달리 복제가 되면 될수록 더 이상 복제하기 어려워지는 한계를 갖고 있다. 예컨대 모든 나라들이 수출을 증대시키려고 하면 세계적 과잉생산 문제는 더욱 악화될 것이다. 설사 이와 같은 수출 경쟁력 강화 전략이 성공한다 할지라도 이는 실업을 세계시장경쟁에서 밀린 나라들로 수출하는 것을 대가로 한 것이다. 이 점에서 진보적 경쟁력론은 좌파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덕 차원에서도 용납될 수 없다. 사실 “진보적 경쟁력론은 거리의 굶주리고 집 없는 이들을 보고 이 체제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일자리를 가지려는 동기를 갖고 있지 않다던가, 게으르다던가, 기술이 없다는 식으로 생각” (Panitch, 2001: 373)하는 것으로서 결국 신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시장경쟁의 비윤리를 승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식 자본주의의 국가는 약한데, 라인 자본주의의 국가는 강하다는 관념은 잘못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레이건, 부시, 클린턴 행정부로 이어지는 미국의 강한 국가가 주도한 것이다. (Gowan, 1999: 제1부)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작은 정부론은 강한 국가인 미국이 다른 나라 국가를 약체화시켜 지배하기 위해 이들에 강요하는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라인 자본주의론은 또 자본주의에서 국가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국가는 공동체적 가치와 사회적 필요를 수호하는 것이 아니라 총자본의 이익을 집행할 뿐이다. 세계화는 국가의 역할과 성격을 더 분명하게 자본주의적으로 만들고 있다. 또 라인 자본주의론은 자본주의에서 산업자본은 금융자본에 비해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관념을 갖고 있다. 금융자본이 비생산적 투기적 자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잉여가치를 노동자로부터 착취해 내는 자본은 금융자본이 아니라 산업자본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산업자본이기 때문에 금융자본만 규제하고 산업자본은 육성한다면 자본주의 착취체제는 더 강고하게 될 것이다.
라인 자본주의론의 노동자경영참가론이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대안적 능력이 아니라 자본을 흉내내는 실천 (예컨대 자본가들처럼 기업과 펀드를 경영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 등) 뿐이다. 그리고 이조차도 극소수 노동자 대표와 간부들에게 제한되며, 이들은 자신들이 자본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기업비밀’ 등을 이유로 동료 노동자들과 공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실제로 접근하여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극히 제한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운동을 통해서 쟁취된 것이 아니라 운동을 제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Panitch and Gindin, 2000: 18) 라인 자본주의론은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적 자본이 할 수 있는 것을 크게 과장하고 노동자의 자율성을 희생시킨다. 라인 자본주의론은 노동자를 위한 전략이 아니라, 자본의 노동 지배와 착취의 강화에 봉사하는 전략이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반동이데올로기로 규정되었을 라인 자본주의론이 오늘 진보진영의 한 대안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은 1989-91년 소련 동유럽 블록 붕괴 이후 유포되고 있는 자본주의 이외 대안부재론의 대중 망각 효과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 준다. 물론 필자는 후술하듯이 라인 자본주의론이 주장하는 노동자경영참가, 금융자본 규제 등 각종 개량적 요구의 의의를 모두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개량은 노동자계급의 정치경제적 상태를 개선하는 데 기여하는 한 지지되어야 하고 추구되어야 한다. 필자가 반대하는 것은 그와 같은 개량적 요구가 제기되는 대안부재론의 문제설정 및 ‘좋은 (혹은 덜 나쁜) 자본주의’(=라인 자본주의)와 ‘나쁜 자본주의’(=미국식 자본주의)의 부당한 이분법에 기초한 전자, 즉 ‘차악’ (lesser evil)에 대한 ‘비판적 지지’ 전술이다.12) 진보진영의 대안은 자본 중심의 반동적 경쟁력 강화 공세를 노동 중심의 진보적 경쟁력 강화 방안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력의 논리, 시장 논리 즉 자본주의 그 자체를 총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6. 반세계화 운동과 반자본주의 정서의 고양
1999년 12월 시애틀에서 2001년 7월 제노바로 이어지고 있는 반세계화 운동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의 모색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반세계화 운동에서는 “이윤보다 인간이 먼저다!” 등의 슬로건에서 보듯이 오늘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의 근원을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서 찾는 흐름이 부각되고 있다. 물론 반세계화를 주도하는 세력들 사이에 의견 차이와 이해대립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에 대한 합의가 형성되어 있지도 않으며, 반자본주의를 명시적으로 내거는 세력이 있는가 하면, WTO의 폐지가 아니라 개혁을 주장하는 입장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점은 신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그리고 상당 정도로는 자본주의 전체에 대한 대안을 갈망하는 욕구를 표현하는 운동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Callinicos, 2000: 121)
시애틀 이후 반세계화 운동은 조직노동자운동, 농민운동, 소비자운동, 환경운동, 인권운동 등이 내거는 각종의 슬로건들이 신자유주의 반대, 다국적기업 반대 등으로 수렴되면서 반자본주의 자체가 슬로건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 구별되는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다. 예컨대 1970-80년대 한국에서 반자본주의를 목적으로 하는 정파도 반자본주의를 슬로건으로 내걸지는 않았다. 반자본주의도 반제라든지 반파쇼라는 매개고리를 통해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 통념이었다. 이는 스탈린주의적 2단계혁명론이 당시 진보진영을 지배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사회에서 자본주의 모순이 반자본주의를 운동의 슬로건으로 내걸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지는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 반자본주의라는 외견상 추상적인 슬로건이 구체적이고 강한 대중적 호소력을 갖게 된 것은 자본주의의 모순이 피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되고 심화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총체성에 대한 인식, 체제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야말로 새로운 반자본주의 운동을 특정한 쟁점이나 불만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기존의 운동과 구별짓는 것이다.” (Callinicos, 2001) “시애틀 이후 정치가 우리를 그토록 흥분시키는 것은 새로운 활동가 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에너지와 창조성뿐만이 아니라 이 운동이 자본주의를 하나의 총체로 파악하고 그 정당성을 문제삼고 있다는 점이다.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은 이러저러한 불평등이나 실패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비도덕성 및 인간과 자연의 상품화 그리고 집단적 잠재력의 부정 및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권력의 국가적 국제적 집중과 그 결과로서 의미 있는 대중민주주의의 타락이다.” (Gindin, 2001: 361)
반세계화 운동에서 무수한 다양한 요구들이 제기되고 있지만 그들을 통일시켜 주고 오늘 운동에 새로움을 부여해 주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반자본주의 정서, 즉 반시장, 반상품화 정서라고 할 수 있다.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이 적절하게 묘사하듯이, “삶의 모든 측면의 사유화와 모든 활동과 가치의 상품으로의 전화는 오늘 수천의 사회운동 단체들이 함께 싸울 수 있도록 묶어 주는 공통의 적이다. ... 그들이 같이 하고 있는 정신은 공유성(commons)의 급진적 회복이다. 팽창하고 있는 시장이 우리들의 공유 공간 - 시내의 광장, 거리, 학교, 농장, 공장 - 을 대체하면서 저항의 정신이 세계 전체에서 형성되고 있다.”13) 그리고 오늘 반세계화 운동은 1990년대 후반 특히 1997-9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의 후퇴와 함께 대두되었던 ‘제3의 길’을 비롯한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실망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1980년대 이후 득세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이 1990년대 후반 서유럽에 선거를 통해 사회민주당 정부를 대거 들어서게 했다면, 사회민주당 정부에 대한 대중의 환멸이, 즉 서유럽에서 개량주의의 위기가 오늘 반자본주의 정서가 고양된 배후에 놓여 있다. 오늘 반세계화 운동은 “기존의 세계화의 제도적 틀에서는 협상될 수 있는 요구들을 제출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진실로 대중들에게 그 동안 가해졌던 것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대중들 속에 구축하고 있다.” (Panitch, 2001: 379)
반세계화 운동 속에서 반자본주의 정서가 고양되면서 총체성이나 ‘거대담론’을 부정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허구성이 폭로되고 있다. 애당초 부문운동의 독자성을 강조하며 출현했던 신사회운동, NGO들도 반세계화와 반자본주의라는 ‘거대담론’에 동참하고 있다. 시애틀에서 제노바로 이어지는 반자본주의 운동은 체제에 대한 집단적 저항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부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점에서 오늘 반세계화 운동은 1960년대 이후 좌파에 열린 최대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재 반세계화 운동과 반자본주의 운동이 아직 넘어야 할 한계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반자본주의 운동은 아직 소수의 운동이다. 또 조직노동자계급의 중핵의 재정치화도 아직 초보적 단계에 있을 뿐이다. 이 운동은 반대하는 대상은 명확하지만 왜 반대해야 하는지, 또 대안은 무엇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Rees, 2001: 7) 그리고 반세계화 운동에 대해 IMF, World Bank, WTO 등이 구사하기 시작한 ‘분리통치’ 전술, 즉 개량주의적 NGO들이 제기하는 의제의 부분적 수용과 급진적 반자본주의적 세력의 고립화를 통한 반세계화 통일전선의 교란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제의 특수한 양상들이 아니라 체제 일반을 공격하기 시작한 소수의 출현의 전략적 중요성” (Callinicos, 2001)을 고려하는 것은 사회주의 정치에서 매우 중요하다. 특히 “아직 주로 그것이 반대하는 것 - 신자유주의 정책과 다국적기업 - 에 의해 주로 정의되는 산만한 이데올로기인 반자본주의를 훨씬 일관된 사회주의 의식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Callinicos, 2001) 즉 반세계화 운동이 사회주의의 전망을 열기 위해서는 현재의 반세계화 통일전선을 반자본주의 통일전선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이러한 통일전선을 위해서 “지난 20여년 동안 혁명적 좌파가 처했던 고립 상태가 조장했던 종파주의 경향과 단절” (Callinicos, 2001)하는 것이 요청됨은 물론이다.
반세계화 운동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반자본주의 정서를 극대화하여 사회주의의 전망을 여는 데 관건이 되는 것은 역시 노동자운동이다. 노동자운동의 결정적 참여 없이는 반자본주의 운동은 성공할 수 없다.14) 그러나 노동자운동은 배타성이 아니라 반자본주의 통일전선에서 다른 운동들과 연대해야 하고 다른 반자본주의 운동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노동자운동은 작업장 자체에서 제기되는 문제뿐만 아니라 작업장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일자리를 나누는 것, 비정규직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투쟁 등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즉 노동자운동의 범위는 자본주의 작업장의 틀을 넘어서야 한다. 일국사회주의가 불가능하다면 일공장 사회주의는 더욱 불가능하다.15)
7.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위하여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필자는 사회주의상의 복수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중 고전적 맑스주의 전통의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개념을 지지한다. 고전적 맑스주의에서 사회주의는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혹은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으로 정의되며 이는 세계혁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본다.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대중투쟁을 통해 노동해방을 쟁취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으며, 권력을 장악한 전위당이 대중에게 선사하는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것이 아니다. 또 사회주의는 의회 혹은 선거를 통해서 달성될 수 없다. 사회주의는 또 국유화 혹은 계획경제와 동일시될 수 없다.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직업적 혁명가들로 구성된 전위당이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미래 사회의 청사진으로서 준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즉 자본주의의 내재적 모순이 불가피하게 발생시키는 투쟁 속에서 형성된다. 즉 “대안적 논리는 자본의 논리에 반대하는 일상적 투쟁에 존재한다.” (Lebowitz, 2001: 42) 최근 반세계화 운동 속에서 출현하고 있는 반자본주의 정서와 운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투쟁을 강조한다고 해서 개량적 정책의 구체적 강령화 작업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투쟁의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진전이 미래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상세한 청사진의 입안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면, 대중투쟁 그 자체의 자동적 산물도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대중투쟁이 사회주의 전망을 열기 위해서는 양자가 트로츠키(L. Trotsky)가 말한 이행기 요구로 매개되어야 한다. “일상적인 투쟁과정에서 대중이 제기하는 현재의 요구들과 혁명의 사회주의적 강령 사이에 놓인 간극을 이어 줄 가교를 발견하도록 대중을 돕는 것이 필요하다. 이 가교에는 이행기 요구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행기 요구들은 현재의 객관적 상황과 노동자계급의 광범위한 층들이 지닌 현재의 의식으로부터 비롯해 나오며,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장악이라는 하나의 최종 결론으로 반드시 인도한다.”16) 즉 “현재의 대중투쟁의 목표와 사회주의 사회의 전망 사이에 연속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조직을 건설하여 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바람직한 사회주의 사회의 요소들을 지금 여기 자신들의 세계에서 실제로 식별할 수 있다고 자신들의 존재의 모든 수준에서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Panitch, 2001: 374)
이러한 관점에서 파니치(L. Panitch)와 진딘(S. Gindin)은 사회주의 전망으로 연결될 수 있는 이행기 요구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Panitch and Gindin, 2000: 22-4)
① 소외의 극복
② 분업의 완화
③ 소비생활의 변혁
④ 공동체적 생활방식의 모색
⑤ 시장의 사회화17)
⑥ 생태적 계획
⑦ 국제적 평등의 실현
⑧ 다원적 의사소통 매체의 발전
⑨ 민주주의의 확대와 심화18)
⑩ 생산수단, 금융, 통신 등의 공유
파니치는 또 이에 다음과 같은 전략들을 추가한다. (Panitch, 2001: 381-9)
① 투자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19)
② 노동자운동 그 자체의 민주화를 중심으로 한 노동 자체의 변혁
③ 운동의 구조화20)
④ 국제주의의 실현
20세기 전세계 노동대중의 희망이었던 고전적 맑스주의의 사회주의 전망, 즉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과 세계혁명으로서 사회주의 정치는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세계화, 디지털화에 따른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에 따라 맑스가 사회주의의 전제로 생각했던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노동과 여가의 경계를 허무는 노동해방의 객관적 조건이 조성되고 있다.21) 자본의 지배의 세계화 과정에서 자연환경의 파괴가 지구가 생태적으로 지탱될 수 없는 상태로까지 격화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생활양식의 근본적 전환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오늘 인류와 지구의 존속을 위해서도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 맑스가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인부라고 규정했던 노동자계급은 전세계적 규모에서 증대했으며, 세계화에 따라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도 강화되고 있다. 세계화에 수반한 자본주의적 모순의 격화에 따라 사회주의의 가능성과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주의의 도래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의 대중투쟁의 고양과 승리를 통해서만 쟁취될 수 있다. “사회주의가 역사적으로 가능한 것이고 자본주의의 악을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일지 몰라도, 그렇다고 사회주의가 반드시 필연적인 것만은 아니다. ... 이는 훨씬 많은 참여와 훨씬 적극적인 행동, 훨씬 높은 전투성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객관적 조건의 한계 내에서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일 것이기 때문이다.” (싱어, 2001: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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